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대중의 탄생 - 흩어진 개인은 어떻게 대중이라는 권력이 되었는가
군터 게바우어.스벤 뤼커 지음, 염정용 옮김 / 21세기북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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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공저자 중 한명인 군터 제바우어는 독일 팀멘도르퍼 슈트란트 출신으로 2012년 은퇴한 이후, 베를린 자유대학의 명예 교수로 자리하고 있는데요. 그는 베를린 공과대학과 카를르수에 공과 대학을 거쳤고, 1991년부터 1993년까지 국제 스포츠 철학 협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주요한 관심사는 사회철학과 스포츠철학, 언어 이론, 인간한 등인데요. 특히 프랑스의 파리, 스트라스부르 및 일본의 히로시마에서 초청 교수로도 활동했습니다. 다른 공저자인 스벤 뤼커는 2010년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저작자이자 철학 강사로 일하고 있는데요. 특히 뤼커의 박사 논문은 베를린 자유 대학에서 인문학 최고 논문에 수여하는 에른스트 로이터 상의 영예를 누린 바가 있습니다. 그는 철학과 역사학, 근대 이론 및 대중이론에 관심을 갖고 꾸준히 저술 활동에 매진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 책은 “Vom Sog Der Massen Und Der Neuen MAcht Der Einzelnen” 이라는 원제로 2019년 출간되어, 국내에는 21세기북스를 통해 올해 2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본격적으로 논의에 앞서 여기에 논증되고 있는 3장, ‘이중 대중’과 4장, ‘포퓰리즘’ 만으로도 충분히 읽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위의 4장은 지난 2017년에 번역 출판된 얀 베르너 뮐러의 “누가 포퓰리스트인가”의 훌륭한 보론으로도 손색이 없어 보였습니다. 특히 뮐러의 논저가 분석하는 “포퓰리스트들에게 어떤 이들이 자신들이 강조하는 ‘국민’에 속하는가?”에 대한 적절한 해답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저 역시, 이들 포퓰리스트들이 구분한 ‘적과 아’의 개념에 대해 동의하지 않으며, 자신들에 대한 성찰은 전혀 없이 피아 구분으로 사실상 민주주의를 혼란에 빠트리는 것에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 책에서 얻은 한가지의 통찰은 포퓰리즘 자체의 가장 큰 문제는 생각이 다른 시민과 시민들 사이에 대화와 토론을 전면적으로 부정한다는 측면에 있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인식은 실로 중요한 것이어서 공저자들의 학문적 노력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만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기존의 대중에 대한 연구자들이었던 귀스타브 르 봉과 가브리엘 타르트 그리고 오르테 이 가세트 등이 피력했던 이론들이 인식상 지금의 시대와는 다소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 공저자들이 현재의 경향과 ‘이러한 대중들’이 어떤 형태와 영향력의 표출로 이어지는지 여러 사례들로 살펴보고, 문화와 종교까지 갈음하는 꽤 방대한 결과물로 이어졌습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 단순히 자유주의 담론에서 해석되었던 “유일성을 가진 개인”이라는 관념이 대중에 참여하는 개인과 인간들에 대한 사실상의 두려움으로 르 봉과 타르드의 대중론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현재까지도 정치사회적으로 경우에 따라서 “국민”의 개념이 확실하게 실체화되지 못한 경우도 분명 존재하는 것처럼 각 개인들의 자유와 권리라는 개념을 일반적인 지식인들이나 상류층이 이를 인정하면서도 “과연 무리를 이룬 개인들, 즉 이 대중이 얼마나 자신들의 자유와 권리를 요구할 것인가?”에 대한 앞선 이들의 두려움이 카를 슈미트와 같은 현상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도 슈미트는 인용되기도 하는데요. 제가 보기에 정치적 상황에서 적아 구분을 명확히 하는 슈미트의 논법은 그것의 본질을 떠나 역설적이게도 우파들에 의해 변질되어 자신들의 의견과 다른 계층의 시민들을 역사속에서 무참히 적으로 규정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계몽주의와 함께 발전한 우리의 공화주의가 일견 자유라는 명목으로 슈미트에 의해 부정된 것이며, 이러한 명맥이 우파 포퓰리즘에 이어져 현재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즉, 현재의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의 유럽 우익 포퓰리즘이 미국의 티파티 운동의 구호처럼 “좌파를 격멸하자”는 식으로 애용되기도 하는데요. 이것은 도널드 트럼프가 적극적으로 이용했고, 자신을 지지하는 지지층에게 “총을 들고 나서서 싸워라”라는 식으로 (물론 이들이 총을 들고 나서지는 않았지만) 일개 선동 정치가가 어떻게 민주주의의 근간을 해치는지 잘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2장에서 르 봉의 입을 빌어 말하는 정신적 감염에 대해 “대중의 구성원들이 과연 ‘현대의 미개인’으로 변하는 것”에 완전히 얼토당토 없는 것으로 치부하기는 어렵습니다. 뒤이어 3장에서 저자가 인용하는 2017년에 함부르크에서 열린 G20 정상회담에서 암약한 무정부주의자들인 ‘검은 복면단’의 사례는 이처럼 꽤 위험한 사례이기도 한데요. 마누엘 카스텔은 일반 시민들이 행동에 나설 때, 맨처음 주저하게 되는 이유에 대해 ‘공권력’의 존재를 먼저 들었습니다. 확실히 자신들의 정치를 위해 나서야만 하는 상황에서 잔잔한 호수를 파국에 이르게 하는 거대한 돌덩어리처럼 단순한 공권력과의 대결에서 유혈이 낭자하는 폭력시위로 언제든 상황이 위태롭게 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국가 공권력과의 대치는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또한, 헌법을 수호할 의무를 가진 지도자가 헌법을 수호하지 않고 오히려 국민을 억압하는 경우도 수도 없이 많았기에, 대중이 오로지 혁명을 바랄뿐이다라는 논법은 여건상 이치에 많지 않습니다. 따라서 “정치 대중은 아무리 다양화된다 하더라도 대표자들에게 파괴의 잠재력이 있다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이 대표자들 뿐만 아니라, 대중을 비방하는 사람들은 “동시에 또다른 ‘선량한’ 대중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양면성을 드러내는 것이다”는 해석은 대중의 정치 활동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을 갖게 하는 장치로서도 기능합니다. 저는 일반 대중정치론에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이들이 엘리트와 기득권층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쌓아올린 각자의 기반을 필히 체제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강하게 기존의 시스템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매시대 있어왔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지옥일지 모르겠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더할 나위없이 만족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나딘 고디머의 한줄 문장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사실 이 쯤에서 중요한 점은 이 대중과 대중정치를 파극의 아이콘으로 만들어 부정만 할 것이냐 아니면 “모두가 공감하는 단호한 결의”아래 정치를 개선하는데 쓰이게 할 것인가의 논법에는 오로지 우리가 그 심판자로 서있게 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어, 3장과 4장은 대중에 대한 분석의 인식 강화판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카를 슈미트의 적아 개념이 완벽히 들어맞는 ‘이중 대중’은 자신들 이외의 다른 대척점을 만들어 강력한 대결을 추구하면서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그 지점에서 찾는 것으로 오로지 자신들은 옳고 저들은 틀리다의 논법과 아예 일치하기도 합니다. 반대편의 사람들을 자신들의 존재 이유로 삼는 논법은 매우 빈번하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그리했었죠. 앞선 2장에서 “대중 유형의 개인들이 더이상 열성적으로 지도자에게 매달리지 않는다”는 현재의 모습이 물론 그러한 점에 대해 반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뒤에 4장에서 이 이중 대중이 포퓰리즘과 어떻게 결탁하고 있는지 꽤 노골적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적이 비로소 나에게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 “포퓰리즘에서 말하는 우리들과 그 적들”, “포퓰리스트들은 자신에 대해 긍정하는 말은 하지 않고, 남들에 대해 부정하는 말을 한다”, “포퓰리스트들은 자신이 ‘거짓 언론’에 둘러싸여 있다고 판단하며, 박해받고, 속고, 경멸받고 있다고 느낀다”는 등의 일례들과 함께 이중 대중과 포퓰리즘과의 상관 관계가 4장에서 규명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포퓰리스트들은 자신이 본래의 것과 따라서 ‘진정한 국민’을 확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시민들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구분하고, 자신들의 편에 속하지 않는 시민들을 적으로 규정, 나아가서는 사회와 국가의 악으로 단죄하는 것입니다. 뭔가 로마 카톨릭 시대의 속세 규정법 같습니다만, 이러한 현상을 부채질하고 있는 선동 정치인들이 이미 유럽과 미국에서 드러나고 있어 대중의 행동 양식과 이해에 관한 지금보다 더 많은 연구가 있어야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여겨집니다.

