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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식탁 위의 책들 -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종이 위의 음식들
정은지 지음 / 앨리스 / 2012년 4월
평점 :
![](http://image.yes24.com/goods/6981186/L)
내 식탁 위의 책들-정은지
*네이버의 모 독서 클럽에서 50주 동안 1주도 빼놓지 않고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기에, 이제부터는 게으름 부리지 않고 블로그에 꾸준히 서평을 올릴 예정이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서평이라기 보다는 독서감상문이나 책을 읽고 나서의 소감 정도에
불과하겠지만.
나는 문자중독은 아니다. 주변에 문자 중독에 가까운 분이 있어서 아는데, 그분은 문자로 된
것들은 다 읽으려고 하신다. 나는 문자로 된 것이라도 책이 아니면 잘 읽지 않는다. 신문은
배척하고, 우연히 손에 쥐게 된 전단지도 시큰둥하게 넘긴다. 휴대폰의 문자도 잘 보내지 않고,
답장도 짧게 하며, tv에서 나오는 자막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주변의 광고판도 잘 쳐다보지
않고, 심지어 식당의 메뉴판도 몇 번 보지 않고 넘긴다. 인터넷에서도 나의 그런 성향은 여전해서
블로그,카페 글도 내가 보고 싶은 글들만 본다. 인터넷 뉴스는 거의 보지 않고, 댓글은 정신
건강을 위해 앞으로도 볼 계획이 없다. 인터넷 공간의 게시판 자체에 관심도 없고, 참여도 하지
않으며, 글도 왠만해 서는 달지 않는다. 스마트폰이 없으니 카카오톡도 안하고, SNS도 거의 하지
않는다.
하지만 책으로 넘어오면 상황은 달라진다. 병리적 증상으로서의 책중독은 아닐지라도, 내가
책중독에 가깝다는 것은 확실하다. 하루라도 책을 안 읽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 것은 아니지만,
하루라도 책의 문자 하나라도 읽지 않으면 어디가 허전한 것은 맞다. 자기 전에 책을 읽지 않아도
잠을 못자는 것은 아니지만, 책을 읽으면 잠이 잘 오는 것도 사실이다. 가방에는 언제나 책 한권
정도는 들어 있으며,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때 읽을 수 있는 상황이 되면 반드시 책을 읽으려고
한다. 심지어 예비군 훈련 갔을 때도 책을 들고가서 시간 날때 틈틈이 읽었다.(예비군 훈련 가서
보르헤스의 <알렙>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읽고 머리가 아파서 힘들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이 책중독이 신체에 이상을 초래하는 병리적 증상은 아니라서 몸에 이상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폐암이나 간암이나 성인병의 걱정은 없다. 다만, 근심걱정이 예전보다 많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것도 나 말고 다른 이들도 근심걱정을 많이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볼때 나만 특별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여러모로 살펴보니 책중독은 신체적인 질병과 고통을 동반하지 않는 조금은
색다른 중독처럼 보인다.
그러니저러니 해도 내가 책중독에 가까운 것은 사실이다. 신체적 질병과 아픔을 동반하지
않는다고 해서 중독이 중독이 아닌 것은 아니다. 다른 중독을 겪어보지 않은 나에게 이 중독은
유일무이한 중독이고, 그 중독이 불러일으키는 쾌감은 언제나 유일한 것이다. 책을 읽을 때의
행복, 책을 읽는다는 행위가 주는 기쁨, 책을 읽을 때의 황홀경은 다른 누구도 느낄 수 없는
나만의 것이다. 때로는 친구처럼, 스승처럼, 연인처럼, 가족처럼, 원수처럼, 존경의 대상처럼,
증오의 대상 처럼 다가오는 천변만화하는 책의 매력은 나같은 책중독자에게는 언제나 새롭고도
새롭다. 또 책중독자에게는 책을 읽는다는 행위 자체가 쾌락의 원천이자 쾌락의 과정이자 쾌락
그 자체가 된다. 나는 책을 읽을 때 만큼은 스콜라 철학을 거부하고, 에피쿠로스를 따라서 책의
쾌락주의자가 되며, 마르크스를 거부하고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앉는 손에 따라서 이기적인
책의 탐식을 한다.
위의 모든 것을 종합해 봤을 때, 나는 <내 식탁 위의 책들>을 쓴 저자 정은지와는 너무 다르다.
