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계속 가난한가? - 실업에서 잉여로, 새로운 빈곤층의 탄생 지그문트 바우만 셀렉션 시리즈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안규남 옮김 / 동녘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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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에게 유동하는 근대 혹은 액체 근대, 쓰레기가 되는 삶, 인간 쓰레기라는 사회학적 개념을 창안한 지그문트 바우만은 우리가 20세기를 넘어 지금까지 우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사회사상가이자 사회철학자였습니다. 제가 서평을 남긴 그의 책은 꽤 여럿 되지만, 그의 유고작이었던 레트로토피아의 서평을 작성하면서 그의 죽음이 너무나 안타깝다는 소회를 남긴 것처럼 우리에게 바우만은 지금도 몹시 필요한 사상가이자, 또한 귀한 비판적 지식인이었지만 그래서 그의 부재가 아쉬울 따름입니다. 바우만은 유대계 폴란드인 부모 슬하에서 태어나 바르샤바 대학에서 수학한 이후, 영국 런던 정경대에서 머물고 있는 동안 사회학에 대한 연구를 지속해 전통적 가치를 잃어버린 근대와 지나간 근대가 밟아왔던 비인간성에 주목, 평생을 들여 이 문제에 천착을 하게 됩니다. 바로 그러한 관련을 갖고 있는 이 책은 지난 1998년 “Work, Consumerism and the New Poor”라는 원제로 초판이 발행이 되었고, 국내에는 2010년 ‘새로운 빈곤 - 노동, 소비주의 그리고 뉴푸어’로 번역 출판되었으나 가장 최근인 2019년 4월 추가된 5장을 포함한 2004년에 개정된 2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책의 중요한 주제는 대량 산업 시대라고 불리우는 근대 산업화 이후 변화된 기존의 노동 윤리가 어떤 식으로 자본의 이익에 부합되었고, 그 와중에 쓸모를 잃은 빈자들의 전반적인 현실적 문제에 이어 오늘날에까지 이를 연장해 자본주의와 노동, 그리고 빈자들이라는 관계에서 전통적 가치를 잃어버린 현대 사회의 적나라한 현실을 이론적으로 규명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1장은 공장 자본가들이 개입해 변질된 노동 윤리를, 2장은 소비 지상주의의 부상을, 3장은 역사상 꽤 단명했던 복지국가의 실체를, 4장은 오늘날 변질된 노동 윤리 상황에 놓인 빈곤층, 5장은 총체적인 측면에서 지구화 된 세계의 노동과 잉여를 살펴보고, 6장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서 배제된 빈곤층에 대한 전망을 사회 전체적인 모습에서 조망하는 것으로 끝맺음이 되고 있습니다.

계몽주의 시기 이전의 네덜란드와 독일의 유수 길드에서 평생을 바친 수많은 장인들의 장인정신에서 비롯된 전통적인 노동 윤리는 특히 제품 생산에 따른 노력에 있어서 이들의 책임감을 강조했고 일부 사회학자들에 의해 이러한 전통적 노동 윤리가 보통의 노동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근대의 포드주의를 비롯한 대량 생산 체제에서는 어떻게 하면 노동자들이 현실에 불만을 갖지 않고 현장 관리자에게 순응하면서 그 유명한 ‘시장적 효율성’을 발휘시킬 수 있겠느냐에 대한 관점으로 변화 혹은 변질되게 됩니다. 이러한 변질은 바우만의 평가대로 전통주의적 사회 가치라고 볼 수 있는 “도덕적 책임과 정의”를 사실상 사회에서 박탈했으며, 시장 자체가 정당한 법치 제도에 기반해야함에도 자본의 이익을 위해 이러한 비정상적 상황을 묵인했다고 그는 또한 비판하고 있습니다. 특히 당시에 진보주의적 개혁가로 알려진 제러미 벤담 조차 노동 바깥에 있는 빈자들에 대해 가혹한 구빈소에 쳐 넣거나 일원화된 규율로 이들을 계도해야 한다고 밝힌바 있습니다. 이에 관해서 지그문트 바우만은 사회의 ‘가난한 자들’에 대해 부유층과 중위층의 불안과 두려움은 1장에서 노동 윤리가 직간접적으로 기여하고 있는 사회적 통제에 벗어나 질서와 통제를 뒤흔들 것이라고 보는 벤담 시대의 지식인들이 갖고 있던 지배적 관념에 비롯된 것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이러한 논의는 아마도 그것이 본질적이든 않든 간에 대부분의 일반 계층은 이를 부정할 것입니다. 아니, 최소 1972년 전까지는 가난한 자들과 역외 계급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터무니 없는 경계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었으나, 뒤에서 살펴볼 전세계 노동 계층의 불안정성과 보편적 복지에 대한 공격, 대처 정권 시절 있었던 자산 조사에 의한 빈민에 대한 사회적 급여 지급 등 최하층의 계급들이 오로지 자신들의 선택에 의해 그러한 상황에 처했으며, 이것을 개인의 선택 문제라고 보는 시각은 꽤 멀리나 팽배해져 있는 상황입니다.

