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에 대하여 - 현대 일본의 본성을 묻는 20년의 대화
서경식.다카하시 데쓰야 지음, 한승동 옮김 / 돌베개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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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본 교토에서 자이니치 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 대학을 거쳐 현재 도쿄게이자이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중인 서경식 선생과 일본 후쿠시마 출신으로 도쿄대 프랑스과를 졸업하고 현재 도쿄대학 대학원 총합문화연구과 교수이자, 일본 내에 자크 데리다에 관한 권위자로 명성을 얻은 대표적 리버럴 지식인 다카하시 데쓰야의 대담집 ‘책임에 대하여’를 일독했습니다. 개인적으로 특히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의 ‘희생의 시스템 후쿠시마 오키나와’를 꽤 인상깊게 읽었는데요. 이 책에서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는 소수의 희생으로 이익을 얻는 자들의 행태에 대해 날 선 비판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서경식 선생과 관련해서는 2017년 번역 출간된 ‘다시, 일본을 생각한다’를 읽고 일본에서 선생이 겪은 경험들을 통해 실로 비통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던 소회를 갖고 있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현대 일본의 본성을 묻는 20년의 대화’라는 부제는 우리에게는 실로 의미심장하며, 두 사람이 엮은 대화는 일본이라는 나라와 일본 국민의 가감없는 실체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글은 2018년 8월 처음 일본어로 출판되었고, 국내에는 2019년 8월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서경식 선생이 이 책의 서문에 쓴 한 문장을 먼저 언급하고 싶습니다. “국민 다수가 자숙하며 예속의 정도를 점점 심화시킬 때, 전체주의의 완성된 행태를 목도할 것이다.” 이것은 단연코 현재의 일본인들을 지칭한 문장입니다. 특히 “자신들의 역사를 판단하고 응답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무시했던 일본인들로서는 그 끝의 결과가 어떤식이 될지는 매우 자명합니다. 아마도 자신들의 역사를 판단하고 응답하게 될 때 아베 신조와 같은 인물은 설 땅을 잃게 될 것입니다.

우선, 이 글은 전체 4장의 주제와 한 분량의 자료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특히 2장인 ‘일본의 본성’이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여겨졌습니다. 1장에서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는 “전쟁 책임, 전후 책임, 식민 지배 책임 중 어느 것이든 1945년에 끝난 일본 제국 체제에 대한 책임을 불문에 붙여 왔다는 점, ‘중심부 일본 국민’이 그에 대한 판단을 회피해 왔다는 점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문제 제기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통해 일본 국민이 스스로 시민이 되기 보다는 범접할 수 없고, 건드릴 수 없는 전통적인 일왕의 신민이 되기를 자처하면서 그리고 자신들의 역사에 대해 판단하고 응답하는 어떠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서 이를 통해 일본 사회의 곳곳에 왜곡과 불철저함을 만들어냈다는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의 결론에 매우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뒤이어 2001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더반에서 있었던 과거 아프리카 대륙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유럽 종주국들의 도의적 책임을 도출한 ‘더반 회의’와 유사한 ‘여성국제전범법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NHK가 정치권의 압력에 굴복한 내용을 포함해 일본 내에서 역사문제를 다루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밝혀내는 등의 비판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요. 여기에는 자학 사관이라는 얼토당토 되지 않는 입장과 일본 지식인들이 정치에 전면에 나서 비판을 가하는 것을 금기시 하는 풍토가 한몫을 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2장은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박유하 씨의 최근 논란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로 박유하 씨의 ‘제국의 위안부’는 읽지 못했으나, 그의 법정 공방과 관련해 류시민, 김규항, 홍세화, 고종석 씨 등이 박유하 형사 기소에 반대하는 성명을 낸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사상적 자유를 옹호한 움직임으로 비록 박유하씨가 꽤 논란이 될 만한 주장을 해왔지만 개인 자유의 원칙적인 측면에서 법원에 의한 판단을 우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 책에서도 박유하 씨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는데요. 