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베개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3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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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베개-나쓰메 소세키 

 

"이지만을 따지면 타인과 충돌한다. 타인에게만 마음을 쓰면 자신의 발목이 잡힌다. 자신의

의지만 주장하면 옹색해진다. 여하튼 인간 세상은 살기 힘들다. 살기 힘든 것이 심해지면 살

기 편한 곳으로 옮겨 가고 싶어진다. 어디로 옮겨 가든 살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시

태어나고 그림이 생겨난다. (...) 옮겨 갈 수도 없는 세상이 살기 힘들다면, 살기 힘든 곳을 어

느 정도 편하게 만들어 짧은 순간만이라도 짧은 목숨이 살기 좋게 해야 한다. (...) 

예술을 하는 모든 이는 인간 세상을 느긋하게 하고 사랑의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까닭에 소중

하다. 살기 힘든 세상에서 살기 힘들게 하는 근심을 없애고, 살기 힘든 세계를 눈앞에 묘사하

는 것이 시고 그림이다. 또는 음악이고 조각이다. 자세히 말하자면 묘사하지 않아도 좋다. 그

저 직접 보기만 하면 거기에서 시도 생기고 노래도 솟아난다."(p.15~16) 

 

<풀베개>의 첫부분은 이 소설이 나아가야 하는 방향을 명확하게 제시하면서 그 자체로 하나

의 굳건한 의미망을 형성하고, 책을 읽는 독자가 소설 속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뭔가 화려하거나 아름답거나 독특한 표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알기 쉬운 단어와 표현들로

문장들을 만들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부드럽게 접근해서 조근조근 얘기하며 마음 속에 스 

며들게 만드는 이 부분을 읽고 나니 소세키 소설의 진가를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첫부분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이 소설은 <풀베개> 이전의 두 소설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와 <도련

님>과 다르다. 앞의 두 소설들이 한 사회와 인간이 만나서 빚어내는 풍경을 그려나가는 익살극

이자 풍자극이해학극의 느낌에 가깝다면, <풀베개>는 소세키 소설이 '사회와 인간'에서 

간 그 자체에 대한 관심으 로 들어가는 관문에 위치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습과 행

동을 통해서 한 사회와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을 그려내던 작가 소세키는, <풀베

개>를 통해서 자신이 '인간' 그 자체로 들어가는 과정임을 알려준다. 그는 이 과정을 형상화하기

위해 '예술'이라는 주제를 선택하고 자신의 예술론과 미학적 관점을 담아, 동양의 예술적 관점이

라고 할 수 있는 '인정'과 서양의 예술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는 '비인정' 사이를 방황하는 한 화가

의 얘기인 <풀베개>를 써냈다. 이는 작가 개인의 예술가로서의 고뇌가 짙게 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소세키가 이 작품을 통해서 예술가로서의 기본적인 입장을 정립한 것일까?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작품의 마지막 부보면 분명 소세키가 '무언가'를 얻은 것은 분명

하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는 이 작품 보다는 그 뒤에 쓰여진 작품들을 서 알 수 있을 것

이다. 결론적으로 <풀베개>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소세키 소설의 미래와 이미 도래한 소세키

소설의 과거가 예술이라는 접점에서 만나 빚어진 소설적인 관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관문 자체

도 충분히 아름답고 빛나지만 아직 도래 하지 않을 미래도 무척 궁금해지는 현실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소세키의 그 다음 작품들을 읽는 것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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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2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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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나쓰메 소세키 

 

먼저 현암사판 <도련님>의 해설을 맡은 소설가 백가흠의 글 일부를 적어 보겠다. 

