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에 선 민주주의 - 억만장자 코크는 어떻게 미국을 움직여왔는가
낸시 매클린 지음, 김승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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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자신이 역사학자로 불리길 원한다는 저자 낸시 맥클린은 브라운대학과 위스콘신 대학에서 각각 역사학으로 박사 학위까지 마친 뒤, 노스웨스터 대학을 거쳐 현재 듀크 대학에서 역사학 및 공공정책학 교수를 역임하고 있는 여류 학자입니다. 특히, 이 책은 공공선택과 지대연구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제임스 맥길 뷰캐넌과 그의 사상적 행적을 치밀하게 탐구했는데요. 여기에 더하여 뷰캐넌과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은 미국 내 비상장회사 가운데 두 번째 순위에 있는 코크 인더스트리의 찰스 코크의 행적 또한 상세히 담고 있습니다. 본격적인 글에 앞서 뷰캐넌과 코크 이 두 사람은 정부가 개인의 자유에 반하는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인식하고 기업인들과 부유층에게 과도하게 매기는 세금과 이와는 반대로 정부에서 보장하는 사회보장제도 역시 인간 자유의 측면에서 대표적인 해악으로 여기는 등의 입장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입장을 뷰캐넌의 표현대로라면 “사회보장제도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긴 해도 그것을 대놓고 솔직히 반대하는 것은 ‘정치적 자살’이나 다름없다”는 취지의 내면과 현실의 반대되는 역설을 실질적으로 정부를 사실상 무력화시키고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이 진정한 자유를 향유하기 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두 사람의 과거를 저자는 비판적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 2017년 출간된 이 글의 원제는 “Democracy In Chains”로 국내에는 가장 최근인 2019년 11월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흔히 좌파들에게 가장 공격 받는 경제학자로 일컫는 제임스 맥길 뷰캐넌은 노벨 경제학상 수상 당시 “시골 공립학교를 다니고, 지방의 교육대학을 나오고, 기득권 대학과는 아무 연고도 없고, 학계에서 유행하는 온건 좌파 이데올로기를 공유하고 있지도 않고, 전적으로 비주류인 주제를 연구하고..” 라는 소감을 밝힌바가 있습니다. 저자인 맥클린도 뷰캐넌이 젊은 시절에 소위 아이비 리그 출신들에 대한 반감과 방어기제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고 언급합니다. 아주 단순한 개인사에 입각해 그가 노골적인 자유주의 (특히 가진자들과 기득권들을 정부가 수탈한다는 감정을 가질 정도로)에 경도된 것은 스스로 홀로 일어선 사람이기도 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이처럼 어려운 가운데 자신의 손으로 어떠한 성과를 얻었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극심한 반감과 혐오를 갖게 되기도 하는데요. 제가 이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그가 ‘외눈박이 학자’처럼 그저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 경제적 자유와 시장에 정치를 투영시키려는 정부를 반대하고 그외의 다른 가치적 자유에 대해서는 거의 냉담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를테면 그는 칠레 피노체트 정권에 기득권과 부유층에 유리한 헌법 개정을 조언하고 관여했으면서도 사실상 다수의 칠레 시민들의 자유에 대해서는 거의 무감했다는 것이 이를 반증합니다. 푸틴 치하의 러시아처럼 피노체트 치하의 칠레에서 신음한 다수 시민들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었고 어떻게 민주주의가 그들로부터 박탈당했는지 학자가 아니라도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음에도 그런것에는 관심도 없었다는 것이 저에게는 꽤 충격이었습니다. “뷰캐넌과 몽 펠레린 소사이어티 학자들이 칠레의 군부 독재 정권이 저지른 일을 어떻게 그토록 쉽게 자신의 임무와 융화시킬 수 있었을까?” 라는 매클린의 질문은 이처럼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요즘같이 학문의 진정성이 결여되어 가는 시대라 할지라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이자 학자인 사람이 공익과 시민의 자유에 저렇게 노골적으로 냉담하기 어려운 것인데, 하물며 과거, 전세계 상아탑의 본산이라 일컫는 미국 대학에서 자리를 잡은 학자가 기본적인 양심도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태도를 보인 것은 저자인 맥클린이 뭔가 잘못 본 것이 아닐까 믿고만 싶을 지경입니다.

