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로서의 디자인
토니 프라이 지음, 송기철 옮김 / 안그라픽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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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영국 버밍엄 대학 출신으로 현재 호주의 저명한 철학자이자, 디자인 이론가인 토니 프라이는 특히 카를 슈미트와 조르조 아감벤에 대한 연구로도 유명한 학자입니다. 더불어 정치철학과 관련된 주제들로 활발한 저작 활동을 그동안 지속해왔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에는 이 책이 아마도 처음 소개되는 논저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 글은 지난 2010년에 ‘Design as Politics’ 라는 원제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4년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우선 본격적으로 책에 대한 논의에 앞서 아쉬운 두 가지 점을 밝히고 싶습니다. 본문 75페이지의 오탈자와 함께 심각한 문제는 가편집도 제대로 하지 않은 듯한 삐뚤삐뚤한 문장 줄넘김입니다. 이렇게 의미있는 번역본을 이렇게 성의없이 편집한 것은 인력의 문제, 시간의 부족을 떠나서 정말 비판받아야 하는 점이라 생각합니다.

저자인 토니 프라이는 “현재의 시장 자본주의의 사실상 종속 상태인 (서구) 민주주의가 앞으로 인류의 지속 가능성을 제한하고 있으며, 이 점은 명백하게 반미래화로 귀결된다”는 큰 틀에서의 주제 의식을 밝히고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주장을 기본으로 이것의 합리적 당위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현시대의 현상으로서의 근거와 이론적 대응을 결합시켜 꽤 설득적인 논의 글을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우선 개인적으로도 이러한 시장 자본주의에 예속된 현재의 민주주의적 병리적 상황에 매우 공감하고, 우리의 근대가 기술 만능주의에 휩싸여 전개되어 왔다는 것에도 동의합니다. 물론 이 뿐만 아니라 2부의 카를 슈미트 현상을 비판적으로 인식한 논의 만으로도 충분히 일독해 볼만하다 여겨졌습니다. 특히 근래 번역된 슈미트의 유명한 논저 ‘정치적인 것의 개념’의 대한 이해를 돕는데 중요한 해석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부문 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독서였습니다.

과거 냉전시기 전후로 급격한 세계화에 따른 소비 자본주의화가 초래한 문제에 대해서는 익히 이해하고 계실겁니다. 많은 민주주의 이론가들이 제가 앞서 소개해드린 바와 같이 ‘민주주의가 시장 자본주의에 종속된 형태로서 정치 (민주주의)가 자본주의 (시장 자유주의)를 보조하는 구조적 결합으로 강화’ 되었다는 것이 오늘 광범위한 세계적 문제의 본질입니다. 이 책에서 토니 프라이가 논하는 대로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는 어떻게 보면 지엽적인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기술 만능에 따른 광범위한 자연파괴적 대량 생산에 따른 환경 파괴 문제와 세계화의 사실상 본질이라고 볼 수 있는 선진국의 환경 오염 배출 산업을 제3세계에 이전하는 즉, ‘미녀로 야수를 포장하는’ 교묘한 행태 등을 전방위적으로 저자는 비판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동안 이러한 문제들의 해결책을 국제사회에서의 의결과 같은 모든 것을 포함한 더 많은 민주주의의 확대로 인식해 왔는데요. 저자인 프라이는 그러기에 앞서 먼저 현재의 민주주의를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과거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창했던 실질적 민주주의가 오늘날 우리의 민주주의에는 없으며, 사실상 일종의 대의 민주주의로 귀결되는 민주 정치에 ‘실질적 민주화’가 결여되어 있다고 해석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2부에서 본격적으로 논의하는 카를 슈미트 비판과 연계되어 있는데요. 먼저 카를 슈미트는 ‘적과 우리’라는 대결구도를 통해 정치 및 자유를 해석함으로써 그 유명한 결단주의와 함께 정치 자체를 획일화 시킨 책임이 있습니다. 또한 주권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도 “주권은 법률의 명령 안팎에서 동시에 기능하기 때문에 주권의 역설이 존재”한다고 그는 첨언하면서 사실상 슈미트는 정치적 이상주의를 불신하고 첨예한 현실주의 및 현실정치를 비판하기 힘들게 만든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는 혐의를 벗어나기 힘듭니다. 여기에는 “법의 등장 (성립) 은 (어떤 식으로 정의하든) 인간이라는 존재의 다루기 힘들고 지배할 수 없는 본성에 대한 대응”이라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날것’을 가차없이 평가함으로써 그가 우파 뿐만 아니라 좌파에게까지 영향을 끼친 이면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만, 슈미트 역시 존 듀이와 마찬가지로 (주된 대상이 하급 계층이라는) 오락거리의 범람이 앞으로의 정치 토대에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분석했고, 일원화되지 않는 개인주의 총합의 ‘다원주의’ (물론 저는 이러한 분석을 모두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정치가 과연 민주주의에 있어서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회의적인 시각과 함께 독특한 통찰을 엿볼 수 있습니다. 즉, 동일성의 정치라는 것이 우리가 스스로 소멸시킨 ‘공공성의 가치’ 내지는 ‘공익의 목적’이라는 가치로 귀결되어야 함에도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많은 이론가들에 의해 ‘자유를 건드리는’ 모든 것들을 배척하게 만들었고, 프라이는 이것을 한술 더 떠서 ‘자유 마저도 제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약간의 첨언이라면, 프라이가 인용한 라클라우와 무페가 주장한 바대로 “수행적이고 다원주의적인 ‘자유민주적’인 사회들의 객관화된 권력구조와 실상은 헤게모니적이며 따라서 전체화한다고 결론지었다.”라고 밝힙니다. 여기에 카를 슈미트가 ‘대의 정치’에 회의적인 시각을 가진 것도 그가 왜 요즘 각광을 받고 있는 이유라 생각됩니다.

