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본제국 붕괴 - 1945년 일본의 패망과 동아시아
가토 기요후미 지음, 안소영 옮김 / 바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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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 책의 저자 가토 기요후미는 일본근현대사와 동아시아사 등을 연구하고 있는 역사학자입니다. 한자로도 동일하게 ‘대일본제국붕괴’인 원전은 지난 2009년 일본에서 출간되었는데요. 흥미롭게도 2010년 국내에 번역 출간되고 나서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을 친히 게재할 정도로 한국에서의 출판에 큰 관심을 가진바가 있습니다. 그래서 서문에는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한국에 계신 분들의 강렬한 지식 욕구에 무척 놀랐습니다”라는 문장입니다. 이 일본인 역사학자가 그동안 삶을 살면서 귀와 눈을 막지 않았다면 일본 식민지 시기의 한반도와 중국, 동남아시아에서의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잔혹한 역사를 인식하고 있을겁니다. 우리 한국인이 그러한 역사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이 일본인 역사학자는 어떤 말을 이 책에 담았나 바로 그런 의구심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절로 관심을 받을 수 밖에요. 한국어판 서문에 박혀 있는 저자의 저 문장 때문에 저는 뭔가 복잡한 심사를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일제 식민지 시기와 그 종전의 역사가 한국인들에게 단순히 ‘강렬한 지식 욕구’로 해석되는 건지 하는 씁쓸한 감상과 함께 말이죠.

우선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저는 그동안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주변국들에 대한 식민지 침탈의 역사를 담은 글을 읽을 때마다 매우 집중해서 그리고 토씨 하나 허투루 넘어가지 않기 위해 노력했는데요. 가토 기요후미의 이 책도 마찬가지로 기묘하지만 많은 책들이 시원하게 이해되지 않는 간극이 있었습니다. 또한 꽤 교묘한 언설도 함께요. 오늘날 자민당과 총리 아베를 필두로 위에서 아래로 불고 있는 일본 내의 ‘역사수정주의적 입장’은 대다수의 일본인들의 예의 침묵과 함께 강화되어 왔습니다. “우리는 아시아인들에게 진 것이 아니라 미국에게만 진 것이다”부터 시작해서 꽤 대표적으로 뿌리채 뽑히지 않고 있는 난징대학살의 그 왜곡적 인식 태도, 독일과 비교해서도 드러나는 사과와 배상에 대한 애매한 태도 등 외에도 수백 수천가지가 있지만 대다수의 일본 국민들을 포함한 일본 자체는 매번 그래왔습니다. 일본 내에서는 그나마 리버럴한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는 오에 겐자부로조차도 전후 역사에 대한 약간 애매한 태도를 갖고 있죠. 최근에 불거진 위안부 문제를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일본측의 정치역사적 태도로 인해 한국 내에 동아시아 공동체 혹은 동아시아 연대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을 정말 끊임없이 비판해 왔던 것입니다.

그럼 이쯤에서 다시 책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총 7장의 분량으로 되어 있는데요. 특히 기존의 일본인에 의한 종전사와 관련해 새로운 서술의 행간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준비되지 않은 일본 제국의 패망으로 이뤄진 당시 조선, 타이완, 만주를 살펴보고 있으며, 기존의 알탸회담이 일본에게 있어서 스탈린에 의한 술책으로 보는 것과 루즈벨트에 이어 등장한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 대한 사실상 부정적인 의견 등 입니다. 당시 일왕에 의한 ‘항복 옥음 방송’ 으로 인해 한반도에 정치적 공백이 발생했고, 한국인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미군이 남한에 주둔하게 되는 과정과 이후 자기 결정권이 박탈당하는 정치적 혼란의 분위기를 꽤 객관적으로 설명해 내고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저자에게 한가지 고마운 점은 영국과 미국은 조선의 독립이 아직 시기상조라고 판단했지만, 본디 한반도에 있던 조선은 일제치하의 35년을 제외하면 오랫동안 통일 왕국의 역사로 존재했던 것을 첨언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정에 어두운 미국과 영국을 꼬집은 것이죠. 그리고 중국의 장제쓰는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한반도에는 필히 정식의 정부가 있어야만 주장했던 것도 서구와 이 지역 사람들과의 본질적인 역사인식 차이라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다만 이렇게 일왕의 항복 선포 전후에 발생한 사건들 중에서는 소련의 만주 침공을 비판하고 있는데요. “소련으로서는 군사적 위혐도 받지 않았음에도 중립조약을 위반하면서까지 만주에 침공한 대의 명분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고 평가하는데요. 이 부분이 앞뒤 행간으로는 당시 일본 제국을 위한 변명인지, 눈뜨고 소련에게 강탈당한 만주을 바라보는 중국의 장제쓰를 위한 건지는 다소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연합국으로 참전해 독일과 유럽에서 치열하게 전쟁을 치룬 스탈린에게 그 전에 맺은 일본과의 중립 조약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이며, 이미 세계대전인 상황에서 주축국을 제거하기 위한 명분이 스탈린에게 있었는데 뻔히 알고 있는 일본인 역사학자가 명분 운운 하는 것은 다소 이치에 맞지 않아 보였습니다. 또한 소련의 참전을 막기 위해 당시 일본 내각이 전면적인 모스크바에 대한 화평교섭을 시작하면서 소련 측이 시간을 끌기 위해 일본 대사에게는 즉시 선전포고를 하고 대사관 주위의 통신을 끊은 걸 대단한 술책으로 여기는 저자의 인식도 이해하기 힘들더군요. 스스로도 외교에서 강대국이 일방적으로 행하는 수단들에 대해 단순히 도덕이상주의적 접근은 거의 쓸모가 없다고 인정했으면서, 미국은 인정할 수 있고, 소련은 인정할 수 없다는 식의 이분법은 일본인들의 입장에서는 통용될 만한 가치일수는 있겠으나 거의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여기에는 얄타 밀약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스탈린의 술수라고 언급하고 “독일에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스탈린은 일본의 분할 점령을 통해 미국에게서 양보를 얻으려고 했다”고 분석하는데요. 이와 같은 맥락에서 소련군에 의한 만주 진입을 정당성의 문제로 치환시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일본 제국이 패망하기까지의 각국의 정치적 셈법과 외교적 술수 등을 잘 설명해 냈으면서도 조선 총독부가 와해되고 해방 한반도에 속속들이 생겨나는 정치 세력을 열거하는 와중에 이 중 백범 김구 선생을 설명하면서 “과격한 독립 운동”을 시도했다고 평가하는 대목에서는 역시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부분은 “원폭 개발의 성공과 소련의 공동성명 참가를 명백히 밝혔다면 일본은 항복 의사를 표명했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미군이 진입한 오키나와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말할 필요도 없이 도쿄가 미 공군에 의해 대 공습을 받을때도 본토에서의 결사 항전을 주장했던 인사들이 적지 않았는데, 마찬가지로 이 부분과 논리적으로 대치되는 저자의 평가는 “일왕의 항복 표명의 가장 큰 이유는 원폭 투하가 아니라 소련의 선전포고였다”입니다.