초기에 뷰캐넌이 관여했던 몽 펠레인 소사이어티의 기조 역시 “정부가 나의 재산권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입장의 이른바 경제적 자유주의였습니다. 훗날 시카고 경제학파와 더불어 신자유주의의 사상적 기초를 닦은 것으로 여겨지는 이 집단은 최종적으로 시민이 경제적으로 정부에 기대는 것을 이론 및 사상적으로 확립시키고 시장 전반에 있어서 기업인들에 대한 전면 재량권과 과도한 세금을 철폐하고 사실상 정부가 야경 국가로 돌아가는 것을 목표점으로 삼았습니다. 결국 1900년 이전으로 국가 시스템을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이들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을 경제적 말살이라는 표현과 더불어 극심히 반대하고 혐오했습니다. 1929년 세계 대공황 이후, 붕괴한 경제 시스템과 사회 기반을 되돌리기 위해 루스벨트 행정부는 소위 부유층 및 기업인들에게 막대한 세금을 물렸던 것으로 유명했고, 당시 내각의 구성원들이 거의 기득권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습니다. 뷰캐넌 역시 이러한 시각에 동의하고 있었고 경제학 전반에서의 ‘지대 추구 이론’을 밝혀냈음에도 기업들이 법적 그리고 정치적 수단을 통해 좀 더 이익을 추구하려는 행태에 대해서는 별다른 평가가 없던 것으로 보아 앞선 해석들과 더불어 뷰캐넌이 어떠한 사상을 견지하고 있었는지 짐작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그가 초임으로 근무하던 버지니아 대학의 경제학과 당시 공립학교들의 흑백 통합 분위기에 리틀록에 공수부대를 투입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비난하면서까지 인종주의적 차별 의식을 보이는 것 또한 정치역사의 진보를 믿는 우리라고 하더라도 심히 뜨악한 장면입니다. 그가 근무하던 대학의 버지니아 주는 보수주의자인 해리 버드의 영향력에 있던 소위 귀족주의적 분위기였습니다. 거의 이 글 전반을 장식하고 있는 ‘주의 권리 state’s right’는 국가 차원의 정책에 있어서 연방 정부의 관리를 받는다기보다 각각의 주들은 스스로 통치할 권한이 있으며 또한 주마다 각각의 상황이 있다는 인식을 넘어 ‘연방정부가 일일이 관여할 수 없는 배타적 권리’를 표방합니다. 마찬가지로 뷰캐넌이 그토록 혐오하는 ‘집합주의’에 대해서도 과거 파시즘 시대에서나 통용될 만한 인식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목소리를 합쳐 정부에 이래라 저래라 하는 대중 다수를 몰아 비판한 것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약간 조심스러운 내용이지만, 일반적인 보수 다수와 극우들을 포함한 이들이 민주주의를 명목상의 수단화로 삼아 겉으로는 민주주의에 대한 표상을 밝히고 있지만, 결국 이들이 원하는 것은 경제 및 정치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과두 정치가 아닌가 의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들이 단순히 민주주의를 배격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주도하는 정치와 이들의 다수결 및 의견 개진을 소수의 기득권들과 기업인들이 이를 신뢰하지 않으며, 이러한 가운데 뷰캐넌 역시 ‘대중의 반역’의 오르테가 이 가세트와 공감했던 것도 이를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1980년대 이후, 미국의 사회 정치적 상황이 이런 ‘경제적 자유’에 반하는 토대였냐고 반문해 본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고도화 된 금융 기법이 발달하고 미국 내 경제 활동에 대한 보장, 이를테면 아직도 기본적인 노조 활동이 어려운 주들이 태반이고 고소득층에 대한 꾸준한 세금 감면과 세금 혜택 및 변호사들과 회계사들을 비롯한 이들을 갖은 방면에서 지원하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어 이 부문만 봐도 저는 ‘경제적 인간으로서의 자유’는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2008년 뉴욕 발 금융 위기에서는 리먼 브라더스를 제외한다면 거의 대부분의 금융 기업들이 구제를 받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도 사회 시스템을 재구축하고 심지어 헌법을 개정하면서까지 자신들이 원하는 정치사회적 체제를 만드려고 하는 것은 뒤의 헌법 개정 시도 만으로도 충분히 반민주적인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건 모든 정치인들이나 기업인들까지 자신의 면전에 ‘반민주주의자’라는 딱지가 붙는 것을 매우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뭔가 아이러니가 아닐까 합니다.

글 초입에 낸시 매클린은 2013년 세상을 떠난 제임스 M. 뷰캐넌의 자료가 담긴 문서들이 방치되어 있던 것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어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제임스 뷰캐넌의 전기를 쓰려고 한다는 찰스 K. 롤리는 과연 뷰캐넌에 관해 어떠한 기록을 쓸지 매우 궁금합니다만 다수의 권리나 (기본적인) 이익을 악으로 표명하고 소수의 경제인들과 기업 경영자들의 배타적 권리와 자유에 힘쓴 이 노벨 경제학자의 실체가 뒤에 저자의 수많은 주석으로 그 근거들을 대고 있는데요. 사뭇 믿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다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뷰캐넌과 코크가 추구한 그 ‘자유로운 사회’는 자유를 누릴만한 자격이 있는 자들만의 자유였으며 일반적으로 대중 기반에 있는 민주주의를 사실상 불신한 것으로 취급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한 학자의 행적을 낱낱이 밝힌 책의 진정성은 충분히 값어치가 있다고 볼수 있겠죠. 그리고 이러한 외눈박이 학자가 자신의 신념을 사회와 정부로까지 확장시키고 현실화하려고 했다는 것은 실로 불행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1. 102페이지에 오타 한 곳을 발견했는데, 책의 값어치와 내용을 고려 한다면 실로 아쉬운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2. 루트비히 폰 미제스와 관련된 성명 표기가 이 글에서는 “루트비히 폰 미제스로” 로 되어 있더군요. 처음에는 오타로 표시했는데, 나중에 5번 정도 반복해서 나오더군요. 외래 성명 표기여서 구글을 포함한 몇 군데 포탈에서 검색을 해봤지만 ‘미제스로’라는 표현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영문 표기도 Mises인데, 제가 모르는 오스트리아식 독일어 표현 방법이 있는지 모르겠군요. 일반적으로 ‘미제스’로 알려져 있는 것은 거의 반박할 수 없는데요. 이 부분도 가능하다면 편집자 내지는 출판사의 입장을 듣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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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andante 2019-12-01 20: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운 책이군요. 대한민국에도 공공선택론의 세례를 받고 돌아온 학자들이 학계에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하이예크나 미제스처럼 알긴 알아둬야 할 사람인 듯 합니다...

베터라이프 2019-12-01 22:46   좋아요 0 | URL
당시에 뷰캐넌이 고안한 이 공공선택론이 꽤 이론적으로 중요했다고 매클린도 인정하고 있더군요. 마찬가지로 그가 학자로서의 명성과 성취에 비해 사회실천과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상대적으로 부족했다고 평하면서요. 매번 느끼는 거지만 하이에크의 그림자는 너무나 크고 오래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뷰캐넌의 공공선택론에 대해 어떤 숨은 맥락을 갖고 접근하는 것이 음모론에 가까울수도 있지만 이와 관련하여 몇군데 기사를 좀 찾아봤지만 뷰캐넌은 확실히 정부가 사용하는 비용과 지출에 있어서 꽤 비판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공공비용과 관련된 논의와 사회보장제도와 연관된 지출 등 이런 것들이 민영화되지 않고 정부에 의해 관리되는 것이 그 자체로 시장을 억압하는 것으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저의 짧은 해석은 대충 이렇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 하여튼 댓글 감사드립니다.

