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이슬람은 서구의 적이 되었는가
타마라 손 지음, 김문주 옮김 / 시그마북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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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쓴 타마라 손은 미국 조지타운대학교에서 이슬람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정통한 이슬람 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지금까지 100편이 넘는 논문과 글을 썼다고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는데요, 그래서 조금 기대를 안고 보게 되었습니다. 책은 작은 문고판 크기의 200페이지가 안되는 얇은 분량입니다.

원제는 Is Islam An enemy of The West 인데요. 구글에서 검색을 해보니 원서판과 지금 이 국역판의 표지가 똑같더군요. 제목의 의미도 크게 벗어나지 않게 번역을 한 것으로 나오는데요. 개인적으로는 여기 제목에서 이슬람을 서구의 적으로 대비시켜 표현되어 원제와는 달리 자극적으로 만들어 놓은게 아닌가 싶었는데 이것은 저의 오해였습니다.

우선 책의 전체적인 내용은 평이한 편입니다. 흥미롭다거나 새로운 인상의 논점은 거의 없었는데요. 다만, 명백하게 이슬람인들과 이슬람주의적 테러 단체와의 구분을 명확히 해줄 것을 독자들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이 책이 나오게 된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저자의 의도에는 공감하는 편입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대로 이슬람을 믿는 평범한 이슬람교도들은 민간인들에 대한 테러와 살해에 동의하지 않는 편이고, 이것을 코란이 내세우고 있다는 테러단체들의 주장에도 반대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죠. 더 본질적으로 저자는 알 카에다와 같은 이슬람주의 테러 단체가 코란을 비롯한 종교 해석과 이론 연구를 무시하고 오로지 마오쩌둥 식의 정치투쟁으로 일관하고 있다고 꼬집고 있는데요. 이는 얼마전에 사실상 격퇴당한 IS가 칼리프가 통치하는 이슬람 국가를 세우려고 한 것과 같은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와 메디나를 아우르는 칼리프 국을 건국하려는 거의 실현 가능성이 없는 욕망을 기저에 놓고 있는데요. 여기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라고 봐야겠죠. 과거 이란이 팔래비 왕조를 무너뜨리고 정교 일치 국가를 세운것처럼 이란의 적대적이고 파괴적 형태가 IS 모델이 아닌가 싶습니다.

유럽이나 미국에 거주하는 즉, 민주주의 사회에서 삶을 보내고 있는 이슬람인들은 세계의 민주주의 원조 국가인 미국이 다소 전제주의적이고 독재체제를 보이고 있는 중동의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 등을 국익의 명목으로 후원하고 지지하는 것에 대한 격렬한 비판 의식을 갖고 있는데요. 물론 2차대전 이후 냉전시기를 거치면서 핵전쟁의 위협을 안고 있던 동서 대립의 시기에 미국이 안보를 이유로 많은 독재국가를 묵인하고 지원한 것은 사실입니다. 거기에다 이스라엘을 위한 배타적이고 일방적인 정책을 미국 정치권이 그동안 보여왔기에 그런 부분에서도 많은 이슬람인들에게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타마라 손도 이 부분을 언급하고 있는데요. 2차대전 이후에 영국과 미국의 소위 ‘이스라엘 건국 지원’ 이후 수십만의 팔레스타인 난민을 발생시키고 자신들의 안보를 위해서라면 무슨짓이라도 하는 이스라엘을 보노라면 현실적인 분노를 느낄 수 밖에 없을겁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슬람인들의 국가가 인권과 민주 정치를 외면하고 현실 정치에 종교를 잣대로 삼는 비이성적인 행위들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것은 자신들도 되짚어 봐야하는 문제인데요. 종교인 이슬람 교리가 현실에 우선해 이를 기반으로 해석하는 것은 많은 이슬람인들이 생각해봐야 될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많은 유럽인들이 유럽에 이슬람인들의 이주가 증가하면서 종내에는 강고한 배타적 이슬람주의가 기승을 부려 역겨운 파시즘으로 오도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것에는 이 점이 문제라고 봐야겠죠.

