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밑 페스티벌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김선영 옮김 / 문학사상사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물밑 페스티벌-츠지무라 미즈키

그 남자의 독서노트1

그는 사라졌다. 작디작은 방안 가득한 책과 노트들을 남겨두고. 언제나 부스스한 몰골로 작은 자기 방안의 작은 책상에서 영혼이 책에 빨려 들어간 것처럼 책을 열심히 읽어나가던 그를 우연히 만날 때마다, 나는 그가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그렇게 파멸을 예감하게 만드는 위험한 감각이 있었다. 책을 너무 많이 읽었고, 지나치게 열심히 읽었던 그는, 어느 순간부터 현실과 책을 구분하지 못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이 ‘책’이라고 주장했다. 삶이라는 제목의 책에 자신이 글을 써나간다는 그의 주장은 광기의 수준을 넘어서서 묘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생각을 믿는 수준이 아니라, 그것이 당연하기에 일상적인 이야기를 한다는 식으로 나른하게 말을 하는 그의 얘기를 들으며 나는 생각이 현실이 될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몇 달 전부터 그와 연락이 되지 않으며, 불길함을 느낀 나는 그의 방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나는 책과 노트만 가득한 방을 보게 되었다. 모든 것이 예전 그대로였지만 오직 그만 없는 그 방을 보며 나는 그가 드디어 사라졌음을 알았다. 그의 휴대폰도, 그의 지갑도, 그가 목숨처럼 아껴서 언제나 넣어 다니던 작은 수첩과 볼펜도 언제나 놓여 있던 자리에 있었는데, 제자리에 있어야 할 그만 없었다. 그는 과연 어디로 간 것일까?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책들과 독서노트들을 남겨두고 어디로 간 것일까? 섣부른 추측 따위는 하고 싶지 않는 나는, 예전에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는 혹시라도 자신이 사라진다면 자신의 책들은 내 마음대로 하고 독서노트는 챙겨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그의 말에 따라서 우선 노트들을 집에 가져가기 위해 챙겼다. 그 외의 방의 물건은 그대로 놔두고 그의 방을 나섰다. 언젠가 그가 다시 돌아온다면 그것을 반기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늘 문득 그의 독서노트 중 하나를 펼쳤다. 독서노트 63권. 중간 부분을 우연히 펼치니 바로 일본에서 현재 가장 주목받는 작가 중 한명인 츠지무라 미즈키의 <물밑 페스티벌>에 관해서 그가 적어놓은 글들이 보였다. 여기에 그 글 중 일부와 내가 쓴 글들을 적어 보겠다.

‘이 마을은 괴물이다.’라고 그는 적었다. 그 밑에는

‘괴물인 마을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괴물이 되어야 한다. 괴물이 되어야만 마을 자체가 괴물이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괴물이기에 그들은 마을이 괴물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마음껏 괴물스러운 행동을 벌일 수 있다.’라고 적혀 있다. 다시 조금 더 내려다보니 이런 글이 적혀 있다.

‘괴물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절대로 괴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오만과 자만이야말로 괴물들이 괴물들로서 살아나가는데 있어서 핵심적인 것이다. 자신들이 괴물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마음껏 괴물성을 향유하며, 마을이라는 괴물을 지켜나가게 된다.’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도대체 이 책은 무슨 책이기에 괴물이라는 말만 잔뜩 있는 것일까?

 

는 호기심에 <물밑 페스티벌>을 읽었고, 읽고나서야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알게 됐다. 낭만적이고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이자 일종의 성장소설이기도 한 이 소설은 읽다보면 책 자체가 괴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든다. 소년의 비극적 사랑을 만든 원인부터, 사랑의 과정에서부터 비극적인 결말까지, 악습과 억압이라는 물밑에 가득 잠긴 마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괴물인 마을에서 살아가는 얼마나 괴물스러운지 보여준다. 가장 무서운 건, 괴물들의 자기 정당화나 그것들을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기는 생각이 아니라,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아무 탈 없이 일상을 유지해나가려는 그들의 욕망이다. 분명히 부당하고, 폭력적이며,부도덕하기 그지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그것들을 자신들의 일상이라고 여기면서 그것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그들의 욕망이야말로 '괴물의 진정한 핵심'이다. 그도 그걸 알고 글로 썼다.

