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화 시대의 정의 - 정치적 공간에 대한 새로운 상상 프리즘 총서 5
낸시 프레이저 지음, 김원식 옮김 / 그린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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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젠더학과 페미니즘 이론가로 잘 알려져 있는 낸시 프레이저는 실제로는 후기구조주의에 입각해 사회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며 미국을 비롯한 서구에서 인정받는 학자들중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다만, 근래 국내에서는 페미니즘 연구가 큰 화두가 되면서 관련 학자들이 여러 사람들의 입을 오르내리고 있는데요. 그중 국내 출판계에 뿐만 아니라 학계에서 인용되고 있는 사람이 바로 프레이저입니다. 더불어 그녀는 악셀 호네트의 연구와 함께 사회정의 및 정의론에도 관심을 갖고 어쩌면 여성주의 운동 또한 이런 정의론에 입각해 해석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또한 일부 연구자들에 의해서는 프레이저의 연구가 약간 난해하다는 평가도 하고 있는데요. 마찬가지로 이 책 역시 적절한 사회학적 지식 배경이 갖춰져 있지 않는다면 상당히 읽기 지루한 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더군다나 토마 피케티에 의해 새롭게 점화된 정의론에 대한 최신 경향과 이론을 인지하고 있지 않고 있다면 꽤 어려운 글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지난 2008년 원제 “Scales of Justice : Reimagining Political Space in a Glolbalizing World” 로 처음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1년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대담을 포함한 마지막 장을 포함해 총 9장의 다소 구분된 주제로 되었는 글의 전체적인 구조는 특히, 요즘들어 자주 요청되는 정의론에 대해 그녀는 새롭게 인식과 배경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삶을 영위하고 있는 ‘지구화 시대’에 헌법에 의한 사회 정의 및 국가적 정의론의 주된 배경이 되었던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거한 국민국가주의가 사실상 한계를 맞이하고 있다는 인식으로 주된 논거를 확대하는데요. 이것은 글로벌 기업들이 국가라는 개념에 연연하지 않고 생산기지를 값싼 노동력을 따라 수시로 이전함에 따라 더이상 자본주의의 이전 제약이 없어지는 현실을 기반으로 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점은 약간 논란이 될 수도 있겠는데요. 해당 사회에 정착한 기업의 생산 공장에 일하는 노동자들이 과연 속지주의에 따라야 하는지 아니면 그 기업의 국적을 따라야 하는지에 대한 사회정치적 구분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 점은 저자인 낸시 프레이저가 강조하는 오늘날 비정상적 사회에서 정의가 뿌리내리지 못하는 “불평등한 분배, 무시, 대표 불능의 문제”에 따른 정의의 대상은 과연 누구인가에 명확한 답변을 요구하게 됩니다.

따라서, 과거 베스트팔렌적 국민국가주의는 오늘날 영토국가의 규제력과 세금 부과 능력을 벗어날 수 있는 힘을 가진 다국적 기업의 본질과 이 세계화 시대의 진실된 면모를 해석하고 적용하기 위한 한계를 갖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로서도 이런 낸시 프레이저의 의견에 동의하게 되었는데요. 특히 이러한 글로벌 기업의 경영자들과 수많은 부유층들이 “시민들이 법 앞에서 형식적으로 평등한 것으로도 충분하다 보았다”는 이들의 본심이 ‘과연 사회에 정의가 필요한가’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다고 보였습니다. 그래서 앞의 합리적 대응에 필요한 정의를 저자는 ‘삼차원적인 정의’라 표명하고 이에 “경제적 분배 차원 및 문화적 인정 차원과 더불어 정치적 대표 차원’을 포함하는 것을 뜻한다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이 삼차원적인 정의와 관련해서는 제일 마지막인 정치적 대표 차원이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겠는데요. 2장에서 논증되고 있는 바와 같이 ‘정치적으로 아예 배제된 사람들’이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저자는 비판하고 이 점은 뒤에 4장에서 이어지는 대로 ‘비정상적 사회에 종속된 사람들의 정의’는 그 대표성과 정의의 대상이 누구인가가 중요하며, 이것을 사회과학자들이나 사회철학자들에게 그 범주와 인정을 맡기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라고 프레이저는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비정상적 사회에 놓여 있는 시민들이 자신들의 인정과 운명을 소위 전문가들인 사회과학자들에게 일임해 버리는 것은 스스로 정의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봐도 무방해 보였습니다.

물론, 광범위한 정의를 주장하는 일종의 평등주의 또한 두 가지의 독단이 있다면서 프레이저는 3장에서 언급하는데요. 정의와 평등에 관한 의견 불일치에 따른 논쟁도 없이 국민만을 ‘당사자’로 규정하는 암묵적 가정과 표준 사회과학의 정의의 ‘당사자’를 규정할 수 있다는 무언의, 입증되지 않은 가정이 그렇습니다. 전자는 일종의 베스트팔렌적 국가의 한계로 후자는 사회과학의 증거와 이론적 가정에 따른 이들이 ‘당사자’를 결정하는데 시민들의 맹신을 비판하고 있는 보였는데요. 사실 뒤이어 5장에서도 “위르겐 하버마스의 공론장 이론과 더불어 이런 시민들의 의사소통 권력이 국가로 흘러들어가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구조적 힘들이 무엇이냐”에 일부 해답이 바로 이 사회과학에 대한 시민들의 맹신이 아닐까 추측해보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정의롭지 못한 현실에 존재하는 사회과학 주류에서 통용되는 내용들은 기득권자들의 관점을 잘 반영하고 그들의 약점을 방어하기 마련인데, 이런 사화에서 과학주의적 가정을 채태하는 것은 불이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요구를 은폐할 위험이 있다”고 보는 저자의 예견과 일맹상통한 부분이라 여겨졌습니다. 이것은 또 달리 말하면, 시대의 지식인들이 현재의 기득권과 결탁해 일찍이 신자유주의의 교조인 하이에크가 주장한 ‘정의 따위가 필요한가’에 매우 근접한 결과라 해도 지나치지 않아 보입니다. 반대로 평등주의의 요청과 필요성과 관해서도 모두가 강제로 ‘결과주의적 평등’에 집착하게 된다면 그것은 또 부정적인 사회적 결과를 낳게 될 것이므로 우리가 주목해야되는 평등은 ‘출발선상에서의 평등’이라 개인적으로는 그리 생각합니다.

