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받으리라, 너희 법률가들이여!
프레드 로델 지음, 이승훈 옮김 / 후마니타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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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80년 6월에 작고한 (이 책에는 1981년 세상을 떠난 것으로 나와 있으나, 위키백과에서는 사망 날짜까지 표기되어 있습니다) 프레드 로덱은 26세에 천재성을 인정받아 미 예일대 로스쿨 교수로 일하게 됩니다. 그로부터 40여년간 존경받는 법학자로 명성을 떨치고, 특히 1939년에 출간된 이 책이 미국의 거의 모든 법률가들이 읽게 되면서 큰 반향을 일으킨 바가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어느 호텔에서 이름모를 변호사를 만난 일화에서 또한 손수 서문을 남긴 진보적인 판사 ‘제롬 프랭크 판사’의 소개까지 미루어 짐작해보면 글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됩니다. 앞서 짧게 언급한대로 이 책은 지난 1939년 “Woe, Unto You Lawyers!”라는 원제로 처음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4년 후마니타스에 의해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간략히 이 책의 구성을 소개해드리자면 총 12장의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 각 개별 주제들은 1장부터 10장까지 차례대로 논증되며, 그리고 11장과 12장이 글의 결론이자 이상적인 대안을 표방하는 형태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글의 해석과 관련하여 전체적으로는 미국의 연방법과 연방대법원 및 독립 시기의 헌법 취지와 시민권 및 대공황시기의 루즈벨트 행정부 시대를 주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저와 같은 법의 문외한이 특히나 미국의 연방법 체계와 이를 바탕으로 하위 법률로 실제 법치주의에 이르는 과정 전반을 다루고 이해하는 것은 다소 어렵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아쉬웠던 부분은 미국 헌법을 다루고 있는 국내 학자의 책 한권을 중도에 그만두었던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런 연유로 조만간 다시 잡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했습니다.

이 글의 저자인 프레드 로덱은 미국의 사법체계와 그 관료들의 행태와 시스템을 여지없이 비판하고 있는데요. 이러한 배경에는 바로 “사법제도 및 사법부 역시 시민의 마땅한 견제를 받아야만 한다”는 권력이 마땅히 국민으로부터 나와, 각 정부 기관이 그러한 위임을 받아 정당한 통치 행위를 실행한다는 취지의 인식에 기반하고 있었는데요. 즉, 사법부가 크게는 민주제하에 정부의 일원으로서 마땅히 시민 모두의 견제와 감시를 받아야만 하는 당위성을 바탕으로 1장에서 그렇게 밝혀두고 있습니다. 약간 극단적인 주장일 수도 있으나 “우리의 정부는 ‘인민의 정부’가 아닌 법률가의 정부다”라고 규정하는 것은 미국에서 조차 연방대법원과 사법체계 및 사법 관료들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만하다고 여겨졌습니다. 또한 “법률업은 간단히 말해, 고등 사기술 high-class racket 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하는 것도 헌법에 기반한 하위 법률들이 판사의 재해석과 판결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으며, 그러한 재해석이 과연 개인의 의견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헌법의 정의와 의지에 기반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역시 깊은 회의를 보이고 있습니다. 과거 홈스 대법관은 이와 관련하여 “법이 모호하고 부정확 할 때 법관 개인의 편견이 작용할 위험성”을 경고했고, 연방 대법원장인 찰스 에반스 휴스는 “우리는 모두 헌법 아래 있다. 그러나 헌법이란 법관이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은근슬쩍 말했던 것은 특히,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사가 어떠한 권력을 누리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또한 이렇게 논증이 이어지는 6장에서는 “법적 절차의 공허함과 부적절함”으로 사법 제도의 불분명성이 강조되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저자의 인식에는 헌법의 각 조항을 하위 법률로 해석할 경우 각 법관들이 심각히 추상적이고, 불분명한 법적 용어들과 중의적인 표현으로 조항 자체를 누더기로 만들어 자신들이 아니면 (법률가들)누구도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어 시민들의 정의를 위한 사법체계 자체가 더욱더 괴리와 거리가 생기는 결과를 낳았다고 저자는 일침합니다. 또한, 법률가들은 자신이 속한 직업세계에 대한 당위적인 반응과 필요성에 집착하여, 한발 떨어져 법과 사법 제도를 객관적으로 살펴보는 기회를 스스로 차단하고 심지어 “지역 사회에서의 지위, 업계 동료들 사이에서의 위신, 스스로에 대해 갖는 자부심이 몽땅 자신이 말하는 것을 자신이 알고 있다는 가정위에 매달려 있다”고 이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법률가는 그저 법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을 뿐이다”라는 문장은 그것의 본위가 어디에 있는지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처럼 “법률가들은 알지만 비법률가들은 모르는 것”과 “법이라는 언어의 마술은 사회적 한계를 알지 못한다”는 등의 실랄한 표현들은 특히 법률과 해석에 이어 이러한 생태계 안에 들어가 있는 수많은 법률인들이 법은 아무나 다룰수가 없으며 설사 권력의 주체가 다수 시민에 의해 주어진 것이라 할지라도 이것을 명확히 실현하고 합리적으로 다수 전반을 이해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법률가들 뿐이다”라는 것은 실로 통탄할 지경입니다. 우리는 익히 수많은 정치학자들과 정치학을 통해 국가의 정당하고 필연적인 당위성을 제공하는 것이 헌법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 헌법은 시민의 권리를 제한하거나 좀 더 수월한 통치를 받기 위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국가보다 더 중요한 것이 국민들이며 과거 계몽주의적 공리에 따라 정당하고도 정의로운 가치를 사회와 국가에 세우기 위한 틀이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그러한 헌법과 법률을 다루는 기술을 오로지 엘리트 관료주의와 다름없는 현 체계에 의해 매우 강력하고 틈이없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재교육 없이 “뛰어난 관료 자체”에게 일임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에 대해 우리는 고민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관련해서도 저자인 프레드 로델은 우리가 그동안 사법체계와 결탁한 거대기업 총수들과 부유층 들의 과도한 권력 행위에 대해 수도없이 또한 끊임없이 귀에 딱지가 붙도록 비판해 왔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한치도 나아가지 못했다고 역설합니다. 저는 일례로 기존의 사법 시스템의 관료들을 선발하는 로스쿨과 같은 현행 제도를 유지하되, 경력이 오래된 고위 판사들이나 대법원의 판사들 가운데 얼마정도는 지방 선거를 통해 선출하거나 출중한 능력의 변호사들 가운데 다수로 선발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강력하고 자비없는 사정을 판사들에게도 시행되어야 하며, 우리나라와 같이 판사를 해임하는 것을 오직 국회에 맡기는 제도 또한 시급히 개선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저자는 실효적으로 적용이 가능한 사법 제도에 대한 개선안을 11장에서 여럿 제시하고 있습니다. 경제 분야에 있어서 전문가의 처리를 위임하는 방안이라든지, 법원 안에 따로 결정기구를 만들어 기존의 판사들의 협의체가 아니라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자문위원이 아니라 ‘법률 실행위원’으로 위촉해 시민들이 전문적인 판결을 받게하자는 등의 제안들입니다. 사실 어느 민주국가이든 사법 당국의 기득권과 폐쇄성은 자신들만의 울타리를 만들정도로 그 폐해가 심각했습니다. 헌법을 통해 인간이 인간을 판결하는 것 자체가 단순히 판사와 법정에 참석한 해당 당사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저자인 로델이 밝히고 있듯이, 모든 일반인들이 “마땅히 동등하게 법을 살 수 있어야” 하며, 특별히 억울한 일을 당한 시민들이 적절하게 구제 받을 수 있도록 국가가 공익 변호인 법인과 같은 기구를 만들어서 얼마간 공적 자금을 지원해 현재의 국선 변호사의 업그레이드 판을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지 이 책을 통해 고민해보기도 했습니다. 예전에 토크빌은 민주주의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는 비범한 시민들이 각자의 생각을 제안하고 정치 자체의 책임감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로버트 달은 대중 정치의 오욕을 극복하여 모든 시민이 자신들의 비범함을 잊지 않아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건전한 시민들이 모여 만드는 정치를 저는 아직도 희망하며, 이러한 가운데 사법과 행정 및 입법을 견제하고 감시하는 시민들이 권력에 경종을 울리는 사회가 하루빨리 완성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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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andante 2020-02-02 19: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법률만능주의만큼 위험한 것도 없지요. 어떻게 보면 극도의 반지성주의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 같기도 합니다...