 

"도련님은 외롭다. 정직하기 때문에, 솔직하기 때문에, 관대하기 때문에, 순응하기 때문에

외롭다. 도련님은 세상에서 손해보고, 비난받고, 무시당하고, 빼앗기면서도 관대하다. 슬픈

일이면서도 망가진 세상에서 꼭 필요한 존재이기도 하다. 여전히 그의 소설 <도련님>이 유

효한 까닭은 백 년이 지났어도 그 방식이 촌스럽지 않다는 것, 세상이 변하고 변했지만, 그

안의 인간 본성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백가흠의 <도련님>에 대한 해석 모두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글에서 드러난 

<도련님>에 대한 견해만큼은 전적으로 동의한다. 도련님의 순진할 정도의 솔직함, 인간성,

순수함은 도련님 인생의 난관이 되어 그의 인생을 힘들게 만든다. 바로 이점, 우리가 흔히

미덕이라고 정의하는 덕목들이 한 사람의 인생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 이것이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학교의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학생들

에게 가르치고, 삶에서 이렇게 살라고 강요하는 덕목들이 실제 인생에서 쉽게 통용되지 않으

며, 그것만 믿고 거기에 따라 살아간다면 인생이 힘들어진다는 '윤리적 이상과 실제 현실과의

리'를 나쓰메 소세키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나쁜 것은 나쁘다고,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다고, 틀린 것은 틀리다고 말할 수 없는 세상, 그렇게 얘기하면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가고

배척하는 세상, '좋은 게 좋은거지.'하고 슬쩍 넘어가며 조용히 모르는 척 하고 살아가는 것을

권장하고 심지어 강요하기까지 하는 세상의 모습을 소세키는 순진할 정도로 순수한 도련님의

삶을 통해 해학적이고 풍자적으로 그려낸다.  

 

"세상 사람들은 나빠지는 일을 장려하고 있는 것 같다. 나빠지지 않으면 사회에서 성공하지

못한다고 믿고 있는 듯하다. 간혹 정직하고 순수한 사람들을 보면 도련님이라는 등 애송이

라는 등 트집을 잡아 경멸한다."(p.76) 

 

소세키가 그려낸 세상의 모습들이 어떻든 우리가 현실을 살아가고 있으며,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나이가 든다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소설처럼 고정된 세상에서 고정된 채로 시간의 흐름을 흘러다니는 것이 아닌, 현실에서 나이가 든다는 과정은 단순히 시간의 경과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이 사회에 적응해서 살아간다는 말이자, 솔직하기 는 능청스럽게 거짓말도 하고 위선도 떨게 만드는 능력이 성장하고,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는 쉬쉬하고 조용히 넘어가는 생활태도를 자연스럽게 몸에 익힌다는 사실과 다름없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시간이 쌓이고 쌓일수록 도련님처럼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때때로 위선적인 삶을 견딜 수 없을 순간이 찾아오기도 할 것이다. 살아간다는 것의 비애가 몸속에 차오르고 차올라서 견딜 수 없는 한계의 순간이 찾아왔을 때, 우연히 <도련님>을 펼칠수도 있다.  그때 해학적으로 그려진, 우리와 다른 도련님의 삶의 모습은 우리를 위로하고, 우리 몸속에 차오른 삶의 비애를 진정시켜 줄 것이다.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에 세상에 나와서 만들어진 <도련님>의 이 현실적인 유효성은, 도련님이 소설 속 세상에서는 무익했을 지라도 현실에서는 유익하다는 소설의 아이러니한 진실성을 보여준다. 그게 소설의 유용성 아닐까. 그것이 소세키가 바랐던 것이 아닐까.

 

"한 것은 한 것이고 안 한 것은 분명히 안 한 것이다."(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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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뒷세이아 - 그리스어 원전 번역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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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뒷세이아-호메로스 

 

트로이 전쟁은 끝났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살아남은 그리스의 영웅들 대부분은 고생을

겪으며 어렵게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전쟁이 아닌 일상으로서의 운명을 살아간다. 트로이

전쟁 내내 인간들의 세상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던 신들은, 과거만큼의 관여는 제하며 조용히