곧이어, 다음에서 논의되는 ‘비정상적 사회의 부정의’에 대해서 저자는 이런 부정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요구들을 공정하게 검토할 수 있는 상대적인 안정틀이 필요하고 둘째로, 부정의를 시정할 제도화된 기관과 수단들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결국, 사람들의 휴머니즘적 원칙들이 결함을 가진다고 보았을 때, 우리 모두가 종속된 모든 사람들의 원칙 all-subjected principle에 따라 포섭시킬 것을 주장하는 것과 같은 모두가 인식하는 공통된 원칙을 가질 것을 일종의 정의를 적용하기 위한 구체적인 조건이 되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모두가 인정하는 규범화된 원칙은 이래서 매우 시급하며, 어쩌면 그런 연유로 사회과학자들의 각종 이론 제시는 현실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는 문제가 아닌가 싶기도 하였는데요. 다만,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시대의 파편화와 시민들의 파생적 종속 문제에 대해 끊임없는 여론의 돌출과 이를 이론화 시키는 사회과학자들의 역할론은 분명 필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프레이저는 이러한 필요성에 대해 별반 언급은 안하고 있습니다만 결국 가장 중요한 결정에 있어서 소위 전문가들의 조언 보다는 직접적인 시민들의 정치적 참여와 의견 일치 및 광범위한 규범화를 더 인정하는 듯 보였습니다. 저의 결과론적인 입장은 매번 엘리트 정치와 전문가적 조언이 우리의 삶에 정확한 해결책이 되지는 않으며, 민주주의 자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다양성의 측면에서 민주 정치 자체를 우리의 손으로 영위해 가는 중요한 가치를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첨언으로 얹고 싶습니다.

끝으로, 6장과 7장 그리고 8장은 보는 독자에 따라서는 주제의 중요성을 구분하는 장으로 여겨질 수 있을텐데요. 저 개인적으로는 이들 3장을 일종의 보론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6장의 여성주의적 상상력은 말 그대로 시급한 정의와 5장에서 논의되는 좀 더 효과적인 공론장의 역할에 대한 첨언이 될 수 있으며, 7장의 푸코, 8장의 한나 아렌트의 지구화시시대의 인류의 위협에 관한 부분 또한 그러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다만, 한나 아렌트에 대해 따로 추려볼 수 있는 부분은 그녀가 일찍이 지구화 시대의 시민 권리의 축소에 대해 우려했던 것으로 보아 그녀가 경고하는 다방면적인 증거 제시에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악을 몸소 체험하고 그것을 일일이 분석했던 사상가로서 다른 어떤 사회학자나 철학자에 비해 그녀의 철학적 담론은 충분히 시민들에게 깊은 설득력을 보이고 있다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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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 국가 - 미국의 세계 지배와 힘의 논리
노암 촘스키 지음, 장영준 옮김 / 두레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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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국 필라델피아 출신의 세계적인 언어학자이인 노엄 촘스키는 세계 지식인들 가운데 누구와도 비견될 수 없는 실천적 지식인이자 현실의 부조리들을 선명한 양심에 따라 가차없이 비판하는 소위 ‘인류의 양심’이라 불릴만한 지성인입니다. 현재 MIT의 명예교수로 있는 촘스키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활발한 저술 활동을 하고 있는 정력가이기도 한데요. 특히 그와 관련된 한가지 특이한 일화는 미국 CIA가 그를 지속적으로 감시해 왔다는 점이었는데요. 아마도 권력층에 있는 사람들은 그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지 않을까 짐작해보기도 합니다. 더불어 생전의 지그문트 바우만과 촘스키가 서로 만나 정치와 사회 비판을 주제로 작은 대담집이라도 기획이 되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사뭇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이 책은 지난 2000년 “Rogue States”라는 원제로 출간되었으며, 국내에는 이듬해인 2001년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다만, 재출간을 앞두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재는 절판된 상황입니다.

아마 독자분들은 제목만 보고선 과거 조지 W. 부시의 테러지원국이라는 리스트가 올라간 그 담화를 떠올리고 계실지 모르겠군요. 저자인 촘스키는 제목과 관련된 설명을 서두에서 하고 있는데요. “정치적 담론의 많은 다른 용어들과 마찬가지로 ‘불량국가 rogue state’란 용어도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는 선별된 적국들에 대해 적용하는 프로파간다로서의 용법이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를 국제질서에 구속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는 국가들에 적용되는 문자 그대로의 용법이다”라고 이어집니다. 물론 이 책에서는 미국을 후자에 빗대어 비판해내고 있습니다. 현재에도 중동의 권위주의적 종교 독재 국가들의 후견인을 자처하고 있는 미국은 과거 전 국무장관인 조지 슐츠가 말했던 대로 “국제 사회의 역학 관계를 무시하고 유엔이나 국제 사법재판소와 같은 중재기관에 호소하는 유토피아적, 법률주의적 수단”을 옹호하는 사람들을 비웃고 있습니다. 오로지 국익이 우선이라는 교리는 특히 미국과 같은 초강대국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며, 사실상 미국이 그러한 지위를 꽤 적나라하고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것은 세계 민주주의 국가의 큰형을 자처하면서도 행동은 그 반대가 되는 아주 역설적인 행태인데요. 니카라과와 아이티, 파나마 등에서 벌인 민중이 주도가 된 민주정치를 거부하고 다루기 쉽다는 미명하게 군부 독재 정권을 지원했던 미국 정부의 과거 이력은 우리와도 꽤 밀접하게 보이는 것은 단지 기분탓일까요.