아직도 서구 유럽인들과 이슬람인들이 이렇게 서로 터부시하는 시선과 몰이해의 측면이 이런 뿌리깊은 내재적 갈등을 수반하지 않았나 하는 해석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테러주의를 표방하는 이슬람 테러단체에 대해 반대하는 이슬람 내부의 일관된 태도가 있어야만 하고, 좀 더 세속의 일에 종교를 끌어들이는 일을 자제하면 좋겠지만 코란의 규율이 이런 반세속주의에 도움이 되지는 않겠죠. 그만큼 교리를 신봉하는 이슬람인들이 절대 다수이기 때문에 어려울 가능성이 높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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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자본권력의 불량한 역사 - 정권은 재벌을 만들고 재벌은 권력을 지배한다
안치용 지음 / 내일을여는책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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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저널 발행인 겸 한국 CSR연구소 안치용 소장의 최근 출간한 ‘한국 자본권력의 불량한 역사‘를 일독했습니다. 포탈에서 한국CSR연구소를 검색해보니 자세한 결과가 잘 나오지 않더군요. 일부 기사에서 기업의 지속가능한 사회 발전 등을 연구하는 연구단체 인 듯 한데요. 약간 첨언이지만 안치용 소장은 과거에는 신문사 기자로 오랫동안 재직한 경력이 있더군요.

이 책의 전체적인 내용은 해방 이후의 한국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해 온 한국 재벌에 대한 기원과 분석이 주 내용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여기에 인용된 자료들이나 주석으로 나오는 다른 연구자 내지는 학자들의 면면을 봐도 재벌에 대한 논조가 어떨지는 짐작이 되었습니다. 재벌에 대한 긍정적인 부분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이와 동시에 제가 들었던 생각은 현재 공정거래위원회 김상조 위원장이 잠시 떠오르더군요.

거의 재벌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만, 그 연원과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서 1945년 해방 이후, 미 군정과, 한국 전쟁 등 한국 정부 수립 시기 및 6.25 동란과 이후의 한국의 정치 역사 들을 자세히 원용하고 있는데요. 달리 표현하자면 다른 측면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다루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우리 나라의 자본 이식 과정은 거의 외적 요인에 의한 경우라고 볼 수 있는데요. 말할 가치도 없는 일본의 자본이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과 관련해서 저자도 언급을 하고 있지만 오로지 일본 제국을 위한 자본이 식민지 조선에 들어와서 그것에 아주 부합하는 역할을 한 것이 역사절 사실일겁니다. 저자도 이 부분과 관련하여 당시 식민지 상태의 조선에서 제대로 자본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조선총독부의 유무형의 승인 전제되어야 하는데, 이런 측면에서 조선 고유의 민족 자본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었느냐 하는 분석에 동의할 수 밖에 없습니다. 더욱이 한국 전쟁 이후엔 남한 북한 할 것 없이 한반도 전체의 산업 기반 시설이 파괴된 상황에 이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것은 거의 의미가 없다고 봐야겠죠.

이렇게 해방 이후 일본 자본가와 기술자 및 권력의 공백의 틈새에서 이승만 정권과 미군정 및 미국 정부의 자본주의적 토양을 배양시킨다는 명목으로 시작된 초기 재벌가들의 창립자들이 여러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자신들의 사업을 일구고 이후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와 전투환 노태우의 신군부 쿠데타를 포함한 군부 독재 기간에 이들이 어떻게 당시 정권과 영합했는지 여러 자료를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다른 자료들은 십분 양보해서 둘째치고라도 정권에 검은 돈을 건네준 재벌 그룹들의 명단을 보고서 부당한 권력에 영합한 이들이 현재의 한국 경제를 이끌고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합당하지 않은 권력과 사익을 추구한 자본이 어떠한 일을 벌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역사의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읽다 보니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자신의 정치적 합당성을 국민들에게 얻기 위해 한일 기본 조약을 통해 얻은 자금과 월남전에 청년들을 파병해 얻은 특수 등을 중화확 공업 등 경제 기반 산업에 투자해 그것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는 부분에서 바로 이웃나라의 현실과 사뭇 유사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정당하지 못한 권력에 대한 정당성을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하는 통치권자의 태도와 그러한 행태의 결론은 항상 민주주의를 희생시키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특히 이러한 민주주의의 희생은 헌법을 위반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라 뒷맛이 더 씁쓸할 수 밖에 없지요.

