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창비시선 344
김선우 지음 / 창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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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무한한 혁명에게-김선우

저는 아직 시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아닌가 봅니다. 읽어도 잘 이해가 안 되거든요. 읽고 또 읽어도 이해가 안 된다는 건 원래부터 시를 읽을 수 없는 사람이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시가 저랑 안 맞아서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몰라도 시를 읽는 걸 좋아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시가 몰라서 재미있고, 낯설어서 재미있고, 이해 못해서 재미있고(뭔가 말이 안 되는 소리군요.^^;;), 가끔 이해되면 더욱 재미있고, 나의 마음을 울리는 표현이나 단어가 나오면 너무 좋고, 그 외의 이런저런 이유들로 시를 읽는 걸 좋아합니다. 주저리주저리 여러 이유를 말했지만 무엇보다 시를 읽다 보니 읽는 걸 좋아하게 됐다는 게 가장 정확한 이유인 것 같습니다. 잘 안 읽혀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읽다보니 시를 읽게 됐고, 이후로는 운명이려니 생각하며 시를 지금까지도 읽고 있는 것이죠. 수능시험 치고 나서 ‘이제는 시와는 절교다’고 외친 나같은 인간이 어느 순간 시를 읽고 있다는 사실이 운명이 아니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운명으로서 시 읽기라는 내 삶의 운명의 여정에 또 하나의 시집을 더해 봅니다. 운명처럼 다가온 김선우 시인의 시집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책 제목을 보는 순간 너무 좋았습니다.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라니, 캬~ 너무 멋지지 않나요? 시인은 시인 체게바라가 되고 싶었던 걸까요? 이런 쓰잘데기없는 낭만적이고, 호르몬 과다 분비 남학생 같은 생각을 하며 시집을 펴들었는데... 펴들었는데... 분명히 글을 보고, 단어를 보고, 문장을 보고, 시집을 본 건 맞는데... 근데 왜 읽어도 읽어도 이해가 안 되는 걸까요? 분명히 한국말이고, 한글이고, 내가 지금까지 평생토록 써온 말이고, 평생 읽어온 글인데, 읽어도 왜 모르는 걸까요? 더 재미있는 사실은 모르겠고, 이해하지도 못하고, 굉장히 낯설었는데 다 읽고 나서는 내 뇌가 ‘좋았다’고 저 자신에게 속삭이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엥? 이해도 못하고, 무슨 말인지도 몰랐는데 좋았다고? 이거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인데...(왜 이 시집과 관련된 일들은 온통 이해 못할 일 투성이일까요?^^;;) 아무리 이해가 안 되는 일이라도, 분명한 건 내 뇌가 좋다고 얘기했다는 점입니다. 결론적으로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는 저에게 좋은 시집이었습니다.

 

 

음, 이걸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읽고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좋았다’라는 저 자신의 상황을 표현할 말을 쉽게 찾을 수 없네요. 그래도 이왕 이렇게 글을 썼으니 이 이해 못할 상황을 한번 저 자신의 생각을 담아 표현해볼게요. 전체적으로 봤을 때 저는 이 시집을 이해하지 못한 게 확실합니다. 시인이 자신만의 감수성과 감정과 시각과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떠올린 것들을 자신만의 언어적 정련 작업을 거쳐 만들어낸 시들을 저는 전체적인 틀 속에서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그런데 시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정신의 산물을 전체적인 틀로서 파악하는 게 가능할 일일까요?) 하지만 저와 마주친 시의 일부분이, 반짝반짝 빛나는 시의 언어들이, 표현들이 저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더군요.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그 시의 일부분들이 내 머리와 가슴 속으로 파고 들어와서 자리를 차지하고는 저를 뒤흔들었습니다. 그건 마치 사랑과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사랑을 할 때, 우리는 왜 사랑을 하는지 정확하게 얘기하지 못합니다. 사랑에 ‘왜?’는 부질없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저 사람이 왜 좋은지?’ 정확하게 얘기하지 못합니다. 그저 저 사람이 있기에 사랑한 것이고, 사랑하기에 저 사람이 좋은 겁니다. 이 시를 읽고 나서의 저의 기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왜 좋은지 정확하게 말하지 못하겠지만 그 시가 저기 있어서, 그 시가 나의 눈앞에 있어서, 읽다보니 그 시가, 그 표현들이, 그 언어들이 좋아서 좋아하게 됐습니다. 말장난 같겠지만, 좋으니까 좋은 겁니다. 어쩌면 사랑이라고도 부를 수도 있겠네요.