sejongbook 2019-12-12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세종서적입니다.
저희 책을 구매해주시고 수정사항을 알려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다.
추후에 재쇄를 찍을 때 알려주신 수정사항을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저희 도서에 많은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진보의 대안 - 자본의 민주화와 역량증진 정치
로베르토 M. 웅거 지음, 이병천.정준호 옮김 / 앨피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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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출신의 저명한 정치인이자 정치철학자인 로베르트 M. 웅거는 29세 때, 하버드 로스쿨의 종신교수의 직을 허락받았을 정도로 학계에서도 학문적 역량을 인정받기도 했습니다. 특히 웅거의 글과 관련하여 이 책의 옮긴이 서문을 작성한 이병천 교수도 그의 글이 다른 학자들이나 지식인들과 달리 힘이 느껴진다고 했다는 것에 저역시 동의하게 되었는데요. 병약해진 전세계 민주주의에 대한 혁신적 개선과 치료를 주장한 그의 ‘민주주의 넘어’를 읽었을때도 방대한 분량이었지만 직관적인 논법에 절로 수긍이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그의 또다른 이론적 동류로서 좀 더 대중적인 이 책이 번역이 된 것은 실로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난 2009년에 원제, “The Left Alternative”로 처음 출간되어 독일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 번역되었고, 국내에는 최근인 2019년 11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책과 관련해 한가지 이해가 안되는 부분은 원래 국역된 제목이 ‘좌파의 대안’으로 인쇄가 되어도 될 법한데, 진보라는 단어로 대체한 것은 책에 대한 독자들의 원만한 접근을 위한 시장주의적 의도인지 아니면 출판사의 자기 검열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미 인민 주권과 관련 ‘인민’이라는 번역을 본문에 사용했음에도 왜 좌파라고 명확히 제시하지 않은 것인지 의문입니다. 더군다나 본문에 진보와 좌파가 동시에 등장하는데, 여기서 원래 좌파 The Left를 그냥 진보로 번역했는지 약간 의구심이 드는데요. 뭔가 이래저래 아쉬운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군요.

저자인, 로베르트 웅거는 스스로를 ‘민주적 평등주의자’로 읽혀지는 것을 선호하는 모양입니다. 이 표현이 조금 이상해보입니다만 민주주의의 평등의 원칙이 바로 서야 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그의 진실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책의 (수정된) 제목대로, 우리는 과거 마거렛 대처가 부르짖었던 ‘신자유주의 말고는 달리 대안이 없는’ 정치경제적 일방주의의 이념이 강요된 세계를 인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웅거는 2008년 미국 뉴욕발 세계 금융 위기를 거쳐 신자유주의가 그 실체를 잃고 말았다는 것에 일정 부분 동의하고 있지만, 분명 신자유주의가 철회되거나 재구성된 것은 아니라 말할 수 있습니다. 조지 W. 부시 정권 이후 등장한 버락 H. 오바마 정권이 이러한 사태를 초래한 금융인들을 어떠한 법적 기소 없이 놓아주고 심지어 공적 자금으로 이들이 은퇴 자금 놀이를 한 것을 그냥 수수방관 해버린 점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때 사실상 신자유주의는 종말을 고했다고 봐야 했으나, 웅거가 일침하는 대로 경제적 합리성을 맹신하는 일관주의적 입장에 의해 신자유주의에 대한 전반적인 반성과 재조정이 아직도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웅거는 “세계 경제의 구조적 불균형에 맞서 이를 극복할 필요성으로 금융과 생산 관계를 조절하는 구조를 재구축할 기회 경제의 회복과 재분배를 동시에 실현할 연결고리 모색의 중요성의 기로에 서있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웅거의 금융 부문에 대한 명료한 대처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제한적인) 한계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제한적인 한계라는 구절이 제가 생각하기에도 웃기지만 확실히 웅거가 금융 시장에 대한 무의식적인 방만을 의도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대안 제시가 약간 부족할 따름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부분을 경제적 불평등의 입장에서 충분한 국내 저축과 소비세 징수로 여건의 개선을 노려볼만 하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만, 특히 소비세 징수 정도에 대한 문제와 이를 위한 과세가 증가하는 것에 대한 저항을 과연 어떤식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에 대한 현실적인 방안이 조금 더 필요한 것은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다시 초반의 문제제기 겸 해결 당위성과 관련해, 진보 내지는 좌파가 신자유주의적 파고의 시기에 왜 실패할 수 밖에 없었는가에 대해 먼저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샹탈 무페의 현실 인식과 상당히 유사한 발언인, “미국을 포함한 전세계의 진보 좌파가 전격적으로 투항해 세계화에 수용되었다”는 점을 먼저 꼽고 있습니다. 반대의 보수 우파가 자유주의적 경제 합리성에 순응해 조절 기능이 없는 자유방임 시장주의에 경도되어 어쩌면 미국의 억만장자 코크와 같은 자들이 자신의 권력과 대중 정치의 불신으로 경제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보수 정치가 민주주의를 병들게 하는 데 일조했던 것도 분명해 보입니다. 사실 사회나 정치 일선에서 가장 기본적인 대안이라는 것은 과반의 힘을 가진 정치 세력을 견제하는 반대의 창의적인 정치 세력이 있어야 함은 매우 자명합니다. 이것과 관련해서도 웅거는 ‘민주주의적 혁신’과 ‘고에너지적 민주주의’ 등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처음 프레카리아트라는 표현이 학계에 등장했을 때부터 전세계의 수많은 근로 노동자들은 숨가쁜 노동에 짓눌려 자신의 삶이 개선되고 좀 더 나은 이상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조차 꿈꿀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현재 미국 사회가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 계급 이동성의 제약, 정치 참여의 감소, 사회적 연결의 악화 등 반 민주적 굴절들이 심화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죠. 달리 말하면 이러한 결과를 초래한 미국의 적당한 시장에 대한 거리두기를 저자 역시 확실하게 비판합니다.

