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일본 - 사이에서 근대의 폭력을 생각한다 아이아 총서 7
요네타니 마사후미 지음, 조은미 옮김 / 그린비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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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대를 졸업하고 도쿄외국어대학의 교수로 재직중인 요네타니 마사후미씨는 과거 일본 제국 시기의 식민지 경영과 중국과 한국에 자행했던 근대 폭력에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여 ‘비판과 연대를 위한 동아시아 역사 포럼’의 멤버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저자의 그런 활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글로서 지난날 아시아 지역에 무수한 고통을 안겼던 일본 제국주의와 그 연원의 사상에 비판을 가하고 있는데요. 저는 꽤 흥미롭게 읽었는데요. 역사를 통한 진정한 화해가 아직도 이뤄지지 않고 있고, 그 역사가 정치 논리에 철저히 이용당하고 있기 때문이겠죠.

미국의 페리 제독에 의해 1854년 2월, 일본은 흑선이라 불리우는 중무장한 함대에 의해 강제로 개항하게 되는데요. 도쿠가와 막부의 쇄국이 끝나고 자신들이 ‘문명화’라 부르는 서구식의 개화를 도입하고 확대하게 됩니다. 그 이전의 일본이나 바다 건너 조선, 청나라는 각각의 정체를 바탕으로 독립적인 왕조 국가로 통치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전통적인 중국 중심의 조공 통치 체제로 당시에 조선이 종속되어 있다는 식으로 일본측에서는 조선의 자주적 통치를 폄하했는데요. 사실 명백한 것은 3국이 서로 적절하게 관여하지 않고 각자 스스로의 정치를 해왔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봉건주의의 왕조 국가라는 한계와 특수성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주되게 밝히고 있는 1854년을 기점으로 일본은 소위 ‘문명화’가 되었고, 아직도 문을 닫아 걸고 있는 청나라와 조선은 일본에 비해 미개하다는 식의 시각은 소름끼치게도 유럽이 아프리카를 보는 관점과 동일해 보였습니다. 저는 서양의 자연 과학을 바탕으로 사회 전반에 큰 전환을 갖고 온 산업혁명과 그 이후의 기술 문명에 대해 무조건적인 비판을 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 문명이라는 것은 비교하여 미개하다 그렇지 않다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봉건적인 국가 시스템을 유지했지만 동시에 고유의 문화와 문명을 발전시킨 것이죠. 왕조 문명 자체를 격하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도 일본에서 존경과 추앙을 받고 있는 후쿠자와 유키치는 처음에 다 같이 잘 살아보자는 ‘흥아론’에서 나중에는 ‘탈아론’으로 급격히 변질되는데요. 그것은 여기에 저자도 언급하지만 당시 조선의 김옥균이 일으킨 갑신정변이 청의 개입으로 인해 무위로 끝나고 그것은 곧 청과 조선이 함께 개화 문명이 되기는 어려운 것이며 그로인해 일본이 독자적으로 청과 조선을 개화시키고, 결국에는 서구의 개입과 침입으로부터 아시아를 쟁취하는 것으로 일본은 아시아의 한 국가이기 보다는 유럽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대한 나라로 스스로 격상시킵니다. 이처럼 일본이 주도하는 강제적 시스템에 조선과 중국 대륙 일부가 편입되지만 실상은 역사가 보여주는 그대로 입니다. 일본 제국 시절 조선인들은 2등 국민의 처지가 아니었습니까. 만주 진출의 교두보였으며, 각종 수탈과 매우 계획적인 병참기지화 전략이 조선의 실제 모습이었죠.

이러한 일본의 사상의 근원에는 조선과 중국에 불평등조약을 강요했던 그 자신이 불평등조약에 벗어나는 것과 상관관계가 있었으며, 그것에 그치지 않고 ‘정한론’을 들고 나와 당시 전통적인 조공 질서를 개변시켜 새로운 국제 질서를 창출하려는 본질이 여기에 있다고 저자는 보고 있습니다. 조선을 비롯한 오키나와와 타이완을 식민지로 삼은 것은 병합했던 지역의 백성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유럽의 제국주의를 그대로 답습해 자신들도 영국과 프랑스와 같은 위치에 있는 아시아 유일의 문명국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어했습니다. 동아시에 대한 유럽의 진출은 더욱더 받아들이기 어려웠겠죠. 이것은 선점의 문제로 그렇게 폭력과 차별, 억압을 통해 주변 민족을 지배하게 됩니다.