 

 

아, 맞습니다. 저는 시인이 쓴 시와 사랑에 빠졌습니다.(시인과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닙니다. 이걸 유의해주세요.^^) 세상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소외되고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아픔과 고통과 슬픔과 소중함을 보이게 하고, 들리게 하고, 느끼게 하는 시인의 시를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니까 그것들이 나의 일처럼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더군요. 그리고 그건 시인의 말을 따르자면 혁명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피와 폭력의 냄새를 풍기는 폭력이 아니라, 사랑하면서 이루어지는 혁명. 보고 듣고 알고 느끼면서 이루어지는 연대와 공감과 애정과 관심의 집합체로서의 혁명. 폭력과 포연과 피가 없는 지극히 사적이지만 충분히 위력적인 혁명. 이 혁명은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혁명입니다. 사랑이면서 혁명이고, 혁명이면서 사랑입니다. 사랑-혁명. 혁명-사랑. 바꾸고 또 바꾸어도 같아지는 두 개의 단어가 보여주는 사랑과 혁명의 무한한 순환. 시가 보여주는 세계에 저는 매료되었고, 매료된 순간 저는 시가 좋고 사랑스러웠습니다. 물론 그 모든 건 혁명이고요.

 

 

하지만 이 혁명은 완벽히 이상적인 혁명의 구현은 아닙니다. 이 혁명은 아직 오지 않은, 어쩌면 제 살아생전에는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우리가 끊임없이 기다려야 할 혁명은 아닙니다. 이 혁명은 그 혁명을 기다리며 현재라는 순간순간에 우리가 지속적으로 만들어나가는 혁명입니다. 그러니 이 혁명은 무한히 계속되어야 하는 겁니다. 우리가, 우리에 속하는 나라는 각각의 개인이 현재 속에서 무한히 구현하는 것이 이 혁명입니다. 혁명을 사랑으로 바꾸면 현재 속에서 이루어지는 무한한 사랑의 몸부림이자 구현이 이 혁명의 실체입니다. 이런 충격적이고 아름다운 얘기를 저에게 이성이 아닌, 느낌을 통해서 깨닫게 만든 것이 이 시집의 힘이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이 시집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까지 제가 느낌과 감정으로서 알게 된 것을 나름대로 길게 풀어서 써봤습니다.(이게 정확한지는 저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저 말할 수 있는 것만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확실한 건 이 시집이 저에게 사랑으로서의 혁명, 혁명으로서의 사랑을 얘기해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일단 얘기 들었으니 멈출 수는 없습니다. 저는 지금 당장 이 혁명을, 사랑을 시작해야겠습니다. 무한한 혁명의 시작을 외치며 이제 이 글을 마무리 짓겠습니다. 지금부터 나와 좋은 관계를 맺을 사람들이여, 내 앞에서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줄 것들이여, 사랑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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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두나무 정류장 창비시선 338
박성우 지음 / 창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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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두나무 정류장-박성우

 

어란 말로 표현되어 말을 듣는 상대방에게 가닿는 순간 다른 무엇이 되는 것 같습니다. 화자의 의도가 어떻든간에, 말은 청자에게 가서 원래의 말과는 다른 것이 되는 것이죠. 이건 말을 한 인물과 말을 듣는 인물이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입니다. 사실 인간은 완벽한 의미의 의사소통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고 서로 간에 믿으며 말을 할뿐이죠. 서로 간에 소통이 되는 언어의 사용과 의사표현의 유사성,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성이라는 틀이 우리로 하여금 완벽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착각을 만드는 겁니다. 이 착각이 있기 때문에 화자의 말이, 청자에게 다른 형태로 가닿음에도 불구하도 인간들은 서로가 완벽하게 소통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죠. 착각 없이는 인간의 의사소통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의사소통을 가장한, 착각에 의거한 의사소통을 하고 있습니다.

