가무사리 숲의 느긋한 나날
미우라 시온 지음, 오세웅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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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먼저 사랑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보려 한다. 내가 하는 이 사랑은 낭만적인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이 사랑은 맹목적인 믿음이나 맹신과는 거리가 멀다. 이 사랑은 오히려 분별있음을 지향한다. 이 사랑이 사랑하는 대상의 모든 것을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사랑하는 대상을 느끼고, 음미하며, 공감하며, 이해하려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이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모든 목소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이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품에 안으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사랑하는 대상의 모든 것을 품에 안지는 않는다. 나의 이 사랑은 호르몬의 폭발이 아니라 머리와 머리의, 가슴과 가슴의 교감이다. 나의 이 사랑은 불꽃처럼 확 타오르다가 꺼지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지속되는, 영원을 향한 몸부림이다. 나의 이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서 꾸준히 말을 건네고, 대화하면서 티격태격하고 자신들의 무언가를 나누는 몸짓이다. 이 사랑은 내 마음속의 얘기들을 꺼내는 장이자 은밀한 비밀을 주고받는 장이다. 이 사랑에 스킨십은 없지만 영혼의 교감은 풍부하다. 아마 이쯤 얘기했으면, 이 사랑이 어떤 것에 대한 사랑인지 알아차렸으리라 믿지만, 그래도 굳이 확인해보자면 내게 이 사랑은 책에 대한 사랑이다.

 

 

 

사랑을 위한 몸부림으로서의 독서. 책을 쓴 이들이 글과 종이에 남긴 영혼의 흔적을 찾아가는 과정으로서의 독서. 그 영혼의 흔적과 교감을 나누고 영혼의 대화를 나누는 행동으로서의 독서. 내게 독서는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사랑의 행위에 다름 아니다. 내가 독서라는 사랑의 행위를 하는 순간 책은 단순히 종이에 글이 쓰인 종이 덩어리가 아니라, 하나의 살아 있는 대상이 된다. 이때 책은 무생물이 아니라 책을 쓴 저자가 보여주는 삶의 가능성, 저자 스스로의 삶에서 길어 올린 새로운 삶의 모습이 된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말을 잠시 빌리자면, 책에 대한 사랑은 바로 그런 삶의 모습과 가능성들에 대한 사랑이기에 책을 사랑한다는 건 삶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 나의 독서는 이런 삶의 모습과 가능성들에 대한 사랑을 꿈꾸기 때문에 치열한 대화를 지향하고, 치열해야한 한다. 삶의 모습과 가능성들에 대한 사랑이 무심하거나 맹목적이라면 그 삶의 모습과 가능성들에게 얼마나 미안한가? 그래서 나의 독서는 어떻게든 책에 대해서 꼬치꼬치 질문하고 치열하게 대화하는 행위가 된다. 이것은 나의 책에 대한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더 사랑하기 위해서 이루어지는 행위이다.

 

 

 

<가무사리 숲의 느긋한 나날>에 대한 독서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우선 나는 이 책을 즐겼다. 현대의 빠른 삶이 아니라, 산에서 백년을 내다보고 살아가는 임업 종사자들의 느린 삶을 만나면서, 현대의 강박적인 빠른 삶에서 벗어나 한번 숨을 쉬어보고 휴식의 시간을 가졌다. 동시에 환경 친화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느린 산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건 너무나 느리고 따스하지만 치열한 면도 있는 자연과 함께하는 삶이었다. 도시와 다른 삶의 가능성을 생각함으로써 우리의 삶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친근하면서도 편안한 미우라 시온의 문체와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니 그것이 저절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것을 만끽하면서 나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이렇게 무균질의 이상화된 낯선 공간으로서의 산이 과연 현실 속에서 존재할 수 있는가? 이런 공간에도 과연 이 소설처럼 단점과 모순이 없는 것일까? 자연과 함께하는 삶도 삶의 하나라면 언제나 좋을 수 없는 것처럼, 어떤 공간이든지 그것만의 문제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것을 생각하니 이 소설의 모습이 다르게 다가왔다. 이 소설은 그저 이상화된 자연 공간에, 도시의 삶에 지친 도시인들을 인도해서 쉬게 해주는 소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도시의 삶과 반대로서의 삶에 대한 갈망이 담간 소설. 하지만 현실은 아마도 다를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나아가자 갑자기 또 다른 생각이 급브레이크를 건다. ‘그것까지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 하고. ‘자연 친화적이고 인간적인 삶에 대한 낭만적 꿈을 형상화한 휴식 같은 소설에 더 이상의 딴지가 필요할까’ 하고. 어쩌면 나는 너무 나간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이상 나아가지 않으려 한다. 그래도 확실한 것은 이런 행위가 나의 독서를 더욱 풍요롭게 하는 사랑의 행위의 일부라는 사실. 질문은 나의 독서를 살찌우고, 풍요롭게 하며, 나의 사랑을 더욱 불타오르게 만든다. 그 사실만은 잊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며 이제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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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콜라티에
우에다 사유리 지음, 박화 옮김 / 살림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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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콜라티에-우에다 사유리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읽으면서, 그 책의 글을 쓰는 방식이 마음에 와 닿았다.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이라는 부제처럼, 하루하루 대화를 건네는 스타일의 책인데, 나도 이렇게 북리뷰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닷새 대신 천일동안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일명 천일책야화.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는 스타일의 글인데(물론 이 모든 건 허구이다.)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자의 숙명처럼 계속해서 이야기를 해나가는 방식의 글이다. 사사키 아타루의 말을 조금 변용시켜보면 ‘책을 읽고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미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고, 이야기는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작해보려 한다.