약간의 논외지만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지역에 산개해 살고 있던 일본인들이 3천만이나 되었는데도 당시 일본 정부는 각자 알아서 살길을 찾으라는 식의 아무런 대책을 보이지 않은 것을 당시 일본 정부가 얼마나 대책이 없었는지 저자는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본인 특유의 책임 회피에 대한 냉엄한 책임 추궁이랄까요. 일왕이 항복 옥음을 발표하면서 ‘신민’이라고 언급한 부분은 오로지 ‘일본인들’을 위한 것이었으며 한때 나마 강하게 일본 제국 신민으로 이해되었던 ‘반도인’과 ‘본도인(타이완인들)’들은 순식간에 제국 신민이 아닌 것이 되었다고 아마도 패망하는 일본 제국의 허울을 꼬집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역사학자의 이 책은 일본 제국의 패망과 관련된 정치와 외교, 그리고 국제관계를 설명하는 선에서 더불어 첨언으로 제국이 사라진 조선과, 타이완, 만주 등을 살펴보는 것으로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뒤에 동남아시에 대한 간략한 서술도 이어지지만 큰 의미는 없어 보였습니다. 이 책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는 좀 더 곰곰히 생각해봐야겠지만 이러한 역사적 서술을 어떻게 이해해야 될지는 약간 어렵기도 하군요. 그래서 저는 이 책의 보론으로서 하세가와 쓰요시의 ‘종전의 설계자’를 다음 읽을 것으로 준비해 놨습니다. 약간의 애석한 저의 평가는 대충 이 즈음에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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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현기증 (양장) - 소셜미디어 속에서 길을 잃은 현대인
앤드루 킨 지음, 진달용.전준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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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런 러니어, 니콜라스 카와 함께 네트워크 및 소셜미디어, 인터넷 미디어, 인터넷 생태계와 관련해 요즘 많이 인용되고 또한 여러 매체에 조언을 해오고 있는 앤드루 킨의 일종의 디스토피아적인 네트워크 시대를 진단한 이 책 ‘디지털 현기증’을 일독했습니다. 킨의 번역 출판은 이번이 두번째인데요. 2010년에 국내에 출간된 ‘인터넷 원숭이들의 세상-구글, 유튜브, 위키피디아’가 큰 반향을 일으킨 바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앤드루 킨은 네트워크와 소셜미디어를 통칭한 뉴미디어 시대와 관련하여 재런 러니어와 비슷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느껴졌는데요. 이 점은 뒤에서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킨의 간단한 약력은 영국 런던 대학과 미국의 버클리 대학을 거쳐 실리콘 벨리의 기업가로 또한 CNN을 비롯한 언론에 칼럼을 기고하고 현재는 TV쇼 킨온의 진행을 맡고 있습니다. 이 책의 원제는 ‘Digital Vertigo’ 로 2012년에 출간된 것을 국내에는 지난 2016년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앞서 잠깐 설명해 드린대로 저자인 앤드루 킨은 오늘날 소셜미디어 시대와 관련하여 비판적이고 비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자신의 입장을 위해 제러미 벤담과 파놉티콘, 조지 오웰의 1984 등을 자주 인용하고 있는데요. 특히 제러미 벤담과 관련해서는 약간의 희화화와 익히 알려지긴 했지만 그의 파놉티콘을 현대의 면밀한 감옥으로 재탄생시켜 해석해 자신의 논리를 강화시키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데요. 물론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동의하지 않는 분들도 있을겁니다. 더불어 역자는 글의 초입에서 킨의 글이 충분히 공감이 가지만 논리의 과장도 분명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페이스북의 CEO인 마크 저커버그와 같은 기업인의 인터뷰 발언이나 기사 등을 곳곳에 인용하고 있는데요. 자신의 논증 과정을 인터뷰와 발언 등으로 보강하는 것은 충분히 공감은 되나 이것을 이를테면 네트워크 시대 전반적인 상황의 모습으로 독자들에게 이해시키려고 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무리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오늘날 킨의 해석대로라면 이 소셜미디어로 비롯되는 뉴 미디어 시대를 ‘과잉가시성’이라는 용어로 규정하는 것인데요. 이것은 심각한 노출증과 빠르게 유입되고 빠르게 지나가면서도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집착을 결코 놓지 못하는 혹은 자제하지 못하는 모든 세태를 꼬집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21세기에 과연 소셜미디어가 국가를 대신해 개인의 정체성의 구원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은 적지 않을 것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개인의 행복과 관련해서도 “서로 연결되어 있는 군중 속에서 홀로 분리되어 있는 인간의 외로움”이라고 저자는 그 상반된 면을 지적하면서도 “인간은 본디 홀로 있을 시간이 있어야만 한다”고 동시에 주장하는 것은 아이러니 하기도 합니다. 저는 인간의 행복이란 자신의 삶을 통제하고, 충분한 자기결정권을 갖고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소셜미디어와 수많은 웹들이 과연 그 연결성 만으로 우리의 나은 삶과 행복을 보장해 줄 수 있을지는 저역시 크게 회의적입니다. 거대한 나르시시즘적 창궐의 시대에 과연 진정성이라는 것이 존재할 지는 여러분도 인식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또한 이 점을 바탕으로 킨은 네트워크 시대의 지성, 네트워크 지성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는 꽤 산만한 서술로 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제가 보기에 아주 간략한 이해는 “중동 사회에서 소셜미디어가 민주주의 정부의 수립에 얼마나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인지는 아직도 분명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데요. 물론 위의 과정을 면밀히 관찰하고 수집한 마누엘 카스텔과는 비교할바는 아닙니다만 분명 시대착오적인 독재자와 독재정권을 제거하는데 민중들의 역할과 이들을 광장에 모이게 한 수많은 휴대폰과 연결성을 너무 과소 평가하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아마도 과잉가시성과 소셜미디어로 연결된 전지구의 수많은 사람들이 벌이는 나르시시즘에 저자는 치를 떨고 있는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위키피디아를 비롯한 ‘집단지성’이 우리의 민주주의에 어떠한 희망이 될지 기대하고 있는 많은 학자들을 도외시하는 경우라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양가적 측면이라고 도식적으로 말하기 보다는 분명 희망적인 부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페이스북과 트위터닷컴을 비롯한 소셜미디어 기업들이 수많은 회원들의 빅 데이터로 말미암아 막대한 기업 가치를 불리고 그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대중들의 현실 기피는 심각한 것은 사실로 보입니다. “소셜미디어가 자발적 참여의 공간이 아니라 우리를 영속적인 가입자 신분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라는 주장이나, “우리가 소셜미디어의 상품이 되어가고 있는 형국”으로 보는 시각도 위의 인식과 동일선상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조로프의 법칙처럼, 소셜미디어가 민주화되지 않은 이란, 시리아, 중국과 같은 국가들에서 비밀 경찰들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는 주장은 소셜미디어의 극명한 어두운 부분을 드러내는 것인데요. 반대로 미국의 CIA가 이제는 미행을 붙이거나 도청을 하지 않더라도 이 ‘나르시시즘 시대’에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올린 개인 정보들을 살짝 보기만 해도 위치정보를 비롯한 갖가지 정보를 취합할 수 있는 상황에 이른 것은 또한 괴상할 정도로 획기적인 일이기도 할 것입니다.