 

의사소통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뜻이 서로 통함.

글에서도 이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글을 쓰는 작가가 언어를 글이라는 형태로 표현하여 독자 앞에 내놓은 순간, 작가의 글은 독자에게 가닿아 원래와는 다른 무엇이 됩니다. 서로 간에 직접적으로 주고받는 직접적 관계성에 근거한 말의 소통과 달리, 글은 표현양식의 특성상 서로 간에 직접적으로 주고받는 직접적 관계성이 아니라 간접적 관계성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말보다도 더욱 오해와 착각은 커지게 됩니다. 작가가 쓴 글을 작가가 직접적으로 독자에게 전할 수는 없고, 어떤 특정한 매체를 통할 수밖에 없어서 발생하는 이 오해와 착각은, 글을 읽는 독자 자신의 존재 조건에 의해서 발생합니다. 독자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고, 독자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으며, 독자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에 따라서 독자가 글을 읽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달라진다는 거죠.

 

문학

사상이나 감정을 상상의 힘을 빌려 언어로 표현한 예술. 또는 그 작품. 시, 소설, 희곡, 수필, 평론 등을 이룬다.

글 중에서도 문학이라는 글쓰기 양식, 그 문학 중에서도 ‘시’라는 장르는 특히나 더욱 이 오해와 착각이 큰 편입니다. 글을 쓰는 작가 자신이 바라본 세상과 인간의 삶을 표현하는 문학 장르의 특유의 정의를 공유하면서도, 언어에 더욱 더 천착한다는 특성을 가진 ‘시’는 언어를 가다듬고 정련하여 자신만의 언어로서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시인은 공통된 의사소통의 구조를 가진 인간들 사이에서, 자신만의 언어적 틀을 만들어서 그걸로 다시 인간들과 의사소통을 해야 하는 존재인 겁니다. 시인은 특정한 공동체의 보편적인 언어적 틀 속에서 자기 자신만의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언어적 틀로서의 시를 써내고(물론 이것도 완벽하게 특정 공동체의 언어적 틀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이걸 다시 특정한 공동체의 보편적인 언어적 틀 속에 돌려보내 시를 읽는 독자와 소통하게 만듭니다. 시인은 필연적으로 이중의 작업을 거칠 수밖에 없죠. 그런데 고독하고 외롭기 그지없는 첫 번째 작업과 달리 두 번째 작업은 시인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두 번째 작업은 첫 번째 작업의 결과로 탄생한 시를 우연히 만나서 읽게 된 독자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시인에 의해서 탄생한 시는 독자라는 새로운 존재를 만나서 제2의 탄생을 맞게 되는 거죠.

 

 

정서나 사상 따위를 운율을 지닌 함축적 언어로 표현한 문학의 한 갈래.

어떤 시라도 제2의 탄생이라는 운명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시인의 주관적 언어 속에서 탄생한 시가 독자를 만나는 순간 독자에 의해 변형되어 받아들여지고 삶 속에 스며들기에 발생하는 제2의 탄생은 시가 맞이하는 행복한 운명입니다. 그런데 현대 시사는 이 제2의 탄생을 조금 기묘한 형태로 만듭니다. 과거의 시들이 보편성에서 충분히 받아들여지는 맥락 속에서 존재했기에, 제2의 탄생은 보편성에 근거한 부드러운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현대로 오면 올수록 시들이 보편성에서 점점 더 일탈해서 개별성에 천착한 나머지 제2의 탄생을 힘겹고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현대 시를 읽는 독자에게 제2의 탄생은 지극히 이질감이 느껴지는 현대시라는 정신적 실체를, 자신의 지성과 사고로 받아들이는 지난하고 어려운 과정이 된 것입니다. 현대 시를 읽는 독자에게 제2의 탄생은 지적인 고통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진짜 탄생에 가까워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생명의 탄생은 고통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법이니까요.