 

천일책야화-1.책을 읽고 침이 고이다.

 

M에게

 

M, 오늘은 너무 더워서 힘겨웠어.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나는 무더위 속에서 진짜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더군. 너는 괜찮았어? 나는 그저 에어컨만을 찾아다녔어. 에어컨이 있으면 행복하고, 에어컨이 없으면 불행한 단순한 생활의 반복을 했다고 해야할까. 그래도 밤이 되니까 그나마 낫네. 아무리 열대야라도 해도 밤은 밤이니까.

 

 

 

나만큼 책을 좋아하는 너에게 오늘부터 책 이야기를 계속해서 해볼 생각이야. 기본적으로 천일동안 이야기를 할 생각인데, 어쩌면 천일을 넘을 수도 있어. 아니면 천일을 못 채우고 끝이 날수도 있겠지. 세상일이란 어찌될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까.^^ 너무 말이 많다고 비난하거나 탓하지는 말아줘. 나만큼 너도 말이 많은 네가 내 얘기를 듣는 것이 억울하다면, 너도 나에게 이야기를 해봐. 그럼 나도 들어줄게. 아무튼 네가 내 이야기를 계속 들어준다는 전제아래 이야기를 이제 시작해보도록 할께.

 

 

 

첫 번째로 이야기할 책은 <쇼콜라티에>야. 초콜릿과 서양과자를 만드는 셰프 나가미네와 우연히 그를 알게 된 화과자(일본식 과자)가게 점원 아야베 아카리의 만남과 그 만남 속에서 빚어지는 인간과 과자 이야기를 그린 일본 소설인데, 일본 소설들이 자주 보여주는 무겁지 않음과 섬세하고 세밀하며 감각적인 묘사와 표현, 이상적이고 드라마틱한 이야기 구성을 그대로 갖춘 책이야.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것은 초콜릿과 과자의 향연이었어.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책을 사랑하고 책에 마음 설레어 했지, 책에 나오는 것들에 관해서는 무관심했어. 특히 책에 나오는 음식들에 관해서는, 그게 책에 나오는 음식으로만 보였지, 미각의 대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어. 나에게 그것들은 책에 나오는 미각과 관련 없는 음식들에 불과했거든. 하지만 <내 식탁 위의 책들>이라는 책을 보고 나서 갑자기 책에 나오는 음식들에도 관심이 가기 시작했어.

 

 

 

‘아는 만큼 보인다’고, 진짜 관심가지니 보이더군. 이 책이 그 관심이 위력을 발휘한 첫 책인데, 진짜 책 곳곳에 적혀 있는 수많은 초콜릿과 과자의 모습에 마음이 동하면서, 나도 모르게 어느새 침이 고이는 거야. ‘먹고 싶다’는 생각이 막 들더군.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대다수의 초콜릿과 과자를 내가 모른다는 사실이었어. 나는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그냥 미각적 표현과 묘사의 향연에 끌려서 욕망하게 된 것이야. 잘 모르지만 사랑한다고 해야 할까. 아니, 그건 ‘욕망하기를 욕망한다’에 다름 아니었어. 나는 책이 전해주는 미각적 욕망의 지도를 받고, 그 지도에 따라서 욕망하게 된 것이지. 지금까지 그런 적이 없었기 때문에, 막상 실제로 하니 너무나 좋았어. 알지도 못하면서 욕망하고, 욕망하니 좋아지는 이 욕망과 무지의 순환이 불러오는 쾌락 앞에서 즐거워했지. 이것을 경험했다는 것만으로 이 책은 내게 좋은 책이었어.

