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전에서 살아남기 - 신자유주의를 넘어 대안 사회 건설까지
세르주 라투슈 지음, 이상빈 옮김 / 민음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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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대표적인 탈성장 이론가이자 경제학자인 이 책의 저자 세르쥬 라투슈는 특히 프랑스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유엔과 같은 국제 기구내에서 활발한 여론 활동을 해왔는데요. ‘발전에서 살아남기’ 라는 이 글도 유네스코가 관여해 만들어진 연구물이라고 서두에 밝히고 있습니다. 국내에는 민음사가 라투슈의 글들을 거의 독점적으로 출간하고 있는데요. 지젝이나 랑시에르의 사례와 같이 유사하게 저작 시리즈물이 연결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라투슈는 지난 204년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된 ‘낭비 사회를 넘어서’란 책으로 많은 관심을 이끌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난 1980년대 이후부터 제한되게 해석한 세계 발전론의 일환으로 ‘신자유주의 사조’가 마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확산되게 이르렀는데요. 헨리 키신저는 꽤 노골적으로 “세계화는 미국의 헤게모니 정치의 새로운 이론에 불과하다”고 논평한 적이 있습니다. 높은 수준으로 발전된 세계의 북반구와 이와는 다르게 아직도 낙후되어 있는 남반구 사이의 긴장과 이러한 차이에서 발전적 욕구를 갖고 있는 남반구 세계의 현실과 일찍이 허구로 입증된 낙수 효과 이론(trickle-down effect)에 대한 총체적인 비판과 궁극적으로 환경과 발전의 양립 가능성에 대한 것을 주요한 골자로 하는 내용을 라투슈는 이 책에 담고 있습니다.

꽤 의미있게 봤던 그의 주장들 가운데는 북반구의 선진 국가들이 아직도 경제 발전 이론에 기대어 더욱더 발전을 표명하고 있다는 것과 많은 선진국의 경제 이론가들이 “국민 총생산의 수준과 성장을 인간 사회를 평가하는 최종적 판단으로 간주한다”는 것에 비판을 보이는 것 또한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외형상 단순히 낙후되어 보인다는 이유 만으로 폭발적인 생산과 소비가 연계된 것을 주입시키고 실행을 강요하게 만드는 것은 어쩌면 신자유주의가 갖고 있는 왜곡된 속성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오늘날의 많은 인간들이 차별적 수준의 위치해 있고, 이러한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많은 국가들이 경제 발전을 잣대로 삼고 있는 것은 일견 이해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가치적으로 불행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선진 국가들의 국민들의 무분별한 소비 생활이 지구 환경을 병들게 하고 있고, 앞으로 후발주자로 대기하고 있는 13억이 넘는 중국인들이 오늘날 미국인들과 비슷하게 소비하려고 든다면 과연 지구가 이를 견뎌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저로서도 선뜻 판단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결국 전세계에 만연된 불평등의 문제는 이처럼 신자유의적 기치로 인한 문제일 수도 있다는 라투슈의 판단은 다른 여지가 없는 것인데요. 불평등의 문제를 경제 발전으로 해결하려고만 하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그의 판단과 결국에는 어느 정도 복지체제의 확립에 희망을 거는 것이 온당하다는 것도 크게 수긍할 만합니다. 이미 이 책의 서두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3명이 가장 가난한 48개국의 국내 총생산 총액보다 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고, 가장 부유한 15명의 개인 재산은 사하라 이남 지역 아프리카의 국내 총생산을 넘어선다. 또한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32명의 재산은 남아시아의 국내 총생산 총액을 넘어서고, 가장 부유한 84명의 재산은 12억 인구를 가진 중국의 국내 총생산을 넘어선다”는 점은 이러한 무차별적인 부의 불평등이 단순이 개인의 능력 문제로 전가하거나 발전 상태의 차별로 비롯되는 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심각한 문제입니다. 결국 신자유주의가 2008년 뉴욕 금융 위기의 비참한 결말 뿐만 아니라 여느 오페라에서 극적인 장치로 대비되는 비극적 현실과 동일시되는 ‘경제적 불평등의 총체’도 그것의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 명확해 보입니다.

