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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대중의 탄생 - 흩어진 개인은 어떻게 대중이라는 권력이 되었는가
군터 게바우어.스벤 뤼커 지음, 염정용 옮김 / 21세기북스 / 2020년 2월
평점 :
이 책의 공저자 중 한명인 군터 제바우어는 독일 팀멘도르퍼 슈트란트 출신으로 2012년 은퇴한 이후, 베를린 자유대학의 명예 교수로 자리하고 있는데요. 그는 베를린 공과대학과 카를르수에 공과 대학을 거쳤고, 1991년부터 1993년까지 국제 스포츠 철학 협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주요한 관심사는 사회철학과 스포츠철학, 언어 이론, 인간한 등인데요. 특히 프랑스의 파리, 스트라스부르 및 일본의 히로시마에서 초청 교수로도 활동했습니다. 다른 공저자인 스벤 뤼커는 2010년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저작자이자 철학 강사로 일하고 있는데요. 특히 뤼커의 박사 논문은 베를린 자유 대학에서 인문학 최고 논문에 수여하는 에른스트 로이터 상의 영예를 누린 바가 있습니다. 그는 철학과 역사학, 근대 이론 및 대중이론에 관심을 갖고 꾸준히 저술 활동에 매진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 책은 “Vom Sog Der Massen Und Der Neuen MAcht Der Einzelnen” 이라는 원제로 2019년 출간되어, 국내에는 21세기북스를 통해 올해 2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본격적으로 논의에 앞서 여기에 논증되고 있는 3장, ‘이중 대중’과 4장, ‘포퓰리즘’ 만으로도 충분히 읽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위의 4장은 지난 2017년에 번역 출판된 얀 베르너 뮐러의 “누가 포퓰리스트인가”의 훌륭한 보론으로도 손색이 없어 보였습니다. 특히 뮐러의 논저가 분석하는 “포퓰리스트들에게 어떤 이들이 자신들이 강조하는 ‘국민’에 속하는가?”에 대한 적절한 해답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저 역시, 이들 포퓰리스트들이 구분한 ‘적과 아’의 개념에 대해 동의하지 않으며, 자신들에 대한 성찰은 전혀 없이 피아 구분으로 사실상 민주주의를 혼란에 빠트리는 것에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 책에서 얻은 한가지의 통찰은 포퓰리즘 자체의 가장 큰 문제는 생각이 다른 시민과 시민들 사이에 대화와 토론을 전면적으로 부정한다는 측면에 있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인식은 실로 중요한 것이어서 공저자들의 학문적 노력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만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기존의 대중에 대한 연구자들이었던 귀스타브 르 봉과 가브리엘 타르트 그리고 오르테 이 가세트 등이 피력했던 이론들이 인식상 지금의 시대와는 다소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 공저자들이 현재의 경향과 ‘이러한 대중들’이 어떤 형태와 영향력의 표출로 이어지는지 여러 사례들로 살펴보고, 문화와 종교까지 갈음하는 꽤 방대한 결과물로 이어졌습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 단순히 자유주의 담론에서 해석되었던 “유일성을 가진 개인”이라는 관념이 대중에 참여하는 개인과 인간들에 대한 사실상의 두려움으로 르 봉과 타르드의 대중론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현재까지도 정치사회적으로 경우에 따라서 “국민”의 개념이 확실하게 실체화되지 못한 경우도 분명 존재하는 것처럼 각 개인들의 자유와 권리라는 개념을 일반적인 지식인들이나 상류층이 이를 인정하면서도 “과연 무리를 이룬 개인들, 즉 이 대중이 얼마나 자신들의 자유와 권리를 요구할 것인가?”에 대한 앞선 이들의 두려움이 카를 슈미트와 같은 현상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도 슈미트는 인용되기도 하는데요. 제가 보기에 정치적 상황에서 적아 구분을 명확히 하는 슈미트의 논법은 그것의 본질을 떠나 역설적이게도 우파들에 의해 변질되어 자신들의 의견과 다른 계층의 시민들을 역사속에서 무참히 적으로 규정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계몽주의와 함께 발전한 우리의 공화주의가 일견 자유라는 명목으로 슈미트에 의해 부정된 것이며, 이러한 명맥이 우파 포퓰리즘에 이어져 현재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즉, 현재의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의 유럽 우익 포퓰리즘이 미국의 티파티 운동의 구호처럼 “좌파를 격멸하자”는 식으로 애용되기도 하는데요. 이것은 도널드 트럼프가 적극적으로 이용했고, 자신을 지지하는 지지층에게 “총을 들고 나서서 싸워라”라는 식으로 (물론 이들이 총을 들고 나서지는 않았지만) 일개 선동 정치가가 어떻게 민주주의의 근간을 해치는지 잘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2장에서 르 봉의 입을 빌어 말하는 정신적 감염에 대해 “대중의 구성원들이 과연 ‘현대의 미개인’으로 변하는 것”에 완전히 얼토당토 없는 것으로 치부하기는 어렵습니다. 뒤이어 3장에서 저자가 인용하는 2017년에 함부르크에서 열린 G20 정상회담에서 암약한 무정부주의자들인 ‘검은 복면단’의 사례는 이처럼 꽤 위험한 사례이기도 한데요. 마누엘 카스텔은 일반 시민들이 행동에 나설 때, 맨처음 주저하게 되는 이유에 대해 ‘공권력’의 존재를 먼저 들었습니다. 확실히 자신들의 정치를 위해 나서야만 하는 상황에서 잔잔한 호수를 파국에 이르게 하는 거대한 돌덩어리처럼 단순한 공권력과의 대결에서 유혈이 낭자하는 폭력시위로 언제든 상황이 위태롭게 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국가 공권력과의 대치는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또한, 헌법을 수호할 의무를 가진 지도자가 헌법을 수호하지 않고 오히려 국민을 억압하는 경우도 수도 없이 많았기에, 대중이 오로지 혁명을 바랄뿐이다라는 논법은 여건상 이치에 많지 않습니다. 