베터라이프 2020-02-02 19:37   좋아요 1 | URL
우리가 사법체계에 접근하기가 실로 어려운 부분이 시민과 법을 괴리시키는 게 아닌가 싶은데요. 여기에는 법관들의 권위라는 문제. 판결에 이의는 없다는 등의 다소 비타협적인 측면도 한몫 한다고 생각이 드네요. 제가 극도로 경계하는 반지성주의는 우리 시민들이 무조건 멀리해야 하는 폐기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여튼 댓글 감사드립니다.

파란놀 2022-06-13 0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마니타스가 처음이 아닙니다.
박홍규 님이 1986년에 처음 우리말로 옮긴 책이고
2014년 이 판은 ‘복간본‘입니다.

베터라이프 2022-06-13 09:10   좋아요 0 | URL
보충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숲노래님. 잠깐 첨언을 드리자면 원서의 처음 출간을 말씀드린거고 글 보시면 후마니타스가 국내 처음 번역이라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하여튼 댓글 감사드립니다.
 
왜 자유인가? - 당신의 삶, 당신의 선택, 당신의 미래
탐 G. 팔머 지음, 전계운 외 7인 옮김 / 바른북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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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특이하게도 편저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톰 G. 팔머는 자유주의 논저의 저자이자 자유주의 이론가입니다. 그는 세인트존스 칼리지를 거쳐 워싱턴 DC의 더 카톨릭 유니버시티 오브 아메리카,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옥스포드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바가 있습니다. 현재는 미국의 억만장자인 코크 가문이 출연한 것으로 유명한 케이토 연구소 Cato Institute의 선임 연구원이지자 아틀라스 네트워크 재단의 수석 부회장으로 재직중입니다. 우선 이 책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점은 7명의 번역자가 참여했다는 점과 번역본에 대한 정확한 원전에 대한 정보가 잡히지 않는다는 부분입니다. 아틀라스 재단이 출판한 것은 확실하나 팔머가 편저로 참여했다는 점에서 일종의 에세이나 소논문 형식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저로서는 다소 정보가 부족하였기에 이 정도로만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편저자인 팔머와 이 글의 대표(?) 역자는 자신들의 자유에 대한 근거와 해석을 위해 데이비드 보아즈의 논저를 인용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이사야 벌린이 기초했던 자유주의 담론과 여러 사회학 계통 및 정치철학의 흐름대로 서두에 언급하고 있는 자유지상주의 LIbertarianism 를 자유주의로 소급해 규정하는 것에 반대하고 싶습니다. 뒤에 3장에서 편저자인 팔머가 ‘자유주의자들은 ‘자유’ 그 자체를 원칙으로 삼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에 단순히 의미와 어감이 축소되는 자유주의자 만으로는 이들을 규정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뒤이어 이어지는 논증에서도 저의 이런 인식을 뒷받침하는 내용들이 등장하고 있어 더욱 동의하기 힘들었는데요. 여기에는 다소 논점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모르겠으나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법의 필요성을 개인들의 사유 재산 보호라든지 살인과 강간 등 극악의 범죄를 방지하기 위해 효용이 있다는 식의 해석 뿐만 아니라 논증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힘든 ‘헌법에 의한 정부의 제한’이란 목적을 중요하게 강조하는 등 이들 모두가 단순한 자유주의자가 아니라 자유지상주의자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더욱이 편저자인 톰 팔머는 뒤에서 미국 오바마 행정부 후기에 일어난 티파티 운동에 대한 실망감을 표출하고 있었는데요. 이러한 소회의 정확한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을 하지 않아도 짐작할 만했습니다.

