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넘어 - 급진민주주의자의 정치경제사회 혁신 프로그램
로베르토 M. 웅거 지음, 이재승 옮김 / 앨피 / 2017년 11월
평점 :
절판


이 글의 저자인 로베르트 M. 웅거는 브라질 출신으로 현재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로 재직중인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진보 지식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특히 정치철학과 법학이론, 각각의 사회정치이론과 진보경제학 등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연구하고 있는 그는 특히 지난 브라질에서의 군부 통치를 비판하고 브라질의 진정한 민주화를 줄기차게 요구해 온 바가 있습니다. 또한 개인의 더 나은 삶이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이것에 대한 철학적 연구를 지속해왔고 이를 민주주의와 연계해 오늘날 정치가 시민의 삶에 어떠한 역할을 해왔는지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피력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책은 “Democracy Realized”라는 원제로 지난 1998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좀 늦은 2017년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뒷편의 부록을 제외한다면 약 370여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이 글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관한 꽤 혁명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오늘 정치와 경제에 관한 병폐적인 면을 제대로 비판하고 있고 여기에 합리적인 대안까지 제시하고 있는데요. 정치와 경제의 불협화음을 표출하고 있는 우리의 현 시대상황을 이처럼 잘 조망하고 있는 책은 아마도 보기 힘들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개인적으로 들기도 했습니다. 우선 큰틀에서 이 책은 “민주주의가 과연 대립된 이들을 화해시킬 수 있겠는가”라는 문제의식을 놓고 그를 위한 “민주적 실험주의”라는 저자의 독특한 해결방안으로 전반적인 정치와 경제 및 이들을 배경으로 한 시민사회와 만연된 불평등 문제를 조목조목 분석하고 각각의 대안을 제시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총 1부 6장과 2부 4장으로 전체적인 구성에서 연계된 각 주제들에 관한 다양한 논거와 자료가 인용되고 문장들은 매끄럽게 이어지고 있어서 상당한 분량만큼 논지를 흩트리는 부분은 거의 없었습니다. 민주적 실험주의를 소개하고 있는 1장과 독특한 경제적 구조적 해석을 곁들이고 있는 2장과 3장,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고 있는 4장, 이어지는 논거들을 통해 적절한 대안을 제시하는 5장, 그리고 이 글의 전체적인 결론이라고 봐도 무방한 민주주의적 제도 재정립의 6장으로 1부는 마무리되고 있으며, 2부는 1부에서 광범위하게 논의된 민주적 실험주의를 기반으로 정부와 헌법조직, 시민사회와 그 조직, 공적 금융 및 경제 조직과 새로운 진보주의 세력이 되기를 바라는 저자의 바람이 담겨 있는 민주주의적 좌파로 2부 역시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저자인 로베르트 M. 웅거가 강조하는 ‘민주적 실험주의’ 간단히 말해 민주주의를 포괄하는 정치 및 정치학에서 (시민들의 삶과 관련된) 이상과 이익의 절충이라는 인식을 기반하고 있습니다. 즉, 정치에서 자기예언적 이상주의 정치라고 하더라도 현실정치에서 이를 배제해서는 안되며, 시민들의 삶과 관련되어 있는 이익이라는 가치에서도 사전적 정치학이 이를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 민주주적 실험주의는 신자유주의와 사민주의 양쪽 가운데 한쪽의 손을 일방적으로 들어주어서는 안되며, 양자를 거부함으로써 비로소 이 실험주의가 존재할 수 있다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민주적 실험주의에 관한 도식적인 해석은 앞선 부분과 같습니다만 좀 더 유연하게 받아들인다면 정치사회적 불평등 상황에 놓여 있는 여러 민주주의 국가들에게서 이를 타개하는데 어떤 이론적 수단이 될 수 있겠다는 희망을 걸고 저자는 이 실험주의를 오늘날 정치경제적 병폐현상에 투입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구조로 인해 이 민주적 실험주의로 확대되는 민주주의야 말로 진정한 ‘급진적 민주주의’로 저자가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보기도 했습니다.