사실 촘스키가 쓴 이 글에는 실로 소름끼치는 일들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터키와 이라크가 쿠르드족을 말살하기 위해 사용한 화학무기와 국가 폭력의 현장,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가 동티모르인들을 학살하면서도 당시 빌 클린턴이 이런 수하르토를 두고 ‘우리 사람’이라고 했던 것, 미국 정부에 의해서 콜롬비아에서 화학 및 생물학 무기가 사용되었던 것 등은 실로 믿겨지지가 않을 정도입니다. 저는 그동안 여러 책을 통해 미국이 비합법적으로 파나마와 그레나다 및 쿠바에 군사적 침공을 벌인것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자신들이 앞마당이라고 부르는 남아메리카에서 군사 정권을 지원하며 벌인 일들은 단순히 역사의 불행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입니다. 따라서 이 책의 총 14장의 구성 중 7장까지는 앞에서 짧게 열거한 국가들에서 미국의 CIA와 군대 및 국무부가 벌인 일들을 UN을 비롯한 국제시스템 기반의 체제를 불신하고 반하게 된 원인들(물론 주요한 이유는 미국의 국익입니다)과 8장부터 14장까지는 2차대전 전후부터 마셜 플랜과 브레턴우즈 체제를 거쳐 워싱턴 컨센서스의 신자유주의가 미국 국적의 집산 기업들의 이해에 맹목적으로 따르게 됨으로써 벌어지는 진보에서 멀어지는 퇴행의 정치사회적 결과들을 매우 신랄하게 비판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미소 냉전시기의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첨예한 대결에 대해 그 시대에는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체념을 잘 알고 있습니다. 특히 이러한 이념 대결에서 남미와 아시아의 민중들이 요구하는 민주주의를 좌파로 몰아가 탄압한 많은 군부 독재 정권을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이들의 배후에는 유감스럽게도 미국이 있었으며, 브루스 커밍스가 일전에 언급한대로 아시아의 여러 외교무대에서 미 국무부 장관이 한국과 일본의 외교장관을 양쪽에 거느리고 나타났다는 후견국과 피후견국의 관계의 역사를 엿보았습니다. 과거 미국은 지역 안정과 자신의 국익의 부합이라는 미명하에 다루기 쉽고 말을 잘듣는 독재 정권들을 지원하였으며, 리비아의 카다피와 이라크의 후세인은 오판하여 그러한 대열에서 이탈해 결국 미국의 응징을 받았다고 촘스키는 설명합니다. 우드로 윌슨의 도미니카 공화국 및 아이티 침공은 미국의 국익 우선이 어느 선에 있는지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꽤 합리적이고 진봅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는 아이젠하워 조차도 과테말라에 군사 개입을 시도해 현지에서 야만적인 억압과 고문의 시대를 열었다는 일편의 평가도 초강대국의 국익 우선이 어떠한 파급을 낳는지 감히 재단하기도 힘듭니다.

“법의 규제를 거부하는 불량국가들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한 이러한 (유엔의) 해결책은 아무런 효과도 없다”고 국제 시스템의 무용론은 과거 미국이 안보리 이사국으로서 수많은 거부권을 해온 것에 기반합니다. 또한 자의적으로 해석된 인도주의적 개입은 막상 소말리아나 앙골라와 같은 적극적 개입이 필요한 국가에는 유명무실했는데요. 만약 이들 국가에 원유라도 묻혀 있었다면 그 결과는 아마 다르게 나타났을 겁니다. UN에서의 각 가맹국들의 권한은 자신들 스스로 자결권과 침략에 대한 방어권을 갖고 있음에도 강대국들의 ‘인도적 개입’이라는 선별적 선택에 의해 체제 자체가 만신창이가 되었고, 꼭 필요한 인도적 지원에는 미국이 눈을 감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데요. 특히 인도네시아 특수군에 의해 자행된 동티모르인들의 학살과 관련해 당시 미국 정부가 호주의 압력이 없었다면 어떠한 지원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촘스키의 평가는 이를 잘 대변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자신을 너무 이성적이고 냉철한 머리를 가진 나라로 묘사하는 것은 자행행위이다” 라든지, “우리는 적대국들에게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국가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닉슨의 미치광이 논리는 무력이 없이는 국제 정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촘스키의 설명에 단순히 맞아 떨어진다고만 봐야할지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이 책에 노엄 촘스키는 전반적으로 스스로 미국인이라고 믿을 수 없을정도로 자신의 정부와 과거 불법적인 군사외교정책에 서슴없는 비판의 칼날을 휘두르고 있는데요.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이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자위하는 많은 국제정치학자들과는 다른 변치않는 양심에 걸맞는 그의 논법이라 할만 했습니다. ‘미국의 명령을 거부한 국가가 불량국가’라는 촘스키의 해석은 다소 논란의 소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이것이 아예 터무니없는 것만은 아님은 분명합니다. 다만, 베트남과 관련한 정치적 셈법인 “미국이 두려워했던 것은 이들이 결국 독립적인 아시아 지역을 형성하면서 일본식으로 발전하여 미국의 통제를 벗어난 아시아의 새로운 질서의 산업중심지로 성장하는 것”이라는 비평에는 다소 동의하기는 힘들었는데요. 베트남이 파란색이 아니라 다소 붉은끼가 감도는 국가여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한편으로는 역외 균형 Offshore Balancing 전략을 베트남에 적용할 정도로 이 소국이 지역내의 대두하는 국가로 성장할 것이라는 일종의 예견에는 동의하기 힘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외에는 이 책은 오늘날 강대국의 국익에 대한 논법과 이와 관련된 비현실적으로 비합법적인 행태를 모두 담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가 한번쯤은 읽어봐야 하는 글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현대 외교의 창안자이자 영향력있는 과격한 현실주의자인 헨리 키신저가 촘스키의 이 글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으나, 그도 역시 이 글을 완전히 부인만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관점의 차이라는 미명하에 수단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하게 될까요? 과연 미국에게 민주주의란 무엇인지에 대해 솔직히 물어보고 싶을 정도입니다.