특히 박유하 씨의 ‘화해를 위해서’와 관련하여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는 “주요 논점으로 조선인 업자들의 책임을 강조하고, 일본군 내지 일본군의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입장이 명확하다.”며 자신은 이것에 설득당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일전에 어떤 일본 지식인은 우선 자국민들을 용서하고 구제해야 비로소 다른 나라의 피해자들을 돌아볼 수 있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다분한 것과 같습니다. 또한 박유하 씨가 지난 1995년에 발족한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 조성으로 일본이 사과한 것과 같다는 식의 주장도 비판하고 있습니다. 즉, 국민 기금이 있으므로 일본의 사죄의 자세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인데요. 사실 박유하 씨의 ‘제국의 위안부’와 ‘화해를 위해서’는 그 주장의 진위 여부와는 별개로 일본내의 우익과 한국의 사과 요구에 비판적인 이들의 논리로 교묘히 매개되어 왔다는 부분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런 전체적인 맥락에서 서경식 선생은 “피해자와 가해자 간에 매우 곤란한 화해가 가능하냐는 이야기를 아마도 의도적으로 끊임없이 혼동하면서, 화해를 받아들일 수 없는 개개의 피해자들에게 국가 간의 화해를 막는 존재라는 위치를 부여했다”고 해석합니다. 더불어 일본내의 리버럴 지식인 가운데 한 사람인 우에노 지즈코와 같은 사람이 이러한 한국의 태도와 정대협과 같은 단체를 내셔널주의적이다고 오도하는 것은 매우 큰 문제임은 자명합니다. 역사 문제와 관련해 개인이 한 국가를 상대로 진실과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매우 지난한 일이며, 이것을 한국인의 민족주의적 태도라고 우회 비판하는 것은 그만큼 유감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하물며 일부 위안부 할머니들이 정치적이다 라고 언급하는 것도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박유하는 일본의 법적 책임을 회피하는 방향의 논리를 세우고 있다”는 주장을 가볍게 들어서는 안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현재 나무위키에도 올라와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만, 박유하 씨의 ‘화해를 위해서’의 국내판에는 없고 일본판에만 있는 내용중에 “일본 지식인들이 스스로에 대해 물어 온 정도의 자기비판과 책임의식을 한국은 아직도 가져본 적이 없다”는 한줄이 대체 무슨 의도인지는 명확하게 이해하기는 힘들었습니다. 저도 역사의 고통을 저울질을 하는 것을 무엇보다 비판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행위자의 범죄를 여러 수단으로 가리는 것은 피해자를 두 번 욕보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오늘날 일본이 2001년 더반 회의를 거울 삼아 도의적 책임 이외의 법적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수단을 강구해 오지 않았나 유추해 보게 되었습니다. 끝으로 박노자 교수가 언급한대로 일본이 저지른 위안부 범죄는 ‘제네바 협약’, ‘헤이그 협약’, ‘국제 여성 인신매매 방지 조약’ 등에 대한 위반이므로 그것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물을 근거는 매우 명확하다는 것을 여기에 남겨두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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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라 진다 - 전후 70년, 현대 일본을 말하다
우치다 타츠루.시라이 사토시 지음, 정선태 옮김 / 우주소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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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대 불문과 출신으로 프랑스 현대사상 및 푸코와 라캉을 연구하고 말년에는 고베여학원대학에서 은퇴해 현재 명예교수로 있는 우치다 다쓰루와 와세다 정치학과 출신으로 정치학, 사회사상을 연구하면서 현재는 교토세이카대학의 교수로 있는 시라이 사토시의 두 번째 대담집 ‘사쿠라 진다’를 일독했습니다. 우선 시라이 사토시 교수는 얼마전 번역된 ‘영속패전론’으로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반향을 일으킨 바가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마르크스-레닌주의자’로 칭하고 있는데요. 이것과는 논외로 대담에 참여한 두 사람 다 일본 내 대표적인 리버럴 지식인이라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들의 첫번째 대담집은 2018년에 번역 출간된 ‘속국 민주주의론’입니다. 국내에는 두 번째로 번역 출간된 이 ‘사쿠라 진다’는 일본의 전후 70년이라는 주제로 지난 2015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올해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한 가지 출판사의 착오인지 아니면 알라딘의 임의 표기인지는 모르겠으나 책 표지에는 저자 이름이 우치다 다쓰루와 시라이 사토시로 표기되어 있으나, 알라딘 홈페이지에는 우치다 타츠루, 시라이 사토시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이 점은 양자간에 합의를 보던 어떻든 간에 수정이 필요해 보입니다.