끝으로, 한나 아렌트는 ‘대중의 정치적 출현 공간’에 대해 위르겐 하버마스와 비슷한 입장의 의견을 피력한 바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옹호하는 민주주의에서의 공동체에 이르기 위해선 대중들의 무모하고 왜곡된 쾌락을 불식시켜 ‘폐쇄적 대중’에 이르지 않기를 경계해야만 할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도 꽤 이상주의적 관점입니다만 다수 대중의 정보를 팔면서도 현실 정치에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 거대 SNS 기업의 행태와 자신이 능동적이고 비판적으로 사고하지 않는 상당히 시스템에 종속된 대중의 출현은 급히 우려할 만하다고 생각됩니다. 과거에는 존 듀이의 논법식으로 교육과 자기 절제, 관심사에 대한 꾸준한 의견 제기 등이 현실 정치에 건전한 담론이 될 수 있었으나, 현대의 개인들과 대중은 너무나 복잡한 환경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한 인식은 이 책의 7장과 8장에서 좀 더 자세히 논의되어 있습니다만 단순히 외부로 돌출되어 어리석은 소속감에 몸을 맡겨 다시 자유로운 개인으로 환원되지 않는 대중은 자신의 삶 뿐만 아니라 현실 정치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은 분명해보입니다. 개인의 자유와 건전한 공동체주의가 우리에게 필요한 정치로 제 역할을 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 되는 것이며, 앞으로 대중들이 과연 어떠한 역사의 족적을 남기게 될지는 전부 우리 스스로에게 달린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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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봉쇄전략 - 냉전시대 미국 국가안보 정책의 비판적 평가
존 루이스 개디스 지음, 홍지수.강규형 옮김 / 비봉출판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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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내에서 저명한 냉전사가이자 세계 패권 전략의 이론가인 존 루이스 개디스는 특이하게도 지금의 관심사와는 달리 현대 철학을 전공한 학자입니다. 그는 미국 텍사스 출신으로 역시 텍사스 대학을 거쳐 영국 옥스포드와 프린스턴과 헬싱키 대학의 방문 교수를 역임하고 1997년부터 예일대의 미 해군사 교수로 재임하고 있습니다. 특히 2005년에는 미국 인문학 발전에 기여한 인물에게 수여하는 내셔널 휴머니티 메달 National Humanities Medal 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현재에도 왕성한 지적인 활동을 하고 있으면서 근래에는 미국의 외교관계사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 책은 “Strategies of Containment”라는 원제로 지난 1982년 초도 출간된 이후, 2005년 약간의 증보를 거친 개정판을 국내에서 번역해, 작년인 2019년 9월 국내 독자들에게 선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소위 냉전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조지 F. 케넌이 미국 외교에 전면에 나서고 과거 트루먼 행정부 시기의 중요한 문건인 NSC-68 (미국 국가 안전보장회의 NSC 가 작성한 비밀문건)이 기반이 되어 전체주의를 종식시킨 미국이 어떻게 소련을 가까운 미래의 위험 요소로 여기게 되는지를 시작으로 이후 봉쇄의 완성이라는 레이건 행정부를 끝으로 방대한 분량의 이 책은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즉, 프랭클린 루즈벨트 행정부에서 로널드 레이건까지의 미국의 대외 정책과 시대 배경 및 소련과 중국이 동시에 얽힌 국제정치적 치킨 게임 등을 인물과 사실에 기반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책의 장점이라면 각 행정부 별로 미국의 외교 정책을 수행한 인물들과 대통령, 그리고 시대 배경 등을 꽤 상세하게 그리고 있어서 저와 같은 독서인들에게는 노련한 전문 지식을 습득할 수 있게 해주는데요. 물론 개디스의 이 책 역시 상당한 배경지식이 있어야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는데 좀 더 수월할 수 있겠습니다.