따라서 앤드루 킨의 결론은 이러한 소셜미디어의 이행화가 “고독하고 분열적인 개개인이 모인 군중시대”로 귀결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그와 같은 변형된 제러미 벤담의 ‘사회적 효율성과 중앙계획이 변조된 방식’을 비판하면서, 사회적 파편화에 대해서도 경고하는 것으로 글을 마치고 있습니다. 몇가지 대안으로 존 스튜어트 밀의 점진적인 디지털 자유론을 언급하고 있습니다만 크게 와닿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네트워크 시대의 문제 의식은 공감할 만하나 이를 위한 논증이 매우 산만하고 꽤 감정적이기까지 해서 개인적으로는 일독 후에 큰 아쉬움이 남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전문적인 연구를 하고 있는 사람은 아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약간의 비관의 태도로 우리의 세태와 이용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는 것은 충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우리 개인의 정체성이 완성되고 완벽하며 종결된 총체적인 모습으로 통합된 부분들의 조직적 결합이 아니라 사실 계속 움직이고 변화하며 불완전한 무엇보다도 최종 상태가 아니라 언제나 새로 시작하는 어떤 것이라 불릴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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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숭배 - 우리는 왜 경제성장의 노예가 되었는가
클라이브 해밀턴 지음, 김홍식 옮김 / 바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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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저자인 클라이브 해밀턴은 영국 서섹스 대학의 경제발전연구소 (Instirute of Development Studies) 에서 ‘한국의 자본주의적 산업화’라는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이후 시드니 대학교, 오스트레일리아 국립 대학교를 거쳐 호주 진보 단체인 ‘오스트레일리아 인스티튜트’를 설립한 대표적인 진보주의 경제학자이자 정치학자이며 또한 오스트레일리아 녹색당에서 활동하고 있는 현실 정치인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그의 현실 참여와 꾸준히 갖고 있던 연구물로 탄생한 이 책은 지난 2003년 출간되었으며, 원제는 ‘Growth Fetish’로 국내에는 좀 뒤늦은 2011년에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여기서 약간의 첨언을 드린다면, 역자가 지면을 할애해 특별히 설명하고 있듯이 원제의 fetish를 우리 말의 ‘망상’으로 지정했는데요. 이 부분은 후에 일면적인 경제성장주의와 소비지상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할당된 용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지극히 적절한 표현이라고 느껴졌습니다.