간혹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오역되는 장 자크 루소의 일반의지는 굳이 그것의 개연성과 내면의 숨은 뜻을 밝히지 않더라도 이러한 시민들의 일반의지가 근대 공화주의의 원천임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가 조직되지 않은 자연상태에서 인간들의 서슴없는 행동과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행위 및 여러 위험 상태에서의 요소들을 방지하고자 정부를 조직하고 시민의 권력을 위임시켰습니다. 이 쯤에서 되묻는 것은 민주주의의 토대가 된 위임된 권력의 정부가 우리의 자유에 반하기만 한 것인지에 대해 적절한 답변을 듣고 싶어지더군요. 자유주의자들이 권력과 권위의 존재를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냥 아주 간단히 말씀드린다면 쇼펜하우어가 인정했듯이 인간은 아주 불확실하기에 매번 인간과 인간 사이 혹은 인간 무리에 놓여 있는 개개인이 언제나 합리적 이성을 발휘하여 사회적 절제심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에 대해서저도 회의적입니다. 어떻게 보면 시민들의 권리와 그 자유를 보호 하기 위해 정부는 필요불가결한 것이며 반대로 무정부 상태하에서 개개인들의 자유가 (실질적으로)으로 보장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이미 답이 나와있지 않습니까. 프란츠 오펜하이머가 피력한 국가론에 이미 비슷한 관점이 나오기도 합니다.

비록 자유가 정치철학의 범주안에 속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현실에서는 자유가 단순히 철학의 문제에만 국한되지는 않습니다. 시장에서의 확실한 자유주의는 법과 제도에 우선해 ‘확실하고 자유로운 이익’ 만을 위하는 것은 익히 잘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에 편저자인 팔머는 글의 10장에서 “정부 간섭들의 거대한 연동체계가 엄청난 ‘주택 거품’을 창조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실로 무지의 극치라 불릴만 했습니다. 애초에 스티걸-글래스 법의 무력화와 그에 따른 금융 시장에서의 거대한 모럴해저드가 어떠한 결과에 도달했는지는 이미 명확히 다 나와 있지요. 여기에 한술 더떠 그렇게 혐오해 마지 않았던 정부에 의한 공적자금을 받아놓고서도 개인의 영리활동의 자유를 숭상하고 누리던 자들이 이 공적 자금으로 퇴직금 잔치와 가당치도 않은 인센티브를 뿌려댔던 것이 눈에 선합니다. 더욱이 금융 위기에 책임있는 자들 어느 누구도 기소도 되지 않았던 것을 포함해서죠.

따라서 현재의 자유와 자유시장주의 및 꽤 민주화가 진행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이미 개인의 자유와 그 자유의 원칙이 충분히 실효성 있게 보장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시진핑 치하의 중국과 푸틴 치하의 러시아와 같은 무늬만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전제 국가들은 아직도 시민의 자유가 묘연하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글의 6장인 정치적 자유의 원리에서 등장한 ‘결과의 평등’이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어떤 진정성을 함의하고 있다면 정치적이고 더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에 처한 시민들의 자유가 과연 보장되고 있는지에 대해 더 깊은 논의를 해봐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팔머는 경제적 불평등과 같은 문제를 정부를 통해 논하는 것을 회의적으로 봤지만, 현재 일반 시민들과 부유층 및 거대 기업의 소유자들과의 권력 관계가 현저하게 차이 나고 있는 시점에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이러한 불균형한 권력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점에 대해 자유주의자들의 진정성은 어디에 있는지 스스로 고백해봐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자유주의자들의 정치적 스펙트럼이 중도 좌파와 중도 우파에 넒게 펴져 있다고 해석하는 부분에서 현실성이 동떨어져 있다고 제가 이해했던 것은 바로 위의 양자 사이의 단절에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또한 “정치에서 실현되어야 할 최우선의 가치는 바로 자유다”가 아니라 정치에서 실현되어야 할 중요한 가치들 중에 하나가 자유다 라고 해야 급진적인 자유주의자들 및 자유지상주의자들이 모든 시민에게 얼마간의 정치적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 근거가 될 것이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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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 사회란 무엇인가
피터 코닝 지음, 박병화 옮김 / 에코리브르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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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에 생명과학을 접목시켜 비판적 사회 이론으로 무장한 이 글의 피터 코닝은 미국의 생물학자이자 복잡계 과학자이기도 한데요. 여기서 복잡계 과학이란 인간, 사회, 경제 등 여러 분야에 얽힌 복잡한 요소들을 학문적으로 규명해 내고자 하는 일련의 과학입니다. 브라운 대학을 거쳐 뉴욕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코닝은 이런 자신의 학문적 운명을 위해 워싱턴 주에 소재한 복잡계연구소 Institute for the Study of Complex Systems 의 소장을 역임하고 있기도 합니다. 따라서 일종의 복잡계 과학의 해법이 녹아든 공정과 공정사회의 필요성이 담긴 이 책은 지난 2011년 “The Fair Society”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도 같은 해인 2011년 번역 출판되었으나, 현재는 절판된 상태입니다.

