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데타, 대재앙, 정보권력 -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새로운 신호들
데이비드 런시먼 지음, 최이현 옮김 / 아날로그(글담)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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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영국 런던의 북부 지역인 세인트 존스 우드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줄곧 성장한 데이비드 런시먼은 캠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를 거쳐 현재 켐브리지 정치학과 교수로서 정치학과 역사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특히, 영국 국내에서 큰 관심을 받은 ‘정치적 위신’, ‘정치’, ‘대표’ 등의 6개의 주요 저작과 더불어 여러 영국 언론에 글을 기고하면서 자신이 운영하는 팟캐스트 ‘토킹 폴리틱스’에서 토마 피케티, 주디스 버틀러, 존 란체스터 등을 초대해 정치적 현안과 시대적 요구에 대한 활발한 토론을 구성한 바가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일전에 서평을 쓴 ‘자만의 덫에 빠진 민주주의’에 이어 두 번째 글이 되었습니다. 이 책은 원제 “How Democracy Ends”로 지난 2018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근래인 2020년 4월 초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본격적인 글에 들어가기에 앞서 런시먼의 이 글에 대한 한줄 평가를 다음과 같이 먼저 하고 싶은데요. 아주 간략히 말해, 이 책은 ‘정치적 수사의 거의 모든 것’이라는 저의 개인적 평가입니다. 이를테면 이 글 3장에서 주요 논지로 비판하고 있는 반동주의자들에 대한 그의 평가 “싫어하는 모든 것에 대한 경멸감이 대안을 설명할 수 있는 능력보다 훨씬 크다”와 같은 수사적 비유는 꽤 시의적절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달리 말하자면, 앞의 비유는 ‘포퓰리스트 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라고도 생각됩니다. 물론 이에 못지 않게 많은 정치학자들과 인문학자들의 논저들이 인용되고 있는데요. 이 점 역시도 글의 주장을 뒷받침하는데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는 것을 밝혀두고 싶습니다. 사실 이러한 미덕이 단순한 단편 소설을 쓰더라도 그것의 기반이 되어야 한다는 점은 몇번이나 강조를 해도 부족하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글의 구성적인 측면에서 이 글은 총 4장의 주제로 (논증적 측면에서) 서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다만, “앞으로 민주주의를 위태로운 지경에 빠트릴 수 있는 요소와 그 가능성을 찾아보고, 뒤이어 대안과 해결방안이 포함된 결론”이 중요한 큰 틀이긴 합니다만 단순히 정치학적인 접근 뿐만 아니라 정치철학적 분석과 이에 대한 문제점과 현실 정치에서의 다소간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는 면에서는 서로 연관되어 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경계가 구분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정치와 정치철학 및 사회구조학적 측면의 논증과 서술이 그렇습니다. 먼저, 1장에서 런시먼은 오늘날 민주주의를 위협에 빠트릴 수 있는 쿠데타의 가능성에 대해 먼저 그 실마리를 찾아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런시먼은 이에 1967년의 그리스에서의 쿠데타와 비교적 최근인 2016년의 터키에서의 총리 에르도안의 친위 쿠데타를 살펴보고 있는데요. 최종적으로 민주주의를 사망 선고에 이르게 하는 소위 ‘군부 쿠데타’의 가능성 역시 문제지만, 설사 “구경꾼 민주주의”가 아닌 실제 시민들이 쿠데타를 성공적으로 종식시켰을 때, 그 파장으로 도래할 수 있는 보존된 기존의 권력에 의한“행정권 남용 내지는 행정권의 확대” 역시 민주주의의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진단합니다. 사실 이런 측면에서 민주주의는 기만적인 요소를 갖고 있으며, 민주주의가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마음을 일부러 비틀려고 작정한 독재자가 지배하는 (사실상의) 전체주의 사회”를 근본적으로 제거하기 위한 수단이 필요해 보입니다.

물론 이 시점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과연 이 시대에 쿠데타의 위협과 전체주의에 빠질 가능성이 있겠느냐는 점이겠죠. 사실 런시먼이 진단하는 쿠데타와 관련해 그가 민주주의에 대한 위험요소로 보는 것이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쿠데타”입니다. 뭐 이 점은 보는 관점에 따라 허무맹랑하다고 볼 수 있겠으나 여기서 중요한 부분응 민주주의가 오랜 시간에 걸쳐 고사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한 취지입니다. 다시 앞의 질문으로 돌아가보면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겠느냐에 대한 가능성은 부분적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과연 보다 성숙한 민주 사회에서 과연 군부 쿠데타가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본질적인 문제겠죠. 즉, 이집트와 터키와 같은 국가들 - 민주주의가 성숙하지 않고 정치 체제상 권력 분산의 제도적 근거가 미약한 - 에게서는 그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순 없을 것입니다. 다만, 저자도 동의하듯이, 미국과 같은 국가가 군부 쿠데타에 이르기는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이 점은 미국이 군산복합체에 영향력이 전무하다고 볼 수 없다는 측면에서 꽤 비현실적으로 다가오기도 하는데요. 이것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고안하고 제도적으로 200년간 지속되어 온 민주주의에 대한 제도적 견고함과 시민의 인식이 뿌리 내렸기 때문일 겁니다.