현시점에서 민주주의의 가장 큰 문제로 볼 수 있는 만연된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저자의 분석대로 생산의 측면은 전위주의와 후위주의로 나뉠 수 있는데, 전위주의적 생산은 자본과 공학 기술 및 전문 지식의 주요 원천 자체에 대한 접근성을 포함한 꽤 자원가능적 생산이지만, 반대로 후위는 전통적 경제를 포함한 다소 낙후되고 폐쇄된 생산 구조로 각각의 많은 국가에서 이 양자의 구조가 꽤 견고하고 긴장된 형태로 나아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 양자간의 경제물리적 경계를 해소하는 것이 이러한 경제적 이중구조를 해결하여 사회구조에서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는 길임을 저자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천적인 측면에 노동 조직은 다방면의 시민사회 조직과 마찬가지로 자유롭게 구성되어야 하며, 선조직되어 있는 노동기득권이 계급주의적 정치 논리에 이용되어서는 안되는 것이 이에 기반한다고 여겨집니다. 그런 면에서 저자도 5장의 진보적 대안에서 민주주의에서 시민들의 정치 참여를 확대하게 해주는 자유로운 시민 조직의 결성과 마찬가지로 근본적으로 경제 부문에서 벌어지는 다각도의 불평등 현상을 지속적으로 감시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의 연대와 자유로운 조직 활동이 이뤄져야 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즉, 경제-정치 라는 연계 구조에서 노동자들의 경제 발언과 시민들의 정치 발언은 되도록이면 보장받아야만 하고, 마찬가지로 법에 의해 보호받는 형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당위성은 “경제 발전과 정치적 민주주의의 병행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적절한 해답이 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적절한 이론주의적 발언에 유능한 엘리트주의자들이 이를 마냥 용인하기는 힘들 것이며, 과연 민주주의하의 정치경제적 계급 구조가 올바른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긍정을 보이고 있는 기득권과 엘리트 정치가 우선적으로 계급 이동의 자유로운 보장과 특히 교육과 관련된 자원 불평등을 해소하는 데 나서야 그에 관한 최소한의 논의를 해볼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러한 가운데, 많은 민주주의 국가들에게서 경제적 부분에서 전방위적으로 이행된 이 신자유주의는 “세계 경제 질서를 맹목적으로 고수하는 전략말고는 국가 발전에 관한 정부의 모든 적극적 전략을 폐기하려는 시도”를 보이고 있고, (조직된 시민 결사체를 포함한) 결사체 자체를 경제생활에서의 경직성의 원천으로 악마화 시켰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전체적으로 신자유주의 내부에서 논의되고 있는 정치적 논의에 대한 일부 근원적인 거부감은 시장이나 경제에서의 정부의 관여 및 정치의 접근에 대한 것에서 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병폐를 개선시키려고 하는 많은 시도를 무산시키는 데 작용해 왔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자인 로베르트 M. 웅거 역시 그동안 많은 학자들과 이론가들이 이 신자유주의의 비판에 나섰으나, 사실상 이들이 효과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점은 불행한 일이지만 이 대안의 제시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어려웠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자유로운 무역과 경제활동을 주장하는 전세계적 자유주의적 경제 이념에 기반하는 신자유주의 이론을 마냥 거부하는 것은 능사가 아닌 점은 분명하고, 세계 경제 체제가 점진적인 세계화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큰틀에서는 자유 경제론을 마냥 거부하기는 힘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국가간의 무역 및 자유로운 자본 이동과 반대로 그 국가들의 시민들의 삶의 개선과 고착화 된 부의 불평등과 계급 불평등을 전제로한 희생이 실제로 놓여 있어 이 부분은 개선이 필요한 것은 분명합니다.

마찬가지로 5장에서 이러한 국가간의 불평등과 그 나라안의 시민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경제구조적 모순인 해외 자본의 차입을 미연에 방지하고 각각의 국가들의 저축률을 높이는 등의 국내 자본의 활성화를 저자는 주장하고 있는데요. 물론 2007년 이전의 미국이 극대화된 중국과의 무역 역조와 이를 통해 중국계 자본의 유입으로 미국 시민들이 과도화 된 신용생활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전세계적으로 금융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과 투기 금융이 각국을 목표하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저축률 만으로 이를 해결할 수 있는지는 꽤 의문이 듭니다. 다만, “신자유주의는 민족주의적이고 대중영합적이며 수일 대체적인 전략의 철저한 교체보다는 세계경제의 새로운 규칙에 대한 적응을 대변한다”고 저자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또다른 분석을 따르고 이렇게 민주주의 정치에서 경제권력과 정치권력의 연결과 특권적 이익과 특혜적 연결이라는 왜곡 구조는 아마도 신자유주의 이념의 가장 큰 병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의 대안도 역시 시민의 원할한 정치 참여라고 저자는 분석하고 있고 “비록 사회가 여전히 집요한 계급 분할로 얼룩져 있지만 국가는 부유한 엘리트들로부터 고도의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정책을 만들고 시행해야만 한다”는 다른 해결책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민주주의의 위기에서 그동안 너무나 이론주의적 접근으로만 현실을 분석해 왔습니다. 그래서 웅거의 이 민주적 실험주의는 시민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쓰일 수 있으며, 이것을 가장 크게 보장하는 대중의 현실정치 참여를 높일 개혁으로 “의무투표제, 정당과 사회운동의 공존 자유 확대, 구속 명부제처럼 정당을 강화하는 제도, 선거 비용 공영제 등이 있다”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정치에 대한 회의주의적 분위기에서 민주적 제도만 고도화되고 현실 정치에 무관심을 보이는 민주국가의 모델이 과연 글로만 그칠 것인지는 낙관할 수 수 없습니다. 샹탈 무페와는 다른 웅거의 이 급진 민주주의가 그의 목적대로 성공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지도 다소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의 이 짧은 글이 웅거의 광범위하면서 심층적인 이 책의 분석으로는 상당히 부족한데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시간을 기울여 꼭 읽어보셨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됩니다. 이것말고도 웅거의 독창적인 분석이라 볼 수 있는 권위주의적 경성국가 모델이라든지 꼭 시장주의적 자유경제가 아니더라도 성공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호랑이에 대한 꽤 설득적인 분석도 크게 흥미를 끄는 부분이었습니다. 아마도 정치경제적 연구를 다각도로 지속해온 학자로 웅거 만큼 유명한 이는 드문 것도 이 책의 꼽을만한 장점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자본주의가 그저 불가피한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끝으로 본문 78페이지에 오타가 한 곳 있었습니다. 이 점은 아쉬운 부분이라 생각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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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자, 가지지 못한 자 - 세계 불평등에 대한 색다른 시각
브랑코 밀라노비치 지음, 정희은 옮김 / 파이카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세르비아계 출신의 미국 경제학자인 브랑코 밀라노비치는 룩셈부르크 소득연구센터의 선임 학자이자 뉴욕시립대학교 대학원의 객원 석좌 교수이기도 합니다. 그는 일전에 세계은행 연구소의 수석 경제학자로 일하였고, 여러 학술지에 소득분배에 대하여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이 소득 불평등과 관련하여 최근에 국내에도 ‘왜 우리는 불평등해졌는가’라는 그의 글이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의 원제는 ‘The Haves and The Have-Nots”로 지난 2010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이듬해인 2011년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다만, 현재 이 책은 절판된 상태입니다.

