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메모

1.1950년대에 출간된 로버트 A. 하인라인의 SF고전

2.읽은 시기:2017년 1월4일~1월5일

3.1950년대 미국인들은 희망과 믿음과 확신을 간직하고 있었다. 경제는 계속 성장할 것이고, 과학과 기술도 계속 발전하여 인간들의 삶을 이상적으로 바꾸어줄 것이고, 개인이 열심히 한다면 자신의 꿈을 이루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이 신념은 1950년대 미국에서 나온 SF에도 반영되어 있다.  SF속 주인공들도 희망에 차서 우주여행과 시간여행을 하며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따른 이상의 실현이 가능하다는 비전을 구체화한다. 당연하게도 <우주복 있음,출장 가능>도 여기에 포함된다.

 

하지만 2017년은 어떠한가.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더 이상 1950년대 미국인들같은 희망과 믿음과 확신을 가지지 않는다.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여 인간들의 삶을 이상적으로 바꾸어줄 것이라는 생각은 쇠퇴해가고, 개인이 열심히 한다면 자신의 꿈을 이루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개인의 꿈에 대한 희망과 믿음과 확신은 사라져가고 있다. 희망과 믿음과 확신이 사라져가는 자리에는 대신 좌절감과 상실감과 분노가 가득차 있다. 2017년의 나는 지금과 같은 시대적 상황 속에서 <우주복 있음,출장 가능>에 가득한 희망과 믿음을 들여다보며 '상실된 낙원'을 보는 것 같은 묘한 감정을 느낀다. 이 책에 나오는 희망과 믿음이 다시 돌아올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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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봐. 나한테는 우주복이 있어.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말이지...(11)

 

킵, 네 인생은 네가 사는 거야.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20)

 

네가 원하는 게 뭔지 찾아서 그걸 해. 네가 원하지 않는 일을 너 자신에게 강요하지 마.(43~44)

오스카, 넌 아무 문제 없어. 너와 난 동료야. 함께 세상을 돌아다니자.(55)

 

믿기 힘들 정도로 넓디넓은 달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는 거칠고 눈부신 절벽들과 어두운 그림자와 까만 하늘, 그리고 끝도 없이 한 발, 한 발 내딛는 일밖에 없었다.(156)

 

우리는 당신네 경찰과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어요. 우리는 뒤뜰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어요. 난 우리 집 뒤뜰에 있었다고요! 이 벌레머리가 와서 우리에게 문제를 일으켰을 때 말이에요. 우리는 당신들을 해친 적이 없어요.(361)

 

'행운'은 꼼꼼하게 준비했을 때만 따라오는 거야. '불운'은 일을 대충 처리했을 때 따라오지.(384)

 

이 우주선에서는, 한 번 도약하면, 어떤 도약이든 상관없이, 돌아가는 지름길은 길게 돌아가는 거예요. 출발한 곳으로 돌아갈 때까지 똑바로 앞으로 가는 식이죠. 뭐, '똑바로'는 아니에요. 우주는 굽어 있으니까요. 그래도 가능한 한 똑바로이긴 하죠. 그러면 모든 게 제로로 돌아가요....그건 '거리'가 아니라 '상태'라는 의미에 더 가까웠어요. 저는 여행 했던 게 아니라 그냥 갔던 거였잖아요. 살펴볼 틈이 없어 그냥 휙휙 지나갔어요.(387~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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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메모

1.하루키의 작가론,문단론,문학론이 집대성된 에세이

2.읽은 기간:2017년 1월3일~1월4일

3.역시 하루키의 책은 읽기가 쉽다. 부담없이 휙휙 페이지가 넘어간다.

하지만 책의 가독성과는 달리, 내용은 분명히 무게감 있고, 의미가 있다. 

쉽게 읽히면서도 자신의 문학적인 '핵'을 전하는 느낌이랄까.

어쩌면 하루키는 소설은 소설적인 방식으로, 에세이나 여행기는

에세이나여행기의 방식으로 자신이 쌓아올린 문학적인 '핵'을 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 하루키 문학의 핵을 접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받아들여

자신만의 '무언가'를 만드는 건 독자 자신의 몫일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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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1-05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만의 ‘무언가‘는 리뷰가 될 수 있겠군요. ^^
 

 

나를 포함해 대부분의 작가는(대략 92퍼센트일거라고 나는 예상하는데) 그걸 실제로 입 밖에 내느냐 마느냐는 제쳐두고, '내가 하는 일, 내가 쓰는 글이 가장 올바르다. 특별한 예외를 제외하고 다른 작가들은 많든 적든 모두 틀려먹었다'고 생각하고 그러한 생각에 준하여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이런 자들과 친구나 이웃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극히 조심스럽게 표현해서, 그리 많지 않은 거 아닐까요.(10)

