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는 모임 시간을 착각하고 있었다. 오후 7시에 시작하는데 6시에 시작하는 걸로.
부랴부랴 집을 나서서 지하철을 타고 거의 다 도착할 즈음에야 그는 시간이 7시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허탈함보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시간이 더 남은만큼 더 여유로울 수 있을 것 같아서.

모임 장소에 들어가서 음식을 먹고 준비해둔 음악을 들었다. 음악속에서는 세상을 떠난 프레디 머큐리가 감성적인 목소리로 ‘엄마 내가 사람을 죽였어요.’라고 외치고 있었다. 자신을 낳아준 엄마에게 내가 사람을 죽였다고 외치는 자식의 심정은 어떠한 것일까? 그리고 그 자신의 고백을 들은 엄마의 심정은 어떨까? 결혼도 안하고 자식도 낳지 않은 내가 알 수 있는 감정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의 마음이 찢어지리라는 것 정도는 추측할 수 있었다.

음식 먹고 준비해둔 음악을 들었는데도 당연히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다. 하는 수 없어서 읽고 있던 책을 집어들었다. 현대에 생존한 철학자 중 가장 급진적인 회의주의자이자 근대의 인간중심적 시각을 가장 철저하게 비판하는 영국 철학자 존 그레이의 <꼭두각시의 영혼>. 책을 펼치자 존 그레이는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브루노 슐츠, 자코모 레오파르디, 에드거 앨런 포, 메리 셸리,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스타니스와프 렘, 필립 K. 딕, 스트루가츠키 형제, 디어도어 포이스 같은 작가들의 문학작품과 아즈텍 문명, 중세 유럽, 데카르트 같은 근대 사상가들, 20세기 미국과 이탈리아를 오가며 인간이 인간을 넘어선 존재가 될 수 있다거나 인간이 세상을 유토피아로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의 위험성을 다시한번 각인시키며 자유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 인간중심주의적 시각을 파괴시켜버린다. 흠, 역시 존 그레이의 책들은 나의 사유를 깨부수는 도끼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는군.

<꼭두각시의 영혼>을 읽다가 불안한 마음에 <침묵을 삼킨 소년>을 펼쳐서 훑어본다. 읽은지 상당한 시간이 지난 책인데도, 감당할 수 없는 정념의 파토스가 밀려온다.
“마음을 살해한 건 용서받는데 몸을 죽인 건 왜 안 되지?”
“마음이랑 몸이랑 어느 쪽을 죽인 게 더 나쁘냐고?”
“만약 두 번 다시 네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널 만질 수도 없게 된다면, 내가 얼마나 괴로울까... 병이나 사고로 네가 사라진대도 견딜 수가 없어. 하물며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면...”
“나는 유토만이 아니라, 유토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죽인 거네...”
“계속 생각해야지. 앞으로도 꾸준하게 계속. 그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풀어 주기 위해서 뭘 해야 할지, 무엇이 가능한지. 아빠도 같이 고민하겠지만, 아빠도 언젠가는 죽어. 엄마도 마찬가지야. 너 혼자 남더라도 계속 생각해야 해.”
‘요시나가가 일어서서 닫힌 문을 향해 걸어갔다.
이제 더 이상 널 혼자 내버려 두지 않아.‘
쉽게 읽히고 무언가 생각할 거리를 줄 수 있는 책이라고 판단해서 추천했는데, 사람들은 어떻게 읽었을까? 궁금함과 더불어 불안감이 나를 찾아왔다. ‘모든 건 사람들이 말하는 시간속에 들어있겠지’라는 생각으로 사람들을 기다리며 나는 시간을 떠나보내고 있었다.