 

 

 

이렇게 좋은 점만 얘기하고 얘기를 끝내려 했는데, 아쉬워서 잠깐의 평가를 덧붙여볼게. (너도 알다시피 내가 책에 대한 평가를 좋아하지 않잖아. 그래서 평가는 최대한 짧게 할 생각이야.) 이 소설이 하나의 이상적인 가상의 공간으로서 우리를 편안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면 조금 더 그 목표에 충실했으면 하는 바람이 읽으면서 들더군. 왜냐하면 갑자기 이상적인 가상의 공간에 현실이 틈입하면서 현실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너무 당혹스러운 거야. 물론 어떤 소설이든 현실과 가상의 조화와 뒤섞임 속에서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것을 감안할 때 현실이 갑자기 튀어나올 수 있는 것은 맞아. 문제는 그게 어느 정도냐의 것인데, 이상적인 가상의 공간을 표현한 소설에서 가상의 행복감을 맛보고 있는데 갑자기 현실이 튀어나와서 현실의 무거움을 드러내고는, 그것을 그냥 이상적인 마무리로 봉합해버리는데, 너무 황당한 거야. 이상적이려면 계속 이상적이던가 아니면 아예 현실적인 마무리를 하던가 해야지, 이건 그냥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잡탕이 되어버리니 뭔가가 어색한 거지. 책의 주인공인 나가미네의 입장에서도 이런 식의 잡탕 같은 과자나 초콜릿은 재앙이 아닐까?(모든 에피소드가 그런 것은 아니고 몇몇 에피소드가 그랬어.) 그러니 이상적인 가상의 공간은 계속해서 그 모습 그대로였으면 좋겠어. 현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꿈을 꾸게 해주는 것이 이런 소설의 미덕 아닐까.

 

 

 

여기까지 얘기하니 갑자기 졸음이 밀려오네. M, 미안한데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어. 나중에 다른 책으로 다시 다른 이야기를 할게. 그러니 오늘은 이만 안녕~~~

 

 

 

*참, 혹시라도 이 책을 읽고 여기에 나오는 과자나 초콜릿을 사게 된다면 잊지 말고 나에게 보여주지 않겠어? 나 사실 그것들이 너무 궁금했거든. 친구 좋다는 게 뭐겠어. 이럴 때 도와주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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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왕국
현길언 지음 / 물레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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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숲의 왕국-현길언

<숲의 왕국>을 읽고 갑자기 두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아이스킬로스와 에우리피데스. 그리스 3대 비극 작가에 속하는 이 두 사람의 이름이 갑자기 왜 떠올랐을까? 이제부터 여기에 관해 잠시 써보도록 하겠다.

 

아이스킬로스는 그리스 비극을 진정한 극예술의 길로 이끈 인물이다. 그는 배우 1명과 코로스의 노래로 구성된 그리스 비극을 이인극으로 바꾸고, 비극을 극예술의 경지로 들어서게 만들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게 그는 아테네의 전성기를 몸으로 체험하며 아테네의 미덕을 표현하고 신을 찬양하는 극작가로 기억된다. 그는 동방의 강국 페르시아를 그리스 연합군이 격파한 살라미스 해전과 마라톤 전투에 직접 참여했고, 뒤이은 아테네의 전성기를 몸소 체험하며, 아테네의 위대함과 미덕을 굳건히 믿었고, 페르시아로 대변되는 오만한 인간들이 재앙을 겪는다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으며, 이 모든 것 뒤에서 신은 인간이 오만하지 않다면 올바른 길로 인도하다고 믿었다. 그에게 신은 조화와 질서의 수호자였고, 이 세상을 올바르게 이끌어나가는 존재였다. 아이스킬로스의 비극이 종교적인 이유는 바로 이 신에 대한 찬양과 믿음 때문이고, 그가 인간의 이야기를 하지만 신을 모든 것의 근원으로서 극 속에 숨겨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죽기 전까지 자신의 믿음, 신이 있기 때문에 세상이 올바르고, 아테네가 위대하다는 그 믿음을 견지했다.