 

소설이라는 건 누가 뭐라고 하든 의심할 여지 없이 매우 폭이 넓은 표현 형태입니다. 그리고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그 폭넓음이야말로 소설이 가진 소박하고도 위대한 에너지의 원천의 중요한 일부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누구라도 쓸 수 있다'는 건 내가 보기에는 소설에게는 비방이 아니라 오히려 칭찬입니다.(15~16)

소설을 오래 지속적으로 써내는 것, 소설로 먹고사는 것, 소설가로서 살아남는 것, 이건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보통 사람은 일단 못할 짓, 이라고 말해버려도 무방할지 모릅니다. 거기에는 뭐랄까, '어떤 특별한 것'이 점점 필요해지기 때문입니다.(16)

 

소설가는 많은 경우, 자신의 의식 속에 있는 것을 '스토리'라는 형태로 치환해서 표현하려고 합니다. 원래 있었던 형태와 거기서 생겨난 새로운 형태 사이의 '낙차'를 통해서, 그 낙차의 다이너미즘을 사다리처럼 이용해서 뭔가를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상당히 멀리 에둘러 가는, 손이 많이 가는 작업입니다.(20)

 

소설을 쓴다는 것은 아무튼 효율성이 떨어지는 작업입니다. 이건 '이를테면'을 수없이 반복하는 작업니다. 하나의 개인적인 테마가 있다고 합시다. 소설가는 그것을 다른 문맥으로 치환합니다. '그건요, 이를테면 이러저러한 것이에요'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 치환 속에 불명료한 점, 애매모호한 부분이 있으면 다시 그것에 대해 '그건요, 이를테면 이러저러한 것이에요'라고 다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러한 '그건요, 이를테면 이러저러한 것이에요'가 끝도 없이 줄줄 이어집니다. 한없는 패러프레이즈의 연쇄지요. 꺼내도 꺼내도 안에서 좀 더 작은 인형이 나오는 러시아 인형 같은 것입니다.(23)

 

효율성 떨어지는 우회하기와 효율성 뛰어난 기민함이 앞면과 뒷면이 되어서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중층적으로 성립합니다. 그중 어느 쪽이 빠져도(혹은 압도적인 열세여도) 세계는 필시 일그러진 것이 되고 맙니다.(24)

 

아무리 거기에 올바른 슬로건이 있고 아름다운 메시지가 있어도 그 올바름이나 아름다움을 뒷받침해줄 만한 영혼의 힘, 모럴의 힘이 없다면 모든 것은 공허한 말의 나열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그때 몸으로 배운 것은, 그리고 지금도 확신하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말에는 확실한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힘은 올바른 것이 아니어서는 안 됩니다. 적어도 공정한 것이 아니어서는 안 됩니다. 말이 본래의 의미를 잃고 제멋대로 왜곡되어서는 안 됩니다.(40~41)

어차피 멋진 소설은 쓸 수 없어. 그렇다면, 소설이란 이런 것이다, 문학이란 이런 것이다, 라는 기성관념은 버리고 느낀 것, 머릿속에 떠오른 것을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써보면 되지 않을까(48)

 

언어가 가진 가능성을 생각나는 한 모든 방법으로 시험해보는 것은, 그 유효성의 폭을 가능한 한 넓혀가는 것은, 모든 작가에게 주어진 고유한 권리입니다.(52)

 

그들이 공통적으로 느꼈던 것은, 혹은 태도로서 표명하고자 했던 것은 아마도 '참된 작가에게는 문학상 따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아주 많다'라는 것이겠지요. 그 하나는, 자신이 의미 있는 것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실감이고, 또 하나는 그 의미를 정당하게 평가해주는 독자가- 그 수의 많고 적음은 제쳐두고-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실감입니다. 그 두 가지 확실한 실감만 있다면 작가에게 상이라는 건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것입니다.(72~73)

 

내가 진지하게 염려하는 것은 나 자신이 그 사람들을 향해 어떤 작품을 제공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뿐입니다.(77)

 

그것은 시간의 경과와 함께 그들의 그림이 오리지낼리티를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감각이 그 오리지낼리티에 동화하고 그것을 '레퍼런스'로서 자연스럽게 체내에 흡수했기 때문입니다.(94)

 