끝으로 저자가 이러한 재벌 경제와 전세계의 신자유주의 기조로 봤을 때, 현재는 ‘금권정치‘의 시대로 여기는 것에 비감한 일이지만 동의할 수 밖에 없더군요. 보통 포스트 케인스주의자라고 일컫는 하이먼 민스키도 이와 비슷한 입장으로 시장에서 권력과 자본의 영합을 경고한 바가 있습니다만 이제는 우리의 민주주의를 위해 얼마나 더 효과적인 견제책을 마련할 수 있느냐에 미래가 달려있다고 봐야겠지요. 권력의 집중과 마찬가지로 부의 집중 또한 사회를 이반시키고 종내에는 파국을 일으키는 원인 중의 하나이죠. 그래서 시민 개개인의 학습과 질문이 거듭 중요해지는 시점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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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르포르 컴북스 이론총서
홍태영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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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 큰 난제를 안겨주며 힘들게 서평을 쓴 책이었던 자크 랑시에르의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에 언급이 된 프랑스 정치 철학가 클로드 르포르의 글을 찾아보게 되었는데요. 그 중에 국방대학교 안보정책학부의 홍태영 교수가 쓴 ‘클로드 르포르‘를 읽었습니다. 이 책은 커뮤니케이션스에서 ‘컴북스이론총서‘의 시리즈 물로 출간하중인 일종의 인문, 사회, 기술 분야의 독보적인 사상가들을 추려서 출간하고 있습니다. 예전 1997년 즈음에 한길사에서 ‘한길로로로‘ 시리즈와 비슷한 컨셉의 출판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뿐만 아니라 시공사에서도 이와 비슷한 시리즈물을 출간한 기억도 나는군요.

약간 논외의 말이지만 저는 학부 시절에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을 읽으면서 약간의 추종자 입장이 되어 그녀의 말과 행적을 쫓아 자료를 수집한 기억이 있는데요. 당시 한참 같이 한나 아렌트와 같이 나오던 인물이 클로드 르포르였습니다. 기억 저편에 놓고 잊고 있다가 이번에 랑시에르의 책을 보면서 다시 접하게 되었지요. 지금 이 책을 홍태영 선생은 얼마전에 출간된 르포르의 ‘19-20세기 정치적인 것에 대한 시론‘을 번역한 바 있습니다. 더불어 요즘의 신기한 현상으로 지젝과 랑시에르가 국내에 활발히 소개되면서 많은 독자들이 찾고 있는데요. 이에 곁가지로 르포르도 많이 언급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뿐만 아니라 르포르는 자신이 천착한 분야의 광범위성과 연계성으로 말미암아 토크빌과 한나 아렌트, 지젝, 랑시에르 등 근현대 정치사상사에서 함께 인용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책을 받아보니 얇은 신국판 크기의 페이지는 100여 페이지 정도 였는데요. 하지만 보기보다 상세한 내용이 담겨있다고 봐야하는데요. 르포르의 삶의 초반의 메를로 퐁티와 장 폴 사르트르와의 관계부터 사상적으로 꽃피우게 되는 퐁티와의 결별과 그 이후의 여러 저작들 중 앞에서 언급한 ‘19-20세기 정치적인 것에 대한 시론‘ 에서 프랑스의 역사에서 민주주의의 행적을 쫓으며 탁월한 해석을 보였는데요. 그가 프랑스인으로 태어나 프랑스 혁명을 눈과 글로 쫓을 수 있었다는 것은 사상적 토양에 있어서 긍정적인 부분으로 거기에다 토크빌이 주의깊게 관찰한 미국의 독립혁명까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학자의 연구를 체계적으로 연구한 것은 학문적으로 더할 나위없이 좋은 부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근현대 민주주의 역사에서 프랑스 혁명과 미국의 독립혁명은 주권 개념과 민주주의의 이념 확대의 획을 그은 사건으로 과거 전제정에서의 소수 권력층을 제외한 다수의 사람들이 인간 본연의 자연권을 배제당했다면, 르포르가 표현하는대로 더이상 국가는 신체와 같지 않게 된 것이죠. 루이 14세에 ‘짐이 곧 국가‘ 라는 표현이 바로 이러한 국가는 살아있는 신체와 같다는 지난 역사의 산물이었습니다.

또한 니콜로 마키아벨리에 대한 독해로 얻게된 정치적인 개념을 통해 우리 시대를 해석했고, 이와 더불어 과거 역사에서 민주주의와 정치적인 것의 선명한 개념을 찾으려 했던 것도 그의 여러 사상적 업적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면서 전체주의를 직시하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였는데요. 그는 민주주의의 적으로서 전체주의를 이해한 것 같은데요. 스탈린의 사회주의 혁명 또한 전체주의와 비슷한 궤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근현대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이 전체주의와 사회주의를 비슷한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 주류가 되었으며 그것의 범주는 매우 넓은 편이죠. 저는 개인적으로 민주주의의 위기를 불러일으킬 불안 요인은 전체주의가 아니라 포퓰리즘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물론 양자의 해석이 서로 비슷할 수는 있지만 정치 불신과 양비론을 발판삼아 기존의 정치를 불신하고 도모 대상으로 생각하는 이 포퓰리즘과 포퓰리즘적 정치인들이 더 위험하다고 느껴집니다.