 

아이스킬로스의 비극은 그의 후배 격인 소포클레스의 비극과 비교해도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그리스 비극의 완성자인 소포클레스는 그리스 비극을 진정한 극예술로 만든 그리스 비극의 대표자이다. 그와 아이스킬로스의 비극의 차이는 두 사람의 삶의 차이를 반영한다. 소포클레스는 아테네의 전성기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의한 급격한 몰락을 모두 겪은 인물이다. 그는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패해 패망하기 전에 9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기까기 아테네의 성장과 번영, 위기와 몰락을 모두 겪었다. 아테네가 급격하게 성장해서 역시 급격하게 몰락한 것을 모두 본 소포클레스에게 세상을 움직이는 신은 알 수 없는 존재였다. 그래서 그는 극에서 신을 불가해한 존재로 그리면서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 얘기한다. 신의 의도를 우리가 알 수 없으니, 우리는 그저 우리 자신의 운명과 삶에 대해서 얘기할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그는 죽기 전까지 아테네의 미덕을 믿었다.

 

이에 비해 그리스 비극의 3대 극작가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에우리피데스는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와 다르다. 그건 그의 삶이 두 사람의 삶과 확연히 다르다는 것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의 잠깐 동안 아테네의 전성기를 경험한 에우리피데스는 뒤이어 아테네의 몰락을 몸소 경험한다. 그의 삶의 다수의 시간은 아테네의 몰락으로 점철된 것이다. 전쟁과 전쟁에 의한 고통, 스파르타의 압박과 아테네의 패전에 따른 온갖 부조리한 경험이 그의 삶을 채우고 있다. 전쟁을 외치면서도 막상 전쟁터에 나서면 이기지 못하는 정치가들, 그런 정치가들을 계속해서 찍어주고 그에 따라 온갖 고통을 경험하는 아테네 시민들, 어른거리는 죽음과 패망의 그림자를 어떻게든 극복하려 하면서도 어떤 해결책도 보여주지 못하는 아테네의 상황, 슬픔과 고통과 기아와 폭력으로 점철된 세상의 모습들. 여기서 에우리피데스는 이 세상이 부조리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 같다. 그에게 신은 알 수 없는 불가해한 존재이자 부조리한 존재였고, 아테네의 미덕은 믿을 수 없는 것이었고, 인간들은 자신의 눈앞에 닥친 문제를 쉽게 해결하지 못하는 모순적이고 부조리한 존재였다. 그는 신과 아테네의 미덕에 회의를 표하고, 인간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며 그리스 비극을 인간의 탐구로 만들었다. 그는 인간 내면의 심리를 탐구하고, 부조리한 신에 의해서 시련을 겪는 인간이 얼마나 모순적이고 허약한지를 그려낸다.

 

