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는 미래가 있는가
이매뉴얼 월러스틴 외 지음, 성백용 옮김 / 창비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세계에 손꼽히는 사회학자 5인이 현재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전반적인 분석과 그에 대한 비판 그리고 앞으로 이 자본주의의 미래를 예측한 이 논저는 소위 2008년 세계금융위기 혹은 대침체에 착안하여 쓴 글이기도 합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현재의 자본주의의 여러 문제들로 인해 체제 전반의 위기를 느끼고 계신 분들이 많을 겁니다. 다만, 최소한의 상식선에서 이러한 진단을 하고 있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반대로 무비판적인 자유시장 원리주의에 이미 몰입된 사람들은 현재의 자본주의가 대체 무슨 문제를 안고 있느냐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는데요. 이런 부분을 차치하더라도 우리의 삶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이 자본주의에 대한 합리적이고 면밀한 분석은 그만큼 의미가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에 참여한 집필진인 총 5명의 사회학자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찍이 자본주의적 세계체제론을 분석한 이매뉴얼 윌러스틴, 개인적으로는 대니 로드릭과 비슷한 관점을 갖고 있다 여겨지는 랜들 콜린스, 특유의 군사학적인 관점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바라보고 있는 마이클 맨, 저명한 민족주의 이론가인 게오르기 데를루기얀, 비교 역사학과 실증 사회학의 거장인 크레이그 캘훈이 이들입니다. 이 책은 원제, ˝Does Capitalism Have a Future?˝로 지난 2013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이듬해인 2014년 1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간단하게 여기에 소개된 5인은 자본주의 체제 전반을 나름의 식견에 따라 다각도로 분석해 내고 있습니다. 윌러스틴과 콜린스의 입장은 자본주의 체제의 불안정성을 논하고 앞으로의 미래가 상당한 개혁이 없으면 암울하다는 전망으로 양자가 거의 유사하다고 볼 수 있으며, 다음 마이클 맨은 자본주의 체제가 급격하게 붕괴할 가능성을 먼저 부정하면서 대공황과 2008년 대침체를 기반으로 자본주의가 어떤 변화를 맞이하게 될지에 대해 논하고 있습니다. 데를루기안은 과거 구소련 체제에 대한 분석과 더불어 오늘날 자본주의가 저들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인가에 대해 분석하고 마지막 캘훈은 자본주의가 스스로 개혁된 상태로 온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진단하고 자본주의 자체가 시장 경제이면서 동일하게 정치학적인 카테고리를 갖고 있다면서 이런 고리들이 꽤 견고한 상황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윌러스틴이 세계제체론에 입각해 자본주의의 노정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하는 부분에서 특유의 ‘헤게모니 사이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모든 이데올로기적 체제가 각자 수명을 갖고 태어나며 자본주의 역시 그것을 벗어나기란 어려우리라는 진단을 그는 내리고 있는데요. 자본주의 자체를 거대한 생명체로 여기는 학자들이 의외로 많은 것처럼 이것을 논외로 하더라도 어떠한 사상이나 체제 자체가 인간의 역사에서 영원히 존속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은 학문적인 접근에서도 쉽게 긍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사실 현재의 자본주의적 경제 기조의 위기가 어떻게 보면 미국의 헤게모니 쇠퇴와 연결이 될 수도 있을텐데요. 대략 46퍼센트에 이르는 미국의 국방비 지출과 반대로 사회 부문의 비용 투입에도 불구하고 미국 사회 전반의 사회 보장이 유수의 선진국들 가운데 최하를 걷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가 효율성을 부득 강조하는 점을 감안한다면 쉽게 받아들일 수 없은 수치입니다. 이에 마이클 맨은 ˝자유시장에 대한 호소가 자비로운 국가에 대한 호소보다 이데올로기 상으로 더 깊이 미국에 뿌리내리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미국인들이 신념 이상으로 내면화 되어있는 자유에 대한 믿음과 그 자유를 잣대로 자신들의 삶 마저 해석하는 이러한 특유의 관념적 상황은 미국의 자본주의가 어떠한 양상을 띄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8년 뉴욕발 세계금융위기에서 아마도 수많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질서 옹호론자들에 의해 ‘금융시장에서의 케인스주의적 대처‘를 한시적으로 수용하기도 하는데요. 이러한 맥락을 견고한 사회학적 틀의 변화로도 받아들일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경제학자들이 적극적인 국가 담론을 거부하며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을 강하게 옹호했던 얼마전의 주장이 문득 떠오릅니다. 다수의 이익을 위해 시장 자체를 붕괴 상태로 내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뭐랄까 이런 전개에 대한 아무런 자각이 없는 저 금융 엘리트들을 보노라면 다소 후안무치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매뉴얼은 이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에서 자본을 영원히 축적 가능하다는 점을 회의적으로 보고 있었는데요. 뒤이어 논증되는 콜린스의 주장에서도 마찬가지로 불평등의 심화 자체가 다수의 중간 계급을 몰락에 이르게 하고 더 나아가서는 과소 소비를 초래한다는 점에서 혁명의 기운을 우려할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자본주의를 내부부터 몰락하게 할 원인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하에서 불평등의 심화와 금융 시장의 불안˝이라는 이 두 가지 사안은 미래의 자본주의를 어떤식으로든 변질시키는 위험요소라 할 수 있을텐데요. 상위 고소득 계층이나 이미 부유의 단계를 넘어선 소수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부를 성공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회의 안정이 최대로 중요한 요소이며, 콜린스의 주장대로 지금처럼 자본주의가 온라인 사업과 인터넷 혁명으로 종래와 달리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경우 이 새로운 테크노크라트들이 불평등의 문제를 등한시하게 됨으로써 그 자체로 자본주의를 종말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는 경고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콜린스의 중요한 주장대로 중간 계층의 소멸내지는 몰락이 그 자체로 자본주의의 건전성을 해치게 되리라는 것을 익히 전망하게 하는데요. 이처럼 사회의 건전성과 자본주의의 체제 유지는 매우 연관이 되어 있으며, 이것을 가소롭게 혹은 대단치 않게 보는 이들의 논법이 과연 스스로의 안정에도 도움이 될 것이냐에 대해서는 지극히 회의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윌러스틴과 콜린스는 자본주의 체제의 순수한 종말로서가 아니라 여러 복합적 요인들로 인해 이 몰락이 가속화 될 수 있다고 보는데요. 핵무기에 따른 핵전쟁 가능성과 심각한 기후 변화로 인한 인간 삶의 위태로움이 자본주의 종말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사회적 격변을 초래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즉,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으로 인한 혁명이 아니라 무차별적으로 자본을 축적하기를 바라는 탐욕의 자본주의가 지구와 인간 사회의 건전성을 무너뜨리고 스스로 자멸에 이르는 것을 사실상 뜻하는데요. 특히 무지한 경제학자들이 자신들이 신봉하는 ‘시장자유의 순수성‘이 끝내 자본주의를 비명에 이르게 할 수 있으며, 그것은 정치사회적인 혁명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스스로 목줄을 졸랐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여기 콜린스의 예측과 거의 일맥상통한다고 생각됩니다. 이 두사람과는 달리 마이클 맨은 ˝미래의 혁명적 변혁˝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자본주의가 내부 모순의 가능성을 크게 받아들이기 보다는 전반적으로 자본주의 체제가 종말을 고하지는 않을 것이며, 그에 대한 근거로 현대 좌파의 세력이 매우 보잘 것 없으며, ˝좌파의 미래는 기껏해야 개량주의적 사회민주주의거나 자유주의가 아닐까 싶다˝며 이를 일축합니다. 사실 과거 신자유주의적 파고에 있어서 진보 좌파의 몰락 자체는 근본적으로 사회에 있어서 이익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지구가 아니라 다른 행성에 살고 있는 것이겠죠. 마이클 맨의 앞선 결과론적인 견해로 좌파의 몰락을 분석하려 시도한다면 그야말로 오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한술 더 떠서 마이클 맨은 핵무기와 어쩌면 연관성이 있을 민족주의를 자본주의 체제의 종말 보다도 더 위험 요소로 보고 있습니다만 이에 대한 진정성은 차치하더라도 자본주의의 대안을 그저 ‘네오파시즘적 이행‘으로 한발 물러서 이를 분석하는 것은 막연한 소설보다도 더 위험하다고 여겨집니다. ˝금융자본과 신자유주의의 영향이 지대한 미국과 영국˝을 이해하면서, ˝이 신자유주의가 금융 자본이 뜻하는 대로 몸을 움직여 많은 나라들을 수렁에 빠지게 한 점˝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인류가 어떤 짓을 하던 자본주의를 벗어나기 힘들것이라는 틀에 박힌 주장은 통념으로는 그럴 수 있다쳐도 밀접한 대안이 되지 못하는 것은 명백한 한계라 할 수 있겠습니다.

