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오스틴 - 세상 모든 사랑의 시작과 끝
존 스펜스 지음, 송정은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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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존 헌터 스펜스는 미국의 저명한 제인 오스틴 전문가로, 2003년 오스틴의 전기 영화인 '비커밍 제인 오스틴 (Becoming Jane Austen)'의 고증 자문으로도 참여했습니다. 그는 1945년 미국 조지아 주의 미첼 카운티 소재인 카밀라에서 태어납니다. 이후 그는 조지아 대학에서 영문학 학사 학위를, 그리고 뉴올리언스에 위치한 사립 연구 대학인 툴레인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영국 런던의 공립 연구 대학인 킹스 칼리지 런던에서 최종적으로 박사 학위를 마쳤습니다. 그는 학위 취득 후, 사우디아라비아의 킹 사우드 대학과 일본 히로시마 대학 및 도시샤 대학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또한, 스펜스는 본인이 제인 오스틴 전문가로서 호주 제인 오스틴 협회의 편집 위원회에서 오랫동안 활동했지만 2011년 5월, 다소 불명확한 이유로 시드니 더블 베이에 있는 자택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가 집필한 '제인 오스틴 되기 (Becoming Jane Austen)'는 지난 2003년에 출간되었는데, 이 책은 "지난 25년 동안 오스틴과 관련해, 출판된 최고의 여섯 권 중 하나"로 평가를 받았고 제인 오스틴에 대한 방대한 사료와 개인 오스틴에 대한 성격과 인성, 그리고 그녀의 소설에 대한 스펜스 자신의 고유한 해석은 그의 놀라운 업적으로 평가를 받은 바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Becoming Jane Austen"으로 지난 2003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07년 11월 번역 출판되었으나, 현재는 절판된 상황입니다.

존 스펜스의 이 글은 무엇보다 1장과 2장에서, 제인 오스틴의 가계를 치밀하게 분석해 냈고 부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외가 쪽의 가계에도 적잖은 사료를 덧붙이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부계인 '오스틴 가'와 모계인 '리'가의 많은 인물들의 살아생전 행적 등을 치밀하게 조사하기도 했습니다. 즉, 제인 오스틴이 어떠한 분위기의 가정에서 성장했고 그녀를 둘러싼 가족들과 먼 친척까지 분류하여, 오스틴 가의 뻗어나간 인적 가지들을 독자들이 한 눈에 조망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대략 1740년대부터 1810년대까지 오스틴이 살아간 시대상과 더 나아가 그때의 영국인들이 어떠한 사회상을 품고 인생을 살았는지도 확연히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저자인 존 스펜스는 제인 오스틴이 남긴 작품들과 그녀 자신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도 주요 관점으로 써 내려갔으며, 특히 개인적으로 그녀가 왜 결혼에 이르지 못했는지에 대한 '인연의 한계' 역시, 빠짐없이 언급되고 있었습니다.

이미 확인된 여러 기록에 의해, 그녀와 언니인 카산드라와의 자매를 초월한 깊은 우정은 많은 '서간'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다만 카산드라가 제인에게 보낸 편지들은 저자인 스펜스가 언급한 바와 같이, 거의 전부가 유실되고 말았는데요. 그럼에도 언니인 카산드라와 제인의 어떻게 보면 내밀하고 가족 간의 이야기들이 후세에 전해지면서 이 두 사람을 살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여기에는 제인과 아일랜드 출신의 톰 러프로이와의 인연이 젊은 시절의 짧은 열정으로 끝나자, 그녀는 그 과정에서의 이야기들을 함구하기에 이르고 언니인 카산드라 역시 이에 동참합니다. 후에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은 제인 오스틴을 가리켜, 톰 러프로이는 젋은 시절에 흔히 볼 수 있었던 '찰나의 열정'을 인정하고 그것이 작가적 명성을 쌓은 제인 오스틴의 연결고리를 그저 언급하려는 러프로이 자신의 속세의 욕망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 실패에서 제인 오스틴이 경험한 '결혼하지 못한 여성'에 대한 편견과 수근거림을 뒤로하고 그녀 자신은 더욱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했던 것 같습니다. 이에 저자인 스펜스는 "오스틴 일가 대부분이 제 속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이었지만 유독 제인 오스틴은 더욱 개인적 성향이 짙어졌고,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게 되었다"고 언급합니다.

경제적으로 그다지 풍족하지 않은 조건에서 꽤나 까다롭게 굴 수밖에 없던 오스틴의 양친은 상대적으로 주변인들에게 '합리적인 인사들'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럼에도 오스틴의 형제들을 대부분 별 탈 없이 삶을 영위하게 됩니다. 저자인 스펜스가 기록해 낸 당시 영국 사회의 일면들이 꽤나 흥미롭게 느껴지기도 했는데요. 앞선 오스틴 일가가 분주하게 연결된 혈연에 의해, 자식이 없는 일가 친척의 유산을 승계하고 그런 경제적 이익을 얻는 과정에서 영국 사회의 일종의 소산을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오스틴의 외숙모인 리 페럿의 재산 승계를 바랐던 그 과정에서 오스틴 일가와 리 페럿 간의 밀고 당기기는 꽤나 인상이 깊었습니다. 후에 제인이 너무 아끼던 오빠인 헨리가 은행 사업이 파산하면서 외숙모에게 끼친 손해가 막심하자, 리 페럿이 보인 오스틴 일가에 대한 분노 역시, 새삼스럽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다만, 저자인 스펜스가 깊게 서술하지 않은 관계로, 1800년대 초반, 유럽 대륙에 벌어졌던 '나폴레옹 전쟁'에 대한 영향력과 그 파급이 그냥 지나치는 수준인 것은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제인 오스틴 본인을 비롯, 그녀의 일가가 마치 유럽 대륙과 멀리 동떨어진 하나의 섬처럼 작용했던 영국에서의 삶이 그렇게 차분하고 고요할 수밖에 없던 점이 쉽게 믿겨지지가 않았습니다.

스펜스는 오스틴의 작품과 관련하여, 우선 '맨스필드 파크'를 언급합니다. 이는 그녀의 작품들에 있어 위계를 세운다면 이 작품이 우선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들고 있는데요. '오만과 편견'은 물론, 후에 등장하는 '에마'역시 쉽게 탈골을 끝낸 반면에, 맨스필드 파크는 그녀 스스로가 오래 고민했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제인은 '맨스필드 파크'를 1811년 2월경에 쓰기 시작해, 소설을 구상하는 데만 적어도 10년이 걸렸다."고 저자는 언급하고 있었는데요. 이 작품에서 패니 프라이스에게 상당 부분 자신을 투영한 오스틴을 저자가 따로 분석하면서, 그 시대를 통틀어 약간 괴상하면서 열렬한 반응을 이끌어 낸, '아주 못되 쳐먹은' 메리 크로퍼드를 요새 말로 톱 스타 마냥 소개하고 있기도 했는데요. 물론 이는 반쯤은 그 시대의 독자들의 의견을 덧칠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연유로 저자인 스펜스는 맨스필드 파크가 출간되어 인기를 끌자, 당시 독자들이 메리 크로퍼드에 보인 열광적 반응을 빗대어 설명하고 있었는데요. 그다지 낙관적인 분석은 아니지만 오스틴이 왜 메리 크로퍼드와 같은 인물을 그려냈는지에 대해, "자신이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것에 관심을 갖는 것, 그 자유라는 측면의 이상"을 제인 오스틴이 새롭게 발견했고, 또 그것을 자신이 원하게 될 것을 예견했던 것에 이유가 있지 않나 추측해 봅니다.