위에서도 적었지만 아이스킬로스와 에우리피데스는 상반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세상에 대한 이상적인 믿음을 유지한 아이스킬로스와 세상을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에우리피데스. 나는 이 두 사람의 모습에서 <숲의 왕국>을 쓴 현길언 씨와 나를 대입시켜본다. 완벽한 의미의 비유는 아니지만, 그래도 유사성을 찾아본다면 <숲의 왕국>을 쓴 현길언 씨는 아이스킬로스에 가깝고, 나는 에우리피데스에 가깝다고. 나이로 보나 살아온 시대상으로 보나 책의 저자인 현길언 씨는 나의 윗세대에 속한다. 군부 독재를 겪으며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민주화를 이루어낸 나의 윗세대들은 거시적인 사회적인 비전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더 나은 사회에 대한 믿음으로 민주화를 이루어낸 나의 윗세대들이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 믿음을 상당부분 상실한 것은 맞지만, 분명한 건 그들이 그것을 가졌었다는 사실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숲의 왕국>에는 그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인간과 세상의 더 나은 미래에 대한 믿음으로서의 그림자. 그래서 나는 현길언 씨가 아이스킬로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에 비해 나와 나의 선배, 후배를 포함한 세대들에게 거시적인 사회의 비전에 대한 경험은 미약한 수준이다. 우리의 대부분의 삶은 IMF 이후에 이루어졌고, 그에 따른 고용 불안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를 항상 따라다닌다. 우리는 정규직이 아니라 비정규직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던 시대를 살아왔고, 사회적인 비전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에 대한 걱정만으로 벅찬 삶을 살아왔다. 친구들과 만나서 하는 이야기는 거시적인 사회적 비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들의 생존과 삶의 불안을 메우려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우리의 존재 조건은 언제나 생존 그 자체였고, 그것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내 자신이 에우리피데스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인간과 더 나은 미래에 대한 믿음보다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불신과 회의에 더 익숙한 것이 우리 세대의 모습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니체의 회의주의와 카뮈의 '시지프스의 신화'에 끌렸다. 더 나은 세상에 대한 믿음, 사회적인 비전에 대한 믿음을 얘기하는 담론들보다는 세상을 회의하고, 세상의 부조리함 속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를 매혹시켰다. 무턱대고 인간과 더 나은 세상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하는 것을 내 존재 조건에 비추어보건대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숲의 왕국>을 읽고 나니 갑자기 그 믿음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맹신과 복종이 아니라, 대책없이 무언가를 믿는다는 것에 끌림을 느낀 것이다. 어쩌면 그건 낭만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낭만을 가진다는 건, 팍팍한 삶을 지금보다 더 행복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그 낭만성, 인간과 세상에 대한 대책없는 믿음을 가진다는 건 지금보다 내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그래서 나는 현길언 씨의 믿음을 믿고 싶어졌다. 그것을 믿는다면 지금의 삶보다는 더 나아지리라는 근거없는 믿음을 마음 속에 품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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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쾌한 이야기 바벨의 도서관 28
레옹 블루아 지음, 김계영 옮김, 이승수 해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바다출판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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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쾌한 이야기-레옹 블루아

불쾌하도 또 불쾌했다. 책을 읽으면서도,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보통 즐거움이나 기쁨,슬픔,아픔,

아련함,씁쓸함,혼란스러움,고뇌 등의 감정을 독서를 통해 느끼는데, 이 책은 불쾌함이라는 드문

감정을 독서를 통해서 느끼게 했다. 다 읽고 나서 떠오르는 생각도 '내가 왜 이런 불쾌한 책을

읽고 있는 것일까?'였다. 도대체 작가는 왜 이런 책을 쓴 것일까? 진짜 세상에 불쾌한 일이 많아

서 그것을 알리고 싶어서? 아니면 인간과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이 너무 싫어서 그 불쾌함을 표출

하고 싶어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알기 위해서 책의 처음에 나오는 보르헤스의 작가와 작품

소개글과 마지막의 해제를 들여다본다.

레옹 블루아. 부르주아 세계에 봉사하는 공범자로 보았던 성직자들과 공식 문학과 단절하는 태

도를 보여 세상 불화했던 작가. 인간 자체와 인간들이 살아가는 삶과 사회 자체를 조롱하고

경멸했으며, 이에 대한 신랄한 독설을 선보인 작가. 블랙 유머의 창시자로 자신만의 블랙 유머로

세상과 인간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한 작가. '우리는 이미 지옥에 있고, 모든 인간은 자신

의 동료를 고문할 책임을 맡은 악마'라고 생각한 인물. '프랑스가 선택된 민족이고 다른 민족

들은 그 접시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핥아 먹어야 한다' 주장한 인물. 반유대주의자. 프로

이센 군을 무서워하는 저격병 마르슈누아르와 지금 세대들에게 레옹 블루아로 알려진 냉정한

논객의 이중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 '우주는 일종의 신성한 암호문이고, 그 안에서 모든 인간

하나의 단어, 문자 혹은 단순한 구두점'으로 우주의 심연과 별들이 단지 인간 의식의

투사일 뿐이라고 주장한 남자. 실증주의와 대립하고 인간의 진보 따위는 믿지 않고 인간과 역사

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한 인물. 영국,미국,독일,벨기에를 공평하게 혐오하고 증오한 인간. 에밀

졸라를 위시한 동시대의 작가들에게 혹독하기 그지없는 비난을 퍼붓던 작가.