크레이그 캘훈은 ˝2008년 위기의 뿌리는 미국과 유럽에 집중되어 있었다˝ 분석하면서 더욱이 유럽에서는 반정치의 위협까지 존재했다고 덧붙입니다. 물론 이들 반정치 운동의 근본적인 원인은 시장에서 정치를 퇴출시키는 교묘하고 대담한 전방위적인 작업에 있다고 봐야할텐데요. 앞선 마이클 맨의 주장대로 시장 경제를 부정하고 탈자본주의적 길에 들어서는 국가가 등장할 경우, 이 국가는 자본주의 체제를 존속시키고 유지시키려는 다수의 국가들에 의해 봉쇄 내지는 북아프리카의 민주화 운동 시기에 프랑스와 영국이 개입했던 것처럼 진보와는 아주 다른 양상을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자본주의적 위기는 모순의 양상에 따라 어느 국가에서든 존재할 수 있지만 아예 탈자본주의에 이를 수 있을 것인가는 매우 어려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전세계게 이미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로 자리매김하고 있고 만약 예멘이나 콩고와 같은 국가에서 탈자본주의 운동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국지적인 문제로 국한되겠지만 반대로 일본과 같은 국가에서 탈자본주의로 나아갈 경우 종래의 자본주의 국가들이 연대해 일본에 개입하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캘훈의 입장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체제가 어느 한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전세계적인 사회경제적 체제이며,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양대 기조에 해를 끼치려고 하는 자들이 나타나는 것은 그것의 실효성 여부를 떠나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2100년 이후 급격한 기후 변화 때문에 세계 체제가 흔들릴 가능성이 있다고 필자들은 예측하고 있었지만 사실상 가장 높은 시나리오는 자본주의 자체가 내부 모순으로 인해 스스로 자멸할 수밖에 없는 길에 들어서는 것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심각한 불평등 문제와 계급 간에 심대한 경제적 차이는 자본주의 스스로를 몰락하게 하는 요소이며, 이것에 대해 제대로 된 접근을 하지 않을 경우 자본주의를 몰락하게 하는 것은 혁명이 아니라 스스로의 문제 때문이라는 것을 거듭 밝혀두고 싶습니다. 바로 그런 연유로 윌러스틴 역시 ‘도덕적 가치의 회복‘이라는 부분을 거듭 강조하고 있고 기술 관료들과 엘리트들이 사회문제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는 콜린스의 주장 역시 자본주의의 존속에 필요한 일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물론 이러한 가운데 ‘핵전쟁에 따른 절멸‘이 인류 생존의 문제로 남아 있고 전쟁으로 인한 갈등 해결이라는 해법이 ‘상호확증파괴‘라는 지옥의 실현 가능성 때문에 핵전쟁의 발발을 방지하고 있지만 이를 반대로 뒤집어 보면 잃을 것이 없는 ‘실패 국가‘가 핵무기를 사용하게 될 환경이 조성된다면 이를 방치한 국제 체제의 무능으로 인해 비롯될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대니 로드릭은 이미 국제 체제의 비규범성과 비민주화로 인해 언제나 이러한 위험성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는데요. 이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으며 기존의 체제를 터무니 없이 맹신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인류 전체가 항상 주지하고 있어야만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나라의 진보주의의 일각에서 아직도 한국을 유독 남한이라고 지칭하는 경우가 있는데요. 이 출판사가 진보를 대변한다고 여기지는 않지만 글 본문에서 남한과 한국을 동시에 표기하는 것은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더불어 이딸리아나 에스빠냐 혹은 엘리뜨와 같이 과거 ‘종속 이론‘과 같은 논저에서 보여지는 단어 번역이 이 글에서도 볼 수 있었는데요. 그저 현재의 외래어 표기법을 지켜줬으면 하는 바람 뿐입니다.

중도 자유주의는 세계체제의 지배 이데올로기, 사실상 유일하게 정당한 이데올로기로서의 지위에서 물러났다

오늘날 세계 앞에 놓인 문제는 자본의 끝없은 축적을 효율적으로 추구하는 능력을 되찾을 수 있도록 정부들이 어떤 식으로 자본주의 체제을 개혁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다

컴퓨터로 경영되는 미래 세계가 반드시 조지 오웰이 1984에서 묘사한 것처럼 첨단 과학기술을 이용한 감시와 독재국가의 지배가 이루어지는 세상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 산업의 생산품들에 대한 열광이야말로 자본주의를 잘 굴러가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다