2번 생략

3.
내 것이 되지 못한 경험은 완벽하게 체화할 수 없다. 하지만 무수하게 많은 간접경험들을 한다면 비록 그것을 완벽하게 체화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 근처에 가닿거나 어느 정도의 준비를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이것이 비록 책 읽는 자의 변명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나는이 말에 일만의 진실, 일말의 진리, 일말의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겪지 못했지만, 우리가 겪은 것처럼 경험을 하고, 공감을 하며, 자신의 감정의 파고를 만들 수 있다면 우리가 진짜 그런 일을 겪을 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이가 그런 일을 겪는다면 예전보다는 더 그들에게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우리가 이렇게 된다면 과거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된 것이 아닐까. 여기에 인문학 모임을 하는 의의가 있을 것이다. 지금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는 측면에서. 나는 2월 2주 인디고 수독 모임에 참여한 이들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인문학과 삶의 가능성을 엿보는 시간을 가졌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나 자신이 그랬기에. 부디 그들이 지속적으로 인문학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지며 좋은 삶, 좋은 앎을 위한 발걸음을 계속 할 수 있기를 기원하며 이 글을 마치겠다. 나와 함께하며 자신만의 좋은 말들을 내게 전해준 시간의 벗들에게 감사하다는 말도 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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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요네자와 호노부의 소시민 시리즈 두번째 작품
2.읽은 기간:2017년 1월5일~1월6일
3.
십대 시절. 누군가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결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무엇도 쉽게 하지 못하고, 공부라는 틀안에 갇힌채로 자기 내면의 욕구와 호르몬을 주체하지 못하는 그 시절이 지금보다 반드시 좋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기에. 그 시절에 대한 어떤 낭만성을 간직하고 있거나 그 시절로 돌아가면 자기 삶을 바꿀 수 있다는 주장은, 그 시절의 리얼리티를 망각한 채로 현재의 자기 상황을 과거에 낭만적으로 투영한 생각이 아닐까? 낭만적인 과거에 대한 투영은 진실한 그 시절의 모습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고전부' 시리즈와 '소시민' 시리즈를 쓰며 십대 시절에 대한 자신만의 리얼리티를 형상화한 요네자와 호노부라면 당당하게 십대 시절에 대한 낭만적 회고를 거부할 것이다. 그것은 현실이 아니다라면서.

'고전부' 시리즈나 '소시민' 시리즈의 주인공들은 십대다. 십대로서 그들은 불완전한 모습을 보이며 아직 자신만의 정체성을 형성하지 못한 채, 자신들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고전부' 시리즈 주인공들은 소설의 주요 무대인 학교에서. '소시민' 시리즈의 주인공들은 학교가 거의 나오지 않기에 자신들이 사는 도시에서. 그들은 십대 특유의 활력과 이상한 열정을 보여주며 십대 시절의 낭만을 부추기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현실이라면 가질 수밖에 없는 씁쓸합과 슬픔도 동시에 보여주며 작가 특유의 리얼리티를 형성한다. 활력과 열정, 씁쓸함과 슬픔, 좌절감이 얽히고 섥혀 만들어내는 삶의 리얼리티. 그 맛은 결코 달콤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 맛은 때로 씁쓸하며 슬픔을 맴돌게 한다. 우리는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의 십대를 되돌아 볼 수밖에 없다. 우리도 십대라는 한 시절을 거쳐 왔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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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금지하니까 가지 않는 것이 소시민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한다면 아직 멀었다. 진정한 소시민이라면 '규칙은 어기라고 있는 것이다!'하고 으스대며 축제의 밤거리에 뛰어들었다가 선생님이나 선도 위원의 모습을 보고 몰래 도중다니는 법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야간 노점 사이를 어슬렁거리고 있다.(10)

 

우리는 하루하루 평온하게 보내는 생활 태도를 몸에 익히길 갈망하고, 그것을 방해하는 일들을 완강히 회피하는 입장을 고수한다. 그리고 트러블 혹은 문제의 싹에서 빠르게 손을 떼기 위해 서로의 존재를 이용하는 것이다.(18)

 

세상에 이렇게 맛있을 수가!거품이 사르르 녹는 듯한 매끄러운 식감에 있는 듯 없는 듯 아련한 단맛. 스펀지케이크 안쪽은 크림치즈 풍미의 바바루아였다. 튀지 않는 부드러운 치즈 맛을 지긋이 음미하고 있으면 안쪽에 숨은 마멀레이드 같은 소스가 대번에 입안을 깔끔하게 마무리해준다.(46)

 

나는 탐정 흉내는 낼 수 있어도 아무래도 뛰어난 범인이 될 소질은 없나 보다.(72)

 

비할 바 없이 성스러운 순간, 인간의 머릿속에서는 비약의 한계가 사라진대.(99)

 

내 경험상 모르는 문제를 풀 때 집중하면 안 된다. 물론 무엇이 문제인지 파악하려면 집중해야 한다. 사고를 점차 좁혀 초점을 맞춰간다. 마침내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면 이번에는 집중을 풀어야만 한다. 물론 긴장의 끈을 놓쳐서는 안 된다. 긴장감은 유지하되 사고를 확산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사물을 보는 행위와 흡사하다. 인간의 눈은 중심 부분이 어둠에 약하다. 그러므로 어둠 속에서 사물을 볼 때는 주변시를 쓴다. 상황의 본질을 파악하려면 사고를 확산시켜야 한다. 핵심을 감싸고 있는 전체상이야말로 우리가 진정 보아야 할 답이다.(110)