현실은 대부분 “어떤 공식적 금지를 할 필요도 없이 어둠속에 갇혀 있다”




-아마 큰 의미는 없겠지만, 267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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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의 시대 - 유동하는 현대사회의 문화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윤태준 옮김 / 오월의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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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바우만은 폴란드 유대인 출신으로 바르샤바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이후 바르샤바 대학의 교수가 되었으나 당시 팽배하던 폴란드의 반유대주의 운동 때문에 이스라엘을 거쳐 영국으로 망명해 세계적으로 명망있는 근대주의 비판 이론가로 큰 명성을 얻게 됩니다. 특히 개인적으로 그에게 큰 감명을 받았던 것은 과거 시오니즘과 같은 폐쇄적인 유대주의 운동에 대해 여지없이 비판의 목소리를 세웠던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과거 알베르 카뮈가 알제리 독립 운동과 관련하여 다소 후퇴한 모습을 보인 것과는 달리 바우만은 버틀란드 러셀과 비견될 정도로 지식인의 비판적 인식과 사유를 여실히 잘 보여주었는데요. 근래 어느 유튜버는 알랭 바디우와 에티엔 발리바르, 자크 랑시에르 및 슬라보예 지젝과 함께 그를 유럽의 5대 좌파 지식인이라고 소개하기도 했습니다만 단순히 좌파 지식인이라는 수식어 가지고는 지그문트 바우만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는 생각을 저는 갖고 있습니다. 쥘리랑 방다가 지식인의 책무에 대해 말할때, 샹탈 무페가 오늘날 지식인들이 변질되어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다고 할때, 오직 지그문트 바우만은 유일하게 이 범주에 해당이 되지 않는 지식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일개 독서인의 평가이니 여러분은 깊게 생각하지 않으셨음 좋겠습니다. 이 책은 지난 2011년, “Culture in a Liquid Modern World” 라는 원제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3년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약간의 논외로 제가 구매해 읽었던 판본이 벌써 4쇄를 찍었을 정도인데, 이 점은 다른 바우만의 번역글과 비교될 정도의 판매고를 올린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원제와 번역된 제목의 뉘앙스가 상이한 편이라 이 책을 읽으실 분들은 이 부분을 감안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 글의 주요한 분석 대상인 문화에 대해 저자인 바우만은 초기 계몽주의 시기를 거쳐 그저 민중에 그치고 있던 이들을 ‘시민’으로 만드는 원동력 가운데 하나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문화가 ‘사회를 개선하고 민중을 발전시키는 것’ 이라고 세부적인 내용을 점검하는 것과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데모스 demos 에서 기인한 이 민중이라는 단어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뭔가 멸칭에 가깝게 느껴지는 이 음절의 의미는 꽤 거슬리기까지 한데요. 원래 데모스 demos는 초기 사회과학 번역글에서 인민이나 국민으로 소개되기도 하였으나, 최근에는 민중으로 또는 시민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저는 마땅히 ‘시민’이라고 규정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본래의 글로 돌아가서, 바우만은 문화가 지식을 지니고 다루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암시하며, 바로 이들에 의해 “최근 새롭게 형성된 국민국가 Etat-nation에서 시민 citoyens의 역할을 맡은 민중 le peuple 을 승격시키고 기품 있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만약 지식을 다루는 사람들을 소위 ‘지식인’으로 치환할 수 있다면 지식인들과 문화의 관계와 사회에 대한 지식인의 역할을 밝힌 4장은 이러한 인식의 확증된 논증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다음 2장에서는 오늘날 ‘유동하는 근대’의 명목을 이어온 자본주의적 소비(지향)사회가 과연 우리들의 유토피아가 될 수 있을 것이냐에 대해 평가하고 동시에 비판하는 장이라 볼 수 있을 겁니다. “유행에 대해 변함없는 충성을 바치고 시민 및 소비자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사형으로 처벌받는 의무”의 오늘날의 세상이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어떠한 실체적인 희망도 더는 진지하게 품을 수 없다”고 바우만은 평가하는데요. 