그렇게 되면 경제 전반에 걸쳐 개인 소비지출을 지탱하고 그리하여 자본주의의 작동을 지속시키는 데 충분할까? 금융시장들이 밑바닥의 군소 참여자들을 착취하면서 점점 더 집중화하는 쪽으로 나아간다면, 그렇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전부는 역사적 혁명들과 폭력의 다양한 양상이 최종적인 자본주의 위기에도 역시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핵심은 한결같다. 중간 계급의 기술적 대체가 지금 자본주의가 지배적인 지역들에서 21세기 끝나기 전에 자본주의의 몰락을 몰고 오리라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권력과 지성인 - 개정판
에드워드W.사이드 지음, 전신욱.서봉섭 옮김 / 창 / 201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기를 뒤흔들었던 명저, ‘오리엔탈리즘‘의 저자인 에드워드 와디 사이드는 공공 지식으로서의 자신의 책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던 지식인입니다. 그는 팔레스타인 계 미국인으로 프린스턴과 하버드를 거쳐 2003년까지 컬럼비아에서 후학을 지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사이드는 중동과 관련된 미국의 외교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해 왔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논저가 탄생되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에드워드 사이드가 새뮤얼 헌팅턴과 완전 다른 대척점에 있는 학자로 이해되고 있는데요. 사회체제 안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권력에 대한 비판을 지식인들이 가면 갈 수록 해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 책무를 다하는 지식인의 존재는 실로 귀중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의 이 글은 서문에도 간략히 소개되고 있는 것처럼, 1948년에 버틀란드 러셀이 주도한 영국 BBC의 리스 강좌 Reith Lecture 에 출연한 사이드의 강의를 묶어 출판한 된 것입니다. 따라서, ˝Representations of the Intellectual˝이라는 원제로 지난 1993년에 처음 출판된 이 책은, 국내에는 1996년 초도 번역이 이뤄졌습니다. 이후 2011년, 개정판이 국내에 출간되었습니다. 우선 뒤에도 차차 다루겠지만 번역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을 수가 없겠습니다. 정말 개정판이라는 말이 아까울 정도로 이 책의 편집 자체는 처참한 수준인데요. 단언컨대, 이 책을 펴낸 출판사의 편집 인원들이 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실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 편집 오류에 대해선 글을 마무리하고 따로 기록하겠습니다. 그리고 원제를 충실히 번역하지 않은 국내 번역본의 제목에 대해 비판을 하고 싶은데요. 글 전체의 문맥을 좀 더 완벽하게 이해하는데 있어서 책 제목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번역 제목의 취지는 공감이 될 만한 부분이 있기는 합니다만 책 판매고를 위해서인지 원제와 동떨어진 제목 번역은 한국 출판계의 자기들 스스로의 관행이었으니 제목 문제는 이쯤에서 마무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지성인 Intecllectual 에 대한 쥘리앙 방다의 강고한 정의를 먼저 밝혀보자면, 그는 자신들의 말과 글에 권력에 의해 화형을 당할 각오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 지성인 계층의 의무라고 표현했습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할말을 할 수 있어야만 지성인의 책무를 다할 수 있다는 관점은 오늘날 사회와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는 부분이라고 많은 분들이 그리 여기실텐데요.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 에드워드 사이드가 글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그만큼 사회의 도덕성과 정의감이 상당 부분 쇠퇴해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이상적인 목적 자체에 대한 현실 괴리라는 측면의 부정하는 사조 자체가 사회 전반에 너무나 강고하게 깔려있으며, 모든 각계 각층이 이 ‘현실적인 조건‘에 대해선 끊임없이 입아프도록 발언하면서도 앞으로 다음 세대나 혹은 인류 전체가 나아가야 될 방향을 규정하는 이상향에 대해서는 밑도끝도 없는 거부감이 바탕이 되어 있는 것은 그 자체로 부정하기 힘든 현실일겁니다. 이와 관련해 사이드는 지성인이라는 부류가 ˝자유와 정의를 위해 행동할 의무˝가 있으며, 특히 재현 Representation 즉, 불의한 상태에 있는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지식인들이 마땅히 이들을 대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대한 오늘날의 사회 전반을 분석해 보자면, 인류가 지난 역사에서 걸어왔던대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마땅히 보장 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만 하는 부분은 충분히 공감할 만합니다. 그러한 노정 가운데 이 지식인들(앞선 의무를 제대로 하지 않는점에서 저는 지식인이라 지칭하겠습니다)은 자신들의 이익을 먼저 챙기는 쪽으로 타협하게 됩니다. 이 점과 관려해 저자는 5장에서 권력과 보다 밀착한 지성인들의 사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권력의 요구와 방향성에 스스로 순종하면서 그에 대한 반대급부를 끊임없이 추종하는 현대의 지식인들의 자화상은 만약 쥘리앙 방다가 이를 목도하게 된다면 과연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과거 장 폴 사르트르는 지식인들이 대학의 바깥에서 홀로 존재해야만 한다고 했던 것은 그 자신의 도도함을 위해서가 아니라 보다 이익에 자유로워진 상태에서 지식인의 책무를 다하라고 요구했던 것으로 이해됩니다. 물론 사이드는 이런 사르트르의 입장을 완전히 지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여기에서 소개되고 있는 노엄 촘스키처럼 할말은 해야하고 누구 눈치도 볼 필요도 없이 비판은 서슴치 않는 그런 정신만은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듯 보였습니다.

따라서, 사이드가 무엇보다 강조하는 지성인의 과업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성인의 절대적으로 중요한 과업으로 추가해야 할 것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지성인이 자신의 국민들의 집단적 고통을 재현하고, 그 고통의 극심함을 입증하고, 고통의 지속적인 존재를 다시 확인하고, 고통에 대한 기억을 강화하는 것과 같은 의무가 있음에 틀림없다는 점이다˝라고 강조합니다. 현재의 세계가 권위적인 정부들에 의해 수많은 시민들이 억압받고 있는 상황을 충분히 인지한다면 앞선 방다의 날선 주장은 결코 허언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지성인의 양심은 내가 아니라 다수의 계층이 핍박받고 고통을 받는 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다는 목숨을 걸어야 될 정도로 중요한 일이라고 파악했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지성인들의 노정이 ˝인간의 자유와 지식을 발전시키는 것˝에 있다는 자체가 ˝여전히 변함없는 진실˝이라고 확신하는 점은 더할 나위 없이 진정성을 갖추고 있다 생각됩니다. 지성인 개인의 권리나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정치인들이 공익 앞에서 자신의 사익을 저울질하며 정치 전반을 반정치로 퇴행시킨 원동력이었다는 점에서 지성인이 자신들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을 경우, 사회의 미래 자체가 어떻게 될지는 무슨 아마겟돈과 같은 상상속의 산물이 아니라 충분히 파괴적인 결말을 예측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4장에서는 정부와 하나가 된 지성인들의 맹종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했는지 보여주는 사례가 등장합니다. 종전의 제임스 뷰캐넌과 같은 지식인이 CIA의 의도에 장단을 맞춰 칠레의 민주 정부를 전복시켜 미국의 뜻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를 세운 것은 의미심장한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제3세계의 정책을 지원하기 위해 수행된 반게릴라 연구 가운데 일부의 경우는 은밀한 활동, 사보타지, 심지어는 노골적인 전쟁에 직접적으로 적용되었고, 도덕성과 정의 문제들은 그러한 계약들이 충족될 수 있도록 뒤로 제쳐졌다˝고 사이드는 이와 같이 강조합니다. 사실 이익을 앞세우는 행위의 전반적인 사조는 도덕성과 정의를 뒤안길로 내몰았고 그러한 행태 자체가 꽤 영리하고 존경받을만한 것으로 포장되어 왔습니다. 밀턴 프리드먼과 같은 인물들의 이해는 바로 그러한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라이트 밀즈가 권력은 끊임없이 견제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에는 바로 그와 같은 파행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일겁니다. 그 견제를 주도할 수 있는 자들은 지성인들이며, 그 의무에 대해 반감을 조장하거나 다른 말로 곡해시키는 자들은 거의 선동과 다름없다 여겨도 의미가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5장에서는 소위 전문화와 직업전문주의의 시대에 대해 사이드 특유의 통찰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말과 현실의 괴리˝는 차치하더라도 이 엘리트주의에 대한 맹신은 ‘전문지식을 다룬다‘는 전문 직업 계층의 입장과 발언을 가면갈 수록 맹신할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가 고착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제가 반엘리트주의자로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은 소위 그 분야에서의 리더라고 하는 자들이 허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무엇이든지 수용하고 길들여진다˝는 사이드의 맥락에 동의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이 엘리트주의에 있어서 다수의 보편성과 보편주의는 허용이 되지 않기 때문에 자신들의 폐쇄성을 용인하는 것 자체가 특수성이라는 논법으로 사실상 사회의 계층화를 초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자본주의는 계급주의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 이념이었음에도 충분히 변질되어 왔으며, ˝잘 사는 자들의 이익˝, ˝고도로 교육받은 자들의 이익˝, ˝전문 직업에서 일하는 자들의 이익˝ 등 아주 노골적으로 주장되지는 않고 있지만 사회 전반이 이들의 이익을 거의 용인하고 있는 상황이며, 그것을 능력주의나 자아 실현 등으로 포장되어 교묘하게 자신들을 소수라 규정하고 다수의 횡포에 어떻게 맞설 수 있겠느냐로 사회적 발언 자체가 왜곡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권력 구조 자체가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에 있어서 부유층과 전문 직업 계층과 다수 시민들의 심각한 불균형적 상황을 그저 자본주의의 원초적 모습이다 혹은 그것이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것이다 라고 하는 점은 이미 사회가 모순의 심각한 지경으로 치닫고 있는 게 아닌가 판단해봅니다. 애초에 보수라고 불리웠던 자들이 초기 자본주의에서 극렬하게 저항했던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지성인 뿐만 아니라 시민들 모두가 아마추어 정신을 갖고 사회를 비판하고 정의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주장은 꽤 설득력이 있기도 합니다. 권력 자체를 지향함으로써 대다수 언론인들이 비판 의식을 결여한 작금의 상황은 자본과 결탁한 정치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시민들이 자본주의에 반항하지 못하도록 길들이는데 막대한 자금이 투하된 것이 한몫 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는 개인의 지향 목표를 오로지 보유한 재산으로 평가받게 하는 탁월한 계산도 이바지했으며, 사익을 추구하는 것 자체에 대한 경계심을 상당히 유명무실하게 만듦으로써 아이러니하게도 사회가 자본에 의해 건전해지지 않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사회가 주체가 되어 자본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하지만 엘빈 토플러의 말대로 자본이 전 세계의 제1 권력이 된 것은 절대 과장이 아님을 이해하게 됩니다. 일전에 신자유주의의 파행을 제대로 견제하지 못했던 것은 유럽의 진보 좌파의 몰락이라고 언급했던 바가 있는데요.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 보니, 시민과 좌파 사이의 조직적인 이간질은 차치하더라도 소수의 좌파가 스스로 이와 같은 거대한 파고를 견제할 수 있는 능력이 아예 없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모두 죽을 각오를 하고 저 파고에 대항하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측면으로 봤을 때는 지나친 요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한편으로 들기도 합니다.