지내고 있다. 더 이상 전쟁의 법칙은 통하지 않는다. 지금 이 세계를 지배하는 건 일상의 법칙

이자 평범한 생활의 법칙이다. 여기에 치욕스럽게 살아남기 보다는 영광스럽게 죽기 원하는

영웅은 필요하지 않다. 필요한 건 죽기 보다는 살기 위해 힘쓰며 일상을 이루어나생활인들

이다. 여기서부터 <오뒷세이아>는 시작한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살아남았지만 유일하게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뒷세우스의 돌아가기 위한 몸부림으로부터.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영웅 오뒷세우스에게 아직 일상의 법칙은 적용되지 않는다. 그는

초라한 행색이지만 여전히 영웅이다. 영웅의 성향을 가진 그에게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

운명은, 자신의 영웅성을 실현시킬 절호의 기회이다. 호메로스는 이걸 놓치지 않았다. 그는

생활인이 되지 않은 영웅 오뒷세우스의 귀향 이야기를 몰락해가는 문학 장르인 서사시를

통해 들려준다. 영웅들의 이야기에는 아직도 서사시가 다른 어떤 문학 장르보다 적합하기 때문

이다. 하지만 오뒷세우스의 귀향 이야기는 <일리아스>와 다르다. 많은 영웅들이 등장

하고, 그들의 이야기가 마지막까지 이어지다가 결말에 미래의 영웅들의 활약상이 열려 있게

되는 <일리아스>와 달리, 오뒷세우스의 귀향 이야기에는 영웅도 한 명이고, 주도적으로 나서서

영웅을 돕은 신은 아네테 여신뿐이고, 영웅이 생활로 돌아가는 것이 결말로서 준비되어 있다.

아무리 영웅의 귀향를 미루어도 그가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결말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오뒷세우스가 돌아간 이후의 이야기가 현재까지 전해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생각해볼때,

<오뒷세이아>의 결말은 서사시라는 문학 장르가 그리스의 문화적 전서 사라진다는 사실을

예언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지막의 오뒷세우스가 자신의 영웅성의 표출을 포기하고 

자신이 복수를 저지른 이들의 가족들과 아테네 여신의 중재로 평화롭게 화해하는 장면은 신들도

잠잠해지고, 영웅들도 일상으로 돌아온 세계에서, 영웅들의 이야기를 노래하는 서사시라는 문학

장르가 사라지고 일상을 노래할 다른 문학 장르의 등장해야 함을 얘기한다. 그건 서사시라는

꿈이 깨졌다는 의미로 내게 다가왔다. 꿈이 깨진 걸 느낀 순간. 나도 일상으로 돌아가야 함을

깨달았다. 오뒷세우스라는 영웅과 함께한 백일몽의 끝에서, 오뒷세우스가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간 것처럼 나도 나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여기가 호메로스의 두 편의 서사시와

함께한 모험의 끝이라고 되뇌면서.

 

*고대 그리스에서 서사시의 몰락은 교훈시의 등장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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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뒷세이아, 모험과 귀향, 일상의 복원에 관한 서사시 리라이팅 클래식 13
강대진 지음 / 그린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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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뒷세이아,모험과 귀향,일상의 복원에 관한 서사시-강대진 

 

책을 읽는 것에도 흐름이 있다고 한다면, 한번 흐름에 흘려들어간 이들은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고 흐름에 쓸려갈 수밖에 없다. 나도 흐름에 휩쓸려 아이스퀼로스,소포클레스,에우리피데스

의 비극과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을 읽어 나갔고, 그것들을 다 읽자 <일리아스>까지 나아갔다.

멈추지 않는 흐름은 여기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나를 다시 <오뒷세이아>라는 영역으로 나가게

이끌고 있다. 그러나 <오뒷세이아>의 오뒷세우스가 자신의 집에 바로 돌아가지 못하고 여러 곳

을 헤매고 다닌 것처럼, 나의 독서의 흐름은 쉽사리 내가 <오뒷세이아>라는 목적지에 도달하게

용납하지 않고, 나로 하여금 <오뒷세이아,모험과 귀향,일상의 복원에 관한 서사시>라는 책의

영역을 모험하게 만들었다. 마치 바로 <오뒷세이아>를 읽는 건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헤매고

다닌 영웅 오뒷 세우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듯이. 