중간에 북반구에 의한 남반구 지역의 인종주의적 편견이 서구 백인들은 발전할 수 밖에 없었고, 남반구의 유색 인종들은 그것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아직도 해석하는 서구의 이론가들 내지는 시스템의 존재 문제 또한 이러한 결말을 부채질한 것으로 봐야겠죠. 결국엔 북반구의 선진 국가들이 발전주의를 다소 후퇴시키고, 환경과 발전의 양립과 하등 쓸모도 없는 인종주의적 편견 등을 제거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라투슈는 보고 있는 듯 했습니다. 핵심적으로도 우리의 경제이론가들도 마땅히 환경과 경제의 양립 가능성을 연구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라투슈의 이 책은 분량이 크게 많지 않으면서도 상당히 의미있고 통찰력있는 내용들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본질을 노려보는 글들은 읽고 나서 적잖은 안도감을 주기도 합니다. 나중에 세르주 라투슈의 다른 글들을 좀 찾아 읽어봐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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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힘 우리 시대의 고전 16
자크 데리다 지음, 진태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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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에 들어 많은 인용과 연구를 불러온 자크 데리다는 현대 철학에서 해체론을 창시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좌파 사상가들의 많은 영감을 안겨주었고, 특히 탈식민주의와 인권, 민주주의에 큰 관심을 갖고 많은 저작과 논문을 쓴 것으로도 유명하죠. 지금 소개해드릴 이 책 ‘법의 힘’은 지난 1994년 초도 출간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1990년 미국에서 있었던 데리다의 강연을 토대로 출판이 된 것으로 아마도 영어와 불어로 동시에 나오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존 스튜어트 밀은 ‘개인의 자유’를 등한시 않았음에도 이와 관련하여 법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고,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있어서 법의 필요성을 인지한바 있습니다. 더욱이 공리주의에 입각한 사상가들은 법은 그 중요한 ‘공리적 의미’로 인해 인간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평가했는데요. 민주주의와 법의 양자관계는 이를 보는 여러 사람들에 의해 엄밀한 관계이냐, 혹은 무관하거나 상호침탈적인 관계로까지 해석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칸트의 의도대로 ‘힘이 없이는 법도 없다는 것을 매우 엄밀하게 환기’ 시키고 있는데요, 폭력과 강제를 동시에 수반하는 법의 의미에 대해 ‘근원적 고찰’과 분석을 하는것이 바로 이 책의 1장입니다. 뒤이어 나오는 2장은 특히 문학에서 많은 영향력을 발휘한 발터 벤야민의 1921년 텍스트를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해 ‘벤야민의 특별한 법 사상’ 에 대해 데리다의 분석이 외형상 주된 내용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1장 2장은 데리다의 통찰력과 엄밀한 해석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요. 특히 2장에서 저로서는 발터 벤야민이 왜 그렇게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했는지에 대해 일부분에 불과하지만 약간의 해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데리다는 몽테뉴의 입을 통해 법이 과연 정의와 동일시 될 수 있느냐고 질문을 던지는데요. 그는 “우리는 법들이 정당하기 때문이 아니라 권위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에 복종한다”고 언급하며 앞서 제가 말씀드렸듯이, 법이 폭력과 강제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측면에서 법의 권위가 존재하는 것이고, 여기에 법 자체가 공리적 측면을 유지하고 있어야 법의 존재의 정당성이 답보되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많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입법을 담당하는 의회와 법을 집행하는 사법과의 관계는 매우 밀접하고 상호 보완적이기에 뒤에 2장에서 벤야민이 경고한대로 “산업 민주주의 국가들과 고도의 정보 통신 기술을 이용한 이 국가들의 군산 복합체의 치안적 현실에 대한 분석 원칙을 지지하는 것”으로 이는 아마도 은밀한 경찰력으로 앞에 나와 있는 것처럼 빈틈없는 정보 기술로 사회 통제에 나서거나 이를 우회하거나 무력화하여 시민들의 자유를 제한할 가능성에 대한 경고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벤야민이 소위 법집행기구인 경찰 집단을 불신하고 현존하는 민주주의 체제가 벤야민에게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개선 가능성이 시급한 것으로 여긴것으로 볼때, 벤야민 스스로 이에 관해 이상주의적 시각을 갖지 않았나 싶습니다. 더불어 ‘개인들간의 관계에서 충분히 (법없이) 비폭력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과 같은 ‘인간에 대한 이상적 관점’이 벤야민의 비극적 자살의 매개가 되지 않았나 짐작해봅니다.