이렇게 웅거가 강조하는 진보 좌파의 역할론과 관련해 일찍이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사회학자인 토마스 프랭크는 “우파는 돈이 되지만, 좌파는 돈이 되지 않는다”는 표현으로 양 정치의 극단적인 차이를 드러낸 바가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경제적 합리화가 부국이 빈국들에게 압력을 가하는 것처럼 강요되어 여기에 합류한 보수 우파와는 달리 진보 좌파는 이념적인 것을 떠나 사회와 시민을 위해 적절한 선택을 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 소극적 대안으로 비롯된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사회 민주주의’가 충실한 재정적 뒷받침 없이 사회화 비용을 과세로 충당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좌파가 어떠한 대안을 명확히 제시하기는 아마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물론 이런 연유로 진보 좌파에게 면죄부를 부여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왜 금권 정치와 경제적 합리성에 매몰되지 않는 꽤 건전한 보수주의는 탄생하지 않았는지 이것을 맹목적인 이념적 강요로 해석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 것도 존재합니다. 즉, 전통적인 정치와 경제에서의 도덕적 가치가 쓰레기통에 들어가면서 사실상 보수와 진보의 대결 문제는 거의 무의미한 논쟁이 되지 않았나 성급히 판단해봅니다. 다만, 이러한 근본적인 가치 문제로 변질되는 대결 구도를 ‘무제한적인 다원주의’가 아니라, ‘개인들이 참여할 수 있는 역량과 의견을 달리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건전한 다원주의’가 이를 치료하고 나아가서는 민주주의 발전에 더할 나위 없는 기여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저역시 깊은 공감을 받게 되었습니다.

최종적으로 다원주의에 대한 태도의 문제는 이졸데 카림이 예견한 바와 같이 ‘적지 않은 고통이 따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일견으로는 다원주의가 꽤 단순한 이상주의로서 쉽게 그 노정이 완료될 것으로 보이나, “사회 통합적 성장에 대한 탐색과 달리, 다원주의에 대한 요구를 정치경제적 대안이 그 효력과 범위에서 보편적이기를 요구하는 것과 모순된 것처럼 보인다”는 로베르트 웅거의 통찰은 매우 귀담아 들을만합니다. 더욱이 그동안 진행된 사회학에서의 자기 합리화와 인문학에서의 현실도피주의 경향은 전반적인 이들 문제의 본질을 가리는 데 부정적으로 기여했으며, 이것은 오로지 미국 내의 현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기조가 전세계적으로 매우 특별하게 진행되어 왔다는 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아주 쉽지만 어려운 해결책의 길은 미국의 세계 경제를 포함한 주도권과 헤게모니를 정상적인 민주주의하에 놓인 국가들과 연대해 국제 정치와 세계 경제를 민주화하는 것이 중요해 보입니다. 그러한 전략과 관련해서도 웅거는 여러가지 선결 조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량이 상당해 이곳에 전부 소개하기는 어렵지만, “기본적으로 시장의 변덕과 정치적 불운에 대처할 수 있도록 기본적 권리와 역량을 보장해야 한다”는 명제로 대체할까 합니다.

결국 전체적인 맥락에서 대안의 수단을 잃어버린 진보 좌파가 대의적인 측면에서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꿈과 희망을 잃고 방황하는 수많은 근로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대변해 나가는 것이 최초의 걸음이라고 웅거는 제시합니다. 시장을 전복시키거나 어떠한 위기 상황의 혁명을 꿈꾸는 진보 내지는 좌파 세력은 그 정치적 선명성을 결코 달성할 수 없으며, 인간의 고유한 양심을 지켜내려는 그 어마어마한 시도와 동일하게 어려운 길에 들어서야 하며, 모든 젊은인들을 정치에게서 멀어지게 한 그 음모론을 불식시키고 모두가 에너지 넘치고 활발한 정치 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진정한 다원주의적 민주주의를 구상하는 것이 이상과 현실에 가장 부합한 해결책이라고 저는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부와 시장 사이의 호혜적 관계 뿐만 아니라 시민과 시장 사이의 호혜적 관계 또한 구축해 진정한 경제와 시장주의의 민주화를 추구하는 것이 다음 세대를 위한 우리의 남은 과제가 아닌가 곰곰히 생각해봤습니다. 더불어 진정 한 사람의 속내 깊은 웅변과도 같은 이 글이 모쪼록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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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장 당신의 SNS 계정을 삭제해야 할 10가지 이유 - 실리콘밸리 구루가 말하는 사회관계망 시대의 지적 무기
