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진 사다리 - 불평등은 어떻게 나를 조종하는가
키스 페인 지음, 이영아 옮김 / 와이즈베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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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의 심리학과 교수인 키스 페인은 행동과학과 인지심리학 분야의 전문가이기도 한데요. 그는 사회학적 측면에서의 다중 인간 심리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아마도 다수 인간의 집단 행동 연구와도 유사한 연구 궤적을 그가 따라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근래 많은 학자들과 지식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소위 ‘불평등 문제’와 관련해 아주 단적으로 이를 ‘공중보건의 문제’라고 확정짓는 것은 공통된 맥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이 책의 소개는 의미심장하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원제, “The Broken Ladder”로 지난 2017년 출간된 이 글은 국내에도 역시 같은 해인 2017년 12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일종의 사회과학 범주안에 들어가도 무방한 책임에도 번역은 꽤 잘되었다고 여겨졌습니다.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키스 페인의 이 글이 최근 이어지는 사회적 문제 내지는 관심사를 반영하는 판매고를 올리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 점은 작성된 서평 글 수를 봐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우선 글의 결론인 9장에서도 언급되고 있는 바와 같이, 키스 페인의 근래 불평등 문제와 관련한 해석과 관련한 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즉, “불평등을 줄이려면 많은 문제들을 한꺼번에 다룰 수 있다. 하지만 그러려면 불평등을 도덕적으로 고찰하려는 태도를 버리고 이를 공중보건의 문제로 바라봐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이것은 종래의 심화된 불평등 문제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던 수많은 지식인들과 그들의 진단과 비판과는 약간 상이한 관점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물론 도덕적인 측면에서의 접근을 시도했던 학자들도 분명 있었으나, 근본적으로는 불평등 문제가 현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 작게는 개인의 능력차나 크게는 사회적 자원과 효용성을 발휘하는 측면에서의 차이가 매우 차별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들을 요약해서 분석들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미국의 중산층들이 여러가지 이유에서 자신들의 자식들에게 유리 바닥을 만들어주고 아낌없는 지원을 하고 있는 것을 도덕적으로 마냥 비난할 수는 없기에 모두가 동등한 선에서 출발할 수 있는 최소한의 평등주의에 대한 인식이 필요한 것은 분명합니다. 이와 관련해 일본 전 총리인 고이즈미는 “격차가 뭐가 잘못된 것이냐”고 반문한 것과 같은 불평등 문제와 관련한 명사의 몰이해적인 측면은 이것의 인식차가 얼마나 심각한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굳이 자본주의적 상황에서 개인의 인센티브 문제를 제기하지 않더라도 개개인들의 합리적 이기심이라는 전제에는 많은 역사적 사례들을 보더라도 합당하지 않은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4장에서는 ‘합리적인 사익 추구’라는 것이 현실 가능하다고 봤던 일련의 경제학자들의 해석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4장은 통념적인 좌파와 우파의 틀로 인식되는 불평등의 관념적 측면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진보적인 엘리트와 노동계급 보수주의자”와 같은 태생적 이분법 말이죠. 이 부분에 대해서 저자가 밝히고 싶은 것은 미국 러스트 벨트의 노동자들이 보수주의적인 정치 성향을 갖고 있다는 점과 유사한 판에 박힌 계급적 정치의식에 대해 반대하면서, “낙태를 반대하는 자들이, 사회적 복지 제도의 강화를 주장 할 수 있다”면서 반론을 제시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개인의 이념적 성향이나 정치 성향이 시시때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며, 우리가 내면화된 가치로 어떤 신념을 쭉 지켜내기란 어렵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미국 시민들의 민주당 지지와 관련된 지도에서도 실질적으로 중산층 이하의 가난한 계층들이 폭넓게 지원하고 있는 것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가난한 노동계층이 언뜻 공화당을 더 지지하는 것으로 통념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으나 실제로는 그보다는 더 많은 노동자들이 민주당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이 책에서는 밝혀냅니다.

그래서 키스 페인은 불평등과 일반적인 사회학적 관점과 관련해 우리의 편견을 타파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불합리내지는 부조리한 상황에서도 “그래도 사회는 정의롭다 혹은 정의로운 세상”이라는 결말에 이르게 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세뇌시키는 편견에 대해서도 저자는 비판을 하고 있는데요. “재능과 노력과 운의 복잡한 조합으로 성공과 실패가 결정되는 현실 세계”에 자신이 마땅히 원하는 것을 얻어야만 한다고 인식함으로써, 이 세상은 아직은 정의롭다고 여긴다고 측면은 6장에서 다른 여러 사례들을 통해 입증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점은 “자기와 의견이 다르면 그를 무능하거나 이기적이며 비합리적인 사람으로 평가했다”는 어느 실험 사례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물론 보기에 따라서는 극단적인 측면으로 여길 수 있지만 이미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해 객관적인 인식을 결여한 채로 얼마나 부정적일 수 있느냐”에 대해 철학적 접근을 해온 바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 책에 소개되는 여러 결과론적 인식을 통해 전반적인 불평등 상황이 사회 내에서 개인과 개인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서로간의 이해를 제한시키며, 끝내는 “불평등이란 서로 공유하는 공간이 없음을 의미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이와는 약간 별개로 “불평등은 본질적으로 공통적인 경험이 아니기 때문에” 실제로 이런 불평등을 공유하는 공간이 전무하다는 것은 시민들의 사회적 단절을 더욱 가속화시키는 원인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더욱, 사람들의 편견이 더 심해지는 특정 상황은 “돈과 권력 및 불평등이 관련되어 있다”고 저자는 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5장의 불평등은 생과 사의 문제라는 표제는 제가 임의로 발췌한 것에 불과하지만 원칙적인 측면에서는 이 문제가 생과 사를 좌우하기도 한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꼭 돈의 차이 때문에 개개인의 수명 차이가 발생한다는 여러 주장들을 귀담아 두지 않더라도 가용할 수 있는 사회적 자원의 개별 차이와 이것의 결핍과 관련된 정신적 및 육체적 질병의 문제는 분명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에 대해 어떠한 연민과 관심이 없는 것처럼 분명 부유한 자들과 가난한 이들이 같은 공간에서 자신들의 삶을 영위하고 있음에도 계급간의 단절은 이미 심각한 수준에 이른 것은 모두가 부정할 순 없을테죠. “대부분의 보수주의자들은 불평등 자체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자유와 능력, 책임을 중시하다보면 불평등이라는 결과물이 생길 수 밖에 없다고 여긴다”는 인과론에 대해 유독 보수주의자들의 자기 방어적인 주장에서 뿐만 아니라 진보나 그외의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이들까지 이 불평등 문제가 아주 자연적이고 태생적인 문제여서 어떤 인위적인 개입을 해야만 하는 것에 대해 아직도 의구심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저는 많은 서평에서 이러한 (경제적) 불평등 뿐만 아니라 사회 구조적인 많은 불평등의 여건에서 우리의 민주 정치와 민주주의가 과두제와 포퓰리즘이라는 악의 쌍두마차로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해왔습니다. 애초에 시민 다수의 삶의 인간다운 영위에 대해 사실상 많은 정치 엘리트들은 관심이 없으며, 여기에 합세한 경제 엘리트들 역시 이러한 자본주의적 사회 구조를 더욱 강화하는 것에만 신경쓸 따름이지 허버트 스펜서 류와 같은 그냥 ‘자연의 섭리’에 불평등 문제를 맡길 것을 바라고만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끝으로 이 책을 다 일독하고 나서 드는 생각은 얼마전에 접했던 리처드 윌킨슨의 글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많은 사회학자들과 경제학자들이 이 책에 인용되고 있었는데요. 저 개인적으로는 마틴 길렌스의 다른 논저들이 하루 빨리 번역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 책에 소개되어 있는 수많은 사회적 실험과 모의 실험은 흥미로운 점들이 많았습니다만 몇가지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소득이 높은 이들은 남의 말에 신경쓸 일이 많지 않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다른 기회를 잡기 위해 상대방의 말에 집중하게 된다는 것에는 다소 동의하기 힘들더군요. 또한 선진국일수록 종교의 필요성에 구애받지 않고 후진국 내지는 보수적인 전통국가는 종교적 믿음에 집중하는 것에 대해서도 일반적으로는 수긍이 가지만 오늘날 미국과 같은 나라는 오히려 사회에 있어서 기독교의 영향력이 강해지고 있고 많은 정치인들이 자신의 종교적 믿음에 대해 언론을 통해 어김없이 밝히고 있다는 점은 꽤 예외적 사례로 불릴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광범위한 불평등 문제에 대해 이렇게 약간 상의한 접근의 글 또한 나름 필요하다고 인식되었는데요. 아예 불평등 문제가 개인의 심리적 문제와 질병 등에 어떻게 더 작용하는지와 같은 연구가 좀 더 이뤄지면 어떨까 싶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논하고 있는 다양한 사례와 실험들이 꽤 신선하다고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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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외정책은 국내에서 시작한다 - 미국은 자기 집부터 정리해야 한다
리처드 하스 지음, 우정엽 옮김 / 아산정책연구원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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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뉴욕 브룩클린의 유대인 부모 밑에서 태어나 오하이오주에 있는 미국 명문 사립인 오벌린 대학을 거쳐, 미국에서 영예로운 장학금인 ‘로즈 장학금’으로 영국 옥스포드 대학에 유학한 리처드 하스는 2003년부터 현재까지 미국외교협회의 회장직을 역임하고 있습니다. 그는 콜린 파월 전 국무부 장관의 상임 고문을 맡았고 2003년에는 북아일랜드의 평화협상 과정을 지원하기 위한 평화특사로 파견되었으며, 조지 H. W. 부시 정권 시절 당시, 새로운 외교 정책을 세운 공로를 인정 받은 바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최근 번역된 그의 논저 “혼돈의 세계”의 서평을 작성한 이후, 두번째로 접하는 글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지난 2013년 원제 “Foreign Policy Begins at Home : The Case for Putting” 으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5년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약간의 참고로 책의 출판을 맡은 아산정책연구원은 과거, 로버트 케이건과 같은 네오콘에 속하는 학자들이나 정치 관료들의 글을 번역해 온 것으로 유명했는데요. 더불어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실질적인 정책 행위자들로 유명했던 네오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을 때, 저 역시 레오 스트라우스와 아인 랜드의 글을 찾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미국내에서 손꼽히는 외교 학자이자 정책 관여자였던 리처드 하스가 이 글을 통해 밝히고자 하는 것은 “세계의 모든 인도주의적이고 인권을 보호하는 개입을 포함한, 정치군사적 투입에 더이상 미국의 여력이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특히 이러한 환경적 변화 요인에 미국 국내적 상황이 예전 같지 않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에 따른 비용은 2001년 이후 누적된 연방정부의 15퍼센트 정도”라고 저자는 소급해 이해하고 있기는 하지만, 2008년 이후 세게 금융 위기 이후 미국의 재정적 여력이 한계에 이르렀으며, 연방 정부의 적자 규모 또한 나날이 누적되고 있는 상황에서 과거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의 전쟁 비용 지출과 같은 재정 조력이 사실상 힘들어지지 않았나 추측해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인 리처드 하스는 2부 마지막 주제인 ‘옹호할 수 있는 국방’에서 오늘날 현대전에서는 막대한 지상군 투입이 필연적이지 않기 때문에 일본과 EU와 같은 국방비 지출의 후발 주자보다는 전략적이고 대외적인 측면에서 어느 정도의 국방비 유지를 전제조건으로 옹호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스는 지상군 투입이 선결조건이라 할 수 있는 미래의 현대전은 한반도에서의 작전 밖에 예상되지 않으므로 꽤 주도면밀하게 공군과 해군에 대한 규모 유지가 필요하다고 보는 듯 했습니다.