이미 언니인 카산드라를 통해, '에마'에 대한 그녀의 기대가 드러나듯, '에마'역시 오스틴의 작품들 가운데 한 획을 그은 소설이기도 합니다. 실제 삶에서 오스틴은 그녀가 너무나 사랑했던 스티븐턴을 떠나 우여곡절 끝에 이른 '초턴'에서의 일기가 '에마'의 하이버리 마을에서의 장면들과는 매우 대조적으로 느껴질 만한데요. 앞서 스치듯 지나간 제인 오스틴이 '여자 가정교사'에 대한 상당히 저어했던 감정을 차치하더라도 아주 극적인 태도의 변화까지 느껴지게 만드는 '에마'에서의 테일러 양의 인물 조성은 상당히 간극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에마의 주인공인 에마 우드하우스가 일전의 테일러 양의 사례에 힘입어, 보는 사람에 따라 다소 경솔해 보일 정도로 해리엇 스미스를 통한, '사랑의 작대기'로 거간하는 장면 자체는 실제로도 제인 오스틴이 그러한 '중매'를 했다는 점에서 꽤나 놀랍기도 했는데요. 또한 앞선 맨스필드 파크에서, 패니 프라이스에 대한 아이디어를 오스틴 자신의 조카인 패니 나이트를 배경으로 했다는 점도 처음 접한 사실이었습니다. 이미 5장과 6장에서 따로 설명되는 바와 같이 오스틴의 여러 작품속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과 모티브는 대부분 자신의 가족과 친척으로부터 차용되었습니다. 외가인 리 일가의 세 자매 역시, 맨스필드 파크에서 간접적으로 아이디어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오스틴의 다른 작품인 '이성과 감성'은 유독 다른 작품들과 달리, 섹스와 관련된 간접적인 긴장감과 감성적인 측면이 드러납니다. '오만과 편견'도 마찬가지로 엘리자베스와 다아시의 관계를 통해, 저의 해석으로는 섹스를 통해 발산되는 관능과 감정의 고조가 다소 간접적으로 소비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이것은 섹스라는 주제 자체를 간접적으로 또는 완곡한 어법으로 처리한 제인 오스틴 특유의 주제 의식으로 볼 수 있을 겁니다. 이것을 따로 주제의 한 방편으로 꺼내 그녀의 여러 작품들과 연계해서 분류해야 될지는 독자들의 판단이기도 하겠습니다만 그녀의 작품 대부분에서 등장하는 인물들 대부분이 젊은 남녀들임을 감안해 본다면 그 시대에는 매우 희소한 여성 작가가 그리는 연애와 결혼, 그리고 그 속에서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런 섹스 자체의 간접적인 요소 채용은 독자들의 흥미를 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적당히 압축해 담은 저의 글이 이 상당한 분량의 자료들을 담은 '제인 오스틴' 개인의 삶을 얼마나 담아낼 수 있을지는 불명확합니다. 다만 저와 비슷하게 이미 그녀의 작품 여럿을 경험해 본 독자들에게는 스펜스의 이 책은 파란만장한 그녀의 작품들을 내면에서 다시금 되새김질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아직 '이성과 감성'을 일독하지 못해, 이 책에서 소개되는 이성과 감성과 레이디 수전에 대한 부분은 그저 읽고 참고하는 수준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또한 '노생거 수도원'과 관련된 이야기들은 캐서린 몰런드에 대한 짧은 인상과 작가인 제인 오스틴이 실제로는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는 배스 (혹은 바스)에 대한 의견이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그에 반해 레이디 수잔은 이 글에서 적지 않은 분량으로 분석되고 있어서 이 작품 역시 조만간 일독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곧 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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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말로 설득되지 않는다
사라 스테인 루브라노 지음, 이혜경 옮김 / 북플라자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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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사라 스테인 루브라노는 하버드 대학을 거쳐, 케임브리지에서 석사를 그리고 옥스포드 대학에서 정치 이론을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그녀는 인긴 심리학과 정치 이론과의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에 따라 시민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인지 부조화 현상을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인지 부조화 현상이 어떻게 현대 정치적 일상에서 음모론과 확증 편향, 더 나아가 민주적 담론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조사하고 있는데요. 이런 일환으로 그녀는 영국 런던에 있는 '더 스쿨 오브 라이프 (The School of Life)'에서 콘텐츠 책임자로 일했고 여러 소셜미디어와 앱 기반 및 영화 등지에서 활동을 지속해 오고 있습니다. 이번에 소개할 그녀의 이 논저는, 자신이 처음 발표한 글로 출간 즈음에 유튜브와 여러 인터넷 미디어를 통해 활발한 홍보 활동을 겸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원제, "Don't Talk About Politics : How To Change 21st Century Minds"로 최근인 2025년 5월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5년 7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저자인 루브라노에 대한 정보를 구글에서 찾다가 이 책에 대한 그레이스 블레이클리의 짧은 감상평이 보여 제 눈길을 끌기도 했습니다. 근래들어 어떠한 정치경제학자들도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극단주의, 극우 포퓰리즘 정치에 대해 특별한 해결책을 내놓고 있지 못하는 실정을 감안해 본다면 루브라노의 이 글은 부분적으로는 상당히 독창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저자는 자신이 누구보다 엘리트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소위 다른 계층의 지식인들과는 다른 정치경제적 배경을 갖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엘리트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표출하는 것도 신기했고 극단주의 정치를 어느 정도 연구 목표로 삼은 점도 제가 보기에 흔한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서두에서 저자가 밝히고 있지만 그녀의 이 논저는 아주 철저하게 이론과 고증에 집착한 학문서가 아니라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 정치 더 나아가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해 그 구성원들인 시민들의 관점에서 글을 진행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흔히 목도하고 있는 현실 정치를 기반으로 시민들이 처해 있는 인터넷 기반의 인지 부조화와 확증 편향 등이 강화되는 문제적 현실을 깊이 있게 분석하고 이러한 상황에서, 근본적인 문제 인식과 여기에 좀 더 실효적인 개선 방법을 시도할 수 있는 방안 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보는 현실 정치에서 소셜 미디어가 갖는 위상은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올라선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저자인 루브라노는 1장의 논증에서 아주 기본적인 '의사 소통'이라는 관점으로 이들 소셜 미디어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단언하고 있는데요. 이는 저자가 서두에서 도출한, "자유주의라는 오래된 명목에서 개인의 권리, 사유 재산, 법 앞의 평등을 강조하는 이 유산"이 과연 오늘날 현대 정치에서 제대로 기반해 작동하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되묻는 식으로 앞선 '소셜 미디어 혁명'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자유주의적 전통과 유산이 오늘날 민주주의의 신뢰 구축과 지향에 어느 정도 이바지하고 있다고 표면적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이 자유주의는 특정 정치 세력이 이를 왜곡하거나 혹은 시민 전체를 아우르는 자유라는 이상의 확대가 더이상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겁니다. 이 지점에서 필립 페팃의 공화주의적 자유를 굳이 언급하고 싶지는 않지만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자유라는 기본적 가치가 아니라 이제는 현실에서 이 자유라는 가치가 얼마나 평등하게 뻗어나가고 있는지를 주목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인 루브라노가 밝히는 소셜미디어 상의 우리가 흔히 수렴하고 있는 의사 소통과 시민들 간의 의견 개진이 그저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점을 명백히 인식하고 있어야만 한다고 여겨집니다.