 

재주도 호적수가 있어야 부각되는 법. 재능을 시험하려면 그에 합당한 무대와 소재가 필요하다. 오랫동안 그런 기회를 만나지 못했는데 이렇게 멋진 사건을 만나다니, 지금까지 참아왔던 지루함을 충분히 보상받고도 남는다. 유괴 만세!(160)

 

범죄는 과자가 아니야,오사나이.(256)

 

사실은 여우가 아닌데 자신을 여우로 착각하고 소시민이 되겠노라 선언했다면, 그마저도 거짓말이라면.그것은 마치 솜사탕. 달콤한 거짓말을 부풀린 것은 작은 한줌의 설탕.무엇이 남는지 물론 알아, 오사나이. 오사나이의 입술이 움직였다."남는 건 그저 오만한 고등학생 두 사람뿐이야..."(261~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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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메모

1.이탈로 칼비노의 문학 세계를 마무리하는, 살아 생전에 마지막으로 완성한 소설.

2.독서 기간:2017년 1월5일

3.

책은 삼중주로 구성되어 있다. 첫번째는 시각적 경험과 묘사. 두번째는 문화적이고 인류학적인 의미를 찾고 언어,의미,상징을 포함한 이야기 형식의 글. 마지막은, 한층 더 사색적인 경험을 고려하여 궁극적이고 보편적이고 총제적인 진리를 찾으려고 하는 성찰의 장. 이 세 부분이 뭉쳐 하나의 부분을 이루며 그 부분은 다시 세 부분이 뭉쳐 한 편의 글이 되고, 그 세 편이 뭉쳐 <팔로마르>라는 하나의 소설을 이룬다. 3x3x3형식. 총 27개의 짤막한 글들 속에서, 작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을 사색적이고 철학적이며 예술적인 필치로 그려나간다. 다양하기 그지없는 시각과 사색과 철학의 향연 같은 이 소설 같지 않은,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에세이같은 소설을 읽다보면 다시 한번 칼비노의 실험성에 감탄하게 된다. 역시 칼비노의 소설은 세상에 다시 없는 유일무이한 그만의 소설일 수밖에 없다며.

 

천문대가 있는 캘리포니아의 팔로마 산에서 따온 '팔로마르'라는 이름을 쓰는 책의 주인공은 세상 모든 것을 자신만의 진지한 시각으로 관찰하며, 거기에서 자신만의 사고를 어떤 형태로든 구현해낸다. 파도에서, 기린이 달리는 모습에서, 알비노 고릴라가 타이어를 움켜쥐고 있는 모습에서, 짝짝이 슬리퍼에서, 거북이들의 짝짓기 행위에서, 지빠귀의 휘파람 소리에서, 잔디밭의 잡초 속에서, 팔로마르는 세상과 삶과 시간과 인간 존재와 소통과 언어와 세대 갈등과 서구 문명과 상상력 들과 같은 세상의 온갖 것들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사고화해서 그것을 문학이라는 형식 속에 녹여낸다. 철학과 문학의 경계를 모호하게 방황하는 칼비노의 이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결국 묻지 않을 수 없다. 문학이란, 소설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어디까지 갈 수 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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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쩌면 사람들은 자기 책에 대해, 작가의 해설을 요구하지 않아야 하는 책에 대해 '소극적인 방법'으로만, 그러니까 그 책에 도달하기 위해 버린 책들의 계획을 통해서만 말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11)

 

한 사람이 현명함에 도달하기 위하여 조금씩 나아간다. 그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14)

하나의 파도는 언제나 다른 파도와 다르다. 하지만 각각의 파도가, 설령 바로 옆이나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해도, 다른 파도와 동일하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간단히 말해 시간과 공간 속에 불규칙하게 배치되어 있으면서도, 반복되는 형태와 연쇄가 있다.(18)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보는 것의 거부를 과시하고 있어. 그러니까 나도 결과적으로 가슴을 보는 걸 부당하다고 간주하는 관습을 강화하고 있는 셈이지....간단히 말해 내가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은 내가 그 나체를 생각했다는 걸 전제하지. 걱정스럽게도 그건 근본적으로 경솔하고 반동적인 태도야.(23)

 