우선 글이 시작되는 1부에서는 냉전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이후, 일종의 다극체제로의 변화 가능성으로 대두하고 있는 여러 국가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중국과 브라질, 멕시코, 인도네시아, 호주, 일본, 한국 등 각 국가별로 간략히 분석해내고 있는데요. 이에 저자는 냉전의 종식 이후 바로 미국이 주도해 국제 관계에서 갈등과 대립을 조정시킬 수 있는 일종의 국제적 협의체를 만들어내지 못한 것을 아쉬움으로 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기존의 UN을 비롯한 국제 외교 무대의 한계로 볼 수도 있겠는데요. 하지만 이러한 저자의 토로에 선뜻 동의하지 못하는 것은 지금도 중국은 과거에 자신들이 참여하지 않은 국제 조약과 기준에 상당한 거부감을 밝히고 있는데 과연 명확한 국제 기준과 합의가 중국과 같은 권위주의 국가들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습니다. 중국 전문가로 불리우는 조반니 아리기 역시 중국이 어느 정도 민주화가 진행되는 것이 중국 뿐만 아니라 국제 사회에게도 이득이라고 했던 것은 그 의미가 명확해 보입니다. 특히 많은 서구의 학자들이 민주화 없는 베이징 컨센서스에 우려를 표명했던 것도 마찬가지의 맥락일 것입니다.

다만, 현재의 상황과 과거에 있었던 다소 고립주의적 정책에 기반하는 복고주의를 설명하면서 논증 가운데 몇가지 동의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습니다. 우선 “중국, 일본, 한국. 그리고 러시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의견 불일치를 아직 극복하지 못했다”는 의견은 약간 반감까지 들었는데요. 청산되지 않은 역사 문제를 단순히 의견 불일치로 이해하는 점은 전형적인 미국인의 몰이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더욱이 자신들이 2차 대전 당시 일본 제국과의 교전 당사국이었지만 안마당인 태평양 지역의 안보를 위해 일본 제국의 과오를 서둘러 봉합한 것은 주변국들의 이해에 기반한 것은 아닙니다. 냉전 시기에도 소련의 위협이라는 문제 앞에 일본과 주변 당사자들의 강제 화해를 주도하고 결국 일본에게는 어떠한 역사적 참회를 철저히 미연에 방지시킨 결과는 과연 누구의 책임인지 짚어보고 싶습니다. 또한,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지역에 대한 이해와 동맹의 의무를 고려했을 때 군사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압박이 클 것이다”라는 서술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는데요. 한미동맹과 같은 비대칭 동맹 관계에서 미국이 항상 연루의 위협에 직면해 있지만, 다른 미국과의 우호국 내지는 동맹관계를 고려했을때 압박이라는 표현은 동맹의 의무라는 입장에서 다소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몇번이나 미국내 여러 지식인들이 서울이 핵공격의 위협과 동시에 LA이나 샌프란시스코에 핵위협 가중될 때, 과연 미 당국이 한국에 대한 핵우산을 지킬 수 있을지에 설왕설래가 있는데요. 마찬가지로 동맹에 대한 의무는 단순한 조약의 서명으로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한반도에서의 재래전이 핵전쟁으로 발화될 가능성이 있을 경우에도 미국이 동맹의 의무를 지켜낼 수 있을지에 대해 누구나 확신을 갖기 어렵다는 것도 분명해 보입니다. 마찬가지 측면에서 인도와 파키스탄의 초기 재래전과 같은 대결이 결국 양국 사이의 핵전쟁으로 귀결될 가능성 또한 상당하기 때문에 인도와 파키스탄의 사소한 국지전이라고 할지라도 국제사회 차원의 개입이 분명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즉, 한반도에서의 무력 충돌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주변국의 노력이 인도와 파키스탄의 사례와 같은 엄중한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고 보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여겨집니다. 앞선 주장과는 논외로, 저자인 리처드 하스 역시 “파키스탄의 증가하는 핵무기는 거대한 위협중에 하나”라고 인정하고 있는데요. 파키스탄의 국내 정치가 사실상 부족 중심의 체제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과연 자신들의 핵무기가 2010년 오바마 대통령이 확언한 만큼 과연 안전하고 통제권에 있는지 의구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파키스탄 서북부에서 암약하고 있는 테러 단체의 존재를 감안해본다면 파키스탄 정부의 핵무기가 언제까지 안전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군요.