결론과 더불어 프라이는 앞선 비판적 인식을 토대로 우리 세계가 ‘지속불가능한 상태’에 놓여 있고, 이 부분을 우리는 정확히 직시해야 하며, 주권과 자유의 재인식을 통해 새롭게 세계관들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거듭 강조합니다. 저는 저자의 주장 끝에는 ‘다소나마 독재의 그것이라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로 도출되는 불길한 인상을 받았습니다만 물론 근본적인 독재 정치를 지긋이 가리킨 것은 아닐겁니다. 이미 이 책 1부에서 권위주의화 된 민주주의에 대한 일침을 한 것으로 저의 의심은 터무니없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개인적으로 마지막 소감은 하이데거와 슈미트의 비판과 더불어 받아들일만한 근거들을 보여주는 것에 이해를 하면서도 뭔가 뒤끝이 씁쓸했고, 이미 그도 이라크 전쟁 상황에서 잡힌 포로들을 고문한 등의 그 ‘예외상태’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던 점이 명백한 것으로 꽤 괌범위한 그의 논거를 의심하지는 말아야겠습니다. 그래서 글 도입에서 말한 민주주의 국가들이 국익을 신봉하게 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대놓고 비판하는 것은 충분히 그 의도를 인정할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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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인가 - 국가의 본질에 대한 역사적 고찰
카야노 도시히토 지음, 김은주 옮김 / 산눈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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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카야노 도시히토는 일본 와세다 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프랑스를 거쳐 현재 일본 고다이라시의 쓰다주쿠(다른말로 즈다쥬크) 대학의 국제관계학과 준교수로 재직하면서 국가와 권력, 정치철학과 관련된 연구를 지속하고 있는 학자입니다. 특히 폭력론과 관련하여 아렌트, 아감벤, 슈미트 등에 지속적인 학문적 관심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일본내에서 신예 철학자로 불리우며 대학 외에 활발한 강연과 기고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국내에도 그의 책이 번역되어 있는데요. 다만, 안타깝게도 지금 소개해 드릴 이 책은 현재 절판된 상태입니다. 도시히토의 이 논저는 2005년 일본에서 처음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0년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다행히도 ‘국가의 본질에 대한 역사적 고찰’이라는 부제로서 대충 이 글의 내용을 짐작하게 합니다. 국가론에 대한 개념이 분명 역사적으로 고찰해봐야 하는 측면이 있습니다만 저자는 단순히 역사적 수단의 해석보다는 국가를 해석할 수 있는 중요한 사상가들의 주장과 이론을 도입하고 이를 재해석하는 형태로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다만, 인용된 구절이나 문단을 다른 서체로 구별하는 식으로 글이 구성되어 있는데요. 이 점은 독해의 과정에서 분명 호불호가 있을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전체적으로는 번역도 나무랄데 없고, 밝히고자 하는 주장도 꽤 명확하다고 볼 수 있고 상당히 균형잡힌 글이라 봐도 무방해보입니다.