눈이 달린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따라오는 반사광을 볼 수 있어. 감각과 정신의 착각은 언제나 우리 모두를 죄수처럼 붙잡아 두지.(26)

 

나는 검을 붙잡을 수 없어. 그것은 언제나 저 앞에 있지. 나의 내부에 있으면서 동시에 내가 그 안에서 수영하는 것은 될 수 없는 거야. 내가 눈으로 보고 있다면 나는 그것의 외부에 있고 그것도 나의 외부에 있는 거지.(27)

 

모든 것이 유래하는 원리를 확신함으로써 편파적이고 의심 많은 자아를 없앨 수 있다면 얼마나 마음이 놓일까! 그것은 행위와 형식이 유래하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원리일까, 아니면 매 순간 보이는 그대로 유일한 세상에 하나의 형식을 부여하면서 상호 교차하는 힘의 계열들, 일정한 숫자의 서로 다른 원리들일까?(28)

 

팔로마르의 수여하는 자아는, 합류하고 분리되고 부서지는 직선 무더기들, 벡터 도형들, 힘의 영역들이 상호 교차하는 형체 없는 세상 속에 잠겨 있다. 하지만 그의 내부에는 모든 것이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지점이 덩어리처럼, 뭉치처럼, 응어리처럼 남아 있다. 그러니까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존재하는 세상 안에서, 너는 여기 있지만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느낌이다.(29)

 

에로스는 정신의 전자적 뒤엉킴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프로그램이지만, 정신은 피부이기도 하다. 만져지고 보이고 기억되는 피부 말이다.(34)

 

침묵으로 말하기나 휘파람 소리고 말하기는 언제나 가능하다. 문제는 서로 이해하는 것이다.(37)

 

하나의 집합은 구별되는 요소들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만 존재한다. 그것들을 헤아릴 필요는 없다.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단 한 번의 눈길로 그 작은 개별 식물 하나하나를 고유한 특수성과 차이와 함께 포착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는 데서 그치지 말고 생각해야 한다.(45)

 

달은 눈에 보이는 우주의 천체 중에서 가장 변화무쌍하며, 자신의 복잡한 습관에 가장 규칙적이다. 약속을 절대 어기지 않으며 언제나 약속 장소에서 기다릴 수 있지만, 어느 한 장소에 있는가 싶으면 언제나 다른 곳에서 발견되고, 특정 방식으로 돌린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면 많든 적든 벌써 자세를 바꾸고 있다. 어쨌든 한 걸음씩 그 뒤를 따르다 보면 감지할 수 없게 달아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다만 구름이 개입하여 빠르게 달려가고 변신한다는 착각을 하게 할 뿐이다. 정확히 말해 시야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48)

 

만약 내가 지금 보는 것처럼 고대인들이 볼 수 있었다면, 플라톤은 이데아들의 하늘을, 유클리드는 원리들의 비물질적 공간을 보았다고 믿었겠지. 그런데 어떤 실수 때문인지 모르지만 이 모습이 나에게 이르렀어. 나는 그것이 사실이라기에는 너무 아름답고, 현실 세계에 속한다기에는 내 상상의 우주가 너무 즐거운 것이 아닌지 두려워. 하지만 어쩌면 감각에 대한 이러한 불신이 바로 우주 안에서 우리가 편안함을 느끼는 걸 방해하는지도 몰라. 나에게 제시해야 할 첫 번째 규칙은 아마 이런 걸 거야. 내가 보는 것에 매달려라.(51)

 

상상력이 시력의 약함을 돕는 게 사실이라면, 그것은 불붙이는 시선처럼 즉각적이고 직접적이어야 한다.(53)

 

사물의 표면을 알고 나면 그 아래에 있는 것을 찾아볼 수 있겠지. 하지만 사물의 표면은 끝이 없군.(67)

 

만약 우리를 떠받치고 있는 땅바닥이나 우리 몸을 둘러싸고 있는 껍질까지 모든 물질이 투명하다면, 모든 것은 감지할 수 없는 베일들의 펄럭임이 아니라, 분쇄하고 소화하는 과저들의 지옥으로 보일 것이다.(70)

 

즐거움이나 신선함 없는 탐욕이 그들을 이끈다. 그렇지만 그들과 음식 사이에는 깊고 유전적인 관계가 존재한다. 그들의 동질적인 음식은 바로 그들 육신의 고기이다.(80~81)

치즈와 고객 사이에는 상호 관계가 존재한다. 치즈는 각자 자신의 고객을 기다리면서 약간 거만하게 입자가 있거나 견고한 모습으로, 아니면 반대로 연약한 무관심함에 의해 용해되는 모습으로 고객을 유혹한다.(83)

