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지만 문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적어본다.

모 독서모임에서 뒷풀이를 하다가 내가 독설을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조금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독설이라....
최근에 내가 하는 말은 독설이라고 볼 수준이 아닌데...
그분이 예전에 내가 했던 말들을 들으면 기겁하겠네.
예전에는 사정없이 물어뜯는 말들을 내뱉었는데,
겨우 비판하는 몇마디 말같고 독설이라고 한다면
이제 과거의 나로 돌아가 진짜 독설을 해야하나?^^;;
물론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해 내가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으며
비판을 하면 기분이야 안 좋겠지.
근데 기분이 안 좋다고 그게 다 독설이 되는건가?
최근에 내가 하는 말이란 내가 책을 읽으며 내 안에서 차오르는 것들을
나름 정리해서 뱉은 말인데.
무조건 비판하는 것도 아니고 무조건 긍정하는 것도 아닌,
긍정과 부정 사이를 오가며 내 나름의 이유를 갖다붙여서
아쉬운 점과 좋은 점을 이야기하는 것.
내가 지금까지 읽어온 책과 독서의 경험이라는 영역 안에서
내가 지금 이야기하는 책의 위치를 정해서 그 위치에 대한
나름의 설명을 하는 것이 지금의 내 말들인데,
이 정도로 독설이라고 한다면, 그분은 책에 대한 비판 같은 것은 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건가?
아니면 자신의 감상을 무너지게 만드는 말 따위는 듣고 싶지 않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한다면 좋은 말만 듣겠다는 말인가?
좋은 말만 듣는 힐링의 장소를 원한다는 말인가?
음... 근데 그런 장소가 진짜로 있기는 할까?
내 마음에 맞는 말만 있는 곳, 내 마음의 감정을 절대로 무너지지 않게 하는 곳.
적어도 여러 사람이 모이는 장소라면 그런 게 가능할까?
마음에 안 들어도, 내 감정이 약간이라도 무너질 수 있어도
추슬러서 사람들과 관계 맺어나가는 게 어른의 모습 아닐까?
내가 독설과 아마추어적인 비평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것처럼,
내 마음이 긍정과 부정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것처럼,
우리 모두가 어딘가 사이를 방황하며 사람들과 관계 맺어가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닐까?

여기까지 쓰고 보니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싶다.^^;;
하지만 일단 썼으니 놔두는 수밖에.

그분에게 참으로 미안하지만, 나는 그분이 얘기하는 독설을
멈출 수는 없을 것 같다.
책에 대해 좋은 말만 할 인간은 아니기 때문에.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cyrus 2017-04-29 06: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짜라투스트라님이 합당한 비판을 하셨을 거라 믿습니다. 상대방의 시원찮은 반응에 신경 쓰지 말고, 짜라투스트라님의 생각을 소신있게 말씀하면 됩니다. 의견이 틀렸으면 스스로 인정하면 되는 거고요.

저는 여기 북플에 댓글을 달면, 제 생각을 솔직하게 밝히는 편입니다. 글을 읽다가 잘못된 것이 보이면 댓글로 알려줍니다. 그리고 글쓴이의 입장과 분명한 차이가 있으면 이 또한 밝히는 편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저의 태도가 남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처럼 느껴졌던가 봅니다. 작년에 ‘맨스플레인‘ 소리까지 듣었습니다.

짜라투스트라 2017-05-01 21:41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뭐 사람은 자기 성향대로 가는 수밖에 없겠죠.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ㅎㅎㅎ
 
내 아이가 사랑한 학교 - 아이에게 준 최고의 선물, 발도르프 학교
강성미 지음 / 샨티 / 201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상의 모노 드라마 형식을 이용해서 글을 썼습니다.

처음 무대는 빛이 한조각도 없는 깜깜한 어둠이다. 극이 시작되고 나서야 조명에서 뿜어져나간 빛이 무대를 내리비춘다. 빛이 비춘 원형의 공간 안에는 한 남자가 의자에 앉아 있다.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던 듯한 남자는 빛이 자신을 비추자 망설이는 듯하다가 입을 열기 시작한다.