 

 

<자두나무 정류장>은 현대 시의 흐름과는 조금 동떨어진 느낌입니다. 제가 이 시를 받아들인 과정에서 벌어진 ‘제2의 탄생’은 전혀 고통스럽지 않았거든요. 아니, 오히려 그건 따스했습니다. 시인의 시는 따스하게 저를 감싸안아주며 삶에 스며들어 제 가슴과 온 몸에 온기를 전해주더군요. 한국 서정시의 맥을 잇는 시인이라는 평가답게 그의 서정시는 진짜 한국스러운 온기로 가득했습니다. 따스한 사랑이 스며든 어머니의 밥 같은, 언제라도 부르면 옆에서 달려 나와 같이 놀아주던 이웃의 친구 같은, 함께 라는 말의 의미를 보여주던 이웃사촌의 모습 같은, 나 자신의 작은 우주로서 나를 품어주던 나 자신의 기억과 삶의 근원이 되는 과거의 동네 같은. 이 시들은 지성과 사고 이전의 근원적인 저 자신의 감정으로 파고들더군요. 재미있는 사실은 이런 감정의 파고들어옴이 이룩한 정서적 교류가 보여주는 정서적 역동성의 힘이 지적인 교류를 했을 때보다 더욱 더 강력하게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는 사실입니다.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들이 주지못한 정서적 폭발력을 이 시들이 저에게 주었다는 말입니다. 이걸 실험적이고 지적인 시들이 전해주는 차가운 정서적 폭발과는 다른 의미로 뜨거운 정서적 폭발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저도 한국인이라서 그런지 한국인의 내밀한 정서를 뒤흔드는 이런 정서적 역동성의 힘이 너무 좋더군요.^^ 그런데 이건 과거 회귀가 아닌 것 같아요. 차갑고 어지러우며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 시들이 많기 때문에 오히려 이건 과거 회귀가 아니라 또다른 미래의 모습처럼 여겨지더군요. 시인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로 향하는 그 길을 묵묵히 걷고 있는 것입니다. 저도 그 길을 따라가며 걷고 싶습니다. 사는 게 힘들고 여기저기서 외치는 ‘힐링’보다는 이런 따스한 온기가 진짜 치유가 되거든요. 그 이유 때문에 저는 시인을 따라 걷다가 자두나무 정류장에 가서 언제 다가올지 모를 ‘따스함’이라는 버스를 함께 기다려보렵니다. 과거가 아닌 미래로 향하는 그 버스를.

 

그래, 우리 몸엔 세 개의 바닥이 있지

손바닥과 혓바닥과 발바닥,

이 세 바닥을 죄 보여주고 감쌀 수 있다면

그건 사랑이겠지,

언젠가 바닥을 쳐도 좋을 사랑이겠지

-‘바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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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시선 - 당대편 107 중국시인총서(문이재) 107
김민나 엮음 / 문이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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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시선-이하

 

아름다움은 하나의 뜻으로만 존재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아름다움이라는 말은 쉽게 정의되는 개념일까요? 저는 이 질문에 대해 ‘아름다움은 쉽게 정의되지 않는다’고 대답하렵니다. 백치미가 있으면 지성미가 있고, 퇴폐미와 관능미가 있다면 순수한 아름다움이 있듯이, 세상에는 수 없이 많은 아름다움이 서로와 서로의 존재 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으니까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느끼는 아름다움이란 때로는 비슷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각자마다 다른 것처럼. 이건 아름다움이 인간 모두에게 공통적일수도 있지만, 각자 개개인마다 다를 수도 있다는 말일 겁니다. 동시에 이건 아름다움이란 세상에서 일어나는 각각의 상황 속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름다움에도 보편적인 공통성과 개별적인 편재성이 공존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아름다움은 쉽게 정의내릴 수도 없고, 쉽게 정의해서는 안됩니다. 만약에 누군가가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이야’라고 외치면서 아름다움의 정의를 못박아 버리고 있다면 그건 일종의 실수이자 오만일 겁니다. 하지만 인간은 실수를 반복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존재라서 계속 아름다움에 대한 자신만의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아름다움에 대한 정의를 내리려는 시도들이 인간의 삶을 아름답고 풍성하게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아름다움을 정의한다’는 불가능에 가닿으려는 지속적인 시도가 그 시도 자체가 품고 있는 아름다움과 무한한 가능성 때문에 우리들의 삶을 아름답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전제가 하나 있습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정의 내리기를 넘어서서 자신이 만든 아름다움의 정의만이 옳다는 생각을 누군가가 하고 있다면 그건 삶을 아름답게 하지 않습니다. 그건 아름다움의 영역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가장한 폭력의 영역이니까요. 혹시라도 다음에 이에 대해 얘기할 기회가 있다면 애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글에서 거기까지 얘기하려면 너무 복잡하니까요.^^;;)