우선, 이 책은 총 8장의 연관된 주제별과 마지막 결론을 포함한 구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공정과 공정 사회의 가치가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적절한 요구와 대안이 담긴 8장이 개인적으로는 매우 중요하다고 여겨졌는데요. 뿐만 아니라 19세기형 이데올로기의 한계라고까지 규정짓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해석한 6장 또한 나름 중요하다고 언급하고 싶습니다. 책에서 인용되어 있는 바와 같이 하이에크는 정의 자체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냉소했는데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자유주의자들과 자본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이행 과정에서 다소의 불평등과 차별은 불가피한 일이며, 전통주의적 경제학에서 신성시 되는 개인의 합리적 이기심과 이윤추구가 어찌됐든 최종적으로 시민들의 보편적 복지를 포함한 사회 안전망에 이바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되었지만 그것은 사실상 허구에 지나지 않았음이 밝혀졌습니다. 여기에 더 1980년대에 무차별적으로 진행되었던 “가능한 자들의 지대한 이윤추구”는 확실히 보장된 반면 전자를 위해 희생당한 민주주의와 평등, 법의 지배 등과 같은 도덕주의적 관념은 깡그리 무시됨으로써 나온 결과가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현실일 겁니다. 저는 제 입으로 이런 아포칼립스적인 상황을 읊어대는 것을 즐거워하지는 않습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죽기전에 우리에게 경고했던 것처럼 우리의 삶이 과연 인간다운 충족을 통해 존엄성을 가져갈 수 있겠는가와 쓰레기가 되는 삶에서 구원받을 수 있겠는가에 대해 그 전망이 불확실한 것은 익히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면에서 이 책은 생태학과 진화론의 풍부한 관점과 동물과 인간이 어떻게 다를 수 있느냐에 대한 개괄을 포함해 어떤면에서는 동물이 인간보다 더 ‘사회적 교환 즉, 상호주의’에 기반하고 있는지 아주 여실히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동물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흡혈박쥐가 자신의 군체가 모여있는 동굴로 돌아가 활동하지 못하거나 약한 개체에게 획득한 피를 다시 토해내 이들에게 먹인다는 사례는 꽤 놀랍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루소에 의한 일반의지에 따라 자연상태의 불안한 상황을 벗어나고자 사회 계약을 인정했던 것은 명백합니다. 앞선 사회적 교환이라는 가치는 바로 저자인 코닝의 공정 사회에 대한 단초로서 작용하게 되는데요. 제가 전 문단에서 강조했던 바와 같이 7장에서 보편적 복지와 모두에게 돌아가는 공동재라는 측면에서 바로 이 ‘사회적 교환의 법칙’을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과거 미국에서 시도되었던 ‘사랑의 집짓기 운동’과 같이 길거리를 전전하는 노숙자들을 자발적으로 투입시켜 자신이 살 집을 스스로 짓게 만드는 꽤 합리적인 대안 등을 여기에 기반해 제시하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점은 많은 민주주의 이론가들이 말하는 복지의 인센티브라 불릴만 하다고 생각됩니다. 마찬가지로 과거 애덤 스미스가 그의 묻힌 논저 ‘도덕감정론’에서 옹호한 정의의 감정과 찰스 다윈이 인간이 동물과 다른 특별한 점을 ‘도덕주의’에서 찾은 것도 그 의미도 명확해보입니다.

더불어 6장에서는 우리가 옹호하는 공정과 공정 사회의 가치가 19세기적 이데올로기인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모두가 당연히 실패했다고 비판합니다. 전자의 자본주의는 분배의 원칙을 거부한다는 점과 사회주의는 개인의 사유 재산을 인정하지 않고 또한 강제적으로 인본주의적 평등을 주장하는 것으로 양쪽이 사실상 실패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옹호론자인 밀턴 프리드먼이 눈이 멀 정도로 집착해 마지 않았던 ‘바람직한 최적의 실업률’이라는 허상은 결국 자본주의 자신이 모두에게 합리적이고 납득할만한 경제적 안정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사회주의 역시 국민에 대한 군사적인 강요와 핍박이 정권의 안위를 위해 동원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모습이기도 하겠죠. 물론 사회학과 경제학의 인간적인 개선점의 단초를 제공한 다윈과 그를 따르는 많은 생태학자들과 진화론자들 그리고 이에 기반한 사회학자들이 모두가 공정한 사회에 대한 가치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사상에 진화론을 접목시킨 허버트 스펜서와 같은 이는 마땅히 도태되어야 할 자들은 도태되어야 한다고 믿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일련의 동물들도 무리지어 마땅히 상호적 재화를 교환하는 마당에 만약 인간이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이것을 동물만도 못한 무언가로 규정해야 될까요. 이것의 답변에는 차치하고 다만, 어떠한 이유를 막론하고서라도 우리가 공정이 추구하는 결과와 공정한 사회의 필요성을 위한 이론이 될 수 있다면 그걸로도 족하지 않을까 고민해봅니다.