수업을  듣는 곳에서 '내 기억속의 학교'라는 주제로 글을 써오라는 과제를 받았을 때 고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학교에 대한 기억이 거의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망각은 축복이라고들 하는데, 학교에 대한 기억이 지나치게 많은 축복을 받은 것일까요? 그래도 글을 쓰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모두가 하는데 나만 안 한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죠. 어쩔 수 없이 내 머리에 있는 낡은 기억 속 서랍을 열심히 뒤졌습니다. 서랍을 열어 살펴보니, 먼지가 가득 쌓여 있어 쉽게 분간이 되지 않는 '학교에 대한 기억들이' 있더군요. 먼지를 털고 바라보니 잊었던 기억들이 떠오르더군요. 좋은 기억들도 있었죠. 근데 부정적인 기억들이 더 많이 떠오르더군요. '아직도 그 기억들을 잊지 않고 있다'는 생각에 씁쓸했습니다. 상처는 쉽게 잊히지 않나 봐요.

씁쓸한 미소를 짓던 남자는 입을 다물고 골똘히 생각을 한다. 잠시간의 침묵을 거쳐 그는 입을 열어 말을 한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수업의 기억이었습니다. 무슨 수업을 했고, 어떤 것들을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앉아서 무언가를 들었던 기억은 확실히 있습니다. 덥든 춥든 잠이 와서 눈이 감기든 상관없이. 그 다음으로는 좋았던 기억들이 떠오릅니다. 주로 친구들과의 기억입니다. 웃고 떠들고 뛰어다니고 같이 놀고 운동하고. 좋았던 기억 다음으로는 기억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부정적인 기억들이 생각납니다. 뺨맞고 두드려맞고 몽둥이로 맞아 피멍들고 욕듣고 비난듣고 기합받고. 내가 맞은 기억도 있지만 친구들이 너무 심하게 맞아서 그것 때문에 공포스러웠던 기억도 많습니다. 중학교 시절에는 친구들이 심하게 싸웠던 것도 기억납니다. 의자와 책상을 집어던지고 패싸움하고. 부정적인 기억의 힘이 막강하진 학교에 대한 기억이 좋지는 않네요. 휴우~~

남자는 갑자기 한숨을 내쉰다.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려는듯이 앞을 지그시 바라보던 남자의 입이 열린다.

부정적인 기억 때문인지는 학교에 대한 기억을 의도적으로든 아니든 잊고 지냈습니다. 나쁜 기억을 떠올려봐야 좋은 게 없기 때문이죠. 지금에 와서 다시 떠올리나 예전만큼 감정이 북받치는 것은 없습니다. '그때는랬구나'하는 생각만 듭니다. 굳이 떠올리지 않았던 것을 떠올리니 기분이 묘하기도 하고요. 내가 지냈던 시절을 되돌아보니, '조금 더 좋은 시절을 보내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남자는 말을 그만두고 의자 근처에 놓여 있던 책을 든다. 책을 자기 앞쪽으로 보이며 남자는 말을 이어간다.

수업 때문에 글을 쓴것과 더불어 <내 아이가 사랑한 학교>라는 책도 읽었습니다. 책을 읽으며 온갖 감정이 휘몰아치더군요. 한 한국인 여성이 아이들과 같이 미국의 콜로라도 주의 볼더라는 곳에 가서, 발도르프 학교라는 곳에 들어가서 자신과 아이들이 겪은 일들을 쓴 책인데, 읽으면서 너무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내가 발도르프 학교의 교육을 받았더라면, 덜 맞고, 덜 비난받고, 나 자신으로 오롯이 존재하는 기쁨과 즐거움을 느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 아이를 아이 자체로 바라보고 그 자체를 당당하게 받아들이게 만들어 자신의 자아를 존중하게 하고, 시험과 성적의 압박에 시달리지 않게 하는 교육을 받았더라면 나는 어떤 존재가 되었을까 하는 아쉬움. 지금에 와서 이런 후회를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도 아쉬움은 드는 건 어쩔 수 없네요.

남자는 말을 멈춘다. 잠시간의 침묵. 일정 시간이 지나자 그는 입을 연다.

책을 읽고 나서 든 생각은 내가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하는 점입니다. 기본적인 지식, 한국이라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가치관과 관습 정도는 배웠습니다. 그러나 자아에 대한 것, 삶에 대한 것 같은 살아가면서 본질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배우지는 않았어요. 나는 어떤 존재인지,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성장해야 하는지, 세상은 어떤지, 세상은 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같은. 물론 답을 내리기 쉽지 않겠죠. 그걸 아는데, 답을 주지는 않더라도 스스로 질문을 하고 자기만의 답을 찾아내는 과정을 습득하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 정도도 할 수 없다면 지금 교육의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요?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가고 좋은 직업 가지는 것 외에 삶에 필요한 것들을 가르칠 수 없다면 우리의 교육은 어떤 효용이 무엇일까요?질문을 던지기는 했는데 저 자신도 여기에 대해 어떤 대답을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정말 모르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푸념이나 늘어놓는 것 밖에 없겠죠.