현대 경제학의 선구자 가운데 데이비드 리카도가 관심을 가졌던 분배는 소위 말하는 기능적 소득 분배 즉, 국민 소득이 계층 간에 어떻게 나뉘는지를 따지는 것이었는데, 반면에 저자인 브랑코 밀라노비치는 명백하게 “개인 간 소득 분배”에 주요한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에도 빈번하게 인용되는 ‘파레토 개선’의 파레토는 소득 분배 법칙을 연구한 거의 최초의 학자로 보입니다만, 이후에 경제학의 안마당이라고 불리우는 미국에서 앞선 소득 불평등에 대한 연구가 단적으로 기피되어 온 연유에는 미국인들 스스로 자신이 수령하고 있는 소득과 그 권리에 대해 일종의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이유만으로 한쪽에서 외면을 받고 있었던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빈곤의 퇴치가 이뤄지고 있다는 연구 같은 경우는 미국에서도 수월히 스폰서를 구할 수 있겠지만, 이 ‘소득 불평등’과 같은 주제에 있어서는 모두가 외면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고 저자는 언급하고 있습니다.

‘불평등한 개인, 국가, 세계’라는 3개의 소주제 구성되어 있는 이 글은 특히 각 총론 이후 몇가지 가설과 질문을 독자들에게 던짐으로써 단순한 관념이론적 서술에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꽤 칭찬할 만하다고 여겨집니다. 저자는 개인들의 전반적인 소득 문제에 있어서 특히 ‘후생’과 관련한 부분을 강조하며 각 개인들의 소득 불균형이 인간이라면 마땅히 보장받아야 될 사회적 보장의 실질적 차별을 어떻게 초래했는지 꽤 객관적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단순히 수치화 된 GDP를 논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가처분 소득을 포함한 실질 소득 지표를 면밀히 비교해 논증에 대한 설득력을 높이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아시아 지역의 일본, 한국, 대만, 싱가포르 및 홍콩을 지니 계수와 실질 소득을 계산해 앞에서 열거된 국가 이외에 베트남이나 태국, 방글라데시 등의 소득 저위 국가들과의 객관적 수치 비교를 제시합니다. 약간의 곁다리로 이 글의 3장에서는 냉전 시기에서 제3세계에 불과했던 한국과 대만 등이 경제 발전과 더불어 거의 미국과 유럽에 준하는 제1세계가 되었으며, 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소득 분포에서 최상위에 위치한 이들 국가들이 실질적으로 유럽 연합과 유사한 국가 연합인 ‘아시아 연합’이 왜 불가능한가에 대해서도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들 아시아의 선진 국가들이 그렇지 않은 아시아 국가들에게 막대한 돈을 투입하여 동일한 경제적 외형을 구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지역내의 민족주의적 요구 또한 아시아 지역의 단합을 방해하는 것으로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소득 불평등의 논점으로 돌아와서, 현재 전세계가 직면한 이 경제적 불평등이 다채로운 원인 가운데에서도 심각한 위협이 되어 온 것은 명백합니다. 저자는 실질적인 부의 재분배나 소득 재균형이 더할나위 없이 ‘빈곤층에게 이득일 것’이나, 의외로 중산층에서도 이러한 주장이나 요구에 동의를 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가까운 미래가 아닐지라도 자신들의 경제적 조건이 악화될 가능성을 염두해 두고 다수의 중산층들은 이 소득 분배에 대해 수긍하고 있다고 판단됩니다. 그외에도 후생적인 측면에서도 균형적인 소득 분배는 매우 필요하다고 보고 있는데요. 이는 반대로 “대대적인 소득 이전이 이루어지면 그 비용을 부담하는 부유한 구성원들이 분개할 것”이라고 글에서 예측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과연 자본의 이동이 자유로워진 세계화 시대에 불평등이 해소되었는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과 동시에 세계화 시대에 이르러 많은 경제학자들이 이 자본의 이동이 마땅히 부유한 국가에서 빈곤한 국가로 일종의 투자의 형태로 옮겨 갔어야 했으나,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고 저자는 비판합니다. 결국 막대한 자본은 부유한 국가에서 마찬가지로 부유한 국가로 이동했다고 저자는 인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3장에서 “세계화와 세계적 불평등 사이의 인과 관계를 밝힐 수 있는가”에 대해 이것의 문제를 명백하게 밝히기는 어렵지만, 세계화 자체가 많은 국가들과 사람들에게 번영을 안겨주었는가에 대해서는 아마도 정확한 판단을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특히, 이점은 과거 식민지 시대에 식민지 상황에 처해 있던 아프리카와 인도와 같은 케이스에서 종주국들이 이들을 뼛속까지 깊이 착취했으며 이러한 상황이 지금까지도 이어져 왔다고 저자는 판단합니다. 대햑 기본적인 자본주의적 이행에 있어서 그 토대가 이들 지역과 국가들에게 전무했으며, 마지막 결론에서 저자 역시, “결국 아프리카는 성공하든 실패하든 스스로 자구책을 세워야 한다”며, 다소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식의 연결고리는 세계화 과정이 결코 모든 이들의 삶의 번영을 가져오지 못했고 “경제체제의 내생화”라는 표현대로 오랜 시간이 투입되어 기술 축적이 이뤄진 국가에서나 쓸만하고 쓸모 있는 상품을 생산할 수 있다는 원천적인 해석에 이릅니다.