끝으로 현재의 프랑스 뿐만 아니라 요즘은 미국에서도 르포르의 저작을 출간하는 중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나라에서도 약간의 ‘신상‘ 같은 사상가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이 책을 쓴 홍태영 선생의 2008년 출간된 ‘국민국가의 정치학‘을 곧이어 읽어볼까 합니다. 책을 얼른 구해야겠죠. 이 책을 출간한 출판사가 그리 규모가 크지 않다고 들었는데요. 이런 의미있는 시리즈 물을 출간하는 것에 응원을 보내고 싶더군요. 인문 사회과학이 나날이 도태되고 있는 요즘에 반가운 소식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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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신용 - 왜 기본소득이 필요한가
클리포드 H. 더글러스 지음, 이승현 옮김 / 역사비평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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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뿐만 아니라 세계 경제학에서 꽤 독특한 위치를 차지고 하있는 클리포드 H. 더글라스의 ‘사회 신용‘을 일독했습니다. 더글라스의 이 책은 1924년에 처음 출간되었는데요. 이번에 우리나라에 1933년 개정판을 베이스로 역시비평사에서 최근에 완역 출간을 했습니다. 출간된 해가 2016년인데, 그동안 잠시 잊고 있다가 이제서야 구해 읽게 되었습니다.

저자인 더글라스는 전공을 수료한 학자 출신이 아니라, 웨스팅하우스의 엔지니어로 일과 관련해 미국과 인도 등의 현지 경험하는 등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서 웨스팅하우스라면 원자력 발전으로 유명한 그 회사인 것으로 추측되는데요. 뒤늦게 31세 나이로 캠브리지에서의 학업을 시작하지만 대학과정을 다 마치지 못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어떤 개인사가 있을법 한데, 따로 찾아보지는 않았습니다.

주류 경제학에서는 그의 이 책, ‘사회 신용‘에 대해 케인스가 과소소비론과 관련해 언급하고 있는데요. 약간의 상상에 기대면 그가 제도권과 주류 학자가 아니어서 크게 관심을 받지 못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학계의 기득권은 꽤 배타적인 법이라 할 수 있죠.

책을 전체적으로 요약해본다면, 시장 경제 시스템에서 금융과 이를 수단으로 삼는 금융권력에 대한 경각심과 전통적인 경제학에서의 기본적 이론들을 다시금 재론하는 것이 맥락입니다. 이런 토대에 고용과 산업 전반, 저축 문제, 세금 등을 서로 연계해서 다루고 있는데요. 이번에 국문으로 번역된 책에는 일종의 부제로 ‘왜 기본소득이 필요한가‘ 라고 나와있는데요. 물론 더글라스가 논의를 하는 부분에서 개인의 소득 문제와 그것을 바탕으로 최소한의 개인 소비 욕구와 생활에 대한 언급이 나와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고찰이라고 평가하는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꽤 독특한 도덕적 상벌 이론을 경제와 시장에 인용해 해석하는 것은 신선한 부분이지만 개인의 경제 시스템하에서 노임과 봉급, 배당 시스템에 긴밀하게 얽혀있는 것이 도덕적 규율이라고 단언하는 것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조금 맞지 않는 분석이라고 해야겠죠. 뭐 개인의 사적 이익 추구를 제어하고 규제할 수 있는 것은 법률이 효과적이 되어있고, 정부와 기업도 마찬가지로 이런 법률에 기반하는 것이 거의 정설이 되었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문제는 실제로는 완벽하게 법률의 적법성대로 돌아가지 않는 현실이겠죠. 이 부분을 여기서 깨내 들면 매우 장황한 글이 될 듯 싶어서 이 정도로 언급만 하겠습니다.