뒤에 5장에서 일부로 논증되는 부분입니다만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신봉하는 이 자유가 세계화 과정과 지구화 시대에 직면에서 각 사회의 여러 규범들이 해체되면서 일개 개인들이 더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추론합니다. 꼭 더 많은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노력을 추진했다 하더라도 이미 세계화 과정에서 각 사회의 도덕 규범을 비롯한 사회적 규범들이 수많은 개인들의 원자화에 이르러 유명무실해졌다는 점은 굳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언급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요점인데요. 제가 왜 이런 자유가 얻게 되었던 부가적인 측면을 꺼내게 된 것은 이처럼 사회를 이루는 개인들이 자신의 자유를 과거보다 제약없이 누리게 됨으로써 마찬가지로 공동체 의식이 옅어졌으며, 앞선 문화가 민중들을 시민으로 도약하게 어떤 매개라고 규정한다면 소비지상주의와 결합한 개인들의 자유주의 문화가 과연 공동체 의식을 회복시키고 더 나아가 살기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회의적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3장에서도 이러한 논지의 글이 이어지는데요. 로티나 프리드먼의 입을 빌어 비판하는 현대 지적 엘리트들의 사실상 변질은 국가 건설 시대에 기대되었던 교육자, 지도자, 교사 등의 역할을 그들 스스로 거부하고 다른 역할을 더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고 바우만은 파악하는데요. 바로 그것은 이들 하이브리드 지식인들이 세계 특권층이나기업가 계층을 모방하고 심지어 그들과 결탁하는 경향까지 있다는 것입니다. 문화 발전의 접점에서 물론 상아탑 연구자들의 연구 성과로서 문화의 분석도 중요하지만, 실질적으로 문화를 올바른 쪽으로 이끌어가는 건전한 지식인들의 존재와 2장에서 존재감을 보이는 인간 문화의 유행, 유행의 영구운동은 소비시장의 대두와 함께 그 존재감을 위협받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제가 자의에 의해 이 유행을 설명하는 부분을 다소 함축해버렸습니다만 전통적인 사회 규범으로 정착되는 문화의 유행을 앞선 소비와 자본주의의 논리가 익히 “소비시장이 힘과 지혜를 모아 문화를 유행의 논리로 일단 지배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반드시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능력을 갖추었음을 증명해야만 한다”고 그는 일침합니다. 어쩌면 그런 연유로 4장에서 “즉, 누구나 남들과 구별될 권리가 있다는 것과 타인의 개성에 무관심할 권리도 있다”는 당위는 꽤 의미심장한 부분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뒤이어 4장과 5장 그리고 6장은, 디아스포라와 문화적 다양성, 다문화주의를 기반으로 현재의 유럽과 앞으로 유럽이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논증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디아스포라라는 단어는 서경식 선생의 일본사회에 우리 재일동포에 대한 의미로 뇌리에 박혀있습니다. 물론 여기의 디아스포라는 2차대전 전후에 벌어진 중동의 이스라엘 건국 운동과 같은 종래의 질서에 유입되는 이민과 그들 고유의 전통과 개별적 문화의 대결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에티엔 발리바르가 탈공동체주의적 상황에서의 소수 이주민들의 유럽 유입과 사회적 갈등이 물과 기름으로 나아가고 있는 상황을 잘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인식은 바우만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소수의 이슬람 이주민들이 자신들의 전통을 굳이 고수하지 않아도 그 사회에 녹아들 수 있을만한 적절한 당근책과 이점이 있었는가에 대해 본질적인 어려움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나날이 긴장감이 높아가는 유럽의 현 상황에 이득을 볼 존재들은 세계화 권력이나 세계화주의자들이라는 점은 꽤 통렬한 해석인데요. 이런 세계화 과정에는 무엇보다 ‘현대적 정신이 없는 현대성’이 약간의 계몽주의적 결과론이지만 “인간의 갈등과 고통에서 완전히 해방해 준다는 희망을 실현하기 위한 조건이 아니다”는 점을 들어 본질을 들춰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번 바우만이 강조했던 것으로 인간이 인간에 대한 도덕적 책임감 없이는 기존 사회에 도덕적 전통이 바로 설 수도 없으며, 우리가 그동안 수없이 직면했던 신자유주의의 이행의 그 결과 역시, 인간과 사회에 탈도덕과 탈윤리의 참혹한 현실입니다. 물론 매번 도덕주의적 이상을 늘어놓는 것으로 보여져 이러한 논법을 몇번이고 강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어찌됐든 철학적인 측면에서는 분명 무시할 수 없는 것이죠.