나는 일반론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감히 일반론을 말하게 해주신다면(죄송합니다), 일본에서는 그다지 보통이 아닌 것, 남들과 다른 것을 하면 수많은 네거티브한 반응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은 일단 틀림이 없겠지요? 일본이라는 나라가 좋든 나쁘든 조화를 중시하는(평지풍파를 일으키지 않는) 체질의 문화를 가졌다는 것도 있고, 문화의 일극 집중 경향이 강하다는 것도 있습니다. 말을 바꾸면, 프레임이 공고해지기 쉽고 권위가 그 힘을 휘두르기 쉬운 것입니다.(103)

 

나는 1960년대 말의 이른바 '반란의 시대'를 뚫고 나온 세대의 사람이라서 '체제에 말려들고 싶지 않다'는 의식은 나름대로 강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라고 할까, 그보다는 우선, 그래도 명색이 표현자의 말단으로서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자유롭고 싶었습니다. 내가 쓰고 싶은 소설을 내게 맞는 스케줄에 따라 내가 원하는 대로 쓰고 싶다. 그것이 작가인 내가 가져야 할 최저한의 자유라고 생각했습니다.(104~105)

 

오리지낼리티는 바로 그러한 자유로운 마음가짐을, 제약 없는 기쁨을, 많은 사람들에게 최대한 생생한 그대로 전하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욕구와 충동이 몰고온 결과적인 형체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109)

 

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만일 당신이 뭔가 자유롭게 표현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것보다 오히려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나 자신은 원래 어떤 것인가'를, 그런 본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게 좋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문제를 정면에서 곧이곧대로 파고들면 얘기는 불가피하게 무거워집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야기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자유로움은 멀어져가고 풋워크는 둔해집니다. 풋워크가 둔해지면 문장은 힘을 잃어버립니다. 힘이 없는 문장은 사람을- 혹은 자기 자신까지도- 끌어들일 수 없습니다.(110)

 

그에 비하면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나 자신'은 나비처럼 가벼워서 하늘하늘 자유롭습니다. 손바닥을 펼쳐 그 나비를 자유롭게 날려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문장도 쭉쭉 커나갑니다. 생각해보면, 굳이 자기표현 같은 것을 하지 않아도 사람은 보통으로, 당연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뭔가 표현하기를 원한다. 그런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자연수러운 문맥 속에서 우리는 의외로 자신의 본모습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릅니다.(110~111)

 

이것이 오리지낼리티의 정의로서는 가장 이해하기 쉬운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선하고, 에너지가 넘치고, 그리고 틀림없이 그 사람의 자신의 것인 어떤 것.'(113)

 

상상력이란 그야말로 맥락 없는 단편적인 기억의 조합을 말합니다.(125)

 

소설가란 예술가이기 이전에 자유인이어야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 때에 나 좋을 대로 하는 것, 그것이 나에게는 자유인의 정의입니다. 예술가가 되어서 세간의 시건을 의식하거나 부자유한 격식을 차리는 것보다 극히 평범한,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자유인이면 됩니다.(150~151)

 

어떤 장소가 됐든 인간이 소설을 쓰려고 하는 곳은 모두 다 밀실이고 이동식 서재입니다.(176~177)

 

소설가의 기본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말을 바꾸면 의식의 하부에 스스로 내려간다는 것입니다. 마음속 어두운 밑바닥으로 하강한다는 것입니다. 큼직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할수록 작가는 좀 더 깊은 곳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큼직한 빌딩을 지으려면 기초가 되는 지하부분도 깊숙이 파 들어가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치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할수록 그 지하의 어둠은 더욱더 무겁고 두툼해집니다.(188)

 

작가는 그 지하의 어둠 속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즉 소설에 필요한 양분-을 찾아내 손에 들고 의식의 상부 영역으로 되돌아옵니다. 그리고 그것을 형태와 의미를 가진 문장으로 전환해나갑니다. 그 어둠 속에는 때로는 위험한 것들이 가득합니다. 그곳에서 서식하는 것은 때때로 다양한 형상을 취하며 사람을 미혹시키려 합니다. 또한 표지판도 지도도 없습니다. 미로 같은 곳도 있습니다. 지하 동굴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자칫 방심하면 길을 잃고 헤매고 맙니다. 그대로 지상에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 어둠 속에는 집합적 무의식과 개인적 무의식 등이 뒤섞여 있습니다. 태고와 현대가 뒤섞여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해부하는 일 없이 그대로 들고 돌아오는데 어떤 경우에 그 패키지는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189)

 