앞의 인식은 1903년 오사카에서 열린 1903년 오사카 내국권업박람회의 학술인류관에 아이누인, 타이완 선주민, 류큐인, 조선인, 중국인, 인도인, 자바인을 재현한 주거 내지 풍속, 관습과 함께 실제로 살아있는 사람을 전시 및 진열하여 관객의 시선을 끌고자 했던 ‘인류관 사건’이 글에 인용됨으로 나타는데요. 어처구니 없게도 당시 이 일본인들은 주변 민족들을 아프리카 원주민과 다를바 없이 여겼던 것 같습니다. 유키치의 ‘탈아론’이 어떤 의미인지 저는 여실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즉, 일본이 주변 민족에게 혜택이 되었다던 근대화와 개화는 결국 폭력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요네타니 마사후미 교수의 일관된 목소리입니다. 일본을 중심으로 동아시아가 협동해 잘 살아보자는 것은 한낱 허구에 지나지 않았고, 진실은 일본을 위해 너희가 마땅히 희생하라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제국 시절의 일본의 통치는 철저했고, 가혹했으며 ‘대동아공영’이라는 미명하에 2천만명이 넘는 아시아인들을 희생시킨 것으로 증명되었습니다.모두가 다 아는 이 사실을 일본만 인정하지 않는 꽤 ‘불유쾌한 시기’를 우리는 지금도 살고 있습니다.

끝으로 ‘일본의 근대’가 어떠했는지 사상사의 형태로 독자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는 아마도 학자의 양심이라고 생각됩니다. 난징대학살과 위안부 문제를 적극적으로 부인하고 부정하는 일본 학자들이 많은데요.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요네타니 마사후미 교수 같은 연구는 ‘진실의 접근’이라는 측면에서 평가받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일본인 특유의 섬세한 시각과 어조는 더 설득력이 높았습니다. 이와 비슷한 글들의 출판이 앞으로도 더 활발하게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을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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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격의 역사 - 끝나지 않는 대량 학살
아라이 신이치 지음, 윤현명.이승혁 옮김 / 어문학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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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소개해 드리려는 이 책의 저자 아라이 신이치 선생은 도쿄대 출신으로 스루가다이 대학 명예교수인데요. 그는 일본의 전후 책임과 전쟁에 대한 비판을 학자적 양심으로 평생동안 지켜왔습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지난 2017년 10월 11일에 별세했습니다. 일본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도 타협하지 않는 양심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자리를 빌어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끝나지 않는 대량 학살’이라는 부제를 갖고 있는 이 책은 일종의 전쟁사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양차 대전과 스페인 내전,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략 등의 배경으로 자행된 항공기에 의한 무분별한 폭격에 관한 신랄한 비판적 기록이라고 여겨집니다. 특히 군인이 아닌 민간인들의 무고한 희생에 따른 비윤리적 폭격이 어떠한 식으로 각국의 결정권자들로부터 군 수뇌부까지 이뤄졌는지 과정 또한 상세히 서술하고 있습니다. 일단 결론적으로 평가를 내린다면 ‘전쟁 상황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의도되고 계획된 민간인 다수에 대한 일종의 폭격과 같은 도살행위는 정당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의견이 타당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여기 글들을 읽으면서 그동안 알지 못했던 몇가지 사실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스페인 내전에서 독일과 이탈리아의 폭격 및 독가스 살포와 2차대전 당시 주축국이었던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무력으로 병합하는 과정에서도 사용된 독가스와 소이탄 등 유럽의 (자신들이 스스로 지칭하는) 문명국들이 상대방에게는 직접적으로 반격의 원인이 될 수 있는 민간인에 대한 살상을 자제하는 