끝으로 우리에게 나쁜 불평등이란, 기득권에게 부를 유지하는 수단을 (이유없이) 보장해 주는 것으로 이를 최소한 가능성에서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균등한 교육의 보장’이라고 저자는 조언합니다. 실질적으로 각 사회에서 부의 원칙적인 재분배가 실효적으로 행해질 수 있는 것에 대해 우리 모두는 그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결국 사회 시스템이 누구나 계급을 오르내릴 수 있도록 보장하고, “지배층의 행동이 지배를 정당화하는 사상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저자가 일침하는 대상이 ‘금융 엘리트들’인 것은 마찬가지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더욱이 미국에서는 이런 불평등이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고, 유럽에서는 국가의 문제로 이해된다는 저자의 인식은 각 사회가 어느 정도로 부의 불평등을 이해하고 다루고 있는지 드러내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3장에서처럼 중남미와 아시아를 비교하며 소득 불평등이 대륙별로 어떠한 지경에 처해 있는지 분석하는 등의 여러 수치화들이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얼마전에 번역된 대앤 코일의 ‘GDP 사용설명서’나 아주 최근에 읽었던 대니 로드릭과 저자의 관점이 서로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고민해 보게 되었습니다.

“존 롤스에게 공정한 세계란 공정한 국가들이 모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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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소로스는 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까 - 세계 금융을 지배하는 수퍼리치들의 두 얼굴
니콜라 귀요 지음, 김태수 옮김 / 마티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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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 귀요는 이탈리아 피렌체에 위치한 유럽 대학 연구소 (European University Institute : EUI)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 받은 뒤에 미국 뉴욕대학과 컬럼비아대학 등지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학자입니다. 앞선 유럽 대학 연구소라는 명칭이 국문으로 정확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위키백과에 의하면 유럽 연합 회원국들이 유럽의 관점에서 사회 과학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설립된 연구 기관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사회 과학과 국제 관계학, 정치 이론, 민주주의 및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원제는 “Financiers, philanthropes : Sociologie de Wall Street”로 지난 2006년 프랑스어로 출간되었으며, 국내에는 2013년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번역된 책 제목과 관련하여 먼저 밝히고 싶은 점은 전체적인 내용을 고려했을 때, 제목이 이것과 아주 동떨어졌다고 볼 수는 없으나 상당히 자극적인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출판사나 번역가의 판단일 수 있겠으나 대충 이 정도에서 논하는 것으로 정리하겠습니다. 서문과 결론을 포함해 총 8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글은 전체적인 논증에 있어서 꽤 설득적이고 또한 객관적인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저자의 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금융 자본주의와 관련한 기본적인 배경 지식이 필요하긴 하지만 경제 관련 글임에도 불구하고 가독성은 크게 나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번역도 매끄러운 편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책의 전체적인 맥락은 산업 자본주의가 대공황 시기를 거쳐 은행의 역할이 커지고 금융과 관련된 투자 기법들이 만들어지면서 어떻게 금융 자본주의가 미국의 자본주의 이행과정에서 대두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런 과정 가운데 저자의 표현대로 ‘도적남작’이라 불리우는 기업사냥꾼들과 금융 엘리트들이 “평화나 사회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등의 진보적인 이데올로기적 입장 뒤에 숨어있는 이들 담론의 본질은 지배적 규범에서 일탈한 경제 행위를 정당화하는 전략”이라는 신흥 부자들의 ‘자선사업’ 행위를 다소 회의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즉, 이것은 기존의 기득권과 산업 엘리트들에 반해 계층적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이 이익으로 고도화 된 금융기법을 다루는 이들을 ‘사기’와 같은 단어로 이해하고 있는 상황에서 꽤 최근에 떠오른 이 기업 사냥꾼들이 자신들의 부의 정당성 내지는 현재의 자본주의와 시장 경제에서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는 일종의 희박한 근거라도 마련하고자 ‘조지 소로스’를 필두로 여러 금융인들의 이력과 부침을 상세히 열거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 기록되고 있는 적지 않은 금융인들의 일면은 기존의 여러 엘리트 계층과 어깨를 나란히 하거나 혹은 자신들의 부의 창출이 자본주의 내에서의 일정 지분을 인정 받고자 하는 욕구 또한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2장부터 4장까지의 자본 축적의 새로운 형태라고 볼 수 있는 금융인들과 공격적 기업 합병, 몇몇 유명한 금융인 (혹은 금융 투기꾼)의 기법 들이 기존의 자본주의에서 어떤 파급을 갖고 있는지에 논하고 이러한 전문직업화 논리가 “일종의 정당화 전략으로서, 존중받는 ‘프로’의 이미지를 만들고 싶은 이들에게 유용”하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습니다. 특히 제목에서 언급된 조지 소로스는 지난 1992년 영국의 파운드화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막대한 환율 차익을 얻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 자신은 수차례 “고삐풀린 금융 시장을 비판하고 자본주의의 위협을 경고”했는데요. 이러한 금융 시장 내지는 환율 투기로 막대한 이익을 챙긴 자가 오히려 금융 시장에 대해 우려하는 것이 크게 와닿지는 않았습니다. 우리가 2008년 뉴욕발 금융 위기에서도 볼 수 있듯이 CDS를 비롯한 채권의 무분별한 증권화와 이를 막대한 돈을 들여 사고 파는 행위가 어떠한 결과를 초래했으며, 그런 와중에도 아무런 도덕적 가책 없이 자신들의 호주머니에 돈을 넣는데 그치지 않고, 미국 납세자들의 돈으로 투입한 공적 자금에도 거액의 은퇴자금을 챙기는 행위가 법적으로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 것을 역시 목도한 바가 있습니다. 더욱이 부시 행정부 이후에 출범한 오바마 행정부가 단 한명도 이들을 기소하지 않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죠.