즉. 이러한 법의 시행 배경에서 데리다는 “규칙적이면서도 규칙이 없어야 하며, 법을 보존하면서도, 매 경우마다 법을 재발명하고 재정당화하기 위해, 적어도 그 법의 원칙에 대한 새롭고 자유로운 긍정과 확증 속에서 이를 재발명할. 수 있기 위해 법에 대해 충분히 파괴적이거나 판단 중지적이어야 한다”고 언급하면서 특유한 해석이 요구되는 판결 상황에 그렇지 못하다면 “판사는 계산 기계가 되고 만다”고 음울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법의 본질이 사전적으로 이해되는 공리적 목적과 (많은 부분에서) 정의로워야 한다면, 더 안쪽의 법은 ‘법이 힘을 위해 봉사한다는 것’과 ‘법과 권력’의 관계를 어떻게 많은 개인들을 유익하게 만드는 것으로 한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 데리다의 고심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오직 결정만이 정당하다”, “정당한 판결이었다”고 주장하며 법의 판결에 어떠한 의구심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많은 사법 당국들의 경직성에서 어떤 측면에서는 법은 공리에 기여하며, 또한 한편으로는 폭력적이고 개선 불가능한 원천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 우리 시민이 해결해야되는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초월적 존재인 신이 스스로 무소불위의 정당성으로 인간들을 도덕적으로 강제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매우 당연하게도 국가와 시민들속에 법은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벤야민은 20세기 초, 의회주의는 권위와 폭력에, 그리고 이상의 포기에 있으며, 그것은 말과 토론, 비폭력적인 토의, 요컨대 자유 민주주의를 작동시킴으로써 정치적 갈등을 해결하는 데 실패한다고 단정했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우리나라에도 의회의 부패는 심각하다고 봐야하지만 의회를 배제한 사법만의 사회 통치나 의회의 역할을 대신할 어떠한 ‘기구’를 다시 고안해 내는 것은 어쩌면 지난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14세기 르네상스 이후 개인의 자유가 꽃피운 이래로 우리 인류가 사회 공리를 위해 몇세기의 시간을 소모해 만든것이 모두에 의한 정치인 민주주의였습니다. 법을 모조리 제거하고 나서 우리의 사회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저는 그 뒤의 결과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많은 국가들에서 사법부의 관료들이 고도화된 엘리트 계층이고, 이것을 선출된 이들로 바꾸기 위한 제도적 장치의 그 한계가 극명했던 것은 여러 정치학에 다루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사법을 선출된 권력으로 바꾸는 것에 찬성하지만 이와 관련해 많은 연구가 수반되어야 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데리다도 법에 있어서 정당화와 정의와 관련된 논의들을 이 책을 통해 하게 된 큰 범위로서의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았나 싶군요. 그래서 여러모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주는 글이라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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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의 정치가 불신과 이념논리에 매몰되어 제대로 된 정치가 굴러간 적이 없었습니다. 1987년에 민주화는 이뤄졌지만 정치인들은 더욱 교묘해졌고, 겉과 속이 매번 일치하지 않는 것을 소위 정치력이라고 여기며 자화자찬들을 했었죠. 일찍이 버틀란드 러셀은 정치인이 도대체 사회와 국가에 무슨 도움을 주고 있느냐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매번 국민들은 현실 정치와 우리는 별개의 세계로 여겨왔습니다. 이런 엘리트 정치는 기득권과 결합하여 국민을 소돼지 취급을 했습니다.

정치인이 없는 정치가 과연 가능할 것인가에 대해 살면서 몇번이고 질문을 던졌던 적이 있습니다. 플라톤이 고대 민주제에 관해 간접적으로 혐오했던 것에는 방향성이 살싱되어 어리석은 정치가 도래할 수 있을지 모르는 가능성 때문이었죠. 하지만 오늘날 이런 전문 정치인들이 참여하는 정치가 이상향은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국민들의 바람과 요구가 현실 정치에서 실현되었느냐는 질문에는 여전히 부정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속을 전혀 알 수 없는 정치인들이 만들어가는 우리의 정치는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면 이러한 정치 불신의 구축은 이렇게 한두가지의 문제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더군요.