것으로 무언의 합의를 결정지었다면, 그렇지 않은 비문명국의 민간인들에 대한 무차별 살상은 전혀 거리낄 필요가 없다는 의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사례들이 앞에서 언급한 몇가지 말고도 추가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결론에도 불구하고 저자 또한 글 중간에서 언급했다시피, 제1차 및 2차 세계대전은 그 특성상 민간인들의 노동력과 집중력까지 포함한 총력전의 형태였고, 미국과 영국의 수뇌부 뿐만 아니라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 등에서도 적성국 정부의 전쟁 의지를 꺾기 위해서 또한 효과적인 공업 시설과 전쟁 물자 차단을 위해서 항공기 폭격을 아주 적극적으로 사용해 왔습니다. 이 양자간의 치열한 전쟁 행위내에서 승리 수단의 적극적 고려와 이 수반된 행위로 인해 서로간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비윤리적 및 비도덕적 운운이 그 자체로 불행한 일이겠지만 상당히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오로지 종전을 쟁취하기 위해 행해졌던 많은 수단들이 전쟁상황에서 미치는 여파를 사전적인 비판으로 해석하기에는 좀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항공기와 여러 군수 물자 생산에 종사하는 민간인들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그 일차적인 판단으로는 비윤리적이나 전략적인 측면에서는 심각히 고려해야만 하는 수단으로 여겨졌던 것만큼 좀 더 면밀한 전쟁사 연구가 필요하다고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포인트로 생각한 2차대전 당시 미국에 의한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의 원폭 투하와 도쿄 대공습과 관련해 이 일본인 학자는 미국의 법적 책임에 관해 논하고 있는데요. 이와 관련해서도 1941년 일본 제국에 의한 진주만 습격과 일본에 대한 미국의 참전과 그 전쟁 수행에서 발생된 일왕과 일본 제국 수뇌부가 오키나와 방어전 등에서 민간인들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동원한 것을 봤을 때 일본 정부 차원에서 민간인 희생 운운하는 것은 뭔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소위 ‘반자이 어택’이라고 불리우는 일본 대본영의 전투상의 방침인 일본군의 절멸 공격은 미국과 일본의 군인들의 막대한 피해를 발생시킬 가능성이 매우 높았고, 이러한 측면에서 미국이 원자탄을 사용한 것은 완벽하게 악의 행위라기 보다는 수단의 대체가 희박한 어쩔 수 없었던 일면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상황을 전쟁 상황에서 전부 고려할 수 있을 거라고 여기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고 어찌됐든 자국의 희생을 최소화하려는 의지를 보일 수 밖에 없는 양측의 전쟁 수뇌부들의 입장을 고려했을 때, 단순한 차원의 해석은 사건을 충분히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오늘날에도 일본 내부에서는 자신들이 비윤리적 원폭 투하를 당한 희생자 내지는 피해자 코스프레를 서슴없이 하고 있는데요. 정말로 원폭과 도쿄 공습 등으로 희생된 희생자들을 제대로 평가하고 추모하고 싶다면 일단 주변 민족들의 희생을 하잘것 없는 것으로 치부했던 ‘대동아공영’과 ‘태평양전쟁’에 대한 일본 정부 차원의 명확한 태도 표명과 진솔한 사과를 보이고 나서 국제 사회에 이러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먼저 선행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전쟁으로 인한 가족들과 지인들의 희생을 입은 일본 국민들도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에게 법적 책임 운운하기 이전에 ‘비겁하고 지저분한 전쟁’을 수행했던 당시 일본 내각과 일왕에 대한 비판과 마땅한 처분을 요구하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중국의 난징 대학살과 위안부 문제 등의 2차대전의 종전이 반세기가 넘었음에도 해결되지 않는 역사 문제와 이런것들은 일단 부정하고 넘어가는 식으로 국체의 손상을 가하지 않는 것이 일본의 이익이라고 여기는 일본 정부의 몰염치부터 수정하는 것이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약간의 번외지만 미국 정부와 영국 정부는 원자탄이 개발되는 즉시 신속하게 일본에 투하한다는 비밀 협약인 하이드파크 협정이 나오는데요. 전후과정을 고려해 봤을때, 미국과 영국은 종전 이후 사실상 소련의 견제를 전제했던 것 같습니다. 냉전은 아마도 예상보다 빨리 더 예정되어 있던 게 아닌가 곁가지로 추측해봅니다.