우선 이 책은 총 8장의 구분된 소주제로 되어 있는데요. 8장은 탈성장 사회의 이행 방법과 그 과정을 담은 사실상 결론으로 볼 수 있겠고요. 처음 1장과 2장, 3장이 전체적인 주제의 핵심을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며, 4장과 5장, 6장과 7장은 개략적으로 서로 연계되어 있는 논증 부분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처음 3장까지 부분을 제외한다면 각 장의 독립된 구분의 논증은 따로 읽어서 이해해도 될 만큼 특유의 개성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일반적인 논의들이긴 합니다만 꽤 설득력이 있고 논리적 군더더기를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번역 또한 꽤 양호했습니다.

대략적인 큰틀에서 보자면, 경제 성장의 이데올로기와 신자유주의와의 관계 그리고 그 이행과정에서 세계화와 소비 지상주의 및 왜곡된 현대 사회의 행복과 자기 결정권 등을 매끄럽게 연결하여 글의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먼저 저자가 단언하는 오늘날 성장 일변도의 경제 발전주의와 관련해서는 이러한 성장 일변도의 가치관 자체가 거의 ‘성장의 망상’이라고 규탄하고 있는데요.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신자유주의가 한번 이행과정에 들어서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서면 더이상 수정 가능성과 돌이킬 수 없다는 터무니 없는 확신을 강요해왔던 것으로 이해할 수 없는 전자의 행로에서 서구권의 좌파 정치와 진보 세력의 철지난 이데올로그에 사로잡혀 견제와 비판의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을 먼저 비판하고 있습니다. 즉, 아직도 사회 전반의 빈곤의 문제에 집착해 신자유주의적 우파와의 정치 대결에서 힘을 잃고 내적 동력을 상실했으며, 이 점은 결국 신자유주의를 효과적으로 견제, 비판하지 못해 사실상 많은 시민의 고통을 낳게했다는 측면의 포괄적인 ‘좌파의 실패’에 대한 이해를 담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언급하고 있는 부분은 그동안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를 다룬 여느 책들에서는 볼 수 없는 꽤 상세한 내용인데요. 흔히 많은 논저에서 ‘그 동안 진보 좌파의 지리멸렬’에 대해 비판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그것의 충분한 연유와 결과를 저자인 클라이브 해밀턴이 실로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거대한 뒷배경을 갖고 있든, 면밀한 해석상의 창의력을 갖고 있든 간에 어떤 사회경제적 이데올로기가 우연히든 아니든 나타났다면 우선 그것을 이해하고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효과적으로 견제하고 비판할 수 있는 수단 내지는 방법, 이론 등이 필요합니다. 신자유주의가 그러한 이행과정을 거치면서 정치경제적인 이데올로기가 되었다면 반대의 혹은 충분히 의심을 갖고 살펴볼만한 상대가 현미경으로 들여다봐야 했음에도 우리가 알고 있는 진보 좌파가 궤멸해서 어떠한 사회적 병리를 낳았는지는 익히 목도했습니다. 이들이 우파와의 표심 다툼과 정권 획득과 관련해서 특유의 사회경제적 가치를 발밑에 던져버리고 욕망의 본성으로 이합집산해 버린 것은 실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자유의 적은 집단주의와 국가권력”이라는 전제와 함께, “신자유주의 이전까지 시장에서의 권력만이 아니라 정치 과정에 참여하는 시민으로서의 권력을 우리는 가지고 있었으나 이제는 시장에서의 권력 밖에 갖지 못하나 그것마저도 일개 개인의 권력이 기업과 경제 권력의 힘에 대응할 수 없었다”고 저자는 이처럼 분석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 부분과 관련하여 결코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영구불변해야 하는 민주적 권리”라는 절대 명제 입니다. 그동안 뉴라이트나, 시카고 학파, 밀턴 프리드먼과 아인 랜드와 같은 이들 혹은 아류들이 민주주의의 과잉 시대 혹은 민주주의의 왜곡에 주도 면밀한 쳬계로서 목소리를 높여 왔는데, 이들이 그만큼의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만큼 더불어 우리의 권리를 보장하는 민주주의도 그보다 더 중요하고 양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와 같이 민주주의는 어떤식으로든 종속되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내몰려서는 안되는데 그동안 이 신자유주의를 비롯한 전방위적인 세계화는 시장이 필요하고 갖고 싶은 만큼의 권력을 종래 근대이념인 자유와 인간 해방의 민주주의 체제로부터 우선 지위를 할당받아 많은 시민들의 대다수의 삶이 벼랑 끝으로 내몰렸습니다. 바로 이러한 인식위에 있던 성장 제일주의 내지는 성장 유일주의에 대한 비판을 이 책은 담고 있습니다.