일단 이 책은 총 4장의 큰 주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글을 관통하는 주제는 크게 ‘일본의 국내 정치와 대미관계 그리고 청산되지 않은 역사 문제 및 역사수정주의’를 다루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일본 내 리버럴 지식인들의 공통된 문제 의식인지는 모르겠으나, 사실상 일본이 미국의 속국 지위에 놓여 있는 것을 일본 정부가 이를 알면서도 묵인하는 건지 아니면 경제적 이익을 위해 외교와 군사 문제를 미국에 위임하는 것이 피치못한 문제로 보는 것인지에 대해 의구심과 함께 비판적 인식을 보이고 있습니다. 또한 일본과 미국과의 관계는 패전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 인가에 대한 입장 차이부터 미국의 안보 이익을 위한 일본의 군사 기지 지원과 같은 ‘배려예산’에 대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얼굴을 들고 다니는 많은 일본 정치인들과 국민들의 무의식을 포함합니다. 이것은 전후 국체호지를 위한 미국 정부와 일본 파시스트의 영합이라는 측면과 미일안보조약을 통한 평화헌법의 존재로 인해 일본인들 스스로 ‘군사적 발기 불능 상황’이라고 자조하면서도 미국의 영향력을 벗어나고자 하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는 일본 정부와 그 정치인들의 행태를 꼬집는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반세기 이상을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서 안주해 온 일본이 얼토당토 않게도 ‘전후의 탈각’을 목표로 ‘자학 사관 퇴출’과 ‘역사수정주의’를 주요 정치적 사업으로 확대시켜왔는데요. 지난 2013년 아베가 고노 담화를 무력화하려는 시도를 했을 때, 오마마의 백악관이 이에 대해 아주 불쾌한 평가와 함께 압력을 행한 것이 아베의 궁색한 변명과 함께 이를 철회하게 되었습니다. 끊임없는 역사 수정의 시도는 주요 주변국인 한국과 중국의 어떠한 의견에도 아랑곳 하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단지 백악관의 시선이 도쿄에 닿을때, 반응하는 것에만 일본 정부에게는 중요했던 것이죠. 이에 관해 시라이 사토시는 “분명 과거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가 일본의 국익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최근 부흥 올림픽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있는 도쿄 올림픽에 대한 주변국들의 보이콧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 점도 단순히 동일본 대지진 사태에 따른 환경 문제에 대한 측면 뿐만 아니라 현재 중국과 한국에서 증가한 ‘역사 압력’ 상황을 우려하는 것으로도 보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도쿄 올림픽 보다는 ‘후쿠시마 올림픽’이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 책과는 논외로 일본이 벌이고 있는 경제적 술수를 보노라면 이 후쿠시마 올림픽에 대한 좀 더 합리적인 대응이 필요하지 않나 판단해 봅니다.

과거 일본의 전중 세대는 “절대 말하지 않고 무덤까지 갖고 가겠다”는 그 소름끼치는 예의 침묵과 이를 바탕으로 과거 여러 장소에서 벌어졌던 일본군에 의한 지옥의 광경들을 왜 오늘날 다시 끄집어 내야 하는가라는 침묵의 정당성을 일본인들 스스로가 자의적인 판단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는 오늘날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에 대한 꽤 설득적인 매커니즘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역사를 무덤까지 안고 가는 전중세대의 침묵과 증인과 증거가 없다는 핑계로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도리어 이러한 과거 역사 문제들이 일본을 자학 사관에 빠지게 만든다는 이상한 해석이죠. 더군다나 평화헌법을 수정해 동맹국인 미국의 군사 협력을 좀 더 수월하게 하겠다는 본질을 흐리는 주장을 함께 곁들이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면에서 이 책의 3장에 더해져 있는 논의들은 큰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특히 “한국과 중국을 혐오하는 책이나 혐오 발언에서 알 수 있는, 하시모토 도오루와 아베 신조의 인격에서 배어나는 반지성주의, 또 그런 것을 환영하는 폭력적인 풍조” 등이 이를 말해준다는 우치다 다쓰루의 비판은 꼭 일본인들이 귀담아 들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미밀 동맹에만 기대어 방향타를 잡고 이를 위해 역사수정주의가 뒷받침하는 일본의 대외 정치의 요점은 “일본이 아시아에서 고립되는 결과를 낳았다”는 평가와 일맥상통합니다. 