그래서 요즘 근래 계속 듣게 되는 이름은 아르마티아 센과 마사 누스바움입니다. 후자인 누스바움은 말할 것도 없이 센이 기여한 HPI와 같이 자본주의 위에 인간이 서는 입장을 대변했던 경제학의 개선이 아직도 소수에 불과한 것은 매우 불행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단순히 경제학이 개인이 자신의 선호를 ‘충분히’ 추구해야만 비로소 사람들이 무엇을 할 것인지 밝혀내는 데 집중한다”는 건 경제학이 갖는 그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즉, 인간의 본성과 욕구를 다르고 있는 이 책의 4장과 5장이 함의하는 것을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이를 무시해왔고, 오로지 자본주의의 양적인 성장 및 그 토대의 견실에만 이바지했던 것은 아마도 부인하기 힘들것입니다. 이제부터라도 경제학이 인간 본연의 삶과 충분한 사람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일련의 조건들에 대해 심사숙고하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디만 자본의 우월을 옹호하는 이들이 이러한 겉치레에 발을 담그는 것은 어려워 보입니다. 결국 왜 우리 사회에 공정이 필요한 것에 대해 정의와 평등이 철지난 타블로이드와 같이 밑바닥에 흘러다니지 않기 위해서라도 근본적인 평등의 원리부터 그리고 저자가 강조하는대로 훌륭한 민주주의란 사회적 조화와 평등을 갖춘다는 점을 우리 모두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생물학자인 피터 코닝의 이 책은 꽤 밝은 명료성을 주고 있으며, 어떻게 우리의 사회를 개선시켜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당위성도 주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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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성장 - 경제성장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데이비드 필링 지음, 조진서 옮김 / 이콘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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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데이비드 필링은 지난 1990년 영국 유수의 경제지 파이낸셜 타임즈에 입사해 아프리카와 아시아 대륙의 각지를 돌며 존경받는 언론인으로 활동을 해 온 바가 있습니다. 특히 그는 2002년부터 2008년까지 도쿄 사무 국장을 역임하며, 중국과 일본을 포함하는 아시아 경제에 큰 관심을 갖기도 하였습니다. 현재는 독특한 칼럼니스트로서 환경 문제와 제약 업계와 관련된 글 뿐만 아니라 경제와 투자 및 정치경제를 두루 포함하는 여러 칼럼들을 기고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에 대한 정보가 위키 백과에서는 나오지가 않아서 파이낸셜 타임즈에 들어가 기사를 찾아보기도 했는데요. 기사의 성향도 그렇거니와 이 글에서 보이는 논지는 일반적인 경제적 관점과는 거리가 먼 꽤 진보적인 인사로 보였습니다. 이 책은 지난 2018년 “The Growth Declusion” 원제로 출간되었으며, 국내에는 2019년 번역 출간이 되었는데요.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일본에서도 이 책이 번역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 책의 구성은 총 3부, 14장의 소주제들로 이뤄져 있는데요. 글의 성격을 잠시 논해본다면 일반적인 경제학 개론서가 아니라 일종의 르포 형식의 인물 대화들과 이를 통한 저자의 분석이 섞여 있는 경제에세이 겸 가벼운 논저 정도로 규정할 수 있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최근에 출간된 다이앤 코일의 “GDP 사용설명서”와 유사한 취지의 글이기도 합니다. 우선 저자는 그동안 전세계가 “경제 성장에 대한 숭배는 거의 도착증의 수준에 이르렀다”고 서두에서 비판하고 있습니다. 물론 결론 부분인 14장에서 독자들의 오해를 피하고자 “GDP가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책들도 있지만 이 책은 아니다. 결점이 많다고는 해도, GDP는 여전히 강력한 측정치이며 유용한 정책도구이다” 라고 원칙적인 실효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경제학 자체를 숫자로 해석하는 환원주의로 고착화시키고 자신들의 분야를 일종의 ‘전문학’으로서 공고히 한 것은 비판 받을 만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즉, 이것은 모든 경제학이 현실과 동떨어진 채로 경제학 이데올로기에 놓여 있는 수많은 시민들의 삶과 행복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아니 오히려 그러한 해석을 일부러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점에서 경제학이 스스로 개선되어야 함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제학의 메커니즘이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라는 미덕(?)하에 인간의 이기심을 더욱 부추기는 형태로 발전되어 왔으며, 결국 이러한 시스템의 완성이 현재도 진행중이며 또한, 심각한 불평등의 폐해를 아무렇지도 않은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고 저자는 날을 세우고 있습니다.

다만, 이 책의 한계는 저자가 짧게 언급하는 수준에서 그치고 있는 불평등 문제 및 그 현상을 제대로 짚어내고 있지 못한다는 점과 시민 개개인의 행복을 어떻게 하면 실제적으로 수치화 할 수 있겠는가에 대한 대안이 다소 부족하다는 것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특히 축소 되고 있는 중산층 시민들은 자신들의 생활 수준이 별로 나아지지 않고 있는 것 같아서 분노한 상태다” 라고 짧게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경제적 불평등과 중산층의 붕괴를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중국 공산당의 관료인 니우웬유안 등과 같은 여러 관료들과의 대화는 해당 국가의 엘리트가 GDP를 어떤식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해 독자들이 간접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점은 이 책의 큰 이점이라고 할만합니다.