(끝으로 제가 구입한 책의 2페이지 정도가 통째로 누락되어 있었는데 추측하기로는 출간된 책 거의 전부가 이런 상태가 아닐까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찢겨지거나 잘라진 티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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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체에 대한 권리
에티엔 발리바르 지음, 진태원 옮김 / 후마니타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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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프랑스 학계를 비롯한 세계 정치사회학 분야에서 많이 인용되고 있는 자크 랑시에르와 더불어 민주주의와 시민권에 관한 이해를 독자들에게 비교적 명확히 전달하고 있는 에티엔 발리바르의 최근 글 ‘정치체에 대한 권리’를 손에 들었습니다. 발리바르의 이번 글은 몇 가지 시론을 그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민주주의적 가치관에 대한 입장으로 볼 수 있겠는데요. 외형상 각각 의 주제들이 상이해보이지만 그 속에는 일관된 주제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일찍이 미셸 투르니에는 “미국의 독립혁명과는 달리 근본적으로 인민 주권에 입각해 봉건주의적 현실을 붕괴시키고 시민들의 손으로 공화주의 혁명을 이룩해 낸 전통을 다른 나라는 가져보지 못한 전통을 프랑스는 갖고 있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벤담의 공리주의를 기초로 존 로크와 장 자크 루소의 시민과 정부간의 일종의 계약론을 바탕으로 한 ‘근본적인 공화주의’가 인간의 역사에 큰 획을 그은 것은 부인할 수 없겠죠. 그것보다도 시민이 부여한 주권을 바탕으로 정당한 권력을 획득한 정부가 어떤 식으로 시민들의 공익에 부합을 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방법을 제시한 것만으로도 큰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프랑스주의적 공화에 실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정치 운동이 발생하는데, 그것은 르펜이 이끄는 ‘국민전선’입니다. 발리바르는 과거 이웃 나라에서는 파시즘이 유럽의 악화를 불러일으켰지만, 프랑스는 그러한 부분에서 정치적 전통과 환경으로 인해 프랑스 내에서 파시즘에 대한 우려는 미약했지만 그것이 결국 현실로 나타난 것에 대해 프랑스의 학자로서 숨길수 없는 복잡한 심정이 글에서 묻어나고 있는데요. 근래의 독일에서 발생되는 과거 나치즘에 대한 향수는 젊은 계층들이 현재의 부패와 억압의 상태에서 일종의 탈출구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고, 전반적으로 유럽에 난민과 비유럽계 이민이 확대되면서 기존의 유럽인들에게 여러 차원의 불안감을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일겁니다.

그래서 저자는 프랑스 내의 알제리계 시민들에 대한 사회적 해석을 시도하고 오늘날 민족적으로 비 프랑스인들의 이민과 사회내의 계층적 뿌리내림과 관련하여 비논리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르펜의 국민전선, 이러한 상황의 근본적인 원인이 된 식민지 시절부터 현재까지 프랑스와 알제리의 진지하고 이성적인 성찰의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동안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이러한 질문은 결국 프랑스 뿐만 유럽의 시민들이 유럽에 유입된 비유럽 시민들의 복합적인 빚을 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민권과 시민 민주주의를 강조했던 유럽인들이라면 이들에게 마땅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단순히 복지국가라는 평면적 개념보다 ‘국민사회국가’로 개념화하고 있습니다. “세계화가 인간 사회의 현실적인 통일이 아니며, 인간 집단들 사이의 제도적 매개들의 설립이 아니다. 그것은 유일한 공간 (우리가 동일한 재화를 소비하고 동일한 세력에 복종하는 공간) 에 대한 매체적 표상을 동반한 가운데 경향적으로 통합되어 가는 시장위에서 개인들이 서로 순수한 경쟁을 벌이는 것”이라는 독창적인 분석을 내리고 통념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시민 불복종’의 개념이 민주주의적 시민권이 대항적 권력에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측면에서 파생된 셰계화에 대한 모순과 그로 인한 비이성적이고 파시즘적 사회 분위기에 훌륭한 수단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결국 비타협적 인종주의적으로 해석된 원주민-비원주민 개념을 극복시키고 ‘국민국가’의 한 국민들로써 사회적 시민권이 이미 사회적 국가에서 기본권으로 널리 제도화 되고 있고 따라서 국민들이 지닌 사회적 기본권을 함부로 축소할 수 없다는 공감대를 단순히 이민자들이기 때문에 이들의 사회권을 축소하거나 제거하겠다는 주장은 시민들이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저자는 믿고 있습니다. 