 

그렇게 본다면 시인이란 지독히도 어리석은 존재입니다. 자신만의 언어로 세상의 아름다움을 지속적으로 표현하며,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나가는 존재니까요. 시를 쓴다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도 모르게 ‘아름다움을 정의한다’는 불가능한 행위를 지속적으로 해나가는 존재니까요. 그런데 앞에서 얘기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 어리석음이, 이 불가능에 가닿으려는 무모한 시도가 시인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쉽게 정의내릴 수 없기 때문에 아예 아름다움을 정의내리지 않고 아름다움을 표현하지 않는다면 세상이 얼마나 삭막하고 어두울까를 생각해본다면 이 시인의 어리석음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지 깨달을 수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시인은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살찌우는 존재인 겁니다.

 

중국문학사에도 이처럼 어리석은 숙명을 안고 살아가는 시인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은 숙명으로 중국 문학사를 아름답게 빛내며 중국인들의 삶을 풍요롭게 했습니다. 그 중에 이하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이제서야 겨우 이하 얘기를 하게 되네요.^^;;) 그는 중국문학사에서 그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자신만의 독특한 시세계를 구축했던 인물로서, 17세에 이미 동시대 대문호 한유의 인정을 받으면서 이름을 날리지만 그것 때문에 경쟁하는 이들에게 미움받고 그들의 계략에 의해 과거를 치르지도 못하고 떨어져버렸고, 그때의 좌절과 울분과 슬픔을 시를 쓰며 달래다가 27세에 요절한 천재시인입니다. 죽을 당시에는 시인으로서 큰 명성을 얻지는 못했지만 후대에 그의 독창적인 시세계가 알려져 중국문학사의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각광받게 되죠. 앞에서 간략하게 적은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알겠지만, 이하는 시를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현실의 울분과 슬픔을 달래는 도구로서 시를 썼고, 그 외의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때도 시를 썼는데, 쓰고 보니 시를 쓰는 게 삶이 되고, 삶이 되다 보니 계속해서 시를 쓸 수밖에 없었던 거죠. 이 시 쓰기의 무한 연쇄 고리에 갇혀서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운명을 살았던 이가 이하라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의 삵을 구속했던 시 쓰기의 무한 연쇄 고리는 그라는 인물을 중국문학사에 빛나는 시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건 자기 자신과 자신의 삶을 위해서 시를 썼다는 개별적 진실이 중국문학사에 다시 없는 독창적인 시 세계를 만들고 그것이 중국문학사에 돋보이게 되었다는 보편성과 만나서 빚어진 하나의 사건입니다. 이하는 자기가 할 수밖에 없는 일을 하고 자신의 삶을 산 것인데 그게 동시대를 뛰어넘은 하나의 사건이 된 거죠. 그러니 이하에게 시를 쓰는 시인으로서의 삶은 필연적인 것이자 운명적인 것으로서 자신이 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필연적이자 운명적인 삶의 동력으로서의 시 쓰기. 이하의 앞에 놓인 시인으로서의 운명은 그를 아름다운 시인으로 만들고, 중국문학을 아름답게 합니다.