23일, 출근하기전에 운동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서 부지런히 옷을 갈아입고 반복되는 하루를 시작하려고 마음 준비를 하고 있는데, 황망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짧은 속보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2016년 11월경, 백남기 농민 영결식에 추모를 하러 갔다가 심상정 의원의 짧은 연설을 보고, 우연찮게 아주 먼 발치에서 노회찬 의원을 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는 시국이 뭔가 터질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굳은 표정의 노 의원님을 뵈면서 저는 이상하게 아무 이유없이 적잖게 안심이 되었던 기분이 들더군요. 사실 한가지 더 고백을 하자면, 노 의원님이 과거 조선일보 창립 90주년을 맞아 참석을 했던 것에 개인적으로 당시에 크게 실망을 했더랬습니다. 정치인들이 으레 하게되는 행사로 여기라고 하는 말들이 많았습니다만 저는 그렇게 마음의 혹으로 남더군요. 아마도 그래서 백남기 농민의 영결식에서 노 의원님을 그냥 먼 발치에서 뵌 것이 오랜 기억으로 남은 것 같습니다.

노회찬 의원의 영정이 있는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일반인 조문객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이따 강남에서 넘어가려고 합니다. 그래도 우리에게 노의원님과 같은 정치인이 있었고, 말씀하셨던 말들이 어떠했는지는 앞으로도 많은 시간을 통해 사람들이 입을 통해 전해지겠죠. 지금까지도 훌륭하셨고, 존경받을 만한 삶이셨습니다. 부디 아무 걱정 마시고 하늘 나라에서 평안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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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불안정 노동자 우리시대 학술연구
이승윤.백승호.김윤경 지음 / 후마니타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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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인 이승윤 선생과 가톨릭대학교 사회복지학전공 교수인 백승호 선생이 이화여대 박사과정에 있는 김윤영씨와 함께 의미있는 공저를 출간했는데요. 역시나 후마니타스에서 출판을 맡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요즘 최저 임금과 관련한 정치권의 소모적 논쟁에 뭔가 의미있는 해답을 이 책이 주지 않을까 싶어서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는데요. 260여 페이지 분량의 술술 읽혀지는 글이라 단시간 집중해서 소화하게 되었습니다.

앞서 설명한 대로 3명의 학자들의 이 공동 연구물은 우리 나라 노동시장에서 크게 3부분의 문제점을 꼽고 있는데요. 청년층의 노동 불안정성과 65세 이상 노인의 49%가 빈곤층인 ‘노인 빈곤층 문제’ 그리고 ‘불안정성의 젠더화’라 지칭되는 여성 노동 계층의 불안정성이 이와 같습니다. 우리 나라는 OECD 국가들중에 복지 지출이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이고, 전통적으로 고용시장에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한 고용 및 임금 보호 제도와 기업 내 훈련, 종신 고용, 연공 임금제 등의 형태로 제공되는 대기업의 복지 제도는 대기업 종사자와 중소기업 종사자 사이에 구조적인 차이를 만들어냈고”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상황에서 우리나라 역시 대기업들에 유리한 유동적 고용 제공을 위해 비정규직과 같은 단기 고용 제도를 도입한 상황에서도 대기업의 복지와 수입은 예정대로 올랐지만, 중소기업을 비롯한 일정 규모 이하의 사업체에 고용된 노동자들은 상대적으로 열악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의적 흐름에서 가뜩이나 기업 친화적인 노동 시장의 기득권이 더욱 기업에 쏠리면서 현재 고학력 청년 니트족과 히키코모리들을 양산시키는 등의 사회적 문제를 양산했습니다. 일찍이 앤소니 기든스는 소위 ‘위험 사회 이론’에서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 기본소득 만으로는 인간적인 삶을 영위하기 힘들다는 주장이 전세계 학계에서 주목을 끌었지만, 한국은 특히 이러한 미흡한 사회 보장제를 오로지 개인적 차원으로 끌어내려 일종의 말도 안되는 ‘아프니까 청춘론’ 을 확대 재생산 시켜왔습니다.

사실상 이러한 고용시장에서의 불균형적이고 불안정성의 상황에서 ‘비정규 노동자가 사회적 보호에서 배제되는 것은 고용주의 입장에서 노동 비용을 절감시킬 수 있다’는 측면에서 전체 고용주와 기업주의 이해 관계에 밀접하게 관계되어 왔고, 과거 덩샤오핑 시절의 1980년대 중국과 최근의 인도가 ‘낙수효과론’에 따른 선별적 경제 집중과 같은 상대방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회피론’이 한국에서도 경제 시장 내에서 주요한 논리로 개발, 확장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배경에 따라 여기에 이 글은 6장까지 전계층의 ‘불안정한 노동 상황’ 의 분석을 일목요연하게 효과적인 자료를 덧붙여 이해를 높이고 있습니다.