남에게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것에 능했던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실제로 냉전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랐고, 실제로도 발생하지 않으리라 믿었다”는 저자의 언급으로 일단 시작하겠습니다. “루즈벨트는 런던과의 관계와는 달리 모스크바와의 관계는 너무 깨지기 쉬워서 그러한 압박을 견뎌내지 못하리라고 우려했을지도 모른다”는 첨언까지 저자는 하고 있는데요. 아이젠하워 행정부 이후로 스탈린과의 얄타회담을 히틀러에 놀아난 체임벌린이 손에 쥐고 귀국한 ‘뮌헨 협정’과 같이 치욕스럽게 생각했다는 점을 고려해 봤을 때, 루즈벨트 대통령 스스로도 스탈린과의 담판에서 꽤 심대한 정력을 소비하지 않았을까 짐작해봅니다. 곧이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루즈벨트 이후 정권을 승계한 트루먼은 “공산주의든 파시즘이든 이념은 독재 정치를 하려는 구실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미 스탈린의 소련이 국내 정치에서 어떻게 나아가는지 익히 체험한 미국 관료들에게는 아마도 “모두 다수의 자유와 그냥 있는 그대로 살 권리”를 소련인들로부터 보장받기 위해 그리고 그 자체로 얻게 되는 모스크바와에 대한 원초적인 불신이 일개 개인이 벌인 일이라고 믿을 수 없는 ‘외교 탄원서’를 작성한 케넌의 행동과 맞물려 소련에 대한 관계 재정립이 새롭게 모색된 것으로 글로서도 파악됩니다. 초기 관료 조직에 입성한 케넌은 프랭클린 루즈벨트와 비슷한 입장으로 윌슨이 주창했던 국제 공동체주의에 동의하지 않았던 것으로 이해되는데요. 애초에 소련은 동유럽을 자신들의 위성국화 하는데 그쳤지만, 미국은 자신들의 이익과 안보를 위해 소위 ‘소련에 대한 거점 방어’를 명목으로 필리핀과 일본, 한국 등과 양자 동맹을 구축하게 됩니다. 이후 애치슨의 이해할 수 없는 실언과 대치되는 한국 전쟁 당시 맥아더가 “아시아를 지금 포기하는 것은 서유럽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발언한 것들은 초기 대소 정책 및 대 공산권 정책에 혼란이 있긴 했으나 “동맹국들에 대해 미국이 신뢰를 잃게 되는 것은 국제 구도상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역대 백악관의 주인들이 확언해 왔다는 점은 일종의 일관된 지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미국을 필두로 유지해 온 자유진영의 체제가 속내에는 일부 중립국가들이 소련의 마수에 벗어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미국은 무분별하게 개입하지는 않겠다는 입장을 갖고 있기도 하였으나, 지체없는 한국전쟁에 대한 개입과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남베트남 정권에 여지없이 군사력을 지원한 것은 냉전 시기의 대결 구도를 유지하는 것이 핵무기의 균형 만큼 미국의 이익에 중요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사실 미국의 외교 정책이 무조건 이런 도덕적 원칙을 표명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플랜 B 라고만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소련의 부하라고 여겨졌던 유고슬라비아의 티토가 모스크바와는 다른 공산주의를 시도했고, 그 와중에 반대 세력을 40만이나 죽였음에도 워싱턴은 이에 개의치 않은 점은 미국의 외교 정책이 얼마나 현실적인지 잘 알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쿠바를 전복 시키기 위해 케네디 행정부 때 개입한 사실이나 도미니카 공화국에 대한 개입, 칠레의 선거로 선출된 아옌데 정부에 대한 키신저의 불편함 등을 봤을 때, 아이젠하워가 “미국의 이익이라는 것이 경제적으로 원유와 텅스텐 같은 자원을 자유롭게 확보하고 지리적으로 가까운 국가들의 정부에 친미 정권이 들어서는 등의 리스크 관리가 비교적 용이한 환경을 추구하는 것”과 같은 이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이에 아이젠하워는 미국의 이익과 동맹국들의 이익이 같이 가고 수렴하는 것을 보다 원했지만, “미국이 안전하려면 세계가 미국의 형상을 닮아야 했다”는 인식에서 이것이 얼마나 모순된 상황인지 우리는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미국의 대소 봉쇄는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추구했던 것처럼 소련을 점차 파국적인 공산주의로부터 희석시켜 국제 사회의 안으로 들어오게 하려는 궁극적인 목표를 갖고 있었지만, 핵무기라는 힘을 가진 국가가 자신의 권력을 스스로 포기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습니다. 결국 흐루시초프의 오판은 쿠바 사태를 만들었고, 아이젠하워 시기의 존 포스터 덜레스가 핵무기와 관련된 벼랑끝 전술을 소련에 선보이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미소간의 대결은 대체로 안정적이었습니다. 저자는 이에 케넌을 해석하며, “결국 전쟁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지 목적 자체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 것은 추구하는 바가 명확해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 “소련과의 갈등은 첨예화 될 지언정, 전쟁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던 것은 앞선 인식이 배경이 된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전임인 아이젠하워 행정부보다 많은 참모를 거느렸던 케네디 행정부와 그의 불의의 사망 이후 등장한 린든 존슨은 두 사람의 사뭇 다른 배경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보는 지적인 틀은 거의 동일”했다고 개디스는 첨언합니다. 이것은 사실상 케네디 대통령의 정책이 고스란히 존슨 행정부에 이어졌다고 보는 해석과 그 궤가 동일한데요. 다만, 전임 행정부에 비해 별로 자신감이 없어보였던 케네디의 백악관은 특히 동맹국들에 대해 “미국이 실제로 동맹국들의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자국의 도시가 위험해지는 상황을 감수하겠다고 미리 증명해 보일 수도 없다”는 맹점을 안고 NATO 동맹국들에 대한 핵우산 및 중거리 핵무기 배치만으로 지역의 안보 불안이 가시질 않았으며, 우리 역시 워싱턴이 서울을 방어하기 위해 샌 프란시스코가 잿더미가 되는 것을 감수할 수 있겠느냐에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단순히 외교 정책과 동맹국들을 방어하기 위한 자신감 문제를 넘어서 현재에도 가까운 베이징의 미사일에 의해 한번쯤 고민해보게 되는 서울과 도쿄에 불안감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중국은 이미 2008년쯤에 선제 핵사용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보인 바가 있으며, 특히 쿠바 사태 이후, 벌어진 핵전쟁의 위협은 당시 동맹국들을 안보 불안에 떨게 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애초에 덜레스와 같이 동맹국들을 배려하지 않는 관료가 존재하는 것은 최근에 조지 W. 부시와 마찬가지로 동맹국에 대한 외교적 배려가 ‘적당히’로 나갈 수 있다는 면에서 우리도 어느 정도 한계지점을 명확히 설정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닉슨 행정부의 불세출 관료이자 학자인 헨리 키신저는 닉슨이 불명예스런 퇴진으로 하야를 했음에도 후임인 포드 행정부에서도 중용되기에 이릅니다. 그는 과거 백악관의 관료들이 ‘철학’이 없이 외교를 이끌었다고 비판하고 자신은 그런 길과는 거리를 두겠다는 원칙을 세우게 되는데요. 이미 존슨 행정부 시기에 군사비 지출과 군대 동원에 있어서 의회의 의심을 받기 시작했던 백악관은 외교 정책에 있어서 닉슨에게 거의 위임을 받은 키신저가 소위 홍길동식으로 미국 외교를 좌지우지 하게 됩니다. 닉슨은 특유의 다소 조용한 성격으로 인해 자신의 참모들과 약간 거리를 두게 됨으로써, 정상적인 외교 라인에 이어 뒤로 다른 비선 라인을 각 참모들이 지휘하게 됨으로 닉슨이 물러선 이후, 키신저에 대한 비난이 꽤 높았던 것으로 파악됩니다. 포드 행정부에도 키신저는 제법 중용되기도 하는데요. 다만 이 책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키신저가 딕 체니와 ‘저팬 핸들러’로 유명한 리처드 아미티지에 의해 백악관에서 축출되는데, 이에 대한 설명이 전무해서 조금 아쉽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지독한 현실주의자였던 키신저는 앞서 짦게 언급한대로, 자유 선거로 출범한 칠레 정부에 대해 불신을 갖고 그것이 설사 민주주의 정부라고 할지라도 미국의 국익에 반하는 것으로 파악되면 개입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언급하게 됩니다. “단지 국민이 무책임하다는 이유만으로 나라가 마르크스주의로 가도록 내버려 두어야 할 이우는 없다”는 칠레에 대한 키신저의 평가는 미국 국익을 위해서라면 내정 간섭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아니다는 암울한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물론 미국이 세계 2등국이 된다면 실로 비참한 2등국이라고 비하했던 세간의 말대로 세계의 양대 패권국 중 한 곳의 외교 관료가 저런 자신감을 갖는 것은 이해는 되나, 이후 로널드 레이건에서 보여지는 타국에 대한 군사 개입, CIA를 통한 교란 작전 등과 같은 수많은 불법 행위를 눈감게 하는 어떠한 치부책이 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닉슨과 키신저가 초래한 ‘데탕트’에 대해 개디스는 1945년부터 1949년 사이에 조지 F. 케넌이 제시한 개념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고 언급하고 적절한 행동에 대한 자유와 위임을 받은 논리적인 외교관이 삼극주의를 기반으로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구한 것은 역사의 순리인지 아니면 일개 개인의 능력인지는 추측하기 어렵습니다. 이에 관해 한가지 곱씹을 만한 부분은 “1960년대 말에 미국의 전략적 역량을 크게 증강시키자는 얘기도 꺼내지 못한 이유는 베트남 사태가 야기한 예산 압박과 반군대 정서 때문이었다”고 언급이 되는 것은 닉슨 행정부 시기에 소련과의 핵무기 격차가 나게 되는 원인으로 꽤 중요한 맥락으로 여겨졌습니다.

끝으로 과거 냉전시기의 미소간의 대결은 다행히 상호 확증 파괴의 핵전쟁으로 이어지지 않은 것은 천만 다행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미 미국 행정부가 수차례 소련과의 핵대결로 가는 것은 공멸로 이어지는 길임을 재차 확인했고, 이것의 리스크 관리를 위해 다소 변덕스런 모스크바를 다루기 위한 정력적인 노력을 워싱턴이 수십년을 기울여 왔다는 점은 분명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대의적인 측면에서 서유럽과 태평양의 민주주의 동맹들을 물론 자신들의 안보를 위해 후원하기도 하였으나, 우리나라와 같은 빈곤국이 미국의 지원과 경제 발전 단계에서 보여준 시장 개방으로 지금과 같은 위치에 서게 된 이유임은 분명합니다. 저 역시 이 점은 왜곡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아이젠하워가 고민했던 것처럼 우리가 미국과의 동맹국이라면 서로의 국익이 같은 통로로 갈 수 있을 정도로 외교관계상의 현명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유의 보은심으로 미국과의 관계를 냉정하게 보지 못하는 이들도 많지만 우리가 미국 외교의 명과 암을 잘 분석하고 정책 가운데 이를 중요한 기준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약간 우스개와 같은 소리로 과거 닉슨이 모스크바를 향해 “우리가 어떠한 짓도 벌일 수 있는 미친놈이란 걸 알게 해야 된다”는 이 미치광이 이론이 우리 이승만 대통령에게 비롯된 것임을 글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누구를 상대하든 예측 불가능하게 행동한 남한 대통령 이승만에게 나는 많이 배웠다”는 언급에 실로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1. 이미 이 책 12페이지에는 ‘봉쇄’라는 단어가 스티커로 수정되어 있었습니다.
2. 본문 264페이지에 오타가 있었습니다. ‘인괘철선 trip-wire’이라는 단어였는데, 원래는 인계철선이 맞는 단어겠죠.
4. 본문 382페이지에는 약간 동일 문장 반복이 있었는데, 문장의 흐름상 불필요해 보였습니다.
3. 본문 395페이지에 있는 문장 중에 조사 ‘은’이 빠져 있었습니다. 문장 전체로 봤을 때, 조사가 빠지면 어색하더군요
4. 미국의 탄도미사일인 ‘미니트맨’을 ‘미닛맨’으로 표기했던데, 저는 대체로 대중에게 알려진 용어로 번역하는 것이 맞다고 여기는 사람중에 하나인데요. 한나 아렌트를 해나 아렌트로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라고 생각합니다.
5. 헨리 키신저의 평가에 대한 표현으로 ‘무도덕’이라는 단어를 3차례 정도 언급하고 있는데요. 물론 무도덕도 쓰이는 단어이기도 합니다만 과거 다른 책들에서도 “헨리 키신저의 부도덕성, 부도덕한 측면을 갖고 있는 키신저” - 물론 국제 외교 무대에서의 평가로 부도덕을 뜻하는 겁니다. 이것을 굳이 무도덕으로 표현해야 했을까요.