저도 여기에 동의하고 이민자들이 단순히 상대적으로 선진화된 사회 시스템에 편입되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직간접적으로 그 사회에 기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애초에 이민자들에 대한 배타적 태도와 그것에 기반한 이론들은 곳곳에 비이성적인 논리 모순과 인종주의적 선입견을 내포하고 있어 이러한 움직임 자체가 과거로 회귀하는 행위라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한정된 자원을 공유해야한다는 다소 억울한 주장을 기존의 시민들이 가질 수도 있으나 어차피 시민의 주권으로 위임받은 정부가 그것을 바탕으로 정당한 행정력을 발휘해야만 한다고 받아들여진다면 마땅히 정부가 자원과 여러 사회적 보장책을 다시 구축하는데 힘쓰게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렇게 민주주의적 기초를 확대 재생산 하는 것이 우리 시민들의 마땅한 역할이고 이것에 편견과 배타성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입니다. 역사적으로도 히틀러의 나치가 오늘날 곳곳에 발언되는 왜곡된 주의주장들로 600만의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보낸 것을 목격한 바 있습니다. 아마도 르펜의 국민전선과 같은 정치적 입장들이 궁극에는 이러한 패착을 다시 가져오지 않을까하는 발리바르의 사심없는 우려에 주권과 공화주의, 그로 인한 시민 민주주의 전체를 다시 통찰해보고 거기에서 해결책을 찾아 보고자 하는 이론적 과정들이 이 책에 담겨 있습니다. 저는 발리바르의 여러 비판에도 그가 프랑스와 프랑스의 민주주의에 여실히 드러나는 애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시민들이 자신들의 사회를 모순과 억압으로부터 재구축하고자 하는 노력들은 끊임없이 있어 왔고,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이 없었다면 아마도 이 글 또한 없었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글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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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수정주의 사고의 프런티어 1
다카하시 데쓰야 지음, 김성혜 옮김,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기획 / 푸른역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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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3년 국내에 출간되어 저역시 인상깊게 읽었던 ‘희생의 시스템 후쿠시마 오키나와’ 의 저자 다카하시 데쓰야 도쿄대 교수의 일본의 역사 수정주의를 이론적으로 분석 비판한 ‘역사/수정주의’를 접했는데요. 이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는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과 그 이후의 전후책임에 대한 명백한 책임의식을 갖고 있는 지식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일개 개인으로서도 요즘 일본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제는 죄인의 자식 취급을 받아들이지는 않겠다는 취지로 2차 대전 당시 독일에 의한 홀로코스트를 부정한 독일인 에른스트 춘델을 먼저 소개하고 있는데요. 그는 캐나다에서 머물다 독일에 신병이 인도된 이후로 징역 5년의 구형을 받았고, 아직도 독일을 비롯한 몇몇 국가에서는 이러한 홀로코스트 부정과 관련해서 양심과 사상의 자유보다 우선해 중형의 판단을 내리고 있다고 또 밝히고 있는데요. 예를들어 난징대학살과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현재의 일본의 상황을 비춰보면 이 전후 역사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어떻게 다른지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일본 법정은 위안부가 관련된 한국측의 여성 단체에 의한 이의제기에 일본 정부 스스로 법적 책임을 스스로 부인하고 있고, 사법 당국은 고소, 고발장의 접수조차 거부하고 있는 현실은 저같은 일개 한국인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에 저자는 오늘날 일본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와 같은 역사 수정주의적 입장에 대해 여러 이론적 측면에서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비판을 가하고 있는데요. ‘오욕의 기억을 유지하며 그것을 계속 부끄러워하는 일은 그 전쟁이 침략전쟁이었다는 판단에서 귀결되는 모든 책임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일본의 전후세대들의 양심이 필요하며, 이런 전후세대들에게는 전후책임을 완수하게 만들 책임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역사의 서사적인 기술적 방법으로 각각의 역사를 받아들이는 ‘이야기적 수사’에 대한 비판적 입장과 말할 수 없는 것을 다시 말하자는 일종의 일본 전후 역사에 대한 실제적 사실들을 일반 일본인들이 받아들이고 ‘이야기’해야만 한다고 꼬집어 밝히고 있습니다.