재런 러니어 지음, 신동숙 옮김 / 글항아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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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런 러니어는 미국 뉴 멕시코 출신의 유대인 부모 밑에서 자라나 뉴 멕시코 주립대학을 거쳐 컴퓨터 과학자로서 세계 최초로 가상현실을 고안한 인물입니다. 그는 인터넷과 IT 및 네트워크 등에 대한 소위 내부 고발자로 이 부분과 관련해 활발한 저술활동을 해오고 있는 중입니다. 제가 일전에 읽었던 그의 다른 번역 글 “미래는 누구의 것인가”와 유사한 관점에서 ‘광범위한 네트워크 디스토피아’에 대한 경고를 이 책에서도 또한 인지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그동안 미국 내에서는 많은 언론을 통해 페이스 북과 구글이 보이고 있는 미심쩍은 행보에 대해 많은 기사로 알려지기도 했습니다만 특히 러니어의 이 책은 독자들에게 좀 더 주의와 관심환기를 위해 근거와 주제가 꽤 명확한 편입니다. 오늘날 SNS와 네트워크 생태계에 대해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어서 이 점 또한 큰 장점이라 여길만 했습니다. 이 책의 원제는 “Ten Arguments for Deleting Your Social Media Accounts Right Now”로 지난 2018년 출간되어 국내에는 최근인 2019년 5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저자인 러니어가 고안해 글 전체에 중요한 핵심 키워드로 작용하고 있는 ‘버머’에 대해 밝히고자 합니다. 버머는 Behavior of Users Modified, and Made into an Empire for rent 라는 앞 글자를 따서 지칭한 것으로 뜻은, ‘사용자들의 행동이 수정되어 왕국(대기업)을 위해 이용되는 것이라고 나옵니다. 이를 조금 풀어서 해석해보면 SNS를 운영하는 기업의 여타 수익 (특히 광고)을 위해 수집된 빅 데이터를 기반으로 우리와 같은 수요자들의 인식과 행동을 직간접적으로 수정해 나가는 일종의 광범위한 알고리즘을 뜻하는 것인데요. 이것은 현재 전세계에서 독점적 지위에 있는 페이스 북과 같은 소셜 네트워크 대기업이 자신들의 수익을 위해 러니어의 말대로 ‘수요 독점’하에서 사용자들의 인식과 행동을 바꾸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단적인 예로 지난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에 대해 출처가 불확실한 맞춤 정보가 범람함으로서 박빙의 승부에서 어떠한 결과를 초래했는지 명확히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네트워크 상의 수많은 봇들이 거의 러시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꼭집어 밝힌 티모시 스나이더의 사례도 있습니다만 이것을 단순히 음모론으로 치부하기에는 드러난 바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브렉시트와 관련한 국민 투표에서 영국의 이반을 초래했던 수많은 봇들의 허위 거짓 정보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일찍이 파일 공유 서비스 냅스터의 공동 창업자이자 소셜 네트워크 사이트 페이스 북의 초대 사장인 숀 파커는 “(수요자들을) 페이스북이 의도적으로 중독에 빠뜨렸다”고 고백을 한 바가 있습니다. 처음 페이스북과 유사한 서비스가 시작되었을 때 아마도 경영진의 일부는 이를 인식했던 것으로 보이는데요. 저자인 러니어 역시 많은 사용자들의 ‘내적 트롤’이라는 표현으로 현실의 외부 세계에서는 전혀 그런 언행이나 행동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네트워크 안에서는 서슴없이 자신의 폭력성과 가학성을 드러내며, 심지어 타인과의 논쟁에서 오히려 싸움을 걸어 주었으면 하는 기대까지 보이는 이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개인의 내적 자제심이 네트워크 상에서 받고 싶어하는 관심에 밀려 어떻게 무력화되는지 글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총 9장의 SNS의 해악과 관련해 구분된 본 주제들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진실을 파헤치는 데 할애되고 있는데요. 여기에 가장 중요한 해석 수단은 앞서 말씀드린대로 ‘버머’ 입니다.

대체로 “상업적인 소셜미디어 플랫폼은 비용을 줄이고 성과를 높여서 이윤을 극대화하는 데 주로 관심을 갖는다”라고 글에서 언급되는 바와 같이 처음 긍정적인 이상과 개방성을 목적으로 삼았던 인터넷이 기업이 제공하는 콘텐츠를 소비하는 대신 다수의 수요자들을 배경으로 효과적인 광고와 인지 변화를 획책하는 고안된 알고리즘들이 어떻게 사람들을 ‘자유의지’를 박탈시키고 소셜미디어에 맹종하게 만드는지 매우 효과적으로 설득시키고 있습니다. 즉, “사용자의 관심과 집중을 유도하는 데 최적화 된 맞춤형 피트가 각 사용자에게 전달되는데, 이런 맞춤형 피트는 감정에 강력한 자극을 주는 것이 많아서 중독을 유발한다”고 앞선 근거를 대고 있습니다. 제목과 마찬가지로 러니어는 이러한 SNS적 폐해와 관련해서 각 개개인들이 각자의 SNS계정을 삭제할 것을 종용하고 있으나, 이 부분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페이스북’이 종래 이상주의적 인터넷 환경을 발판삼아 독점적 지위에 올라 사실상 페이스북을 대신한 대안이 없다는 점이 결국 계정 삭제 밖에 뚜렷한 해결책이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저자는 각인시키고 있습니다.

