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가는 길거리에 권력이 떨어져 있는 것이 언제인지를 알고, 그걸 집어 들 때가 언제인지를 아는 사람이에요.(5)


아렌트에게 정치철학이란 말은 마치 '둥근 사각형'과 같은 형용모순으로 간주된다. 절대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과, 다양성(아렌트는 이를 인간의 복수성이라 표현한다)을 존중하고 차이를 그 자체로서 다루어야 하는 정치는 서로 어울릴 수 없는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10)


문제는, 개인적인 문제는, 우리의 적들이 무슨 일을 했느냐가 아니라 우리 친구들이-어쨌든 아직은 테러의 압박이 가해지지 않은 상황에서-무슨 짓을 했느냐 하는 거였어요.(42)


세계는 정치를 위한 공간이에요.(59)


가우스 ...아렌트, 당신은 모든 이에게 영향을 주는 감각을, 즉 정치적인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감각을 현대가 축출해서 폐기했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당신은 현대사회의 특유한 현상으로 대중의 뿌리 상실과 고독, 그리고 단순노동과 소비의 과정에서 만족감을 찾아내는 인간 유형의 승리를 지적합니다. 이에 대해 질문이 두 개 있습니다. 우선 이런 종류의 철학적 지식은 사유 과정을 추동하는 개인적 경험에 어느 정도나 의존하나요?


아렌트 개인적 경험이 없이 가능한 사유 과정이 존재한다고는 믿지 않아요. 모든 사유는 뒤늦은 사유에요. 즉, 어떤 문제나 사건을 사후에 숙고하는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나는 현대 세계에 살고, 내 경험은 분명히 현대 세계 내부에서 현대 세계를 겪어서 얻은 거에요. 결국 이 문제는 논란의 여지가 없어요. 그리고 단순노동과 소비의 문제는 정말로 중요해요. 그 영역에서도 일종의 무세계성이 스스로를 규정한다는 이유에서요. 더 이상은 어느 누구도 세계가 어떻게 생겼는지에 관심을 갖지 않아요.

...

나는 지금은 세계를 훨씬 더 포괄적인 의미로 이해해요. 모든 게 공적 사건이 되는 공간으로, 사람이 살아가는 공간이자 남들에게 받아들여질 만한 모양새를 갖춰야 하는 공간으로요. 당연한 말이지만 그 세계에는 예술이 등장해요. 온갖 종류의 것들이 모습을 드러내요. ... 그 모든 게 이 공간에 속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인간은 노동하고 소비하는 동안에는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만 의지해요.

...

생물학적으로 의지하고,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죠. 그리고 그 영역에서 우리는 고독과 관련을 맺게 돼요. 노동하는 과정 중에 독특한 고독이 생겨나요. 지금 당장은 그에 관해 상세히 설명하지 못하겠네요. 그러다가는 논의가 지나치게 멀리 나가게 될 테니까요. 아무튼 이 고독의 특징은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는 상태가 된다는 거예요. 말하자면 진정으로 상호 관련된 여러 활동을 소비 행위가 대신하는 그런 상황이죠.(65~67)

 

인간성은 혼자 힘으로 절대 획득되지 않으며, 누군가 자신의 작업을 대중에게 바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인간성은 자신의 삶과 존재 자체를 '공공 영역으로 향하는 모험'에 바친 사람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70) 


말하기도 행위의 한 형태에요. 그게 하나의 모험이죠. 다른 모험으로는, 우리가 무슨 일인가를 시작하는 게 있어요. 우리는 인간관계의 네트워크에 우리 자신이라는 가닥을 엮어 넣어요. ...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요. 모험이 뜻하는 바가 그거예요. 요즘에 나는 이 모험은 사람들 사이에 신뢰가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고 말하곤 해요. 모든 사람이 가진 인간적인 것에 대한 신뢰-만들어내기는 힘들지만 꼭 필요한 신뢰-말이에요.(71)


아이히만을 살펴보면 실제로는 아무 범행 동기가 없었어요. 우리가 일상적으로 범행동기라고 이해할 만한 게 없었다는 거죠. 그는 나머지 사람들에게 동조하기를 원했어요. 그는 '우리'라고 말하고 싶어 했는데, '나머지 사람들에게 동조하기'와 '우리라고 말하고 싶어 하기'만으로도 역사상 가장 극악한 범죄가 자행되게 만들기에 충분했죠. 사실 히틀러 지지자들은 결국 이런 종류의 상황에 전형적인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 사람들은 타인의 지지가 없다면 무력해질 거예요.

...

내가 우선 말하고 싶은 것은, 남들에게 동조하는 것-많은 사람이 함께 행동하는 데 가고 싶어 하는 것-이 권력을 낳는다는 거예요. 혼자 있을 때는 당신이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늘 무력해요. 함께 행동하는 데서 유발되는 이런 권력의 느낌은 그 자체로는 절대로 그릇된 게 아니에요. 그건 인간이 느끼는 일반적인 감정이에요. 그렇다고 선한 감정도 아니에요. 그냥 중립적인 감정이에요. 그건 단순히 하나의 현상이라고 기술할 필요가 있는 보편적인 인간적 현상이에요.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극도의 쾌감이 느껴지죠.