 

흐름에 이끌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오뒷세이아,모험과 귀향,일상의 복원에 관한 서사시>라는

책의 영역을 모험하기 시작한 나는, 세이렌처럼 사람을 홀리는 매력은 아니지만 학교의 딱딱한

수업 보다는 더 나를 매혹하는 책의 저자 강대진 씨의 말에 끌려다니며 이 세계를 누볐다. 이미

<일리아스,영웅들의 전장에서 싹튼 운명의 서사시>를 읽으며 그의 말투를 경험했기에, 부담감

느끼거나 홀리는 것 없이 저자가 쓴 해설과 <오뒷세이아>의 세계가 겹쳐진 <오뒷세이아,모험과

귀향,일상의 복원에 관한 서사시>의 영역을 순조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 결과 나는 <오뒷세

이아>가 치욕스럽게 살아있기 보다는 용감하게 싸우다 죽는 것을 원하는 영웅들의 세계이자 신들이 직접 인간의 전쟁에 관여하고 모순적인 행동을 저지르는 혼돈스러운 전쟁의  세계인 <일리아

스>의 세계와 다른, 죽기보다는 살기를 원하며 영웅보다는 평범한 일상을 유지하기 원하는 이들

의 세계이자 신들이 세상에 거의 관여하지 않고 윤리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 일상성과 생존

이 화두가 되는 세계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 세계에 더 이상 영웅들의 이야기인 서사시는

설자리가 없었다. 여기에서 더 변화한다면 그건 서사시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필연적

으로 <오뒷세이아>는 서사시라는 문학 장르가 사라져가며 내지르는 최후의 비명이 될 수밖에 없

었다. <오뒷세이아> 세이렌의 비명보다 더욱 처절하고 매혹적인 사멸해가는 한 문학 장르의

마지막 불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오뒷세이아>읽기를 미루어 둘 수는 없는 법. 나는 이제 해설서가 아닌 진짜 <오뒷세이아>의 세계로 나아간다. 오뒷세우스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간 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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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슬러 민음사 모던 클래식 64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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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슬러-코맥 매카시 

 

1. 

아마도 너는, 네가 <카운슬러>를 읽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너에게 코맥 매카시는 우울함과

어두움과 절망과 폭력과 죽음과 피와 미국적인 장광설이 난무하는 악몽 같은 소설을 쓰는

작가로서, 그의 소설을 몇 권 읽고 '기분 더러워지는 경험'을 하고 다시는 그의 작품을 읽지

않으리라는 다짐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는 그 다짐을 깨고 <카운슬러>를 읽었다.

여기에는 진짜 '운명'이라는 말만큼 적합한 단어가 없을 것이다. 이 운명은 너에게, 운명이

너의 마음 속에 남긴 잔상들을 기록하라는 압력을 가했다. 너는 거기에 굴복해서 이 글을

쓰게 됐다. 그런데 이 글은 운명의 강요로만 쓰여진 것은 아니다. 너는 이 글을 쓰면서 너에게

남겨진 '악몽'의 느낌을 덜어내려는 의도도 가지고 있다. 운명이 강요했든, 자기 자신의 의도

때문이든, 일단 글을 쓰게 됐으니 너는 더 이상 멈출 수 없다. 너는 글이라는 주사위를 던져야

한다. 지금 당장 시작하라. 

 

2. 