하스는 자신이 공화당 당적을 갖고 있는 학자이자 정치인이기도 하면서도 전체적으로 책의 기조를 “전략적이고 제한적인 개입”을 미국의 대외정책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3부에서 밝히는 미국 국내적 요건과 관련해 “미국의 GDP 5분의 1이나 되는 비용을 의료보험제도에 투입”하고 있다는 것을 예로 들며 이것의 감축을 주장하고 있는데요.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이렇게 과도한 의료보험비용을 지출하고 있으면서도 600만이나 되는 미국인들이 변변한 의료보험 조차 없이 지내는 것이 사뭇 이해가 안될 정도입니다. 2008년 이후 미국 경제가 다시 회복기에 이르고 있지만, 여러 국내적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현재 미국 정치가 꼭 누군가를 지칭한 것처럼 “포퓰리즘을 등에 업은 가짜 리더십”을 꼬집고 있는데요. 저자인 그도”민주주의는 단순한 선거 이상의 것이고, 선거 또한 선거 당일에 일어나는 일 그 이상의 것이라는 점이 강조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현재의 미국 정치가 ‘민주주의의 쇠퇴’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앞서 언급한 그 포퓰리즘을 등에 업은 리더가 앞으로 어떠한 결정을 하게 될지에 대해 누구보다도 우리의 미래와 운명이 달려 있다는 점에서 실로 뜨악한 현실이기도 할텐데요. 저자의 예견과는 약간 상이하게 미국이 경제 발전과 꾸준한 국방비 투사가 함께 이뤄질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연방 정부의 재정악화와 대외 경제의 불안감이 미국의 패권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될지는 앞으로 중국의 부상과 더불어 지켜봐야 되는 문제가 아닌가 생각해봤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모든 것을 다할 수 없다”는 의미 역시, 아마도 과거의 미국과 다른 현재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책의 39페이지 하단에 서술된 “쿠웨이트에서 이란을 내쫓았으며..중략”는 아마도 이라크를 이란으로 잘못 번역한 것으로 보입니다. 문장이 시작되는 “중간의 1990년대에는..” 이라는 시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라크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이라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것은 오타라고 할 수 있으니, 기본적인 역사조차 인지하지 못한 역자의 책임이라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다만 이란의 영문표기인 Iran과 이라크의 Iraq는 뒤의 마지막 자음에 헷갈려 할 수 있지만 이 부분도 완전히 변명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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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권력을 시민에게 - 시민주권 시대, 직접 민주주의를 말하다
토마스 베네딕토 지음, 성연숙 옮김 / 다른백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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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저자인 토마스 베네딕토에 대한 짤막한 소개에 따르자면, 그는 이탈리아의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로서 또한 지방 행정 전문가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저는 매번 서평을 쓸때마다 저자에 대한 구글링에 꽤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만 이번 토마스 베네딕토와 관련해서는 매우 짤막한 이력 정도만 이탈리어로 검색되고 있어 제 한계를 여실히 느끼고 말았습니다. 또한, 그는 볼자노 지역의 EURAC라는 연구소와 협업을 하고 있는듯 한데요. 이 EURAC는 사립 사회학 연구기관으로 이 곳에 대한 정보 또한 많지는 않았습니다. 주로 세계화와 관련된 연구를 하고 있는 곳으로 추정됩니다. 이 책은 원제 “Piu potere ai cittadini?”로 지난 2018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올해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의 국내 번역과 관련하여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전문 출판사가 아니라 사단법인이 관여한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아마도 이 사단법인은 이와 같은 출판물들을 꾸준히 낼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우선 이 글의 중요한 관점은 번역된 제목대로 “직접 민주주의”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좀 더 엄밀히 말씀드린다면 “정치적 사안에 대한 확정적 국민투표 (레퍼랜덤)와 국민 발안”이라고 소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글을 읽는 여러분들의 오해를 피하고자 저자는 이 직접 민주주의가 오늘날의 대의 민주주의를 대신하는 정치 체제가 아니라 “일종의 대의 민주주의의 보완재”라고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총 15장의 내용적 구성에서 8장인 ‘직접 민주주의의 실행 특성과 효과’부터는 직접 민주주의가 우리의 정치에서 얼마나 긍정적인 대안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논증하는 것처럼 단순한 보완재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만, 글 도입인 1장과 2장에서 저자가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과 효용성을 믿고 있으며, 오히려 대의 민주주의 체제 하에 직접 민주주의적 기능적 요소를 도입해 사실상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믿고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다양한 정치 무대에 있어서 숙련된 테크노크라시와 같은 소위 직업적 엘리트들에 비해 일반 대중이 각각의 정치적 이슈에 대해 노련한 이해와 자질을 보일 수 있느냐에 대해 전자의 이들이 사뭇 의구심을 갖고 있습니다만, 저자는 이러한 선입견에 대해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을 더하고 있습니다. “평범한 시민들의 역량 부족을 주장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그 자체가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논지이다”라는 반론에 대해서 말이죠. 저역시 이 점에 매우 동의하고 민주주의 자체가 다수의 시민들에 의한 정치체제라는 것은 설사 그것이 책에서나 나오는 이상주의라 할지라도 반드시 이것을 옹호해야 한다는 것을 먼저 밝혀두고 싶습니다.