그렇다면 다음은 우리에게 왜 민주주의가 필요한가 라는 질문에 답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고대 그리스에 시작된 민주주의는 플라톤이 그렇게 혐오해 마지 않았지만 권력 분산을 효과적으로 이행할 수 있는 정치 체제가 발견되지 못했거나 그 적절한 대안이 없기 때문일겁니다. 이에 대해 런시먼은 이 글 4장에서 “실용주의적 독재가 대안이 될 수 있는가”에서 이에 대한 작은 실마리를 찾고 있습니다. “중국 국민은 인도 국민보다 절대적 빈곤과 그 결과 (영양실조, 문맹, 조기 사망) 때문에 고통받을 가능성은 적지만, 무책임한 국가 공무원의 손에 희생당할 확률은 더 높다.”고 비유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즉, 원칙적으로 꽤 실용적이고 현실을 벗어나지 않는 독재 정치라고 하더라도 소수의 손에 어떠한 합법적 장치 없이 이행되는 정치 권력이 공공선이라든지 도덕적 원칙을 제대로 지킬 수 있겠는가에 대한 회의가 먼저 수반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물론 런시먼 역시 “개인적 평안함이라든지, 부의 안락함” 등을 무조건 경멸해서는 안된다고 밝히고 있듯이 여기에는 양자 사이에 균형감각이 필요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또한, 현재의 ‘공격적이고 만연된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시대’에서 도리어 개인의 경제적 이익 추구나 그에 따른 안락함의 인정 등이 공공선의 측면이라든지 전통적 도덕주의적 환원을 비교적 등한시하는 결과를 낳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제레미 벤담의 ‘판옵티콘’과 같은 잃어버린 것에 대한 획일적 강조를 기계적으로 요청하기 보다는 존 듀이가 일전에 언급한대로. “시민들이 스스로 관심을 갖고 재교육에 이르는 그 과정”이 자발적으로 필요한 것이 여기서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대 정치 및 현대의 위협은 크게 기후 문제와 같은 민주주의가 해결하기 힘든 난제와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미국의 트럼프의 정치 일선 등장은 참으로 복잡한 환경을 조성하게 되었는데요. 그가 파리 기후 협약을 탈퇴하고 소위 미국 우선주의로 스스로의 독트린을 만들어 낸 것은 사실 찰스 틸리가 말한 “예측할 수 없는 정치 지도자”의 전형이라고 할만합니다. 도널드 트럼프의 탄생이 현대 민주 정치의 종말이라는 평가를 차치하더라도 트럼프의 스스로에 대한 나르시즘과 기존의 체제와 제도를 불신하는 태도는 그것 자체로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일종의 신념 체계로 작동하여 핵무기 사용과 같은 극단적인 단계에 이르러 과거 케네디와 흐루스초프와 같은 한발 물러섬을 과연 단순히 패배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을지는 매우 불확실합니다. 이러한 도널드 트럼프의 여정을 지켜봤을 때, 런시먼이 다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은 ‘포퓰리즘’의 문제는 민주주의의 정치의 사활적인 역설이라 할 수 있을겁니다. 단순히 기존의 엘리트 지배 체제에 대한 불신과 경멸만 갖고는 포퓰리즘적 지도자의 카리스마에만 의존하는 것은 꽤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동안 왜곡되어 인식된 민주적 제도 하에 숨겨진 엘리트들의 의사 결정 과정만을 놓고 이것을 타도의 대상으로만 삼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도 지나치면 과두제에 이르게 만드는 엘리트 지배 체제에 대한 비판을 그동안 꾸준히 해왔습니다만, 여기에도 다음과 같은 평가가 이어지는데요. “고학력자들을 포함해서 교육받은 사람들로 다른 사람들 만큼 자주 도덕적 정치적 사고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점에 의문의 여지가 없다.”는 것은 그가 무조건적으로 고학력에 대한 맹신과 더 나아가 엘리트 지배 체제를 쉽게 용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 평범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루즈벨트의 내각이 당시 정치경제적 위기를 극복한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처럼 극도의 불안과 경멸만을 지닌채 어떠한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는 포퓰리즘 정치에 대한 본질을 우리가 결코 경시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카데와 같은 입장으로 런시먼 역시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고 보고 있습니다만 원칙적인 측면에서 이를 과도하게 해석하는 일부 학자들과 인사들이 문제일 것입니다.

발전된 기술과 지식인에 의한 통치 혹은 기술 관료 집단의 지배 체제라고 볼 수 있는 소위 테크노크라시가 민주주의에 대한 대안이 되지 못하는 점을 밝힌 런시먼의 의도는 매우 명확합니다. 그가 본질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주의자이자 현실주의자이긴 합니다만 오늘날 우리의 민주주의가 어떠한 식으로 귀결될 것인가에 대한 본질적 질문은 결국 지식인들이나 정치인들에 달린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책임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각계 각층의 이익이 충돌하고 서로에 대한 불협화음과 경쟁, 갈등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혼란한 상태를 만드는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큰 장점은 “특유의 정치적 포용력과 다원주의 정치를 가능케 하는 원동력”에 있습니다. 약간의 논외지만, 영국의 어느 언론에서 내일 있을 우리 선거에 대해, “주요 민주주의 국가중 코로나 사태에 가장 먼저 치러지는 선거”라고 하는 점은 꽤 마음이 설레기도 했습니다. 실질적으로 30년이 조금 넘은 우리 민주주의 정치가 주요한 민주주의 국가들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은 우리가 이집트나 중국, 가나, 인도와는 확연히 다른 점이라 할 수 있겠죠. 쓰다보니 이번에도 꽤 장황한 글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만, 런시먼의 이 책은 현재 우리가 직면한 민주주의의 위협과 앞으로 미래의 민주주의와 더 나아가 우리가 겪게 될 정치 체제에 대한 여러 가능성 등을 꽤 합리적인 근거로 잘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더불어 그의 말대로 “다른 사람의 폭력에 의해 희생당하지 않도록 국가가 보호한다”는 논법이 옳다면 이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 우리의 민주제도라도 생각됩니다. 법과 제도로서의 국가와 다양성을 포용하고 권력의 분산을 효과적으로 이행하는 민주주의는 어찌됐든 매우 중요한 가치임에는 분명합니다. 반대로 민주주의를 불신하는 ‘질서와 통제를 우선하는 이들’에게도 그 필요성은 마찬가지라고 여겨집니다.


- 1. 본문에 핵 종말의 네기사 the four horsemen of the nuclear apocalypse 에 헨리 키신저, 조지 슐츠, 윌리엄 페리, 샘 넌 이 포함되어 있는데 개인적으로 키신저가 저기에 들어가 있다는 게 충격이었습니다. 그리고 four horseme은 성경 요한게시록에서 인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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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정체
이옥연 외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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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이 주관해 출판한 이 유럽의 정체라는 논문 모음집은 두 명의 서양학자와 다섯 명의 국내학자가 모여 21세기 유럽의 정체적 기원이라는 주제로 종교, 문화, 경제, 정치, 국제 관계 및 역사적 접근에서 이를 규명해 보고자 하는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이 책이 갖고 있는 학문적 논의가 어떻게 보면 그렇게 심도있는 내용은 아니어서 뒤집어 생각해보면 이런 적당한 수준의 논의는 일반 독자들에게 오늘날 유럽의 형성과 정체성의 기원을 조금이나마 접근해 볼 수 있는 일종의 개론서적 역할은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에 대해 두 가지 측면의 호기심을 갖고 일독하게 되었는데요. 먼저, 소위 ‘유럽 유일주의’라는 유럽인들의 꽤 배외적 기준은 어디서 비롯되었고, 유럽의 기독교적 근간이 여기에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호기심과 두번째로 국내에는 거의 유일한 클로드 르포르의 권위자인 홍태영 교수의 글이 있었기 때문에 저로서는 서슴없이 선택을 할 수 있었습니다. 고로 소개해 드릴 이 글은 지난 앞선 설명과 마찬가지로 서울대출판문화원에서 주관해 최근인 2011년 논문 모음집으로 정식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1장부터 3장은 유럽의 기독교적 기원과 중세 그리고 유럽의 근대성을 살펴보고 4장부터 7장은 근래 모습을 갖춘 통합 유럽의 기원과 프랑스와 독일의 협력과 반대의 부침 그리고 유로화 출범과 관련한 정치경제적 해석과 더불어 미래의 진정한 유럽 통합이라는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보는 것으로 글은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인위적으로 나눠 설명한 이런 접근법에 대해서는 크게 개의치 마시고 논문 하나하나를 따로 접근해보셔도 충분히 일반 독자들에게는 어느 정도 소기의 목적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또한, 이런 학술적 논문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의 배경 지식만 갖고 있으면 일독을 하는데 큰 문제가 없다는 점은 이 글의 장점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1장에서도 얼마간 논의되고 있습니다만 제가 일전에 서평을 쓴 ‘히틀러와 홀로코스트’에서 유럽의 기독교 문화가 어떤식으로 유대인들의 유대 문화 배제에 영향을 끼쳤는지 이번 장을 통해 그 단초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사실상 “기독교인과 유태인은 서로 관용적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는 측면의 설명은 어떻게 양자 사이의 이런 토대의 가치가 어떻게 쉽게 변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예측을 이 글을 통해 가능하게 해줍니다. 즉, “과거 오스만 제국의 서진으로 인해 유럽인들은 유럽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는 주장은 외부 세력의 급진적 진출을 앞둔 자신들의 문화 보존과 크게는 유럽권의 방어와 (사실상) 기독교 세력의 수호라는 정체성을 낳게 됩니다. 특히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함락은 이러한 정체성에 기름을 끼얹게 되는데요. 물론 당시의 로마가 이끄는 기독교적 분위기가 어느 정도의 강력한 지속성을 갖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후에 왜곡되어 버리는 신성 로마 제국의 세속 권력의 유럽 전역의 확대는 어느 정도는 기독교적 자구책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해도 될만한 사건이라 생각됩니다.