우선 1장과 2장, 3장은 권력과 폭력과의 관계 그리고 이러한 이론의 확장으로 국가가 자신의 폭력 기반을 위한 부를 창출 및 사유화의 개념을 확장시켜 살펴보고, 4장에선 국가가 허구에 기반한다는 알튀세르 주장에 대한 잠정적 비판, 그리고 약간의 재해석과 다음 장인 5장에서 주권을 고찰해보고 6장에서는 국민국가의 형성에 이런저런 영향을 끼친 민족과 민족주의 개념과 7장에서는 현대의 국민 국가가 ‘공리적 이념’의 기로에 서 있는 자본주의 상황을 마지막으로 글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저자인 카야노 도시히토는 글의 도입에서 국가가 폭력을 독점하게 된 연유에 대해서 “그 폭력이 사회 내에서 가장 강력해야 한다”는 이해를 바탕으로 국가가 가지는 폭력의 정당성 기반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국가가 폭력을 소유하는 것이 오로지 도덕적이고 사회적 정당성에 기인한다고 보는 것보다 사회내의 ‘사적 폭력’을 지양시키고 홉스를 재해석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단순히 그의 자연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아마도 3장에서 서술하고 있는 ‘인간의 악의 측면성’을 제어하기 위해 국가는 필연적으로 요구 되었으며, 그것이 여타 홉스나 스피노자 등의 주권 개념에 비롯되었다기 보다는 원천적으로 인간의 불확실성 자체에 요인이 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일찍이 한나 아렌트는 앞의 권력과 폭력의 관계에서 이 두 가지 단어는 아주 면밀하게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홉스의 인식대로 폭력이 권력적인 측면의 인식을 포함해야 한다는 말을 우리가 긍정한다면 국가가 어떤식으로 폭력을 수단화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많은 철학 특히 정치철학의 근본적인 탐구 과제일 수도 있습니다.

앞의 사적 폭력을 지양시키는 국가의 행위에 대해 “국가가 다른 주체들에 대해 폭력의 행사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결코 정의를 목표로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라고 독특하게 구분하는 점은 결국 국가 자체가 강대한 폭력을 기반으로 한 당위성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국가가 권력이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폭력에 대해 도덕적인 정당성을 부여시키기 위한 작업을 기울여 왔는데요. 카야노 도시히토는 이것과는 다른 주장을 곁들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 역사적으로 보면 국가의 폭력 자체가 부정한 것이며, 그 주도권이 실추되는 사건은 늘 발생해 왔다”는 해석입니다. 오늘날의 국가가 사회 구성원들의 안전 보장과 경제 활동을 보호하기 위한 당위성의 문제는 저자가 도출하는 결정적인 역사적 결과인 “국민의 개념은 사회의 산업화 내지는 산업시대에 출현에서 찾아 볼 수 있다”고 밝힙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 3장의 부의 사유화로 인한 국가의 세금 징수는 폭력을 수단화 할 수 있는 금전적 뒷받침이 되었고, 사회의 각 개인들이 발생한 부를 사적 소유하고자 하는 원리에 크게 부합했던 것이 바로 국가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이러한 폭력의 광범위한 국가 소유의 원칙은 ‘공리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어야 됩니다. 아렌트와 푸코는 권력과 폭력의 구별을 첨예하게 연구한 사상이기도 한데요. 단순히 피아의 개념으로 정치와 국가를 해석한 카를 슈미트에 국한되지 않고 더군다나 배외의 개념과 배외주의를 찾아보고 있는 조르주 아감벤과는 달리 국가 폭력이 다른 불법적인 사적 폭력들과 어떻게 다른지 그 점을 권력의 유무에서 찾았던 것으로 우리는 양자를 명백히 구별해야 할 것입니다. 앞선 아감벤이 탐구했던 국가에서의 배외 개념과 관련해 이 책에서는 한가지 해답을 내놓고 있습니다. 아마도 국민 국가주의의 형성에서 민족과 인종의 개념이 어떤 영감을 주었고, 현재 유럽의 이민자 상황을 바라보는 인식과 유사한 ‘국민=민족’ 이라는 개념이 파생한 위험성은 지극히 이해 가능합니다. 이 부분에서 아쉬운 점은 우리가 베스트팔렌 체제 이후 국민국가 담론의 인식에서 얼마간 나아가지 못하고 또한 전지구적 종교적, 인종적 문제가 정말 극복되거나 우리의 관용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인 것인지는 앞으로도 많은 연구가 필요해 보입니다.