-본문 72페이지, 78페이지, 89페이지에 띄어쓰기 오류, 알베르 카뮈에 대한 통일되지 않은 호칭 (카뮤, 까뮈), 96 페이지에 등장한 헨리 키신저에 대한 성명 오타 (킨시저), 나중에는 키신저로 표기, 92페이지에서 93페이지에 레반트, 러반트의 통일되지 않은 지명 등 확실히 출판사의 편집인이 제대로 책을 검수하지 않은 점은 확실해 보였습니다. 더군다나 이런 불완전한 상태의 책을 개정판이라고 내는 처사는 실로 어처구니가 없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지성인은 약하고 대변되지 못하는 자의 편에 속해야 한다는 나의 생각에는 전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지성인의 절대적으로 중요한 과업으로 추가해야 할 것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지성인이 자신의 국민들의 집단적 고통을 재현하고, 그 고통의 극심함을 입증하고, 고통의 지속적인 존재를 다시 확인하고, 고통에 대한 기억을 강화하는 것과 같은 의무가 있음에 틀림없다는 점이다

권력으로부터 보상을 받은 그러한 전문직업인의 위치에 있게 된다는 것은, 나의 관점에서 볼 때 지성인이 기여해야 하는 분석과 판단에 있어서, 비판적이고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정신을 행사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항상 느껴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종차별주의 사고의 프런티어 2
고모리 요이치 지음, 배영미 옮김,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기획 / 푸른역사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일본 도쿄 출신의 고모리 요이치는 홋카이도 대학에서 석사와 박사를 마친 후, 세이조 대학의 조교수를 거쳐 도쿄대학에서 정교수로서 강의를 시작해 지난 2019년 명예롭게 은퇴한 학자입니다. 특히, 그는 9조 모임 九条の会의 사무총장을 역임하고 있기도 한데요. 이 9조 모임은 일본이 전쟁을 영구히 포기하고 무력을 보유하지 않는다고 규정한 일본의 헌법 9조의 개정을 저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단체입니다. 따라서 고모리 요이치는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시민운동가이자 전후 체제에 있어서 과거 일본의 과오를 인정하고 평화 헌법의 개정을 반대하는 등의 소위 일본 내의 ‘리버럴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9조 모임에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오에 겐자부로와 오쿠다이라 야스히로가 이름을 올리고 있기도 합니다. 이같은 그의 이력에 관해 여러 뉴스들를 번역기로 통해 읽어보니 소위 지식인의 책무에 대한 진정성을 엿볼 수가 있었습니다. 더불어 이외에는 나쓰메 소세키에 관한 연구와 최근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평론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이 글은 원제, ˝レイシズム Racism˝ 으로 지난 2006년 이와나미 쇼텐에서 ‘사고의 프론티어‘라는 인문학 시리즈물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5년 1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다만 안타깝게도 이 책은 현재 절판된 상황입니다. 참고로 위의 ‘사고의 프론티어‘ 시리즈는 국내에 삼인과 푸른역사에서 번역되어 출판되기도 하였습니다.

우선, 이 책은 2장까지가 인종차별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을 담고 있고, 마지막 3장은 일본의 문학을 통해 바라본 일본인들 자신의 인종차별주의를 드러내어 비판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인종차별주의가 매우 잘못 쓰이고 단어라고 여겨지는데요. 이 ‘인종차별‘에 대해 주의를 갖다 붙여 어떤 인식적 체계로 구성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와 비슷한 전체주의가 현재는 역사사회적인 범주로 많이 연구가 되어왔듯이 인종차별주의 또한 학문적 분석이 요구되는 것은 분명합니다만 이 뿌리깊은 차별의식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런 측면에서 지난 세기에 이 인종차별주의를 서구 유럽인의 시각에서 강화시킨 것이 저 개인적으로는 새뮤얼 헌팅턴의 기여가 크다고 여겨지는데요. 헌팅턴이 범한 가장 큰 잘못은 과거 서구 유럽의 식민지 지배에 따른 과오에 일종의 학문적 면죄부를 주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자신이 속한 서구 문명의 우월성 등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인류의 각 인종이 우와 열로 구분된다는 식의 히틀러식 논법은 신자유주의자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글로벌리즘과도 매우 반대되는 개념이기에 이와 같은 헌팅턴의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인종차별주의의 방패막이가 되지 않았나 추측해봅니다.