레옹 블루아에게 인간이란,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이란 혐오스럽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그는 이

혐오감을 표출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글쓰기를 선택했고, 글쓰기를 통해 자기 안에 가득찬 인간과

세상에 대한 혐오감과 증오심을 여지없이 표출한다. 그가 창안한 블랙 유머라는 문체적 스타일은

그의 혐오감과 증오심의 표출을 돕는데 일조하고, 그는 그걸 통해서 자신만의 독설의 경지를 창조

해낸다. 소설도 독설의 연장선상에 있는데, <불쾌한 이야기>는 레옹 블루아식 독설의 힘을 보여

주는 불쾌한 이야기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소설에서 내내 들떠있다. 마치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너무나 기쁘다는 듯이. 그는

기쁘고 즐겁 불쾌한 이야기들을 독자의 눈 앞에 내민다.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그의

활력적이고 유쾌한 문체가 보여주는 이야기들의 내용은 그의 문체의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

자신의 아버지를 증오해서 죽음으로 몰아넣딸, 돈 때문에 살아 있는 아버지를 화장시켜버리는

아들, 딸과 사위가 자신과 따로 사는 것에 앙심 품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딸과 사위를 압박해

서 죽게 만드는 어머니, 자신을 괴롭히던 예전 집주인의 머리를 길에서 우연히 주운 작가, 충실

하게 교회다니고 자선을 베풀지만 직업이 킬러인 남자, 재혼 위해 아들 죽이는 어머니, 모든

함께하는 네 남자, 자신이 사랑했던 죽은 누이의 목소리를 창녀에게서 듣는 남자 ...... 레옹

블루아는 어둡기 그지없고,음습하며,더럽고,찝찝한 비윤리적인 이야기들을 너무나 즐거운 말투

로 이야기한다. 그래서 그의 말투를 따라 가다 보면 어느새 몸 전체를 엄습하는 불쾌감을 만날 수

있다.

현재의 책들 중에서 이 책보다 잔인한 책들은 많다. 그러나 이런 독특한 스타일로 대량의 불쾌감

을 조성해내책을 만나기란 지금 이 시대에도 쉽지 않다. 잔인한 표현이 거의 없는데고 잔인

하고, 더럽고 찝찝한 표현을 쓰지 않는데고 더럽고 찝찝하게 여겨지는 이야기들을 창조해내는

그의 능력만큼은 인정하고 싶다. 시대를 앞서 독설과 불쾌감의 선구자로서. 그 이상의 무언가

를 찾는 것은 어렵다. 사실 이 책에서 그 이상의 무언가를 바란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처

럼 느껴진다. 불쾌감을 즐겁게 독자의 몸에 묻히는 책에서 뭔 의미를 찾는단 말인가?

실증주의를 조롱하고 인간의 진보 따위 믿지 않고 세상과 인간을 증오한 레옹 블루아의 글에서

어떤 철학적인 메시를 찾으려고 노력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하지만 독서에서 항상 의미를

찾는게 중요하다고 여기는 강박증을 가진 불쌍한 독서광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의미를 찾아나섰다. 그리고는 온몸에 불쾌감만 잔뜩 묻히 퇴각해야 했다.

온몸에 불쾌감이라는 오물을 잔뜩 묻힌 채로 책을 덮으니,이런 질문이 떠오를 수밖에. '나는 왜

이 책을 읽고 있는가?'. 거기에 대한 해답은 의외로 쉽게 찾았다. 책이 거기에 있었으니까.

나는 <불쾌한 이야기>가 내 눈앞에 있었기에 읽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행위의 결과로 불쾌감

이라는 결실을 얻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시 이런 류의 책을 읽지 않는다고 얘기할 수는

없다. 독서라는 덫에 빠진 나는 나중에 또 이런 책들을 읽으리라. 그리고 또 불평하리라. <불쾌한

이야기>가 주는 불쾌감은 여기서 최절정에 달한다. 내가 이 불쾌한 독서의 악순환에서 빠져나오

못하리라는 예측 자체가 이 책이 내게 전해준 최악의 불쾌감으로 다가왔다. 이 최악의 불쾌감

앞에서 나는 그저 몸서리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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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식탁 위의 책들 -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종이 위의 음식들
정은지 지음 / 앨리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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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식탁 위의 책들-정은지

 

*네이버의 모 독서 클럽에서 50주 동안 1주도 빼놓지 않고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기에, 이제부터는 게으름 부리지 않고 블로그에 꾸준히 서평을 올릴 예정이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서평이라기 보다는 독서감상문이나 책을 읽고 나서의 소감 정도에

불과하겠지만.