글을 마무리 하기에 앞서, 한가지 더 언급하고 싶은 부분은 바우만이 다소 다문화주의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한 주장입니다. ‘세계화의 압력’이 지대한 현 상황에서 문화적으로 견실히 규정되지 않은 다문화주의가 일차적으로 인식의 방해를 이차적으로는 기존의 사회에 혼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여기는 듯 했습니다. 그런데 마누엘 카스텔이 일찍이 옹호했던 다양성의 정치는 저로서도 민주주의가 지켜내야 하는 가치임을 의심하지 않고 있는데요. 다만, 앞선 바우만의 우려는 공동체주의가 실종되고 정치와 권력이 분리되어 사회적으로 더욱 경제, 정치, 문화의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오히려 분별없는 다문화주의의 주입이 상황을 더 혼란스럽게 하는 원동력으로 보는 듯 했습니다. 따라서 세계화의 탈규제가 무조건적으로 이상향이 되지 못하는 것은 설사 이러한 이행 과정에서 개인의 자유가 더 확대되었다 하더라도 탈규제와 세계화의 압력은 꽤 본질적으로 직접적인 공동체의 분산과 더 나아가 시장 주도의 소비지상주의를 더욱 강조하는 문제로 나타난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것은 몰개성과 비인간화는 차치하더라도 인간이 마주하고 있는 고통과 갈등에 온 평생을 기울였던 바우만에게는 이러한 전제가 깔리는 무분별한 다문화주의에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에는 꽤 합당한 이유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민중을 시민으로 만드는 문화적 발전주의와 더 나아가 문화를 이루는 여러 뼈대들이 세계화의 강요에 놓여 있다는 것은 분명 귀담아 들을만하고, 과거 전통적인 사회 질서 유지에 힘을 쏟았던 지식인의 책무가 오늘날에 자신들의 이익에 영합하는 쪽으로 변질된 상황은 단순히 세계화 시대의 공동체 해체이후 뿐만 아니라 그러한 파행을 부채질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책을 덮으며 고민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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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으리라, 너희 법률가들이여!
프레드 로델 지음, 이승훈 옮김 / 후마니타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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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80년 6월에 작고한 (이 책에는 1981년 세상을 떠난 것으로 나와 있으나, 위키백과에서는 사망 날짜까지 표기되어 있습니다) 프레드 로덱은 26세에 천재성을 인정받아 미 예일대 로스쿨 교수로 일하게 됩니다. 그로부터 40여년간 존경받는 법학자로 명성을 떨치고, 특히 1939년에 출간된 이 책이 미국의 거의 모든 법률가들이 읽게 되면서 큰 반향을 일으킨 바가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어느 호텔에서 이름모를 변호사를 만난 일화에서 또한 손수 서문을 남긴 진보적인 판사 ‘제롬 프랭크 판사’의 소개까지 미루어 짐작해보면 글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됩니다. 앞서 짧게 언급한대로 이 책은 지난 1939년 “Woe, Unto You Lawyers!”라는 원제로 처음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4년 후마니타스에 의해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간략히 이 책의 구성을 소개해드리자면 총 12장의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 각 개별 주제들은 1장부터 10장까지 차례대로 논증되며, 그리고 11장과 12장이 글의 결론이자 이상적인 대안을 표방하는 형태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글의 해석과 관련하여 전체적으로는 미국의 연방법과 연방대법원 및 독립 시기의 헌법 취지와 시민권 및 대공황시기의 루즈벨트 행정부 시대를 주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저와 같은 법의 문외한이 특히나 미국의 연방법 체계와 이를 바탕으로 하위 법률로 실제 법치주의에 이르는 과정 전반을 다루고 이해하는 것은 다소 어렵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아쉬웠던 부분은 미국 헌법을 다루고 있는 국내 학자의 책 한권을 중도에 그만두었던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런 연유로 조만간 다시 잡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했습니다.