이미 이 글에서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본질이 드러나고 있지만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개인의 자아 실현과 소비를 통한 개성의 확대, 혹은 (능력을 통해 돈을 축적하는) 신분 상승과 그런 이상을 교묘하게 언설로만 그친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체제입니다. 조장된 경제적 불평등 상황에서 이 신자유주의가 얼마나 교묘하게 작동했는지를 여기서 따로 논하지는 않겠지만 저자 역시, 소셜 미디어를 통해 자신의 부와 능력을 과시하는 이런 포장된 '선물 세트'가 무슨 시민들간의 소통의 한 방편이 될 수 있겠느냐고 일침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근본적으로 이 글에서 일반적으로 논증되는 부분이 과거 위르겐 하버마스가 고안한 '공론장'의 기능이 거의 유명무실화 된 상황이고, 후에 드러나겠지만 이런 공론장에서의 토론과 의견 교환이 시민들 서로 간의 건전하고 생산적인 정치적 무대가 되지 못하고 있는 점도 분명합니다. 물론 이에 대해 저자인 루브라노는 이 전통적인 공론장을 새로 고쳐서 혁신해야 된다는 접근은 애초에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공론장 자체가 민주주의 정치에서 유명무실해졌거나 아니면 공론장의 이상들이 현대 정치에서 더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것인지 명확하게 구분할 수는 없지만 시민들이 공공선에 대한 선행 인식과 도덕적 분별력이 예전보다 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다른 관점의 분석이 요구되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자가 '토론'에 대한 실질적 의미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는 이유를 2장 이후의 논증에서 대략적으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해하고 있듯 토론은 정치 전반을 통틀어 매우 중요한 가치이자 담론입니다. 과거 미국의 대선 시점에서 존 F. 케네디와 리처드 닉슨의 치열한 양자 토론으로 상징되는 미국의 정치적 문화는 분명했습니다. 서로 간의 의견 대립을 충분한 토론을 거쳐, 좁힐 수 있으면 좁히고 더 나아가 그 과정에서 자신이 그동안 잘못 알고 있던 부분이나 혹은 왜곡된 인식을 바로 잡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토론, 그러니까 정치인들의 토론에서부터 일반 시민들 간의 사소한 의견 교환이나 작은 토론까지, 그 본연의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다고 봐야 할 것 같은데요.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맥락은 이렇습니다. "내가 공화당의 지지자인데 우리 정치인이 상대당의 정치인(이를테면 민주당)과 공개된 토론을 시작되면 나는 상대당 정치인의 합리적인 의견이나 사리에 맞는 상황 인식보다는 우리 편의 정치인이 어떻게 저 정치인을 찍어 누를 수 있을 지를 고민하고 또 기대한다."는 일종의 이종격투기와 같은 승리자와 패배자라는 단순한 논리 말입니다. 


즉, 미국의 정치 현실은 민주주의가 그려내는 제도적 기반과는 더욱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저자인 루브라노는 앞선 정치인들의 소위 타협하지 않는 정치적 극단화를 포함하여, 일반 시민들조차도 각 개인들이 이미 심각한 '인지 부조화'에 빠져, 존 듀이식으로 말하자면 '정치적 분별력'을 상실한 상황이라고 사실상 분석해 냅니다. 이미 토크빌이 강조했듯 초기 미국의 유럽과는 다른 정치적 분위기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저 사람이 나와는 다른 정치적 의견을 갖고 있을지라도 정치적 차이에 따른 각자의 최소한의 신념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미국인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건국의 아버지들의 사례가 그것을 대변하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일전에 제가 다른 서평에서도 언급했지만 과거 보스턴 티파티 운동을 차용한 현재의 풀뿌리 극우 포퓰리즘 운동인 티파티 운동이 민주당을 비롯한 리버럴 정치 전부를 싸잡아 '격멸'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저자의 표현대로, 각자가 확연히 구분되는 '정치적 감수성'을 갖고 있다고 전제한다면 스스로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내면의 정치적 극단주의를 통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시민들이 민주주의에 하등 쓸모가 없이 그저 인터넷 기업들을 배불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 소셜 미디어의 검증되지 않는 소문이나 일설 등에 이성을 잃지 말고 각자가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이 과연 진실에 가까운가."라고 말이죠.

이 책에서 보이는 저자의 여러 통찰 가운데, 가장 수긍할 수 있었던 부분은 앞서 언급한 실제 권력과 비등해진 소셜 미디어가 특유의 네트워크성으로 말미암아, 극단주의 정치의 저변을 더욱 두텁게 만들고 있다는 점입니다. 소위 나와 같은 생각, 나와 유사한 정치색, 그리고 비슷한 세계관 등으로 연결된 수많은 네트워크가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숙고해 봐도 종래에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훼손시킬 수 있는 것으로 예견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온-오프라인의 극단화의 근본적 원인은 기존의 공론장의 기능 상실에 있다기보다는 많은 정치학자들이 지적해 온 신자유주의 체제 이행에 따른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에 있습니다. 동일하게 이런 맥락에서 현재 도널드 트럼프 현상이 시작되어 그가 기존 정치 무대에 서게 된 실질적 연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저자 역시, 시민들 간의 불신과 혐오 및 대립이 확산된 이유에도 각자의 삶을 통째로 흔들어 놓은 경제적 불평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5장의 후반부에서, "극우는 우연히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 "일반 시민들조차 가장 인종 차별적이고 가장 이민자를 혐오하면서 그 지향은 흡사 파시스트적인데도 이들은 민주주의를 칭송한다"는 역설은 경제적 환경의 악화 그리고 동시에 유입된 이민자들로 일원화된 단순 도식이 "이들에게 권리를 빼앗긴 선량한 시민들"이라는 서사를 만들게 했습니다. 이러한 매커니즘 자체는 이 서사에 속한 이들이 절대로 타협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습니다. 

글의 결론에 이르면서 저자는 결국엔 우리가 안과 바깥에서 '정치 이야기'를 하며 시간과 관계를 소모시키는 것보다 좀 더 친구와 이웃을 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정부들이 신자유주의 이행에 따라 사회적 기반의 제거와 그에 따른 '민주적 인프라'가 민영화되었고 이는 아주 근본적으로 "자주 자본주의의 요구와 민주주의의 요구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상황에 놓인 우리들의 모습"을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가 신자유주의 경제를 민주적 삶보다 우선시하는 '정치적 선택'을 내렸다"는 과거의 결정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이기도 합니다. 결국 이러한 상황은 모든 정치인들도 쉽게 인식하고 있는 문제로 이는 다른 면에서 시민들이 정치인들의 가면에 쉽게 속아 넘어가서는 안되는 증거라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본질적으로 자본의 이익을 위해 사회적 기반의 전반적인 후퇴를 결정했던 지난 대처리즘의 이행이 바로 저 정치인들이 주도한 것이며, 이들의 진면목을 파헤치기 위해서는 우리는 무엇보다 '정치가 만들어 내는 혐오와 차별과 같은 날 것'에 더는 부화뇌동해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중요한 선언과도 같습니다. 물론 우리의 정치를 위해 진실과 증거를 구별하는 능력을 키울 필요가 있지만 그와 동시에 저자가 강조하는대로 친구와 이웃들과의 대화를 시도하는 것도 그만큼 의미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이 글 후반부에 도출된 것처럼 "사회적 자본이 풍부한 사회일수록 사람들은 타인을 덜 의심하고, 공격적인 성향도 덜하며, 전체의 이익을 고려하는 방식으로 정치에 참여한다."고 강조한 이유일 겁니다. 그런 의미로 글의 결론에서 저자가 밝히는 "오직 민주주의만 생각하라"는 대목에서 저는 한 가지를 더 첨언하고 싶습니다. "가능하다면 자신의 이익과 민주주의의 가치가 합치되는 쪽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라."라고 말입니다.


- 본문 118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 너무나 반갑게도 마크 피셔가 본문에서 인용되고 있었는데요. "자본주의를 대체할 그 무엇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그의 한탄 아닌 언급은, 현재의 경제 및 정치적 불평등의 상황을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더 생생한 연관성을 느끼게 해 줍니다.        

              


우리 사회에는 정치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근본적으로 결함투성이인 두 개의 모델이 존재한다. 첫 번째 모델은 정치가 사실상 ‘상업(생각의 시장)‘과 같다고 보는 것이고, 두 번째 모델은 정치가 사실상 ‘전쟁(사상의 충돌)‘과 같다고 본다.

그리고 이 인지 부조화로 인해, 우리는 자신의 세계관 속 모순이 일으키는 불쾌감을 줄여 가는 과정에서 확증 편향과 자기 합리화와 같은 사고방식에 빠져드는 것이다.