이후, 중세의 암흑기와 봉건 제도적 기반이 뒷받침 되는 유럽의 전제 왕권들이 그 기독교를 기반으로 일전에 퇴치한 스페인에서의 이슬람과 성지 예루살렘 탈환을 목표로 이뤄진 십자군 운동 전개에도 마찬가지로 유럽은 견고한 기독교 세력권이라는 자신들의 정체성과 광범위한 정치적 기반을 유럽인들은 획득하게 됩니다. 즉, 로마 교황에 의해 승인받은 국왕의 명령에 대해 어떤 중요한 체계적 정당성을 획득하게 되었다는 것이랄까요. 주류가 기독교 정치 문화이니 이는 아마 당연하게 인식되는 부분이기도 할겁니다. 따라서 이런 기독교 문화가 기반이 된 당시의 유럽의 정체성이 어떻게 유럽 유일주의로 이어졌느냐에 대해선 이를테면 소위 ‘문명화 과정’이라는 논법으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유럽이 성공적인 산업 혁명 이후, 제국주의를 내면화 시켜 세계 각지에 식민지 건설을 시작하게 됨으로써 이어진 소위 내면과 외면이 합일되어 나타난 정치적 논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알렉시스 더든의 ‘계몽적 착취’와 일맥상통한다고 여겨집니다. 상대방이 문명적으로 미개하기 때문에 마땅히 우리가 지배할 수 밖에 없고 이 지배는 궁극적으로는 이들의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는 믿음은 유럽 주류 기독교 문화의 차별적 근원이 들어가 있는 것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 점은 약간 이해긴 하지만 오늘날 이슬람 세력이 다른 문명에 갖고 있는 인식으로 사회경제적으로 지대한 세계화 본류에 힘입어 세계 각국이 자유 시장 경제로 전환되었음에도 실질적으로 경제에만 국한되어 실질적인 국가와 문화 통합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합니다. 이것은 앞선 초기에 기독교인들이 유대인들에 대한 관용을 갖고 있었음에도 어떻게 이것이 심각한 유대 민족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낳게 되고 여기에 더 민족적 혐오를 초래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일말의 인식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은 문명화되었고, 다른 이들은 미개하다는 측면의 인식론 말입니다. 이러한 차별의식이 계몽주의와 결합하에 어떤식으로 발현되었는지는 제국주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음, 4장부터 6장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몰락한 독일의 가치 재평가가 미소간의 냉전으로 변화되었고 이를 통한 유럽 전체의 프랑스와 독일의 주도하에 벌어진 여러 정치경제적 통합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를 더 쉽게 말하자면 ‘유럽에서 아빠의 역할을 프랑스가 엄마의 역할을 독일이 한 것”으로 볼 수 있겠는데요. 앞선 프랑스는 2차대전 당시의 연합국의 승전 기여가 크지 않았기에, 소위 중견국의 위치로서 종전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에 드골은 자신의 자랑스런 프랑스가 그러한 대접을 받는데 격분하여 (물론 드골이 일차원적인 면모만 드러냈다고 볼 수는 없지만) 핵을 갖으려고 하고 실질적으로 미국을 넘어 유럽의 주도권을 갖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 와중에는 1961년 이후에 정책을 전환에 EC에 가입하려는 영국에 거부권을 지속하고 대륙 유럽의 프랑스와 독일이 주도한 통합 체제를 가속화하게 됩니다. 여기에 프랑스는 자신의 경제적 이익에 별다른 효과가 없음에도 유로화 출범을 정치적 발언을 확대하기 위해 참여하고 일종의 같은 협력자 그룹 내에서 독일을 효과적으로 견제하기 위한 방법으로서도 이 유로화를 지지하게 되는데요. 이는 독일이 그리스에 대한 그 우유부단한 태도에도 일맥상통한 결과를 낳게 됩니다. 서로 통합된 통화가 각 정부의 부채 해결 해소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어떻게 보면 규모의 경제나 또한 유럽 전체의 헤게모니 획들을 위해 서로 연합하고 이것은 정치적으로는 동유럽을 유럽 울타리 안에 넣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정치적 논란을 낳으면서도 경제적으로는 이익을 위해 이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예견되는 그 한계를 여실히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일종의 통찰력이라고 봐도 무방한 의견이기도 합니다.