이 책의 저자들은 냉전 시기 이후에도 왜 미일 동맹은 굳건히 유지되고 있는가에 대한 의구심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맹이 존속과 의존적인 측면으로 일본이 스스로 미국의 속국임을 증명한 것밖에 되지 않았느냐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혐오하는 가당치도 않은 국제 관계와 자신들이 자유 민주주의적 가치를 믿고 있는 서방 진영이라고 믿고 있으면서도 퇴행적이고 전혀 되돌아보지 않는 역사 왜곡을 정당화하는데 있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일본인들 스스로에게도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님은 분명해보입니다. 끝으로 저자인 우치다 다쓰루는 2015년의 한국은 “확실히 민주화가 뒤쳐져 있고 정치 시스템도 문제가 많습니다”라는 표현으로 당시의 우리를 돌아보고 있는데요. 사실 금방 발끈하다가도 옮긴이가 달아놓은 것으로 보이는 주석으로 저자가 그렇게 받아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이후에 촛불 혁명으로 불의한 정권을 끝장냈으니 지금의 한국 민주주의는 그 위상이 달라졌다고 볼 수 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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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와 사회적 실천 고전의 세계 리커버
존 듀이 지음, 김진희 옮김 / 책세상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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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꽤 낯익은 교육철학자로 알려져 있는 존 듀이는 미국 버몬트 대학을 졸업하고 존스홉킨스 대학에 수학한 뒤 헤겔을 집중적으로 연구해 미국의 독특한 철학인 프래그머티즘의 사상적 확대를 일군 인물로도 유명합니다. 개인적으로 존 듀이는 민주주의에서 교육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단순한 교육 분야의 이론가 보다는 공공철학자로서 그를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특히 현대 민주주의의 위기는 시민들이 정치적 관심보다 즐길 오락 거리들이 많아지면서 발생할 수 있다는 경고는 정치철학의 측면에서 공공성의 관심을 기울여 온 측면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그의 1935년에 출간된 논저인 ‘자유주의와 사회적 실천’은 세계 대공황의 위기를 극복하고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을 사실상 지지한 책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원제는 ‘Liberalism and Social Action’ 으로 국내에는 과거 1980년대에 판권 없이 일역판을 번역해 출간된 책들이 있습니다만 2011년 책세상에서 번역 출간되어, 2018년에 대사 개정판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후에 나온 개정판을 구해 읽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총 3장의 구분으로 되어 있고, 글의 마지막에는 꽤 면밀한 해제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존 듀이가 밝히는 자유주의의 핵심은 프래그머티즘에 입각했다고 봐야하는 ‘실용적 자유주의’ 내지는 ‘진보적 자유주의’입니다. 우선 2장에서 존 듀이는 프랑스 혁명을 이끌었던 자유주의 혁명가들과 이론가들 및 자유주의자들이 분명 인간의 자유를 위한 세상을 처음 열었던 것을 기념비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즉, 이들 자유주의자들의 노력을 결코 망각해서는 안된다는 선언적인 의미도 담고 있는데요. 다만, 당시 세계 대공황 이전 혹은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자유주의는 크게 변질되어 1장의 초입에서 “자유주의자는 프롤레타리아의 고통을 인정하면서도 위기의 순간에는 늘 자본주의의 지배자 편에 서는 자들이다”라고 일침을 가하고 있습니다. 결국 듀이가 밝히는 쓸모있고 유용하며, 민주 정치에 도움되는 자유주의는 제도 구성의 철저한 변화와 그 변화를 실현시키기 위한 행위가 필요하다는 측면에서 급진적 인식을 주창했습니다.