뒤이어 2장에서는 우리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일반적인 생산자이자 곧 소비자라는 양 측면의 시장 행위자임을 전제하고, “선택이 소비지상주의에서 중요한 가치라는 것”과 “소비자는 파산의 두려움을 무릅쓰면서까지 외상으로 구매를 하고 싶어할 가능성”이 소비자의 지상과제이자 미덕이라는 바우만의 일침은 인간의 노동을 도구화 내지는 상품화시켰던 자본주의의 의도와 맞물려 그러한 방법으로 만들어낸 소비품에 대해 각자의 이기심을 발휘해 욕망을 실현시키라고 외치는 소비 지상주의의 논법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이기심의 극대화는 전반적으로 비대한 소비 풍조를 잉태했고 즉, 대량 생산-대량 소비라는 고삐 풀린 자본주의의 양 축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소비 대열에 자원의 부재로 배제되었다는 것은 노동자들의 불안한 신분과 더이상 기대할 수 없는 국가의 안정책 및 이들에 대한 탈정치화가 극심하게 맞물린 결과로고도 볼 수 있습니다. 단순하게 이들이 소비 자본주의에서 배제되었다고 논평하는 것을 넘어서는 이것이 주변을 강제로 제압하는 자본주의의의 실질적 모순이라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렇듯, 1972년 이후 복지 국가의 개념이 후퇴하게 되고 앞서 언급한 대로 영국의 대처 시기에 자산 조사를 통한 빈민에 대한 사회적 급여 지급과 같은 정부의 행동은 통합이 아니라 분리, 포용이 아니라 배제를 초래했고, “사회에서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자들은 사회에서 거부된 자들에게 이런 낙인을 찍음으로써 자신들의 진짜 가치 혹은 추정적 가치를 재확인한다”고 바우만은 더 덧붙입니다. 마찬가지로 1980년대에 있었던 흑인을 비롯한 미국내 유색인종의 대학 입학과 관련된 인센티브 제도는 흑인들 스스로의 자기 결정권을 제한한다는 미명하에 말도 안되지만,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이를 철폐해 달라고 주장한 바가 있습니다. 사회적 보장을 비롯한 복지 문제와 관련해서 미국 내부의 인식은 주로 이와 같으며, 개인 선택의 문제라든지, 개인의 자유라는 명목으로 ‘스스로 일어나 성공할 기회를 박탈해서는 안된다’ 의미로 되새김되고 있습니다. 바로 마틴 길렌스의 일반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복지에 대한 연구가 이를 입증해, 꼭 길렌스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미국에서 복지에 대한 일반적인 기대로 요구하는 것은 꽤 어려운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글 도입부에서 전통주의적 사회 가치를 떨쳐낸 최근의 노동 윤리가 사회 전체에 있어서 그리고 노동자들의 삶의 대한 보장과 안정성을 얼마나 박탈해 왔는지 바우만의 논법으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대량 생산 시기의 노동자들을 한데 묶었던 이 노동 윤리가 노동자들 스스로 자기 결정에 의한 결과로 나온 것이 아니라 오로지 공장 자본가와 이들 주변의 이익을 위해 생겨난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많은 자본가들이 시장과 생산 공장에 순응하는 노동관을 노동자들에게 주입했고 상대적으로 이에 걸맞지 않은 많은 노동자들은 사회에서 도태되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바우만이 언급하는 이 역외 계급이라는 정의는 꽤 광범위한 의미이지만 공통적으로 다른 계층의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낙인 효과와 당연히 이들을 도태시키고 배제해야만 사회적 질서와 통제가 유지될 것이라는 이해를 갖고 있다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굳이 허버트 스펜서를 꼽지 않더라도 토마스 칼라일과 같은 이들이 이에 동조했으며, 이 책의 마지막 6장은 이러한 불길한 전망을 담고 있습니다. 이미 미국은 교도와 관련된 공무를 민간에 외주를 주고 있는 상황인데, 이러한 역할을 자본과 민간이 맡게 된다면, 더 나아가서는 이들 빈자들과 역외 계급들을 따로 관리하는 대형 수용소가 나타날 가능성을 완전히 배체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최근에 발생한 난민들을 수용한 비인간적 수용소들도 그렇고 ‘사회에서 철저하게 분리시킨다’는 주장 하에 이에 동의하는 ‘만족하는 다수’가 출현한다면 그것의 가능성을 영원히 배제하기 힘들 것입니다.

우리는 일찍이 스스로를 옥죄었던 정교일체와 봉건주의를 타파한 바가 있습니다. 비로소 인간은 모두가 평등하다는 가치를 확인시켰고 그러한 가치 아래에서 공화주의와 민주 정치가 탄생했습니다. 여기에 자본주의와 민주적 가치가 서로 격렬하게 상충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 널리 확대되어 왔습니다만 이에 관해 작고한 정치학자 로버트 달은 시장이 민주적 통제하에 있고, 민주 정치는 다원주의적 가치를 지지해야 시장의 왜곡과 전체주의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우리의 노동이 단순하게 일을 통해 보람을 찾으라는 소위 전문가들의 논법에 설득당하지 말고 노동 자체가 삶을 풍족하게 하는 다른 수단들 가운데 한가지가 되어야 하며, 바우만의 언급대로 직업적 소명 의식이 사실상 엘리트들의 전유물이라는 것을 봤을 때, 이를 반대로 뒤집어 엘리트 계층들 뿐만 아니라 모든 노동자들이 노동 안정성과 각자의 삶의 질을 증진시킬 수 있는 ‘만족하는 다수의 출현’을 위해 사회적 공감대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리라 생각됩니다. 물론 현재 우리에게 있어 시장과 자본주의는 중요하지만 여기에 도덕적 책임과 정의 그리고 공공의 정치가 점차 사라지는 것을 방치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모두가 이런 문제 의식을 갖고 삶을 향해 나아간다면 사회는 분명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를 어리석은 상태로 만드는 모든 것들을 부정해야만 비로소 인간으로 바로 설 수 있을지 않을까 글 말미에 생각해봤습니다. 바우만도 역시 이런 당위성에 긍정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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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민주주의가 온다 - 도둑 정치, 거짓 위기, 권위주의는 어떻게 권력을 잡는가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유강은 옮김 / 부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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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미국 출신의 역사학자들 중 매우 특별한 관심사를 갖고 있는 티모시 스나이더는 중부 및 동부 유럽 역사의 권위자이자 특히 2차대전 당시 전체주의에 의한 홀로코스트에 대한 연구를 지속했던 바가 있습니다. 그는 미국 유수의 대학인 브라운 대학과 영국 옥스포드를 거쳐 런던 정경대 등에서 강의를 했으며, 정치철학의 주제를 포함한 여러 주저들을 출간한 바가 있습니다. 