끝으로, 오늘날 유럽의 기존의 전통적인 정체성과 대립될 수 밖에 없는 이슬람 이민과 최근의 난민들의 유입은 과연 기존의 유럽이라는 시민들의 연대성을 지속할 수 있겠는가에 암울한 전망을 드리운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일찍이 에티엔 발리바르는 이 난민 문제를 정치와 경제로 나누어 이해했다가는 유럽이 갈등에 휩싸일 수 밖에 없다고 보기도 했습니다. 물론 베스트팔렌 체제를 신봉하는 키신저의 논법대로 유럽에서 기존의 국가적 인식과 해법이 이 이슬람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해결할지에 대해 앞으로 유럽의 통합과 정체성 변화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요인으로 여겨집니다. 즉, 이슬람 문제의 다른 접근과 다른 해결 방법이 있어야만 산적한 동유럽의 문제와 함께 유럽 내부의 통합과 외부의 결속력을 더 다실 수 있는 전제 조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는 발리바르 뿐만 아니라 랑시에르 또한 바우만 까지도 중요하게 봤던 문제로서 앞으로 유럽의 건전한 통합이 여기에 달려있다고 봐도 무방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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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 - 역사가 망각한 그들 1937~1945
래너 미터 지음, 기세찬.권성욱 옮김 / 글항아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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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출신의 영국 역사학자인 래너 미터는 영국 켐브리지 킹스칼리지에서 박사학위를 마친 뒤, 미국 하버드에서도 단기간의 체류를 통해 자신의 전공 연구를 지속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그는 중국 역사와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 연구로 명성이 높기도 한데요. 이를 통해 현재 옥스포드의 정치국제관계학과에서 중국의 정치와 역사 그리고 국제관계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더불어 중국과 관련된 이슈와 관련해 영국 정부에 조언을 하는 등 영국 내에서는 꽤 전도유망한 중국 관련 전문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이 책은 지난 2013년 원제 “Forgotten Ally: China’s War with Japan, 1937-45 for publication in the US”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최근인 2020년 3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래너 미터의 이 글은 엄밀히 따지자면 존 키건이나 제러드 L. 와인버그와 같이 각각의 전략과 전술을 담은 전쟁사로 보기에는 오해가 있습니다. 좀 더 정확한 관점이라면 제목대로 중일 전쟁의 전쟁사적 측면 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장제스와 국민 정부(혹은 국민당 정부)가 이끄는 당시 중국의 정치와 국제 관계 그리고 거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주변 인물들의 행적과 해석이 매우 상세히 담겨 있는 복합적인 역사 서술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글 초입에는 독자가 상당히 오해가 들도록 장제스와 왕징웨이에 대한 대결 구도가 중점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만 온전히 장제스를 중심으로 이 글은 서술되고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서구의 인종주의적인 장제스의 분석에서 좀 더 탈피해 그에 관한 꽤 인간적인 면모와 정치적 갈등 등을 소개하고 있는데요. 물론 이러한 시도가 장제스의 정치적 과오를 덮는데 쓰이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그가 결정한 여러 정치군사적 행위 중에 후안무치하고 도덕적 기준까지 내다 버린 황허강 제방을 붕괴시킨 것과 후난성의 성도 창사가 지리적으로 취약해 일본군이 점령하기 전에 도시 자체를 초토화 시킨 이 두 가지 사건 만으로도 장제스가 얼마나 자기-권력적 인간인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특히, 앞선 황허강 제방을 붕괴시켜 84만 4489명을 수장시키고, 480만명의 이재민을 만든 것은 그가 과연 인간 백정과 다를게 무엇이 있을지 고민해보기도 했습니다.

최종적으로 청나라가 역사속으로 사라진 이후, 중국에서 등장한 많은 정치지도자 가운데 쑨원은 꽤 주목할 만한 인물이었습니다. 사실 권모술수가 능한 인물들에 의해 속임을 당한 것을 꼬집어 그가 순진한 인물이 아니었는가에 대해 논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명백하게 당시 중국에 있어서 매우 필요한 정치지도자 였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다만, 그가 너무 급작스럽게 병으로 쓰러지고 난 이후에 그의 정치적 후계자로 장제스가 등장한 것은 결국 중국 현대사에 있어 불행했던 일이 되었습니다. 더욱이 그의 정치적 라이벌이라고 불리웠던 왕징웨이 역시 자신의 권력 욕구는 분명 있었으나 결정적인 순간에 우유부단하고 또한 이후 매우 잘못된 결정을 통해 한간(우리의 친일파와 같은 취급)으로 격하된 것은 국가에 통제되지 못한 채 각 지방의 군벌들의 존재처럼 일본과의 대전을 앞둔 그 시점에 지지하고 따를만한 지도자가 없었다는 것은 다수의 중국인들에게는 매우 불행한 일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또한, 미터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마오쩌둥의 한계 역시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는데요. 옌안 시절의 마오쩌둥은 소위 정풍운동이라는 것을 통해 무고한 이들과 반대자들을 숙청하고 더욱이 일반 국민들에게 마오쩌둥의 사상을 암기하게 하는 등의 당시에 전혀 쓸데없는 일이나 벌인 점 역시 비판 받을 만하다고 여겨집니다.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최종적으로 1949년에 중국의 일당 지배에 성공한 것으로 인해 승자의 역사로 미화해 그의 행적들을 다소 미담으로 만든 경우도 있으나 미터가 밝히는 역사의 진실은 바로 이와 같았습니다.

1937년 7월 7일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과 유사한 빌미가 된 루거오차오 사건 이후, 1931년 이래 만주의 실질 지배를 하고 있던 당시 일본 제국은 중국 본토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게 됩니다. 당시 중국을 통제하고 있던 장제스의 국민 정부는 그의 카리스마와 통제력 밑으로 수많은 군벌들을 정치적으로 조율하고 있었으나 사실상 군벌 국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1937년 이전까지 중국에 군사적으로 협력하고 있던 독일 무관들의 훈련 지원으로 장제스 휘하에 87사단과 같은 상당한 정예 사단이 있기는 했으나 전체적으로는 각 지방의 군벌들을 제어할 만한 충분한 힘이 장제스에게는 부족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그나마 장제스에게는 사람을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있었기에 속으로 다른 생각을 품으면서도 군벌들이 그의 명령에 듣는 척이라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북부와 산동 지방을 손쉽게 일본군에 빼앗겼던 연유에는 물론 일본군에 비해 장비와 훈련이 열악한 측면도 있었으나, 지방에 혼재해 있던 권력들이 스스로 딴주머니만 차려고 하는 무능과 통제력 상실이 주요한 연유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애초에 장제스는 베이핑과 우한 그리고 난징을 잇는 거대한 삼각 방어를 실현하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었으나, 최정예 부대를 투입하고서도 실패한 상하이 방어는 이러한 말뿐인 전략을 휴지조각으로 만들고 그 끔찍한 난징에서의 비극을 뒤로 하고 장제스는 충칭으로 자신의 정부를 이전하기 까지 합니다. 특히, 이 난징에서의 학살 소위 ‘난징의 강간’을 서술한 이 책의 7장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메이지 유신을 통해 아시아 국가들 중 가장 성공적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그에 못지않게 군대 양성에서도 큰 두각을 나타냅니다. 강력한 훈련과 최신의 장비 지급은 일본군이 최소한 과거 봉건 국가들에서 볼 수 있던 약탈과 폭력, 강간 등은 그래도 스스로는 다르다고 여겼으나, 난징에서의 그 참혹한 사건은 그 이상을 보여주었습니다. 여기에 저자는 이 사건에 대해 한가지 통찰을 보여주는데요. 분명 변명은 되지 않으나 이어지는 극심한 전투를 통해 분노가 극에 달한 일본군이 거의 조장된 분위기에 따라 민간인 부녀자들을 강간하고 무고한 젊은 청년들을 참수하고 난징을 인세의 지옥으로 만든 것은 “너희들이 아무리 서구에 지원이나 도움을 바란다 하더라도 저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전하려 한 것이 아니냐는 판단입니다. 다음 쉬저우 공방전과 황허강 제방 붕괴 이후 속속들이 일본군에 투항하는 중국인들이 등장하고 여기에 왕징웨이의 난징 부역 정부가 들어선 것으로 장제스의 무능과 그의 곁에서 제대로 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인간의 부재는 이러한 상황을 악화시키기만 했습니다.