약 15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스위스의 직접 민주주의 체제는 저자의 논증을 통해 글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연 3회에서 4회에 이르는 레퍼랜덤 (확정적 국민투표)은 저자가 강조하는 시민들의 더할 나위없는 행복과 정치적 고양감에 이르며, 이렇게 시민 개개인이 첨예화 된 정치적 논제에 자신의 선택을 더할 수 있다는 ‘체험’은 단순히 4~5년 주기의 투표권의 행사와 더불어 정치권력과 멀어진다는 소외감을 실질적으로 해소하게 만들어주는 직접 민주주의의 덕목이라 할 만합니다. 제가 이 부분에 대해 머릿속으로 한번 그려보기도 했는데요. 예를 들어 요즘 논란이 되었던 ‘선거제도 개편’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해당 투표로 제 의사를 정치권에 전달하는 것과 같은 국민투표는 시민들에게 꽤 정치적 참여 의식을 높일 수 있는 수단이 될 것이라는 예상이 들었습니다. 물론 저자는 단순히 이상론에 그치지 않고 스위스에 소요되는 이 국민투표와 관련된 비용을 소개하고 특히 자신의 모국인 이탈리아 정치에서 정치인들에게 각종 자문을 해주고 세금을 뜯어가는 대략 40만명이나 되는 자문단체 및 자문위원의 현금 지급 등을 꼬집으며 이탈리아의 같은 경우도 쓸데없는 세금 낭비를 제거한다면 충분히 한정적 국민투표제에 들어가는 소요 비용을 충당할 수 있을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사실 직접 민주주의에 들어가는 비용에 대한 공포심을 의회 정치인들과 정치 권력 엘리트들이 조장해 왔던 면이 분명 존재하며, 아예 저자는 스스로 납세의 책임을 갖고 있는 시민들의 권리가 특히 국가 부채와 관련된 문제에서 전혀 의견이 반영되지 않고 있으니 이 부분에 대한 시민들의 적극 참여가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왜 유독 국가 부채 문제에 있어서만 다수의 시민들의 의견이 무시되고 있는가”에 대해 저역시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매번 민주주의와 관련한 여러 논저들을 읽을 때마다 “민주 사회에서 정치 참여는 기본권에 속한다”는 취지의 주장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러한 맥락에서 직접 민주주의는 정치 행위에 대해 적법성 legitmacy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가히 그 의미가 가볍지 않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도 저자는 15장에서 ‘스위스의 직접 민주주의를 어떻게 하면 유럽과 전세계에 이식할 수 있는지’에 대해 그 가능성들을 제시하고 있는데요. 이를테면 전자 투표를 획기적으로 보안 기능을 삽입하여 인터넷 망에서의 실시간 1인 1투표를 돕는 기술적 보완을 언급합니다. 아주 간단히 살펴보면 요즘 스마트 폰들에 들어가 있는 지문인식이나 안면인식과 같은 보안 장치를 바로 실시간으로 투표 참여에 연동시킬 수 있는 기능상의 지원 또한 가능하다고 여겨집니다. 물론 앞의 부분은 제가 다소 단순화 시켜 봤지만 정부와 여러 자문 단체들이 이와 관련된 논의를 한다면 획기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직접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열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아주 직접적인 반감으로 제시할 수 있는 ‘숙련되지 않은 시민의 정치 참여’와 ‘각 단계에서 소요되는 비용 문제’는 이렇듯 제반 사항을 개선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더불어 근래 문제가 되고 있는 ‘포퓰리즘의 대두’와 관련해서 이어지는 저자의 여러 논증들을 통해 약간의 실마리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즉, 어떠한 대안도 없는 선동 정치인이 직접 민주주의를 빌미로 자신의 주장을 듣고 있는 시민들에게 일어서서 행동하라는 식의 과격한 선동은 그 자체로 견고한 민주주의적 이념과 체제를 갖고 있는 국가에서는 포퓰리즘의 발호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으며, 이것이 그냥 말장난에 불과하더라도 어떤 정치적 이슈에 대해 시민들이 저절로 토론하고 의견을 교환하게 만드는 ‘직접적인 국민 투표의 시행’이 오히려 이를 효과적으로 방지하는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많은 정치 이론가들이 다원주의적 설득과 서로간의 깊은 이해 내지는 활발한 토론을 통해 민주주의가 보다 더 민주주의다워지는 유일한 길임을 주장해 왔습니다만, 시민들이 스스로 고도화 된 정치적 분별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오늘날 드러나는 모든 정치적 논쟁과 대결에 대한 관심과 자신의 고유한 의견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정상적인 민주주의에 있어 애초에 어느 것이 먼저 선결되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역으로 민주주의와 관련된 가장 기본적인 것에 관심을 갖기 시작할 때부터 차례대로 성취할 수 있는 문제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 인식으로 “전문가 정치가 그 무엇보다 ‘투명성’이 필요”하다는 관점은 이들이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민주주의가 왜곡 되었고, 바로 이런 엘리트 정치인들을 효과적으로 견제하는 시민들의 역할이 부족했기 때문에 ‘포퓰리즘’과 같은 비정상적인 도출로 나타났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최종적인 진술로, “직접 민주주의가 제대로 발달한다는 것은 계급적 권력이 덜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언급 역시 엘리트 지배체제에서 일반 시민들의 정치 참여가 만들어내는 긍정적인 효과라고 봐도 지나친 해석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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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개인들의 사회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홍지수 옮김 / 봄아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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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울리히 벡과 앤소니 기든스와 함께 후기 근대 및 근대주의를 냉엄히 비판했던 지그문트 바우만은 지난 2017년 영국 리즈에서 삶을 마칠때까지 인류에 대한 애정으로 도덕주의와 사회적 정의를 적극적으로 옹호한 실천적 지식인으로 우리의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저에게는 그의 유작이 되어버린 ‘레트로토피아’의 남겨진 사회에 대한 간절한 희망이 뇌리에 박혀 있기도 합니다. 일개 개인인 저에게도 이와같은 바우만의 회한이 깊게 남아있을 정도면 그의 통찰력을 아꼈던 사람들과 수많은 독자들은 어떨지 감히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이 책은 “The Individualized Society”이라는 원제로 지난 2001년 출간되었으며, 국내에는 비교적 한참 뒤인 2013년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약간의 첨언으로 바우만의 이 글을 번역한 홍지수 씨의 번역은 나무랄데가 없었습니다. 다만 2013년 출간이후 현재는 절판된 상태인 것은 매우 아쉬운 점이라 생각됩니다. 이 이유에 대해선 이어지는 내용에서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책은 크게 3장의 주요한 논제로 이에 총 18장의 소주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꽤 상당한 분량의 본문에서 바우만이 견지하고 있는 입장은 19세기 근대화의 어두운 측면에 기인된 오늘날 사실상의 주권 국가의 역할 축소와 대량 생산의 자본주의를 더욱 강화한 무차별적인 세계화와 이것의 기반이 된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 그리고 이러한 기조 가운데 진행된 개인들의 삶의 전방위적인 악화와 전통주의적인 도덕과 사회적 정의가 퇴출당한 결과를 매우 직접적이고 다양한 인용을 통해 논증하고 있습니다. 이와는 약간 별개로 이 글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는 건 자신의 논증에 대한 그의 꽤 면밀한 독서와 글을 통해 소개되고 있는 저명한 학자들의 면면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바우만이 주장의 합리적 근거를 위한 인용이 여기의 이 글처럼 다양했는지에 대해 꽤 놀랍기도 했는데요. 그에 대한 위키 백과를 간단히 검색해 보면 바우만에게 영향을 끼친 사상가들의 면면을 알 수 있습니다만 그것과 비견될만큼 꽤 많은 지식인의 주장들이 인용되었습니다.