여기에 한가지 더 흥미로운 부분은 (모두가 납득할 만한) 경제 성장에 대해 “첫째로 노동자의 수를 늘리고, 둘째로 그 노동자들이 보다 효율적으로 일하게 만들어서 생산성을 높이게 하는 것이다”라고 대안 아닌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급여가 절실한 노동자들을 더 고용해 이들이 돈을 받는만큼 강도높은 효율성에 근거해 생산능력을 향상시켜보자는 단순한 제언이겠지만, 이것이 과연 시스템 내부에서 저항없이 수행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먼저 노동자들의 소득 수준을 높여 내수를 향상시키는 식의 경제 논리를 많은 이들이 사회주의라고 공격하고 있는 마당에 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주장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의 실효성이 어느 정도까지 나올 것인가에 대한 고려가 없다면 시민들의 수준을 무시하는 것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결국 권력에 보다 가까운 부유층들과 거대 기업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제한시키고 제도와 법 위에 기업 활동과 영리 활동이 이뤄져야 한다는 긍정적인 규제 재정립이 필요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과거 클린턴 행정부가 무력화 시킨 글래스-스티걸 법안과 같은 것이 유사한 사례일겁니다.

물론, 저자가 밝히는대로, “가난한 나라에서는 평등을 우선하는게 현명한 선택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인용에는 무조건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다만, 여기에서 인용되고 있는 나이지리아의 사례를 보더라도 개도국의 기득권층과 엘리트가 보다 선명한 도덕적 책임감을 갖고 있어야 하며, 제도 전반에 부패가 싹을 틔우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해야 하는 것이 경제 성장의 완성에 선결과제일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기획과 방법론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실질적으로 실행할 수단을 갖고 있는 자들이 사익에 치중한다면 경제 성장이 무의미한 것입니다. 바로 나이지리아는 원유 수출의 성장세와 더불어 지난 몇년간 수치상으로는 경제가 발전했지만 다수의 국민들이 아직도 빈곤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부정적 예시에 해당합니다. 장 지글러의 언급대로 이러한 악순환을 근절시키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면밀한 교육이 먼저 이뤄져야 하겠지만, 개도국의 수많은 국민들은 아직도 먹고 사는 문제에 사활적 관심을 갖고 있으니 앞으로도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이들 국가에 민주적 관심이 뿌리 내리지 않을까 예상합니다.

끝으로 2008년 미국 뉴욕발 금융위기 이후에 미국 메릴랜드 주의 GDP가 오히려 성장했다는 것을 저자는 인용하고 있는데요. 이 뿐만 아니라 데이비드 필링의 이 책에서는 단순히 수치화 된 GDP가 과연 경제 성장의 지표로 건전하게 사용될 만한가에 대해 회의적인 의견이 나오고 있습니다. 저자 역시 자신이 ‘회의주의’에 입각해 경제를 바라보는 것이 지금에선 매우 필요하다고 보고 있는데요. 이 점은 현재 중국 공산당의 관료들이 양적인 경제 성장이 좌절될 경우 자신들의 권력 기반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측면의 이해와 일맥상통합니다. GDP에 대한 맹신을 거둬들이고 오히려 일목요연한 회의주의로 환상을 깨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경제에 대한 저자의 관점입니다. 개인적 차원에서 인간이 ‘억제해야 될 욕구’로 사회적 지위에 대한 열망을 들고 있는데요. 이것은 서두에 아포칼립스적인 수사로 나오는 “경제성장이라는 것은 개인들간의 군비 경쟁이 가져오는 결과의 총합이다”와 비슷해 보입니다. 그래서 GDP 통계에서 중간소득 및 평균값의 중간을 공개하자는 저자의 논의가 왜 필요한 지 다소 이해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GDP에 대한 맹목적 믿음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기후와 환경파괴와도 관련이 있으며, 지금도 수많은 미국인들이 절실하게 필요하지도 않으면서 여러 상품을 사들이고 있다는 것을 꼬집으며, 이러한 대량 생산 추이에 과연 지구가 견뎌낼 수 있겠느냐에 대해 우리는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측면에서 트럼프 행정부의 기후 협약 탈퇴는 마땅히 비판받아야 될 것으로 여겨야 하겠죠.



- 본문 90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 124 페이지에는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European Commission 은 아일랜드 정부에~”이라는 문장에서 조사 ‘은’을 커미션에 맞춰 붙였더군요. 원래 ‘집행위원회는’ 이라고 표기해야 되지 않던가요. 하여튼 국문의 문장 형식이 외래어에 따라가는 건 꽤 이상한 점이라고 봐야 할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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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유럽의 위기와 지정학
조지 프리드먼 지음, 홍지수 옮김 / 김앤김북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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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프리드먼은 헝가리 태생의 유대인으로 미국 코넬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루이지애나 주립대에서 교수로 일하다가 특이하게도 미 국립국방대학과 랜드 연구소 등 정부와 연관된 교육 기관 및 연구소에서 국제정치 및 주요 국제현안에 대한 강의, 자문을 맡은 바가 있습니다. 그는 여러해 동안 이러한 활동을 통해 미국내에서 신뢰받는 국제전문가로서 명성을 얻기도 했는데요. 이와는 반대로 프리드먼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이들은 그를 ‘국제정치학계의 예언자’로 격하해서 부르기도 하는데요. 물론 저자인 프리드먼을 판단하는 것은 각자 개인의 몫이기도 합니다만 어떤 현안에 대해서 보이는 그의 직관은 개인적으로 꽤 놀랍기도 하였습니다. 다만, 여기에서 소개해 드릴 이 책은 학문적인 측면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약간 난감하기도 한데요. 일단 이 부분에 대한 논의는 뒤에서 하는 것으로 갈음하겠습니다. 이 책은 지난 2015년 “Flash Points” 라는 원제로 출간되었으며, 국내에는 가장 최근인 2020년 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국내 번역본에는 예상대로 서두에 이춘근 교수의 추천사가 있으며, 번역은 피터 자이한의 글을 번역했던 홍지수씨가 맡았습니다.