또한 이와 관련한 여러 국제 학술상들도 수상한 경력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이 책은 작년인 2018년 처음 출간되어 국내에는 아주 최근이라 볼 수 있는 2019년 9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의 주요한 논점은 서방의 정치에 무차별적으로 개입한 러시아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 더불어 익명의 누군가들로부터 발생하는 수많은 가짜 뉴스들과 진실인 척 현실을 오도하는 온라인 상의 주장들이 몰고온 현실 정치의 여파를 비판적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것을 크게 풀어보면, 과거 이반 일린이라는 아돌프 히틀러와 같은 이론적 외관을 가진 지식인의 사상을 기초로 ‘대속자’와 ‘영원의 정치학’이라는 개념으로 현재 ‘푸틴 치하에 있는 러시아 및 러시아 정치’를 이론적으로 설명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저는 책에 삽입된 저자의 특별한 한 구절에 괜히 씁쓸한 웃음을 짓고 있는데요. 그것은 “푸틴 치하에 있는 러시아”라는 설명입니다. 저자인 스나이더의 입을 통해 현재 러시아가 최종 목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세계의 중요한 축들인 미국 정치의 교란과 영국의 유럽 연합 탈퇴를 “마더 러시아”의 가장 시급한 이익으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익 경로 안에 우크라이나에 대한 교묘하지만 매우 직접적인 전쟁과 유럽 각지의 극우 정치인들과의 연계를 여러 실증 자료를 바탕으로 한 일관된 논점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러시아의 노골적인 국제적 정치행위 가운데에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현실 정치가 또 놓여 있기도 합니다. 이 책 6장에서 수많은 정치학자들이 경고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과두제’에 대해 경고하고 있기도 합니다. 특히 미국의 경우에는 수많은 유권자들의 표심과 정치 배경을 분석해 자신들의 이익에 규합하는 일들을 벌이고 있는 디지털 과두제 (digital oligarchy)라는 꽤 신선한 용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러시아는 수많은 해커들과 사이버 전사들을 동원해 이미 영국에서 수많은 영국인들에게 유럽 연합 탈퇴가 그들에게 이득이라는 자기 암시의 영향을 끼친 수많은 봇을 투입해 성공한 바가 있으며, 미국에서는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지난 2016년 11월 대통령 선거 직전, 페이스 북이 가짜 계정 580만 개를 폐쇄한 일이 있었습니다. 즉, 러시아 발로 꽤 신빙성 있게 의심되는 수많은 봇들이 악성적 가짜 뉴스를 만들어 수많은 유권자들에게 허위적 판단을 이끌게 하고 그런 식으로 정치화 시킨 것은 꽤 소설처럼 보이기도 합니다만 현재 세계에서 러시아와 중국이 정부의 그림자 안에 수많은 해커들을 거느리고 있다는 점에서 이를 마냥 부인하기는 힘든 상황입니다. 더욱이 현재 “푸틴 치하에 있는 러시아”는 무늬만 민주주의가 아니라 사실상 전제 독재 정치라고 규정해도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어서 양자 사이에 이를 입증하는 것은 매우 객관적이기도 합니다.

이 책, 4장에서는 러시아의 복합적인 정치적 속내가 녹아 있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개입이 사악한 측면에서 얼마나 왜곡되고 날조된 가짜 뉴스들을 사용해 왔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에 의한 소행이라고 주장한 지난 말레이시아 여객기 격추 사건과 우크라이나가 무고한 러시아인들을 학살하고 있고, 우크라이나 스스로가 러시아 영토에 대한 야욕을 드러냈고 하는 등의 수많은 가짜 뉴스들을 살포해 유럽의 일부 언론들이 이를 수용적으로 인용하는 등의 문제를 초래했습니다. 또한 여기에 우크라이나에 대한 미국과 서방의 매우 소극적인 대처로 말미암아 전세계 국가들에게 인정받는 주권국인 우크라이나가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러시아의 직간접적인 작전과 군사 개입에 무너졌던 것은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우크라이나에 존재했던 대량의 핵무기들을 러시아로 귀환시키면서 미국과 러시아가 보증한 1994년 부다페스트 메모랜덤이 어떻게 휴지 조각으로 전락했는지도 증명하고 있습니다. 저는 약간의 논외로 북한의 김정은이 리비아의 카다피 축출보다도 실제로 핵무기를 잠시나마 보유하고 있던 우크라이나가 핵무기를 반출하고 나서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지를 자신에게 교훈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보기도 했습니다. 세계의 두 강대국이 보장한 이 안보 메모가 우크라이나에게 어떻게 작용되었는지 고민해 보는 것도 독자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2차대전 당시 러시아의 전신인 소련이 나치 독일의 히틀러에 의한 침략을 차단하고 전체주의 위협에 대한 대응의 의지를 보인 이후 현재 푸틴 치하의 러시아가 보이고 있는 ‘홀로코스트는 유대인들 때문에 초래되었다’, ‘전세계에서 러시아를 터무니 없이 비난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음모다’라고 러시아 정계와 현지 언론에서 주장을 하는 것은 정치와 언론이 시민들의 정상적인 정치적 견제와 활발한 토론이 전무하면 발생할 수 있는 결과를 확연히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이러한 온라인과 네트워크 상의 수많은 시민들의 정치 발언과 의견 교환이 민주주의에 결정적으로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여겼으나, 과거 민주주의와 시민에 대한 존 듀이의 통찰력이라 볼 수 있는 “제대로 된 사회교육과 정치 인식이 전무한 시민들이 인식론적 분별력을 발휘해 과연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겠느냐”는 의구심은 결코 허황된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스나이더 역시 현재 러시아의 야욕과 관련된 분량으로 논의를 집중한 나머지 앞으로 민주주의의 최대 위협이라 볼 수 있는 과두제에 대한 논의를 미국의 예를 들어 사회적 불평등과 이를 교묘히 용인하게 만드는 거대한 부 소유자들과 이들과 연계한 여러 계층들의 연합을 어느 정도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반대로 이러한 불평등이 통치 권력의 이득으로 직접 작용되고 있는 러시아와는 사뭇 상이점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스나이더는 이를 “미국 엘리트들의 절멸”이라는 표현으로 러시아가 생각하는 과두제에 대한 약간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는데요. 