우선 사실상 우리의 삶을 고통에 빠트린 19세기의 근대주의화의 이행과정이 그동안 보여왔던 바우만의 고유한 인식론에 합당하게 ‘액체 근대’, ‘유동하는 근대’ 및 ‘쓰레기가 되는 삶’에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20세기 중반 이후의 첨예한 냉전적 대결에서 이념이 개인의 삶을 초월한 중대한 목표이자 가치가 되면서 그에따른 “이념이 반드시 그것에서 이득을 얻는 누군가가 있다는 개념과 분리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글의 서두에서 그는 밝혀둡니다. 이와같은 진술은 오늘날 수많은 개인들이 ‘인간적인 품위의 삶’을 영위하지 못하고 단순히 노동 시장에서의 장기말로 국한된 것에 대한 원인이라고 보는 것과 같습니다. “초국가적이고 점점 더 탈지역성을 띠는 자본 (자본의 새로운 진화)”은 더욱 개인들을 피폐한 삶의 한 가운데로 몰아 넣었고 이렇게 폭발적으로 이행된 자본주의화에서 이를 극명하게 논증한 14장, ‘개인의 도덕성, 부도덕한 세계’는 “학식있는 엘리트들 가운데 지식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 정책이나, 미래에 대한 구상, 사회 정의의 본보기를 제시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고 권력과 가까운 이들의 의도적인 침묵을 꼬집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다수의 권력 바깥에 있는 개인들의 영향력의 소외 뿐만 아니라 가일층 권력과 가까운 기득권과 엘리트들이 기본적인 도덕적 문제와 사회 정의에 대해 아무런 의지가 없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런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선 우리가 적절하고도 확실한 시민의식을 갖고 우리의 민주주의를 실효성있는 도구로 만들 것에 대해 사활을 걸고 노력을 기울여만 한다는 점이겠습니다.

또한,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이 신자유의적 세계관이 다른 이념들과 극명하게 다른 점은 신자유주의 세계관은 그 자체가 독자적인 하나의 부류이고 의문이나 비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바우만은 다시 밝히고 있습니다. 매번 신자유주의를 비판할때마다 진보 좌파에게 꽤 과도하고 감정적인 편협성을 갖고 있다고 치부하고 그들을 지지하는 어리석인 시민들의 입놀림으로 국한시켰던 자유지상주의자들과 신자유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주장과는 완전히 다른, 단 한번도 지난 40여년 동안 이어진 신자유주의 이행에서 이 이념을 정상적으로 비판을 당한 적이 없었다는 진실을 가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의 날 것과 같은 진실은 2008년 이후가 되어서야 겨우 진정성을 갖고 비판을 하는 이들이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재검토와 검증과 비판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점이죠.

즉, 3장에서 자유와 안정이라는 가치적 대립에서 “품위있는 삶을 살 수 있는 분명한 방법, 확고하고 안정된 지향점, 삶의 여정에서 예측 가능한 목적지의 결핍”이 원인이 된 이상의 부재는 결국 인간을 고통에 빠트렸다는 결말을 잉태했습니다. 이러한 개개인들의 박탈감들이 모여 ‘공동의 이익’에 대한 요구가 근대화가 완료되고 자본주의의 격렬한 대량화가 지속되면서 이상하게도 수많은 개인들의 정치에 대한 영향력이 비약적으로 감소했습니다. ‘개인은 시민의 최악의 점’이라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인용된 뒤르켐의 “사회적으로 강요받지 않는 개인은 변덕스러운 본능과 욕망앞에 무력한 희생자일 뿐”라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명확합니다. 시민의 기능과 역할에서 개인들이 무력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해도 이런 상황의 근본적인 측면에서 “경제가 정치로부터 분리되고 정치의 규제와 개입으로부터 벗어나면서” 발생한 경제의 이상한 변곡점이 ‘경제 행위로서의 자유로운 인간’이나 ‘인권적인 측면에서는 필요없는 자유’를 강조하기 위한 사실상의 사회적 기득권자들의 교묘한 술수인지는 모르겠으나 ‘대중이 주도하는 민주주의가 위협적인 요소’라는 주장을 펼쳐왔던 자유지상주의자들을 감안해보면 음모론적 시각으로 ‘이러한 전방위적인 고통스런 이행’을 원했던 자들이 많았던 것이 아닌가 추측해 봅니다.