기존의 전통적인 귀족 집안으로 대표되는 엘리트들이 1960년대 이전의 그나마 품위있는 은행 경영과 기업들을 연결하는 역할을 해왔다면 이후 아이비 리그 출신으로 MBA를 취득한 젊은 금융인들이 월 스트리트에 진출해 경쟁적으로 금융 기법을 만들어 이익을 창출한 것 이면에는 “애초에 국가의 역할을 축소하기 위해, 그리고 모든 규제를 사전에 무력화하려는 의도로 구축된 위선적인 ‘기업의 사회적 책임’ 담론은 이제 인수합병과 증권시장에 대한 국가의 감독과 규제를 강화하는 데 명분을 제공”한 이중적 상황을 만들어냈습니다. 하지만 “과거 레이건 행정부가 케네디-존슨 시대에 성립된 대규모 사회보장 프로그램을 폐지하면서 시장의 권한과 자원의 통제를 기업에 위임했으며,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구분을 둔 글래스-스티걸 법이 사실상 무력화 되면서 대량의 도덕적 해이의 원인”이 된 바가 있습니다. 저는 책을 마지막까지 일독하고 나서 저자가 이러한 금융 자본주의의 등장과 팽창이 전통적인 산업 자본주의의 무대가 축소되는 것이 아마도 자본주의 자체에 있어서 결코 긍정적인 상황은 아님을 우리에게 인식시키고자 하는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이러한 신흥 졸부들의 자선 사업이라는 “윤리적 세탁”을 비판하고 있는 이면에는 이러한 관점이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봐도 무방해 보였습니다.

자신이 우위에 선 시장경제 시스템 하에서 막대한 돈을 쌓고 있는 이들이 시민들이 이룩한 사회와 전통적인 국가의 역할에 대해 자신들의 자선 사업이 국가의 손길이 미처 닿지 않는 곳에 대신 그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여기기도 하지만 한정적으로 미국 경제안에서는 이러한 자선 사업이 세금 감면의 혜택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 부분을 차치하더라도 자본이 또다른 막대한 자본을 뽑아내는 현재의 시스템을 이 거대 부자들이 기피할 이유는 전혀 없으며, 오로지 자신들의 부의 유지와 권리 확보에 혈안인 것은 거의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저는 여기에서 단순히 돈이 많은 자들이 사회적 자원에 손을 뻗치는 것은 열번 양보해서 그렇다 하더라도 정치 엘리트들과 연계하여 사실상 민주주의를 무력화 시키는 과두제를 지향하는 것에 강한 의구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 부자들이 자신의 부 이상으로 다른 권리를 요구하는 것에 대한 실질적인 견제의 수단이 마련되어야 하며, 전세계에 만연한 불평등의 상황은 이들이 권리 만큼 의무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것에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매번 밝히지만 우리의 자본주의는 결코 완벽하지 않으며, 그동안 시장과 자본에 최대한의 자율을 제공했던 것 만큼 앞으로는 면밀한 정치적 감시와 민주적 수단의 투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두 알다시피 자본주의는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강한 요구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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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인 토마스 힐란드 에릭슨은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의 사회인류학 교수이자, 유럽 사회 인류학자 협회의 협회장을 역임한 유럽 내의 저명한 인류학자이기도 합니다. 특히 그는 현재 세계가 신자유주의적 과잉 시대임을 자각하고 이에 대한 실질적 해결책을 찾기 위한 연구를 지속해 오고 있습니다. 특히 이 책의 결말인 8장에서 현재의 문제를 단순히 관념적 비판에 그쳐서는 안된다는 관점을 갖고 있는데요. 충분히 공감할 만한 입장이기도 합니다. 또한, 책 곳곳에 나오고 있는 이중구속과 스케일의 충돌이라는 용어는 그의 논증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도구이기도 했습니다. 먼저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유럽연구위원회 (ERC)의 후원으로 진행되는 연구 프로젝트 ‘과열 : 세계화의 세 가지 위기’의 서론이자 개요이다”라는 취지의 출판 목적을 간략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즉, 아마도 이 책이 현시대의 문제 제기라는 측면에서 뒤이어 나올 후속 저작들의 일종의 방향타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원제는 “Overheat : An Anthropology of Accelerated Change”로 지난 2016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최근인 올 2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책의 1장에서는 의미심장한 제목과 일맥상통한 의미인 현재의 과열에 대해 저자는 “자본주의는 19세기 이후부터 세계를 지배하고 있으며 오늘날 화폐 경제 없이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인간 공동체는 남아있지 않다고 해도 좋다”고 분석하며, 이러한 시장경제적우위를 바탕으로 한 신자유주의가 인간의 삶을 좌우할 여러 부분에서 파급력을 끼치고 있고 이것의 여파가 위기를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평가합니다. 