결국 자유주의 사상이 가장 결핍된 문제는 지적 및 지성에 대해서 기존의 자유주의가 인간 바깥의 고립된 역할을 지지했고, 빅토리아 시기의 긍정의 시대 이후 과학과 기술의 놀라운 발전으로 지성의 문제를 편협하게 해석한 것은 그는 시대상과 맞지 않다는 입장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과거의 습속을 깨고, 인간들로 하여금 실제 사건에 근접하는 정신과 지적 그리고 도덕적 양식의 생성에 도움을 주게끔 하는 것이 자유주의가 개선하고 변화해야 되는 점으로 또한 인식하고 있습니다. 본래의 자유주의가 “지적-도덕적 방향성을 지닌 사회조직으로 조직화 하는 문제에 있어서 자유주의는 거의 무능했다”고 비판하며, 1장에서 자유의 문제를 그 시대 상황에서 재정의해야한다는 근본 원칙을 망각했다고 보는 시각과도 이 점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많은 개인에게는 이성과 조화를 이루는 동정심의 실천이 덕을 갖춘 행위의 기준이다”라고 독자들에게 이해시키는 과정도 그러한 맥락에 닿아 있습니다. 따라서 자유주의가 지성을 고립된 요소로 파악하는 것은 현실 정치에서 시민들의 정치철학적 질문들을 막아서는 문제로 비화될 수 있으며, 모두가 공유하고 발전시킨다는 대의 명제로서 지성의 역할을 반대하고 특별한 계층, 특수한 인물들만이 소유 내지는 발전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전반적인 인간 사회의 진보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더불어 3장에서는 현 시점과 약간 다른 인식적 배경이 있었는데요. 당시 미국 정치 무대에서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독립되고 분리되어 있는 상황이 오늘날의 보수정치와 신자유주의의 밀접한 관계와는 상이한 부분이었습니다. 이런 것을 차치하더라도 일찍이 제러미 벤담이 강조한 공익의 측면에서 자유주의가 어느 정도 의미있는 기여를 했다면 새롭게 발견된 자연권과 더 나아가 기본적인 자유의 확대가 인간 해방에 기여할 수 있는가에 대한 불확실성을 불식시키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예견해보기도 했습니다. 빅토리아 시대의 전반적인 시대긍정론과 같은 상황에서 자유주의자들이 과거의 역사에 개념치 않고 단지 실용주의적 입장에 치중했다는 듀이의 평가에 긍정하면서도 이 자유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입장과 지적 이론의 견고함을 강조하기 위해 수도 없이 과거의 역사를 인용하는 것은 역사의 원칙없는 차용이 어떠한 인식 파괴를 불러일으켰는지 명백히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전체적으로 저는 이 책을 통해 1800년대 후반부터 그 이후의 자유주의가 어떠한 길을 걸었는지 대략적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꽤 변혁적이었던 다윈과 멜서스의 진화론의 다수를 받아들여 허버트 스펜서와 같은 이들이 자유주의가 양산한 불평등의 문제를 원인과 결과론으로 한정해 버린 것과 같은 자유 자체가 교조주의적 성향을 띠게 되는 폐해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개인의 경제 자유와 그에 따른 정치의 불간섭을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자들이 날이 가면 갈수록 교조화가 되어가는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상적 주장에는 반드시 그것을 상식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상대가 있어야 하며, 존 듀이가 강조했듯이 그 시대에 맞는 사상, 그 시대에 부합하는 사상으로 철저히 분석하고 개량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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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인간답게 - 글로벌 공공 윤리를 위해
프레드 달마이어 지음, 신충식.최인자 옮김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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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출신의 미국 철학자이자 정치 이론가인 프레드 달마이어 교수는 독일 뮌헨 대학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고 도미해 듀크 대학에서 다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수여 받은 정치학과 법학의 권위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특히 40여권이나 되는 논저를 쓰는 등의 연구 활동에도 매진하고 있는 학자이기도 한데요. 독일과 프랑스 등지에서도 큰 학문적 명성을 얻고 있기도 합니다. 지금 소개해 드릴 이 ‘인간을 인간답게’라는 책은 지난 2011년과 2012년의 특별 강연을 위해 경희대를 세차례 다녀가며 행한 세 번의 강연을 책으로 묶은 것으로, 여기에 마이클 센델과 관련 논문 한편을 포함하여 뒤이은 2014년에 정식 출간된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과거 경희대에서 강연한 슬라보예 지젝과 약간 오버랩 되기도 했는데요. 단연 경희대 후마니타스에서 꽤 흥미로운 기획을 하고 있다고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크게 이 책은 총 4장의 주제로 되어 있는데요. 