우선 이 책은 총 3부로서, 이하 16장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부터 거의 1억명의 목숨을 앗아간 2차대전 그리고 냉전을 거쳐 현재의 유럽과 유럽연합이 내포하고 있는 한계와 문제점을 중점으로 꽤 에세이적인 형식의 글로 저자는 차분히 풀어내고 있는데요. 서두에서 헝가리 출신의 유대인 부모를 따라 공산치하의 헝가리를 탈출하는 장면과 현재의 유럽인들이 ‘과거 31년을 계승한 사람들’이라는 외연 확장과 더불어 피로 쓴 그들의 과거사를 제대로 씻어내지 못했는가에 대해서인지 아니면 인종주의적 국가 압사의 과오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것인가에 대한 선입견인지는 모르겠으나 글에서 서술되어 나타나는 인식이나 평가가 과연 면밀한 근거에 바탕을 두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명료성을 떠나 너무 유럽의 상황에 대해 편파적인 것이 아닌가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이를테면 러시아가 굴복시킨 조지아와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해 프리드먼은 NATO가 연약해졌다는 식으로 서술해 내고 있습니다만, 우크라이나의 경우 러시아와 합의한 ‘부다페스트 메모랜덤’에 대해 미국이 연대 책임을 지지 않은 것은 국제정치학적인 측면에서 문제가 될 소지가 있음에도 이것에 대한 서술은 쏙 빠져 있는 것은 저자의 명성을 생각해 봤을 때 다소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활화산에 끼얹은 기름이 되었던 민족주의는 1871년 비스마르크가 초안한 독일 제국에 의해 비롯됩니다.저자인 프리드먼은 사실상 그 당시 발칸반도를 비롯한 유럽 전지역에서 피올랐던 민족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하고 있는데요. 이후 2차대전에서의 민족주의가 인종주의와 결합해 600만의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낸 역사적 사건을 연계해 해석하고 있습니다. 종전 이후, 오늘날 세계 4위의 경제 국가가 된 독일이 과거 그들이 행했던 인종주의적 말살로 인해 확실한 재무장과 보통 국가로의 이행이 독일 국민 대다수의 신중함에 가로막혀 있다고 봐도 무방해보입니다. 독일인들은 그 특유의 절제와 인내심 그리고 신중함으로 유럽 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국가로 부상했지만, 아직까지도 꽤 진중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같은 시기 드골 치하의 프랑스는 핵을 보유해 발언력이 강한 강대국으로 발돋움하려고 하였고, 영국은 전후에도 대영제국의 경계를 유지하고 싶어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광경이기도 합니다.