그리고 이 위기는 크게 에너지 문제와 난민 문제 및 도시의 인구 집중에 따른 불평등적인 인간의 파편화와 환경 오염의 심각한 원인인 쓰레기 문제들과 소셜네트워크를 비롯한 정보 과잉등의 현 상황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즉, 과잉된 세계의 문제 제기와 함께 그로인한 부정적 파급효과를 7장에 걸쳐서 논하고 결론에 이르는 8장에서는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런 과열된 세계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겠는가에 대한 저자의 핵심 과제로 글은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과거 나폴레옹 전쟁이 마무리 되는 시점이었던 1815년보다 현재의 전세계 인구는 대략 7배 정도로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여왔습니다. 더불어 자원의 개발과 시장의 확대 및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여기에 자본주의가 인간의 노동력을 통한 더 많은 상품 생산에 집중해 왔습니다. 소위 인간의 합리적 이기심이라는 일종의 유일무이한 가치로 인해 시장이 계몽주의 시대 이후 고취시켜 왔던 인간의 삶의 증대에 대해 큰 기여를 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커져왔습니다. 물론 인간이 합리적 이기심을 발휘할 것이라는 기대는 거의 허구에 지나지 않았고 각각의 경제적 행위자들의 이기심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법에 의지해야될 만큼 자본주의 이행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특히 냉전의 시기에서 1980년대 대처와 레이건으로 시작된 ‘신자유주의’는 정치가 마땅히 맡아야 되는 부분에 경제가 합리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터무니 없는 믿음과 더 나아가서는 시장의 견제를 위한 정치적 요소를 전부 제거하기에 이릅니다. 하이에크 조차 시장의 자율적 합리성에 무조건적으로 기대를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밝혔고, 칼 폴라니는 “시장 원리 자체를 반대하기 보다는 마땅히 사회적 원칙이 적용되어야만 하는 사회적 영역에까지 시장 원리가 확산되는 것을 반대한다”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이 글의 8장에서 저자는 “경제성장과 생태적 지속가능성 사이에서 발생하는 이중 구속은 현 세계의 이중구속 (혹은 해결 불가능한 딜레마)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여기의 생태적 지속 가능성은 단순한 환경 문제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을 유지하고 세대를 이어가기 위한 중요한 조건으로 경제 성장의 요구와 생태적 환경의 지속은 그야말로 이중구속에 해당한다고 저자는 여러번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신자유주의로 비롯된 전세계의 규격화 내지는 초접근화의 세계화는 사실상 “구조적 모순과 지역적 갈등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저자는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결국 고도화 된 자본주의의 이행과 이를 보장하기 위한 시장의 배타적 독립은 전 지구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불러일으켰고, 이로 인한 문제의 표출은 여러 측면에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이를테면 수많은 난민들의 발생이나 남반구와 북반구의 외형적 불평등이라 볼 수 있는데 에너지 불평등을 비롯한 북반구 선진 기업들의 폭발적인 아웃소싱과 이러한 과정에서 발생하는 남반구 노동자들의 인권 침해와 보다 나은 삶의 기회에 대한 박탈입니다. 이 책에서 소개되고 있는 아프리카 가나의 수도 아크라 지역의 거대하고 긴 슬럼화 지역에서의 폐가전을 이용해 하루를 벌어먹고 살고 있는 가나 소년들의 실례는 이를 증명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단순한 빈곤층 내지는 저개발국의 국민이라는 담론을 넘어 유럽이나 북반구의 선진국에게도 “안정적인 고용과 즉각적인 생존 사이에 존재하는 이 유동적인 회색지대를 설명하는 데에는 새롭게 떠오른 개념인 프레카리아트가 특히 유용하다”고 저자는 가이 스탠딩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결국 신자유주의의 비인간화적 이행은 저개발 국가나 선진국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시장의 우위라는 한길만을 강요해 왔습니다.