책을 읽은 것에 대해서. <카운슬러>는 <배철수의 음악 캠프>가 아니었다면 읽었을 리가 없는

책이다. <배철수의 음악 캠프>에서  흘러나온 이 책에 대한 배철수의 얘기는 나로 하여금 이

책에 대한 호기심을 품게 했다. 호기심을 품으니 어떤 식으로든 끝장을 보 싶었고, 그것이

<카운슬러>의 독서로 이어졌다. 읽고 나서, 떠올린 건 호기심이 항상 좋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호기심이 창조의 원천이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동시에 재앙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는 점을 생각해볼때, 나에게 이 책은 대한 호기심은 창조의 원천 보다는 재앙의 원천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제목에 대해서. 왜 제목이 <카운슬러>여야만 했을까? 내용은 카운슬링과 아무 상관이 없는데.

책에는 주인공으로 나오는 '변호사'의 의미를 담아서 책의 제목이 이렇게 정해졌다고 했는데,

그렇다고 한다면 조금 더 '변호사'에 가까운 제목을 쓰면 됐을 텐데. 그랬더라면 내가 읽지

않았을 텐데. 괜히 '카운슬러'라고 해가지고 호기심만 더 키웠다.  

 

책에 대해서. 코맥 매카시의 책을 읽을 때는 나는 일단 '기분 더러워질' 각오를 한다. 그 각오

없이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의 책이 읽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코맥 매카시의 

책을 읽을 때 기본적으로 거의 재미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는다. 약간의 기대가 있다면

'스타일이 달라졌을까?' 정도. 제목 때문에 더욱 스타일의 변화가 있지 않을까 했던 <카운슬러>

는 결국 '역시나'로 끝나버렸다. 책 가득 펼쳐진 죽음,살인,피,폭력,선과 악의 명확한 구분,

낭만과 온기라고는 한 조각도 찾아볼 수 없는 냉혹하고 가혹한 인간들과 세상,작가 특유의

장광설,지나치게 미국적인 스타일과 세계관까지, 어느 것 하나 나랑 맞는 것은 없었다. 정말

이렇게까지 나랑 맞지 않는 사람도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극단의 세계관을

구축하고 그 스타일을 유지하고 책을 써나는 것도 대단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다만 그가 구축한

문학적 세계가 나랑 전혀 맞지 않는다는 점이 비극일 뿐.  

 

책을 읽고 나서. 코맥 매카시의 책에 대해서는, 나의 기준에서는 '기대치'라는 말을 없애버려야

할 것 같다. 대신에 나는 그의 책에 대해서는 '실망치'라는 말을 쓰기로 결심했다. 코맥 매카시는

나를 언제나 실망시켜왔고, 최소한 그 점에 있어서는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러니

나는 언제나 나를 실망시키는, '실망치' 가득한 그의 책을 다시 읽고 싶은 생각이 없다. 이번에

는 배철수가 아무리 떠들어도, 전혀 읽을 생각이 없다. 그러나 세상의 운명이란 어떻게 될 것인지 알 수 없는 법이기에, 나는 코맥 매카시의 책을 절대로 읽을 리 없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벌써부터 재수없게 또다른 운명에 이끌려 코맥 매카시의 책을 읽을 생각을 하니 등골이

오싹하고, 소름이 끼친다. 하나의 책이 한 인간에게 이 정도까지의 영향을 끼칠 수 있다니...

이것도 놀라운 능력이라면 놀라운 능력이다. 어떻게 보면 나는 이 책을 통해 코맥 매카시에게

제대로 된 카운슬링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책을 읽을 때마다 오물 뒤집어 쓴 기분을

느꼈던 나를 배려해서, 그는 <카운슬러>라는 시나리오 책을 통해, 나를 카운슬링 해주며

'내 책 읽지마!'라는 진단을 내렸고, 나는 거기에 대해 '네' 라는 대답을 한 것이다.  

 

끝으로. 나의 판단 착오로 오물 한번 제대로 뒤집어 썼으니 그 오물을 씻어 내리기 위해 다른

책을 찾아 읽을 생각이다. 정말, 진심으로, 오물 뒤집어쓴 나에게는 코맥 매카시의 책이 아닌

다른 책이 필요하다.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그것 하나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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