소련의 붕괴와도 거의 일치하는 1991년의 마스트리트 조약은 현재의 유럽 연합을 있게 한 장면이었습니다. 고르바초프의 소련은 개혁 개방의 길에 들어설 즈음, 레이건과의 담판에서 NATO가 더이상 모스크바와 가까워지는 것을 동결하는 것으로 합의를 봤지만, ‘유럽 연합을 확대하려는 욕구’와 더불어 NATO의 확장은 결국 조지아와 우크라이나 사태를 초래했습니다. 사실상 이것의 전제는 NATO가 효과적으로 푸틴 치하의 러시아를 제어하지 못했다는 반증이며, 이것의 책임의 상당 부분은 미국에게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과거 드골은 “미국이 유럽을 위해 시카고를 잃는 위험을 감수하리라고 믿지 않았다”는 저자의 인용은 본질적으로 국제 정치가 어디에 수렴되어 있는지 명확히 보여주는 문장이라고 생각됩니다. 마찬가지로 “미국은 조지아에 개입하지 않으려는 것이 확실했다”는 문장 하나 만으로 미국의 불개입이 정당성을 답보하는 것은 아닐겁니다. NATO에 대한 미국의 기여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NATO자체가 미국의 그림자라고 봤을 때, 현실주의자인 푸틴이 그러한 도발을 감행하고 국제사회에 의해 어떠한 응분의 조치를 당하지 않았다는 점은 그 시사하는 바가 매우 부정적이다 라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프리드먼은 유럽의 여타 상황을 꽤 편안하게 서술하면서 우크라이나를 경계로 동쪽은 유럽의 본토로 서쪽은 유럽의 반도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즉, 이것은 유럽 전도를 90도로 비틀어 버린 것과 같죠. 이러한 해석대로라면 남쪽으로 밀려드는 러시아의 의도를 밑의 반도에 해당하는 국가들이 저지해야만 하는 상황일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독일의 재무장과 경제력의 유지는 매우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죠. 또한 영향력이 쇠퇴하고 있는 프랑스와 이제는 한발 멀찍이 서 있는 영국을 고려한다면 남부 유럽의 PIIGS의 경제 불안과 그 중의 그리스의 쇠퇴는 프리드먼이 어떠한 말을 하고 싶은지 짐작할 만했습니다. 그래서 다가오는 유럽의 위기는 영국, 프랑스, 독일이 처한 입장의 급격한 변화와 유럽 전체에 드리우는 이슬람의 그림자와 호시탐탐 러시아와 서유럽 전체의 완충지대의 역할을 하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전복이 앞으로의 방향타를 좌우할 것이라는 점에 대해 저역시 절로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전 정권과는 달리 좀 더 고립주의로 다가가고 있는 트럼프 행정부의 출범과 더불어 이러한 전유럽의 위기 상황은 더욱 가중되고 있는데요. 독일이 자원을 매개로 러시아에 대한 접근과는 별개로 푸틴은 앞으로도 미국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는 위험한 오판을 또 감행한다면 우크라이나로 시작되는 위기가 과연 어떻게 변질될지는 매우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사실 2차대전 당시 프랑스와 동맹관계였던 폴란드가 어떠한 취급을 당했는지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영국까지 끼어들어 폴란드를 기만하기까지 했는데요. NATO의 확장과 더불어 더욱 가까워지고 있는 상트 페테르부르크과 모스크바는 아예 발칸과 동부 유럽의 완충지대를 자신의 영향하에 두려고 하는 등의 감히 신냉전의 초래가 될지는 일말의 확대해석에 경계를 유지하면서 좀 더 지켜볼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이러한 현재의 유럽 내부의 모순과 혼란의 가능성이 오로지 유럽인들의 문제로만 먼 발치에 두고 과거처럼 미국이 수수방관한 한다면 러시아의 오판을 부를 수도 있다는 점에서 미국의 학계와 관료계에서 꽤 면밀한 관찰과 연구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해봤습니다. 저자의 말대로 헝가리인이었으나,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동화되지 않았던 자신의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독일은 유대인이 장악한 은행, 공산주의, 진보주의에 의해 피해를 당했다”는 꽤 솔직한 고백에는 일개 독자지만 동의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유대인의 고유한 독립성에 의해 독일이 만신창이가 되었다는 해석에는 절대 동의할 수가 없으며, 인종주의적 말살에는 어떠한 근거를 대서는 안된다는 한나 아렌트의 주장에 동의할 수 밖에 없음을 밝혀두고 싶군요. 물론 앞뒤 맥락을 고려한다면 저의 해석은 다소 확대일 수도 있겠으나, 유대인이면서도 반유대주의자임을 먼저 고백했던 저자의 솔직함에 꽤 감명을 받았다고 치부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꽤 신경질적인 평가일 수도 있으나 글의 61페이지에 ‘아버지의 모친’이라는 표현에 대해 홍지수 선생께 정정을 요구하고 싶은데요. 이미 ‘조부’라는 단어나 등장함에도 왜 아버지의 모친이라는 구어를 ‘조모’로 의역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외에 한나 아렌트를 ‘해나 아렌트’로 표기한 것은 애교로 받아들여도 충분해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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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waySunny 2020-03-31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인 의견 잘 보았습니다. 미국도 그렇고 유럽에서도 전반적으로 이제는 ‘민족주의로의 회귀‘ 가 국제 정치 트랜드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좀 더 입증하고 있는 것 같네요.

글 본문과는 조금 벗어날 수 있으나 ‘Hannah‘는 외래어 표기법상 한나가 아니라 해나가 맞습니다.

베터라이프 2020-03-31 16:05   좋아요 0 | URL
해나 아렌트라고 말씀해주셨는데요. 그녀가 유대인인 것을 감안한다면 오히려 한나 라는 표기가 더 정확하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미국을 비롯한 영어권 국가에서 해나라고 표기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국내에 이미 한나 아렌트와 관련된 성명표기가 여러 학술서를 비롯 일반적으로 ‘한나’라고 통용되고 있으므로 그 부분에 대해 말씀드린겁니다. 성명 표기가 특히 인종과 국적에 귀결된다면 유대인인 한나 아렌트는 마땅히 한나가 정확한 표기겠죠.

좋은 친구 2021-04-03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나 아렌트가 더 익숙하긴 하지만 2014년 국립국어원에서 해나로 표기하기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외래어표기법을 따른다면 해나로 표기해야 합니다. 따라서 그것이 이 책의 단점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유대인이라는 점은 이 문제에서 아무런 영향이 없습니다. 미국에 사는 유대인도 많고 그들의 이름은 미국식으로 표기되니까요. 문제는 그가 독일인이냐는 것이겠지요. 독일인이라고 한다면 한나 아렌트로 표기해야 한다고 주장할 근거가 있을 것입니다.

베터라이프 2021-04-03 16:00   좋아요 0 | URL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유대인 표기법을 말씀 드린것은 유대인들의 발음 방식도 독일식이랑 유사하다는 것인데요. 흡사 라틴어 발음과 유사한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지프 슘페터의 이름 표기와 마찬가지로 조셉 슘페터, 조제프 슘페터와 같이 번역자들이 기준 없이 마음대로 번역하는 바람에 성명 표기에 혼란이 올 수 있습니다. 학계에 용인된 표기가 있는데 영어식으로 혹은 다른 언어의 발음으로 표기하는 것은 혼란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예 권위를 가진 기관에서 이러한 국문 표기를 확정해주면 좋겠는데 현재는 그렇지 않죠. 국립국어원의 결정은 일단 참고는 하겠습니다. 그리고 한나 아렌트는 아이젠하워 행정부 당시 발생했던 리틀록 사건에서 스스로 유대인임을 다시금 주장했듯이 유대인으로 보는 게 맞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