 

'마을은 계속 괴물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괴물이 괴물로서의 일상을 유지해갈 수 있다. 자신들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 괴물들은 계속 괴물들을 양산해내며, 괴물로서의 변화를 거부한 자가 생기면 어떤 식으로든 그들을 포섭하려 한다. 포섭에서도 그 사람이 괴물로서의 변화를 거부하면, 그들은 한순간의 양심의 가책이나 망설임 없이 그들을 제거한다. 도덕성과 윤리 의식, 이상주의에 사로잡혀서 괴물로서의 변화를 거부하는 이들을 그들을 순식간에 으스러뜨린다. 사랑의 광기와 낭만성에 사로잡혀 괴물이 되는 것을 거부한 소년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괴물성 앞에서 소년의 순수함과 사랑은 먼지가 되어 사라진다. 그걸 보고 있노라면 이 책에서 진정 중요한 것은 '괴물되기냐 괴물되지 않기냐' 하는 실존적인 물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맞는 말이다. 지금 이 삶에서 중요한 것은 '죽느냐 사느냐'가 아니라 '괴물되기냐 괴물되지 않기냐'이다.

 

‘제발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해주세요. 다음 기회가 있다면 반드시 유키미를 지킬 것이다. 아무리 우스꽝스러워도 다시는 실수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손을 다시는 놓지 않을 것이다.'

‘평온한 일상을 ’되찾은‘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 마을에서는 언제 어느 때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저 먼 옛날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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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민음사 세계시인선 21
W.워즈워드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197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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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무지개-워즈워스

 

 

 

1.

워즈워스의 눈은 자연을 훑는다. 지배와 이용의 대상으로서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이 아니라,자연 그 자체로 아름답고, 신비하고, 숭고하고, 선하다는 듯이. 시인이 자연을 아름다움과 신비와 낭만과 선함과 숭고함과 치유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순간, 자연은 기다렸다는 듯이 시인이 바라보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시인의 시각과 자연이 품고 있는 것들이 만나서 상호작용을 할 때 시인의 마음에는 하나의 거대한 심상과 정서들이 생겨난다. 그것들이 생겨나면 시인에게 시를 쓰라고 강요하고, 시인은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언어로서 표현하게 된다. 워즈워스의 시들은 그렇게 쓰였다. 그는 시를 쓸 수밖에 없기 때문에 쓴 것이다. 자연의 강요가, 자연과 시인의 마음이 만나서 만들어진 심상과 정서의 강요가 없었다면 워즈워스의 자연을 노래하는 시들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2.

세련되고 정련된 언어도 아니고, 고상하고 지적인 언어도 아니고, 평범한 민중들이 쓰는 언어를 바탕으로, 평범한 삶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것을 자신의 시의 기본으로 삼은 워즈워스에게 자연은 최적의 소재였다. 누구나 쉽게 접하지만, 충분히 시의 소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과 아름다움을 품고 있고, 워즈워스 자신이 추구하는 내적인 정서의 흘러넘침으로서의 시작을 가능하게 만드는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영국 시들이 고정관념을 깨부수고 더 나아가서 당시의 일반적인 영국 사람들의 시각 자체와는 판이하게 달랐던 이런 시들은 그 자체로 혁명적이었고, 그의 시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인정을 받기 시작하면서 영국 시세계의 혁명은 시작된다. 콜리지와 함께 쓴 <서정담시집>에서 촉발된 이 시적 혁명은 영국 낭만주의라는 이름으로 후배들에게 전해지고, 이후 영국 문학은 낭만주의의 거센 물결에 휘말리게 된다.

 

 

안타까운 건, 워즈워스가 명성을 얻고 현실에 안주하던 40대 이후로는 창작력의 고갈을 겪으며 예전과 같은 시들을 써내지 못했다는 사실. 유동하면서 넘쳐나는 에너지로 시를 써내던 시인이었기에, 안주하자 창작력이 고갈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해도 영국 낭만주의를 이끈 시인이 전혀 낭만적이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서글펐다. 이 서글픔은 책을 덮고 나서도 나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워즈워스 보다 먼저 태어났던 윌리엄 블레이크의 낭만주의 시들이 당대에 전혀 주목받지 못하고 망각의 어둠 속에 파묻혀 19세기 이후에야 주목받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워즈워스야말로 영국 낭만주의 문학의 시초이자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내 가슴 설레느니.