물론 이 글의 저자인 고모리 요이치는 스스로 일본인의 입장에서 현재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격차세대‘라는 현상과 더불어 신자유주의적 경제 차별주의에 대해 우선 비판하고 있는데요. 그가 서두에서 언급하고 있는 소위 ‘롯폰기‘ 현상은 앞선 신자유주의의 이질적인 결과물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보다 유럽의 경우는 과거 유대인들에 대한 터무니없는 혐오와 차별의식 그리고 현재에 새롭게 대두되고 있는 이슬람인들에 대한 심각한 차별은 배제와 편입이라는 집단 내와 집단 외부를 극단적으로 분리시키고자 하는 인간 본연의 문제라고 치부하기에는 그 정도가 지나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종이 같은 종을 쉬이 살해하고 재산을 수탈하는 등의 수많은 역사들이 증명해 내고 있는 것은 점철된 인간의 불확실성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저자인 고모리요이치는 프로이트를 통해 이를 분석하고자 합니다만 저는 이런 작업도 나름 의미가 있겠지만 철학적 접근에서 인간이 노골적으로 이성을 배제시키려고 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사실 그동안 유럽에서 뿌리깊게 각인된 고학력 계층의 백인들이 주도하는 사회 권력은 오랫동안 지배체제로 자리매김해 왔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저자도 동의하고 있습니다만 과거 이들의 견고한 권력은 제국주의 시대에 식민지 지배에까지 이어져 내려가 전승되어 내면화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것은 ˝다윈의 진화론으로부터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을 거쳐 19세기 후반 서구 열강이 ‘문명‘과 ‘야만‘이라는 자기합리주의적 흑백 논리˝에 젖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백인 계층의 인종적 우월성을 바탕으로 지금까지도 유럽 전체가 아프리카 대륙을 식민지로 착취했으면서도 그에 대한 여타 사과의 발언을 기피하는 것은 그러한 맥락으로 이해됩니다. 아마도 서구 유럽인들에 내면에는 ˝자신들의 우월성을 억지로 부각시키려는 노력˝이 견고하게 내재되어 있다고 봐야 하겠죠.

이미 이러한 차별의 인식적 문제가 초래하고 있는 현재의 유럽 상황에 대해 자크 랑시에르 조차 큰 우려를 밝힌 바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신자유주의적 이행과 맞물려 계급적 차별 의식까지 벌어지고 있는데요. 누구나 이성을 갖고 있는 인간이라면 아무리 인종차별적 혐오에 스스로가 물들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당당히 겉으로 드러내는 일은 흔히 양심의 문제와 결부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2010년 전후로 극우 포퓰리즘이 정치 세력으로 등장하면서 이와 같은 양상이 크게 달라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랑시에르는 이 점을 우려하고 있는 듯 한데요. 저는 인종차별주의와 극우 포퓰리즘이 지금처럼 적극적으로 영합하면 유럽에서 유사 전체주의가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많은 현지의 지식인들이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겁니다. 이러한 유럽의 분위기를 살펴보면 과거에 토크빌과 듀이가 경고한 것이 허무맹랑한 것이 아님을 인지하게 됩니다. 시민들이 도덕주의적인 재교육을 하지 않고 시민 본연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면 그 초래되는 결과가 무엇이든 간에 무조건 되돌아오게 된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사실 이 인종 차별과 관련해 순전히 계몽주의적 접근 자체를 그닥 좋아하지는 않지만 인간의 이성을 배제하고 본능과 자연스러움이라는 원초적 쾌락주의를 주장하는 다수 지식인들의 작태는 유럽의 계몽은 쓰레기통에 떨어진 것이 아닌가 여겨질 따름입니다.

약간 이른 결론이지만 저자는 이 책 2장 후반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종차별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언어 시스템 속에서 ‘자명‘하다고 여겨지는 긍정/부정의 가치 평가를 수반한 언어의 상호간 결합관계의 그물망 전체에 ˝왜?!˝라는 질문을 계속 던지면서 그 내구성을 검증해야 한다˝고 밝히는데요. 꽤 수긍이 될만한 주장이라고 생각됩니다. 내부에서 그러한 만연된 인종차별주의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누구나 평등하게 태어난다는 여러 사상가들의 그와 같은 인용을 따로 적지 않는다 하더라도 인도가 지금까지 카스트 제도로 인해 사회적으로 큰 시름을 앓고 있듯이 스스로 비판 의식과 성찰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저자는 여기에 스스로 일본인으로서의 과거 일본제국주의가 고착화시킨 인종적 차별에 대한 언급을 마찬가지로 하고 있는데요. 후키자와 유키치로부터 시작된 소위 ‘탈아입구론‘은 일본인들이 ‘아시아의 백인‘이라는 망상으로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소수의 일제 앞잡이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아시아인들을 고통의 수렁으로 빠트린 ‘대동아공영‘은 일본의 철저한 반성이 필요하지만 현실을 그렇지가 못합니다. ˝죄를 인정해야만 타자의 존엄성을 인정할 수 있다˝는 저자의 통찰은 일본인들에게 매우 시급한 과제로 남은 것은 분명합니다. 일본사회가 스스로 이러한 점을 자각할 수 있게 되는 날이 와야 하겠지만 현재의 일본 정치를 고려했을 때 이러한 소망은 아마도 금세기 내에는 이뤄질 수 없는 것이라 판단됩니다. 그나마 소수이지만 일본 내에 이런 지식인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매우 귀중하다 볼 수 있겠습니다.

인종주의의 근원은 특권 계급적 인종주의다

다윈의 진화론으로부터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을 거쳐 19세기 후반 서구 열강이 ‘문명‘과 ‘야만‘이라는 자기합리주의적 흑백논리로써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맹위를 떨친 것인 ‘생물학적‘ ‘인종차별주의‘였다

‘인종차별주의‘는 특정 그룹의 사람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특권, 즉 기득권을 옹호하려고 할 때 발생한다

이러한 생물학적 특징으로 남을 차별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고 해서 우리가 ‘인종차별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보장은 아무데도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인간은 다른 여타 동물과는 전혀 달리 같은 인류에게 공격과 폭력을 자행하는 종이기도 하다