좀 전에도 언급했듯이 1장과 2장 그리고 4장은 경희대에서의 강연을 묶은 것이고, 3장은 마이클 센델에 대한 달마이어 교수의 논문이라 볼 수 있습니다.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주제는 ‘오늘날 맞이하고 있는 인문학의 위기와 과거 자유방임주의를 거쳐 신자유주의 시기에 맞이하고 있는 개인의 실익추구와 영리활동에 어떤 사회 역사적 배경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러한 인식하에 부자들이 가난한자를 지배하는 오늘날의 구조적 문제에 대해 과연 민주주의가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고찰해 보고자 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저자인 달마이어 교수는 오늘날 전세계적인 인문학의 위기 내지는 쇠퇴에 대해 근대주의가 목표를 삼고 있는 경제적 이득과 쓸모의 문제에서 인문학 자체가 그것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핑계로 각 대학들의 학문적 목적이 급격하게 변화되어 왔고 여기에 반인본주의적 경향이 더해짐으로써 이 인문학이 설 곳을 잃었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이런 근대를 떠받쳤던 “근대자유주의는 자유와 ‘자연권’을 중시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제국주의와 식민지배에 번번이 연루되었다”면서 저자는 그 이면을 이처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근대성에서의 인문학에 의한 투쟁은 있어 왔지만, 프랜시스 베이컨과 그 추종자들에 의해 전통적인 실천 방안이나 사상이 구태의연한 것으로 치부되고 그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끊임없었지만 자연과학이 점차 경제적 이익에 기여를 함으로써 인간 본연으로 회귀하자는 인문주의 자체가 거부되어 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즉, 자본주의 시대가 채 도래하지 않은 시점에 ‘도덕감정론’ 보다는 시장주의 경제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것으로 더 알려져 있는 애덤 스미스의 사례와 같이 전방위적으로 인간의 이익 추구와 그런 ‘자연상태’를 옹호하는 분위기가 날로 축적되어 왔습니다. 이런 내용의 1장 말미에 말마이어는 누스바움을 인용하면서 민주주의가 이러한 시대에 어느정도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부분을 강조하고 있는데요. 사실 3장의 센델과 관련된 논문에서 “민주주의는 완전한 평등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시민들이 공통된 삶을 함께 나눌 것을 요구한다”는 센델의 결론은 위에서 달마이어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 완전히 부합된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 2장은 인간이 사회를 이루어 마땅히 추구해야 되는 ‘정치적 신체’에 대해 논의되고 있습니다. 홉스의 해석을 “끝없는 경쟁, 자신감 결여, 명예의 추구에서 보이는 욕망의 멈추지 않는 운동은 알려진 바대로 폭력적 충돌로 귀결”된다고 보면서 개인들의 의지가 모여 어떤 최고의 의지가 되었을 때, 이를 바탕으로 자연상태를 벗어나게 끔 되는 메커니즘을 홉스가 정치사회학적 고안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봅니다. 아주 단적으로 말하자면 ‘사회를 이루는 모든 인간들의 이익 추구 및 그와 관련된 광범위한 충돌’의 자연상태가 과연 모든 인간들에 이득이 될 수 있겠는가는 꽤 명백합니다. 권력의 사유화와 효과적인 자원을 가진 계층의 인간들조차 국가를 완전하게 해방시키기 보다는 ‘야경국가’라는 측면에서 일종의 자신들의 자원과 이득의 협소화를 감내해야하는 하위 계층의 불만을 맡으라고 한 것이 아닌가 충분히 오해할 만합니다. 그래서 법과 제도는 인간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이러한 토대를 반하게 되는 시도는 결국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이를테면 다윈의 진화론을 적극적인 사회적 도태론으로 결부시킨 스펜서주의자들과 그것의 추종자라고 봐도 무방한 전체주의의 촉발이 이와 같습니다.

사실 몽테스키외를 비롯한 실증주의적 법철학은 다소 인간들이 안락하고 편안한 생활을 누리기를 원하는 기본적인 욕구까지도 까칠하게 대응한 면이 있기도 했습니다. 인간이 이루는 모든 사회의 실증적인 증명과 그에 따른 결론 도출이 매번 합리적인 것은 아니며, 인간 이외의 좀더 초월적이고 고차원적인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 또한 어불성설이도 합니다. 따로 제러미 벤담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각 개개인들의 조화로운 공통이익을 위한 충분한 공감대가 있어야만 하고 그것이 역사의 진보일테지만 “국가 기관이나 민영기업의 무자비한 지배와 착취가 사회를 속박해 왔다”는 측면의 이해는 결코 부정할 수 없는 것이죠. 그래서 달마이어 교수가 3장에서 요점으로 밝히고 있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가장 명백한 결점은 균형의 완벽한 부제다”라는 인식이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모든 시민들이 충분히 받아들일만한 권력에 대한 공감대는 공공선을 바탕으로 이것을 무시하지 않는 그런 권력일텐데, 개인의 최대 자유를 경제적 이익 추구에 방점을 두고 있는 과거의 자유주의와 오늘날의 신자유주의가 과연 이러한 공동선을 갖고 있느냐에 대해선 모두들 회의적인 평가를 내릴 수 밖에 없겠죠.