최근에 실리콘벨리의 많은 IT 기업들과 트위터를 비롯한 SNS 기업들이 ‘아랍의 봄’에 대해 크게 환호했던 바가 있습니다. 네트워크가 어떤 식으로 우리의 정치에 기여하는지 그것에 대한 희망적인 태도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맥락을 정확히 진실되게 보여주지는 않고 특정 계층에 매우 제한적인 정보만을 접근시키는 수많은 가짜 봇들이 SNS에 범람하면서 미국과 영국 정치에 영향을 끼친바가 있습니다. 과거에 우리는 사회계약론을 필두로 인권과 자유의지를 기반으로 직접적인 인간해방을 달성했습니다. 인간 사이의 어떠한 권력 체계가 인간 이해를 방해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을 기반으로 계몽주의가 꽃 피웠고 그렇게 민주주의와 시민사회를 구축하기에 이릅니다. 여기에 마누엘 카스텔과 같은 학자들은 일반적인 정치와 민주화에 대해 네트워크가 효과적인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다고 예견했으나, 문제는 네트워크 기반 자체가 아니라 오로지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SNS 기업입니다. 지난 미국에서의 대선에서 페이스북은 밝혀지지 않은 허위 계정들을 나서서 삭제한 바가 있습니다만 왜곡되고 선동되어지는 ‘부족주의적 정치’를 어떻게 하면 근절시킬 수 있는지가 SNS 정치와 연계해 가장 큰 정치적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가짜 뉴스를 배포할 권리’가 있는지는 법적으로 표현의 자유에 입각한 문제를 수렴하는 지는 명확하지는 않습니다만 지금의 현실에서 이런 독점 시장 지위를 갖고 있는 SNS기업이 자발적으로 나서기는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 과거 구글이 미국 정보 당국의 협조 공문에 다소나마 저항했다는 사례를 봤을 때 이러한 문제들은 하루 이틀 안에 해결될 문제는 아닌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우리의 (직접적인 동의없이) 지금 이 시간에도 수집되고 있는 데이터들은 조만간 미래의 AI의 역할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지렛대이기도 합니다. 러니어는 이와 관련해 빅 데이터는 (미래의) 인공지능이라고 글에서 경고하고 있는데요. “인공 지능을 인간의 대안적 존재로 받아들여서는 절대 안된다”며 첨언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과학자들과 지식인들은 SNS의 발전이 정치 전반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으로 기대했으나, 현실은 사뭇 다른 흐름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을 정치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한 거대한 음모가 있다고 여겨도 될법한 일들이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죠. 결국 기업의 이익 친화적인 버머의 태동도 두려운 디스토피아가 될 여지를 만들어 주지만 무엇보다도 우리가 진정으로 어떠한 맥락으로 이해되고 표현될 수 있을지 그 귀추가 두려운 것이 가장 큰 문제일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SNS계정을 삭제해야 될 만큼 어떠한 대안을 찾기 힘든 상황입니다만 건전한 인터넷 지향이 단순한 이상주의적 결론으로 쓰레기통에 들어가지 않도록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계몽시키는데 더욱 노력을 기울여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진실 추구의 근본은 자신의 무지를 알아차리는 능력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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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당 세습 - 불평등에 공모한 나를 고발한다
매튜 스튜어트 지음, 이승연 옮김, 이상헌 감수 / 이음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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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보스턴 출신의 철학자이자 저술가로 알려져 있는 매튜 스튜어트는 과거 프린스턴을 거쳐 옥스포드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수여 받았습니다. 그는 스스로 고백하길, 풍족한 중산층의 가정에서 자라나 다른 사람들보다 부족함 없는 삶의 길을 걸었다고 먼저 책을 통해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은 최근에 번역 출간된 리처드 리브스의 ‘20 vs 80의 사회’에서 독자들에게 전한 고백과도 일맥상통한데요. 어찌됐든 이유와 변명을 만들어내는 사람들과는 사뭇 다른 진실성으로도 여겨집니다. 책의 초입에서도 짧게 언급하고 있습니다만, 스튜어트의 이 글은 미국의 시사 월간지 애틀란틱에 실린 글을 따로 번역 출간한 것입니다. 원제는 “The 9.9 Percent in the New American Aristocracy”로 국내에는 최근인 2019년 10월에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우선 저자인 자신을 포함해 책에 함께 등장하고 있는 미국의 9.9 퍼센트 계층에 대해 소위 능력자 계층 meritocratic class 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리처드 리브스나 마틴 길렌스와는 달리 일반적인 중산층 개념으로 설명하지 않고 능력자 계층이라는 조어를 글에 담고 있는데요. 이것은 의사와 변호사들을 포함한 고학력의 능력있는 화이트 칼라를 이르는 말로도 해석이 가능합니다. 특히, 스튜어트는 “우리는 우리의 성공으로 인한 희생자들을 단순히 능력이 모자란 탓에 우리 계층에 진입하지 못한 사람들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분석을 덧붙입니다. 좀 더 달리 표현하자면 마찬가지로 어느 부모에서 태어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결정되고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그 보편적 권리를 향유할 정당성이 있다면 현재 벌어지고 있는 미국의 조세 제도에서 이들(능력자 계층)에 대한 과도한 혜택 등과 같은 불평등이 이뤄지고 있는 상황이 단순한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만, 그동안 여러 사회학자들이 분석하고 연구한 사회적 계급의 분화와 반대의 고착화와 같은 부분에 어떠한 기준을 놓고 단정지을 생각은 없습니다만 초기 자유주의 시대의 많은 자유주의자들과 지식인들이 자본주의 자체가 건전한 계급 이동을 용인하고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그 자체가 자본주의 사상의 핵심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계 최대의 불평등 국가인 미국과 같은 사례에서 저자 역시 동의하고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선명한 계급 이동성’이 차츰 무너지고 있으며, 이러한 복잡한 과정의 실체가 극심한 정치적 양극화를 초래하지만 이 선상에 놓인 현상 자체는 단지 불평등의 심화가 가시화 된 것 뿐이라는 저자의 통찰은 새겨들을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들 소위 능력자 계층의 가장 큰 문제는 “우리는 침묵을 지키며 집단적으로 불평등을 선택했다”는 자기 고백입니다. 