 

이쯤 했으면 시인 이하에 대해서 어느 정도 얘기한 것 같구요, 이제는 이하의 시에 대해서 얘기해보겠습니다. (아, 아직도 글이 끝나지 않아 글을 쓰고 있는 저도 당혹스럽군요. 이것도 운명인 걸까요? ^^;;;) 이하는 중국문학사의 시인 중에 어느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귀신들에 대한 시를 써서 ‘귀재’라고 불립니다. 그는 마치 귀신이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귀신들의 모습을 그리면서도 그것을 아름답게 형상화하는 오묘한 경지를 구사하는데요, 이건 신선세계에 대한 동경과 세상을 벗어나고픈 초월적인 욕망에 대한 시들이 넘쳐나는데도 불구하고 귀신에 대한 시는 없었던 중국문학사의 센세이셔널한 일대 사건입니다. 거기에 귀신을 위시한 자신의 상상력을 생생하게 구사해내는 언어 능력과 강렬한 색채 감각, 누구도 쓰지 않는 독창적인 어휘 구사를 더하면 왜 이하가 중국문학사에서 유일한 시인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삶을 위한 시를 쓰면서 오직 자신만이 쓸 수 있는 시를 쓴 겁니다. 삶의 각인이 길이길이 남을 역사와 문학의 각인이 된 셈이죠.

 

저 자신은 이하의 시를 보며 귀기스러운 아름다움을 느꼈습니다. 귀기스러운 아름다움이라는 말이 이상한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분명히 귀신이 등장하고 분위가가 음산하고 귀기스러운데도 불구하고 아름다우니 귀기스러운 아름다움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거죠. 절대로 섞이지 않을 것 같은 귀기스러움과 아름다움이 섞여서 만들어내는 묘한 아름다움. 이하의 미학은 미국의 에드거 앨런 포와 비슷한 것 같지만, 그보다는 동양적인 문화에 가깝고, 더욱 더 아름다운 지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에드거 앨런 포는 이하보다 훨씬 더 끔직하고 공포스러우며 잔혹한 시와 소설을 썼습니다.) 귀신을 다룬 시 말고 다른 시들을 살펴봐도 이하의 시는 화려하며 현란합니다. 이건 화려하고 현란하기보다는 부드럽게 이미지를 통해서 정서를 드러내는 전통을 가진 중국 문학에서 이하가 얼마나 튀는 존재인지 보여줍니다.(물론 이건 중국문학에서 그렇다는 애기입니다. 서양의 시들과 비교하면 이하는 굉장히 얌전한 편입니다.) 시선이라고 불리며 중국문학사에서 예외적인 존재로 불리는 이백도 독창성에서는 이하의 시에서 밀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드디어 이 글의 끝이 다가왔습니다.(글을 쓰고 있는 제가 제일 기쁩니다.^^) 사실 저는 <이하 시선>을 읽으며 얼굴에 ‘씨익’하고 미소를 지었습니다. 이하라는 새로운 시인과 그의 색다른 시들을 만났다는 기쁨과 더불어 귀기스러운 아름다움이라는 유일무이한 아름다움의 세계를 만난 즐거움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나왔습니다. 이래서 독서를 계속하나 봅니다. 우연히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새로운 아름다움도 만날 수 있으니까요.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누가 말했지만 하늘 아래 모든 것들을 인간이 접하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인간은 어쩌면 계속해서 새로운 것들을, 새로운 아름다움을 만날 수도 있을 겁니다. 인간 존재의 한계, 인간 경험과 인식과 지각의 한계가 계속해서 새로움과의 조우를 초래하는 거죠. 그래서 저는 이하의 시를 만난 것처럼 또다른 아름다움을 찾아서 계속 독서를 해야겠습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만날 수 없고, 아름다움을 정의 내리는 것이 불가능한 걸 알지만 한번 그것에 빠져버렸으니 어쩔 수 없는 거죠. 시인들이 계속해서 불가능에 도전하며 시를 쓰는 것처럼 저도 그 어리석은 운명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게 불가능하다고 해도 아름다움에 빠진 자들에게는 어쩔 수밖에 없는 일이죠. 그럼 이제 다시 새로운 아름다움을 찾아서 떠나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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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응물시선 - 당대편 106 중국시인총서(문이재) 106
권호종 지음 / 문이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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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응물 시선-위응물

 

노자는 <도덕경>에서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을 씁니다. 이것은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며, 모든 것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으며 항상 낮은 데로 임하는 물의 덕(德)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위응물의 시들을 읽으며 이 말이 떠오르더군요. 시가 인위적이거나 화려하거나 날카롭거나 하지 않고 지극히 자연스러웠기 때문일 겁니다. 사물을 표현할 때도, 인간의 모습을 그리거나 삶을 형상화할 때도,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드러낼 때도 위응물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담담한 언어로서 시를 썼습니다. 마치 원래부터 그러했다는 듯이, 자연의 이치로서 그렇게 되었다는 듯이.