자신의 내적인 혼돈을 마주하고 싶다면 입 꾹 다물고 자신의 의식 밑바닥에 혼자 내려가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직면해야 할 혼돈은, 정면으로 마주할 만한 가치가 있는 참된 혼돈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야말로 당신의 발밑에 깊숙이 잠복하고 있는 것입니다.(195)

 

어떤 일을 자신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면 아무래도 세계가 부글부글 끓어서 바짝 졸아듭니다. 온몸이 긴장하고 발걸음이 무거워져 자유롭게 움직이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시점에서 자신이 선 위치를 바라보게 되면, 바꿔 말해 나 자신이라는 존재를 뭔가 다른 체계에 맡길 수 있게 되면, 세계는 좀 더 입체성과 유연성을 갖기 시작합니다.(225~226)

 

나 자신을 분할하고 스토리 안에 던져 넣는 것을 통해 나라는 인간을 검증하고 나와 타자와의-혹은 세계와의-접점을 확인했던 것입니다.(246)

 

내가 말하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소설가는 소설을 창작하는 것과 동시에 소설에 의해 스스로 어떤 부분에서는 창작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253)

 

지금 현재진행형의 나 자신은 웬만해서 파악하기 어려워요.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나는 다양한 사이즈의 내 것이 아닌 구두에 발을 밀어 넣고, 그것으로 지금 이곳에 있는 나 자신을 종합적으로 검증해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마치 삼각법으로 위치를 측정하는 것처럼.(256)

 

아울러 거기에는 아마 '자기 치유'적인 의미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창작 행위에는 많든 적든 스스로를 보정하고자 하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을 상대화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지금 존재하는 것과는 다른 형식에 끼워 맞추는 것을 통해, 살아가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다양한 모습이나 뒤틀림, 일그러짐 등을 해소해나간다-혹은 승화해나간다-는 것입니다. 그게 잘되면 그런 작품을 독자와 공유한다는 것입니다.(260)

 

중요한 것, 교환 불가능한 것은 나와 그 사람이 이어져 있다, 라는 사실입니다. 어디서 어떤 상태로 이어져 있는지, 세세한 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참 저 아래쪽, 어두컴컴한 곳에서 나의 뿌리와 그 사람의 뿌리가 이어져 있다는 감촉입니다. 그것은 너무도 깊고 어두운 곳이라서 잠깐 내려가 상황을 살펴본다거나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야기라는 시스템을 통해 우리는 그것이 이어졌다고 감지합니다. 양분이 오고 간다고 실감합니다.(271~272)

 

스토리란 본래 현실에 대한 메타포로서 존재하는 것이고, 사람들은 변동하는 주변 현실의 시스템을 따라잡기 위해, 혹은 거기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자신의 내적인 장소에 앉혀야 할 새로운 스토리=새로운 메타포 시스템을 필요로 합니다. 그 두 가지 시스템(현실 사회의 시스템과 메타포 시스템)을 제대로 연결하는 것에 의해, 다시 말해 주관 세계와 객관 세계를 오고 가면서 상호 간에 제대로 적응하도록 하는 것에 의해, 사람들은 불확실한 현실을 겨우겨우 받아들이고 평정심을 유지해나갈 수 있습니다. 내 소설이 제공하는 스토리의 리얼리티는 그러한 적응의 톱니바퀴로서 우연히 글로벌한 기능을 수행했던 것이 아닌가-그런 느낌이 없잖아 있습니다.(305)

 

텍스트의 역할은 각각의 독자에게 저작되는데 있습니다. 독자는 그것을 원하는 대로 마음껏 풀어서 저작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만일 독자의 손에 건너가기 전에 저자에 의해 풀리고 저작된다면 텍스트로서의 의미나 유효성이 대폭적으로 손상됩니다.(320)

 

이야기=스토리라는 것은 인간의 영혼 밑바닥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 밑바닥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있기 때문에 더욱더 사람과 사람을 근간에서부터 서로 이어줍니다.(325~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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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메모
1.2017년도에 두번째로 읽은 책
2.읽은 기간:2017년 1월2일~1월3일
3.유쾌 상쾌 통쾌한 노인 갱스터(?)의 활약을 그린 모험소설.
그런데 읽다보면 씁쓸해지는 것은 왜일까?
복지천국이라는 스웨덴에서도 노인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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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1-04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 전체가 완벽하게 행복할 수 없습니다. 잘 사는 나라에도 우리처럼 걱정을 하는 사람이 있을 거고, 해결되지 못한 안 좋은 점이 있을 겁니다. ^^;;

짜라투스트라 2017-01-04 15:43   좋아요 0 | URL
네,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