 

여기에서 그에게 하나의 틈새가 열릴 수 있는데, 인간의 삶의 당혹감에서 탈출구를 찾는 것과 같은 틈새이다. 말하자면 사물에다 자신을 투영하는 것이며, 기호들 안에서 자신을 확인하는 것이며, 세상을 상징들의 총체로 변환시키는 것이다. 마치 기나긴 생물학적 밤에 문화의 첫 여명이 비치는 것처럼 말이다.(93)

 

충류관 안에서의 삶은 스타일도 없고 계획도 없는 형태들의 낭비처럼 보인다. 거기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고, 동물과 식물과 바위가 비늘과 가시, 결석을 서로 교환하지만 무한하게 가능한 한 조합들 중에서 단지 일부만, 아마 가장 믿을 수 없는 일부만 고정되어, 그것을 해체하고 뒤섞고 다시 형성하는 흐름에 저항한다. 그리고 그런 형태들 각각은 곧바로 세상의 중심이 되고, 여기 동물원의 길게 늘어선 유리 우리들 안에서 그렇듯이 다른 형태들과 영원히 분리되어 있으며, 각자 자기 고유의 기괴함, 필연성, 아름다움으로 확인되는 이 무한하게 많은 존재 방식들 안에 질서가, 세상에서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질서가 있다. 파리 식물원의 조명이 비추는 유리로 된 이구아나 홀, 파충류들이 꿈속에서 자신의 원래 숲이나 사막의 나뭇가지와 바위, 모래 사이로 숨는 그곳은 세상의 질서를 반영한다. 그 질서가 관념의 하늘에 땅에 반영된 것이든, 아니면 사물의 본성, 존재하는 것의 바닥에 숨겨진 규범의 비밀이 밖으로 표현된 것이든 말이다.(96)

 

고유의 맥락에서 분리되어 우리에게 전해지는 하나의 돌, 형상, 기호, 낱말은 단지 그 돌, 그 형상, 그 기호나 낱말이며, 우리는 그것을 그 자체로 묘사하고 정의하고자 할 수 있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만약 그것들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얼굴 너머에 감추어진 얼굴이 있다면 우리로서는 그것을 알 도리가 없다. 그 돌들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 이상으로 이해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어쩌면 그것들의 비밀을 존중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추측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며, 잃어버린 진정한 의미를 배반하는 일이다.(106~107)

 

경험이란 전달할 수 없고 우리가 이미 저지른 실수를 다른 사람들이 피하게 할 수도 없다는 사실에서 세대 사이의 연속성 문제가 해결되지. 두 세대 사이의 거리감은 마치 생물학적 유전으로 전달되는 동물들의 행동처럼 공통으로 갖고 있으면서 똑같은 경험을 순환적으로 반복하도록 만드는 요소들에 의해 만들어져. 반면에 우리와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상이한 요소들은 모든 시대가 갖고 있는 돌이킬 수 없는 변화의 결과야. 말하자면 우리가 그들에게 전달해 준 역사적 유산, 때로는 무의식적이지만 우리에게 책임이 있는 진정한 유산에 달려 있어.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겐 가르칠 것이 전혀 없어. 우리의 경험과 아주 비슷한 것에 대해 우리는 영향을 줄 수 없어. 우리의 흔적을 지닌 것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확인할 수 있어.(114~115)

 

자아는 창문에 불과하며 그 창문을 통해 세상은 세상을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기 위해 팔로마르의 눈과 안경을 필요로 한다.(121)

 

이제부터 그는 자신의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오는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볼 것이다. 그는 곧바로 실험을 시도한다. 이제 그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세상이 외부를 바라본다.(122)

 

누구도 자신을 넘어서는 외부의 것을 알 수는 없어. 우주라는 거울은 우리가 자기 안에서 알게 된 것만 관조할 수 있게 하지.(126)

 

사람의 삶은 사건들의 총체로 구성되는데 거기에서 마지막 사건은 그 모든 전체의 의미를 바꿀 수도 있다. 이전 사건들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일단 하나의 삶 안에 포함되면서 사건들은 연대적인 질서보다 내적 구조에 상응하는 질서로 배치되기 때문이다.(130)

 

만약 시간이 끝나야 한다면 매 순간 그 시간을 묘사할 수 있고, 묘사되는 그 순간은 그 끝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확장되지.(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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