 

 

나는 문자중독은 아니다. 주변에 문자 중독에 가까운 분이 있어서 아는데, 그분은 문자로 된

것들은 다 읽으려고 하신다. 나는 문자로 된 것이라도 책이 아니면 잘 읽지 않는다. 신문은

배척하고, 우연히 손에 쥐게 된 전단지도 시큰둥하게 넘긴다. 휴대폰의 문자도 잘 보내지 않고,

답장도 짧게 하며, tv에서 나오는 자막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주변의 광고판도 잘 쳐다보지

않고, 심지어 식당의 메뉴판도 몇 번 보지 않고 넘긴다. 인터넷에서도 나의 그런 성향은 여전해서

블로그,카페 글도 내가 보고 싶은 글들만 본다. 인터넷 뉴스는 거의 보지 않고, 댓글은 정신

건강을 위해 앞으로도 볼 계획이 없다. 인터넷 공간의 게시판 자체에 관심도 없고, 참여도 하지

않으며, 글도 왠만해 서는 달지 않는다. 스마트폰이 없으니 카카오톡도 안하고, SNS도 거의 하지

않는다.

 

하지만 책으로 넘어오면 상황은 달라진다. 병리적 증상으로서의 책중독은 아닐지라도, 내가

책중독에 가깝다는 것은 확실하다. 하루라도 책을 안 읽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 것은 아니지만,

하루라도 책의 문자 하나라도 읽지 않으면 어디가 허전한 것은 맞다. 자기 전에 책을 읽지 않아도

잠을 못자는 것은 아니지만, 책을 읽으면 잠이 잘 오는 것도 사실이다. 가방에는 언제나 책 한권

정도는 들어 있으며,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때 읽을 수 있는 상황이 되면 반드시 책을 읽으려고

한다. 심지어 예비군 훈련 갔을 때도 책을 들고가서 시간 날때 틈틈이 읽었다.(예비군 훈련 가서

보르헤스의 <알렙>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읽고 머리가 아파서 힘들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이 책중독이 신체에 이상을 초래하는 병리적 증상은 아니라서 몸에 이상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폐암이나 간암이나 성인병의 걱정은 없다. 다만, 근심걱정이 예전보다 많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것도 나 말고 다른 이들도 근심걱정을 많이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볼때 나만 특별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여러모로 살펴보니 책중독은 신체적인 질병과 고통을 동반하지 않는 조금은

색다른 중독처럼 보인다.

 

그러니저러니 해도 내가 책중독에 가까운 것은 사실이다. 신체적 질병과 아픔을 동반하지

않는다고 해서 중독이 중독이 아닌 것은 아니다. 다른 중독을 겪어보지 않은 나에게 이 중독은

유일무이한 중독이고, 그 중독이 불러일으키는 쾌감은 언제나 유일한 것이다. 책을 읽을 때의

행복, 책을 읽는다는 행위가 주는 기쁨, 책을 읽을 때의 황홀경은 다른 누구도 느낄 수 없는

나만의 것이다. 때로는 친구처럼, 스승처럼, 연인처럼, 가족처럼, 원수처럼, 존경의 대상처럼,

증오의 대상 처럼 다가오는 천변만화하는 책의 매력은 나같은 책중독자에게는 언제나 새롭고도

새롭다. 또 책중독자에게는 책을 읽는다는 행위 자체가 쾌락의 원천이자 쾌락의 과정이자 쾌락

그 자체가 된다. 나는 책을 읽을 때 만큼은 스콜라 철학을 거부하고, 에피쿠로스를 따라서 책의

쾌락주의자가 되며, 마르크스를 거부하고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앉는 손에 따라서 이기적인

책의 탐식을 한다.

 

위의 모든 것을 종합해 봤을 때, 나는 <내 식탁 위의 책들>을 쓴 저자 정은지와는 너무 다르다.