이처럼 이 글이 나온 시점이 1차 대전과 사회 경제 시스템이 정부에 의존해야만 하는 즈음이라 면밀하게 지금의 시점과 맞아들어가지는 않습니다. 다만 한가지 확실한 건 그가 완전한 자유체제의 시장 자본주의를 옹호만 하지는 않았다는 점이죠. 실업자도 살 수 있는, 즉 고용되지 않고도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대책을 도입하는 일이란 부도덕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도덕적으로 타락시킨다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나, ‘노동‘에 의해서만 생계 수단을 얻을 수 있다면, 이들이 일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는 기껏해야 자살할 수 밖에 없을 따름이다 라고 하는 등 이것 말고도 금융 권력에 의한 소위 ‘금권 정치‘에 대해서도 에둘러 비판하고 있습니다. 제도권의 학자들은 이러한 더글라스의 ‘금권‘ 에 대한 언급을 다소 음모론적인 의미로 제한에서 받아들이고 있는데 약간 다른 상황이지만 지금의 미국 의회의 로비스트들을 고용한 각종 이권 단체들의 의한 이익 다툼이 ‘금권‘ 정치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폐해를 보이고 있는 현실이죠.

뿐만 아니라 경제를 다루는 이러한 금권이 기존의 ‘정치 권력‘에 까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하고 있으며, 종내에 그는 ‘현재 금융 및 사회 시스템의 붕괴는 확실하다‘ 고 결론 내며, 다시 1914년 이전으로는 돌아가기 힘들 것이다 라는 당시의 상황을 비장하게 말하는데요. 아마도 더글라스는 본래의 시장이 전통적인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는 자연적인 자정 능력이 발휘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말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금권력을 각 금융기관들이 집중시켜 개인이 사용할 수 있는 화폐와 구매력을 더욱더 제한하게 될 것이라는 예측은 그래서 더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싶군요. 특히 전세계의 많은 보수 우파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의 소위 보수 우파들은 과거 대처가 말한 것처럼 자본주의에 대안은 없으며, 자본주의 주체가 모순이 없는 뫈벽한 것이라고 믿고 있는 권력과 기득권이 존재하는 것은 매우 사회 현실상 매우 위험하며 이를 단순하게 ˝분배 문제와 실업 문제는 상당 부분 망상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말하는 더글라스의 언급은 우리가 새겨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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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충좌돌 - 중도의 재발견
김진석 지음 / 개마고원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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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하대학교 철학과 교수이자, 계간지 ‘황해문화‘의 편집자인 김진석 선생의 ‘우충좌돌‘을 일독했습니다. 제목은 ‘좌풍우돌‘에서 약간의 패러디로 만든 것으로 ‘우파에 먼저 달려들고 다시 좌파에 충돌하는‘ 의미로 여기에 소개되는 주제에 우파(적 현상)와 좌파(적 이념)을 동시에 비판한 것으로 여기에서 대안은 중도적 접근 자체 라기보다는 위의 양자 사이에 일종의 타협과 토론으로 보여집니다. 김진석 선생은 철학을 전공한 학자인데도 접근과 비판이 꽤 현실적인 부분이 있는데요. 저자가 글에서 밝혔듯이 ‘이 현실을 있는그대로 직시‘ 하기 위해서라는 설명이 여기에 실린 주제들에 대한 배경이 아닌가 싶더군요.

이 책을 읽고 나서 드는 아주 단순한 느낌은 일종의 우파 보수의 시스템적인 현실에 진보의 관념적이고 탈현실적인 접근은 수정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읽혔습니다. 저자 자신이 진보 정권의 집권이 필요하다고 밝히면서도 그를 위한 진보 세력의 현실 이념적 재정비가 필요하다는 식의 간절한 요청이 김진석 선생의 의도가 아닐까 감히 추측해봅니다.

책 출간년도가 2011년도라 지금 읽고 판단하기에는 조금 철지난 논제들도 있긴 합니다. 물론 무시를 해야한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전체는 11장으로 되어 있고, 마지막 11장은 따로 언급해서 실지 않은 일종의 후기와 소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글들을 형식적으로 구분하기 보다는 개인적으로 봤을 때, 요즘 회자되는 강남좌파와 기존의 한국 사회의 좌파 혹은 진보세력, 반값 등록금 문제와 대졸자 주류 사회를 직시하자는 문제, 복지, 비정규직 문제, 부동산 경제, 신자유주의와 사회에서의 개인의 경쟁 등으로 요약했습니다. 여기서는 복지와 비정규직 문제, 한국 사회에서의 신자유주의의 논란 등이 인상이 깊었는데요. 철학을 공부하고 전공한 사람답지 않게 매우 현실적인 접근과 비판을 하고 있어서 꽤 신선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답지않다는 표현이 제 선입견일수도 있지만 사회학을 오래 천착한 학자가 쓴 글같은 느낌이 들더군요.