푸틴에 충성하는 과두제와 미국 부유층들이 원하는 자신들에게 유리한 사회경제적 제도화와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양자의 현격한 차이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러시아는 꽤 오랫동안 푸틴 치하로 남을 것 같으며, 이들 러시아와 중국을 명백하게 ‘민주주의의 그림자를 갖고 있는 국가’가 아니라 ‘전제 독재 국가’로 이해하는 것이 정치학적인 논법에 합당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현재 도널드 트럼프와 러시아와의 커넥션과 관련된 트럼프 타워에서의 러시아인들의 돈세탁과 트럼프와 관련된 주변 인물에 대한 러시아와의 연계는 실로 너무 엄청나서 따로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만 티모시 스나이더가 어쩌면 양국 정부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추측해보기도 했는데요. 모쪼록 저명있는 역사학자가 괜한 일을 당하지 않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전체주의를 유지시킨 것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이 뚜렷한 잔학 행위가 아니라, 법치를 파괴하고 국민들을 그 파괴에 끌어들이는 사생활과 공적 생활 구분의 잠식이었다”





“글 초입에 저자인 스나이더와 제가 존경해 마지 않는 토니 주트와의 사소하지 않은 일화를 담고 있는데요. 당시 심각한 병마에 싸우면서도 우리를 위해 사력을 다바쳐 글을 남긴 한 역사학자의 경건한 양심에 저는 절로 경의를 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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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이란 무엇인가 - 민주주의의 적인가, 개혁의 희망인가
미즈시마 지로 지음, 이종국 옮김 / 연암서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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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지바대학의 법정경학부 교수로 있는 미즈시마 지로는 일본 내에서도 보기 드문 네덜란드 정치사 및 유럽 정치사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일본의 한 월간지에서의 대담을 통해 일본내에 일고 있는 포퓰리즘적 상황에 대한 진단과 동시에 비판을 하기도 했는데요. 여기에서 민주주의의 외연이 침식되어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의 와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그의 경고는 쉬이 생각되지는 않았습니다. 미스지마 시로의 이 책과 관련하여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작년에 번역 출간된 연암서가의 ‘보수주의란 무엇인가’와 같이 읽을 수 있는 책을 역자가 부탁받고 바로 미스지마 시로의 이 책을 번역하게 되었다는 일종의 후일담이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출판사가 이런 기획물로 사회정치학 시리즈 단행본을 추진해 봤으면 어떨까 하는 바람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 책은 2016년 최초 출간되었고, 국내 번역 출판은 올해 10월에 이뤄졌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포퓰리즘은 신자유주의와 함께 가장 큰 관심사이기도 합니다. 전자의 포퓰리즘과 관련하여 다른 무엇보다 의구심을 갖고 있는 점은 이것이 결국 민주주의의 가장 큰 해악이 되지 않을까 하는 부정적 가능성입니다. 얼마전에 국내의 모 티비의 토론 프로그램에서 보수적 논객으로 참여한 한 인사가 포퓰리즘이 대중들의 정치적 요구와 활발한 참여에 기여한 바가 있지 않겠느냐는 평가가 많은 사람들의 포퓰리즘을 바라보는 순진한 인식과 관련있다고 여겨집니다. 일전에 C. 라이트 밀스는 대중 정치가 심하면 중우 정치 내지는 선동 정치로 귀결뒬 수 있다고 경고한 대로 비슷한 일면의 포퓰리즘은 가장 큰 문제로 대중을 선동하여 그것을 정치적 이득으로 삼는 선동 정치인의 존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밀스의 경고를 곧이 곧대로 일반 대중의 정치 참여가 군중 정치화 된다는 판단에 전부 동의하지는 않지만 많은 민주주의자들은 대중의 정치 참여가 없이는 민주주의 자체의 존립이 흔들릴 가능성에 동의한 바가 있습니다.

오늘날의 각국의 정치 상황은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직업 정치인들의 등장과 그들로 인해 만들어진 정치 불신으로 인해 적지 않은 시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끊게 되어버렸습니다. 또한 양 극단의 정치세력들 가운데 극우에 있는 자들이 말로는 민주주의를 입으로 외치지만 내심으로는 사실상 엘리트 기득권층에 의한 과두제를 지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미국의 보수 (사실 극우) 티파티 운동이 진보좌파를 ‘격멸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과 안보와 국가 체제의 수호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위해 얼마간 시민의 권리를 법으로 제한해도 된다고 여기는 이들이 각국에서 나타나는 것을 봤을 때, 무조건 잘못된 심증이라 치부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기실 포퓰리즘의 어원과 사회적 의미를 봤을 때, ‘포퓰리즘’이라는 단어 자체를 부정적이고 역겨운 단어로 여기는 지식인들이 많고 정치 본질적으로 극우와 포퓰리즘의 구분이 매우 어렵다는 점에서 특히 현 유럽에서 극우와 포퓰리즘이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 살펴본다면 왜 포퓰리즘이 파시즘으로 가는 길을 닦는 것과 같다는 수식에 동의하게 되는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다시 책으로 돌아와서, 이 책은 총 7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전체적인 맥락에서는 1장의 포퓰리즘의 간략한 정의를 제외한다면 북미와 남미, 유럽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영국, 스위스 등)과 최근인 2016년 대통령에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의 사례를 끝으로 포퓰리즘의 전세계적 상황에 대한 나레이션이 끝나게 됩니다. 또한 폴 태가트와 카스 무데 및 크리스토발 칼트바서 등의 포퓰리즘을 연구한 학자들의 여러 인용도 글에 담겨 있습니다. 물론 이 포퓰리즘의 가장 큰 난해한 부분은 ‘포퓰리즘 자체를 학술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점’일 것입니다. 이것은 포퓰리즘 현상의 정확한 학술적 법칙을 찾기가 어렵고 대중을 선동하는 포퓰리즘 정치인들의 현실 대안이 전무하다는 점과 트럼프와 같은 경우는 위험스럽게도 많은 연설에서 대중들의 궐기를 부추기는 등의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현재 유럽에서 보이고 있는 극우 포퓰리즘이 이슬람 배외주의를 거의 신념화하고 있는 점도 정치 이론적 측면에서는 매우 이해하기 힘든 현상입니다.