따라서 “정치 대중은 아무리 다양화된다 하더라도 대표자들에게 파괴의 잠재력이 있다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이 대표자들 뿐만 아니라, 대중을 비방하는 사람들은 “동시에 또다른 ‘선량한’ 대중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양면성을 드러내는 것이다”는 해석은 대중의 정치 활동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을 갖게 하는 장치로서도 기능합니다. 저는 일반 대중정치론에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이들이 엘리트와 기득권층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쌓아올린 각자의 기반을 필히 체제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강하게 기존의 시스템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매시대 있어왔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지옥일지 모르겠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더할 나위없이 만족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나딘 고디머의 한줄 문장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사실 이 쯤에서 중요한 점은 이 대중과 대중정치를 파극의 아이콘으로 만들어 부정만 할 것이냐 아니면 “모두가 공감하는 단호한 결의”아래 정치를 개선하는데 쓰이게 할 것인가의 논법에는 오로지 우리가 그 심판자로 서있게 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어, 3장과 4장은 대중에 대한 분석의 인식 강화판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카를 슈미트의 적아 개념이 완벽히 들어맞는 ‘이중 대중’은 자신들 이외의 다른 대척점을 만들어 강력한 대결을 추구하면서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그 지점에서 찾는 것으로 오로지 자신들은 옳고 저들은 틀리다의 논법과 아예 일치하기도 합니다. 반대편의 사람들을 자신들의 존재 이유로 삼는 논법은 매우 빈번하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그리했었죠. 앞선 2장에서 “대중 유형의 개인들이 더이상 열성적으로 지도자에게 매달리지 않는다”는 현재의 모습이 물론 그러한 점에 대해 반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뒤에 4장에서 이 이중 대중이 포퓰리즘과 어떻게 결탁하고 있는지 꽤 노골적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적이 비로소 나에게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 “포퓰리즘에서 말하는 우리들과 그 적들”, “포퓰리스트들은 자신에 대해 긍정하는 말은 하지 않고, 남들에 대해 부정하는 말을 한다”, “포퓰리스트들은 자신이 ‘거짓 언론’에 둘러싸여 있다고 판단하며, 박해받고, 속고, 경멸받고 있다고 느낀다”는 등의 일례들과 함께 이중 대중과 포퓰리즘과의 상관 관계가 4장에서 규명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포퓰리스트들은 자신이 본래의 것과 따라서 ‘진정한 국민’을 확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시민들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구분하고, 자신들의 편에 속하지 않는 시민들을 적으로 규정, 나아가서는 사회와 국가의 악으로 단죄하는 것입니다. 뭔가 로마 카톨릭 시대의 속세 규정법 같습니다만, 이러한 현상을 부채질하고 있는 선동 정치인들이 이미 유럽과 미국에서 드러나고 있어 대중의 행동 양식과 이해에 관한 지금보다 더 많은 연구가 있어야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여겨집니다.
끝으로, 한나 아렌트는 ‘대중의 정치적 출현 공간’에 대해 위르겐 하버마스와 비슷한 입장의 의견을 피력한 바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옹호하는 민주주의에서의 공동체에 이르기 위해선 대중들의 무모하고 왜곡된 쾌락을 불식시켜 ‘폐쇄적 대중’에 이르지 않기를 경계해야만 할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도 꽤 이상주의적 관점입니다만 다수 대중의 정보를 팔면서도 현실 정치에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 거대 SNS 기업의 행태와 자신이 능동적이고 비판적으로 사고하지 않는 상당히 시스템에 종속된 대중의 출현은 급히 우려할 만하다고 생각됩니다. 과거에는 존 듀이의 논법식으로 교육과 자기 절제, 관심사에 대한 꾸준한 의견 제기 등이 현실 정치에 건전한 담론이 될 수 있었으나, 현대의 개인들과 대중은 너무나 복잡한 환경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한 인식은 이 책의 7장과 8장에서 좀 더 자세히 논의되어 있습니다만 단순히 외부로 돌출되어 어리석은 소속감에 몸을 맡겨 다시 자유로운 개인으로 환원되지 않는 대중은 자신의 삶 뿐만 아니라 현실 정치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은 분명해보입니다. 개인의 자유와 건전한 공동체주의가 우리에게 필요한 정치로 제 역할을 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 되는 것이며, 앞으로 대중들이 과연 어떠한 역사의 족적을 남기게 될지는 전부 우리 스스로에게 달린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