이후 7장에서는 서유럽에서 큰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프레카리아트’ 문제를 한국의 상황에 대입해 설명하고 있는데요. 한국은 2014년 기준으로 전체 인구에서 32%가 프레카리아트 계층으로 사실상 이들이 고용 불안과 사회 안전망에의 배제와 같은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지만 정부나 학계에서 뚜렷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은 한계로 봐도 무방합니다. 결국 기본 소득의 실질적 보장은 ‘물가상승률’과 대비하여 어느 수준 정도로 양자의 격차를 줄여 나갈것인가에 달려 있고, 이를 좀 더 확대시킨다면 그동안의 친기업적인 노동 정책을 세계 11위의 교역국과 막대한 무역흑자를 나날이 기록하고 있는 경제국가의 위상에 걸맞는 노동 대책을 세우는 것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전체적으로 여기 이 책은 우리가 노동 시장에서 어떠한 상황에 놓여 있는지 또한 해마다 배출되는 청년들의 노동 시장 진입이 시장 내부에 어떠한 문제점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아주 면밀한 분석과 자료를 제공한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얼만간의 기사 등으로 이와 관련된 정보를 취득하는 것보다는 이 책을 통해 얻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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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인도 - 세계의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아시아의 두 거인
크리스 오그덴 지음, 김은지 옮김 / 시그마북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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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크리스 오그덴은 영국인으로서 아시아 지역의 안보를 연구해 온 학자인데요. 현재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의 아시아 안보 분야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의 과거 연구서들을 검색해보니, 중국과 인도에 관련된 학술 연구가 주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다만, 국내에는 크게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요. 그래서 상대적으로 약간의 기대를 갖고 오그덴의 이 글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저자는 크게 7장의 주제로 나눠, 중국과 인도의 국내와 국제적 현황을 배경으로 경제, 군사, 외교, 지정학 등으로 세밀한 분석을 하고 있는데요. 여기에 7장은 오늘날의 강대국이라 지칭할 수 있는 미국의 패권과 비교하여 이 양국이 추구하는 자국의 ‘강대국 지위 획득’이 어떤식으로 관련되고 배제되는지에 대해 다소 의미있는 결론을 내고 있습니다. 더불어 이를 해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많은 도표와 자료들을 책의 뒷부분에 첨부하고 있는데요. 본문에 인용되어 있는 많은 학자들의 주장들도 그렇고 꽤 객관적인 입장에서 중국과 인도를 고찰하고 있는 점은 좋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고 여겨집니다.

골드스타인의 유명한 주제인 ‘세계 패권을 잡기 위한 국가적 대전략인, 국제적 제약속에서 국력을 수단으로 삼아 국익이라는 목표를 가장 합리적으로 추구하는 것’ 과 조지프 나이가 일찍이 주장한 국제 사회에서의 힘이라는 의미는 ‘타국에게 원치 않는 일을 행동하게 만드는 것’으로 냉전 이후의 국제 관계에서 강대국들이 보이는 패권과 힘의 논리가 어떠한지는 앞의 설명을 통해 명백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현재의 국제 사회 체제가 세계2차대전 이후 미국과 서유럽이 만들어놓은 것으로, 오그덴은 7장에서 이러한 여러가지 조약과 국제 체제를 미국이 만들면서 이를 통해 효과적으로 영향력과 패권을 유지해왔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즉, 이러한 배경에서 중국과 인도는 자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이 증대됨에 따라 이러한 미국이 만들어놓은 국제 시스템에서 과거처럼 공존과 편입을 할 것인지, 아니면 자신들만의 논리를 개발하여 다시 재평가를 받으려고 할 것인지에 대한 전망을 이 책이 담고 있다고 봐도 무방해보입니다. 사실상 중국과 인도 양국은 대체로 동일하게 전통적인 국내적 요인으로 과거의 영향력을 되찾으려는 숨겨진 민족주의적 욕망과 현실적으로는 지역 내의 강대국으로 발돋움하고 인정받으려는 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 국가는 자신들의 장점 만큼이나 한계도 매우 명백하여 섣부른 예측은 경계가 필요할 만한데요. 데이비드 샴보가 자신의 저서에서 “중국은 미국과 같은 강대국이 아니라 불완전한 강대국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높고” 키신저가 말한대로, “인도는 여러 내부 모순과 국가 체제의 무능으로 한계가 확실하여 예측하기 어렵다”는 평가들이 앞으로의 양국의 헤게모니 획득에 불안 요인들이 있는 것은 분명해보입니다.