수천 년 동안의 디아스포라, 즉 전쟁이라는 폭력으로 인해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기억과 현재진행형 전쟁으로 인한 홀로코스크의 기억을 미국과 영국이라는 두 대국이 이용하면서 중동을 거의 영구 분쟁 지역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치를 옹호함 - 정치에 실망한 사람들에게
버나드 크릭 지음, 이관후 옮김 / 후마니타스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국의 저명한 정치 이론가이자, 사회 민주주의자이기도 했던 버나드 롤랜드 크릭은 런던 대학을 거쳐 런던 정경대 (LSE)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 받은 뒤, 런던 정경대에서 오랫동안 강의를 수행하였습니다. 특히, 그에게서 ‘크리키안‘이라는 정치학에서의 학문적 조류를 선도했으며 영국 정치학 협회 (PSA)의 부회장으로도 활동한 바가 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그는 영국 내에서 손꼽히는 조지 오웰의 연구자이기도 합니다. 1974년에 조지 오웰의 자선전 작업을 시작하기도 하였는데요. 여기에는 정치적으로 노동당의 고문을 지냈지만 학계의 명성과 미국에서의 수많은 인용 등으로 여전히 영국에서 큰 존경을 받고 있는 학자였습니다. 그는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세계 2차 대전을 거치고 지성이 성숙되는 시기에 냉전을 몸소 체험하며, 정치와 자유에 대한 고유 이론을 확립시켜 나가다, 지난 2008년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따라서, 버나드 크릭의 이 책은 냉전이 막 무너진 1992년에 ˝In Defence of Politics : Against Ideology, Democracy, Nationalism, and Technology˝라는 원제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4월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이 책의 제목에 대한 간단한 정리가 필요하다고 여겨지는데요. 저자인 크릭의 이 ‘정치‘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인식은 이 책의 3장. ‘민주주의로부터 정치를 옹호함‘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즉, 그가 말하는 ‘정치적 가치‘는 어느 정치 체제보다 중요한 관점이며, 정치 자체가 모든 이들에게 매우 중요한 목적임을 글 전반에 걸쳐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크릭의 이런 관점이 조금은 불편하게 여겨졌는데요.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3장에서 보여지는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적 통념을 있는 그대로 소개하고 있고, 이 부분은 독자들에게 2부에서 논증하고 있는 전체주의에 대한 인식과 쉽게 연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다소 우려스러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더욱이 그가 스스로 정치 행위에 있어서 강고한 윤리주의적 추종자였으면서도 4부 민족주의와 관련된 논증에 있어 사실상 시민들에 대한 도덕적 교육 내지는 도덕적 인식의 필요성을 아주 불필요하다는 관점을 내보이고 있지는 않지만 그것이 정치 전반에 어떠한 영향을 줄 수 있겠느냐에 대한 노골적인 회의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저는 실망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이 글 전체에서 보이는 크릭의 ‘정치체제‘ 자체 대한 회의주의가 설득력이 없다거나 개연성이 아주 희박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정치와 민주주의를 과도하게 대결주의적인 해석으로 일관하는 것은 저명한 정치학자의 논법 치고는 가벼워 보입니다. 더욱이 어떤 부분에서는 체제 자체가 정치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영향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민주주의가 쉽게 선동이 된다는 아주 표면론적인 편견과 어느 사법 관료의 입을 빌어 ˝민주주의가 군중이 원하는 것˝이라고 인용하는 것은 비판적 인식을 선점하던 안하던 간에 마찬가지로 실망스러운 부분이었습니다.

아주 멀리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 그냥 일반적으로 봤을 때는 홉스로부터 시작된 개인의 권리에 대한 정치의 역할로 이해되는 이 역사적 과정은 매우 험난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오늘날 개인의 권리가 아주 쉽게 자유로 해석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지만 자유만을 위한 자유주의 시대 혹은 자유만을 위한 정치를 옹호하는 것은 1980년대의 대처와 레이건을 통해 이미 실감나게 체험해 본 바가 있습니다. 사실상 루소로부터 시작된 자유를 위한 긴 여정은 루소 본인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공화주의가 우리의 자유를 보호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낳게 했습니다. 이에 크릭은 ˝일반 의지의 무오류성에 대한 루소의 강조가, 그가 동등하게 강조했던 열성적 개인주의와 일관되지 않는다는 비판을 오래된 것이지만 여전히 유효하다˝고 강조합니다. 루소는 그 스스로 자발적 격리주의자였지만 그만큼 개인주의를 강조했던 점은 그의 의도를 확대해석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일반의지가 그가 신봉했던 개인주의를 사회발전과 정치 체제의 확립시기에 충분히 충족하지 못한점은 확실해 보입니다. 루소의 이 일반 의지가 궁극적으로 발현되는 지점이 개인의 권리와 자유라고 이해한다면 이것을 부정해서는 안된다는 점에는 저 역시도 동의합니다. 크릭이 2부에서 말하는 ˝어떤 정부가 시민들이 선택한 사적인 삶 혹은 공적 영역 바깥에서 살고자 하는 적극적 권리를 부정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전혀 정치적 정부라고 할 없다˝는 점과 ˝민주주의란, 설령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동료라 할지라도, 그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언제 좋아하는지, 얼마나 좋아하는지, 누구를 싫어하는지, 심지어 운수노동조합 TGWU의 다수를 싫어한다든지 하는 발언조차도 허용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주장은 마찬가지로 옹호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이 부분은 저에게 있어 아주 과도하게 해석하여, 로버트 달과 지그문트 바우만을 같은 비율로 섞은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게 하였습니다.

사실상 정치를 왜곡한 것으로 역사적 평가를 받는 나치즘을 비롯한 전체주의는 ˝진정한 자유란 곧 대의명분을 위한 희생˝이라고 너무나 빈번하게 주장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왜곡된 민족주의가 전체주의와 비슷한 맥락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면 정치 대 전체주의, 정치 대 민족주의에서 정치적 가치가 저들을 극복할 수 있어야 체제 뿐만 아니라 인간의 역사 조차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점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나치즘과 공산주의가 ˝폭력에 대한 강조˝를 통해 모든 국민을 하나의 대오로 획일화 시킨 점은 우리가 과거에서 배우고 반성해야 될 부분일 것입니다. 사실 말로는 이렇게 떠들고 있지만 ‘껍데기에 불과한 프로파간다‘를 구분해 낼 수 있는 분별력을 어떻게 시민들이 갖출 수 있겠느냐는 현재에도 중요한 기로에 놓여있다고 생각합니다. 크릭은 이 글 3부에서 민주주의가 쉽게 선동된다는 점을 들어 결과론으로 자의반 타의반 시민의 다양한 분별력을 거부하고 있는데요. 선동 정치를 오로지 민주주의로 몰아가는 것은 너무 현실 회의주의적인 입장이라 뒷맛이 씁쓸했습니다. 선동 정치 자체를 민주주의의 약점으로 몰고가는 것은 너무나 쉽고 편의주의적인 주장이어서 이것에 대한 해결책은 거의 제시하지 못하는 수많은 정치학자들의 전철을 크릭 역시 답보하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민주주의와 자유 정치의 결합에서 정당들은 곧 민주주의는 자유를 시기하며 자유는 종종 민주주의를 두려워한다는 그 유명한 갈등에 휘말리게 된다˝는 주장은 그것에 대한 진지함을 차치하더라도 1980년 이후 경제에서 정치를 적극적으로 분리한 신자유주의자들의 매우 통속적인 주장과 그 궤를 같이한다는 점에서 이 인용 또한 아쉬운 부분입니다. 차라리 한 장을 더 할애해 ˝정치 vs 시장˝이라는 부분을 새로 썼다면 앞뒤 논증이 좀 더 정교해질 수 있다고 보는데, 크릭은 로버트 달에 비견되는 인식의 확장은 이뤄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제 5장, 기술로부터 정치를 옹호함에서 약간의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는데요. 사회학적 발전의 법칙들을 논하면서, ˝그것들은 관찰되고, 실천되고, 사회에 적용돼야 한다˝는 주장은 정치가 낡은 것이고 과학이 최신의 더 필요한 가치라는 세간의 인식을 약간이나마 불식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정치가 이른바 과학으로 환원되어야 한다는 다수 지식인들의 주장에 동의하지는 않는데요. 기술 과학이 우선되어 결국에는 사회와 정치를 지배하게 되는 테크노크라시에 대해 역시 우려할 부분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일전에 라이트 밀즈가 강조했던 것처럼 테크노크라트 자체가 과두제로 나아갈 수 있는 우려가 있다는 것은 헛된 공상이나 터무니 없는 상상이 아닙니다. 다만, 작금에 이르러서는 전반적인 기술 과학의 발전이 인류의 진보에 부분적으로 이바지한 것은 분명합니다. 이런 진보 자체가 사회학적 기여가 없었다면 과학 기술의 발전 또한 아마도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이 주도하는 사회 기반의 여러 형태가 축적된 총아로서 기본 지식의 기여가 결국 기술로 이어진 것입니다. 수많은 경제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소위 기술 전문가라고 자칭하는 인물들이 사회적 기여를 망각하고 오로지 기술이 홀로 일어선 것처럼 묘사하고 수긍하는 것은 매우 오만한 관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크릭은 이에 마지막으로 ˝확실히 기술적 성취 (또는 그것의 소유) 는 주권의 근대적 상징이다˝라고 강조하는데요. 이 부분도 꽤 귀담아 들을만하다고 여겨집니다.