이러한 인식의 결론으로 홉스와 스피노자를 통해 해석된 주권이라는 개념이 인간을 위한 국민국가의 가능성을 낳았고, 그 이전인 봉건주의 시대에 소수의 이익을 위한 국가 폭력의 무분별성을 이른바 상위 개념으로 인식되는 국민과 민족이라는 틀로 국가의 권력을 아우르는 문제들을 겨우 해석 가능한 단계까지 끌어 올릴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짐작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주권은 본디 “지상의 초월적인 권력”으로서의 인식을 불식시키게 만드는 아렌트의 “권력의 목적을 넘어서서 폭력이 홀로 움직이기 시작할 때, 이 조직화 된 집단적 폭력 자체가 폭주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항상 귀담아 둘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더불어 국가의 자본주의화에 따른 사회 전반의 공리적 가치의 쇠퇴에 대해서도 경계심과 사회 구성원들의 보다 깊은 관심이 필요하지 않나 고민해 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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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경제적 결과 부글 클래식 boogle Classics
존 메이너드 케인스 지음, 정명진 옮김 / 부글북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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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존 메이너드 케인스라는 이름은 경제학의 대부라 불리우는 애덤 스미스처럼 잘 알려져 있습니다. ‘케인지언’, ‘케인스주의자’등으로 수식되는 의미조차 아주 명확합니다. 그는 켐브릿지에서 수학한 이후 경제학자로 활동하며,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파리평화조약에 관여하고, 이후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영국 재무성 관리로 재직하고 전후 유럽 부흥과 1944년 브레튼우즈 체제를 만드는데, 공헌을 한 인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이 책은 그가 1919년 영국 재무성의 공식 대표로 참여한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졌으며, 거의 2개월에 걸쳐 완성한 글로 원제는 ‘The Economic Consequences of The Peace”로 국내에는 2016년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정식 판권으로 소개되기 이 전에 80년대에 ‘평화의 경제적 귀결’이라는 제목으로 일본판을 번역한 판본이 헌책방에 돌아다녔던 것이 문득 생각이 납니다. 이 부분은 그냥 참고로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선 책을 다 일독하고 나서 드는 생각은 제목이 아주 의미심장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치 ‘평화의 경제적 결과’가 파리 평화 회의 에서 전혀 고려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의미하는 바가 역설적이지 않나 추측해 보기도 합니다. 바로 케인스는 그런 관점에서 1차대전의 종전 이후 ‘파리 평화 회의’를 다음 두 가지 관점으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파리 평화 회의 자체가 파괴적 측면을 갖고 있었으며, 두번째, 우드로 윌슨과 로이드 조지, 조르주 클레망소 등 협상국의 정치적인 문제로 인해 경제적 측면의 고려를 결여한 협상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 두번째 비판과 관련해 ‘현실성’을 결여한 채 이상주의적이고 도덕적인 문제에 집착한 우드로 윌슨, 독일을 두 번 다시 프랑스 앞에 서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조르주 클레망소, 선거를 앞두고 마찬가지로 독일의 굴복을 기대했던 로이드 조지의 이런 불편한 하모니가 사실상 ‘독일의 징벌적 배상’을 강요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위의 측면의 정당성 문제와 관련해 케인스는 “독일이 사실상 무조건 항복을 한 것이 아니라 평화 조약 협상에 참여를 요청하고”, “그 이전에 미국 윌슨 대통령과 전후 처리에 대한 협의를 진행한 것으로 봤을 때, 이것이 과연 합당한 결과인가”에 대해 되묻고 있습니다. 더욱이 조르주 클레망소가 주장한 “독일을 포함한 중부 유럽을 1870년(보불전쟁) 이전으로 돌리자”는 주장에 케인스는 전혀 동의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도 프랑스에게는 독일 황제가 보불전쟁 이 후, 베르사유 궁전에서 대관식을 한 사건에 이르는 과정을 대단히 굴욕적으로 여기고, 카이저에 대한 전쟁 책임을 영국과 프랑스에서 요구한 것은 이에 기반한 것으로 보입니다.

독일은 1914년 이후로 유럽 전체에서 중요한 산업국으로 도약하게 됩니다. 알자스-로렌과 자르, 슈레스비히의 석탄 및 철광성의 자원으로 헤외에서 원료를 수입해 가공한 제품을 영국과 프랑스에 수출하는 등 이러한 산업 기반이 유럽 전체에 경제적으로 기여한 측면을 살펴보는 등 뒤이어 ‘4장 : 배상’ 에서 “본래 배상금이 정해지고 나면 지급하는 수단은 그 국가의 자유에 맡기던 것이, 파리 평화 조약의 경우 배상금을 받을 국가들이 금액을 정할 뿐만 아니라 배상금으로 내놓을 재산의 종류까지 명시한 것은 거의 최초라고 언급됩니다. 이러한 인식은 과거 카르타고식 평화로, 제2차 포에니 전쟁 후 로마가 카르타고에 강요한 평화조약에서 적을 잔인할 만큼 철저히 분쇄함으로써 유지하는 평화에 기인하는데, 결국 역사의 가정은 없다지만 독일 내부에서 전체주의가 자생하여 확산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다만 케인스는 이러한 가혹하고 기준없는 독일에 대한 ‘징벌적 배상’이 독일 지역에서 혁명의 기운을 낳게 할 수도 우려했으나, 우리가 아는 바대로 아돌프 히틀러라는 시대의 악을 잉태했습니다. 또한 그는 케인스의 이 책을 통해 히틀러가 면밀히 연구하고 전후 사상적 인식에 도움을 받은 것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이 출간된 6개월 이후 전세계적으로 반향을 일으킨 점이 무엇을 말하는지 예측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독일이 치뤄야 할 배상과 관련해서 케인스는 앞선 알자르-로렌과 자르, 슐레스비히에 대한 할양을 차치하더라도 대전 이 전의 연합국과 각 식민지에 존재했던 독일의 이권이 무상으로 몰수되고 이것이 배상액에 포함되지 않는 상황은 이해되기 힘든 행위라 여기고 있습니다. 