실제적으로 중국, 인도 양국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경제와 군사적으로 핵보유 국가이며, 해당 지역내에서 강국으로 분류될 만합니다. 이러한 성장과 배경에 대해 오그덴도 마찬가지로 여러 인용을 통해 분석하고 있습니다. 인도의 적대국인 파키스탄이 중국과 연계해 인도의 영향력을 줄이고 있고, 이에 인도는 구소련과 현재의 러시아와의 군사적 거래 및 지원을 통해 파키스탄을 통해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중국을 효과적으로 견제해왔는데요. 양국은 서로 적대적이면서, 자국의 이익과 관련하여 서로 상충되는 부분이 존재합니다. 이를테면 인도의 사활적 이익이라 불리우는 카슈미르 지역에 대한 중국의 개입이라든지, 미얀마와 파키스탄에 항구를 조차하고 있는 중국의 숨겨진 목적 등이 이와 같은데요. 과거 인도가 핵실험을 통해 미국의 제재를 받다가 중국 견제 필요성을 인식한 미국이 ‘국제 비확산 레짐’을 해치면서까지 인도와 핵조약을 맺은것과 같은 ‘미국 변수’ 가 이들의 강대국 부상에 있어서 큰 고려 사항이 될 만해 보입니다.

중국과 인도 양국 모두 각기 다른 정치 체제를 갖고 있지만, 극심한 빈부 격차와 계급 문제, 부패와 내부의 경제적 모순 등을 일차적으로 넘어서 사실상 ‘정상 국가’의 궤도에 오르는 것이 제일 먼저 해결해야 될 문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그덴은 7장에서 어떻게 미국이 세계 패권 국가가 되어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면서 미국은 군사적인 부분 뿐만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상당한 위치에 오르면서 패권국의 지위에 대한 논란을 잠재웠다는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강대국에 이르는 길은 어느 한쪽의 발전만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며, 패권국이 지위가 오늘날에 ‘세계 지도국’에 준하는 지위도 갖고 있다는 것을 짐작해 봤을 때, 공산당 일당 체체의 권위주의 국가인 중국과 세계 최대 민주주의 국가이지만, 카스트와 종교 계급 문제가 21세기인 아직도 ‘거대한 봉건주의 국가’로 비추게 만드는 인도에 있어서 앞으로 큰 걸림돌로 여겨질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결국 중국과 인도가 주변국들의 폭넓은 이해와 인정 없이 직접적인 수단인 군사력이나 경제적 침탈로 자신들의 이익과 나아가서는 강대국의 지위를 인정받고자 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반대와 투쟁에 놓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미 중국은 남중국해 영유권 확대와 댜오위다오/센카쿠 문제 등으로 일본을 비롯한 베트남, 필리핀 등과 갈등을 빚어왔고, 더 크게 보면 이들 지역의 이익을 공유하고 있는 미국의 우려를 불러 일으켜 오히려 더욱 미국 조야에 ‘중국 봉쇄 필요성’에 힘을 실어주고 있습니다. 중국의 유명한 정치평론가인 옌쉐퉁의 주장대로 2023년 이후의 중국이 미국의 패권을 위협하게 될지는 앞으로 더 지켜볼 문제입니다.

미국이나 중국 학자가 아닌 영국의 전문가가 분석한 이 책은 꽤 객관적인 시각이 인상적인데요. 일본의 한반도 침략이 오늘날 분단의 영향이 되었다고 밝히는 점과 지역 내에서 전통적으로 중국의 지위를 넘어서는 국가는 없었다고 자부하는 ‘중국 예외론’에 대한 온건적인 비판 등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무작정 세계 패권국가가 될 것이라고 예측하는 ‘세계 유수의 샤머니즘 이론가들’ 에 비해서는 충분히 인정할 만한 글이었습니다. 미어샤이머의 주장대로 중국의 부상이 평화적으로 되지 못한다면, 이것은 크게 세계 안보에 큰 위협이 될 가능성이 높으며 인도 역시 파키스탄을 잣대로 배타적인 군사력 증강에 나선다면 그 역시도 양국의 핵전쟁을 불러일으키는 큰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두 국가의 강대국화에 대한 이런 이론적 분석과 가능성을 담은 특히 여러모로 객관화된 이 글은 충분히 독자들에게 현실적인 이해를 돕는 데 도움이 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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