본디 이 만큼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적인 이식이 이뤄진 상황에 다시 탈성장주의를 부르짖는 것은 유토피아적 발상이라는 신자유주의자들의 비판이 있어 왔습니다. 저자는 이것과 관련해 2장과 3장에서 화폐 거래와 상품 거래 등으로 이루어진 소비 지상주의나 부와 행복간의 관계에 대해 여러가지 자료와 통계를 대입하며 그것이 허구에 가깝다는 평가를 내리고 ‘성장 유일주의-신자유주의-소비지상주의’를 함께 비판하고, “금전이 행복의 척도라는 관념이 강요될 수록, 사회 병리를 더욱 심화시킨다”고 앞선 논증을 통해 밝히고 있습니다. 더욱이 “명백한 진실에 근거한 비판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진실을 부인해야 득을 보는 사람들이 그 비판을 무력화하려고 들 것”이라는 분석 또한 이 정도의 신자유주의화 과정에서 탈성장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현실을 도외시하는 이상주의적이고 유토피아주의적이라는 주장을 하는 이들의 명백한 진면목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소비 지상주의와 자본주의 논리는 화폐의 합리성과 강력하게 결합되어 있다”고 덧붙이며, 대대적인 마케팅과 만난 소비 지상주의가 다수의 삶에 어떤식으로 작용했는지는 그 결과가 명백하다고 생각합니다.

저자의 통찰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과거 산업 자본주의 시대에서 소비 자본주의 시대로 급격하게 변질됨으로 애초에 자본주의의 시스템의 전체적인 수단의 틀에 그치지 않고 “현대 사회에서 수많은 개인들이 소비를 통해 각각의 정체성을 만들어 내고 또한 자기 망상에 의해 지탱되는 과소비 사회다”라고 평가하고 이 정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환경 파괴와 소비에 의존하여 사는 시스템 자체를 잉태했다는 것은 또한 병리의 한 형태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상황을 어쩌지 못하는 것은 “세계화의 본질이 성장과 소비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가 쉴 새 없이 확산된다는 데 있다”고 5장과 6장을 통해 저자는 논증을 하고 있습니다.

앞선 책에서 가이 스탠딩은 시장은 이제 ‘민주주의적 통제’가 필요하다고 밝힌 바가 있습니다. 이처럼 민주주의를 진지하게 수용하는 자세는 작게는 개인의 자기 결정권을 인정받는 것이며, 또한 크게는 신자유주의적 자유 시장 테제로 인해 후퇴했던 사회적 요건과 사회적 보장 등을 다시 민주주의적 논리로 부활시키는 것입니다. 일찍이 레이건이 목소리 높였던 낙수효과는 허황으로 끝났고 시장의 자유가 모두에게 이익이라는 것도 다수의 고통으로 자리매김 했으며, 우리의 보편적인 근대가 왜곡되었던 것을 이제 ‘탈성장’ 아니더라도 뭔가 행동에 나서야 할 때입니다. 그런 의미로 이 책의 마지막 8장은 이러한 의의를 갖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소비 지상주의가 그 자체로 세련된 표상과 문화적 소비 등으로 이해되어 왔던 것은 이면의 허상을 가리기 위한 매우 영리하고 교활한 작업이라 불릴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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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로소득 자본주의 - 부패한 자본은 어떻게 민주주의를 파괴하는가
가이 스탠딩 지음, 김병순 옮김 / 여문책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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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 스탠딩은 캠브리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영국 런던 대학의 SOAS 교수를 역임하고 현재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BIEN의 설립자이자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데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노동경제, 자본주의 시장 경제학, 신자유주의 등을 연구하며, 특히 프레카리아트의 개념을 본격적으로 인식하고 이해를 도출한 학자로도 유명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국내에 번역 출간된 그의 두번째 논저 ‘불로소득 자본주의’는 꽤 반가운 소식이기도 했습니다. 지난 2018년 번역 출간된 글 ‘기본소득’과 소개할 이 책은 약간 교차 출간된 것이기도 한데요. 두 권의 상당한 분량 차이가 출판 시기의 간격을 낳았고, 아마도 출판사가 서로 다른것도 그런 연유에 한몫 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보기도 합니다. 원제는 ‘The Corruption of Capitalism’ 이며, 지난 2016년 출간되었습니다. 국내에 번역 출판은 올 4월에 출판되었고, 꽤 상당한 분량임에도 노란색 겉표지가 절로 시선을 끄는 책이기도 합니다.

우선 책의 원제와 번역된 제목이 꽤 상이한 것을 짚고 싶은데요. 물론 양자 사이에 연관이 아주 미흡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충분한 논리확증의 연계를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완전한 시장 자본주의를 왜곡한 주범이 무분별한 불로소득임은 확실하나 이것에만 집중해서는 민주주의의 상업화에 이르는 ‘민주주의의 부패’를 온전히 파악하기에는 약간 미진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전반적인 논증의 과정과 이론적인 한계를 벗어나 꽤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자료들을 서로 면밀하게 연계해 글을 써 내려가고 있는 것은 저자에게 칭찬할 만하다고 여겨집니다. 더불어 번역도 나쁘지 않아서 저같은 주의력 약한 독서인도 집중해서 읽을 수가 있었습니다.