독일 국내에 필요한 석탄 1억톤 가운데 프랑스와 벨기에 및 다른 주변국에 2000톤 이상 무상(배상금과 상관없이)으로 보내야 한다는 점과 보유한 선박들을(대체로 상선들) 마찬가지로 영국 등에 보내야 한다는 점, 벨기에와 같은 경우는 취약한 동부 국경지대의 피해 이상의 배상금을 따내고 바로 이것을 대전 도중 영국으로부터 받은 현물지원 및 차관으로 대체하는 등의 배상의 이차적인 측면까지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위의 할양할 지역의 독일 민간인 재산의 몰수와 관련해서 아무런 법적, 도덕적 근거가 없이 무상 몰수가 이뤄진다는 부분은 또한 배상금 안에 포함되지도 않는다는 측면에서 매우 가혹한 결과가 아닌가 생각해봤습니다. 저자인 케인스는 최소한 독일 경제가 배상금을 갚을 수 있을 만큼 산업 기반의 재가동이 필요한데, 이것을 원천적으로 제한하게 하는 이런 배상금 문제는 “독일 국민이 커피나 담배와 같은 기호품까지 끊어야 겨우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언급합니다. 기본적으로 독일이 1913년 이전 만큼 국내 경제가 유지되는 것이 영국과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 경제에 도움이 되는 것이며, 반대로 과도한 배상에 따른 국내 시장을 초토화시키는 결과가 과연 누구에게 도움이 될 것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잠정적으로 독일은 프랑스에 배상할 전체 330억 달러에서 210억달러에 이르는 배상금을 납부했지만, 1920년부터 세계 대공황이 터지는 1929년 이후까지 대부분의 독일 국민을 경제적 고통에 처하게 만들어 나치즘이 활개치는 근본 원인이라 여겨도 무방합니다. 즉, 5장 : 평화조약 이후의 유럽에서 무역 저조로 인한 인플레이션의 확대가 유럽 경제의 위기로 대두할 가능성으로 케인스는 예견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또한 전쟁 배상금을 받지 못할 경우 장기적인 경제 침체에 빠질 것으로 예상하고 세르비아를 비롯한 낙후된 동부 유럽도 더 안좋은 상황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와 함께 “이 책에서 나는 러시아와 헝가리, 오스트리아에는 별로 주의를 주지 않았다. 그곳은 삶의 비참함과 사회 붕괴가 너무나 심각하기 때문에 별도의 분석조차 필요하지 않다”며 전쟁 이후 외적으로 발생한 유럽의 상황이 가늠하기 힘들정도로 좋지 않았던 것은 분명해보입니다.

“이 평화조약에 따라 독일에 강요된 배상과 비슷한 예는 인류 역사에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는 케인스의 결론으로 설명되는 이 문장은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대한 전쟁 책임이 여러 측면에서 고려되지 않고 오로지 정치적 수단에 의해서만 계산된 것은 또 한번 대전을 치루고 수많은 인명 살상을 겪게 되는 비극적 원인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예상해봅니다. 여기에 어쩌면 1910년대 불기 시작한 계몽적 낭만주의가 정치의 불확실성을 간과하게 만든 요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비판적 견해에도 불구하고 1차 세계 대전의 종전 분위기와 당시 유럽의 모습을 담고 있는 글을 쉽게 찾기 힘든 출판계에서 케인스의 이 글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한 협상의 이면과 정치적 문제 등을 비판적 인식으로 쓰고 있는 저자의 태도도 꽤 교훈으로 삼을만하다고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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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책임 - 레옹 블룸, 알베르 카뮈, 레몽 아롱… 지식인의 삶과 정치의 교차점
토니 주트 지음, 김상우 옮김 / 오월의봄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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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0년에 타계한 토니 주트는 우리에게 그의 생전 마지막 유고인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를 통해 신자유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했고, 중동에서 일으킨 미국의 전쟁과 자기 자신이 유대인임에도 이스라엘을 비판한 실로 지식인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생전에 켐브리지와 옥스포드. 버클리를 거쳐 뉴욕 대학의 유럽을 연구하는 레마르크 연구소의 소장으로 재임했습니다. 그의 여러 논저들 가운데 가장 명성을 가져다 준 글은 ‘포스트워 1945~2005’입니다. 마찬가지로 위의 책은 국내에도 토니 주트의 주저로 대표될만큼 잘 알려져 있습니다. 소개할 이 책은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하지만, 1930년경부터 냉전시기까지 토니 주트가 비판했던 당시 프랑스 지식인들의 이합집산과는 다른 삶을 살았던 레옹 블룸, 알베르 카뮈, 레몽 아롱의 정치적이고 학문적인 일대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원제는 The Burden Of Responsibility 로서, 지난 1998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조금 늦은 2012년 오월의봄에서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레옹 블룸부터 알베르 카뮈, 레몽 아롱의 차례대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아마도 이 세사람이 서로 아슬아슬하게 겹치며 살다간 각자의 인생 순서 때문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좀 더 엄밀하게 말씀드리면 알베르 카뮈와 레몽 아롱의 시간대가 많이 겹치고 2차대전 이후 삶을 마감한 레옹 블룸만이 따로 서술되는 느낌입니다. 물론 이건 제 개인적인 감상일 따름인데요. 토니 주트는 이 위대한 세 사람의 공통점을 도덕적 용기를 가졌으며, 대체로 반공주의자였던 점을 꼽고 있습니다. 여기에 레옹 블룸은 외로웠지만 고결한 이상주의자였고, 카뮈는 진리를 사심없이 성찰한 모럴리스트에 가까웠으며, 레몽 아롱은 이성을 겸비한 현실주의자라고 저자는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 세 사람 모두 당시 프랑스 지성계 및 지식인들 사이에서 꽤 독특하고 특별한 양심으로 당시 프랑스 지식인들 모두의 미움을 받은 전력을 공통된 경험으로 갖고 있습니다.