 

그의 시는 흘러가는 물이 자연과 인간의 삶을 흘러가서 시인의 붓끝으로 스며들어 그것이 다시 한편의 시가 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제가 그의 시를 읽다가 시 속에 스며있던 물이 제 마음으로 흘러드는 것을 느꼈거든요. 어쩌면 그건 저의 착각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착각을 느끼게 할 정도로 위응물의 시는 자연스러웠고 부드러웠습니다. 그건 세상을 초월한 신선 같은 이백의 시들도, 민중의 고단하고 슬픈 삶을 표현한 두보의 시들도, 세상을 벗어난 은둔자의 정서를 드러낸 왕유의 시들도, 요절했지만 자신만의 독창적이고 귀기로운 세계를 창조해서 화려하게 표현했던 이하의 시들도, 미치지 못한 위응물 자신만의 독창적인 경지였습니다. 안사의 난 이후로 혼란스럽기 그지없던 중당 시기의 삶을 살며 현실을 벗어나고픈 욕망과 현실적인 욕망 사이에서 흔들렸던 위응물은 자신의 그런 욕망을 그저 덤덤하게 시로서 그려나갈 뿐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현실을 벗어나고픈 욕망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지속적으로 관직에 나갔고, 그 때문에 현실의 욕망과 현실을 벗어나고픈 욕망 사이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는 보편적인 인간의 욕망을 구현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평범한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현실적인 욕망과 현실을 벗어나고픈 욕망 사이의 갈등을 그 자신이 자연스럽게 가질 수밖에 없었기에 그 자신의 시가 자연스러움을 획득했다는 말입니다.

 

세상을 벗어나고 싶을 때는 벗어나고 싶음을 자연스럽게 그리고, 자신의 정서와 느낌을 표현하고 싶을 때에는 또 그때의 상황에 맞춰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현실을 살면서 보이는 현실의 모순과 잘못을 비판하고 싶을 때에는 또 그에 맞게 표현하는 것. 이것이 위응물 시의 자연스러움입니다. 언제 어떤 때라도 그는 능히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는 식으로, 그것이 지극히 자연스럽다는 식으로 시를 써내려 갑니다. 한쪽 발은 현실에 두고, 한쪽 발은 현실을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에 두고, 양발로 걸어갈 수밖에 없는 인간적인 자연스러움의 표출로서의 시. 이것이 위응물 시의 ‘자연스럽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일 겁니다. 그러니 그의 시가 물같다고 느껴질 수밖에요. 그의 시가 저의 자연스러운 욕망을 너무나 자연스럽고 능청스럽게 대리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죠.

 

이 시를 읽기 전에는 몰랐는데, 읽고 나서 보니 위응물의 시가 가끔 너무도 그리워질 것 같습니다. 마음 속의 자기 자신을 숨기고 살아가는 게 힘들고 고단할 때, 삶에 치여 나 자신의 자연스런 욕망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다가 그것이 생각날 때, 그의 시가 떠오를 것 같습니다. 그것은 그의 시가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나 자신의 자연스려운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 같다는 말이자 잃어버린 자연스러운 나 자신을 되찾게 해주는 시원한 물같다는 얘기입니다. 물처럼 그의 시를 가끔 마시며 저 자신을 되찾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은 좋습니다. 독서가 가져다주는 이런 행복은 하나의 독서행위가 가져다주는 행복이겠죠. 아니 어쩌면 그 행복은 오래 전에 살다간 사람이 미래의 사람들에게 남긴 ‘오래된 미래’로서의 선물일 수도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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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별을 먹자 - 일본 세계숨은시인선 4
나나오 사카키 지음, 한성례 옮김 / 문학의숲 / 2012년 10월
평점 :
품절


우리 별을 먹자 - 나나오 사카키

 

 

1.