나 어린 시절에 그러했고

다 자란 오늘에도 매한가지.

쉰 예순에도 그렇지 못하다면

차라리 죽음이 나으리라.‘(18)

 

 

 

3.

주변에서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쉽게 찾기 어려운 시대다. 신문이나 TV에는 자극적인 뉴스가 넘쳐나고, 드라마나 영화에는 성형과 몸매관리, 피부관리로 빚어낸 인공적인 아름다움과 인위적인 즐거움이 가득하다. 돈과 성공이라는 목표에 얽매여 살아가는 이들은 아름다움 따위는 상관하지 않고 살아가고, 그런 것들을 꿈만 꾸는 평범한 이들도 일상의 관성에 얽매여 아름다움과는 상관없이 살아간다. 여유를 가지고 하늘을 보는 것도, 주변을 잠시 둘러보는 것도 하지 못하고 속도에 떠밀려 그냥 살아가는 이들이 다수인 이 시대에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찾는 것은 어쩌면 시대착오적인 행동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찾고 싶다. 워즈워스의 시가 좋았던 것은 그것을 내 눈앞에 보여주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찾기 힘든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편안하게 포근하게 언어로서 보여줌으로써 휴식과 치유의 시간을 제공하는 그의 시들을 만난다는 건, 진짜 시대착오였지만 너무나 편안하고 기분 좋은 시대착오였다. 아니 그건 시대착오라는 말 이전에 우리가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인간 삶의 편안함을 만나고, 모든 걸 품어주는 자연의 품에 안기는 아름다운 행동이었다. 그 기분을 잊지 않으리라. 워즈워스가 비록 40대 이후로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해도, 그가 보여준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 낭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에. 그가 나이 들어 무지개를 보고 더 이상 가슴 설레지 못하고 죽은 채로 살아간다고 해도 그가 과거에 썼던 글들이 죽는 것은 아니기에. 시를 읽고 그의 무지개가 나의 무지개가 되어 나만의 아름다움으로 마음 속에 간직됐기에.

 

 

 

'수탉이 울고,

냇물은 흐르고,

작은 새들은 지저귀고,

호수는 반짝거린다...

산에는 기쁨이 있다.

샘에는 생명이 있다.

작은 구름들은 하늘을 날고,

파란 하늘은 드넓게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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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안칠자 시선 지만지 고전선집 638
공융 외 지음, 문승용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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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안칠자 시선-공융 외

 

‘문을 나서니 보이는 건 없고

백골이 들판에 가득하다.

길에 굶주린 부인네가 있는데

안고 있던 아이를 풀숲에다 버린다. ...

“내 몸 죽을 곳을 모르는데

어찌 둘 다 살아갈 수 있겠어요.“(p.37~38, 왕찬의 「칠애시」 중에서)

 

한국에서 필독서라 일컬어지는 <삼국지>의 불편한 진실은, 그것이 끊임없는 전란과 폭력의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뛰어난 지략을 구사하는 책사들과 놀라운 무예를 선보이는 장군들과 기상천외한 전략, 전술이 빚어낸 전투의 모습에 현혹되어 책을 따라가지만, 정작 그 시대를 살아간 평범한 민중들의 삶이란 현란함이나 재미있음과는 거리가 먼 참혹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평원에 널려 있는 백골들, 살기 위해 아이를 버리는 어머니, 굶어 죽어 가는 사람들, 죽지 않기 위해 버러지같이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어 가는 사람들, 전쟁터에 널린 시체, 죽지는 않았지만 부상당해 큰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 이들의 모습 어디에서도 재미나 전투와 폭력의 미학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건 그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처절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 뿐.