즉, 현실에서 우리의 생각은 교환을 통해 형성된다기보다는, 타인과 조화를 이루려는 과정에서 집단이 잘 지내는 데 도움이 되도록 조정되는 경향이 있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이를, "이상적 형태의 정치적 담론이란 피 흘리지 않는 방식으로 전쟁을 대체하는 것이 그 본질이며, 그러한 정치에서 승리는 무력에 기초하지 않은 더 나은 논증의 힘으로 얻어진다."라는 말로 멋지게 요약했다.

실제로 덜 민주적인 체제에 살면서도 독재 정권의 지배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꾸준히 증가하는 모습을 지켜봐 온 사람들이라면, 이러한 인간 행동의 기이함을 바로 알아차릴지도 모른다.

정치 집단과 사이비 종교 집단, 양쪽 모두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러한 집단에 가입하게 되는 것이 대체로 개인이 맺는 사회적 네트워크에 달려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직업적 삶, 취미, 건강, 외모처럼 겉으로 보이는 것들조차도 일반적으로는 관계에서 사랑받고 싶거나,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거나, 다른 사람과 연결되고 싶거나, 더 많은 시간을 갖고 싶다는 욕구로 귀결될 수 있다.

트위터(지금의 X)와 같은 형태의 소셜 미디어 플랫폼은 민주주의를 아주 제한적으로만 지원할 뿐이며, 동시에 반민주적 목적을 위해 너무도 손쉽게 악용될 수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위한 더 나은 인프라를 만든다는 것은 경우에 따라 소셜 미디어를 몰수해야 한다는 뜻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민주적 인프라들이 점차 민영화됨에 따라, 우리는 자주 자본주의의 요구와 민주주의의 요구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실제로,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권력자들이 민주주의를 칭송하며 자주 들먹였던 순간은 정확히 그들이, 그리고 일반 시민들조차 가장 인종 차별적이고, 가장 이민자를 혐오하며, 심지어 파시스트적일 때였다.

어쩌면 우리가 사회를 더 많이 불신하게 된 이유는 사회가 우리에게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하지 않아서, 그로 인해 우리가 고립될수록 우리 뇌에서는 편집증과 의심을 유발하는 영역이 더 활성화되어서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약 이러한 사회적 위축이 계속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신자유주의 경제를 민주적 삶보다 우선시하는 ‘정치적 선택‘을 내렸기 때문이다(그런 사회에서 우리는 아마도 생산적인 노동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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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지식인에 대해, 여러 차례 서평을 통해서 지그문트 바우만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제가 그동안 제대로 알지 못했던 신자유주의 체제의 본질과 18~19세기의 근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시기 동안 인류가 이룩한 '근대성'이 얼마나 문제가 많았는지를 '직보'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약간의 논외로, 지그문트 바우만 살아 생전에 단 한번이라도 대담의 형식으로 이제 언급할 노엄 촘스키와 함께 전세계 문제에 대한 공개 논의를 했으면 어땠을까, 혼자 상상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 두 사람이 과거 실제로 연이 닿아 잠깐의 사적인 만남조차 가능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2월 6일, 어제였죠. 간혹 듣던 모 유튜브 프로그램에서 엡스틴 (엡스타인은 그를 가리키는 정확한 발음은 아닙니다.)과 한 눈에 보기에도 친밀해 보이는 사진이 공개되었습니다. 이것은 '엡스틴 파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2월 6일 전까지 '세계의 양심'으로 불렸던 노엄 촘스키는 특히 저에게는 과거 조지 W. 부시 정권의 네오콘을 아주 적나라하게 비판했고, 1980년대 이후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 이행을 누구보다 앞장서서 비판했던 인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기여한 학문적 업적은 물론이거니와, 하버드와 MIT를 비롯 미국 유수의 대학에서 일하고 있는 많은 지식인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소위 행동하는 양심, 자신이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 진실과 연계하여 그것을 욕되게 하지 않고 할말을 기어코 하는 촘스키의 행동력은 일반적으로 흔히 볼 수 있는 보신에 힘쓰는 지식인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대학 경력과 이후 이어지는 미국 지식인 사회에서 그가 갖고 있는 위상은 단순히 말만 잘해서 인정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전에 조지프 슘페터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지식인들의 역할은 중요하고 특히나 비판이 필요할 때는 지식인들이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 그의 말을 공허하게 느끼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것보다 지식인들이 돈(시장)과 권력에 점차 순응함에 따라, 이러한 의무는 이익에 매몰되어 갔습니다.


그런 노엄 촘스키가 엡스틴과 아주 친밀한 관계였다는 것이 거의 '폭로'되었습니다. 촘스키는 그 누구보다도 정치 권력의 위선과 부패를 증오하던 사람입니다. 그의 글들을 보면 자격이 없는 권력이 어떠한 일들을 벌이는 지에 대해 낱낱이 밝히기도 했습니다. 또한 특히나 국내 방송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노란 봉투 캠페인'의 일환으로 그가 제작진에게 47달러를 건넨 일화는 매우 유명하기도 한데요. 자유주의를 왜곡하고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권력과 부를 쫓는 일종의 수익 사업으로 생각하는 인간들을 강도 높게 비판한 그가, 지금까지 알려진 바대로 그런 권력자들의 유흥거리 (아주 불법적이고 비인간적인 그리고 금수만도 못한)를 제공한 불명예스런 인간과 가까운 사이였다는 진실은 저에게 무엇보다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저는 노엄 촘스키가 그동안 자신이 견지해 온 양심적인 글쓰기와 후학들과 독자들에게 수많은 영감을 제공한 것을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면 추후 이 사건에 대한 명확한 발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 사건이 그가 과거로부터 목숨과 같이 여겼던 스스로의 양심과 선명한 진실, 그리고 비도덕적인 정권을 비판했던 과거의 행적이 그저 위선이 아니었다면 마찬가지로 자신이 분명하게 과거의 오명을 세상에 명확하게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그가 몇 번이나 강조한 '지식인의 책임'을 증명하는 아주 사소한 일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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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셋 파크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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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폴 오스터는 1947년 2월 3일, 미국 뉴저지주 뉴어크에서 태어납니다. 그의 부친인 사무엘 오스터는 저지시티에서 형제들과 함께 건물을 소유한 지주였으면, 모친의 이름은 퀴니 보갓으로 오스트리아계 유대인 출신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이 둘의 결혼 생활은 좋지 못했고 오스터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에 이혼하여, 그와 누나는 어머니를 따라 뉴어크의 위콰히크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하게 됩니다. 1958년과 1959년 여름 동안 오스터는 야구 내야수로서 뛰어난 운동 재능을 인정받기도 했는데요. 유년 시절의 선수 재능이 미국에서 야구를 지속하는데 중요한 원동력이 되는만큼 스스로도 꽤 고양되었던 것 같습니다. 1970년이 되자 그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영문학 및 비교문학 학사 및 석사 학위를 취득하게 됩니다. 이후 파리로 이주하여 프랑스 문학 등을 번역하여 생계를 유지하려 했지만 뜻대로 잘 되지는 않았습니다. 1974년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에티엔 말라르메와 조셉 주베르 등과 같은 프랑스 작가들의 시, 에세이 번역 작업을 지속하게 되는데요. 이런 가운데, 1982년이 되어서야 그의 데뷔작인 '고독의 발명'이 출판되기에 이릅니다. 이어지는 뉴욕 3부작과 달의 궁전, 우연의 음악, 환상의 책, 브루클린 폴리스, 보이지 않는 것, 선셋 파크 등이 문단과 독자들의 큰 호평을 이끌게 되면서, 이즈음 그는 미국을 대표하는 중요한 작가로 자리매감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성공적인 작품 활동 이외에, 그는 자신의 정치 성향을 미국 민주당보다 훨씬 더 좌파적이라고 공개 선언하고 소위 사회주의(개량된 사회주를 포함한)를 지지하는 후보자가 정치 무대에 설 수 없는 미국의 정치 환경을 비판하기도 했는데요. 특히 그는 공화당원들 가운데 극우, 극단주의에 쏠려 있는 지지자들을 대놓고 '지하디스트'라고 규정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왕성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그는 2022년 12월에 전문 병원에서 암진단을 받았고, 2년 뒤인 2024년 4월 30일, 브루클린에 있는 그의 자택에서 폐암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Sunset Park"로 지난 2010년에 출간되었고, 국내 번역은 2013년 3월에 이뤄졌습니다. 다만 현재 이 국내번역본은 절판된 상황입니다.