끝으로 서두에서 제가 따로 언급했던 바와 같이 홉스는 정치 자체를 개인의 권리를 일종의 보호하게 되는 어떤 장치로 여겼던 것은 분명합니다. 다수 개인들의 권리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홉스로부터 시작되었던 것도 확실하고 (물론 존 스튜어트 밀도 함께였지만) 이를 근거로 정치의 확대라든지 정치적 가치라는 것이 다수의 사상가들을 통해 이어져 온 것은 인류 역사에서 중요한 노정이라고도 여겨집니다. 이렇게 저자인 버나드 크릭의 정치에 대한 진실된 관점은 이후 6장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반대의 무분별한 이데올로기의 맹신에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정치가 최우선인 시기가 분명 왔다고 볼 수는 없지만 미국을 비롯한 서구 유럽이 스스로 자유주의적 가치를 표방하여 ˝자유로운 사회에서 권력을 행사해 본다는 것은 책임감을 무엇인지 알게 해주는 위대한 스승이다˝라는 관점을 끝내 크릭이 도출해 내고 있는 점은 그가 줄곧 내내 표방하는 ‘자유와 정치적 가치‘에 대한 일관된 부분이라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자유를 무시하는 민주주의는 지양해야 하지만 마찬가지로 평등을 이념화하는 자유주의 역시 기피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시민의 자유를 보장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일말의 회의에 대해 저는 대체로 동의하지 않으며, 단순히 민주주의가 아름답고 고명한 어떤 고차원적인 정치 체제여서가 아니라 공화주의에 근간된 민주 정치야 말로 모두의 자유와 모두의 권리를 보장할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를 딱히 좋아하지는 않지만 너의 그 권리를 위해 함께 싸워주겠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각자의 권리는 이웃의 권리와 함께 나아가야만 하는 것이며, 자유 역시 타인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한에서 보장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와 자유 정치의 결합에서 정당들은 곧 민주주의는 자유를 시기하며 자유는 종종 민주주의를 두려워한다는 그 유명한 갈등에 휘말리게 된다

이런 지독한 잔혹함은 전체주의 정권에서 아주 일상적인 국가 행정의 일부였다. 그것은 드물게 나타나는 사디스트들의 황홀감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은 - 공리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이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거나 -후기 자유주의자들처럼 - 공동선을 지향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유주의는 여러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정체성이) 명확한 정치적 신조다. 그리고 자유주의자들이 부정하는 많은 도그마적 요소들은, 사실 (정치로 해결해 할) 문제들을 정치의 외부에 두려는 바로 그 시도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omandante 2021-05-08 14: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6월 구입 예정도서에 찜 해야겠습니다^^ 읽고싶은 책이었는데 더 궁금해지게 하시네요 ㅎㅎ

베터라이프 2021-05-08 14:50   좋아요 1 | URL
제 서평이 아주 완벽하지는 않지만 정치에 대한 개념 정리에 관해 꽤 도움을 받으실 수 있을거에요. 특히 크릭이 스스로 정치적 회의주의자라고 자임하면서도 이런 논저를 썼다는 점은 높이 사고 싶은데요. 2차대전과 냉전을 동시에 겪은 인생의 경험은 귀중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하여튼 잼나는 일독 하시길 바랍니다 ^^
 
불안한 사냥꾼의 사회 - 우리는 왜 서로를 혐오하는가 북저널리즘 (Book Journalism) 37
석승혜.김남옥 지음 / 스리체어스 / 2019년 4월
평점 :
품절


이 책의 저자 중 한 사람인 석승혜 교수는 소개된 짧은 이력으로는 현재 강원대 SSK 사업단의 전임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데요. 특히, 그녀는 한국 사회의 내부 모순과 신자유주의의 연관성 등에 관심을 갖고 있고 이와 관련된 여러 논문을 발표한 바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공동 저자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김남옥 교수는 중 한 사람인 석승혜 교수는 소개된 짧은 이력으로는 현재 강원대 SSK 사업단의 전임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데요. 특히, 그녀는 한국 사회의 내부 모순과 신자유주의의 연관성 등에 관심을 갖고 있고 이와 관련된 여러 논문을 발표한 바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공동 저자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김남옥 교수는 개인적으로 낯설지 않은 학자인데요. 예전에 서평을 쓴 컴북스스이론총서의 ‘마누엘 카스텔‘을 쓴 저자이기도 합니다. 현재 김교수도 역시 강원대에서 연구 교수로 일하고 있고 주로 한국 사회에서의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학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책의 서지정보는 지난 2019년 4월 편저 논문의 형식으로 국내에 출판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논문집의 제목은 매우 탁월하게도 현재 한국 사회의 병폐를 아주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전에 자크 랑시에르는 유럽 내에 소외되고 인종적으로 배척되는 이슬람 청년들이 ‘외로운 늑대‘로서 이슬람 테러 단체에 포섭되어 자살 폭탄 테러에 이용된 것을 유럽의 심각한 사회문제로까지 이해했는데요. 여기에 한 사례로서 등장한 ‘일간베스트 사이트의 이용자들‘이나 이들을 밀접하게 미러링 하고 있는 메갈리안 이용자들은 혐오를 통해 일종의 사회 구조적인 모순을 표출하고자 한다는 잘 포장된 당위에 대해 물론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실상 외로운 사람들‘이 현재까지 전반적인 한국 사회의 누적된 모순의 근본적인 문제를 매우 잘못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기 저자들의 분석에 대해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는 점을 먼저 밝히고 싶습니다. 물론 저 두 사이트의 이용자들이 끝내 극심한 여성 혐오나 처참한 남성 혐오를 이데올로기로 체화시켜 강남역이나 종각역 등지에서 폭탄 테러를 하지는 않겠습니다만 한국 사회의 고학력화를 감안한다면 저들이 일반적인 이성적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뿐만 아니라 혐오 자체에 매우 비정상적인 쾌감을 느끼는 병리학적 문제를 안고 있는 자들도 분명 많다는 점도 역시 감안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성공적으로 자본주의 시장에 주도적으로 편입되었다는 평가를 받는 한국은 혹여 많은 경제학자들이 인정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기조에 의해 사회 전반이 극심한 불안정성을 내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지그문트 바우만이나 슬라보예 지젝이 거듭 밝히는 대로,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아주 기본적인 권리가 있다는 것을 분명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자본주의 지배체제 하에 발생되는 부의 쏠림이나 권력의 비대화 및 노동 전반의 도구화가 일개 시민의 삶 전반을 매우 고통스럽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러한 모든 책임을 오로지 개인의 능력으로 치부하고 강요하는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의 무분별한 강화로 사회 전체가 변질되어 왔습니다. 우리가 만약 이 지점의 이해를 고려한다면 현재에 남성과 여성에 극심한 혐오를 발생시키는 무지한 차별주의자들의 논리는 그 칼끝을 상당히 잘못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들의 신념이 저토록 견고한 이데올로기에 기반하고 있다 여기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법입니다. 왜냐하면 말과 행동으로 토해내는 저 차별적 발언들과 혐오 표현은 일정부분 저들에게 정신병리학적 문제가 있지 않는가 생각될 정도로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좀 더 사회 구조적이고 계층적인 문제에 집중을 해 본다면, 자본주의 자체가 계급지배적인 구조를 용인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개인들이 사회에서 유용될 수 있는 자신들의 능력이라든지 자본 및 자원 효용성의 수단 등에서 격차가 발생하는데 특히 1990년대 이후 여성들의 교육과 사회 진출이 남성들과 비교해 활발해짐에 따라 이 책에서 저자들이 평가하는 대로 과거와는 달리 ˝무조건적으로 가정에 헌신하는˝ 여자들이 가면 갈수록 줄어들고 있으며, 여성들의 사회 참여가 늘어남에 따라 각자가 전통적인 가정에서 조차 목소리를 내게 되는 변화 전반이 일부 남성들에게는 마뜩잖게 여겨진 부분도 있습니다. 또한, 한국의 결혼 제도 안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여성들이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집 구입과 관련된 일종의 관습적 이해를 상대적으로 늘어난 권리 만큼 바뀌지 않고 구태연연한 기존의 입장을 보임으로써 드러난 여러 사례들에 의해 남성들이 분노하게 된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마땅한 저축이나 가용될 수 있는 돈이 준비되지 않은 많은 남성들이 쉽게 결혼을 포기하게 되는 케이스들이 알게 모르게 매우 많다고 생각합니다. 다수 여성들의 결혼 가치관에 대한 종래의 입장을 계속 주장하는 등의 타협불가한 문제로 치부되어 여성들의 결혼관이 강고하다는 이미지를 다수 남성들에게 심었습니다. 더욱이 결혼 제도에 대한 논의에서 남녀간에 매우 소모적인 논쟁이 빈번하게 일어났다고 생각됩니다.