남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의자에서 일어나서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빛이 꺼지고 무대에 막이 드리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혐오의 미러링 - 혐오의 시대와 메갈리아 신드롬 바로보기
박가분 지음 / 바다출판사 / 201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33. 올해들어 133번째로 읽은 책이 <혐오의 미러링>이다.

준비운동. 읽지 않은 책에 대한 할말이 나오는 편이 아니다. <일베의 사상>을 가지고 독서토론을 하게 된 상황이다 보니, 내 뇌를 위한 준비운동이 필요했다. <일베의 사상>을 위한 준비운동으로 <혐오의 미러링>처럼 좋은 책이 어디에 있을까. 

혐오발언. 쉽게 내뱉은 혐오발언은 쉽개 내뱉어진 만큼이나 쉽게 회수되지는 않을 것이다. 내뱉을 때의 자의성은, 내뱉고 나서는 타의성에 의해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 되거나 누군가에 대한 커다란 심리적 상처가 될 것이다. 혐오발언은 뱉어진 순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고,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혐오발언은 박가분 같은 저자에 의해 지적인 분석대상이 되거나 또다른 혐오의 대상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이 돌아옴의 피드백 속에서 하나의 지적 창조물로서 오롯이 존재하는 책이 <혐오의 미러링>이 아닐까.

페미니즘. 잘 모른다. 미안하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딱히 할말이 없다.

메갈리안/워마드. 너무 위험해~~~ 공적으로 공개된 자리에서는 할말이 없고, 혹시라도 만나는 자리가 마련된다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근데 이렇게 적은 것 자체도 너무 위험해ㅠㅠㅠ

독서토론. 이 책에 대한 독서토론을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다면 너무 좋을 것이다. 그때를 생각하며 이 허접하고 말도 안 되는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만화애니비평 2017-03-28 1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런 주제로 리뷰와 페이퍼 쓰다가 엄청난 소용돌이에 몰린 적이 있었죠..ㅎㅎ

짜라투스트라 2017-03-29 01:48   좋아요 0 | URL
그런 일이 있었군요. 저도 그럴 수가 있어서 그냥 소심하게 의도를 숨기는 비겁한 행동을 했다고 해야하나...ㅎㅎㅎ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디고 수독 모임에서 했던 말들을 수정해서 쓴 글)
책을 읽고나면 언제나 저의 마음 속에는 책을 읽은 경험의 영향으로 '작은 자아'가 생겨납니다. 이 '작은 자아'는 책을 읽는다는 행위로 인해 변화된 저의 마음과 변하기 전의 저의 마음이 상호작용하여 만들어진 일종의 정신적 창조물로서 일단 태어나면 제 마음속에서 마음껏 자신의 주장을 떠들어댑니다. 제가 독서모임에 나와서 읽는 책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이 '작은 자아'가 뱉어낸 말을 제 입을 통해 내뱉어낸 것에 불과합니다. 어떻게 보면 독서모임에서 말하는 저라는 존재는 이 '작은 자아'의 대변인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런데 종종, 이 '작은 자아'중에 독특한 존재들이 있습니다. 대다수의 '작은 자아'들은 말을 조금이라도 더 하려고 날뛰는데, 변종 '작은 자아'는 별로 할말이 없다고 말한 뒤에 조용히 내 마음속에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기만 합니다. 사실 이 변종 '작은 자아'는 굉장히 만족스러운 독서를 하고나서야 생겨나는 것들인데요, 이것들은 저의 독서 행위 자체가 자기완결적으로 되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책에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없거나 너무 만족스러워서 할 이야기가 없다는 말입니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읽고 나서 생겨난 저의 '작은 자아'도 이런 변종에 속할 겁니다. 35년간 폐지 압축공으로 일해온 햔타의 쓸쓸하면서 아름다운 삶의 얘기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소설이 제 마음에 와닿아 저를 감복시켜서 할말이 없게 만들었다는 얘기입니다. 제가 이 소설을 읽고 느낀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감정을 말로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걸로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한대로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 하는 법이니까요. 저는 '재미있다'는 말  외에는 할말이 없습니다.