일본인들 자신이 전후에도 끊임없이 주변국 국민들이 말하는 일본의 책임에 대해 이전의 조상들이 벌인 일들에 대해 명확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그것을 ‘기억의 되물림’을 통해 후세대들에게도 기억시키게 하는 것으로 사과와 인정 및 기억을 통해야만 이러한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들이 종결될 것이라고 다카하시 교수는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일본 국민들 사이의 이런 공감대가 형성이 되어야 정치권이 더이상 역사 수정주의적 입장을 국체로 여기는 행위가 근절될 것이라 여기는 듯 한데, 개인적으로는 지극히 온당한 주장들이지만 실제로 많은 일본 국민들이 한국과 중국의 ‘사과요구’에 어처구니 없게도 피로감을 느끼는 이들이 많고 동아시아 내에 커지고 있는 중국의 세력 확대에
두려움과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아 단순히 전후의 역사 문제가 역사 본연의 위치로 돌아가기란 어려운 현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다만, 3장에서 짧게 언급되고 있는 ‘도쿄재판’과 관련해서는 당시에 일본 일왕의 책임과 전범들의 죄값이 졸속으로 처리되어 오늘날 독일과 같은 책임의식을 일본인들에게 각인시키지 못했으며, 오히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 도쿄 공습과 같은 희생자들을 배경으로 자신들이 피해자라는 인식적 결과를 가져오게 만든 것은 그것 자체가 모순된 행위이지만 일본내에서는 이미 거듭 재생산되고 있는 것은 또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저자도 이와 관련하여, ‘조선 침략 이래 적어도 70년에 이르는 일본의 아시아 침략의 귀결이었다는 점에서 아시아에 대한 가해 책임을 지지 않고서는 피폭 피해를 호소해도 설득력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한다’고 동일한 취지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결국 제가 이 책을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은 단순히 역사 수정주의적 역사 개변의 입정 뿐만 아니라 가해자/피해자, 이해/몰이해 등과 같은 양자 모순적인 해석까지 곁들여지고 있는 것이 일본인들은 과거의 역사를 단절시키고 현재의 표면화된 ‘번영의 일본’만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동아공영과 태평양 전쟁으로 희생된 2천만의 아시아인들 중의 한 가지로서 이러한 이웃을 두고 ‘교린’이라는 것을 입에 담아야 한다니 저로서도 이런 인식의 결과를 부정하고 싶은 마음까지 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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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의 위기 - 국제관계연구 입문
E. H. 카 지음, 김태현 옮김 / 녹문당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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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우리나라 출판계에 수많은 판본으로 무수히 출간된 ‘역사란 무엇인가’의 E.H. 카의 초창기 국제정치학의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 받는 ‘20년의 위기’를 제대로 읽을 수 있을까하는 망설임과 함께 읽기 시작했는데요. 이 ‘20년의 위기’는 녹문당에서 2017년에 국내에 번역 출간을 했습니다. 다만 제 먼 기억으로는 1990년대 헌책방에서 이 20년의 위기를 우연히 접했던 것 같습니다. 상성당과 현대 판본으로 기억이 나기도 하는데요. 당시에 일본 판본을 판권없이 무단 번역 출판하는 것이 뭐 일종의 관례였으니 그런것과 아예 무관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은데요. 하여튼 저는 일찍이 일본 번역판이라도 접해볼 기회가 있었으나 당시에는 이 책에 별 관심이 없어 늦게나마 이렇게 이 곳을 통해 리뷰라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책의 구입은 제법 되었는데요. 대략 3분의 1 정도 먼저 읽고 중간에 다른 일로 덮었다가 토요일 하루 아예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을 했습니다. 오늘날 국제정치학 분야를 본격적으로 학문 문대에 세웠다는 평가를 받는 한스 모겐소 역시 그의 여러 글에서 이 ‘20년의 위기’를 인용하기도 했는데요. 그만큼 국제정치라는 속성과 분석을 그 시대상과 연계해 제법 훌륭히 접목시켰다고 생각합니다. ‘지정학의 포로들’에서 저자는 제1차 세계대전의 위기가 당시 만연된 정치적 이상주의의 분위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는데요. 여기 카의 언급대로 아마도 19세기의 놀라운 자유주의적 분위기가 제 1,2차 양대전의 원인이 아니었나 저 개인적으로는 추측해보는데요. 거기에다 2차대전은 1차대전 당시의 결과로 학습한 무참한 살육 전쟁에 대한 공포, 영국의 체임벌린 등과 같은 당시 서유럽의 정치인들이 히틀러의 장담을 너무 순진하게 믿은 탓일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랬을 수도 있겠죠.