사실상 사회 구성원으로서 각 개인들의 능력차는 어쩌면 개성과도 같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능력차에 따른 급여 차이와 직장 선택의 문제는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 치더라도 저자가 다소 직접적으로 밝히는 바와 같이, “미국에서 대졸과 고졸의 임금차이가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크게 나는 것은 대졸과 고졸이 할 수 있는 일이 애초에 다르기 때문”이라고 언급합니다.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기 때문에 짧게 첨언을 한다면, 최상위 대학 출신자들을 우대하는 일반적인 기업 정책들이 과도화되고 대학 이후의 사회적 재교육이 대체로 전무하거나 접근이 어려운 것에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든지 정부의 역할 분담에서 사회 현실이나 경제적 조건 등 여러 요인들을 차치하더라도 일차적으로는 책임이 있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특히 저자도 밝히고 있거니와 “이런 전문직종이 포함된 능력자 계층들이 속한 직업 단체들이 결사의 권리를 이용해 급여 획득과 사회 영향력을 위해 행동하는 것은 그것을 공익적 목적이라 이해하고 그렇지 않은 다수의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생존과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결사는 그 반대로 취급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 글에서는 “맹비난 받는 생산계층”이라는 표현으로 노동자 계층에 대한 도넘는 미국 내의 비난을 제시하고 있는데요. 참으로 고착화 된 계급 폐쇄성과 더불어 경제적 불평등이 어떤 식으로 사회를 분열에 이르게 하는지 알 수 있게 합니다. 약간 결론에 어울리는 말이긴 합니다만 경제적 불평등과 수많은 노동자들의 현격한 착취 문제와 관련해서는 그것 자체가 건전한 민주주의 시스템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많은 사람들이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이 한탄스럽습니다. 따라서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고 대물림 하려는 의도를 단순히 개인적 호불호 정도로 넘어가지 말고 전반적인 사회 시스템의 개선이 시급히 필요한 것도 크게 보면 우리의 정치 문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미국의 상황은 우리와는 적잖은 차이가 있을 겁니다. 여러 수치로 봐도 우리의 불평등 상황은 외연적으로는 심하게 보이지 않기도 한데요. 다만, 미국은 조세불평등과 관련된 문제에서는 시급한 개선이 필요하고 “현재 미국 GDP 중 12분의 1은 금융 부문에서 발생한다”는 저자의 자료를 보더라도 금융 부문에 대한 조세 감시와 재설정이 있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최종적으로 이러한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일들이 지속되다 보면, “서서히 경제의 목을 조르며, 민주주의를 말살하게 된다”는 예상이 현실과 아주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또한, 최근에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 정치 전반이 반지성주의와 비이성에 휩싸여 정치 자체가 건전한 미래를 보장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1에서 부터 10까지 이어지는 과정은 앞서 언급한대로 이 능력자 계층들이 스스로 불평등 문제에 침묵하고 이러한 상황을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이익의 보장으로 여겼다는 것이 문제일 것입니다. 정부나 공공부문이 모든 사회 문제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고 미국인들이 스스로 ‘아메리칸 드림’을 소중히 여긴다면 단순히 푸드 스탬프를 능력 밖의 사람들에게 남발할 것이 아니라 과도한 일부 계층에 대한 경제적이고 지위 강화적인 정책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여기서 거듭 중요한 것은 정치적 불신과 사회 분열에 놓여 있는 이 상황의 요인들을 각각 따로 놓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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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타자들 - 우리는 어떻게 타자를 혐오하면서 변화를 거부하는가
이졸데 카림 지음, 이승희 옮김 / 민음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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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졸데 카림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태인 여성 철학자이자 언론인으로 비엔나와 베를린에서 철학을 전공했으며 이후 비엔나 자이퉁의 프리랜서 기자 및 칼럼니스트로 명성을 얻기도 했습니다. 특히 그녀는 외르크 하이더로 대표되는 오스트리아의 극우 포푤리즘에 반대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는 양심적 지식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파시스트적이고 반유대주의적인 정치 공세에 반정부 시위를 주도하는 등, 오스트리아 국내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런 그녀의 정치적 실험과 맞닿아 있는 이 책은 원제 “Ich Und Die Anderen”으로 지난 2018년 출판 되었고, 국내에는 2019년 3월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우선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개인적으로는 이졸데 카림의 이 책은 과거에 읽었던 에티엔 발리바르의 “우리, 유럽의 시민들?”이라는 책의 꽤 훌륭한 답변으로 여겨졌습니다. 전 유럽에 만연하고 있는 인종주의적 반이슬람주의에 대한 문제제기로서 시작된 우리, 유럽의 시민들? 은 그 결론과 앞으로 나아갈 길의 납득할 만한 해결책과 대안이 마련되지 않았던 것을 감안한다면 카림의 이 글이 그것을 채워넣는데 정치사회학적으로 적절한 보탬이 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생각은 또 어떠한지 몹시 궁금하기도 합니다.

카림은 글이 시작되는 도입에서 계몽의 근대 이후 개인주의적 세대의 구분으로 1세대부터 2세대, 3세대의 시기적 근거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보편적 권리를 가진 수많은 개인들의 이 개인주의가 태동했던 옛 1세대부터 1960년대에 다소 성격이 변화된 2세대, 그리고 오늘날 어떠한 권위와 권위주의를 거부하며 정치사회적인 방어적 태도를 보이는 3세대까지 곳곳에서 피터 버거의 영향을 받은 그녀를 엿볼 수 있습니다. 더불어 로버트 달과 찰스 틸리가 ‘벌거벗은 민주주의’에 대한 해결책으로 여겼던 다원주의 및 다원성에 대한 당위성을 앞의 개인주의적 여건과 시대 상황에 근거에 꽤 일목요연하게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즉, 우리의 민주주의에 왜 다원성이 중요한 가치인가에 대한 대답을 저자인 그녀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죠.