순수하고 열정적인 시들을 좋아한다. 신선 같은 품격을 풍기며 아이 같은 동심의 세계와 이 세상을 넘어선 초월의 세계를 동시에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이백의 한시와, 순수한 열정과 세상과 인간에 대한 믿음으로 민주주의와 휴머니즘의 이상을 가열차게 노래하는 월트 휘트먼의 시와, 평범한 일상의 삶을 소재로 삼아 순수하고 아이같은 삶의 면모를 노래하는 프랑시스 잠의 시와, 극도의 불운하고 슬픈 삶을 살았지만 일상의 평범한 사물과 삶을 통해서 삶의 풍경을 슬프지만 즐겁게 만드는 힘을 간직한 고바야시 잇사의 하이쿠 같은.

 

 

이제 여기에 또 한명의 시인을 추가해야 겠다. 나나오 사카키. 우리 별을 먹자고 외쳤고, 죽을 때까지 전세계를 무소유로 돌아다니며 배낭 하나를 유품으로 남겼으며, 지구와 지구의 자연과 지구의 자연에서 살아가는 생명들을 너무도 사랑했기에 그 사랑을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인간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들과 그 생명들이 포함된 지구와 지구를 포함하는 모든 별들이 포함된 우주가 하나라는 사실을 절절히 깨달아서 그 하나됨을 삶으로서 표현했으며, 전쟁과 살육과 폭력과 환경 파괴로 얼룩진 현대 문명을 풍자하지 않고는 버티지 못해서 그 감정을 시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표출한, 시가 삶이 되고 삶이 시가 되는, 자유인이자 방랑자이자 무소유의 철학자이자 실천가이자 전 세계를 고향으로 삼은 유목민이자 자연인인 시인.

 

 

2.

그의 시를 읽었다. 정확하게 읽었다는 표현보다는 만났다는 표현이 옳겠다. 삶과 시가 하나가 되는 시인이 ‘걷기의 신’인 발바닥 따라서 걸어다니며 움직인 삶에서 흘러나온 것들을 노래라는 흔적으로 남겼고, 나는 거기에 운좋게 발을 내디뎠기 때문이다.

 

 

발을 내딛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것이 운명이라는 것을.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운명의 힘 앞에서 나는 무기력하게 무너져 내렸다. 내게 남은 것은 그의 시를 읽고, 그의 삶을 맛보고 느끼며, 그의 삶과 시에서 흘러나오는 에너지를 받아들이는 것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했다. 그와 같이 우리 별을 먹었고, 그와 같이 걸어다녔고, 그와 같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사고하고 상상했으며, 그와 같이 자연을 집이자 벗이자 연인으로 삼았으며, 그와 같이 자연의 아픔을 공감하며 아파했으며, 그와 같이 인간의 어리석음을 비웃고, 문명사회의 모순적인 면모를 풍자하고, 그와 같이 숲에 살며 자아와 자연의 부자가 되었고, 그와 같이 세상을 세상 그 자체로 느끼려 했다.

 

 

자연과 세상과의 하나됨이 불가능 현대라는 시대에 이런 경험은 그 자체가 기적이고 경이다. 아니, 그것은 선물이었다. 인간으로서의 삶은 끝났지만 자연에서의 삶은 지속되고 있는 한 시인이 후대에게 보낸 선물. 평가하거나 분석하려고만 하는 사람은 느낄 수 없는 마음과 마음, 삶과 삶을 교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마음과 삶의 선물.

 

 

3.

어느새 시인은 나에게 너가 되어 있었다. 불특정 다수의 타인이 아니라 내 곁에 서 있는, 나와 함께 하는 너. 당신이 아닌 ‘너’라는 의미 속에, 내가 시를 읽으며 느꼈던 행복과 즐거움과 사랑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서 외쳐본다. 너라는 존재가 된 시인이여, 살아줘서, 시를 남겨줘서, 그것을 내게 가닿게 해줘서 고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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