우선 레옹 블룸은 프랑스 알자스 출신의 유대인으로 사회주의자였던 정치가였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프랑스에서 교육을 받고 공화주의적 영향을 받은 프랑스인으로 여겼지만 동시에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도 갖고 있었습니다. 토니 주트는 블룸을 가리켜 “그가 프랑스에 그토록 충실했던 것은 그의 공화주의적 신념이 강고했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말합니다. 당시 유럽의 반유대주의적 분위기를 고려하면 그의 삶이 무조건 평탄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사회주의자이긴 했지만 소비에트 혁명을 비롯한 공산주의와는 거리를 두었고 끝내는 유럽의 공산주의자들을 경멸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렇게 자의반 타의반 고립되었지만 고결하고 도덕적이고 이성을 갖고 있던 이 정치인은 세계주의적 입장에서 당시 정치적 판세를 다소 오판했는데, 특히 1943년 체코에 대한 히틀러의 교묘한 술책에 속아 넘어가 국내외적으로 비난을 받은바가 있습니다만 이것은 오로지 블룸 한 사람만의 책임은 아닙니다. 영국의 그 얼굴 두꺼운 총리 역시 히틀러를 오판했을 정도로 차라리 히틀러의 교묘하고 치밀한 언설을 끄집어 내야될 정도로 보입니다. 후에 패탱과 비시 정권에 대한 논쟁으로 인신 모욕까지 감내해야 했으나 그는 프랑스 전체를 위해 일했고 공화주의적 신념을 평생 지니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주트의 말마따나 그를 유대인이라는 인종적 편견으로 평가하는 것은 공화주의를 모욕하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1944년 이후 히틀러에 의해 분열된 프랑스와 프랑스 지식인 계층은 그들이 레지스탕스와 나치로 분리지지 하여 시대의 난맥상이 어떠했는지 가감없이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레옹 블룸의 삶을 통해서 말이죠. 여기서 약간의 논외로 히틀러 정권을 지지한 비시 정권에 의해 프랑스 내에 유대인들에 대한 강제 인솔이 이뤄졌다고 글에 나오고 있는데요. 이런 문제 때문에 과거 발터 벤야민이 자의와 상관없이 스페인과의 국경지대까지 몰리게 된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어찌됐든 이 문제는 어떻게 마무리가 되었는지 실로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프랑스를 대표하는 위대한 작가로 알려져 있는 알베르 카뮈는 토니 주트의 표현대로 세 번이나 ‘유배되었던’ 알자스 이민자 출신의 아버지와 마요르카섬 이민자의 후손인 어머니에서 태어나 일생을 ‘뿌리없는 세계주의자’로 살았습니다. 토니 주트는 훗날 카뮈가 사르트르와의 논쟁에서 엄청난 상처를 받게 되는 연유를 ‘학력의 증표가 부족한’ 카뮈가 반대로 거의 완벽했던 ‘맹렬한 실존주의자’ 장 폴 사르트르에게 인간적이고 또한 작품의 본질이 더럽혀지는 것과 같은 치욕을 받게 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더불어 주트는 이 점에 대해서 “카뮈 스스로가 특히 끊을 수 없는 알제리에 대한 끈과 마찬가지로 사랑했던 프랑스 사이에서 대중들과 지식인들에게 인정받지 못했으며, 또한 좌와 우에서 혹은 양극단 사이에서 끊임없이 선택을 강요받았고, 여기에 자신의 작품 성과를 사르트르에게 부정당하기까지 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카뮈 스스로가 냉철하고 완벽한 이성을 보유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으므로 더욱이 정규 과정을 거친 다른 프랑스 엘리트 지식인들에 비해 항상 학력의 결핍을 안고 있었으므로 그의 내면의 양심이 어떠했을지는 감히 짐작하기가 어렵습니다. 교통사고로 죽기전인 프랑스가 저지른 알제리 사태에 대해 그가 프랑스의 편을 들지 않게 되자, 그에 대한 지식인들의 분노와 비난은 맹렬했습니다. 후에 알제리인 포로들에 대한 프랑스 군의 고문이 드러나면서 프랑스 지식인들의 이중 잣대는 실로 역겨울 정도가 되었는데요. 뿐만 아니라 프랑스 군이 자행한 알제리인들에 대한 학살이 근래 계속 드러나고 있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주트는 이런 카뮈를 향해 “시끄럽고 분노가 판쳤던 파리의 공인세계에서 일찌감치 멀찍이 떨어지고 싶어하는 성향을 드러냈다”고 말합니다. 진리를 사심없이 성찰하는 사람이 되었던 카뮈는 말년에 모럴리스트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카뮈에게 중대한 문제는 도덕과 정치 가운데 어떻게 선택할지 하는 게 아니었다. 도덕적 참여를 통해서 어떻게 버려낼까 하는 것이었다”고 이 글은 밝혀내고 있습니다.