처음에 저자는 이 책의 중요한 인식 요소인 ‘불로소득’에 대해 이렇게 정의합니다. “불로소득자들, 부동산과 같은 보유재산에서 발생하는 소득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이라는 꽤 사전한계적 의미로 먼저 인정하고 해당 단어의 본질적인 핵심은 “막대한 부를 갖고 금융과 부동산에 투입해 이러한 이익을 정치 권력들과 후견인 같은 관계로 결합하여 민주주의를 해치고, 수많은 노동자들의 이익을 자신들의 호주머니로 집어 넣는 과거 애덤 스미스가 경멸해 마지 않았던 노동없는 이익”을 뜻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이 스탠딩의 이 글은 꽤 심각하고 진지한 내용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불로소득, 신자유주의, 거의 과두제에 근접한 금권 정치, 정치 엘리트와 경제 엘리트들의 상호간의 후견인 제도와 같은 보호 상황, 노동 유연성이라는 미명하에 비슷한 사회적 제도와 보호장치를 무력화 시키고, 여러 특허권을 손에 쥐고 그것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은 대기업, 재벌, 중개인들, 공유지를 민영화의 작업을 통해 이익을 얻는 자들 이러한 모든 시스템의 변질로 인한 대다수의 시민들의 이익에 불일치화가 되면서 결국에는 민주주의가 망가지는 결론에 까지 이르게 있습니다.

1장은 어떻게 우리 시대가 이러한 불로소득을 잉태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2장부터 5장은 이 불로소득으로 인한 한쪽의 편중된 이익화와 그 반대에 있는 사회적 왜곡 변질과 폐해를 매우 상세하게 열거, 인용, 해석하고 있으며, 6장은 노동 유연성과 노동 조합의 효과적인 영향력 축소로 비롯된 프레카리아트 문제, 7장은 선출되지 않은 기득권 경제인들과 정치권력의 암울한 합작, 그로인한 민주주의의 붕괴, 8장은 정치적 기반과 경제적 획득을 날로 실패하고 있는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그렇게 잉태되어 가고 있는 분노를 설명하며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불로소득의 시대가 이행하는데 큰 이론적인 논거가 된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입니다. 과거의 하이에크를 비롯해 1980년대의 시카고 대학의 ‘시카고 학파’가 미국과 유럽의 오롯이 유일의 정치사회와 경제적 이데올로기로써 신자유주의를 강화시켜 왔고 이것은 ‘노동 시장의 엄격한 규제, 반대로 금융 시장에는 완전한 자유화’ 와 ‘신자유주의의 정언 명령인 민영화와 감세’를 필두로 어떻게 오늘날 노동이 없고, 만연한 금융화의 막대한 이익을 불로소득화에 부채질한 오로지 부유층의 이권의 시대를 설명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이 뿐만 아니라, 1980년대 구좌파 정당들이 표심을 잡기 위해 우익과 경쟁하며 스스로가 보수화되면서 앞선 과정을 비판하고 견제하지 못한 진보 좌파의 망각과 결국에는 금권 정치로 정치 권력과 금융 권력이 결탁해 ‘사악한 과두 금권 정치’로 귀결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논점입니다.

그외에도 애플과 아일랜드의 알려지지 않은 협력과 같은 국가가 기업들에게 투입하는 명확히 알 수 없는 여러 보조금들, 여러 조세 피난처와 막대한 법인세를 회피하면서 발생하는 크게는 대략 20조 달로에 이른다는 탈루 금액은 불로소득 시스템이 어떤 식으로 뿌리깊게 암처럼 작용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불로소득 자본주의를 뒷받침하는 편리한 근거”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보유 재산 덕분에 불로소득을 점점 늘릴 수 있는 집중된 금융자본에 연결된 부호와 재벌 기업들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이다”라는 뼈아픈 결론을 도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이처럼 신자유주의들이 말하는 신자유주의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자유롭지 않은 시장체제를 구축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과도한 독점적 지위를 갖고 있는 특허 문제와 관련해서도 비슷한 관점이고, 주택 임대 산업과 관련해서도 막대한 보조금을 빨아들이면서도 영세하고 돈없는 시민들의 돈을 빨아먹는 형태로 자유로운 이익의 극대화를 부르짓는 것은 실로 괴상하기까지 합니다.

일찍이 로버트 달을 비롯해 찰스 틸리와 같은 학자들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일종의 동등한 관계여야 한다고 밝힌바가 있습니다. 여기의 가이 스탠딩은 이 부분과 관련해서 더 나아가 “시장이 민주주의의 통제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시장의 무분별한 자유화로 인한 시민의 피해를 우려하고 있고, 시장 자유주의를 자유방임주의로 지칭했던 칼 폴라니의 인식도 꽤 의미심장하게 느껴집니다. 특히 2008년 뉴욕 발 세계금융 위기와 관련해서 저자는 영국의 일부 금융인들을 제외하면 사실상 신자유주의의 금융 자유화로 인한 막대한 자본의 훼손을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는 것은 오로지 자신들의 돈만 보증되면 그만이라는 많은 금융 종사자들의 도덕적 해이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만 합니다. 이 위기에 싼값으로 투입된 공적 자금을 금융 엘리트들이 어떠한 태도를 보였는지는 익히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다수 시민들의 막대한 세금으로 만들어진 공적 자금으로 자신들의 이익금으로 전환하여 돈잔치를 벌인것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이 가이 스탠딩이 말하는 불로소득을 뜻하는 핵심이라고 할 만하다 여겨집니다.