일단 3장에서 보여지는 유럽의 포퓰리즘과 관련하여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 영국, 프랑스 등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여기의 국가들은 2차대전 종전 이후 미국에 의한 민주적 정치 제도를 수립하여 발전시켜 온 우리와 같은 동아시아인들이 보기에는 꽤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과 풍토가 견고해 보이는 지역입니다. 흔히 민주주의하에서 벌어지는 이런 포퓰리즘 현상과 이 안에서 대중을 모으는 선동 정치인들이 입으로 민주주의를 외치는 만큼 정말 민주주의를 원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저는 의구심을 갖고 있습니다. 즉, 민주주의를 수단으로 삼아 자신의 정치적 목적이나 이득에 귀결하려는 본심을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존의 체제에 대한 적절한 대안 없이 자극적인 발언으로 대중들을 오도하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정치 소외를 느끼는 계층의 분노를 돌리고자 이민자들에게 화살을 돌리게 한다든지, 이미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3D 업종에서 이미 좋지 않은 처우에도 일하고 있는 이슬람 이민자들을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는 등의 진실을 제대로 말하지않는 태도는 일반적인 정치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저자도 역시 인용하고 있듯, 샹탈 무페는 이 포퓰리즘 정치의 영향력에 놓여 있는 이들이 나중에는 물리적인 폭력 상황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닌가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6장과 7장에서 영국의 ‘내버려진 (left behind) 사람들’과 미국의 러스트 벨트에 있는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은 영국독립당의 사례와 도널드 트럼프의 사례는 신자유주의화 과정에서 정치적 소외에 처한 이들애 대한 어떠한 사회적 안전 보장 없이 선동과 립서비스 만으로 어떤 결과가 일어났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경제의 급격한 자유화와 글로벌화로 발생한 다수의 정치적 경계의 바깥으로 몰리는 상황에 대한 비판은 충분히 필요하고 다시 시장에 대한 민주적 장치를 만들고 사회적 안전을 재정비 하는 등의 실효적인 제안 등이 필요하나 앞선 포퓰리스트들은 이것에 대한 필요성에 대해 아무런 인식이 없습니다. 단지 표와 지지를 위한 이들의 존재가 필요했으며, 특히 트럼프 같은 경우는 당선 이후 그나마 있으나 마나한 ‘오바마 케어’를 폐지하기 위해 밀어붙인 것으로 보아 이들이 얼마나 자신의 정치를 위해 민주주의를 이용하고 있는지 충분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들 선동 정치인들에게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에 대한 당위적 설명이 현재 시급히 필요한 실정입니다. 단순히 저학력의 단순 노동자 계층들이 포퓰리즘적 정치를 지지한다고 도식적으로 논하기 보다는 왜 기존 정치가 이들을 효과적으로 포용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지금보다 더 뼈아픈 연구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기존의 기득권층에 대한 분노를 왜곡해 선동하는 것이 분명 해결과제는 아니며, 정치적 스펙트럼이 다양한 계층을 수용하고 현실 정치를 개선하기 위해 나서는 겸허한 정치인들에 대한 지지와 이들이 의회내에서 어느 정도 발언력을 확보할 수 있게 우리가 인내심을 갖고 지켜보는 것이 중요한데, 그외에 어떠한 현실적 대안이 있을지 모두가 더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물론 여기에는 위르겐 하버마스가 강조한대로 시민들이 모여 정치 공론화를 할 수 있는 각 개인들의 역량 확대와 스스로를 위한 재교육 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정치 불신을 조장하여 시민의 정치 참여를 무익한 것으로 몰아 이익을 얻는 정치인들을 경계해야 할 겁니다. 포퓰리즘이 민주적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어리석은 기대를 하지 않는 것도 또한 중요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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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26 0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26 1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27 07: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밀의 <공리주의> 입문 컨티뉴엄 리더스 가이드
헨리 R. 웨스트 지음, 김성호 옮김 / 서광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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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R. 웨스트는 하버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 미국 미네소타주 세인트폴에 있는 맥켈러스터 칼리지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는 학자입니다. 저는 매번 외국 학자가 쓴 책의 서평을 쓸때마다 구글링을 하고 있는데요. 그런데 이 웨스트 교수에 대한 정보가 많이 없었습니다. 그의 얼굴로 추정되는 사진도 몇장 나오긴 했습니다만 확실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자에 대한 소개는 이 정도 선에서 그쳐야 할 것 같습니다. 앞장의 역자의 소개에 따르면 웨스트의 이 책은 컨티뉴엄 출판사의 ‘리더즈 가이드’ 시리즈의 한 권으로 이 리더즈 가이드의 기획 논저들은 꽤 명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마찬가지로 검색을 해봤더니 해외 북 블로거들의 다양한 글들이 나타났습니다. 지난 2007년 “Mill’s ‘Utilitaianism’”이라는 원제로 출간된 것을 국내에는 지난 2015년 서광사에서 번역 출판을 하였습니다. 한가지 사족으로는 원제의 책의 표지를 그대로 서광사에서 사용한 것으로 여겨졌는데요. 책 표지 디자인을 새로 하지 않고 책을 펴낸 점은 개인적으로 꽤 흥미롭기도 했습니다.