다른 것들은 죄다 억측으로 치부한다 하더라도 오타와 문장 문제를 수정하지 않고 책을 출판한 것은 독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이 책은 상당한 가격의 책이기도 합니다. 마무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책을 출판한 것에 대해 일개 독서인으로서 실망스러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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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힘
존 포데스타 지음, 김현대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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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시카고의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미국 유수의 대학인 조지타운의 로스쿨을 마치고 주검사 등을 역임한 존 포데스타는 일찍이 선거판에서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후, 클린터 행정부가 출범할 당시 정권 인수위원장을 거쳐, 정권 2기 무렵에는 백악관의 비서실장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빌 클린턴 대통령과 관련된 짤막한 일화로 책에 나오는 내용들 중에 한 가지는 클린턴이 꼭 대통령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고 합니다. 오클라호마에서 겪었던 선거 운동 경험이 이 두 사람에게 큰 인연이자 미래가 된 듯 싶은데요. 또한 르윈스키 스캔들과 관련해 고초를 겪은 클린턴 전 대통령에 대한 믿음도 글에서 잘 언급되고 있었습니다. 이와는 별개로 많은 독자 여러분들은 미국에 진보주의 운동과 진보 정치가 있었느냐고 의문을 가지실 수도 있겠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1부, ‘과거 진보시대의 교훈’은 초기 미국 진보주의 정치의 맥락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분량으로 여겨졌습니다. 이 책은 원제 “The Power of Progress”로 지난 2008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0년 번역 출판되었는데요. 다만, 현재는 절판된 상태입니다.

저자의 분석대로라면, 현재 미국 정치의 상황은 “보수의 도그마와 이를 추종하는 패거리 자본주의 및 코포라티즘 (대규모 재계단체들에 의한 국정 장악을 지지)”하에 놓여 있다고 인식되었습니다. 사실 미국의 수많은 보수주의자들은 자유를 제한적으로 받아들여,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다수 개인의 자유가 아니라 “돈 많고 힘 있는 자를 위해 봉사하는 행위”에 결과적으로 집중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미국 보수주의자들의 근원에 대해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이들이 과거 공공시설에서의 흑백 분리를 규정한 ‘짐 크로우법’의 열렬한 지지자들이었으며, 세월이 흐르면서 보수주의자들은 표면적으로 인종 차별의 외양을 벗었지만, 보수주의 운동은 남부의 백인 유권자와 인종 평등에 반대하는 집단에서 힘을 얻었던 것이었습니다. 과거 에드먼드 버크에 의해 규정된 종래의 보수주의는 급격한 사회변화나 혁명 보다는 안정적인 전통의 유지라는 모멘텀을 답보했으나, 현재의 변형된 보수주의는 미국의 사례와 비슷하게 (여러 책들을 통해 추정해 본 결과) 이들이 과연 민주주의의 신봉자임을 자처하는 것이 실로 진실인지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습니다. 포데스타의 이 책에서도 약간의 실마리가 보여집니다만, 진보주의가 사회주의와 확실히 다른 점은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견고한 민주주의를 바란다는 점”입니다. 진보주의는 보수주의자들과는 달리 마땅히 사람이라면 따라야 할 도덕적 책임과 개인의 양심과 같은 공통된 인식에 기반하고 있어서 교리적으로 어떠한 강력한 연결고리가 없는 점도 명백한 특성이기도 합니다. 제가 누누이 입장을 밝혀왔던 전세계에 신자유주의적 이행의 결과라서가 아니라 변형된 보수주의자들과 이 보수주의가 대체로 “보편적인 인간의 자유”가 아니라 모호의 장막을 몇 겹이나 두른 채,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경제적 자유”에 집중하고 있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것입니다. 결국, 이들이 자유주의의 제한적이면서 강력한 신봉자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보수주의가 과연 민주주의를 지지할 수 있을 것인가에는 제가 강한 의구심을 갖고 있다는 점을 먼저 밝혀두고 싶습니다.