바로 그러한 대전의 원인처럼 현실 국제 정치에서 이상주의적 태도를 제거하는 것으로 시작해 아주 완벽한 현실주의적 해법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통해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양 측면의 비교 분석과 그것을 통해 좀 더 현실의 부합되는 면밀한 결과를 도출시키고 있습니다. 즉, 국제 정치가 힘의 논리에 지배되고 있다는 것과 항상 강대국의 정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체가 합리적이라는 이상주의가 현실의 국제 정치와는 맞지 않는 것이고, 절대적 기준을 수립하는 일에 아무리 열심인 이상주의자라도 자국의 정부가 세계의 이익을 자국의 이익에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고 카는 주장합니다.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4장과 5장, 6장은 앞서 설명드린 대로 이상주의의 대척점인 현실주의도 몇가지 결점을 갖고 있는데, 국제 정치 무대의 각각의 개별적 주체들의 이익이 서로 일종의 ‘이익의 조화’를 추구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거의 불가능하고 이익 조화라는 사상은 특권 집단들이 그들의 지배적 지위를 정당화하고 유지하기 위해 주장하는 탁월한 도덕적 장치인데, 이처럼 국제 정치 자체에서 도덕적 주장을 관철시키거나 그 원칙적 입장을 이해시키기란 매우 어려운 것이며 이른바 허울 좋은 명분으로써, 강대국들에 의해 적절한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정치가들이 인정하듯 국내외 문제를 막론하고 특정한 이익에 대해 도덕적 원칙의 옷을 입힐 필요가 있는데 그러한 필요성이야 말로 현실주의가 실제로 맞지 않는다는 증거일 겁니다. 즉 오늘날 미국이 세계에 대한 자국의 패권 정당성을 민주주의 체제의 확대로 삼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특히 강대국의 이익에는 적당한 도덕적 이상이 덧대어져 있고 이 자체로만 봤을 때는 현실주의적 이론이 부정되는 상황이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 이 책의 3부인 7장과 8장 및 9장은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정치와 권력, 그리고 도덕에 대해 이론적으로 열거하며 이것을 국제 정치와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는데요. 정치와 권력은 서로 밀접하고 권력을 도덕과 조화시키거나 정치현실에서 권력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카는 언급하고 역시 이 딜레마를 완벽히 해소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딜레마를 4부인 법과 변경에서 국제 정치에서의 법의 역할로 다소 나마 질서와 규칙을 세울 수 있을지 않을까 싶은데요. 국가간의 조약이나 협정 혹은 국제 협약의 형태의 그러한 법적인 문제들은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민족은 마땅하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이유가 있으면 조약을 엄숙히 공식적으로 폐기할 권리를 당연히 보유한다”고 천명했지만 이것 역시 모든 나라의 권리는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불평등 조약이나 강박에 의한 조약들 역시 거부할 수 있는 도덕적 권한을 인정하는 경향도 있다고 보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거부할 수 있는 권리는 매우 상대적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 대한제국과 일본과의 강제 합병 조약을 스스로 거부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죠. 그 기본적 이론들과 현실적 상황과 이해는 매우 입장이 상이하므로 이것을 최대한 교차점을 찾거나 하는 것은 명백한 딜레마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처럼 오늘날 국제 정치 현실과 점목시켜 본다면, 일정 수준의 군사력과 경제력이 수반되는 국가들만이 자신들의 이익을 그나마 주장이라도 할 수 있고, 이상주의나 현실주의 어느 한쪽의 이론으로만 국제 정치 전반을 해석하거나 평가할 수 없으며, 이러한 일종의 국제 정치적 무정부 상태를 다소 완화시키기 위해 법과 규칙의 원칙이 필요하지만 그것 또한 현실적으로 명백하게 돌아가기는 어렵다는 것이 사실상 결론일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국제 정치학에서 말하는 많은 이론들이 이러한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고, 국력의 차이에서 오는 각각의 행위자들의 배경을 무시하기 어렵고 그러한 힘의 논리를 비도적적이라고 매도할 수 없는 것이 베르사유체제의 시기부터 오늘날의 현실이 아닌가 싶습니다. 인간의 이성적인 측면이 항상 올바른 사회의 일면을 답보하는 것이 아닌것 만큼 국제 정치에서 힘의 논리에 기반한 인식과 그러한 배타적 국가 이익을 추구하는 강대국의 행태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란 어렵습니다. 세계 정치에서 법의 지배를 요구하는 것은 그만큼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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