우선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이미 국내에 번역 출간된 밀의 공리주의를 제가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습니다. 저자인 웨스트의 이 책은 밀의 ‘공리주의’에 대한 일종의 해제라고 볼 수 있는데요. 원전을 먼저 보지 않고 해제 만으로 밀의 주저를 판단하는 것이 어쩌면 어불성설일수도 있지만 이 점은 양해를 부탁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칸트가 등장하고 난 이후로 제임스 벤담과 제임스 밀을 거쳐 존 스튜어트 밀에 이르는 영국 경험론에 입각한 이 공리주의가 상당한 비판을 받아왔던 것은 분명합니다. 칸트가 주장한 개인의 이성을 통한 행동의 결정 및 결과물은 단순한 수학적 산출이 아니라는 점은 일정 부분 공감할 부분이지만, 이성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될 것인가 아니면 이성은 목적에 이르는 수단일 뿐이다라는 양자의 입장이 첨예한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겁니다. 후자의 의미에서 밀은 이성이 선한 목적에 이르는 수단일 것이라는 입장을 표명합니다만 이 점에 반대하는 경우도 분명 적지 않겠죠. 이 공리주의를 간단히 요약해 본다면 (물론 상당히 도식적이겠지만요) ‘쾌락의 산출, 고통의 회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뒤이어 제러미 벤담의 입을 통해 나왔던 그 유명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라는 전제도 역시 귀에 박혀 있습니다. 밀은 그의 저서 공리주의의 마지막 정의에 관한 부분에서 ‘행위 규칙’과 ‘그 규칙을 위반을 제재하려는 감정’을 정의의 요약이라고 제시했는데요. 마찬가지로 이를테면 전체적인 공리주의의 맥락은 규범의 이론으로 평가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사회적 기본 원리에 입각해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 공리주의의 이론인 “법칙과 정책 그리고 사회적, 경제적 제도 등을 그것이 낳는 결과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는 점은 개인의 공리적 입장과 그 결과를 포함한 ‘다수의 이익’과 연관되어 있는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이렇게 결과론적 인식론에 걸쳐 있는 것이 공리주의라 볼 수 있는데 마찬가지로 이 부분에 대해 첨예한 비판을 가하고 있는 반공리주의적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구조적 발전을 이끌었던 개인의 이익 추구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모든 제도와 법의 규명이 결과론적 입장에 치우쳐 있는 것이 부당하다고 여기고 오로지 개인의 자유와 이익의 보호라는 측면에서 사적 개인의 행위의 정당성을 침해할 수 있다는 권리의 제한이라는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이 실정입니다. 저자인 웨스트의 평가대로 밀도 약간 소급해서 적용하고 있었지만 반대편에 있는 많은 이들의 직관주의적 태도가 공리주의를 비판해 온 가장 큰 흐름이었고 이 양자가 해석상의 대립을 유지하면서 다른 화해를 시도할 수 없는지에 대해서는 꽤 어려운 문제인 것 같았습니다. 이 책의 1장과 2장에서 논의되고 있는 이 직관의 절대주의적 관점이 공리주의를 터무니 없는 사상으로 몰고 왔고, 과연 쾌락의 수적 산출이나 고통의 회피 결과가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주된 이유였습니다. 그래서 밀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구체적인 영역에 어떤 원리가 적용되어야 하는지를 결정하려면 더욱 궁극적인 기준이 필요한데, 밀은 이 기준이 바로 공리의 원리”라고 주장했습니다. 단순히 직관의 이성만으로 개인의 행동의 선을 입증하려고 하는 것보다는 다수가 수긍할 수 있는 어떤 구체적 원리가 필요하다는 것은 충분히 공감할 만한 내용입니다. 다만, 단순한 쾌락 산출과 고통의 회피라는 측면을 넘어 “2차대전 당시 홀어머니를 놔두고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참여해야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이 청년이 충분히 개인으로서 납득할 만한 선택이어야 한다는 점은 공리의 경계와 그렇지 않은 부분의 인식적 분리를 가늠하게 합니다.

공리주의에 대한 큰 반박이라 여겨도 될만한 “이 이론이 오직 행위의 결과만을 중요하시는 냉정한 무감각한 인물로 만들며, 그 행위를 행하는 사람의 성품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을 밀의 입을 빌어 설명합니다. 행위의 옳고 그름 외에도 우리의 관심을 끄는 요인이 있을 수 있다는 밀의 인정과 다른 도덕 체계를 지지하는 사람들 또한 개인의 가치 기준의 가볍고 중한 기준에 따라 다르게 적용한다면서 이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는데요. 특히 밀은 여기에서 종교적 도덕 원리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무신론적인 입장에서 초자연적인 존재를 믿지 않았습니다. 이 점은 마찬가지로 공리주의가 (특히 사회학에서) 다른 어떤 이론보다도 더욱 종교적이라는 이해도 의미심장합니다. 더욱이 밀은 “기독교를 도덕을 포함한 모든 종교적 도덕이 우리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부분은 별도 설명이 필요할 듯 싶은데요. 밀은 일찍이 ‘여성의 예속’을 통해 여성의 권리를 위한 주장을 펼쳤고, 종교에 대한 비판을 해왔던 인물입니다. 당시에는 그의 의견이 급진주의적 주장으로 읽혔다는 점에서 밀에 대한 개인적인 약간의 해명이 있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따라서 공리주의는 전체의 공리 혹은 전체의 복지에 기여하는 행위나 행위자들을 지지해왔고, 밀은 여기에 “개인의 쾌락이나 이익에 반하는 오로지 다수의 복지에 삶을 건 사람”을 매우 예외적인 현상이라는 입장을 걸고 이를 긍정한 바가 있습니다. 사회적인 측면에서 이런 사람들을 지켜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라는 말과 함께 말이죠. 이렇게 개인의 이익과 쾌락을 배제하고 다수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과연 자신의 도덕적 원리에 비롯된 것인지 개인적으로 궁금하기도 했습니다만 공리주의는 어찌됐든 그 결과에 집중하는 원리로서 큰 틀에서 앞선 행동을 이끈 개인의 의지 내지는 요인보다는 그런 행동을 한 개인이 얼마나 사회의 복지를 이끌어냈는가라는 측면의 결과에 집중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쯤에서 밀의 개인의 도덕적 관념 내지는 원리를 과신하지 않는 입장이 수긍되었습니다. 우리가 꼭 도덕적 양심을 통해 이해하지 않더라도 각 개인들은 “우리가 이미 전반적으로 어떤 종류의 행위가 유익하고 해로운지를 잘 안다”고 언급하며, 양심을 비롯한 내적 제재를 염두해 둔 행위의 검토는 사실상 경험과 취득을 통해 이해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즉, “밀 자신은 우리가 도덕적 감정들을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서 얻는다고 믿는다”는 저자의 이해도 이와 비슷한 관점이라 여겨집니다.