결국 오늘날의 시장의 도덕적 한계는 매우 명확하고 이를 공공선과 공동의 이익이라는 측면의 가치 재조명에 우리 시민들이 충분하게 인식하고 공감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를 시장 자유주의의의 시녀로 만들어 버린 신자유주의자들의 왜곡에 당연히 반대 의견을 피력해야 하며, 센델이 주장했던 것과 같이 ‘경제적 치유’에 어떠한 현실적 방안이 있을지 좀 더 고민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서평에서 저는 몇번이나 언급한대로, 지그문트 바우만이 우리모두가 무덤으로 같이 들어가지 않기 위해 여기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 있어야 된다고 여겨집니다. 프레드 달마이어 교수 역시 이 책을 통해 인간성의 회복, 민주주의의 역할론, 근대를 만든 여타 자유주의적 배타성에 대해 진지하게 사회철학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실생활과 이론적 실천방안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는 실로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서구와 비서구를 가리지 않고 오늘날 인문학은 과학 기술 발전을 우선시하는 이른바 ‘근대화’ 세력에 의해 직면해 수세적 자세를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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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하거나 통제되거나 - 소셜 시대를 살아가는 10가지 생존법칙
더글러스 러시코프 지음, 김상현 옮김 / 민음사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프린스턴과 캘리포니아 예술학교를 거쳐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미국 내에서 미디어 이론가, 작가, 칼럼니스트, 그래픽 소설가 및 다큐멘터리 제작자로 알려져 있는 더글러스 러시코프는 특히 인터넷과 미디어와 관련된 글을 여러 매체에 기고하며 특별한 관심을 표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 연장선상에 있는 책이 바로 이 ‘통제하거나 통제되거나’일 것입니다. 원제 ‘Program or Be Programmed’ 로 지난 2010년 출간된 이 책은 국내에 2011년 소개된 바가 있습니다. 현재는 절판된 상태라 시중에서는 쉽게 구할 수 없는 점을 참고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자인 러시코프는 자신의 이 책과 관련해 이러한 글을 쓰게 된 연유로 현재 우리의 특별한 인터넷 미디어 시대에 10가지 편향성이 존재하며, 물론 이것이 전혀 개선 내지는 변화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라고 결말에서 짧게 밝히고 있는데요. 즉, 초기 폐쇄된 특정 기능의 웹기반에서 현재 세계에 있는 모두가 자유롭고 제한없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인터넷 세계에서 앞으로 좀 더 모두에게 상생하고 이득이 될 수 있도록 어떤 방향성을 잡아야 하는지에 대한 일종의 나레이션적 성격의 글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글은 전체적으로 꽤 이해하기 쉬운 주장들로 채워져 있고, 번역 또한 나쁘지 않았습니다. 간혹 이해하기 힘든 용어에 대해서는 지면에 따로 공간을 만들어 설명을 하고 있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다만 읽는 분들에 따라 가독성에 영향이 있을 수도 있으니 그 점 참고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과거 계몽주의적 혁명에 입각해 우리가 주권 개념을 받아들인 시점 부터 인간은 늘 선택의 문제에 고민해 왔습니다. 온전히 자기 자신만의 삶을 결정하기 위한 선택의 문제 뿐만 아니라 나를 포함한 모두가 정당한 권리와 안전한 사회를 바탕으로 이를 규정하는 정치와 국가를 만드는 데 이런 무수한 선택들이 기반이 되어 왔는데요. 러시코프 역시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인터넷 미디어 시대에 지식 및 토론과 결부지어 한가지 주제를 던지고 있습니다. 즉, “디지털 시대의 자유란 어떻게 그리고 누구와 당신의 생각을 나눌지 선택하는 자유”라고 강조하며, 이것을 중점적으로 보존할 수 있는 방법론들에 대해 이 책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지금과 달리 과거에는 소위 지식 소유의 한정성이라는 기준에서 일부 대학과 전문가들이 특정 지식들을 포함한 거의 대부분의 지식을 독점해 왔으나, 현재는 “민주적인 정보의 접근성과 더불어 전문가들의 정보 독점이 약화된 특별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명백하게 과거 엘리트들을 포함한 기득권을 쥐고 있던 계층들이 절대 다수의 무지한 대중들에 대한 근거없는 공포를 여러 차원에서 무력화시키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다만, 우리가 인식해야 하는 중요한 한 가지는 우리 스스로 이런 오픈된 세계와 공유하는 수단들을 가지고 이를 악용하지 않고 스스로 편향되지 않게 하는 자정 능력을 보유할 수 있겠는가가 앞으로 사활적인 모험이 되겠습니다.