근래 국내에 소개되고 있는 많은 사회경제학 서적들이 민주주의와 거대한 불평등의 위기를 매우 가감없이 다루고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단테는 사람들 손에 쥐어지는 책들의 내용들이 그 시대상을 반영한다고 말했습니다. 최근에 작고한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작 ‘레트로토피아’의 결말에서 우리가 다함께 손잡고 무덤으로 가게 될지에 관한 이 음울한 디스토피아적인 메시지와 함께 만연된 정치경제적 병리 상황을 우리가 과연 해결할 수 있을지 끊임없는 스스로 질문을 해보기도 합니다. 가이 스탠딩의 그와 같은 이 목소리도 충분히 공감이 되고 동시에 진단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들이 어떻게 우리의 삶을 파괴할 지에 대해 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허공에 외치는 말이 되지 않도록 시민 모두가 현실을 인지하고 좀 더 비판을 가할 수 있는 용기를 세워보는 것이 중요한 시점이 아닌가 다시금 고민해 보게 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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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메시스 2021-07-14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밀도있는 리뷰 감사드리며, 덕분에 당장 구매합니다!

베터라이프 2021-07-14 01:01   좋아요 0 | URL
부족한 서평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모쪼록 유익한 독서 되시길 빌게요
 
배제, 무시, 물화 -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
김원식 지음 / 사월의책 / 2015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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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INSS)의 연구위원으로 재직중인 이 글의 저자는 특히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대한 연구와 하버마스 이론에 따른 사회비판, 지구화 시대의 정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앞선 연구들을 통해 한국 사회를 위한 종합적 비판 이론을 모색하는 것을 찾고 있는데요. 마찬가지로 각종 사회철학의 최근 논의들에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도 보입니다. 개인적으로 저자의 약력을 보면서 문득 호기심이 생겼던 것은 어느 대학의 강단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테면 로버트 케이건 등과 같이 꽤 독점적인 연구를 하고 있는 연구소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는 부분이었습니다. 어쩌면 후학을 가르치는 것만큼이나 이 사회나 국가에 일정 부분 스스로 기여를 하고 있는 지식인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덧붙여 이러한 종류의 글을 쓰는 저자와 같은 학자의 태도는 크게 존경받을 만하다고 여겨집니다.

본격적인 글로 들어감에 앞서 개인적으로 고백할 부분은 일전에 이택광 교수의 글에 이어 실로 오랜만에 읽는 국내 학자의 글이라는 점입니다. 다소 약간의 반성의 마음을 담아 글을 시작해 보겠습니다. 우선 이 책은 총 8장의 소주제들로 구분되어 있는데요. 앞의 1장과 4장까지는 글의 주제를 아우르는 한국 사회의 부정의와 사회적 병리현상을 먼저 언급하고 이를 이론적으로 해석하는 수단으로서 배제와 경제적 불평 및 그리고 인정과 무시, 우리 사회의 급격한 시장화로 통해 초래된 물화에 대해 서로 중첩적인 관계로 진단하고, 이어 5장과 8장까지는 한국 사회를 그 틀로 잡아 사회역사적 서술과 동시에 진행된 왜곡된 방향성을 함께 다루면서 비판하고 그에 대한 대안들을 차분히 살펴보고 있습니다. 다만 8장은 이 글의 대미를 장식하는 부분으로 보기는 약간 애매하고 일종의 매우 보편적인 당위성들을 담고 있는 주제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더 많은 민주주의적 요구 즉, 과두제와 포퓰리즘의 위협에 놓여 있는 현재의 우리 정치 등을 인식하면서 앞으로 우리가 나아갈 길에 대해 조심히 지표를 찾아보는 것으로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서구에서 비로소 시작된 근대는 “봉건적 지배와 억압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되어 바로 이 점이 근대성을 함축하는 매우 중요한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동하는 근대를 인용한다면 이러한 근대가 사회와 정치에 매우 포괄적이고 가치일념적인 시장화를 전세계에 이식됨으로써 극히 변질되었다고 판단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원래 우리의 근대는 원래 개인의 자유와 인간 해방이었으나 시장자유주의적 진행 과정이 설사 전체적인 규모로서의 경제적 부를 가져다 주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익히 대표적으로 장 지글러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비판했던 것과 같이 세계를 국가 범위로서 지배-피지배 관계로 한층 악화시키고 20억의 절대 빈곤 인류를 제외한 나머지 인간들은 그 결실을 획득하긴 했으나, 그마저도 구조적으로 고착화 된 불평등 문제와 차별로 인해 우리를 포함한 거의 모든 시민의 고통이라고 평가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 책은 현대 사회를 어떻게 비판할 것인가에서 출발해 규범적인 문제와 현시적인 문제를 모두 포함한 주제들을 다루면서 좀 더 ‘동등한 자유’에 집중합니다. 이것은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를 비교 분석하며 특히 저자는 “자유의 동등성을 훼손하는 제도나 사회질서, 사회구조는 모두 불의로 규정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우리 모두는 정의라는 촘촘한 그물망 안에 담겨져 있어야 하며, 이것이 본디 근대가 빛나면서 밝혔던 ‘진정한 해방’으로 다시 회귀하는 전제 조건일 것입니다. 물론 앞의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 각자가 어느 것이 먼저 우선해야 하는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개인의 자유와 권력을 누가 잡고 어떻게 이끌어 나갈 것인가의 논의는 꽤 복잡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개념적으로는 서로 상충되는 부분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만 양자는 동등하게 양립할 수 있는 기반위에 서 있어야 하며, 아마도 그것이 절차적 정의를 갖고 있는 민주주의적 토대라고 생각됩니다.