이 작품의 출판 당시, 미국에서의 출간 시기와 맞물려, '2008년 세계 금융 위기'에 따른 사람들의 비틀린 삶을 작가가 절묘하게 그려내는 등의 홍보를 진행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각자가 처한 관계에서 사실상 실패한 사람들의 방황과 옳다고 믿는 것과 삶의 통제력 사이에서의 도덕적 갈등과 그러한 가운데, 인간 내면의 힘을 복합적으로 규명하는 것이 이 작품의 주요한 주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또한 여기에는 사랑하는 사람들 간의 화해와 사소한 것으로 읽히는 단순한 관계가 정작 평범한 사람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맥락으로 자리매김하는 그런 따뜻하고 뭉클한 과정도 잘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서두에 등장하는 마일스 헬러와 모리스 헬러 부자의 서사를 중심으로, 마일스의 친모와 계모, 그리고 마일스의 연인인 필라와 그의 숨겨진 벗인 빙, 더불어 빙을 매개로 모인 앨리스와 엘런 등의 인물 등을 큰 틀의 주제를 엮어가는, 일종의 서사적 가지로서 전자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마치 각자의 서사가 따로 노는 듯 보이기는 하지만 앞서 언급한 마일스의 사유와 행적을 중심으로 이들 모두가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마일스는 부친인 모리스 헬러의 짧은 첫 결혼에서 태어난 아들입니다. 그녀의 모친은 너무나 어린 나이에 그를 출산했기에 여기서 그려지는 봐야 같이, 그녀는 스스로가 어머니가 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더욱이 연기에 대한 열정을 미처 지울 수 없었고 물론 연기에 대한 소위 목마름과 육아에 매진하느라 경력이 단절될 수도 있다는 공포심에서 결국 잘못된 선택을 하고 마는데요. 한참 모성의 보호가 절실하게 필요할 시기에 그것의 중대한 결핍은 작가가 그려내고 있는 바와 같이, 마일스와 같은 아이에게는 대체로 불행한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의 부친인 모리스와 계모인 윌라가 경제적 안정 내에서 그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했으나 여전히 윌라는 그의 친모가 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에다 의붓 형이었던 보비가 불행한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나자 그것에 대한 책임과 고통으로 말미암아, 마일스는 스스로를 도덕적 유배에 처하게 됩니다. 명문 브라운 대학의 재학생으로서 여기에 명민한 두뇌와 통찰까지 겸비했던 그가 어쩌면 주어졌을지도 모르는 꿈같은 미래를 저버리고 스스로를 가까운 이들로부터 멀어진 것인데요. 그는 극의 초중반에서 부친인 모리스와 윌라와의 대화를 자기도 모르게 엿듣게 되는데, 이는 '자신을 벌주기 위한' 도피의 시작점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일스의 특별한 성취와 시와 고전을 아우르는 그의 천재적 분석을 설명하는 장면에서, 매일 손에 책을 놓지 않는 감수성의 폭발적 시기에 그가 얼마나 일반적인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었는지를 짐작하게 되었습니다. 돈벌이에 전혀 쓸모가 없다든지, 자신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거나, 스스로 엄두도 내지 못하면서도 글을 읽는 사람들에 대한 터무니 없는 냉소를 겪어봤던 사람들이라면 마일스라는 한 인간을 온전히 이해하는데 거의 주저함이 없을 겁니다. 마치 대학의 정규 과정은 저버릴 수는 있어도 책은 결코 손에서 저버릴수 없다는 마일스의 행동 원리 그 자체는 세상의 그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홀로 된 느낌, 그리고 그런 자신을 누구도 이해해 줄 수 없는 고립감 등이 다른 것들로는 채워질 수는 없었기에, 그저 숨만 쉬고 있는 상태였던 마일스에게 글 자체는 구원이었을 겁니다. 그런 그에게 필라라는 소녀의 등장은 그만큼 자신의 모든 걸 줄 수 있는 '사랑'이기도 했는데요. 후반부에 모리스 헬러는 심정적으로 마일스가 처한 상황을 동정하면서 그런 아들이 필라를 만나게 됨으로써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을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이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개인적으로도 극의 서두를 차지하고 있는 마일스와 필라의 만남과 이들의 깊어지는 사랑의 감정에 대해서, 조금 회의적인 시각을 가졌던 것도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마일스가 필라를 처음 대면하게 되는 공원에서의 장면은 그녀가 십 육세였고, 갓 성인이 된 마일스와 십대 여자 아이에게 느끼는 그만의 감정들이 솔직히 감정적으로 면밀하게 이해되지는 않았습니다.

마일스의 어린 연인인 필라 산체스는 플로리다에서 힘겹게 살고 있는 쿠바계 이주민으로 위로 세 명의 언니들이 있지만 그녀의 부모 모두 세상을 떠난 상황입니다. 당시 시카고를 거쳐 플로리다로 하염없이 넘어온 마일스는 자신도 부모가 없다고 여겼기에 그녀에게 자신도 고아라고 강조합니다. 물론 상대인 십대 소녀에게 이러한 거짓말이 충분히 나쁜 점이라는 것을 본인도 잘 알고 있었고 이 어린 소녀에게 같이 부모가 없다는 동질감이 어떤 식으로 내면에 작용했을지는 거의 명확합니다. (마일스가 그녀를 향해 진실을 고백하는 장면과 그것의 올바른 마무리는 두 사람의 약혼으로 마무리 됩니다.) 그런 연유에서 조심스럽게 마일스는 십대에 놓여 있는 필라와 어떠한 스킨쉽도 자제하고 섹스 역시, 그녀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유보를 하기로 결정을 합니다. 또한 마일스는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은행에 넘어간 집들을 정리하는 일을 하면서 버려진 장물들을 필라의 언니인 안젤라에게 자신과 필라를 잘 봐달라는 의미로 전하게 됩니다. 이는 자신의 양심에 매우 위배되는 행동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안젤라가 더 많은 것을 그에게 요구하게 되고 더욱이 동네 불량배를 동원해 협박하자, 눈물을 머금고 필라를 플로리다에 남겨두고 그는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빙 네이선은 마일스의 십대 시절 일부를 공유한 친구였습니다. 물론 마일스에게는 그에 대한 기억이 전반적으로 제한적이지만 빙은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일스의 아버지인 모리스와 모친인 메리-리의 '끄나풀'로 일한 것입니다. 마일스가 지난 7년 반의 시기동안 이리저리 도시를 옮기고 여러 직업을 전전할 때, 마일스의 행적을 비밀리에 알린 인물입니다. 그렇다고 빙은 모리스에게 어떤 금전적 이득을 기대하고 이러한 일을 맡은 것은 아닙니다. 오로지 친구인 마일스가 걱정되었기에 그리고 자신이 그런 마일스와 부모들 사이에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후 서사에서 오스터가 그려낸 이 빙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사려깊고 상대에게 대한 깊은 온정과 관심을 갖고 있는지, 엘런 브라이스를 통해서도 잘 드러나게 됩니다. 다만 후반부 설정에서 작가가 만들어 놓은 빙과 마일스의 그 특별한 물놀이 장면은 뭔가 작위적인 느낌이 들기도 했는데요. 결국 이 장면의 모티브와 빙의 인물 형성의 대부분은 후반부에서 적절하게 잘 조절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마일스와 빙 사이에 아주 급격한 변주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엘런 브라이스와 관련해, 그녀가 사회와 인간 관계에서 느끼는 중대한 결핍에 대해 그녀가 거쳐온 인생사 대부분이 설명되었을 때,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는데요. 다만, 선셋 파크에서의 엘런 브라이스를 거의 부정적으로 만들어 놓은 벤 새뮤얼스와의 우연한 대면은 정말 노골적으로 인위적인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폴 오스터가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우연의 마술사' 임을 감안하더라도 엘런과 벤의 재회와 "분명 사랑은 아니것 같으면서도 그에게 빠져든다"는 엘런의 대사는 문학의 서사 구조적 측면에서 너무 억지로 만든 티가 나기도 했습니다.