 

<건안칠자 시선>을 읽는 건 <삼국지>의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역사적으로 한나라의 마지막 황제 헌제의 연호로 쓰인 건안은, 중국 문학사에서 바라보면 한나라 말부터 위나라를 세운 조비의 황초 연간까지를 가리킨다. 건안칠자는 문학사적인 의미의 건안 시기에 문학적으로 맹활약한 일곱 명의 문인을 가리킨다. 공융, 왕찬, 진림, 유정, 서간, 완우, 응찬의 일곱 명이 건안칠자인데, 이들은 공통적으로 어지러웠던 한 나라 말에는 시대의 혼란과 모순을 드러내고, 그것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힘겹고 불운한 삶의 울분을 강건하게 토로하지만, 조조에게 발탁되어 관직을 하면서부터는 조조와 조비 부자를 찬양하고, 자신의 공명심과 일상을 노래하는 것에 그친다.(조조에 저항하다 죽음을 맞은 공융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여섯 명은 이 틀에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여기에서 삼국지의 불편한 진실이 드러나는데, 건안칠자의 초기 시에서는 <삼국지>가 이야기하지 않는 참혹한 진실의 일면을 보여주고, 후기 시에서는 민중의 삶에 상관없이 권력에 빌붙어서 자신의 이득만을 챙기는 지식인의 전형적인 모습을 알려준다. 특히 건안칠자들의 후기 시는 단순히 그 시대적 삶의 불편한 진실을 넘어서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진실을 알려준다. 권력의 맛에 길들여진 이들의 삶이란 그 시대와 지금이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는.

 

시가 아름다움의 언어적 표현인 것은 맞다. 그러나 동시에 시는 시대적 삶의 진실을 알려주는 아우성의 역할도 한다. 버림받고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인내하며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목소리로서의 아우성. 또 시는 어두운 삶의 일면을 보여주며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역할도 한다. '이렇게 사는 것이 옳은 삶인가? 나는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같은 질문으로서의 시. 다양한 삶의 면모를 보여주는 시는 한 시대의 삶이란게 얼마나 다면적이고 다층적일 수 있는지 알리며 한 시대의 초상을 완성해나간다. 나에게 <건안칠자 시선>을 읽는다는 것은, 책을 기계적으로 읽다보면 자꾸 잊어버리게 되는 그 한 시대의 다면적 초상으로서 삶을 다시 만나는 소중한 경험의 시간이었다. 그건 필독서 <삼국지>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건안칠자 시선>을 읽고, <삼국지>에 <건안칠자 시선>을 덧붙여야 겠다는 뜬금없는 생각을 해본다. 그것이 <삼국지>가 말하지 않는 것을 알려 주면서 <삼국지>를 단순한 ‘삼국지연의’가 아니라 ‘진짜 삼국지 시대’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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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지 민음사 세계시인선 25
T.S.엘리어트 지음, 황동규 옮김 / 민음사 / 197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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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지- T. S. 엘리엇

나는 책을 사랑한다. 이 사랑은 내가 읽었던 책들과 읽고 있는 책과 앞으로 읽을 책 모두를 포함한다. 나에게 있어 책에 대한 사랑은 불평등이 없는 공평하고 공정한 사랑이다. 그러나 때로는 나의 사랑에 위기가 찾아온다. 읽어도 이해하기 어렵거나 쉽게 공감이 가지 않는 책들, 지독한 편견에 물들어 있는 책들, 자신만의 주장이 옳다는 책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책들을 읽을 때는 사랑의 감정이 시들어버린다. 그럴 때 나는 책과의 지독한 대화를 시도한다. 책들의 주장의 문제점을 파고들어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것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얘기하며, 책에 대한 나름의 개선방안을 요구한다. 물론 언제나 내가 지적만 하는 것은 아니다. 책들이, 책의 내용들이 나의 마음을 울리고 나의 영혼을 파고든다면 나는 그 울림과 균열에 따라 나 자신을 반성하고 바꿔나가려고 노력한다. 책을 쓴 저자와의 내적이고 긴밀한 영혼의 대화. 이 소리 없는 아우성은 내 사랑의 위기를 극복하게 돕는다.

 

엘리엇의 『황무지』를 읽었을 때도 내 사랑에 위기가 찾아왔다. 도대체 이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시인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이 시는 내게 무엇을 속삭이고 있는가? 그러니까 모든 질문을 종합해보면 ‘도대체 이 시는 뭔가?’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 ‘이건 뭔가?’이다. 나는 책을 읽는 동안 계속해서 ‘황무지, 너는 뭐냐?’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내 질문에 『황무지』는 어떤 대답도 없이 지긋이 자신의 시어를 내밀 뿐이다.