이 글의 저자인 프레드 로덱은 미국의 사법체계와 그 관료들의 행태와 시스템을 여지없이 비판하고 있는데요. 이러한 배경에는 바로 “사법제도 및 사법부 역시 시민의 마땅한 견제를 받아야만 한다”는 권력이 마땅히 국민으로부터 나와, 각 정부 기관이 그러한 위임을 받아 정당한 통치 행위를 실행한다는 취지의 인식에 기반하고 있었는데요. 즉, 사법부가 크게는 민주제하에 정부의 일원으로서 마땅히 시민 모두의 견제와 감시를 받아야만 하는 당위성을 바탕으로 1장에서 그렇게 밝혀두고 있습니다. 약간 극단적인 주장일 수도 있으나 “우리의 정부는 ‘인민의 정부’가 아닌 법률가의 정부다”라고 규정하는 것은 미국에서 조차 연방대법원과 사법체계 및 사법 관료들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만하다고 여겨졌습니다. 또한 “법률업은 간단히 말해, 고등 사기술 high-class racket 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하는 것도 헌법에 기반한 하위 법률들이 판사의 재해석과 판결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으며, 그러한 재해석이 과연 개인의 의견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헌법의 정의와 의지에 기반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역시 깊은 회의를 보이고 있습니다. 과거 홈스 대법관은 이와 관련하여 “법이 모호하고 부정확 할 때 법관 개인의 편견이 작용할 위험성”을 경고했고, 연방 대법원장인 찰스 에반스 휴스는 “우리는 모두 헌법 아래 있다. 그러나 헌법이란 법관이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은근슬쩍 말했던 것은 특히,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사가 어떠한 권력을 누리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또한 이렇게 논증이 이어지는 6장에서는 “법적 절차의 공허함과 부적절함”으로 사법 제도의 불분명성이 강조되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저자의 인식에는 헌법의 각 조항을 하위 법률로 해석할 경우 각 법관들이 심각히 추상적이고, 불분명한 법적 용어들과 중의적인 표현으로 조항 자체를 누더기로 만들어 자신들이 아니면 (법률가들)누구도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어 시민들의 정의를 위한 사법체계 자체가 더욱더 괴리와 거리가 생기는 결과를 낳았다고 저자는 일침합니다. 또한, 법률가들은 자신이 속한 직업세계에 대한 당위적인 반응과 필요성에 집착하여, 한발 떨어져 법과 사법 제도를 객관적으로 살펴보는 기회를 스스로 차단하고 심지어 “지역 사회에서의 지위, 업계 동료들 사이에서의 위신, 스스로에 대해 갖는 자부심이 몽땅 자신이 말하는 것을 자신이 알고 있다는 가정위에 매달려 있다”고 이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법률가는 그저 법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을 뿐이다”라는 문장은 그것의 본위가 어디에 있는지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처럼 “법률가들은 알지만 비법률가들은 모르는 것”과 “법이라는 언어의 마술은 사회적 한계를 알지 못한다”는 등의 실랄한 표현들은 특히 법률과 해석에 이어 이러한 생태계 안에 들어가 있는 수많은 법률인들이 법은 아무나 다룰수가 없으며 설사 권력의 주체가 다수 시민에 의해 주어진 것이라 할지라도 이것을 명확히 실현하고 합리적으로 다수 전반을 이해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법률가들 뿐이다”라는 것은 실로 통탄할 지경입니다. 우리는 익히 수많은 정치학자들과 정치학을 통해 국가의 정당하고 필연적인 당위성을 제공하는 것이 헌법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 헌법은 시민의 권리를 제한하거나 좀 더 수월한 통치를 받기 위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국가보다 더 중요한 것이 국민들이며 과거 계몽주의적 공리에 따라 정당하고도 정의로운 가치를 사회와 국가에 세우기 위한 틀이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그러한 헌법과 법률을 다루는 기술을 오로지 엘리트 관료주의와 다름없는 현 체계에 의해 매우 강력하고 틈이없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재교육 없이 “뛰어난 관료 자체”에게 일임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에 대해 우리는 고민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관련해서도 저자인 프레드 로델은 우리가 그동안 사법체계와 결탁한 거대기업 총수들과 부유층 들의 과도한 권력 행위에 대해 수도없이 또한 끊임없이 귀에 딱지가 붙도록 비판해 왔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한치도 나아가지 못했다고 역설합니다. 저는 일례로 기존의 사법 시스템의 관료들을 선발하는 로스쿨과 같은 현행 제도를 유지하되, 경력이 오래된 고위 판사들이나 대법원의 판사들 가운데 얼마정도는 지방 선거를 통해 선출하거나 출중한 능력의 변호사들 가운데 다수로 선발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강력하고 자비없는 사정을 판사들에게도 시행되어야 하며, 우리나라와 같이 판사를 해임하는 것을 오직 국회에 맡기는 제도 또한 시급히 개선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저자는 실효적으로 적용이 가능한 사법 제도에 대한 개선안을 11장에서 여럿 제시하고 있습니다. 경제 분야에 있어서 전문가의 처리를 위임하는 방안이라든지, 법원 안에 따로 결정기구를 만들어 기존의 판사들의 협의체가 아니라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자문위원이 아니라 ‘법률 실행위원’으로 위촉해 시민들이 전문적인 판결을 받게하자는 등의 제안들입니다. 사실 어느 민주국가이든 사법 당국의 기득권과 폐쇄성은 자신들만의 울타리를 만들정도로 그 폐해가 심각했습니다. 헌법을 통해 인간이 인간을 판결하는 것 자체가 단순히 판사와 법정에 참석한 해당 당사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저자인 로델이 밝히고 있듯이, 모든 일반인들이 “마땅히 동등하게 법을 살 수 있어야” 하며, 특별히 억울한 일을 당한 시민들이 적절하게 구제 받을 수 있도록 국가가 공익 변호인 법인과 같은 기구를 만들어서 얼마간 공적 자금을 지원해 현재의 국선 변호사의 업그레이드 판을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지 이 책을 통해 고민해보기도 했습니다. 예전에 토크빌은 민주주의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는 비범한 시민들이 각자의 생각을 제안하고 정치 자체의 책임감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로버트 달은 대중 정치의 오욕을 극복하여 모든 시민이 자신들의 비범함을 잊지 않아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건전한 시민들이 모여 만드는 정치를 저는 아직도 희망하며, 이러한 가운데 사법과 행정 및 입법을 견제하고 감시하는 시민들이 권력에 경종을 울리는 사회가 하루빨리 완성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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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andante 2020-02-02 19: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법률만능주의만큼 위험한 것도 없지요. 어떻게 보면 극도의 반지성주의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 같기도 합니다...