모리스 헬러는 윌라와의 두번째 결혼 생활에서 보비와 마일스라는 두 아들을 놓고, 이 두 부부가 다른 자식을 두지 않게 된 것은 윌라의 바람과는 반대였습니다. 이는 모리스가 원했던 것으로 그는 이 같은 결정이 자신과 윌라와의 관계 변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저는 다른 인물들의 서사들 가운데, 이 윌라라는 캐릭터의 인물 형성이 제 나름대로는 큰 설득력 있게 다가왔습니다. 모리스가 몇 번이나 '의미 없이 질에 삽입한 페니스'라는 문구로 후회를 드러내는 불륜과 친아들 보비의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인한 죽음, 그와 전처 사이의 아들인 마일스를 양육하고 또 자신의 일을 소홀히 할 수 없던 삼십여 년 이상의 시간이 그녀를 점차 무너지게 했다는 점층된 서사에 저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녀는 나중에 보비가 죽게 된 정확한 연유를 모리스를 통해 듣게 됨으로써, 마일스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기도 했지만 윌라는 진정으로 마일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나자 그의 안타까운 형편, 그리고 이 때문에 겪게 된 고통을 절실하게 이해하게 됩니다. 극의 진정한 화해와 해후는 이처럼 윌라가 마일스를 용서하게 되는 장면이었는데요. 좀 더 앞선 모습이기도 했던 윌라가 완전히 무너져, 남편인 모리스를 애타게 찾는 긴 통화에서, 활달한 이성과 명쾌한 결단력을 지녔음에도 주변인들의 감정과 생각을 이해하고, 항상 글을 손에 놓지 않았던 이 여성의 거듭된 절망과 고통이 저에게 (타자지만) 연결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주인공인 마일스 헬러가 스스로를 벌주게 되었지만 이후 개심을 통해, 스스로 대면할 용기를 내어 부모에게 돌아갈 선택을 하는 이 결심의 장면이 인상 깊었는데요. 다행히 조심스럽고 소극적인 마일스답게 극적인 분절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한 인간의 구부러진 인생 행로를 올바르게 자신의 힘으로 찾아가는 행로 자체는 작가인 폴 오스터가 잘 그려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나 마일스가 어떤 도덕적 완벽함 속에 자신을 가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도 자신이 불완전한 존재임을 익히 알고 있으며, 지나간 행적들이 그 자신의 방황과 분노를 잘 드러냈고 그런 면에서 누구보다 스스로를 용서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여실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소설 속 장면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을 꼽는다면, 모리스가 필라를 처음 대면하는 모습에서 그가 일찍 요절한 천재 작가로 그려지는 수키 로스스타인의 뚜렷한 모습을 필라에게서 찾은 얼마간의 서사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필라가 윌라의 모교인 바나드 대학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합격하게 되었다는 모리스의 독백 역시, 이들 가족의 해후를 드러낸 장면이기도 했습니다. 모리스가 아들의 여자친구인 필라의 대학 합격과 뉴욕으로의 이주를 그만큼 조심스럽게 반가워했던 것은 어쩌면 필라를 자신의 가족을 받아들이겠다는 결심의 소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이러한 연계되는 서사들의 합일이 마찬가지로 작가의 비범함이 느껴지는 설정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최종 결말은 약간의 열린 결말로 마무리 되고 있었습니다. 보기에 따라 우발적으로 벌어진 결론은 마일스를 이해하는 분들이라면 충분히 납득이 되겠지만 보는 관점에 따라 사건의 설득력 문제가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끝으로 이 작품을 읽고 느낀 개인적인 소회는 오스터의 이 작품이 참으로 오랫동안 제 기억에 남을 것만 같습니다. 첫 장부터 이어졌던 문장의 흡인력은 물론이거니와, 번역 역시 크게 나무랄 데가 없었고 여기에 등장하는 각각의 인물들에 대한 작가의 정밀한 서사는 꽤나 훌륭했다고 생각합니다.         



-남자와 여자의 성기를 언급하는 극중 장치로 쓰이는 서사들과 그러한 적나라한 일부 묘사들은 간혹 이언 매큐언의 그것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필라에게 어머니가 그를 낳은 지 여섯 달 만에 아버지를 버리고 다른 남자와 재혼하기 위해 이혼했다는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면 어머니가 손에 보드카 토닉을 들고 거기 서 있는 광경이, 이성을 잃고 곰탱이니 왕재수니 어린애들이나 쓰는 말로 자기를 모욕주는 어머니가 우스웠던 것인지도 모른다.

클럽에서 낯선 여자를 한 번도 낚아 보지 못한 재즈 드러머, 정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되면 창녀한테 돈을 주고 오럴 섹스를 받는 얼뜨기, 어두운 침실에서 포르노를 보며 자위나 하는 섹스에 굶주린 멍청이였다. 그는 여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지각이 있는 존재로서 그의 삶은 사람들이 열린 문으로 밀고 나가는 이제는 죽은 저 시체의 일부로 시작되었다는 것, 그의 삶이 그녀의 안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불륜 상대와 침대로 기어들어 가던 순간에조차 후회했으면서도 성적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다.

그는 윌라가 이번 별거를 앞으로 오랫동안 남편 없이 살아갈 수 있을지 알아보려는 일종의 시험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실 그는 메리-리의 침착하고 동정적이면서 신중하며, 마일스를 판단하기보다는 이해하려 하는 태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아들이 한 남자로 변모해 감에 따라 자신의 삶은 점점 작아져 가다 못해 더는 신경 쓸 것도 없을 지경으로 변해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소설의 아주 사소한 부분에까지 세밀하게 주의를 기울인 사고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을 뿐 아니라 아들이 내놓은 심오한 결론에도 감동받았다.

다른 인간 육체를 지각할 수 있는 정신을 소유한 인간 육체 안에 산다는 것은 타인들의 세계 속에 사는 것이다.

그녀는 혼잣말을 했다. 책은 위험하지 않아.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행복만을 가져다주는데. 책 덕분에 사람들은 더 살아 있다고 느끼고 서로 더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게 돼.