이 책의 저자는 혼자서 음식을 먹고서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음식 때문에 책이 좋아지며, 책에
음식이 나오면 황홀해한다. 반대로 나는 책을 읽기 때문에 그때 먹는 음식을 좋아하고, 책 때문에
음식이 좋아지며, 책에 음식이 나와서 황홀한 것이 아니라 책을 읽기 때문에 황홀하다. 책이 아닐
경우에 나에게 음식은 큰 관심의 대상은 아니다. 물론 미각의 쾌락을 무시할 수는 없다. 나도
먹을 때 만큼은 맛있게 먹으려고 노력하며, 내가 좋아하는 음식에는 관심을 보인다. 하지만 음식
때문에 책이나 음식 관련 글을 읽지 않고, 자발적으로 음식 블로거의 블로그를 찾지 않는다. 나는
단지 책에 음식이 나오면 관심을 보이며 '맛있겠네.' 하고 생각할 뿐이다. 나는 푸드 포르노 중독
과는 거리가 멀고, 미식가를 자처 하지도 않고, 맛집을 찾아 다니지도 않는다. 나에게 먹는다는
행위는 생존에 필수적인 행동으로서 반드시 해야 하는 행동에 가깝지, 쾌락의 대상으로서 중독에
빠져서 하는 행동은 아니다.
그러니 나는 이 저자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철저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도 아니다. 나는 그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이해할 뿐이다. 나는 그녀처럼
음식을 탐식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처럼 책을 탐독하는 것은 맞다. 이 반쪽의 조화는 책을 읽는
내내 지속적으로 불협화음과 마찰음을 일으키는데 일조했다. 나는 그녀를 이해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했고, 그녀의 주장에 동조하면서도 동조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생각과 주장에
공감하면서도 반박했고, 반박하면서도 공감했다. 끊임없는 대화로서의 독서. 혼자서, 비록
저자가 쓴 글과 하는 대화였지만, 나는 진짜 대화하는 것처럼 읽어나갔다.
첫부분인 '책을 내며'부터 이 대화는 시작된다. 저자는 '책을 내며'에 이런 글을 썼다.
'단호히 말하지만 세상에 아직 못 먹는 음식보다 맛있는 음식은 없다.' 나도 이 부분을 읽고
단호히 '내게는 그렇지 않다.'라고 마음 속으로 이야기했다. 내게 못 먹는 음식은 못 먹은 음식
일뿐이었다. 그건 맛있는 것도, 맛없는 것도 아닌 아직 먹지 못한, 맛을 모르는 음식에
불과했다. 거기에 어떻게 단호히 '맛있겠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내게 맛있는 음식은 아직 못
먹은 음식이 아니라 먹어 보고 맛있다고 느끼는 음식이다. 그러니 내게 이 문장은 너무 안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것을 먹지 못한 음식에 대한 갈망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인정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이 부분부터 시작된 대화는 계속되어 마지막까지 이어졌다. 나는 어찌보면
반목했지만, 동시에 그녀가 보여주는 음식에 대한 글들에서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
정보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에게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만찬장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저자와 끊임없이 대화하며 음식
박물관에 전시된 음식들을 들여다보는 경험에 다름 아니었다. 보지 않고, 모르는 음식들을
갈망하고 욕망하기보다는 그것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들이 어떤 것들인지 알아가는 경험
으로서의 독서. 그때의 독서는 침이 고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식이 확장되게 하면서 나
자신을 풍요롭게 만든다. 아무리 책으로 음식을 이야기해도 나는 그것이 먹고 싶다는 생각
보다는 '세상에,이런 음식들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미각적 욕망은 앎의 욕망에
압도당했고, 숨죽여 나 자신의 앎의 세계가 확대되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럴 때 앎의
욕망은 어떤 감각적 욕망보다도 더욱 더 압도적인 힘을 발휘하고, 어느새 앎의 욕망은 미각적
욕망과 이어지고 있었다. 먹고 싶다가 아니라, 침이 고이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알고 싶다는
욕망의 이름으로 나의 앎의 욕망은 다른 육체적인 욕망과 다를 바 없는 것이 되었다.
아, 나는 깨닫는다. 내가 책의 저자와 다른 욕망을 갖고 있지만 그녀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먹고 싶다와 알고 싶다가 하나가 되고, 지나친 탐식과 지나친 탐독이 하나가 되는
경험이 나를 압도할 때 나는 책의 저자와 내가 다르지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실김한다.
멍하니 <내 식탁 위의 책>이라는 제목보다는 <내 책안의 음식>이라는 제목처럼 보이는 책을
쳐다본다. 나는 더 읽고 싶다. 나는 더 알고 싶다. 그리고 외친다. 단호히 말하지만 세상에
아직 못읽은 책보다 재미있는 책은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