그나마 미국은 중국이 일본 육군 60만을 늘어지고 있는 점을 이용하기 위해 티베트와 버마를 통한 물자 지원을 확대시키고 있었습니다만, 버마에 지배권을 갖고 있던 영국의 비협조와 중국 내부에 있던 미국의 정보 조직인 OSS와 장제스에 대한 극심한 불신은 장제스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하기에는 어려운 정치적 난맥상이 분명 존재하기는 했습니다. 최종적으로 가장 큰 문제는 장제스를 대신할 대안이 없다는 점이 심각한 수준이었고, 그저 일본군의 진격을 받으면서도 군벌의 통제를 강화하는 것보다 소련 스탈린의 도움이나 바라고 충칭에 들어 앉아 영국과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만을 바라기만 하는 상황으로 내몰렸습니다. 물론 그가 여러 사건이 지난 이후 자신의 일기장을 통해 소회를 밝히는 것을 저자는 소개하면서 어쩌면 그의 무능 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당시의 정치시대적 상황이 장제스에게 녹록하지 않았다는 점을 밝히려 했던 것인지는 모르나 자신의 부인인 쑹메이링을 비롯한 처가가 권력에 나서는 것을 위협으로 느끼고 그가 간혹 울음까지 터트린 것을 보면 실로 그를 편만 들 수 없는 상황임은 확실합니다. 여기에다 앞선 부분에서 설명한대로 그가 저지른 몇가지의 심각한 비도덕적이고 비인도적인 결정은 과연 권력 앞에는 어떠한 것도 우선되지 않는다는 마키아벨리의 언급이 실로 진실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살아있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또한, 이런 장제스와는 반대로 전쟁 당시 심각한 기근에 휩싸인 민초들을 설명한 14장의 허난성 대기근도 주목할 만합니다. 여기에는 어떤 농촌 마을의 장정들이 자신들의 허기를 견디지 못하고 길을 가던 부녀를 납치해 내장을 드러내고 어떻게 삶아 먹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아마도( 당국의 혹독한 고문을 통해) 이를 자백했던 것으로 보입니디만 이러한 사람들의 식인 행위가 꽤 뚜렷하게 있었고 이를 증언하는 사례가 이 책에서도 등장합니다. 아마도 이런 총체적 난국이 당시 비평가인 시어도어 화이트를 통해 “어떤 의미에서는 일본군이 과거 수십 년 동안 중국을 휩쓸었던 대다수 군벌들보다 더 나쁘게 보이지 않는다”고 비판하며, 이렇게 사리사욕만 채웠떤 군벌들이 중국의 상황을 가일층 악화시켰고 이러한 실정(식인과 같은 비참한 상황)이 비로소 미국에 알려졌을 때, 장제스와 중국에 대한 동정 여론이 돌기는 커녕, 다수의 미국 지식인들을 포함한 미국인들이 혐오에 마지 않았다는 사실은 일견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1941년부터 전쟁 막바지에 이르는 시기에는 장제스가 치뤘던 몇가지 정치적 손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국 군사 고문 조지프 스틸웰과의 관계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스틸웰은 미국 군부 가운데에서도 꽤 유명한 중국통으로 아마도 1942년 전까지는 루즈벨트 대통령이 그를 신뢰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버마 작전을 포함한 전략적 실행 순간에 장제스와 스틸웰은 사사건건 대립했고, 장제스의 부인 쑹메리잉이 7개월간의 미국 방문 시기에 여러 실질적 검토를 통해 루즈벨트 대통령이 ‘말 안듣는’ 스틸웰을 소환시키려 하였으나, 참으로 어이없게도 장제스 대원수는 스틸웰과 잠정적 화해를 하게 됩니다. 이런 그의 착오의 결단은 가까운 미래에 윈난성에 쌓여 있던 비축 물자의 반출을 스틸웰이 거부함으로써 장제스에게는 또 한번의 패착으로 귀결됩니다. 특히, ‘버마의 실패’인 스틸웰을 소환시키지 않고 화해하게 된 연유에는 분명 어떤 정치적 고려가 있었을 것이나, 스틸웰이 자기 정치와 자기 이미지에 몰두한 인간이라는 것을 이해해보면 장제스와 스틸웰의 재결합은 결국 파국을 예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끝으로, “충칭에서 동쪽 저 너머로 향할수록 국민 정부(장제스 정부)가 서류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휴지조각이 된 지폐 이상의 권위를 갖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워졌다”는 14장에 나와 있는 저자의 평가는 이 불행한 시기에 또 얼마나 더 무능하고 불행한 정부가 다수의 백성들을 피폐한 삶의 고통과 죽음을 넘나드는 경험을 겪게 만들었는지 우리는 이 글을 통해 잘 목도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저는 여기에 영국의 처칠이 주요한 거악을 독일에서 일본으로 향하게 만들지는 않겠다는 취지의 노력이 루즈벨트에게 통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단순히 그저 장제스의 중국이 일본 육군의 바짓가랑이만 잡고 있으면 된다는 식의 정치적 계산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당시 일본 제국의 내각은 장제스로부터 만주국을 승인받고 (물론 이는 왕징웨이의 손에 이뤄졌지만) 노몬한 사태 이후 소련과의 불안한 중립과 중국 전선에서의 안정이 결국 진주만 사태로 이어지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이것은 진주만 공습을 위해 중국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라는 확대 해석이 아니라 이러한 정치적 상황이 조성되자마자 미국을 손봐줘야겠다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어리석은 결정을 초래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물론 명목상은 미국 정부의 일본에 대한 금수 조치이기는 합니다만, 육군에 비해 실적이 미미했던 일본 해군이 주도하는 진주만의 공습은 역사적으로 어떻게 귀결되고 말았는지를 잘 설명해준다고도 말씀드리고 싶군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이 글을 내내 읽으면서도 번역이 정말 탁월하여 막힘없이 술술 진도를 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번역자들의 노력을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습니다. 마찬가지로 근래 재출간 된 A. J. P. 테일러의 글과 함께 래너 미터의 이 글 역시 많은 독자들의 선택을 받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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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의 세기 - 독일 망명자들과 냉전의 이데올로기적 토대
우디 그린버그 지음, 이재욱 옮김 / 회화나무 / 2018년 12월
평점 :
절판