이처럼 근대의 전성기를 ‘포드주의’와 같은 이념이 지배했다는 사실은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시민들에게는 앞선 논증의 결과물로서 어떠한 고통이 뒤따랐는지 바우만이 여실히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반근대주의자’라는 수식어가 ‘반자본주의자’와 같은 낙인을 갖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다수의 이익과 사회 공동의 이익을 결여한 경제의 외형적 발전과 정치 권력을 낙후시켜 자신들의 이익을 최대화 시킨 경제 권력과 이러한 모든 것을 ‘정치의 후진성’과 ‘정치의 쓸모없음’으로 치환시킨 교묘하고 자의적인 ‘이익 영합의 지식인들’이 주도해 왔습니다. 어차피 신자유주의는 자유로운 경제적 자유를 주장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니 다른 말로 ‘경제적 자유’는 자의든 타의든 타인의 이익을 침범하는 ‘경제적 이익’으로 재탄생했고, 바우만의 말대로 “도덕이 타인에 대한 책임”을 뜻하는 것으로서, 근대주의가 이런 도덕의 상실과 사회적 정의를 휴지통에 넣어버린 것은 반쪽의 성취도 아닌 내면에 숨겨진 소수의 이익을 위한 외형의 극대화로 귀결 되었다 봐야 할 것입니다. 이런 저의 평가는 꽤 도발적이고 공격적이기까지 합니다만 달리 어떤식으로 표현을 할 수 있을지 명확히 할 수가 없었습니다.

끝으로 결말에 이르는 15장 ‘두 개의 전투를 치루는 민주주의’에서 바우만은 오늘날 우리의 민주주의는 두가지 위협에 직면하고 있는데, 그것은 첫째로 “공적 권력이 ‘좋아 보이는 것’을 입법화하고 제정한 법을 집행하는 능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는 것”과 둘째로, “공공 이슈와 사적인 문제들 간의 소통과 해석이 사라지고 있다”면서 이것은 최종적으로 “국가 주권의 약화”와 궤를 같이 하고 있습니다. 시장이 제도와 법의 기반해야 한다는 윤리도덕적인 명제에 기겁을 하는 자들이 많은 것처럼 국가가 마땅히 보위해야 할 다수의 시민들에 대한 권리와 사회적 보장책 및 사회 정의의 신념을 경제적 자유를 일순위로 놓고 나머지를 주변부로 격하시킨 이들의 ‘그 고유한 신념체계’가 어떻게 사회를 이 모양으로 만들었는지 우리는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에 아주 단순한 면모로 다수의 노동자들을 자판기에 보관된 인형들처럼 ‘까다롭게 고용하고 쉽게 해고하는’ 장기말로 취급해 온 것은 프레카리아트식 처방을 일부러 원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절로 향하게 하기까지 했습니다. 일전에 마누엘 카스텔은 “시민들에게 다시 온전한 권력을 향유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앞으로 민주주의의 진로에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포스트 민주주의’의 콜린 크라우치 역시 ‘정치에 대한 경제의 비타협적 영향력을 해소’시키는 것이 우리의 민주주의가 포스트적 결론으로 치닫지 않는 길임을 밝혔습니다. 아마도 시민 한명, 한명의 권리와 삶의 품위는 결국 모든 사회의 시민들이 자신들이 바라는 건전하고 질적인 삶의 결정을 보장하는 것이며, 민주주의가 이러한 방화벽으로서 소수의 정치인들과 기득권층에게 단순한 수사에 그치지 않도록 우리가 끊임없는 견제와 정치 참여로 지켜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관점을 몇번이고 되내였습니다만 이것의 성취는 결코 쉽지 않은 문제임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민주주의에 대해 자크 랑시에르는 “권력층 태생이 아닌 이들을 침묵시키거나 정치적 과정에서 배제하고, 자신들만의 전문성이 있다는 주장을 하면서 통치를 독점하려는 권력의 집요한 특성을 ‘붕괴’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으로 다소 긴 글을 정리하겠습니다.



-며칠동안 이 책을 일독하고 나서 들었던 생각은 번역된 바우만의 여러 논저들 가운데 이 책은 모두가 꼭 읽어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언급했던 것과 같이 불행하게도 현재는 절판된 상황으로 다시 재간 예정이 불명확한 상황입니다. 모쪼록 돈이 안되는 사회과학 서적이지만, 출판사의 관대한 노력이 너무나 필요해보입니다. 꽤 일방적인 생각이지만 저 뿐만 아니라 모두가 이 책을 읽게 되는 날을 앞으로 기대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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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불평등은 돌이킬 수 없는가 자본주의어게인 1
척 콜린스 지음, 박형준 옮김 / 내인생의책 / 2019년 12월
평점 :
절판


이 글의 저자인 척 콜린스는 미국 햄프셔 대학을 거쳐 서던 뉴 햄프셔 대학에서 경제학 학위를 받았지만 어떻게 보면 주류 경제학과는 일견 거리가 먼 인물이기도 한데요. 특히 그는 미국 경제에 있어서 경제적 불평등과 기업들이 조장하는 경제적 불평등 확대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공공 선을 위한 부’라는 사회 단체를 공동으로 설립,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시키고 그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을 주지시키기 위해 사회활동가로도 활약하는 중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번역된 다른 논저인 “왜 세계는 불평등한가”의 서평을 작성한 바가 있습니다. 이 책은 원제 “Is Inequlity in America Irreversible?”로 비교적 최근인 2018년 출간되었으며, 국내에도 얼마전인 2019년 1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리가 현재 미국의 심각한 빈부 격차와 불평등 문제에 관심을 갖는 이유중에 하나는 미국이 전세계 자본주의적 이행이 가장 오래되고 시장 근본주의라 지칭해도 될만큼 자본주의를 가장 잘 현실화 시킨 국가이기 때문일텐데요. 하지만 요즘에는 시민의 사회적 자본이 가장 미비한 국가이자 개인의 자유에 따른 삶의 선택이라는 일방향에 집중해 그것의 파장이 어떤식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확연하게 연구해 볼 수 있는 사례로 연구자들에게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일전에 토크빌은 “개인의 이기심을 과도하게 보장하고 이것이 개인주의적인 극대화로 나타난다면 사실상 민주주의가 위험에 처할 것”이라고 경고한 바가 있습니다. 