마지막으로 정의라는 관념에 이르러 개인의 행복 추구와 쾌락의 산출에서 이 정의라는 부분이 어떤 식으로 이해되어야 할지에 대해 밀은 밝히고 있습니다. “정의나 불의의 경우를 보고 사람들이 느끼는 주관적이고 정서적인 감정이 행복의 증진이나 불행의 예방을 보고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과 다르다는 점을 인정한다” 밝히고, 이런 정의감이 공리의 관념에서 생겨나지 않는다는 점을 이해하고, “그는 도덕적인 감정이 공리에 의존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점은 해석의 확장된 측면에서 새로운 사회 계약을 주창한 존 롤스와는 상반된 입장이기도 합니다. 또한 밀은 “정의의 관념 또는 정의감은 공리나 행복의 관념과는 구별되는 듯이 보이며 때로 이들은 상충하는 듯도 하다”고 덧붙입니다. 즉, 정의는 개인의 이익 추구를 단순히 제재한다는 것 보다는 개인들의 법적 및 도덕적 권리를 침해하지 않기 위한 명제로 작용한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부분에서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개인의 자유와 공리주의자들의 공리가 얽히는 듯 보이며, 저로서도 다수의 개인들의 권리를 위해 정의를 세우고 필요하다면 자유의 제한이나 법적인 제재 또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초창기 사회 이론과 그 맥을 함께하는 것으로 아마 많은 학자들이 이에 동의하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타인의 권리들을 침해한 개인들에 대한 보복 감정은 그것의 대응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밀은 개인의 보복 감정과 법적인 제재 나아가서는 사형수들의 마땅한 사형 언도를 긍정한 바가 있는데요. 대체로 많은 공리주의자들이 법과 제도를 신봉하는 것으로 보여지는데 기본적인 개인의 양심이나 내적 제재가 자신들의 부정의한 행위를 완벽히 제한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보여집니다. 개인의 이익추구나 자유의 보장이 과연 법과 제도에 우선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대해서도 많은 논란이 있겠습니다만 사실상 공리적 원칙이 가장 필요한 부분은 바로 여기가 아닐까 개인적으로 이런 인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웨스트의 이 책은 단순한 해제를 넘어 개인의 행동이 사회적으로 어떤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느냐와 그 행위의 요인과 정당성의 문제라든지 그 결과에 따른 이해를 밀을 통해 여러 면에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지막 3장에서 “전체의 선이 사회 전체의 복지가 아니라면 어떻게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은 밀이 밝히는 정의감에 포함된 도덕적인 것이 반드시 전체의 선일 필ㅇ는 없으며,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위한 규칙이라고 여기는 꽤 절충된 주장의 한 단면이기도 합니다만 과정과 결과의 도식적인 이해를 통해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야만 하는 당위적 주장에 회의하는 입장일 수도 있겠습니다. 과정이 좋지 않은데 결과는 좋았다는 문장이 과연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일종의 실마리를 한 철학 교수가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더욱 조만간 밀의 공리주의가 현대의 우리에게 더 필요해지는 이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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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새판짜기 - 세계화 역설과 민주적 대안
대니 로드릭 지음, 고빛샘.구세희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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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세계 경제학계에서 꽤 이단아로 지칭되는 대니 로드릭은 하버드대를 거쳐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각국의 공공 정책을 비롯한 세계 거버넌스 연구에도 관심을 갖은 경제학자입니다. 그에 관한 다른 수식어로 자주 언급되는 것이 국제정치학자라는 다른 일면인데요. 물론 오늘날에는 국제정치학이 세계 경제학과 많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이 양자간의 학문적 경계를 일부러 나눠 구분하는 것은 사실상 의미없는 일이 되기도 했습니다. 일례로 그가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의 국제정치경제학 교수로 일하는 것도 앞선 부분과 비슷한 맥락이 아닌가 추측합니다. 맨 처음에 제가 학계의 이단아라고 지칭한 것에는 그가 터키 출신의 일반 주류 경제학과 다른 범위의 학자이기 때문인데요. 더욱이 요즘에는 그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장하준 교수와 비교되기까지 합니다. 그런 연유로 경제학계에서 장 교수와 대니 로드릭은 서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얼마전에 서평을 썼던 ‘그래도 경제학이다’에 이어 두번째로 쓰게 되는 글이기도 합니다. 이 책의 원제는 ‘The Globalization Paradox’로 지난 2011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도 같은 해에 번역 출판되었으나 현재는 절판된 상태입니다. 출판사의 사정이 있겠으나 개인적으로는 이 책이 왜 절판되었는지 아쉽기도 한데요. 곧 개정판 형식으로 새로운 판본이 다시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원해 보겠습니다.

얼마전에 폴 크루그먼도 짧게 언급했듯이, 현재 세계는 “하이퍼-글로벌라이제이션’의 명백한 현실적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이 하이퍼글로벌라이제이션 (대니 로드릭의 이 책에 씌여진 단어대로)은 간단히 ‘과다 세계화’ 혹은 ‘과도한 세계화’ 등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이보다 더 예전에 경제학자 토머스 프리드먼은 “소위 통합된 세계가 경제 성장에 더 이롭고 확실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바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프리드먼은 맹렬한 신자유주의자이기도 한데요. 이 발언과 관련해서도 대니 로드릭은 급격히 통합된 세계가 세계 경제 성장에 도움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세계화의 명과 암에 대해서는 거의 명확한 것이고 자본의 거침없는 이동성을 제외한다면 다수의 노동자들을 포함한 시민들에게 몇가지 고통을 안겨준 것은 거의 확실합니다. 