아들이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으니 돌로 만들어진 사람이 아닌 이상 틀림없이 언젠가는 새롭ㄱ 다시 시작할 마음을 먹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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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의 회전 기담총서 1
헨리 제임스 지음, 임명익 옮김 / 크로노텍스트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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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제임스는 1843년 4월, 미국 뉴욕의 맨해튼 자치구, 워싱턴 스퀘어 인근 워싱턴 플레이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헨리 제임스 시니어와 메리 월시로, 부친은 총명하고 거기에 호감가는 인물로 강사이자 철학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모친인 메리는 뉴욕시에 오랫동안 정착한 부유한 집안 출신의 여식이었습니다. 이런 헨리는 사남일녀 가운데 둘째로, 한 살 위인 윌리엄과 남동생인 가스 윌킨슨, 로버트슨이 있었습니다. 헨리가 한 살이 되기 전에 그의 부친은 워싱턴 플레이스의 집을 팔고 가족 모두를 데리고 유럽으로 기한 없던 이주를 하게 됩니다. 1845년까지 영국 윈저 그레이트 파크의 작은 저택에서 머물던 그들은 그해 뉴욕으로 다시 돌아왔고, 헨리는 유년 시절 대부분을 알바니에 있는 친할머니 집과 맨해튼 웨스트 14번가 58번지에 있던 집을 오가며 지내게 됩니다. 이후 1855년과 1860년 사이, 그의 가족은 아버지의 주된 직업적 관심사와 출판 사업의 향방에 따라, 런던, 파리, 제네바, 불로뉴쉬르메르, 본, 로드아일랜드의 뉴포트를 오가게 되었고, 간혹 가족의 자금이 부족할 때는 미국으로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헨리 제임스의 첫 출판물은 1863년에 출판된 연극 공연 평론으로, 첫 단편 소설인 "오류의 비극 (A Tragedy of Error)" 이 익명으로 출판됩니다. 이어지는 1869년부터 1870년까지 그는 14개월간 유럽 여행을 하게 되는데요. 이때 헨리 제임스는 존 러스킨, 찰스 디킨스, 매튜 아놀드, 윌리엄 모지스, 조지 엘리엇 등과 만남 및 교류를 이어가게 됩니다. 1875년이 되자, 그는 네이션 (The Nation)지에 매주 글을 기고하기에 이릅니다. 그해 가을이 되자, 그는 파리의 라틴 지구로 이사를 하게 됩니다. 미국으로 두 번 장기간 들른 것을 제외한다면, 그는 이후 30년 간의 남은 생애를 유럽에서 온전히 보내게 되었습니다. 또한 헨리 제임스의 작품 활동 역시, 1875년부터 본격적으로 이뤄지게 되는데요. 그해, "로더릭 허드슨"을 시작으로 "아메리칸", "워싱턴 스퀘어", "여인의 초상", "보스턴 사람들"과 같은 의미심장한 장편들을 세상에 내놓게 됩니다. 그의 작품 초기, 신대륙에서 구대륙인 유럽으로 향한 지식인이자 작가로서, 그의 작품에서 미국과 유럽, 양쪽으로 병렬적으로 경험한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유럽의 오래된 문학 역사에서 그도 역시, 일종의 이방인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헨리 제임스는 그의 많은 작품을 통해, 각 인물 간의 의식의 변화 혹은 자신만의 분명한 인지를 갖고 살아가는 인물들에 대한 애정을 표함과 동시에, 당시 시대와 관습이 배타적으로 강요하는 '인습의 굴레'에 대해서도 뚜렷한 비판 의식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시대상과 관습에 어느 정도 얽매여 있는 여성 캐릭터들을 잘 그려낸 것으로도 유명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The Turn of the Screw"로 지난 1898년에 출간되었고, 이번에 제가 구입한 번역본은 2025년 8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접해보셨을 것 같은 헨리 제임스의 이 작품은 당시에도 큰 주목을 받았지만 이후 한 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에도 여러 평론가들과 소설을 쓰고 있는 작가들에 의해 색다르고 다양한 분석으로 이름이 높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표면적으로는 이 작품이 예전의 고딕 형식을 어느 정도 오마주한 공포 소설로 독자들이 은연중에 갖고 있는 내면의 공포심과 그것을 부추기는 드러나지 않는 '거대한 악'에 대해 일종의 작가 나름의 단초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일전에 히틀러의 나치가 사람들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던 저열한 측면을 끊임없이 부추긴 것처럼 일견 호의에 기반한 사람의 의도가 어떻게 붕괴될 수 있는지를 이 작품은 잘 그려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소설의 초반 전개부터 정확히 어떤 의도로 쓰였는지 파악해야 될 수많은 수사와 수식어구(영문법의 표현으로)는 사건과 그에 따른 맥락을 이해하는데 상당히 난해한 부분으로 작용했습니다. 특히 작가인 헨리 제임스는 이 작품에서 만큼은 그다지 친절한 사람이 아니었는데요. 작품의 서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가장 중요한 축이라고 볼 수 있는 어린 마일스가 퇴학을 당한 이유가 명확히 설명되지 않고 있는 점은 오로지 독자들의 상상과 그에 따른 추론에 일임 되어 있어, 극의 결말의 해석 부분과 맞물려, 꽤나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처음 자신의 소설을 쓰기 시작한 소위 견습 작가들과 어느 정도 명성을 얻은 중견 작가들에게서도 이 작품의 해석을 놓고 의견이 분분합니다. 이러한 부분은 사전에 인지해 두고 극을 읽어 내려간다면 독자에 따라 꽤나 흥미로운 부분이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개인적으로는 주인공이 이르게 되는 블라이 저택의 안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그로스 부인'에 대해 본의 아니게 많은 숙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극의 서두에서도 이미 드러나지만 주인공인 여성은 이제 갓 소녀티를 벗은 인물로 할리가의 아이들인, 마일스와 플로라를 적절한 지도와 정서적 보살핌을 제공하기 위해 블라이 저택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녀는 서사에서 잠깐 소개되고 있듯, "멸종되는 법이라고는 없는 유형인, 잘생기고 거침없고 호감형인, 소탈하고 쾌활한 독신남 할리 씨"의 크게 감화되어 (젊은 여성이 저런 축복을 타고난 귀족적 남성에게 받을 수 있는 인상은 아마 모두가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그의 동생의 아이들인 두 남매를 열성적으로 보호하고 가르칠 것을 스스로 다짐하게 됩니다. 이렇게 극에서 그녀의 수차례 언행과 바람을 통해, 이 '할리 선생'을 다시금 재회하기를 손꼽아 기다리며, 그와의 관계에 대해 꿈 같은 기대를 갖게 되었습니다. 거의 상상과 같은 근거 없는 기대 말이죠. 이것은 단순히 여성의 신분 상승의 욕구라고 해석되기 보다는 그녀가 할리에게 받은 개인적 인상과 그로 인한 확고한 신념 등을 포함하고 있는데요. 특히, 어느 정도는 이 아이들을 자신의 시야에서 치워버리고 싶었던 할리가 그녀에게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간에, 타고난 재능으로 적절한 마음가짐을 그녀에게 추동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러니까 주인공인 그녀로 하여금 자신이 책무를 다하게 만들기 위한 약간의 술책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오롯이 그 책임이 할리에게 있다기보다는 자기 나름의 희망적인 재해석을 감행한 그녀에게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주인공인 그녀가 이 아이들과 대면하는 가운데, 할리와의 숭고한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자신이 어떠한 마음가짐을 갖고 어떻게 아이들을 인도할 것인지에 대한 일종의 압박과 사명감을 어떤 식으로 자신의 내면에 덧씌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규명된 여러 정신병증으로 대입해 본다면, "무조건 잘해야겠다"는 정신적 압박이 어느 정도 부담으로 작용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물론 이에 대한 연계가 아주 직접적으로 극에서 묘사되고 있지는 않지만 결국 그녀가 맞닥뜨리게 되는 일종의 환시(幻視)를 초래하게 된 것인데요. '자연의 섭리'를 위반하는 '영적 요소'라는 문제가 인간이라는 피조물로서는 도저히 극복하기 힘든 치명적인 균열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는 극의 전반부 서사에서 가장 큰 요소로 작용하고 있으며, 극의 중반 이전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그녀와 마일스와의 인식적 불협화음과 그녀 자신의 일방적인 기대로 말미암아 파국의 조짐이 드러납니다. 작가인 헨리 제임스는 이 두 사람의 파국을 작가 스스로 이해하는 인간 내면의 악을 드러내는데 이용합니다. 십 세 가량의 어린 남자 아이가 극에서 묘사되는 바와 같이, "애어른 혹은 어른아이"로 규정하고 그가 구사하는 언어들이 천진난만한 소년의 그것과는 대비되어 나타나는데요. 이런 측면에서 이런 장면들을 접하게 되는 독자들은 마일스에 대해 무언가 섬뜩함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단순히 "아이 치고는 영악하다"는 표현을 넘어, 전형적인 캐릭터 이상의 깊은 인상을 우리에게 남기고 있는데요. 다만, 주인공인 그녀가 몸소 겪게 되는 환시에 대해선 아이의 수사와 행동에 의도적으로 겹쳐 놓게 됨으로써, 극 후반부에 그녀가 어린 마일스에게 추궁하는 대화가 거의 양쪽의 분열된 인식을 표출 시키기에 이릅니다.