책의 1장에서 꽤 면밀히 소개되고 있는바와 같이 미국에도 진보주의적 정치가 분명 존재했습니다. 허버트 크롤리와 제인 애덤스 등과 같은 정치적 사상가들의 면면이 글에서 드러나고 있는데요. 이 뿐만 아니라, 시어도르 루즈벨트와 우드로 윌슨 그리고 후에 케네디를 거쳐 린든 존슨의 진보주의 시기까지를 저자는 개념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드로 윌슨의 보편주의적 사고를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차용해 적극적으로 통치에 사용했다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를 차치하더라도 대공황 시기의 루즈벨트 행정부가 엘리트 관료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내각”으로 극복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다만, 뼈아프게도 트루먼 행정부 당시 메카시즘에 의한 광풍에 진보주의가 가담해 수많은 피해자들을 만든 점은 저자가 꼽는 진보주의의 여실한 실패였습니다. 즉, 미국의 진보주의는 완벽히 사회주의와는 다른 개념이며, 개인의 능력주의와 경제적 자유를 용인하면서도 공정하고 평등한 세상을 추구하는 정치를 뜻한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또한, 초기 미국의 진보주의 운동가들은 열렬한 민주주의자들이었으며, 이들은 소위 자유주의라고 인용되는 리버럴의 민주당의 오른쪽에 그리고 자유지상주의자들이라고 봐도 무방한 공화당의 왼쪽 어디쯤에 속한다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만, 1장에서 잠깐 언급되는 진보주의와 포퓰리스트들과의 관계에서 이 양자가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공통의 관심사가 있었다는 저자의 판단에는 약간 동의하기 힘들었습니다. 일찍이 리처드 호프스태터는 “독점 기업과 거대 자본가들 및 트러스트, 철도 회사 동맹의 기득권층이 과거 미국을 주도”했다고 밝혔는데요. 이처럼, 단순히 거대 기득권의 경제적 권력에 반하고자 탄생되었다고 포퓰리즘의 정치적 성격을 저리 규정하는 것은 포퓰리즘 정치를 이론적으로 규명하는 것이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무리가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따라서, 미국의 진보주의와 포퓰리즘을 민주적 가치로 동일선상에 놓는 것은 설사 그것이 정치공학적 판단이라 하더라도 충분히 오해의 소지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포퓰리즘은 반지성주의와 엮어야지, 카스 무데와 같이 단순히 시민의 정치적 참여를 동인하는 요인 정도로 포퓰리즘을 이해하는 건 매우 위험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또한, 호프스태터가 비도덕적인 일종의 자본가들이나 기업 경영인들을 포퓰리즘 운동 한복판에 있는 이들이 도덕적으로 비난한 것은 근거가 희박하다고 볼 수 없으나, 포퓰리즘 운동 자체가 1980년대 뉴욕의 반이민 정서에 불을 질렀고, 특히 유대인들에 대한 인종적 경멸은 꽤 유명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포퓰리즘을 추종하는 이들이 단순히 다수의 민주적 정치의 참여를 북돋는 퍼레이드와 같이 순진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뒤이어, 2부에서는 이러한 진보주의적 관점에서 빌 클린턴과 조지 W. 부시의 정치적 과거를 비교하고 있는데요. 특히 부시의 테러와의 전쟁과 막대한 재정 지출을 전쟁 비용에 투사하고, 결국 중동에서 그렇게 바라던 민주주의 정치의 이식에 실패한 것을 대체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것과는 별개로 저는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인한 남부 뉴올리언스시의 막대한 피해 복구와 관련해 늦장을 부렸던 당시 백악관과 희대의 무능이라 지칭해도 모자라지 않은 부시의 친구 ‘데이비드 사파비언’의 언급이 유독 눈길을 끌었습니다. 미국과 같은 민주주의의 성지에서 과연 대통령 친구가 낙하산으로 내려가도 되는가에 대해 물론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불행하게도 그 최악의 결과가 뉴올리언스에 직격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사파비언의 무능은 기사라도 잘 나와 있으니 여러분들도 쉽게 찾으실 수 있을겁니다. 물론 각자의 정치적 태도에 따라 클린턴과 부시에 대한 평가가 다를수도 있겠습니다만,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뒤로하고 사리사욕만 채운 대통령의 친구가 어떠한 결과를 초래했는지는 뭔가 거창한 역사 논법을 꺼내오지 않더라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포데스타의 이 책은 머리를 싸매고 읽어야 되는 논저라고 받아들이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자신 스스로가 클린턴 내각에 참여해 당시 행정부에 대한 애정이 곳곳에 느껴지기도 한데요. 클린턴 행정부의 과오가 분명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심혈을 기울인 중동 평화 정착에 실패했고, 복지 부분에서도 제대로 된 대책을 만들지 못했으며, 인권을 입에 달고 사는 미국인들임에도 불구하고 소말리아나 르완다에서의 행적은 아주 실망스러울 따름입니다. 이런 저의 평가와는 달리 논외로 우려스러운 부분이 글에 나오기도 하는데요. 1997년에 러시아 알렉산더 레베드 장군은 100개의 핵가방이 사라졌다고 폭로한 언급이 바로 그것입니다. 핵무기를 저런 식으로 관리하는 나라가 현존한다는 것이 정말 암담할 정도인데요. 그래서 오사마 빈 라덴이 모든 수를 동원해서라도 핵무기를 손에 쥐려고 노력했던 것이 아닌가 짐작되는데요. 저자인 포데스타도 짧게 표명하고 있습니다만, 앞으로의 대 테러 전쟁이 국가와 국가간의 전쟁이 아니라 ‘더티 밤’을 소유한 소수 단체와의 대결이 될 것이라고 예견한 것은 바로 이러한 점을 인식하고 있어서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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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정신적 삶 - 예속화의 이론들 철학의 정원 31
주디스 버틀러 지음, 강경덕.김세서리아 옮김 / 그린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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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존경받는 페미니즘 이론가로 알려져 있는 주디스 버틀러는 예일대를 거쳐 풀브라이트 장학금 프로그램으로 독일 남서부 바덴뷔르템베르크주의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수학을 했습니다. 이후 웨슬리언, 조지 워싱턴, 존슨 홉킨스, 버클리 등에서 후학들을 가르쳤고, 현재는 버클리 대학에서 수사학과 비교문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녀는 세계 최초로 퀴어학을 창안했고, 더불어 스스로는 레즈비언이기도 합니다. 오랫동안 그녀와 함께한 파트너인 웬디 브라운 역시 교수이기도 한데요. 얼마전에 모 우익 방송에 출연한 우파 번역가가 주디스 버틀러를 단지 좌파 지식인이라고 규정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그녀가 일찍이 나치즘과 극단주의에 대해 격렬한 반대를 표명할 정도로 상식선을 지키려고 하는 지식인이라고도 할 수 있을겁니다. 제가 그녀의 논저를 많이 읽어본 것은 아니나 단순히 마르쿠제와 알튀세르를 인용한다고 해서 그 인용자를 좌파로 규정해야 하는지와 젠더학과 페미니즘에 연구적 열의를 보인다고 해서 그냥 좌파로 만들어야 하는지는 아직도 의구심이 듭니다. 하물며, 아직도 국내에서는 좌파가 주는 어감에 적지 않게 ‘멸칭’의 의미도 부정할 수 없는 만큼 그녀의 논저를 다 섭렵하고 나서 그 이후에 뭔가 토론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됩니다. 더군다나 소위 우파 지식인으로 잘 알려져 있는 테오도르 아도르노 역시 그녀의 컨텐츠에 자주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 또한 염두해 둬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버틀러가 요즘 과도화 된 페미니즘적 돌출로 국내에서 꽤 오역이 되고 있는 점은 인지하고 있는데요. 이 점도 꽤 아쉬운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동성애와 퀴어에 반감을 갖고 있는 분들은 주디스 버틀러를 그 시조로 격상시켜 그녀를 욕하는 데 할애하고 있는데요. 이 점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이 책은 지난 1997년 “The Psychic Life of Power : Theories in Subjection”이라는 원제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최근인 2019년 6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참고로, 이 책은 강경덕 선생을 비롯한 두 분의 번역가가 번역에 참여했는데요. 난해한 철학 논저의 번역 치고는 꽤 훌륭한 번역이라 할만 했습니다. 번역자들의 노력이 깃든 글임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자리를 빌어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먼저, 제가 이 책을 손에 들고 나서 들었던 생각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계몽주의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현재 벌어지고 있는 동성애와 인종차별에 대한 ‘불균형한 권력’에 대한 분석과 비판이 이 책의 본질로 여겨졌으나, 이러한 저의 예측은 매우 빗나가고 말았는데요. 총 6장의 분량으로 구분되어 있는 이 글은 뒤의 5장과 6장을 일종의 보론으로 취급한다면 1장부터 4장이 주요한 본문이며, 앞선 장에서 논의된 본론에 이어 사실상 독자들의 자유로운 해석에 의한 결말을 열어놓은 (보이지 않는) 결론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버틀러는 이 글에서 강력하게 밝히고자 하는 점은 고유한 영혼을 가진 수많은 개인들의 주체와 주체성 그리고 이 개인들의 내면에 이어지는 몸과 영혼의 본질적 관계와 이들의 겉과 속의 정체를 통해 권력이 어떤식으로 작용하고 어떤식으로 표출되는지에 대한 철학적 담론을 표방하며 탐구해나가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를 위해 헤겔과 니체, 푸코 및 알튀세르를 통해 버틀러 자신의 고유한 사유체계를 제시하는 것 보다는 앞선 주체의 선각자들의 사상을 면밀히 분석하고 추렴해 그것의 대응방안과 합리적인 결과를 도출해내는 데 노력하고 있는 것이 엄밀히 다른 철학적 논저들과는 구별되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알튀세르는 주체와 주체성과 관련해 전자의 주체와 관련해서는 풍부한 이론을 확장시켜 왔지만, 후자인 주체성과 관련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많은 현대의 철학자들에게 이 주체라는 관념에 대해 상이한 의견들이 산재해 있기도 한데요. 과연 개인이 주체를 바탕으로 삶을 지배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란과 주체가 그 스스로 개별적인 독립성을 갖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 또한 있어왔습니다. 저자인 버틀러는 이에 주체란 “존재와 행위성의 언어적 표현”이라 규정하고 있기도 합니다. 여기에 행위성과 관련된 문제에도 여러 논란이 들어차 있는데요. 이것은 언어가 그 자체로 행위의 담론을 답보하는지에 대한 일종의 불확실성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점은 “주체가 종종 사람이나 개인으로 바꾸어 쓸 수 있는가”로 의문시 된다고 평가할 수 있겠는데요. 니체와 쇼펜하우어가 언급한 “인간의 불확실성”은 차치하더라도 과연 인간이 자신의 육체와 영혼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육체와 영혼의 주도권을 바탕으로 주체라는 ‘제2의 객관성’을 움켜줄 수 있는지에 대해 중점을 갖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종종 이러한 철학적 담론을 담은 글들은 자주 동어반복적인 의미와 매우 빈번하게 양가적이고 치환적인 언어들을 남발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남발이라는 저의 표현은 꽤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철학적 용어 조차도 철학자들에 따라 서로 다르게 규정되고 또 재해석하고 의미 부여를 해야 하는 의무 또한 요구되기도 합니다. 저는 앞선 주체가 개별적인 독립성을 갖고 이것을 흉내라도 낼 수 있는 개인이 과연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와 이 주체들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 또 어떤 식으로 규명되는지에 글을 읽으면서 궁금증이 생기기도 했는데요. “권력이 작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체가 있어야만 하나, 이러한 필연성은 주체를 권력의 기원으로 만들지 않는다”와 같은 해석은 이 글 3장의 푸코를 통해 어느 정도 그 철학적 연원을 살펴 볼 수 있었지만, 대체로 일개 독서인이 이해하기란 턱이 높다는 점을 먼저 밝혀두고 싶군요. 우리가 육신과 영혼의 이중구조로 이뤄져 있다는 점을 인지한다면 육체의 단순 원리로서 영혼의 지배나 제어를 받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구조로 여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서장에서 계속 확장되는 일종의 외부인 사회 규범들의 내부화를 통한 영혼의 내면화와 더 나아가 주체가 권력에 의한 남용에 따라 어느 정도까지 예속화가 진행되는지 그리고 이러한 예속화의 본질은 무엇이고 이렇게 예속화가 된 자신의 거울은 무엇을 뜻하는 것과 같은 수많은 질문들이 끊임없이 뇌리를 스쳐가게 됩니다. 결국 이것은 1장에서 푸코가 질문했던, “이 주체를 어떻게 할 것인가? 혹은 어떻게 놔두어야 하는가”로 연결됩니다.