베터라이프 2020-02-02 19:37   좋아요 1 | URL
우리가 사법체계에 접근하기가 실로 어려운 부분이 시민과 법을 괴리시키는 게 아닌가 싶은데요. 여기에는 법관들의 권위라는 문제. 판결에 이의는 없다는 등의 다소 비타협적인 측면도 한몫 한다고 생각이 드네요. 제가 극도로 경계하는 반지성주의는 우리 시민들이 무조건 멀리해야 하는 폐기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여튼 댓글 감사드립니다.

숲노래 2022-06-13 0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마니타스가 처음이 아닙니다.
박홍규 님이 1986년에 처음 우리말로 옮긴 책이고
2014년 이 판은 ‘복간본‘입니다.

베터라이프 2022-06-13 09:10   좋아요 0 | URL
보충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숲노래님. 잠깐 첨언을 드리자면 원서의 처음 출간을 말씀드린거고 글 보시면 후마니타스가 국내 처음 번역이라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하여튼 댓글 감사드립니다.
 
왜 자유인가? - 당신의 삶, 당신의 선택, 당신의 미래
탐 G. 팔머 지음, 전계운 외 7인 옮김 / 바른북스 / 2019년 3월
평점 :
절판


특이하게도 편저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톰 G. 팔머는 자유주의 논저의 저자이자 자유주의 이론가입니다. 그는 세인트존스 칼리지를 거쳐 워싱턴 DC의 더 카톨릭 유니버시티 오브 아메리카,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옥스포드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바가 있습니다. 현재는 미국의 억만장자인 코크 가문이 출연한 것으로 유명한 케이토 연구소 Cato Institute의 선임 연구원이지자 아틀라스 네트워크 재단의 수석 부회장으로 재직중입니다. 우선 이 책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점은 7명의 번역자가 참여했다는 점과 번역본에 대한 정확한 원전에 대한 정보가 잡히지 않는다는 부분입니다. 아틀라스 재단이 출판한 것은 확실하나 팔머가 편저로 참여했다는 점에서 일종의 에세이나 소논문 형식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저로서는 다소 정보가 부족하였기에 이 정도로만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편저자인 팔머와 이 글의 대표(?) 역자는 자신들의 자유에 대한 근거와 해석을 위해 데이비드 보아즈의 논저를 인용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이사야 벌린이 기초했던 자유주의 담론과 여러 사회학 계통 및 정치철학의 흐름대로 서두에 언급하고 있는 자유지상주의 LIbertarianism 를 자유주의로 소급해 규정하는 것에 반대하고 싶습니다. 뒤에 3장에서 편저자인 팔머가 ‘자유주의자들은 ‘자유’ 그 자체를 원칙으로 삼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에 단순히 의미와 어감이 축소되는 자유주의자 만으로는 이들을 규정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뒤이어 이어지는 논증에서도 저의 이런 인식을 뒷받침하는 내용들이 등장하고 있어 더욱 동의하기 힘들었는데요. 여기에는 다소 논점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모르겠으나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법의 필요성을 개인들의 사유 재산 보호라든지 살인과 강간 등 극악의 범죄를 방지하기 위해 효용이 있다는 식의 해석 뿐만 아니라 논증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힘든 ‘헌법에 의한 정부의 제한’이란 목적을 중요하게 강조하는 등 이들 모두가 단순한 자유주의자가 아니라 자유지상주의자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더욱이 편저자인 톰 팔머는 뒤에서 미국 오바마 행정부 후기에 일어난 티파티 운동에 대한 실망감을 표출하고 있었는데요. 이러한 소회의 정확한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을 하지 않아도 짐작할 만했습니다.

간혹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오역되는 장 자크 루소의 일반의지는 굳이 그것의 개연성과 내면의 숨은 뜻을 밝히지 않더라도 이러한 시민들의 일반의지가 근대 공화주의의 원천임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가 조직되지 않은 자연상태에서 인간들의 서슴없는 행동과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행위 및 여러 위험 상태에서의 요소들을 방지하고자 정부를 조직하고 시민의 권력을 위임시켰습니다. 이 쯤에서 되묻는 것은 민주주의의 토대가 된 위임된 권력의 정부가 우리의 자유에 반하기만 한 것인지에 대해 적절한 답변을 듣고 싶어지더군요. 자유주의자들이 권력과 권위의 존재를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냥 아주 간단히 말씀드린다면 쇼펜하우어가 인정했듯이 인간은 아주 불확실하기에 매번 인간과 인간 사이 혹은 인간 무리에 놓여 있는 개개인이 언제나 합리적 이성을 발휘하여 사회적 절제심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에 대해서저도 회의적입니다. 어떻게 보면 시민들의 권리와 그 자유를 보호 하기 위해 정부는 필요불가결한 것이며 반대로 무정부 상태하에서 개개인들의 자유가 (실질적으로)으로 보장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이미 답이 나와있지 않습니까. 프란츠 오펜하이머가 피력한 국가론에 이미 비슷한 관점이 나오기도 합니다.

비록 자유가 정치철학의 범주안에 속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현실에서는 자유가 단순히 철학의 문제에만 국한되지는 않습니다. 시장에서의 확실한 자유주의는 법과 제도에 우선해 ‘확실하고 자유로운 이익’ 만을 위하는 것은 익히 잘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에 편저자인 팔머는 글의 10장에서 “정부 간섭들의 거대한 연동체계가 엄청난 ‘주택 거품’을 창조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실로 무지의 극치라 불릴만 했습니다. 애초에 스티걸-글래스 법의 무력화와 그에 따른 금융 시장에서의 거대한 모럴해저드가 어떠한 결과에 도달했는지는 이미 명확히 다 나와 있지요. 여기에 한술 더떠 그렇게 혐오해 마지 않았던 정부에 의한 공적자금을 받아놓고서도 개인의 영리활동의 자유를 숭상하고 누리던 자들이 이 공적 자금으로 퇴직금 잔치와 가당치도 않은 인센티브를 뿌려댔던 것이 눈에 선합니다. 더욱이 금융 위기에 책임있는 자들 어느 누구도 기소도 되지 않았던 것을 포함해서죠.

따라서 현재의 자유와 자유시장주의 및 꽤 민주화가 진행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이미 개인의 자유와 그 자유의 원칙이 충분히 실효성 있게 보장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시진핑 치하의 중국과 푸틴 치하의 러시아와 같은 무늬만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전제 국가들은 아직도 시민의 자유가 묘연하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글의 6장인 정치적 자유의 원리에서 등장한 ‘결과의 평등’이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어떤 진정성을 함의하고 있다면 정치적이고 더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에 처한 시민들의 자유가 과연 보장되고 있는지에 대해 더 깊은 논의를 해봐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팔머는 경제적 불평등과 같은 문제를 정부를 통해 논하는 것을 회의적으로 봤지만, 현재 일반 시민들과 부유층 및 거대 기업의 소유자들과의 권력 관계가 현저하게 차이 나고 있는 시점에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이러한 불균형한 권력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점에 대해 자유주의자들의 진정성은 어디에 있는지 스스로 고백해봐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자유주의자들의 정치적 스펙트럼이 중도 좌파와 중도 우파에 넒게 펴져 있다고 해석하는 부분에서 현실성이 동떨어져 있다고 제가 이해했던 것은 바로 위의 양자 사이의 단절에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또한 “정치에서 실현되어야 할 최우선의 가치는 바로 자유다”가 아니라 정치에서 실현되어야 할 중요한 가치들 중에 하나가 자유다 라고 해야 급진적인 자유주의자들 및 자유지상주의자들이 모든 시민에게 얼마간의 정치적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 근거가 될 것이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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