순결하거나 그 반대의 두려운 의미로 함께 쓰이는 영체를 경험하는 주인공은 이미 세상을 떠난 두 사람의 영혼 혹은 (가능성이 높은) 환시를 겪게 됩니다. 마일스와 곧잘 어울렸다는 저택의 하인 피터 퀸트와 그녀의 전임자였던 제슬 선생이 가히 목격되는 것인데요. 그녀는 내가 '귀신'을 본 것 같다는 의미의 고백을 처음 그로스 부인에게 하게 되고, 일절 본 적이 없던 피터 퀸트와 제슬 선생의 추정되는 이미지를 부인에게 전달하게 되자, 그녀는 쉽게 '그 사건'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는 두 영혼의 외형상 보여지는 모습을 이 그로스 부인이 확인 시켜 준 것입니다. 바로 이 행동이 그로스 부인의 행적의 분석하는 가운데 가장 많은 논란을 일으킨 부분입니다. 물론 단순하게 작가인 헨리 제임스가 그로스 부인조차도 주인공이 겪고 있는 '현상'을 같이 경험했다고 명확하게 서술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녀와 그로스 부인이 나누게 되는 대화나 그녀를 향한 부인의 일관된 동조와 신의는 단순한 극의 함정 요소를 넘어, 해석 상 난해한 설정으로 자리매김 합니다. 이 때문에 결말에 대한 많은 해석을 낳은 것이기도 합니다. 이 그로스 부인에 대해 첨언을 해보자면 그녀는 신분 상의 지위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 인물로 자신이 처해 있는 신분 상의 위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자신의 고용인인 할리의 신임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주인공에게 쉽게 수용되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물론 그로스 부인이 어느 정도 저택 내의 주인공의 권위를 인정하고 이것에 대해 저항하지 않음으로써 (기존의 저택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부인의 위치로 봤을 때, 갑자기 나타난 가정 교사에 대해 은연중 저항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는 않습니다) 극의 혼란을 가중시켰습니다. 물론 이는 작가의 의도된 상황 설정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극의 후반부에서 마일스가 학교에서 퇴학 당한 이유에 대한 추궁이 마일스를 (물론 스스로 감행했다고 보기에는 다소 의문이 들지만) 비극적 결말로 이끌게 됩니다. 그가 자신의 여동생과 이 저택에서 지낼 수 있게 된 것이, 큰아버지인 할리의 배려임을 일찍부터 인식하고 그 자신이 여동생의 안위까지 책임지고 있다는 점을 정신적 압박으로 지배 당하고 있었다면 아마도 '퇴학의 이유'를 추궁하는 (미처 서로 신뢰를 쌓지 못한) 가정교사의 압박은 어린 아이의 감수성으로는 아마도 쉽게 극복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극에서는 이미 그를 향해, 영악한 어른아이로 설명되고는 있지만 일상의 어른과 같은 보편적 인식과 태도를 갖추었다고는 볼 수는 없기에, 아이의 측면에서는 이러한 분위기가 원치 않는 압력이 되었음은 분명합니다. 졸지에 고아가 된 아이들의 심리 상태가 일반적일 수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고 극 중반부터 이어지는 주인공의 의뭉스런 행동과 그를 향한 억측의 오해들이 중대한 압박이 되어, 굳이 영체나 자연의 흐름을 벗어나는 현상을 내밀지 않더라도 결말은 어느 정도 파국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이 작품을 일독하고 나서, 구글에 떠도는 이 작품의 해설 등을 살펴보니, 어느 블로거가 헨리 제임스의 이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다른 단편 들을 포함한 중요 작품을 일독해야만 한다고 언급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의 의견에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일부 단편들은 읽어볼 필요가 있어 보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작품의 후기에서는 주인공인 가정교사가 일종의 성적 압박에 놓여 있던 것이 아닌가 하는 관점도 있었는데요. 앞의 서사에서 그러한 인식을 뒷받침하는 간접적 문장들이 있어서 그런 쪽의 추론도 가능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또한 주인공이 사망한 전임자였던 '제슬 선생'의 아름다운 용모를 간접적으로 그로스 부인에게 구술하는 장면이나 이를 바탕으로 내려지는 전임자의 외모 평가는 이런 분석을 뒷받침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 본문 164페이지에 띄어쓰기 오류 한 곳이 있었습니다.


- 이 작품의 역자는 '거시기'라는 단어를 세 번이나 사용하고 있었는데요. 굳이 원문이 궁금하지 않더라도 이 단어를 쓰게 된 연유는 어느 정도 짐작이 됩니다. 하지만 이런 번역이 신선하기 보다는 조금 부자연스러운 측면이 있지 않나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더욱이 번역된 작품 내에서 한자어와 같은 의도된 의미의 번역들이 여러 곳에서 보여서 저는 역자가 이 작품을 영어로 된 원전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일본어나 중국어로 번역된 작품을 중역한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다른 역자가 번역한 글을 재차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풍채 좋고 단순하고 소박하고 깔끔하며 건전한 아낙, 그로스 부인이 무척 반가운 나머지 너무 티를 내지 않으려고 확연히 방어 태세를 취하고 있음을 인지하기까지는 도착 후 반 시간도 안 걸렸다.

"그 꼬마 신사에게는 정신없이 휩쓸리실 거예요."

잘 생각해 보니 나의 첫 임무는 내가 동원할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솜씨로 아이를 구슬려 나를 아는 삶으로 느끼게끔 하는 일이었다.

거기서 내가 품었던 공상은 우리가 거의 대형 표류선에 타고 있는 한 줌의 승객만큼 길 잃은 신세라는 것이었다.

확실히. 이 소년의 학교 행실이라는 영역이 계속 알 수 없는 어둠에 파묻혀 있었던 것이다.

특히 마일스에게서 이를테면 과거라는 게 없는 아이 같다는 느낌을 받은 기억이 난다. (중략) 내가 아는 그 애 또래의 누구보다 매일 인생 새출발을 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아이였다.

"퀸트만 좋아라 했던 거죠. 도련님을 데리고 노는. 그러니까 제 말은, 도련님을 망치는 걸요."

그래서 나는 얼른 해당 화제에 대한 나의 관심이 이제는 거기서 탈출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형태를 취하느라 난리라는 말로 부인을 안심시켰다.

부인이 그토록 친밀한 연대의 적절성을 비평하고 부조화를 암시하며 심지어 제슬 선생에게 대놓고 건의를 할 정도로 나섰던 일은 기실 매우 적합한 진상이었다.

내가 압박하자 부인이 실토하길,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은 각각의 위치를 잊지 않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했다.

적어도 그런 소년이 학교장에게 쫓겨났다는 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유의하기도 했었다.

"우리의 기묘한 숙명 속에서 우리가 어디에 있고 그 의미는 무엇인지 배울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어떻게 갑자기 무너졌는지, 틀림없이 저 애도 내가 자기에게 어떻게, 시쳇말로 넘어갔는지 알리라는 생각에 떠밀려 침대 가장자리에 주저앉았는지.

"그 한 쌍이 그 소름 끼치는 시절에 아이들에 쏟아부은 만악 때문이죠. 또, 그 죄악을 아이들에게 계속 더 권하려고, 계속 마귀다운 짓에 매진하려고, 그러려고 다른 자들이 다시 돌아오는 거예요."

원래 남자가 여자에게 최고의 경의를 표하는 방식은 그저 본인 인생의 낙이라는 신성한 원칙을 더욱 신나게 즐기는 식이기 일쑤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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