최근까지 프랑스 학계에서 큰 존경을 받고 있는 레몽 아롱은 주트의 표현대로 ‘이상주의적 열망을 버리고’ 현실주의적 인생을 살다간 인물이라 평하고 있습니다. 1930년대 전쟁에 대한 묘한 이상주의적 분위기를 감지한 아롱은 후에 E. H. 카가 평가한대로 “전쟁에 대한 이상주의적 관점이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불러일으켰는지” 이미 깨닫고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알제리에 대한 프랑스의 전쟁이 사실상 프랑스에게 별로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아롱의 관점은 바로 그가 얼마나 현실주의자인지 깨닫게 합니다. 그는 어린 시절 쓴 꽤 독특한 철학적 논저로 명성을 얻기 시작해 당시에는 사르트르에 버금가는 명성을 얻은 인물로도 유명합니다. 물론 그도 마치 손쉽게 찍어내는 듯한 사르트르의 일관된 글쓰기에 질투를 느끼기도 했다고 주트는 소개하고 있습니다만 레몽 아롱 역시 비범한 지식인임에는 분명해 보였습니다. 1949년 이후 서유럽에 냉전의 그림자가 드리우자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이 집단 안보에 나서는 것이 단순히 군사적인게 아니라 정치적이고 심리적인 행보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전후 유럽 정치를 정확하게 본 인물로 유명했는데요. 자유주의와 시장의 문제가 민주주의의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잠정적으로 에견한다든지 국제 관계에서 이론적 현실주의에 몰입하는 것 또한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바탕에 있는 그의 신념은 “사회과학자 (지식인)의 과제는 과거나 현재에 벌어진 사회적 과정을 이해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지식인은 주어진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언제나 직시하고 선택해야 한다”고 일종의 지식인의 명제로 밝힌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어떻게 보면 당시 프랑스 사회학계를 뒤흔든 뒤르켐주의와는 궤를 달리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 개인적으로 아롱과 가브리엘 타르드는 비슷한 관점을 견지한 것이 아닌가 추측을 해보기도 하였습니다.

비슷한 시대를 살다간 쥘리앙 방다 역시 지식인들의 종잡을 수 없는 ‘무리(떼)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했던 바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지식인들의 무분별한 행태가 대중과 일반 시민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도 있기에 그러한 지식인들 자체가 사회의 해악이라고 여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 세 사람을 통해 주트가 소개하고 있는 1930년부터 1950년을 넘은 냉전시기까지 프랑스의 지식인 사회가 어떠한 굴곡을 갖고 있었는지 가감없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소위 지식인의 양심이라는 것이 허황된 신념과 왜곡된 가치에 전도되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프랑스의 비시 정권과 무모한 알제리 전쟁, 이집트 수에즈에 대한 영국과 프랑스의 개임 등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불완전하고 불확실성을 갖고 있는 인간들이 사회와 국가를 형성하고 그러한 바탕의 세계는 복잡하다는 일련의 전개는 실로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세계의 지식인들의 책무는 과연 무엇일지 이들 모두가 냉정하게 살펴보는 기회로 이 책을 반면 교사 삼아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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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생각하는 민주주의에 대해 문득 이 야밤에 여러분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로버트 달에 의하면 오늘날 민주주의는 사실상 엘리트 중심의 정치 체제 위에 선거제도를 비롯한 시민들의 기초적인 주권개념이 결합되어 있는 구조입니다. 사실 직접 민주주의는 추첨 민주주의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간접적으로 우리의 주권을 특히 정치인들에게 위임하는 것이죠. 그는 이 점에서 오로지 다원주의적 실험이 이 엘리트 지배에 대한 견제가 될 수 있다고 믿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났습니다.