이러한 주체와 관련해 푸코는 “현대 정치학의 핵심은 더 이상 주체를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생산되고 유지되는 규제 메커니즘을 밝히고 연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는데요. 이것은 예속과 욕망의 문제, 그리고 권위에 제약된 욕망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취급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논의합니다. 영혼이 육체의 제어 상실이라는 불안한 의식의 근원에서 ‘노예적 상황’이 도출되며, 이러한 장면을 해석하는 수많은 회의주의자들과 육체의 소멸이라는 최종적 파멸에 따라 인간은 불변의 영역에 다다를 수 없기 때문에 “자기경멸과 심판의 대상이 되고 만다”는 헤겔의 평가는 꽤 직접적으로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자기 불안정에 따라 인간은 욕망을 우선시하게 되기도 하고, 상반된 내면의 감정으로 이런 욕망을 좌절시키기 위해 금지를 강요하기도 하는데요. “금지는 금지된 욕망의 삭제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그 금지된 욕망의 재생산을 추구한다”는 일종의 저자의 양가적 해석을 도출하게 됩니다. 욕망의 금지를 통해 인간의 고난의 길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회의를 보인 니체를 차치하더라도 인간 본연의 욕망이 이러한 불안정한 감정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해석하는 부분은 사뭇 의미심장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법이 육체의 구속을 위해 필요한 원천적인 기능으로 도래되었다 하더라도 헤겔은 ‘불행한 의식’에서 함의하는 도덕적 비참함이 일관적으로 유지될 수 없기에 그것을 부정하려고 하는 육체의 존재를 언제나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그의 비참함의 추구와 애착은 최종적으로 예속화의 원인이자 결과로 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주체는 아예 애착하지 않는 것보다 고통에라도 애착할 것이기 때문에” 애착 자체가 자극이 되어 욕망하려는 의지가 될 수 있다는 프로이트와 헤겔의 한결된 주장은 주체와 규제된 권력의 관계가 어디까지 서로를 인정할 수 있을 것인지 의구심에 들게 합니다.

뒤이어 2장의 양심의 가책의 순환이라는 장은 특히 심리학을 전공하는 이들이 꼭 읽어봐야 되는 부분이라 여겨졌는데요. 양심과 양심의 가책을 논하면서 앞선 것들을 기반으로 도덕성과 도덕주의에 대한 니체의 판단을 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도덕성이 어느 정도 폭력에 의존하고 있다는 생각은 이미 우리게 친숙한 것이다”는 버틀러의 평가는 꽤 놀랍게 느껴지기도 했는데요. 내면의 예속화를 가속화시키는 금지의 언행은 어쩌면 영혼에게 폭력에 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양심이 자기 자신에게 반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인지한다면, 양심을 강화하는 도덕성은 어느 정도 폭력성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보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더나아가 버틀러는 “나는 폭력에 대항하는 주체가 실은 이전 폭력의 효과라는 것, 심지어는 폭력에 자기 자신을 대립시키는 주체도 그러하다는 점을 보이려고 한다”고 언급하는데요. 앞선 서장에서 ‘상실의 상실’이라는 논법과 비슷한 양가적 측면의 해석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다시 앞선 양심으로 돌아가서 니체는 죄와 빚의 예시를 통해 양심을 분석하고 있지만, 상이하게도 버틀러는 “양심의 가책이란 약속을 어기는 행위에 가담하는 내면성의 가공이자 의지의 불연속성이다”라고 꽤 내밀하게 설명합니다. 다분한 약속의 어김에 대해 양심의 논법이 어디에 있는지 우리에게 신속히 알려주고 이를 통해 양심의 작동 원인이 내면의 메커니즘이라는 것 또한 전달됩니다.

3장은 푸코의 주체화에 대한 논법을 주로 다루고 있는데요. 푸코는 주체화 자체가 “주체로 되기와 예속화 과정” 모두를 지칭한다고 밝히고 있는데요. 육체가 영혼을 담는 일종의 감옥이라고 여기는 철학자들이 많다고 봤을 때, “정신은 정확히 일관된 정체성 속에 머물러야 하며 일관된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담론적인 요구의 감금효과를 초과하는 그 무엇이라고 해석됩니다. 뒤이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 무의식과 주체를 비교 규명하고 이를 통해 다시 푸코의 결론에 이르는 “주체는 절대로 예속화 과정에서 완전히 구성되지 않는다”는 점은 구성을 이루는 담론의 외부인지 아니면 말해줄 수 없는 영역에 있는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규명이 이어져야만 한다고 저자는 분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영혼과 육체의 규명에서 이 육체는 감금효과로 비유된 영혼의 대립하는 것은 아니지만 영혼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정신의 어떤 작용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겠습니다.