이 점은 토머스 페인과 존 듀이도 함께 동의하기도 하였는데요. 제법 신기하게도 앞선 미국인들이 갖고 있는 자유에 대한 신념과 그들이 신화로 믿고 있는 아메리칸 드림은 외형상 서로 비슷해 보이지만 오히려 모든 걸 개인의 자유 문제로 국한 시켜서 해석한 나머지 현재의 ‘아메리칸 드림’은 (사실상) 과거의 추억이 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저자는 글의 초입에서 “미국의 불평등은 지구적인 추세의 일부분이지만, 초-개인주의적 자본주의라는 본성과 미국 (특유의) 공공정책으로 인해 상황이 더 심각하다”고 냉정히 평가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배경 가운데 미국 사회가 더욱더 경제적 불평등의 이행과 “더할 나위 없는 세습 자본주의로의 과정”에 놓여 있다고 비판합니다. 이것은 더이상 미국 사회가 건전한 계급 이동성이 불가능해지고 있다고 봐야 하는 것이며, 글에서도 자료로 인용되고 있지만 “부모가 가난했지만 자신의 대에서 부자가 된 사람들”의 비율이 나날이 줄어들고 있는 것은 이를 반증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사회가 계급적 경직성으로 폐쇄적으로 나아가고 있는 연유에는 “권력의 불균형”에 있다고 저자는 분석합니다. 소수의 부유층은 자신들의 이익 보호와 이러한 시스템의 안정 및 존속을 위해 막대한 자원을 투입하고 있는 반면에 대다수의 시민들은 정치와 멀어지고 동시에 정치인들의 관심 밖에 놓이는 ‘현격한 과두제의 진행’으로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특히나 미국은 의회 정치를 비롯한 정치 전반이 금권 정치 영향하에 놓여 있으며, 월 스트리트의 경제 엘리트들과 의회에 관여하는 정치 엘리트 및 관료들과의 긴밀한 연계가 대중이 주도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을 차치하더라도 정치 시스템이 변질되는 상황에 놓여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결국 저자의 분석대로 누구도 원치 않는 정치 과정의 소수 독점화는 시민들이 경제적 불평등 상황에 놓여지게 됨으로써 정치 권력을 견제하고 정치에 새기운을 불어넣지 못하는 과거 플라톤이 우려했던 것과 일치합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몇가지 방안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익히 들었던 내용들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인 양질의 교육 확대와 부유층에 대한 누진세와 현실적인 상속세 부과 및 역외로 몰래 빼돌려지는 약 1.2조 달러 규모의 막대한 현금 자산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등의 실천적인 제시입니다. 물론 충분히 공감할 만한 내용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글을 계속 소화해 나가다가 논증 가운데 두 가지 사례가 저의 흥미를 이끌었는데요. 먼저 부유한 미국 국민들이 조세를 회피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위탁자 유보 연금 신탁이라는 일종의 편법이 있습니다. 미리 신탁회사에 자산을 맡기는 동시에 상속세 및 증여세를 미리 내고 매년 연금 형식으로 돈을 수령한 후 계약이 끝나면 자산을 세금 없이 돌려받는 제도인데, 여기에는 페이스 북 설립자 마크 저커버그와 패션 디자이너 랄프 로렌 등이 이 기술을 이용해 왔다고 합니다. 다음은 자산 도피에 대해 미국 정부와는 다른 해법을 보인 이스라엘 정부의 사례를 들고 있는데요. 이스라엘의 자산 관리자들이 자산 도피의 공범이 되지 않도록 감시와 제대로 된 감사 역할을 하게 만들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스라엘은 정보 당국의 도움을 받아 이에 적절히 대처한 것으로 여겨지는데요. 한편으로는 당국의 이러한 감시와 개입이 개인 자유의 측면에서 문제가 되지 않을까도 싶었지만 경제 전반의 시스템이 법의 토대 안에 존재해야 하는 것은 분명 중요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저는 스스로 더 많은 독서를 하기 전에는 소수의 기득권층과 부유층들이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시민들이 더이상 정치에 관심을 갖게 하지 않도록 일부러 경제적 불평등과 가혹한 노동 여건을 강요하는 것으로 이해했던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진실은 더욱더 진행된 세계화와 노골적으로 경제에 정치를 제거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던 신자유주의의 영향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많은 자유지상주의자들이 크게 착각하고 있는 점은 70년대를 거쳐 지금까지 전세계의 주류 경제와 시장 지배적 경제주의가 단 한번도 제도와 시스템 바깥에 밀려난 적이 없었다는 것이죠. 이 (뭐라 불러야 될지 모르는)사조는 줄곧 지금까지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던 주류 중의 주류였습니다. 한 줌도 안되는 유럽의 사민주의적 이행을 제외한다면 신자유주의의 흐름을 막아선 그 어떤 세력도 전무했었죠. 최근인 2008년 이후에 들어서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학자들과 언론이 등장했던 것은 최소한 개혁과 다수의 시민들을 위한 사회적 안전 보장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적 안전 보장은 전반적인 복지국가로의 이행을 말하는 것 또한 아닙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더 글이 길어질 수도 있으니 다음 책에서 더 논해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더이상 이제는 이념 논쟁이나 좌우 논쟁에 소모되지 말고 모두가 인간의 품위다운 삶을 보장할 수 있는 대책과 실효적인 제안 등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이를테면 기본 소득이나 시민 배당과 같은 것들 말이죠. 그래서 피터 반스의 주장은 꽤 귀담아 들을만 하지 않나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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