민주주의하에서 이런 엘리트 지배체제의 반대 사례는 익히 존재합니다. 과거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내각이 엘리트 계층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로 대공황을 비롯한 위기를 슬기롭게 넘기기도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해리 트루먼 역시 다소 보잘것 없는 학력에 오로지 독서와 사색으로 백악관의 주인이 된 인물입니다

저는 여기서 한 가지 의심을 갖고 있는데요. 과연 전세계 엘리트들이 이 민주주의를 누구보다 신봉하고 있느냐는 부분입니다. 자신들을 보수 우파 엘리트라고 자임하는 많은 이들은 일반 대중에 의한 정치를 ‘중우정치’라 이해하고 이점을 두려워합니다. 이것과 관련하여 오늘날 집단지성이라 불리우는 일반 대중들의 출현이 나타났는데, 이를테면 정치 제안의 단계에서 이 집단지성들이 꽤 쓸모있는 의견피력과 토론 및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등의 놀라운 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점은 토크빌과 듀이와 같은 이들이 개인들의 정치 참여의 당위성이 어떠한가를 드러낸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민주주의 테두리 안의 이 엘리트 지배 체제를 완전히 불식 시키자는 게 아니라면, 신자유주의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민주적 통제로 여겨지는 앞선 이들에 대한 끊임없는 견제와 도덕적 환기를 집단지성이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 집단지성은 시민 개개인이 모여 이룩할 수 있는 그야말로 높은 단계이며, 민주주의를 축으로 정치경제 엘리트들과 시민들의 집단지성 및 각 3부의 시스템이 발전적인 균형 체제를 이룬다면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딛고 성공적으로 민주적 통제에 나서 시장-정치-주권이 서로 정상궤도에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앞선 정치-경제 엘리트들의 비밀스런 협조와 이해관계의 심화가 결국에는 과두제에 이르는 등의 민주주의의 쇠퇴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단순한 권력의 속성을 논하기에 앞서, 이 양대 엘리트들이 국가를 비롯한 사회 시스템 및 체제 전반을 자신들의 손으로 재구축하려는 시도를 전혀 배제하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민주주의는 이 시점에서 중요한 귀로에 서있는데요. 보수와 진보의 대결이라는 프레임 내지는 대결구도에 너무나 집중하고 있는 나머지 ‘밀실 엘리트들의 야합’을 시민들이 놓칠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이제 전통적인 주권 위임 상태의 고결한 정치인들을 찾아보기 힘든 상황에서 교묘한 자신들의 이익을 여러 수단을 통해 달성하려는 정치경제 엘리트들을 과연 시민들이 적절히 견제할 수 있느냐에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앞으로 우리의 민주주의가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는 계급 지배적 정치를 용인하기 힘든 정치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평등과 복지국가 개념을 이상하게 비틀어서 배포한 신자유주의자들이 금권의 저울을 스스로 들기 시작하면서 자본주의하에 돈의 가중으로 더 많은 자유를 보장받고 그것을 공고화하는 작업에 이미 많은 자원을 투입하고 있습니다. 촘스키가 이런 시스템이 결국 더 많은 부자들을 양산하기 위한 결과로 이어졌다고 말하는 것이 허언이 아닙니다. 이미 한번 국가가 시장을 구하는데 나섬으로써 자유시장주의자들에게 고약한 선례를 남긴 건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저는 우리의 민주주의가 단순히 위기의 순간에 있다, 어떤 막연한 경각심을 드리려는 것보다 개인의 사적 목적에 의한 적지 않은 행동 만큼이나 공적인 영역에 대한 관심과 또한 필요합니다. 사실 모든 경제 왜곡 문제들은 우리가 정상적인 견제 조치들을 통해 시스템 자체를 바꿔 나갈 수 있습니다. 소위 지식인들이 정의와 양심을 통해 모든 정치 권력을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비판해야 한다는 것이 옳은 과정이라면 이 지식인들이 다수의 시민들의 입과 손이 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죠.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건강한 여론을 형성하고 수많은 토론과 대화를 통해 충분히 이룩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 알라디너들은 책을 공유하고 지식을 서로 함께 하면서 많은 시민들을 같은 길로 인도할 수도 있죠.

아마도 많은 정치학자들이 우리의 연대와 참여를 바랐던 것은 바로 시스템 자체를 바꿀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있다고 믿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쯤에서 제가 인용하는 것을 즐겨하는 루소의 말은 적어보고 싶군요. “시민은 마땅히 정부를 갈아치울 권리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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