남녀 대결 구도의 사회적인 문제는 이렇다 쳐도 언론들에 의해 극우 청년들로 알려져 있는 일간베스트 사이트 이용자들과 그들과 비슷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많은 네티즌들의 오판은 민주주의의 주요한 가치 체계라 할 수 있는 다양성에 대한 옹호와 다원주의를 직접적으로 배격하는 심각한 문제라 할 수 있겠는데요. 이 부분과 관련해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인종 차별 및 장애인과 기초 생활 수급자들에 대한 저들의 증오와 다름없는 구별짓기는 파시즘에 비견될 정도로 위험하다 여겨집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극우라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북한의 존재로 말미암아 이미 본질적으로 왜곡된 이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반공 이데올로기에 의해 민주주의 사회에서 마땅히 용인받아야 될 기존 기득권들에 대한 비판과 견제가 반공이라는 잣대로 말도 안되는 법의 심판을 받았으며 지금도 정상적인 발언과 주장에 대해 이념적 잣대를 들이대는 왜곡된 관념을 정상인 양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죠.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는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 제도가 아니기에 저들이 기득권이나 돈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를 지지할 수 있어도 과연 실제로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있는지는 실로 의문이 듭니다.

끝으로 여기에 소개된 사례와 관련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는데요. ˝한국 여성은 일상적으로 성폭행, 성희롱, 모욕, 데이트 강간, 살인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고 느낀다˝는 단정적인 주장인데요. 더불어 다수 남성들에 의해 외모 품평 등을 당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요. 이미 많은 분들이 한국이 범죄 발생률에 있어서 세계적인 억제 국가임을 잘 알고 있을겁니다. 물론 여기에는 누구에게나 불안 심리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테죠. 다중 매체에 의해 외부로 드러나는 여성들에 대한 범죄는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과거 나치 독일이 자행한 게토 구역처럼 남자와 여자를 분리할 수도 없는 노릇이죠. 즉, 현재 미국이 자신들의 국가 안보를 위해 과도한 안보 조직을 운용하고 있는 것처럼 안보에 대한 욕구는 대체로 완벽하게 채울수 없는 것인데요. 자신의 안전에 대한 완벽한 충족 또한 이와 동일합니다. 미국의 비대화 된 안보조직은 국가 조직이 시민들을 제어하고 감시해 민주주의를 사실상 축소시키고 과두제를 초래할 수 있다는 여러 학자들의 경고를 받아왔습니다. 마찬가지로 일부 여성들이 자신들의 안전에 대한 불안 심리를 갖고 있다고 해서 남성 전반을 주요 관찰 대상으로 어떤 법적인 조례까지 만들어 감시하자고 하는 것은 거의 병적인 일과 같습니다. 일관된 논지를 위해 저자들이 저런 사례를 대입한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일정 부분 과도한 불안 심리까지 사회현상으로 용인해야 된다는 식으로 논문에 쓰는 것은 매우 부적절한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 남녀 관계에 있어서 고분고분한 여자가 가면 갈수록 보기 힘든 현상 자체를 터무니 없이 비난하거나 남자의 경제적 능력의 유무를 따지는 여자들의 종래의 조건 선호 풍조를 일관되게 지지하는 사이의 타협할 수 없는 간극들이 소수의 고소득층을 제외하면 널리 퍼져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극우 보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종래와는 완전 다른 도덕적 프레임을 갖고 있다는 판단에 실로 동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여성들이 자신의 외모를 품평하는 것에 불쾌감을 느낀다는 의견에 있어서도 우선적으로 자본주의의 여성의 성 상품화를 먼저 다뤘어야 함에도 이것을 남성의 문제로만 국한시키는 것은 설득력을 얻지 못하는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장의 결실을 분배하기도 전에 맞은 신자유주의의 파고로 경쟁에서 도태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일상화됐다

사람들은 무시로 인한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사회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이나 존재 가치를 인정받고자 하는데, 박탈감이 원한으로 심화되면 그 방식이 타인에 대한 폭력으로 나타난다

미셸 라몽의 연구에 따르면, 미국의 백인 남성 노동자 계급은 전통적인 부르주아나 상류 계급을 적극적으로 비난하지 않는다

또 하나의 새로운 현상은 뚱뚱한 사람과 못생긴 여자, 키 작은 남자나 취업 포기자 등 주관적 선호의 영역에서 차별 대상이 나타나고 있었다는 점이다

에리히 프롬에 따르면, 사람들은 스스로가 무력하다고 느낄 때 이에 대한 반동으로 보상적 폭력을 보인다. 보상적 폭력은 자신의 삶이 완전히 무기력해지거나 불구 상태가 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실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집요하고 강력하게 나타난다

극우 보수가 활용하는 도덕적 프레임 안에는 부정합이 있다. 배려 없는 공정성과 강자에 대한 충성심은 기득권에 동조하고 타자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