이 책의 저자는 혼자서 음식을 먹고서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음식 때문에 책이 좋아지며, 책에

음식이 나오면 황홀해한다. 반대로 나는 책을 읽기 때문에 그때 먹는 음식을 좋아하고, 책 때문에

음식이 좋아지며, 책에 음식이 나와서 황홀한 것이 아니라 책을 읽기 때문에 황홀하다. 책이 아닐

경우에 나에게 음식은 큰 관심의 대상은 아니다. 물론 미각의 쾌락을 무시할 수는 없다. 나도

먹을 때 만큼은 맛있게 먹으려고 노력하며, 내가 좋아하는 음식에는 관심을 보인다. 하지만 음식

때문에 책이나 음식 관련 글을 읽지 않고, 자발적으로 음식 블로거의 블로그를 찾지 않는다. 나는

단지 책에 음식이 나오면 관심을 보이며 '맛있겠네.' 하고 생각할 뿐이다. 나는 푸드 포르노 중독

과는 거리가 멀고, 미식가를 자처 하지도 않고, 맛집을 찾아 다니지도 않는다. 나에게 먹는다는

행위는 생존에 필수적인 행동으로서 반드시 해야 하는 행동에 가깝지, 쾌락의 대상으로서 중독에

빠져서 하는 행동아니다.

 

그러니 나는 이 저자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철저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도 아니다. 나는 그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이해할 뿐이다. 나는 그녀처럼

음식을 탐식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처럼 책을 탐독하는 것은 맞다. 이 반쪽의 조화는 책을 읽는

내내 지속적으로 불협화음과 마찰음을 일으키는데 일조했다. 나는 그녀를 이해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했고, 그녀의 주장에 동조하면서도 동조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생각과 주장에

공감하면서도 반박했고, 반박하면서도 공감했다. 끊임없는 대화로서의 독서. 혼자서, 비록

저자가 쓴 글과 하는 대화였지만, 나는 진짜 대화하는 것처럼 읽어나갔다.

 

첫부분인 '책을 내며'부터 이 대화는 시작된다. 저자는 '책을 내며'에 이런 글을 썼다.

'단호히 말하지만 세상에 아직 못 먹는 음식보다 맛있는 음식은 없다.' 나도 이 부분을 읽고

단호히 '내게는 그렇지 않다.'라고 마음 속으로 이야기했다. 내게 못 먹는 음식은 못 먹은 음식

뿐이었다. 그건 맛있는 것도, 맛없는 것도 아닌 아직 먹지 못한, 맛을 모르는 음식에

불과했다. 거기에 어떻게 단호히 '맛있겠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내게 맛있는 음식은 아직 못

먹은 음식이 아니라 먹어 보고 맛있다고 느끼는 음식이다. 그러니 내게 이 문장은 너무 안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것을 먹지 못한 음식에 대한 갈망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인정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이 부분부터 시작된 대화는 계속되어 마지막까지 이어졌다. 나는 어찌보면

반목했지만, 동시에 그녀가 보여주는 음식에 대한 글들에서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

정보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에게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만찬장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저자와 끊임없이 대화하며 음식

박물관에 전시된 음식들을 들여다보는 경험에 다름 아니었다. 보지 않고, 모르는 음식들을

갈망하고 욕망하기보다는 그것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들이 어떤 것들인지 알아가는 경험

으로서의 독서. 그때의 독서는 침이 고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식이 확장되게 하면서 나

자신을 풍요롭게 만든다. 아무리 책으로 음식을 이야기해도 나는 그것이 먹고 싶다는 생각

보다는 '세상에,이런 음식들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미각적 욕망은 앎의 욕망에

압도당했고, 숨죽여 나 자신의 앎의 세계가 확대되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럴 때 앎의

욕망은 어떤 감각적 욕망보다도 더욱 더 압도적인 힘을 발휘하고, 어느새 앎의 욕망은 미각적

욕망과 이어지고 있었다. 먹고 싶다가 아니라, 침이 고이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알고 싶다는

욕망의 이름으로 나의 앎의 욕망은 다른 육체적인 욕망과 다를 바 없는 것이 되었다.

 

아, 나는 깨닫는다. 내가 책의 저자와 다른 욕망을 갖고 있지만 그녀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먹고 싶다와 알고 싶다가 하나가 되고, 지나친 탐식과 지나친 탐독이 하나가 되는

경험이 나를 압도할 때 나는 책의 저자와 내가 다르지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실김한다.

멍하니 <내 식탁 위의 책>이라는 제목보다는 <내 책안의 음식>이라는 제목처럼 보이는 책을

쳐다본다. 나는 더 읽고 싶다. 나는 더 알고 싶다. 그리고 외친다. 단호히 말하지만 세상에

아직 못읽은 책보다 재미있는 책은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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