또한, 이 신자유주의의 고도화는 난민 문제에 있어 거의 모든 이민자가 환영받지 못하게 되는 일종의 경계선주의를 만들었고, 이점은 큰 틀에서 “현대 국가에서 행해지는 전형적인 배제의 형태”라 불릴만 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시리아를 비롯한 난민의 발생이 전쟁과 분쟁으로 인한 명백한 원인이 존재하며 이런 전쟁과 무력 갈등 상황에서 이익을 얻는 기업과 국가들이 존재하고, 결론적으로 이러한 정치적 설계에 무고한 시민들이 난민화되었고 여기에서 한가지 명백한 점은 이들을 무슬림이라는 지칭으로 왜곡해서는 안된다는 점입니다. 난민 발생의 일차적인 문제는 자크 랑시에르도 동의했듯이 이러한 정치외교적 배경이 먼저 박혀 있는 것입니다. 좀 더 확장된 틀에서는 “보편적 인권과 신자유주의에 따라 인간의 가치를 경제적 스케일로 재단해 등급을 나누는 등의 이중구속”이며, 이를 더 요약해 내자면 “신자유주의라는 이념은 정치적 이슈를 경제적 이슈나 경영의 문제로 환원시킴으로써 근본적 가치, 사회 정의 장기적 관점에서 인류의 안녕을 보장하기 위한 조건들에 대한 논쟁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앞선 평가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완곡한 어법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끝으로 현재 세계에서 진보 좌파에게 거의 일임되어 있는 전지구적 생태 문제와 기후 변화 및 환경 오염은 그렇잖아도 현실 정치에서 궤멸되어 있는 이들에게 힘든 과제일 것입니다.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타협하지 않는 개발론자들, 이를 옹호하는 경제주의자들과 영합하여 현재의 지구적 위기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그 여파가 적을수도 있겠으나 후세에게는 그야말로 재앙으로 직면할 수도 있는 문제일텐데요. 여기에는 이와 관련하여 태평양에 존재하는 미국 텍사스주 크기의 거대 플라스틱 덩어리들과 육지에 터를 잡고 있는 쓰레기 무덤에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사람들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하등 쓸모가 없는 쓰레기 더미에서 하루를 연명해 살 수 밖에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그것이야 말로 딜레마이자 이중구속이며, 이 글의 결론에 이르러 느끼게 되는 경제의 구조적 모순과 이를 더 부추기는 시장경제의 왜곡이 과연 개선 가능할 수준 정도의 논의가 이뤄질 것인가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이 글의 결론인 8장에서 저자는 “시민 모두가 동의할 만한 사회 시스템에 대한 신뢰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해결책을 강구하기에 앞서 현실 인식을 정확하게 할 수 있는 수단 하나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렇게 변화하는 세계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부터 시작해 칸트가 제시했던 세계시민주의적 관점으로까지 확대시켜나가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점을 진정한 해결책으로 볼 수는 없겠지만, 우리 모두가 현실 인식의 괴리를 좁히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는 최소한의 기대는 가져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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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 보수를 찾습니다 - 우리가 잃어버린 보수의 가치
로저 스크러튼 지음, 박수철 옮김 / 더퀘스트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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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 스크러튼은 영국의 저명한 철학자로 켐브리지에서 미학 박사 학위를 수여 받고, 이후 런던대학교 버크벡 칼리지 교수를 역임하는 등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타임즈와 BBC에 출연하며 일반인들에게 철학과 미학의 저변을 넓히는데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는 특히 자신이 보수주의자라고 수차례 미디어를 통해 언급하며 그에 관한 자신의 관점을 피력하기도 하였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1980년에 출간된 것으로 보이는 ‘보수주의의 의미’의 연장선상으로 이 책을 펴내게 된 것인지 약간 궁금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책의 원제는 “How to Be a Conservative”로서 지난 2014년에 출간되었으며, 국내에는 2년 뒤인 2016년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우선 이 책은 총 13장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각각의 포함되고 있는 주장들은 과거 세계 2차대전 시기부터 이슬람 난민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현재의 유럽까지의 논증적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약간 차례대로 살펴보자면, 1장에서 저자인 로저 스크러튼은 자신이 왜 합리적 보수주의자인지에 대해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1장 후반부에 대처리즘을 옹호하면서도 자신은 경제적 특권을 비롯한 기득권 층에 반대하며, 특히 “보수주의를 자유시장경제학과 차별화하는 것”에 대한 언급이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다만, 대처리즘으로 영국내의 경제적 엘리트들의 출현과 자신의 경제적 특권을 차별적으로 옹호하는 인사들의 등장을 초래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큰 틀에서 대처리즘을 옹호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꽤 불명확한 부분이 아닌가 개인적으로 생각해봤습니다.

이후, 2장과 3장에서는 보수주의가 옹호하는 전통적인 가치인 가정과 국민의 개념, 특히 9장에서 시민 사회 내에서 국가에 대한 우국충정이 필요하다는 주장과 같이 이 부분에서도 ‘특유의 소속감을 느끼게 하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에 대해 밝힙니다. 4장과 5장은 경제적인 담론에서 사회주의와 보수주의를 설명하고 6장에서는 보수주의가 추종하는 자유주의적 가치를 그리고 7장부터 13장까지는 현재 직면한 현실에서의 보수주의자의 눈으로 보는 문제들과 그것과 관련한 여러 해결책들과 마지막에는 후세들을 위한 간략한 담화를 끝으로 글은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먼저 제가 저자의 논점에 크게 관심을 가졌던 부분은 오늘날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에 대한 여러 관점입니다. “경제적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도구적 이성을 억제해야 한다”는 부분이나 “개인들의 이기심에 대한 토크빌 경고”를 언급하고, 의무와 사회적 책임 등의 전반적으로 세계의 자본주의적 이행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물론 1장에서 대처의 입을 빌어 분배와 관련해 과연 정부가 특유의 능력이 있는가에 대해 의구심을 보이면서 특히 10장에서 “차별은 그것이 어떤 측면에서 부당할 경우에만 용인할 수 없다고 약간 그럴듯하게 주장하는 것이다”라고 보수주의자들에게 조언을 하는 것으로 보아 오늘날 자본주의적 체제가 사실상 시민의 평등의 큰 위협이 되는 것은 분명함에도 반대의 차별에 대한 개선 요구를 저런식으로 대처하라고 말하는 것은 뭔가 저자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에 진정성이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또한 6장과 7장에 등장하는 ‘합리적 이기심’에 대해서도 과연 시장과 정치에 이 합리적 이기심이 과연 존재하는 것인지에 대해 저자의 명확한 논증이 없었으며, 사실상 인용의 인용에 그치는 아쉬운 부분이라 할 만 했습니다. 물론 ‘비뚤어진 자본주의’를 바로 잡기 위해 법을 이용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크게 동감했고, “도덕적 제재의 지원이 없으면 시장경제는 적절하게 기능할 수 없다”는 평가에도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앞선 의무와 사회적 책임이라는 것이 바로 시장경제를 배타적으로 옹호하는 이들이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되는 부분이 아닌가 합니다.