이 글의 저자 우디 그린버그는 현재 미국 뉴햄프셔에 소재한 다트머스 대학에서 역사학을 가르치고 있는 학자입니다. 특히 그는 유럽사와 지성사를 비롯 냉전사와 프랑스 혁명 시기의 자코뱅 당 연구로 명성을 얻기도 했습니다. 아쉽게도 위키백과에서 그의 관한 정보는 찾아볼 수 없었는데요. 심지어 구글에 나와있는 그의 사진 조차 몇사람의 얼굴로 검색되고 (동명이인 일수도 있겠지만) 다른 정보 역시 별다른 게 없었습니다. 아마도 저의 검색 능력이 부족해서 비롯된 것일수도 있기에 이 점은 양해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지난 2014년 원제 “The Weimar Century”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얼추 4년 뒤인 2018년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디 그린버그는 자신의 이 책을 통해 밝혀내고자 하는 점은 세계 제2차대전 당시, 독일 나치 정권의 핍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던 독일인들과 그 지식인들의 영향이 과연 냉전시기까지에 이르러 어떠한 결과를 낳았는지에 대한 학문적 분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바로 여기에 이 ‘바이마르’라는 단어를 집어넣은 것은 꽤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미국의 전임 대통령인 오바마조차도 1차대전 종전 후,독일에서 출범한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실패와 그 한계를 연설로서 밝힌바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세계의 독재들자들에게 민주주의의 실패로 조롱받기도 하였는데요. 저들의 후안무치한 논리에 귀담아 들을 필요는 없지만 우리는 짧게 이 바이마르시대가 어떻게 독일의 정치 실패가 되었는지 곰곰히 따져 볼 이유는 되리라 생각됩니다. 마찬가지로 이 책의 맥락 어느 지점에는 바로 이 ‘바이마르 시기’에 대한 저자의 가감없는 분석을 느껴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독일 망명자 출신임에도 미국과 세계에 영향을 끼친 5명의 독일 지식인들의 면면이 놓여 있습니다. 엘리트를 길러내는 교육에 관심을 가졌던 카를 J. 프리드리히와 법의 지배를 유달리 신봉했던 개혁가 에른스트 프렝켈, 보수적 가톨릭 신앙의 입안과 극렬한 반공주의자 발데마르 구리안, 나치에 의해 몰락한 독일 자유주의자의 면모이자 정치인인 카를 뤼벤슈타인, 조지 케넌과 더불어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을 고안한 한스 모겐소가 이들입니다. 우리에게는 특히 5장의 한스 모겐소가 유명할텐데요. 이와는 별개로 2장에 서술되는 ‘에른스트 프렝켈’은 우리와도 매우 밀접합니다. 그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카를 슈미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고 해방 전후, 미군정과 함께 남한에 들어와 우리의 제헌헌법을 기초하는 데, 영향을 끼친 인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더욱이 자신이 경험한 독일에서의 실패를 거울삼아 우리 한반도에 정치적 실험을 시도했는데요. 그것은 다름 아니라, ‘사회민주주의에 기초한 반공국가 건설’이라는 얼핏 모순되어 보이는 국가 건설이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프렝켈과 뢰벤슈타인 그리고 한스 모겐소를 중점적으로 읽어봐야 하는 장(Chapter) 으로 여겨졌습니다.

저자의 입을 빌어 표현한다면, 베르사유 체제 이후에 출범한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실패는 아마도 “많은 민중들이 선동하는 정치인에게 유독 약해보이고 정치적으로 휩쓸리게 되는 부분”이 그 원인으로서 한몫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저는 기존의 대중 대 엘리트의 정치 개념으로 일반적인 공화주의 체제에서 민중 내지는 시민을 계도의 대상으로 삼아 전자의 해석 부분을 기존의 엘리트 지배 체제에 대한 근거적 이념으로 여겨 마땅히 옹호만 하는 것을 다소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자 역시 4장, 뢰벤슈타인에 대한 부분에서 ‘다원주의적 체제’에 대한 짧은 언급을 통해 이 권력의 분산에 있어서 얼마간 동의를 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간 저는 로버트 달과 찰스 틸리를 통해 민주주의가 온전히 자리하기 위해서는 다원주의적인 가치가 반드시 이뤄져야 함을 여러편의 서평을 통해 밝힌 바가 있습니다. 아주 면밀히 따지자면 이 뢰벤슈타인의 ‘전투적 민주주의’가 냉전 시기의 꽤 고약한 산물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그 곁가지가 타협없는 반공주의가 기반했으나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해 어떤 결단이 필요했음은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다시 뢰벤슈타인의 경우 “사회적 평등과 법의 지배, 민주주의를 신봉”하고 있었음에도 그 당시 공산주의에 맞서 이처럼 타협없는 강력한 민주주의를 주장했던 것은 일찍이 모겐소가 예견했던 것처럼, 정치 권력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민주주의를 전면에 내세울 수 있다는 점을 아마도 간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조금 더 앞으로 돌아가보면,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이 독일 바이마르 시대가 어떠한 조각을 갖다 붙이고 수식어를 들이댄다 하더라도 아돌프 히틀러의 탄생에 대한 일종의 ‘자궁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여기에서 제가 들었던 의문은 왜 그 시기의 독일 자유주의자들은 변변한 저항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는가에 대한 일종의 안타까움을 동반한 것입니다. 사실 여기에는 (이 책을 통해서도 약간의 모티브를 받았지만) 선동 정치인에 의해 다소 휩쓸리기 쉬운 대중들의 소위 ‘약점’을 단순히 열거하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엘리트 지배체제가 필요하다고 논거를 확대해 - 1장의 카를 J. 프리드리히의 경우 - 공화적 민주주의에 대한 사실상의 이론적 반대를 강화하는 꼴이라는 점입니다. 1장에서 카를 J. 프리드리히는 공공선에 집중하는 엘리트들을 길러내는 것이 교육의 과제라고 이해했습니다만 이것이 계몽주의적 선을 신봉하고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 하는 것은 오늘날의 환경에는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하실 겁니다. 특히,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이런 사익추구에 대해 일종의 경외감까지 갖고 있는 기득권과 엘리트들이 부지기수인 것을 감안한다면 그야말로 순진한 생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오늘날의 민주주의 체제가 엘리트 지배체제의 또다른 면일 수도 있겠으나, 사실 시민에 의한 권력과 법의 지배는 그것 자체로 수호되어야 하는 부분이지만, 민주주의 내에서 엘리트 지배와 시민 권력의 힘의 기울기는 어디쪽에 있는지 명확합니다. 굳이 테크노크라트를 논하지 않더라도 이런 이행은 상당히 많이 진행된 상황입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또 들었던 생각은 이들 망명객들에게는 그 배후에 카를 슈미트가 있었다는 것이고 이를 오늘날 배경으로 해석한다면 최근의 네오콘 뒤에 레오 스트라우스가 있는 것과 유사합니다. 물론 스트라우스 역시 카를 슈미트의 영향을 받았는데요. 그래서 이들이 첨예한 냉전시기에 성조기를 등에 붙이고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추측해봤습니다. 