또한 위의 관점 외에도 인터넷 미디어 전반이 민영화되어 벌어지는 양면성과 수많은 개인들의 정보를 갖고 이득을 취하는 기업들에 대해 과연 우리가 어떠한 일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논의를 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인터넷 기업들의 휘발성을 밝히면서도 우리의 이웃들과 친구들을 통해 이익을 취하는 것에 ‘공유의 정신’과 오픈 소스라는 자산에서 벌어지는 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이 책은 꽤 진지한 해답을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7장에서 세계의 친구들을 통해 이득을 얻으려 하지 말라는 소주제는 “소셜 네트워킹 사이트가 그 정책들을 계속해서 바꾸는 데에 사람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사실 프라이버시 침해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우정을 돈으로 바꾸려는 기업의 속셈 때문이다”라고 그 이면성을 꼬집고 있습니다. 아마도 오픈된 공간 내에서 세계인 모두가 구축한 이 인터넷 시스템하에 과연 민영 기업이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이유가 되는가에 우리는 좀 더 집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마이크로소프트가 정부로부터 리눅스를 배제시키기 위해 암호화 작업과 관련된 견제를 해왔던 것은 꽤 의미심장하기도 합니다.

“대충 매체와 디지털 미디어 사이의 근본적 차이는 쌍방향성이다”는 주제와 관련해서도 기존의 대중 매체의 소비자들은 일방향적인 측면이 강했던 반면에 오늘날 디지털 미디어의 소비층은 활발한 의견교환과 더불어 적극적인 소비형태를 띄게 되었습니다. 물론 9장과 관련된 논의에서 “적극적으로 공유하되 도둑질하지는 말아라”는 일침은 적극적인 디지털 시대에서 활발한 저작 활동에 대한 중요한 전제를 표명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다수의 개인정보와 활동을 통해 이익을 얻는 기업들에 대해 저자는 부정적인 입장이면서도 개인이 활발하게 디지털 문화적 생산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찬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정당한 저작권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도 앞선 인식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6장에서는 약간 논란이 될 만한 주제로 글을 쓰고 있는데요. 인터넷 익명성과 관련하여 저자 자신의 경험을 소개하면서 정부가 개인을 검열하고 자료를 수집하는 것보다 다수의 익명이 자신이 쓴 글을 가지고 정보를 수집해 무고한 피해자를 낳게 되었다는 일례입니다. 자신의 이름과 주소를 잘못 수집해 본인이 아닌 타인이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이었는데요. 이것을 개선시키기 위해 무분별한 익명 상태를 벗어나 “우리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는 것을 표준으로 삼는 것이다”라고 저자는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책임지지 못할 말은 디지털 영역에 올리지 말라고 하는 것도 익명에서 숨어 되도않는 말을 옮기는 것보다 자신의 신분과 입장을 밝히고 사실만을 인용하고 주장하라는 것인데, 쓸모있는 여론과 쓸모없는 여론의 진위여부를 가리는 것은 여론 자체의 신빙성을 물고 늘어지는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만 무엇보다도 현실의 법이나 규범이 들어오기 전에 우리 모두가 스스로 자정능력을 통해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넷 상에서의 여론과 시민들이 갖는 의견이 어떤 측면에서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데요. 선동이나 기만이라는 것만 놓고 인터넷 여론이 기여한 민주주의에 대해 과도한 자기검열을 놓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거짓에 근거한 타인에 대한 인신공격은 제한되어야 하지만 익명이 필요한 곳이 있고, 자신의 말을 책임을 질 정도로 사실에 기반한 넷 윤리가 무엇보다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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