기본적으로 보수주의자들은 개인의 자율성을 존중하기 때문에 사유 재산을 신봉하고 더 나아가서는 현재로선 시장 경제의 특별한 대안이 없다는 것을 저자는 주장합니다. 앞선 고삐풀린 자본주의를 다시 정상궤도에 올리기 위해선 법의 수단 뿐만 아니라 시장에 민주주의가 개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저 개인적으로 그렇게 여기는데요. “민주주의가 특수 이익 집단의 싸움판으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시민의 공공심을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과 “민주적 선거만으로는 내분을 극복하거나 공적 책임의 진정한 의미를 당선자들의 마음에 심어줄 수 없다”는 어떻게 보면 민주 정치의 제도적 한계에 대한 저자의 피력에 크게 공감했습니다. 결국 자신을 보수주의자들이라고 여기는 자들은 어찌됐든 민주주의에 대한 강력한 신념을 갖고 있어야 하며, 선거와 상관없는 사회의 기득권층과 보수주의자는 확연히 구분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7장 이후부터 이어지는 오늘날 (유럽의) 문제와 관련해서, 중동 지역의 여러 전쟁으로 발생한 수많은 난민들이 유럽에 유입됨으로서 이들이 종래의 국민국가주의와는 상관없는 이슬람교의 맹종과 우선시하는 가치관으로 종교 자체가 국가와 제도에 우선하는 이들의 근본적인 상황을 저자 자신이 이처럼 우려하고 있는 것에 일정 부분 동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보편적 인류애와 인간성으로 보아서는 이들 난민 문제를 격리와 추방으로 해결해서는 안되지만 이슬람인들이 대체로 종교와 세속간의 문제를 종교 우선주의로 기울어지는 것은 기존의 유럽 국가들 내부의 사회적 불안 요소를 갖게 하는 문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저자가 밝히는 대로 큰 틀에서 국민국가적 사회 관념체계에 이들이 자연스럽게 융합되어 그대로 사회의 한 축이 되어야 함에도 ‘기독교적 사회-흡수되지 않는 별개의 이슬람’이라는 대결구도를 만들게 되는 위험을 안게 됩니다. 근본적으로 이슬람이 무엇보다 제도와 사회에 우선되는 종교적 가치관을 철회하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큰 사회적 괴리로 남을 가능성이 높아 보였습니다.

따라서, 보수주의자들은 유럽의 기독교적 문명 토대위에 지금까지 이어 온 발전에 전통적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믿고 믿습니다. 사실상 저자 역시 기존의 국가와 사회에 균열을 가하는 어떠한 것들에 대해 반대하고 “규칙, 직위, 의례, 위계 등의 가치”를 옹호하며 시민들의 자유의 영속적 결사를 지지하는 것이 이들의 의무라 볼 수 있겠습니다. 특히 10장에서 “자유 결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전체주의 국가를 옹호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에는 보수주의가 옹호하는 전반적인 자유의 의미와 이를 바탕으로 시민의 자율성과 결사를 보장해야만 한다는 가치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저자가 언급하는 ‘보수주의’에 대한 논법이 과거 에드먼드 버크의 담론과는 차이가 있으나 오늘날 극우와 구별될 만큼 그 언저리가 명확하지 않은 심지어 과두제를 옹호하는 무늬만 보수주의자들 하고는 매우 명확히 다른 보수주의라 인식될 만 했습니다. 보수의 반대는 진보가 아니라 반동이듯이 오늘날 극우와 포퓰리즘을 추종하는 보수주의가 아니라 진짜 ‘합리적인’ 보수주의가 사회에 뿌리 내리길 간절히 기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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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andante 2019-12-24 23: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베터라이프님 덕에 스크러튼을 알게 되는군요. 스크러튼이 쓴 책들 하나하나 읽어봐야겠습니다.
동의하지 못하는 의견이라도 배울 점은 있겠지요...

베터라이프 2019-12-25 10:15   좋아요 1 | URL
자유주의의 이행과정에서 보수주의와 영합한 것이 오늘날의 보수주의의 모습일텐데요.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입으로만 민주주의를 외치고 있어서 아쉬울 따름입니다. 저는 사회에 상식적이고 건전한 보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런면에서는 과거 보수주의 전통이 책에서만 볼 수 있는일이 되었죠. 저도 보수주의자들의 노골적인 현실 이익에는 동의하지 않는편입니다. 하여튼 댓글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