사실 앞선 해석과 관련해서도 우리가 직면한 여러 담론의 문제들은 사회학적 기반의 문제라기 보다는 해석의 차이와 그 간격을 좁히지 못하는 거듭된 주장들일 수도 있습니다. 저자도 사회적 모델을 비판의 전략이라는 주제를 통해 이를 먼저 언급하고 있는데요. 다만 이러한 담론들이 “종류가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모든 형태의 담론들은 공동의 비판적 검토를 거쳐 공동의 문제해결을 모색한다는 점에 그 기능적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고 밝히고 여기서 중요한 점은 서로 공동의 문제 해결을 찾는데 먼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규범적 비판 모델과 달리 현시적 비판 모델은 우선 우리 사회가 병리적 사회 현상을 안고 있다는 것을 각자 모두가 인지해야 하며, 이 병리 현상은 “사회 성원들의 삶의 방식이나 가치추구 방식이 왜곡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실상 어떤 연유이든 간에 이 왜곡된 병리 현상이 시민들을 병들게 하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를테면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 사회 성원들을 학력과 경제적 조건으로 광범위하게 배제하거나 불인정하고, 사회적으로 인정 받을 수 없는 욕망을 추구하는 등의 요인들이 있을 것입니다. 더불어 “상대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 역시 획일적인 경쟁의 압박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라고 전제하고 이는 앞선 저의 평가와 마찬가지로 모든 사회 구성원의 문제라고 봐도 무방해 보입니다. 결국 이런 사회적 병리 현상으로 귀결되는 결과에는 이 글의 제목과 동일하게 배제와 무시 그리고 물화가 지배하고 있으며 이것들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비판하고 소멸시킬 수 있느냐가 중요한 관건으로 파악됩니다. 이 점은 크게 동의할 만한 부분이라 여겨졌습니다.

다만, 반대로 약간 동의하기 힘든 부분들은, 개인의 권리를 다소 소극적으로 이해하거나 인정의 문제로 여기고 이를 권력과 비교 연계하는 것과, 특히 사회 갈등 일반을 경제적 불의나 분배 불평등 문제로 환원해서는 안된다고 밝히는 것은 ‘현대사회 비판을 위한 몇가지 지침’이라는 항목 아래 나와 있는 것치고는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문화적 무시라는 의미로서 사회 구성원간의 불의와 무시의 문제가 이내 경제적 불의로 환원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저자는 강조하고 있는데요. 이미 왜곡된 사회 조건으로서 만연된 경제적 불평등 시대에서 인정과 무시라는 개념이 경제적 불의를 초래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큰 의미가 있는지는 생각해볼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오독을 한 것이 아니라면 이미 두껍고 깊은 사회적 테두리가 이미 주변에 자리하고 있는데 경제적 불의를 따로 도출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해가 되지는 않더군요.

그리고 저자는 많은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 해결의 당위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저도 이 부분은 동의하면서도 “오늘날 경제적 배제의 주된 원인은 여전히 자본주의 시장 체제의 변화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전반적으로 재분배와 경제적 불평등 문제가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지에 대해 약간 미진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물론 저자만의 책임은 아닙니다. 어느 누구도 이를 명쾌하게 해결하기란 어려운 과제니까요. 수많은 개인들의 노동력을 수단화 시키고 문화적 차별, 인정하지 않는 범람한 무시와 배제의 문제 등이 우리의 자본주의 하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결국 선언적인 해결론으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민주주의의 확대와 농밀화’와 시민들 스스로의 이성적이고 좀더 도덕적 가치에 가까워지는 길 밖에는 딱히 떠오르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생활 세계가 사전적으로 합리화되는 것도 기대하기는 어려우므로 마냥 “민주주의 발전이 정치적 안정성을 제공하는 동시에 불완정성을 제공하는 역설”이 마땅히 이해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저자는 분배와 인정의 문제와 특히 타인을 도구화하고 지배하는 사회적 관계 등과 좀 더 권력 불균형의 문제에 주목하면서 앞선 논의의 전개 과정들에서 특별히 위의 목록들을 언급하고 있는데요. “생활 세계의 내부의 정치적 투쟁을 통해서 구체적인 경제적 불의에 대응”해야 한다고 포괄적으로 인정하는 부분에서 대략 인정과 배제 및 문화적 차별이 좀 더 중요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과연 이런 일종의 문화가치적 재설정으로 사회의 무분별한 시장화로 비롯된 일련의 문제들과 경제적 불평등을 진정으로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해 문득 의문이 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5장과 8장에 이르는 내용들은 지극히 당연하고 보편적이지만 특별히 새롭거나 독창적인 논의나 주장은 딱히 보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각각의 인식의 전개 과정은 꽤 설득력이 있었고, 매우 일관되게 느껴졌습니다. 굳이 하버마스를 통해 도출한 것은 아니겠지만 시민들의 논의와 토론을 보장하는 시민들의 공론장과 같은 제안에 개인적으로 꽤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서 어떻게 정치 투쟁을 효과적으로 또한 모두가 인정할 수 있게 시도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일면적인 서술로서가 아니라 매우 심도 있는 방법론들이 학자들에 의해 도출되어야 하지 않을까 일개 독서인으로서 고민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더불어 이 책의 1장과 2장 및 4장은 면밀하게 읽어봐야 할 만큼 중요하다고 생각되는데요. 그리고 이 글의 마지막은 꽤 제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든 문장으로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인간적인 인간다운 삶이 과연 규범화 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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