최근에 샹탈 무페는 이 카를 슈미트가 우파쪽 뿐만 아니라 좌파에게도 현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점을 특이하다 까지는 아니고 꽤 이채로운 것으로 이해했습니다만 이들이 세계의 공산주의 확대에 맞서 어떠한 “결단”이 필요하다고 인지했던 점은 꽤 기시감이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이행에서 5장의 한스 모겐소는 베트남 개입에 대한 반대와 미국의 ‘병영국가화’에 대한 명백한 반대를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이것과 관련해 다른 측면에서 “개인적 권리와 집단적 권리는 서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는 2장, 프랭켈의 이 인식을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고민해 봤습니다. 현재 독일 내에서도 이들은 꽤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지식인이자 사상가들로 볼 수 있겠는데요. 이들의 매파 역할을 했던 미국의 역사학자가 이를 분석하고 있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해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프랭켈과 뢰벤슈타인도 이런 미국의 역할에 대해 공감하고 상당한 부채 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지는데요. 냉전 시기에 로널드 레이건과 같은 모순적 정치인이 활동하기도 했습니다만 이 때의 미국이 바이마르와 비견되는 것은 분명 억울한 측면이 있을겁니다. 다만 우리가 이 지점에서 잊지 말아야 할 부분은 당시의 극렬한 반공주의가 낳은 후폭풍 또한 가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엘리트들과 지식인들이 현명했다면, 혁명으로 체제가 붕괴될 것이라는 극단의 공포감을 조절할 수 있어야 했지만 결국 종말에는 미소간의 권력 게임으로 비하되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불행한 시기의 역사를 다시는 반복해서는 안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돌이켜보면 무엇보다 이 시기에 수많은 개인들의 권리가 대결구도에서 희생당했고 사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의 권리와 집단의 이익이라는 경계가 개념상 융해 되어버렸다 해도 과장되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런 연유로 저는 지그문트 바우만이 또 생각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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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데이터로 세상을 지배하는 사람들
스티븐 베이커 지음, 이창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4년 10월
평점 :
품절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논픽션 작가 및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는 스티븐 L. 베이커는 위스콘신-메디슨 대학과 컬럼비아 대학에서 수학한 뒤, 처음 언론사 경력을 쌓은 버몬트에 소재한 주간지 블랙 리버 트리뷴을 시작으로 베네수엘라와 에콰도르에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비즈니스 위크의 멕시코 시티 지사로 파견되었으며, 또한 프랑스 파리에서 유럽 산업 전반을 취재하는 등 경제 전문 기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특히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지금도 다른 언론사들에서 왕성한 기고 활동을 하고 있는데요. 뉴욕 타임즈와 월 스트리트 저널, 로스앤젤레스 타임즈 및 보스턴 글로브지가 이에 해당됩니다. 이 책과 관련해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제가 얼마전에 서평을 남긴 아난드 기리다라다스의 ‘엘리트 독식 사회’의 글 구성과 유사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두 책이 거의 동일하게 일종의 르포 취재 형식으로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전자는 소위 엘리트 계층에 속하는 이들의 언행을 통해, 후자인 이 책에서는 저자인 베이커가 고안한 일종의 IT 전문가들을 뜻하는 ‘뉴머러티 Numerati’가 사회적으로 이행하고 있는 변화에 대해 논하는 것으로 앞으로 ‘데이터 마이닝’을 뜻하는 빅데이터 사회를 가늠해보고 있습니다. 이 책은 지난 2007년 “The Numerati”라는 원제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0년에 초도 번역되어. 2014년 (아마도) 재개정판으로 2판이 출시되었습니다. 다만, 개정판이 나왔음에도 현재 이 책은 절판된 상황입니다.

우선, 이 책은 총 7장의 소주제별 구성과 마지막 결론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저자인 스티븐 베이커가 이 글을 통해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은 오늘날 발전된 웹 기반의 수집된 개인간의 데이터와 이를 통한 데이터 마이닝이 과연 어떤 미래를 우리에게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간략한 예측과 평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동안 재런 러니어를 비롯한 업계의 이론가들이 앞으로 우리의 프라이버시와 익명성이 구글과 같은 거대 웹기반 기업들의 데이터 수집으로 인해 시민의 권리가 사실상 위태로운 지경에 이를 것이라 예견한 바가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이 책의 5장, 테러리스트에서도 논증하고 있듯이, “뉴머리티가 제공하는 도구를 활용하여 자체 감시를 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사회가 자유롭고 거침없이 돌아가고 구성원들이 나쁜 짓도 좀 하면서 살수 있을까를 알아보기 위함”을 라스베이거스의 소프트웨어 기업가인 제프 조나스의 대안으로 이를 관찰해보고 있는데요. 여기에 소개된 제프 조나스는 IBM에 소속된 전문가로 그 자신도 어떻게 하면 시민들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할 수 있겠는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지난 9.11 테러 이후 미국 사법정보 당국인 FBI와 CIA의 데이터베이스를 비롯한 방대한 이들 데이터베이스들을 통합하는데 미국 정부는 10억달러 이상을 쏟아부은 바가 있습니다. 현재 다수의 정보 당국을 총괄하고 있는 NSA의 주된 임무가 데이터 수집에서 이 대상자들을 찾아내는 것으로 바뀌고 있는 것으로 보아 현재 미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다수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테러리스트를 추려내는 과정이 과연 무고한 희생을 방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는 것은 우려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전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에서 이런 정보당국의 비대화가 과연 바람직한 일인지는 이들 미국인들의 관심과 의회 지도자들의 끊임없는 감시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여기에는 또 한가지 중요한 부분이 있는데요. 후에 이어지는 백악관을 비롯한 권력자들이 이들 정보 기관의 입을 중요시하고 시민들의 기본적 권리를 국가 안보에 있어서 어쩔 수 없는 배치 기조로 더 나아간다면 이것은 그야말로 민주주의의 위기라고 불리워도 과도한 해석이 아닐겁니다.