근래 강남좌파로 소개되는 새로운 진보 현상에 대해 보수 우파와 같이 개인 소비와 이익 추구를 하는 이들이 사상과 이념적으로 좌파라고 커밍 아웃 하는 것이 관념적으로 봤을 때 진보와 좌파에 합당한가에 대한 의문과 전통적인 좌파는 전통적으로 돈과 개인적 이익에 대해 비판적인데 이에 대해 저자는 강남좌파라고 표현하기 보다는 ‘리버럴‘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저도 이 부분에 동의하구요. 사실 한국 사회에 좌파는 따지고 보면 3% 도 안 될 수치라고 볼 수 있죠. 그러니까 이런 미약한 수치로 한국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느냐 하는 것에 대해선 매우 부정적이고 소위 과거 집권 여당과 기득권 세력에 대비되는 민주당과 사회 민주주의적인 태도를 지닌 세력들은 거의 리버럴로 지칭해야 되지 않나 싶습니다. 극우 보수 정치인들이 민주당을 ‘좌파‘라고 규정짓는 것에 대해 저는 그동안 수없이 희극같은 장면이라 여겨 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규정해도 불구하고 김진석 선생도 비교적 해석을 광범위하게 해서 리버럴을 진보로 여기고 있는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결국 한국 사회는 거의 대다수의 극우 보수와 보수, 우파 세력에 민주당과 같은 리버럴 우파가 이끌고 있으며 사실상 진보라고 부를 수 있는 세력은 정의당과 일부 좌파 정치인들과 지식인들 정도라고 할 수 있겠죠. 이처럼 한국 사회의 영향력적인 측면에서 진보와 좌파는 거의 미미하지 않나 싶은 전제를 깔면서 이곳의 저자의 논의들을 그런 점을 감안하여 해석해야되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 부분을 제외하면 한국 사회와 신자유주의로 대표되는 경제와 사회 현상에 대해 매우 깊은 통찰력이 보여집니다. 한국 사회가 이미 대졸들이 다수인 직업계층 및 사회주도계층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이를 현실적으로 직시해서 복지와 비정규직 문제를 다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복지와 비정규직 문제는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문제로 보고 있구요. 한국의 고용 시장이 지난 2000년대 이후로 많은 대졸자들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이 수많은 대졸 구직자들이 원하는 실질적 자리는 10% 남짓에 지나지 않는 현실 상황의 부조화와 더불어 복지 문제도 이런 점에서 고찰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용 문제가 해결되면 복지 문제도 꽤 신속하고 수월하게 해법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보편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는 이런 고용 시장과 연관이 깊다고 봐야겠죠.

그외에도 저자의 한국 사회에 대한 새로운 입장이 많이 있었습니다. 반값 등록금 문제는 사립 재단의 비리 문제와 경영 합리화를 통해 먼저 토대를 만들고, 북유럽의 사회 복지제도가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작금의 한국 상황에 맞지 않는다면 포기하는 것이 맞다고 주장하는 등의 논리들이 있습니다. 경쟁과 관련된 문제에서는 현재 사회에 경쟁이 너무 과다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저자의 분석에 동의하며 이것을 개인적 차원에서만 한정 짓는 것은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들의 제반적 안정을 저해하는 것으로 지금 한국사회는 이미 근간을 흔드는 살인적인 높은 이혼율, 자살, 빈부 격차 등의 사회 토대가 흔들리고 있기에 경쟁을 부추겨 여기에서 도태되는 사람들을 벼랑에 몰아서는 언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현실적인 지원이 있어야 하는데 이 부분과 관련해서 보수와 진보가 사실상 무능하기 때문에 좀 더 행동적 각성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끝으로 이미 한국 사회의 정치적 계급 지지가 다소 역전되어 있는 상황은 보수보다 오히려 리버럴한 보수와 진보의 책임일 것입니다. 다수의 가난한 하위 계층이 보수 우파 정당을 지지하는 것은 어떤 잣대로 들이대도 참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죠. 민주주의가 정착된 미국과 유럽 서구 사회는 각 시민들이 자신의 상황에 맞는 정치 이념적 행위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는데, 우리 나라는 기득권을 대표하는 보수 우파의 ‘격차는 자연스럽다는 주장‘ 에 중도 보수와 진보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의 그 특유의 다면적인 무능으로 이런 한심한 현상을 불러 일으켰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경제적 하위 계층이 진보 정책을 믿고 투표할 수 있도록 소위 합리적 중도 내지는 진보를 자처하는 정당과 정치인들의 각성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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