또, 한 가지 여기에 민족의 형성과 민족주의 담론에서 출발해 비교적 성공적인 안착에 이르렀던 민족과 민주주의와의 정치적 상호 관계와 최근에 전유럽에서 보여지고 있는 이슬람 이주민들의 이민 행렬이 근대적인 민족 개념의 민주주의 정치를 허물어뜨리고 있는 상황을 제법 내면화된 목소리로 밝힙니다. 민족이 과거와는 달리 그 영향력을 실종했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의 입에서 민족이 전언되고 그것을 새로운 대두라고 일컫는 것은 꽤 설득적입니다. 이에 좀 더 첨언을 하자면 민족이라는 개념이 각각의 민족에 속하는 이들의 정치적 각성을 불러일으켜 한울타리로 동질성과 공감대를 만들어 근대 국가의 형성 및 민주주의의 발전에 이바지 했다면 근래 ‘액체 민주주의’로 이반하고 뒤이어 국민의 개념까지 모호해지는 것으로 봤을 때, 민족의 허물어짐은 그 영향이 실로 지대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자인 그녀 역시, “민족 정체성은 다원화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자신의 정체성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경험이 다원화의 시작이다”는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짚고 넘어거야 할 점은 “원천적인 다양성은 기분좋은 공존이 아니다”라는 전제입니다. 다양성에 따른 다원주의와 다원정치가 실상 모두를 만족하기는 어려우며, 개인주의화 된 각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조금씩 덜어내고 타자를 좀 더 이해하기 위한 노력과 동질성을 강요하지 않는 객관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통합은 동화가 아니다”는 명제가 이를 반증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꽤 이채롭게도 제 3세대의 개인주의는 사실상 자기 방어적인 기재로서 다원화에 반대하는 입장을 소극적이든 드러나지 않든 이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분석대로 1세대 및 2세대 개인주의가 그나마 서로 동질성을 갖고 있었다면 3세대의 개인주의는 거의 하이브리드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오늘날 3세대 개인주의적 인간들이 갈망하는 것은 “그렇게 정치적인 것에서도 개인으로서 인정받기를 원한다는 점”일 것입니다. 이것은 일방적으로 가치판단을 할 수 없는 인식으로 정치적인 것에도 개인의 고유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욕구는 마냥 부정당할 것은 아닙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매락 또한 사실상 다원주의와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하지만 이 글의 6장에서 논의되고 있는 포퓰리즘적 정치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에서 알 수 있듯이 분노와 증오를 재료 삼아 자신들의 가치를 다른 사람들과 별개로 여기며, 더 나아가서는 자신 이외의 타인들을 같은 국민으로 여기지 않는 이런 포퓰리즘 정치의 폐쇄성을 고려하면 지나친 것은 분명히 폐단을 낳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저자는 근래 논쟁적인 담론으로 여겨지고 있는 정체성 정치와 정치적 올바름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많은 우파 정치인 및 이들을 지지하는 계층이 이러한 일종의 정치적 정화 운동을 무력화하려고 하는 것은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접근과 태도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그것이 현실에 맞지 않는 시대착오적인 의미임을 강조하기 위함으로 이르고 있습니다. 저자는 좌파의 예를 들어 이 정체성 정치와 정치적 올바름의 과도함을 비판하고 있는데요. 사실 정치적 불신과 분열을 조장하는 정치 세력이 건전한 정치적 이성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보이는지 고찰해 보면 대략 이들이 만나는 지점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분열된 정치 전략에 따라 포퓰리즘적 국면이 나타났다”는 저자의 판단대로 “시민들의 계몽만으로는 포퓰리즘에 대적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하게 됩니다. 실상 완벽한 다원주의적 정치는 마찬가지로 완벽한 민주주의적 토양에서 꽃피울 수 있으며, 현재의 여러 왜곡되고 때로는 각 사회를 분절된 상황에까지 몰고가는 포퓰리즘적 정치 공세에 효과적인 대응을 하기란 사뭇 어렵게 보입니다. 다만, 무작정 개인적 담론과 개인주의에 대한 열망에 기대지 말고 우리가 과거 민족주의적 사회의 공감대와 같은 모두가 이해하고 공감할 만한 서로의 연계성을 다시 부활시키고 이것을 해묵은 전통주의적 복고로 몰고가지 않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정치적 올바름과 정체성 정치는 다원화 사회에서 핵심적인 불의와 차별을 균등하게 하려는 정당한 도구”라는 저자의 해석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이러한 과정에 제일 먼저 전제해야 할 것은 서로가 동등한 대화 상대로 파악하고 어느 정도 자신의 개인적 고유성과 권리를 타인과 공유하고자 하는 용기가 아닌가 먼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끝으로 저자는 지식인의 양심으로 오늘날 유럽에서 보이고 있는 반이슬람주의가 2차대전 전후의 파시즘의 소용돌이에서 일어난 반유대주의를 대체하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습니다. 이슬람 관습을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프랑스와 독일의 사법 당국의 판단이나 비이슬람 시민들의 정서가 과연 어떤식으로 결론이 날지 아직은 묘연합니다. 자크 랑시에르가 진정한 민주주의에 대한 첫걸음으로 인종과 성별을 초월한 사회 통합에 나서는 길로 바라 봤듯이, 얼마간 민족주의 향기가 남아있는 이 국민국가적 민주주의에 앞으로 이 반이슬람 정서가 어떤식으로 나타날지 예측하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이 부분을 따로 꼬집어 언급하는 것은 근래 극심한 경제적 차이로 인한 다수 시민의 현재적 고통으로 봤을 때, 정치와 사회가 이 혐오와 분노를 자양분 삼아 과두제를 거쳐 결국 파시즘의 망령이 다시 유럽에서 나타나게 될 것이 아닌가 우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의 브렉시트와 관련된 영국의 정치적 과정을 주의깊게 보고 있는 저자와 마찬가지로 유럽의 반이슬람 정서가 어떻게든 해결이 되어야만 하는 선결과제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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