또한, 이 책을 통해 NSA에서 일하고 있다는 수학자 제임스 샤츠를 통해 데이터 마이닝의 미래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것은 이들 뉴머리티 즉, 숫자 지식 계급이라는 IT 전문가들이 일반 시민들에 비해 민감한 업계에 일하고 있는 만큼 그만큼 높은 수준의 도덕적 기준을 이들이 갖고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위 많은 전문가들은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투입하고 있는 ‘특별한 자신의 분야’에 비이성적으로 매몰된 나머지 다수의 이익이라는 부분에서 괴리되는 성향을 보이기도 합니다. 즉, 내가 특별한 일을 맡은 선택된 인간이라는 관점에서 과도한 자부심을 갖고 더 나아가 본인 역시 이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것을 망각하게 되는 계급주의적 사고관을 가질 수가 있는데, 이 부분이 권력과 결탁하게 되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는 명약관화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이들 전문가 그룹들을 아주 밀착해서 감시할 만한 어떤 수단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이것은 앞으로 관련 학자들이 염두해 두어야 하는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마찬가지로 이 책에서 기본적으로 따르고 있는 법칙은 현재 웹 검색 기반의 구글이나 다른 쇼핑몰 사이트 및 신용카드 회사들이 그것이 적법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시민들의 여러 정보 조각들을 수집해 자신들의 이익으로 수렴하는 데 쓰이고 있다는 이해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무차별적으로 수집되는 개인들의 데이터들이 어떤식으로 데이터 마이닝을 걸쳐 실제 소비 생활이나 사적인 행위 등에 쓰이는지 밝혀내는 것이 바로 2장, 소비자입니다. 이 광범위한 소비 업계에 근무하는 뉴머리티들은 일종의 소비 패턴 분석가들로서, 이를 통해 개인들의 성향과 소비 습관들을 정확히 분석해내고 이를 기업에 이용하는 등의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신용카드의 문제는 내가 사용한 카드의 명세서가 중앙서버에 저장된다는 점과 이것에 대한 접근권이 불명확하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일겁니다. 이것들은 공적으로 처리된 것이 아니라, 아주 지극히 사적인 범위안에 들어가 있는 부분으로 이 사적인 정보들이 소위 기업 영역으로 여겨지는 본사 중앙 데이터에 축적되는 것이 과연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는 것인가에 대해 논의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은 간략하게 5장에서도 분석되고 있습니다만 각 권력기관들이 여차하면 이들 신용카드 기록에 접근하기를 바라고 있으며, 이것에 대한 영장 청구가 과연 면밀히 고려되고 있는지에 대해 아주 당연하게 시민들을 의구심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으레 전문가들이 알아서 하지 않겠느냐는 입장은 자신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전체적인 다수 시민의 권리에 대한 일종의 인식적 책임 회피로 단순히 현재 우리가 국가 기관에 우리의 권리를 위임하는 형식으로는 매우 불안한 상황이며, 확실히 미국의 사례들을 고려해 봤을때도 현재 이 빅데이터 관련 문제가 전환기에 있는 만큼 애초에 이를 규정하고 제한할 법안이나 기구 등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정치와 관련한 3장, 유권자에서는 현재 미국 선거 운동 전반에 대한 꽤 내밀한 분석이 이번 장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미 미국의 선거 운동과 관련된 산업은 꽤 정평이 나있기도 합니다.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단골 소재로 등장하고 있고, 이를 위한 전문가들의 지원과 자원 투입이 매우 원할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민주당과 공화당은 자신들의 지지 기반을 확대하기 위해 일반 시민들의 개인 정보들과 그 알고리즘 등을 매우 상세하게 다루고 있고, 선거철이 되면 이를 통한 결과 예측이나 지지층 규모 등을 분석할 수 있는데요. 이 점은 꽤 공교롭게도 현재 미국의 금권 정치와 면밀히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과거 조지 W. 부시가 엘 고어 전 부통령에게 아슬아슬하게 대선에서 승리한 이후, 이것의 원인과 과정에 대한 분석을 당시 조지 W, 부시의 선거를 총괄한 이들이 수행하고 더 나아가서는 다우드를 비롯한 당시 전략가들이 부동표 지역에 대한 공화당의 영향력 확대에 힘을 기울인 것은 사실상 수백만 달러의 투자에 이른 것으로 봐도 무방합니다. 애초에 정치자금이라는 것이 이런 식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현재에 많은 민주주의 국가들의 선거 형태가 돈이 없으면 사실상 해결되지 못한다는 볼멘 소리는 이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언급하고 있는 것은 무차별적인 금품 살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선거 운동 전반의 천문학적인 비용 증가와 이를 더 부추기는 정치 자금법의 유명무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현재 사소하게는 우리의 여러 정보 단편들이 이제는 거스를 수도 조차 없는 거대 웹 기업들에 의해 수집되고 조직됨으로써, 이들 업종에서 대두하고 있는 ‘뉴머러티들’과 관련 산업의 이행 과정을 꽤 객관적으로 저자는 분석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책의 번역 제목인 ‘빅데이터로 세상을 지배하는 사람들’은 출판사의 꽤 의도적인 시도로 개인적으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전반적인 맥락으로 우리의 아주 기본적인 프라이버시와 권리가 이들 뉴머리티들의 손에 처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대체로 이 분야에 대해 호의적인 학자들과 언론사들은 이러한 이행과정은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고 있으나, 앞서 제가 언급하대로 이들 모두는 매우 강도 높은 도덕적 기준을 갖고 있어야 하며, 자신들이 현재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명확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밝히고 있는 이 부분은 사실상 교과서에 등장할 만한 교리에 불과할 수도 있으나, 우리가 이들과 국가를 상대로 지난한 싸움에 돌입하기 전에 이들이 이러한 책임감을 갖고 있었으면 하는 조그만 바람을 써본 것으로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이 부분에서 아쉬운 점은 ‘개인의 자유’를 부르짖는 수많은 보수주의자들이 이것에 대해 입을 싸매고 있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입니다만, 이들이 말하는 본래 자유라는 것은 ‘개인의 이익을 취할 자유와 경제적 자유’뿐이니 일견 이해는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해당 업계의 관계자가 쓰는 디스토피아가 아니라 제3자라고 할 수 있는 언론인이 객관적으로 뉴머러티들을 통해 논증하고 있는 ‘미래 세상’은 꽤 의미가 있는 작업이 아닌가 생각해봤습니다. 따라서, 아쉽게도 이 책을 시중에서 구할 수가 없는 것은 많은 독자들에게 실망을 안겨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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