...

그렇지만 행위에서 중요한 것은 남들과 함께 행동하기, 즉 함께 상황을 노의하기, 어떤 의사 결정에 도달하기, 책임을 받아들이기,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사유하기 등이 있는데, 이 모든 것이 기능하기에서는 제거돼요. 당신이 거기서 얻는 것은 그저 관성대로 굴러가는 것일 뿐이죠. 이런 단순한 기능에서 얻는 쾌감이, 이런 쾌감이 아이히만에게서 꽤나 눈에 잘 띄었어요. 그가 권력에서 특별한 쾌감을 얻었느냐고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는 전형적인 공무원이에요. 그런데 공무원은 공무원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일 때 정말이지 대단히 위험한 신사에요. 여기에서 이데올로기는 그다지 큰 역할을 수행하지 않겠다고 봐요.(7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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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의 방정식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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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의 방정식-미야베 미유키


찬사와 비난. 두 가지가 서로를 침범하지 않고 오롯이 존재했다. 우등생에게만 힘을 쏟는 교육자에게는 딱히 이상한 현상이 아니다.(87)


나와 비슷한 나이에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치고 선생님에게 폭력을 안 당해본 사람이 있을까. 폭력의 더하고 덜함, 폭력의 빈도수는 사람마다 다를 수는 있지만, 아마 폭력을 안 당해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뺨맞고, 걷어차이고, 얻어맞고, 폭언을 듣고. <음의 방정식>을 읽다보니 나의 학창시절 폭력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성적 때문에 아이들을 무시하는 문제적 교사 히노 다케시라는 인물을 보았기 때문이다.


선생도 인간이니, 학생이라는 살아 있는 인간을 상대하다보면 교육자의 얼굴 아래 본래 있던 인격이 드러나기도 하겠죠. 그것이 학생들의 공감을 불러오거나 반발을 초래할 테고요.(59)


우리 또래가 겪은 학창시절 폭력의 경험을 사회학적으로, 문화연구적으로, 정치학적으로, 경제학적으로 분석해서 나름의 이유를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부르디외가 말한 아비투스라든지,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에서 이야기한 사회구성체론이라든지, 급속한 근대화의 산물이라든지, 가부장적 사회와 군사문화의 영향이라든지, 불평등한 사회구조와 계급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든지 하면서. 그 어느 것이든 분명히 맞는 말이고,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음의 방정식>에서 미야베 미유키는 그 모든 것들 대신에 오직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학생과 인간의 관계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미야베 미유키는 기본적인 인간 관계가 어그러졌기에 문제가 발생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 우리가 우리인 이상은 소용없는 거죠. 히노 선생님에게 우리는 없으니만 못한 학생들이었어요."

...

음의 방정식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선생과 학생, 가르치는 쪽과 배우는 쪽, 이끄는 쪽과 따르는 쪽, 억압하는 쪽과 억압받는 쪽의 조합부터 잘못되었고, 그러니 어떤 숫자를 넣어도 마이너스 답만 나온다.(116~117)


어떤 숫자를 넣어도 플러스가 아닌 마이너스가 나오는 음의 방정식으로서의 인간 관계. 결코 좋은 관계를 만들 수 없는 소설 속 '음의 방정식'으로서의 인간 관계는, 오직 좋은 성적만을 원하고 그걸 이루지 못하면 무조건적으로 무시하는 담임 선생님과 그 억압 속에서 살아가는 학생들 사이에서 비롯된다. 무엇을 해도 인정받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자신들을 무시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담임 선생과의 인간 관계가 잘 되기는 힘들 것이다. 여기에 다른 무언가가 더해진다면 이제 걷잡을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할 것이다. <음의 방정식>은 이렇게 얽히고섥힌 인간 관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을 그리고 있다. 물론, 탐정 생활에 익숙해진 탐정 사부로와 <솔로몬의 위증>을 겪고 변호사가 된 후지노 료코가 파헤치는 사건의 전말은 단순하게 선생과 학생 사이의 인간 관계만의 문제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사건의 핵심에 선생과 학생간의 어그러진 인간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도 없다. 선생과 학생 간의 인간 관계가 제대로 잡혔다면 무언가 다른 일이 있었다고 해도 <음의 방정식>의 핵심적인 사건은 아마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선생이 학생들을 존중하고, 학생들도 선생들을 존중한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사건이라는 얘기이다. 선생과 학생이라는 권력 관계를 빼고 바라본 인간 대 인간의 관계가 원만하게 진행되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나도 거기에 동의한다. 읽으면서 재미도 느꼈다. 하나 아쉬운 점은, 미야베 미유키 특유의 사회파적인 느낌이 약하다는 점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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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11-05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사 일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감정 노동’이라고 생각해요. 학생들에게 올바른 모습을 보여주느라 ‘도덕’으로 무장하면서 학교에서 생활해야 하잖아요. 이걸 참지 못해서 학생들에게 간접적으로 분노를 표출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체벌입니다.