 

:갑자기 『올드보이』의 최민수 형님의 대사가 떠오르더라. ‘누구냐 넌?’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은 뿌리를 봄으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어 주었다.(P.46)

 

이 내밀한 시어의 속설을 들여다보며 나는 ‘황무지’의 세상을 만난다. 내적인 감정의 표현으로서의 시가 아니라 이성을 이용한 정련되고 정제된 시어가 가득한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의 세상, 죽음을 통한 재생이 불가능한 불임과 진짜 죽음과 정신적 메마름이 가득한 황량한 현대의 세상, 고대의 시어들이 현대의 시어와 표현들과 병렬되어서 다양성이 꽃피는 콜라주의 세상. 이 모든 세상을 통해서 도시적 감성의 차가운 시인 엘리엇은 현대라는 시대의 황량함을 보여주며 우리가 황무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내 마음에 속삭인다.

 

살아 있던 그는 지금 죽었고

살아 있던 우리는 지금 죽어간다

약간씩, 견디어 내면서.(P.102)

 

재미있는 사실은, 세련되고 이성적인 창작 기법과 시어를 사용하며 20세기 영미 시단의 모더니즘을 주도한 대표주자로서 꼽히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엘리엇이 과거의 순박하고 단순한 전원 사회를 꿈꾼다는 점이다. 그의 언어와 창작 기법은 모던하지만 그의 지향점은 과거라는 사실은, 그의 복고주의가 내용은 복고주의지만 표현은 모더니즘이라는 사실 앞에서 역설을 드러낸다. 알다가고 모를 것 같고, 모르다가도 알 것 같은 시를 쓰지만 그의 시가 그려내는 꿈들은 우리 누구나가 꿈꾸는 것이라는 얘기다. 이 황무지의 놀라운 역설을 접하고서 나는 힘이 솟는다. 나의 황무지에 대한 사랑이 끝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에.

 

이들 이미지들 주위로 웅크리고, 그리고

달라붙는 심상들에 내 마음 끌린다:

어떤 한없이 순하고

한없이 아파하는 것에 대한 생각.(P.38)

 

베르테르의 사랑이 자살로 결론 나고, 페트라르카의 사랑이 언제나 시로서 표현되고, 단테의 사랑이 『신곡』을 만들어낸 것과는 달리 내 『황무지』에 대한 사랑은 『황무지』를 계속 읽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 사랑이 쉽지 않지만 나는 계속해서 읽고 또 읽으리라. 그러면서 황무지의 세계를 접하다보면 이전보다 더욱 더 황무지를 사랑한다고 생각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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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미래보다 새롭다 - 유하 산문집, 개정증보판
유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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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미래보다 새롭다-유하

 

 

‘추억은 미래보다 새롭다’라는 제목이 새롭다. 시간의 법칙을 거스르려는 몸부림을 기록한 이 제목은 책의 첫 출간연도(1995년)와 책 속의 내용과 더불어 이 책을 진짜 새로워 보이게 만든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부터 계속해서 영화감독으로 알고 있던 유하가 시인이었다는 사실, 기억조차 나지 않는 압구정동과 오렌지족, 이소룡을 위시한 홍콩 영화의 위세, 이름도 생소한 과거의 한국 영화배우 문희를 비롯한 과거 한국영화의 족적, 60년대 한국인들의 삶, 과거 극장의 흔적, 그 시절 유행한 팝송, 과거 재즈 뮤지션들의 활약상, 90년대 시인들의 시와 그들의 삶에 이르기까지 이 책은 어느 것 하나 새롭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과거를 지나와서 미래에서 되돌아보면 ‘추억이 미래보다 새롭다’라는 것을 하나의 고정된 진실로서 깨닫는 순간으로서의 독서의 순간, 내 머릿속에 또 다른 하나의 생각이 짓쳐든다. 지금 내가 이 책을 읽고 있는 순간조차 언젠가는 새로워질 것이라는.