사실 저의 호기심 반 궁금증 반 정도 되는 의문이기도 합니다만 과연 경제학이 인류의 복지 증진과 삶의 향상에 어떠한 태도를 갖고 있느냐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이 점을 오로지 경제학의 기준으로 사회를 재구성 할 수 있느냐와 여기에 정치를 제외하고 위의 이상을 실현시킬 수 있느냐에 대해서도 저는 꽤 많이 집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니 로드릭의 이 책은 저의 질문에 대해 어느 정도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는 일종의 쓸 만한 자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세계는 지난 2007년 뉴욕 발 세계 금융 위기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신자유주의적 담론이 철회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철회되기는 커녕 이 신자유주의 이념이 변조 되었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시장의 붕괴를 위해 시도된 이 정부의 개입이 마땅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심하게 말하면 안면몰수하는 발언을 이어왔기 때문입니다. 물론 시장의 공적인 위치를 위해서 그 붕괴를 수수방관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어찌됐든 그런 ‘시장의 도덕적 해이’를 끄집어 냈던 누리엘 루비니 교수의 지적은 하나도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총 12장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는 430여페이지의 분량은 전체적으로 단일한 세계 경제사를 수렴한 글이면서 동시에 초기에 형성된 자유무역 이념과 제국주의 시대의 영국 경제와 신자유주의를 거쳐 극심한 폐해를 안기고 있는 하이퍼글로벌라이제이션을 넘어 최종적으로 건전한 세계화를 향한 결론에 이르러 글은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현재의 세계는 “민주주의, 국민국가, 세계화라는 세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기 불가능한 상황에 놓여 있으며” 초기 경제학에서 애덤 스미스가 정부를 자의반 타의반 야경 국가로 해석한 이후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과 ‘비교우위론’에 입각한 자유무역과 무역 헤게모니에 이르는 자유 시장 경제의 기조가 세계 경제의 큰 틀로 자리매김해 왔습니다. 소위 워싱턴 컨센서스로 불리우는 흐름은 브레턴우즈체제 이후 GATT와 WTO체제에 이르러 이 신자유주의적 경제 기조를 세계 자유 무역의 방향타로 이어져 왔는데요. 여기에는 세계 금융의 자유화와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골자로 한 ‘새로운 자본주의’가 이식되고, 금융 자유화 및 자유 무역이 몇십년간 견제와 비판을 당하지 않은 채 우리의 민주주의를 경제 논리로 소급해 온 것이 사실로 드러나기에 이릅니다. 저자인 대니 로드릭은 이러한 기존의 신자유주의적 정체를 다시 ‘민주적 관행’을 포함한 국민국가가 민주정치의 주요한 처소로 다시 회귀하는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이 책의 중요한 문제 해결의 인식적 틀이며, 국민국가의 민주주의가 매우 중요한 시점이라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신자유주의를 선도해 온 앞선 금융 세계화는 “자유 무역과 기술 진보의 비교는 우리를 현혹시킬 수 있다”는 주장처럼 최근에 등장한 최신의 금융 기법으로 무장한 경제 엘리트들이 과거 많은 학자들이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기술 관료들이 대두하며, 정치를 밀실정치 내지는 정실정치로 왜곡시킬 가능성에 경고했던 것처럼 이 새로운 엘리트들이 결국 도덕적 해이로 결론남에 따라 국가를 비롯한 사회 전반에 해를 끼친바가 있습니다. 그런 과정에 미국 정치는 과도한 금권 정치에 놓여 있는 것이며, 특히 이 글의 5장이 이를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금융 시장이 오작동 할 때’라는 소제목이 절묘한 매치라고 드는 이유라고 여겨집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도 대니 로드릭은 민주적 거버넌스에 입각해 세계 금융 체제에 대한 민주적 규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는데요. 다만, 현물 경제와 관련하여 수출 지향적 경제와 자본 자유화 및 금융 자유화는 별개로 이해해야하며, 맹목적으로 수출 지향적 경제로 말하여지는 각국의 활발한 무역 활동이 이 금융 자유화를 일정 부분 촉진시켜 왔다는 것에는 진지한 연구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특히 로드릭은 이 글에서 개발도상국들의 경제 발전과 관련된 조언에 대해서 일찍이 알렉산더 해밀턴이 파악했던 바와 같이 “정부 지원 없이 현재 산업을 부흥시킬 수 있다는 믿음은 잘못되었다”는 문장과 더불어 1960년대 경제 성장의 길에 들어섰던 동아시아의 한국과 대만의 정부가 주도한 수출 보조금과 80년대 이후에서나 유치 산업을 위해 시장 개방을 늦췄던 것과 같이 마냥 자유무역에 기반한 개방 경제가 무조건 경제 성장을 답보하는 것은 아니라고 반론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남미의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사례에 이어지는 것으로 최근 중국의 경제 성장과 마찬가지로 수출 주도 기반의 최소한의 제도적 및 현실적 안전장치가 있어야만 한다고 보는 것과 비슷합니다. 물론 여기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한국 정부와 대만 정부가 일관된 목표를 갖고 정부의 개입이 있었으나, 이것은 경제 성장의 알파와 오메가의 전부가 아니라 당시 미국과 유럽이 주도하는 세계 경제 체제하의 자유 무역 기조가 일정 부분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혜택이 되어 왔던 것은 부정해선 안됩니다. 반대로 갓 식민지에서 독립한 아프리카 대륙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국가 경제 발전에 실질적으로 관심을 두기 보다 오로지 권력 유지에 신경 썼던 연유로 로드릭이 언급하는 모리셔스의 예를 제외한다면 오늘날 아프리카 대륙이 근 오십 여년간의 실패에 놓여 있는 것은 한국과 대만과 극명하게 차이나는 부분이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끝으로 노골적인 금융 자유화 및 자본의 이동에 대해서 ‘각국의 법인세 제도를 존중하고 유지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무역체제와 더불어 국제 금융 체제는 국제 경제 활성화보다 각국의 경제 상황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신념이 더 중요하다’고 재차 주장하고 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무역자유화가 국가들의 자본 통제를 더 어렵게 만들었듯이 시장 전반의 합리적 기대가 완벽하리라는 것을 맹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 ‘건전한 세계화’의 전제 조건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며, 원천적으로 인간이 시장과 자본의 귀속물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대니 로드릭이 말하는 ‘신세계화의 논리’를 끝으로 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1. 시장은 거버넌스 체제에 깊이 착근되어야 한다
2. 민주적 거버넌스와 정치 공동체는 주로 국민국가 내에 조직되며, 가까운 미래에는 그 상태에 머물 것이다
3. 번영으로 가는 ‘단 하나의 길’은 없다
4. 각 나라는 저마다 자신의 사회적 합의, 규제, 제도를 보호할 권리가 있다
5. 어느 나라든 자국의 제도를 다른 나라에 강요할 권리는 없다
6. 국제 경제 협정의 목적은 각국의 다양한 제도 간의 접촉면을 조절하는 교통 법규를 정하는 것이어야 한다
7. 비민주국가들은 국제 경제 질서에서 민주 국가들과 동일한 권리와 특권을 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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