4장은 사실상 이 책의 복합적인 결론이라 부를 수 있겠는데요. 푸코의 주체에 대한 규정과 한계를 통해 명백히 이 점을 차용한 알튀세르가 말하는 주체와 양심을 좀 더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죄의식’에 대해 논의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주체와 죄의식의 관계라 볼 수 있겠는데요. 다수의 사람들은 법의 목소리에 순응해 개인의 내면의 양심의 발동과 유사한 ‘법에서 돌아섬’을 설명합니다. 돌아섬은 부름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며, 법과 수취인 양자에서 규정되는 이 돌아섬은 결국 “정체성을 향한 기대의 움직임”이라는 표현으로 꽤 상대화되기도 합니다. 이에 알튀세르는 국가와 지배 이데올로기라는 논법에서 그리고 주체적 이데올로기라는 측면에서 돌아섬을 차용해 서술하고 있으며, 특히 지젝과는 다른 슬로베니아의 비평가이자 철학자인 믈라덴 돌라르의 ‘알튀세르에 대한 재해석’을 저자는 글에 차용하고 있습니다. “강한 데카르트적 반향’이라는 주체의 이데올로기적 작동에 대해 돌라르는 이를 강조하고 있지만 반대로 주체의 문제가 주체성의 문제와는 사뭇 다른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돌라르는 이를 명확히 구별해 낼 수 없다는 것을 한계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또한 주체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알튀세르의 안과 바깥 개념에 대해 돌라르는 이데올로기의 영역을 물질성과 관련해 알튀세르와는 달리 해석하고 약간 신학적 개념으로 이를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후술된 글을 통해 짐작되기도 했는데요. 또한 뒤이어 니체식으로 해석된 주체에 있어서 정념과 법의 문제 그리고 욕망의 문제 등 앞으로 주체가 직면한 문제들에 대해 우리가 철학적인 질문들을 계속 해나가야 하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꽤 산만하고 장황한 서평이 되고 말았습니다만, 지금도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상황에서도 제가 버틀러의 이 글을 제대로 이해했는지에 대해선 약간의 불안감이 들기도 합니다. 사실 앞서 소개해드린대로 저는 이 책을 ‘세계를 억압하는 권력에 대한 일종의 해부’라고 여기고 골랐으나, 저의 기대와는 완전 다른 글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인간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각 개개인이 영혼의 소유자가 되어 주체적인 삶에 대한 의지를 갖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프로이트를 비롯한 정신분석학적인 측면을 포함해 이론적 근거의 다양성을 꽤 살펴볼 수 있었는데요. 일찍이 미국에서도 버틀러의 글과 사상은 매우 난해한 것으로 유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 대한 세간의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좀 더 얼마간의 책을 손에 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분의 좀더 세밀하고 수준높은 서평을 기대하며, 저의 부족한 글은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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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적인 세계 경제 - 우리는 불확실한 미래의 충격에 대처할 수 있을 것인가?
장에르베 로렌치.미카엘 베레비 지음, 이영래 옮김, 앤서니 기든스 추천 / 미래의창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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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프랑스 툴롱 출신의 경제학자인 장에르베 로렌치는 1992년 설립된 이코노미스트 서클의 창립자이자 회장이기도 합니다. 그는 1975년 파리 13대학의 경제학 교수를 시작으로 1979년 프랑스의 다국적 광고회사인 하바스 그룹의 회장을 거쳐, 뒤이어 프랑스 산업부 장관을 역임하고, 에디트 크레송 총리의 경제 자문을 맡는 등 프랑스 내에서는 꽤 유명한 경제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공저자인 미카엘 베레비는 파리고등경제상업학교 ESSEC 의 이력 이외에는 별다른 정보가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이 책의 다소 주목할 만한 부분은 앤소니 기든스가 추천사가 실려 있다는 것이겠죠. 이에 ‘유럽의 산업 공동화’와 ‘영속적인 부채 현상’에 대해 공감하고 있는 기든스는 전체적으로 이 책에 대한 호평을 남겼습니다. 지난 2015년 출간된 불어 원제는 “Un monde violences. Leconomie mondiale 2016-2030”로 국내 번역은 지난 2017년 1월에 이뤄졌습니다.

먼저, 이 글은 총 7장의 구성으로 되어 있는데요. 약간 뜬금 없기도 한 와해성 기술 Disruptive Technologies 에 기반해 해석한 현재의 기술 정체를 논한 1장은 업계를 완전히 재편성할 신제품과 기술들의 출현과 앞으로 미래의 한정적인 자원으로 비롯되는 ‘둔화’와 그것에 이어지는 새로운 경제침체와 문제점들을 도출시켜 뒤이어 이어지는 2장부터 6장까지의 논거를 뒷받침하는데 쓰이고 있습니다. 특히 2장과 6장은 7장에서 저자가 언급하는데로 사실상 앞으로 세계 경제가 직면할 위기로써 좀 더 면밀히 설명해내고 있습니다. 즉, 전세계의 노령 인구의 증가, 폭발적인 불평등의 문제, 선진국에서 비롯되는 산업공동화 현상, 자본주의를 더 왜곡하는 금융화의 존재, 그리고 빈약한 저축과 그나마도 투자로 이어지지 않는 상황을 각 주제별로 진단하고 그것의 해결책들을 제시하고 있으나, 개인적으로는 지정된 답변들이 면밀한 해결 방안이라고는 평가하기 어려웠는데요. 특히 3장의 오늘날 민주주의와 소득 재분배와 관련된 민주주의에 대한 저자들의 불확실성에 대해 동의하기 힘들었습니다. 뒤에서도 이 부분에 대해 따로 언급하겠지만 지금의 민주주의가 신자유주의에 의해 시장의 권한을 가급적 건드리지 않는 쪽으로 강요되어 왔던것을 저자들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거나 아니면 이러한 사정을 짐짓 모른척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단순히 이 점을 경제학자들의 ‘외눈박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것은 다소 인신공격에 이를 수 있으니, 대충 이 정도 선에서 정리하겠습니다.

순서대로 2장에서는 갈수록 더해지는 전세계의 노령 인구화에 대해 논의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선 저자는 “소위 전통 경제학자들은 노령화는 역동성의 결핍, 둔화, 약화와 관련되기 때문에 이 현상이 성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며 결국 노인들이 받는 의료와 복지 혜택에 관련한 비용 부담이 커질 것이라고 말한다” 평가하는데요. 이 장의 후반부에서 인정하는대로 시민은 누구나 “균일한 생활 수준”을 영위할 권리가 있는데 앞으로 증대되는 노령인구의 비율을 고려했을 때, 선진국이나 개도국 할 것 없이 추가된 복지비용이 필요할 것임은 자명해보입니다. 다만,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를 비롯한 아시아 지역의 국가들은 아직도 노인의 복지와 건강유지를 위해 가족 단위의 비용 지출이 이뤄지고 있다고 분석하고 이 점은 서구 사회와 약간 다른 부분이라 여겨지기도 합니다. 인도네시아나 태국을 비롯한 개도국들에게도 지속적인 경제 부문의 성장 유무와는 상관없이 지금도 적잖은 비용을 노년층을 위해 지출하고 있으며, 이것이 이들 국가들의 경제 성장에 방해 요인이 될 것인지에 대해 좀 더 면밀한 분석이 필요해 보이지 않나 싶습니다. 더불어 노년층의 인구 증가와 이에 따른 세대별의 갈등은 단순히 경제학적 논법으로 풀 수는 없으며, 사회학적인 접근과 복지 차원에서 복합적으로 분석해야 되는 부분이 있다는 점은 꽤 동의할 만합니다. 특히 저자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현재 또는 앞으로의 노년계층의 문제에 천착하기 전에 “전세계에서 고통받고 있는 젊은이들 사이의 어려움, 고통, 불안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조언을 하는데요. 이런 불균형을 맞춰 나가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꽤 박수를 줄 만한 부분이었습니다.