짜라투스트라 2016-11-05 16:41   좋아요 0 | URL
맞는 말입니다^^
 
말벌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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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덮인 산장이라는 클로즈드 서클에서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대신 한 남자가 홀로 말벌과 서바이벌 게임을 펼치는 소설. 마지막의 반전까지 기시 유스케답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쉬운 건 예전에 기시 유스케가 내게 줬던 놀라움을 느끼지 못했다는 점. 내가 기시 유스케에게 너무 익숙해진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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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까지 걸어온 구불구불한 길은 어둠 속으로 완전히 가라앉았다.

나는 지금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견디기 힘든 적막감과 의지할 곳 없는 외로움이 심장을 움켜쥐었다.(7)


이미 어느 누구도 아니게 된 나를, 음침한 어둠이 천천히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10)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것은 첫째 속재(세속의 일에 능통한 재주가 있는 사람), 지금의 경우는 세상 물정을 잘 알고 있느냐가 아니라 실천할 수 있는 지식이 있느냐, 벌의 습성이나 산장 안의 이용 가능한 도구에 대해 얼마나 정확히 알고 있느냐다.

...

마음을 편하게 가져라. 몸의 힘을 빼라. 벌이 나타나면 멈추어서 생각하지 말고 직감에 따라 행동하라.(66)


당황하지 마라. 상대를 자극하지 않고 신속히 이 자리를 떠나면 된다. 벌집 옆이 아니면 함부로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71)


인생이란 싸움의 연속이다. 싸움을 포기한 자는 그저 죽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102~103)


하나의 진형을 짜서 적에게 돌격하는 일벌들은 똑같은 유전자를 가진 복제품이 아니지만, 일심동체이자 분신 같은 존재이다.(123)


남을 떨어뜨리기 위해 깎아지른 절벽으로 유인하는 자는 자기 자신 역시 떨어질 운명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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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쓸모없기를 문학동네 시인선 84
김민정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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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쓸모없기를-김민정


시는 내가 못 쓸 때 시 같았다.

시는 내가 안 쓸 때 비로소 시 같았다.(5)


나는 시를 버렸다. 거의 6개월여동안. 그런데 다시 시집을 펼쳐읽으니 시가 내게로 왔다. 하나의 의미가 되어, 하나의 꽃이 되어, 하나의 몸짓이 되어. 내 의식에 도달하지 못하는 어렵고 난해한 시가 아니라, 내 의식에 밀려들어와서 자신이 생생히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주장하는 사람과 삶의 언어로서의 시로. '아름답지만 쓸모없는 의미'로서의 시로. 


비 오는 날 뜨거운 장판에 배 지질 때나 하는 생각


하자, 가 아니라

하면 할게, 라는 사람이

무조건 착할 것이라는 착각으로

우리는 오늘에 이르렀다(78)


김민정 시인의 시는 거침없이 내달린다. 외설과 예술, 경쾌함과 우울함, 비루함과 비루하지 않음, 현실과 가상, 시의 화자와 독자, '나'와 '너'의 경계를. 경쾌하고 거침없이 내딛는 시인의 시와 함께 걷다보니 어느순간 해방감과 더불어 웃음이 찾아오더라. 삶이 이렇게 가볍기도 하는 것이구나. 인간 존재가 무겁지만은 않구나라는 생각이 빚어내는 웃음. 웃음이 끝나고 나니 다시 시에 생각하게 된다. 과연 시란 무엇인가.


밤에 뜨는 여인들

...

4

여기

그녀가

있다

영정사진 속

아무도 아닌

동시에 어떤 것도

되려 한 적 없는

그 무엇으로

여기

그녀가

있다(47)

시를 6개월만에 읽다보니, 거침없이 내달리며 삶을 쏟아내는 김민정의 시를 읽으며 웃음을 터뜨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시란 무엇인가가 생각난다. 시란 무엇인가. 물론 시를 완벽하게 정의할 수는 없겠지만 내 나름대로 시를 정의해보는 것은 어떨까. 그런데 막상 정의해보려 하니 시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어쩌면 시는 알 수 없는 것, 정의할 수 없는 것 아닐까. 시를 시로서 정의하는 것은 오직 각각의 시밖에 없는 것 아닐까. 세상의 모든 시들이 자기 자신으로서 '시'를 정의하는 것 아닐까. 천개의 정의, 천개의 개념들. 무엇으로 개념화할 수록 그 개념화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으로서의 시. 이렇게 비겁한(^^;;) '시'에 대한 정의를 내리며 김민정의 시집을 덮었다. 현실로서의 시, 세속에 파묻힌 시, 난해하고 어려운 예술작품으로서의 시가 아닌 삶의 표현양상으로서의 시집의 매력을 되새기면서. 


근데 그녀는 했다


양망이라 쓰고 망양으로 읽기까지


메마르고 매도될 수밖에 없는 그것


사랑이라


오월의 바람이 있어 사랑은


사랑은 멀리 있어 슬픈 그것(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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