동시에 제 작은 자아는 저에게 고독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 소설을 읽고 나서는 고독 속으로 침잠해야 한다고 속삭입니다. 고독 속으로 침잠하여 자기 같은 존재들을 잘 정리해나가야 한다고. 저는 작은 자아의 말에 따라 말없이 고독 속으로 침잠합니다. 고독 속으로 침잠하며 내 마음 속의 작은 자아가 어떻게 되는지 지켜봅니다. 작은 자아는 자기가 말한대로 고독 속으로 침잠하더니 곧이어 쓸쓸하게 소멸되는 걸 선택합니다. 그 쓸쓸하고도 아름다운 광경을 지켜보고나니 더욱 더 침묵할 수밖에 없더군요.^^;; 이상으로 제 말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양이라디오 2017-03-23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은 책이 만족스러울수록 리뷰나 페이퍼에 쓸 말이 없었던거 같습니다. 공감가네요^^

짜라투스트라 2017-03-23 11:03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1.
갑자기 6번에서 83번으로 점프해서 글을 쓰게 되었다.
뭔가 큰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글을 쓰기 싫다는 강력한 게으름의 여파로, 10번 책부터
82번 책에 연관된 내 후기는 사라지게 되었다.^^;;
원래는 이 책 후기도 안 쓰려고 했는데 인디고 수독 모임 후기를 내 마음대로 쓰고 나니,
이제부터는 읽은 책에 관해서는 다시 글을 써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에 따라서 글을 쓰려고 앉았는데 어떻게 써야할지 모르겠다.
어쩔 수 없이 마음대로, 의식 가는 대로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 전에도 마음대로 썼지만.

2.
11시. 아직 하루가 다 지나가지 않았다. 남은 건 1시간.
딱히 하루가 지나 가든 말든 신경쓰지 않지만, 책을 펴고 앉아 있으니
과거에는 신경 쓰지 않았던 시간이 갑자기 신경 쓰인다.
책을 읽다가 하루가 지나가버리면 그때 내가 읽은 책은 어디에 속하는 것일까?
책을 읽기 시작했던 과거? 책을 다 읽은 미래? 책을 읽었던 순간들인 현재?
아니면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이어지면서 만들어진 책과 연관된 모든 시간대?
아무 쓸모도 없는 쓸데없는 생각들이 머리를 가득 채운다.
아직 책에 집중 안해서 그런 건가? 정신을 모아서 다시 책을 펴든다.
읽어야지 하면서.
역시 쉽게 집중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다시 집중을 외치며 정신을 모아보려고 노력한다.
노력 끝에 나는 책속으로 빠져든다.
주변의 모든 것들을 잊고.

처음에는 천천히 머리속을 스치던 글자들이,
존 리버스가 범인을 쫓아 달리는 순간에 이르자
미친듯이 달리기 시작한다. 마치 존 리버스를 따라 달리는 것처럼.
추격전 상황에서는 더더욱 빨리, 글자가 눈앞을 휘리릭 지나간다.
달리는 게 아니라 자동차나 기차,비행기 같은 교통수단을 이용한 듯이.
마침내 범인과 존 리버스가 대결을 벌이는 장면이 펼쳐지자,
글자들은 진정되었다는 듯, 두 사람의 대결을 집중해서 보여준다.
나는 글자의 지시에 따라 눈을 크게 뜨고 둘의 대결을 지켜본다.
영화속에서 한 장면을 집중해서 보여주는 것처럼, 세부적인 것들까지
세세히 묘사하던 글자들은 결국 하나의 결론으로 나를 이끈다.

모든 것이 끝나고 나서 시계를 보니 나도 모르게 어느새 1시간 반이 지나있었다.
잘 읽히는 가독성이 막강한 책들이 내게 행사하는 독서의 타임슬립 마법의 순간들을
다시한번 경험했음을 실감했다.
지나간 하루 전날, 시답지 않은 독서애호가로서 독서모임에 참가해서 주장했던
말들이 떠오른다.
예술을 당위론적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봐야한다고 했던 말들이.
특정한 당위의 논리로 본다면 <이빨 자국>이 좋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존재론적으로 본다면, <이빨 자국>이라는 책은 충분히 그 자체로서 존재가치가 있다.
나를 즐겁게 했고, 내가 시간을 잃고 빠져들게 했기 때문에.
역시, 쓰고 보니 괜히 썼다는 생각이 든다.
지우려고 보니 아깝다. 해서 남겨둘 것이다.
이것도 내 팔자라고 생각하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