 

 

 

 

아마도 유하는 이것을 알고서 이 책을 썼을 것이다. 그는 추억이라는, 지나간 시간의 몸부림과 그것이 새로워질 것이라는 미래의 예측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며 자신의 글을 써나갔을 것이다. 그 고뇌와 고독과 외로움이 빚어낸 사고의 흔적인 이 글을 읽는다는 건 그래서 걸어갔던 그 길을 다시 걷는 길에 다름 아니다. 나는 그저 그가 걸어가며 흘린 열매들을 주워 먹으면 된다. 그 맛이 과거의 맛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맛이라는 사실을 알면 된다. 그런데 나는 그 길을 걸으며 그가 흘린 열매들을 주워 먹으면서 서글퍼졌다. 그것은 내가 독서를 하는 한 계속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나의 독서가 글을 쓴 사람들의 길을 따라 걸으며 그들이 흘린 열매를 주워 먹는 행위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니체의 ‘영원회귀’와 카뮈의 ‘시지프스의 신화’의 수동적인 구현. 실존적인 것이 아니라 비실존적이고 비본래적인 것으로서의 독서 행위의 필연적인 예감. 거기서 반복은 지옥이 된다. 아니, 반복은 지옥이 될 것이라고 나는 예측했다. 이 ‘지옥의 예감’을 벗어나기 위해서 나는 ‘반복은 지옥이 된다’라는 말을 가능성의 문장으로 바꾸었다. 그 순간 나의 서글픔은 다시 새로운 의지의 구현으로 이어진다. 이것을 벗어나야 겠다는. 나는 이 서글픔에서, 이 ‘반복의 지옥’에서 벗어나야 하겠다. 아니, 벗어나겠다. 내가 벗어남을 외치는 순간, 사건이 생겨났다. 이건 내 독서 인생에서 있어 왔던 평범한 사건이 아니라 들뢰즈가 말한 사건이다. 이제 나의 사건은, 나의 독서는 차이 없는 반복이 아니라 차이의 반복을 향한 여정이 된다. 끝없이 반복되지만, 언제나 다른, 차이가 있는 반복으로서의 독서를 향한 여정. 서글픔을 느낄 때는 진짜 서글픔에 힘들었지만, 서글픔이 사건을 향한 꿈꾸기를 불러오자 나는 다시 힘을 얻었다. 나는 서글프지만 서글프지만은 않다. 나에게 새로운 꿈과 의지가 생겼기 때문이다.

 

 

 

 

다시 책으로 돌아온다. 유하가 걸어간 길을 뒤따라 걷는 나의 발걸음은 이제 힘차다. 그건 내가 새로운 꿈과 의지로 걷기 때문이다. 내가 그를 뒤따라 걷는 것은 맞지만, 그를 맹목적으로 따라 가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의 뒤에서 걷는 단독자다. 그는 그냥 앞에서 걷는 사람일 뿐이다. 우리의 걸음의 순서는 차이가 있지만, 같은 단독자라는 점에서 그와 나는 같다. 단독자로서의 나의 행보는 그와 같으면서도 다르다. 그가 흘린 열매를 먹지만, 그건 그의 열매이자 나의 열매가 된다. 아니 내가 먹는 순간만큼은 나의 열매다. 그의 추억도 나의 추억이 된다. 그의 이소룡은 나의 이소룡이 되고, 그의 문희는 나의 문희가 되고, 그의 찰리 파커는 나의 찰리 파커가 된다. 하지만 그건 동일한 반복이 아니라 차이가 있는 반복이다. 아니, 그것들을 겪어 보지 않은 나에게 그것은 아직 오지 않는 기대와 미지의 사건으로서의 반복이다. 겪지 않았지만 겪었고, 겪을 것으로서 예상되지만 겪은 반복. 그래서 그건 언제나 새로울 것이다.

 

 

 

 

다시 하나의 문장을 적어본다. ‘추억은 미래보다 새롭다’라고 적은 이의 추억을 경험한 나에게, 그의 추억은 추억 그 자체로서 새롭고, 지나갈 추억으로서 새롭고, 다가올 추억으로서 새롭고, 지나가서 되돌아볼 추억으로서 새롭다고. 그건 유하의 문장이 진짜 나의 문장이 되었다는 의미다. 그리고 나는 그 문장 옆에 덧붙일 것이다. 독서는 추억보다 새롭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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