제가 몇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던 3장은 특히, 자본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민주주의 국가들의 심각한 불평등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취지대로 장의 제목 역시 “불평등의 억누를 수 없는 폭발적 증가”인데요. 이번 장에서 논의대는 주장들을 간략히 추려본다면, 현재까지 자본주의의 주요한 가치가 되고 있는 자유주의와 시장 자유주의와 관련해 “자유 시장 체제에서 만들어진 불평등은 개인의 향상을 도모한다는 면에서 유익하다. 여기에는 모두를 극빈자로 전락시키는 평등주의 체제와 반대로 인구 성장에 대한 제약이 수반된다.”고 저자는 논의를 더하고 마찬가지로 모두를 하향 평준화 시켜 빈곤에 이르게 하는 무분별한 평등주의에 대해 일종의 선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다만, 이러한 개인주의적이고 자유로운 경제 활동과 개인들의 이익 추구가 “국가 번영의 원천을 이루는 활동”이라는 소위 대의에 이른다는 것에는 동의하기 힘들었습니다. 물론 자본주의의 건전한 발전과 그에 따른 경제 성장의 확대는 거시적인 측면에서 공감하는 부분이 있으나,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 불평등을 감수해도 되느냐 혹은 이러한 불평등의 문제를 오로지 개인의 선택과 자유의 보장에 국한시켜 결과적으로 민주 정치를 토막내는 심각한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허버트 스펜서류의 ‘아주 자연스런 현상’으로 치부해야 되는지는 저 역시 동의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회 경제적 불평등이 용인되는 것은 기회의 평등이 존중을 받고 사회에서 혜택을 받지 못한 구성원 대부분에게 돌아가는 혜택을 통해 불평등이 상쇄되는 경우에 한해서다”라고 저자가 설명하는 것은 꽤 합당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 장의 후반부에서는 과거 대럴 M. 웨스트의 “부자들은 왜 민주주의를 사랑하는가”에 대한 실로 적절한 답변을 찾을 수 있었는데요. 즉, “민주주의는 자본 도피와 탈세에 참여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정치 정당과 같은 법률상 기관을 비롯한 엘리트에게서 나오는 사실상의 위혐요소를 다룰 필요가 있다”는 사실상 경고에 기인합니다. 그동안 엘리트 관료들과 부유층은 민주 정치 자체를 민중들에 의한 중우정치로 취급해 그 불확실성을 경계해 왔는데요. 이들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정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자원과 시간을 들이고 있다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부분입니다. 결국 법과 제도하에 돌아가는 민주주의 제도에서 정치 엘리트들과 경제 권력들의 야합은 서로의 이해관계가 일치했기 때문이며, 이러한 협력을 통해 막대한 부유층과 경제 기득권들이 국가 권력의 징세에 맞서 자신들의 부를 지키기 위한 메커니즘에 사력을 기울이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여서가 아닐까 고민해봤습니다. 이것은 그동안 민주주의가 평등의 가치를 축소시키고 오로지 ‘발 하나로 지탱하는 자유 민주주의’의 확대라는 것에 집중해 온 결과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본을 갖고 있는 계층의 조치라기보다 정치적인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절차 속에서도 민주주의가 사회의 불평등을 얼마나 늘려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는 분석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뒤에 나오는 앞으로 미국의 중산층이 부유층과 빈곤층 사이에 껴서 절멸할 것이라는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고, 또한 시장 자본주의의 강요가 불러 일으킨 민주주의의 약화를 먼저 전제하지 않고 민주주의 절차적 이행과 그러한 이면의 취약점을 물고 늘어져 저자들이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다소 단순하게 바라본 것이 아닌지 이 점에 대해서도 비판을 하고 싶습니다.

4장은 간단히 말해, 세계화의 끔찍한 불확실성으로 인해 오늘날 선진국들에게서 산업공동화가 나타났다고 비판하고 있는데요. 값싼 노동력을 위해 쉽게 이전과 이동이 가능한 현재의 다국적 글로벌 기업들은 기존의 지역 경제에 큰 타격을 끼칠 만큼 기존의 산업 국가들에게 산업공동화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티글리츠와 같은 경제학자들은 공장 이전과 관련해 좀 더 규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며, 이에 저자들은 전반적으로 “1790년부터 1820년까지 영국이 기술적 진보 상태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모든 면에서의 보호주의 때문이었다”라고 덧붙여 논증하고 있습니다. 물론 세계 경제의 자유화 흐름의 대세를 거스를 수 없는 것은 분명하나 기존의 지역 사회가 붕괴되는 산업 이탈에 대해서는 적당한 규제가 필요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앞선 보잉의 사례는 그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여겨집니다. 또한, 앞선 이 ‘불안한 세계화’와 관련해 미국이 본보기로 민주주의를 지키고 필요한 개혁에 착수할 것을 요청하고, 여기에는 또한 “국민국가와 민주주의를 보존하는데 있다”고 강조합니다. 이런 글로벌화에 따른 전구적 문제에 대해 저자들은 아직도 국민국가주의적인 대처 방안에 기대를 갖고 있으며, 대니 로드릭이 세계 정부에 극도의 회의를 보인 것과 같은 공감을 역시 글에서 피력하고 있습니다. 물론, 국민국가주의적 민주 정치의 부활과 강조가 분명 세계화의 문제에 어떤 대응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에 다소 동의하기도 합니다만, 마찬가지로 기후 문제와 관련된 문제 등과 같이 전세계적으로 의견 제시와 합의가 필요한 부분도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유럽에서 나타나고 있는 반이민 정서에도 이러한 합의가 필요하지 않나 고민해봤습니다.

5장은 현재 기형적으로 돌출된 자본주의 시스템하에서의 금융화가 과연 탈금융으로 이어질 것인가에 대해 역시 회의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미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의 방대한 ‘유동성’으로 인해 남아도는 여유 자금을 다른 투자처에 투입하는 것은 소수의 부유층을 비롯한 다수의 경제 행위자들에게는 자연스런 현상이기도 했습니다. 다만, 기존의 전통적인 산업 경제 주체와 괴리되었다가 이제는 모든 기업들을 좌지우지 하게 된 모든 분야에서의 금융화는 필연적으로 충분한 규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기업들의 경영 자금 조달이라는 일차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이미 기업의 경영권을 위태롭게 하는 동시에 채무조차도 증권화하여 수익으로 남기는 이 비정상적인 행태에 소수의 이익자들에게만 막대한 돈이 돌아가는 것은 유동성의 위기를 논하기에 앞서 다소 위험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카지노 자본주의’로 설명되는 금융의 세계화가 제어되지 않은 채로 돌아다니는 것은 그 해결 방안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지 불명확합니다만, 지금부터라도 학자들과 경제 부문의 종사자들이 의견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다수의 연금 기금과 복지 기금들이 수익을 위해 금융 시장에만 매달려 있다는 것에 환경 개선의 필요성이 시급해 보입니다.

끝으로 6장에서 논의되는 저축의 필요성은 현재 기존의 과다한 저축률에 비견해도 직접적인 투자에 이르지 않는 것을 분석하고 있는데요. 왜 저축을 가장 희소한 자원이라고 했는지 공감이 갑니다. 단순히 저축의 확대를 금리 인상에만 기댈 수 없듯이, 그나마 꾸준한 저축 이면에는 자금이 산업계나 필요한 투자처에 공급되지 않는 현상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점은 5장에서 연계되는 자본주의의 금융화에 기인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요. 1차와 2차 산업이 주로 개도국에 집중되고 있는 현실을 고려했을 때. 다국적인 저축 자금이 과연 이들 국가에 투자될 수 있는지에 대한 현실적인 분석 또한 필요해 보입니다. 글의 마지막 결론에 저자들은 고통의 분담화와 같은 소위 당위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만 이미 환경 오염 산업의 개도국에 대한 아웃소싱으로 인해 과연 선진국과 개도국간들 간에 투자를 비롯한 상생하고 발전적인 협력이 가능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입니다. 이를테면 현재 프랑스와 같은 유럽국들과 이들의 피식민지배국이었던 아프리카 국가들의 관계를 비추어 봤을 때, 명확합니다. 전반적으로 저축과 투자의 불균형과 과거 미국인들이 사실상의 중국계 자금으로 신용 생활을 했던 것과 같이 부분적인 세계화의 현실이라고 생각할 만합니다. 즉, 저자들이 본질적으로 현재의 세계화는 반-세계화 semi-globalization 라고 지칭하는 것은 이런 점들에 기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매번 이런 글들을 읽을때마다 느끼는 것은 현재 우리의 자본주의가 세계 수준의 영향력과 파급을 생산해 내고 있지만, 다수의 경제학자들과 경제적 담론을 만들어 내는 지식인들이 체제의 균열을 비판하지 않고 오로지 단순하게 체제 옹호에만 나서고 있는 것은 우려할 만합니다. 또한 경제학자들이 앞으로의 남은 21세기를 불안하게 보고 있으면서도 시스템 개선에 도움이 될만한 이론이라든가 대안 제시를 못하고 있는 것도 문제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결국 12장의 이러한 위기들을 건너는 방안에 대해 일부의 의견 전환과 관점의 재시도 또한 분명 필요하지만, 자본주의 전반이 문제점을 표출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개선의 시급함을 모두가 인지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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