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권이란 무엇인가 - 근대 국가의 기원과 진화
로버트 잭슨 지음, 옥동석 옮김 / 21세기북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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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저자인 로버트 잭슨은 버클리 대에서 정치과학과 관련된 박사 학위를 수여 받은 이후, 보스턴 대학에서 국제 관계학을 가르치고 있는 학자입니다. 그는 과거 제국주의 시절의 아프리카 식민지를 비롯한 식민정치에 대한 연구와 이와 관련해 동시대의 영국의 견고한 제국주의 정치에도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이 뿐만 아니라 옥스포드 대학과 런던정경대 및 스탠포드 대학의 방문 교수이기도 하며, 영국과 캐나다 그리고 덴마크 정부의 외교정책 자문위원을 역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책은 지난 2007년에 “Sovereignty”라는 원제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6년 11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한가지 번역과 관련하여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역자는 경제학을 전공한 학자인데, 아무래도 정치학과 인문학에 관련된 배경 지식이 부족하거나 아니면 본래 인명 표기에 대한 영문상으로의 표기를 그냥 갖다 쓸 정도로 개념이 부족해 보였는데요. 이 부분은 맨 마지막에 따로 밝혀 두기로 하겠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이 책은 약간 특이하게도 역자의 번역 취지의 글이 맨 앞에 위치해 있었는데요. 이것을 서문으로 여겨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일반적으로 역자의 변이라는 장으로 맨 뒤에서 다루는 것과는 매우 상이한 것입니다. 물론 원저자의 서문이 뒤에 이어지기도 합니다. 다시 글로 돌아와서, 이 글은 총 6장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다시 엄밀히 말하자면 주권과 주권체 개념에 대한 유럽 위주의 시대적 서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평가하는 데에는 저자인 로버트 잭슨이 1장에서 주권체에 대해 밝히는 의미와 일맥상통합니다. 즉, “주권체는 중세 이후에 전 세계적으로 등장한 헌법사상인 동시에 그 이전 시대를 명확히 구분짓고 또한, 보편적 기독교 신정에 반하는 사상에 기초하는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고 규정되는데요. 이는 시대를 거치면서 주권체의 개념이 변화하게 되고 이것은 최종적으로 오늘날 우리가 읽히 인지하고 있는 “주권체는 바로 다름 아닌 일반 의지의 행사”이면서 이러한 주권체를 형성하며 발전해 온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주권은 거부될 수 없기 때문에 문어상으로는 국민 주권체는 대중이 실질적으로 최종 결정을 내리는 정부로 이해될 수 있다”는 4장, 대중 주권체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래서 1장에서 저자가 단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것은 ‘이 책이 사상사적 관점에서 기술되었다’는 부분입니다. 애초에 정치발전과 공화주의적 착안과 민주제도 전반의 부분에서 학술적으로 주권과 주권체를 밝혀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 인식하고 있는 이 주권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역사적인 사상의 흐름을 거쳐 변화를 거쳐 왔는지에 대해 저자는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접근법이 아예 무의미하거나 한계를 갖고 있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애초에 유럽의 역사에서 이 주권을 다루고 있고 (물론 그럴 수 밖에 없겠습니다만) 소위 문명 세계를 이루는 사람들의 권리라는 것으로 다루고 있는 점은 소급으로만 이해해도 그 근거가 명확해 보였는데요. 이를테면 3장의 유럽의 주권과 전 세계에서, 각 유럽의 국가들이 제국주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그들이 임의로 정해놨던, 아프리카와 아시아 지역에서의 토착 정권에 대한 사실상의 주권 불인정은 바로 이것을 대변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흐름속에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열강이 식민지 건설에 나섰고, 근대를 넘어선 1910년대의 미국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 원칙 조차 유럽인들을 제외한 다른 민족과 인종에는 적용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저자가 밝히는 바와 같이 우리는 유럽의 정치가 주권체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을겁니다. 과거 중세 시대에 있었던 정교 일치 사회에 대해 저자인 로버트 잭슨은 이 시기의 로마 교황으로 선도되는 여러 정치적 기술과 체제에는 각 유럽의 봉건 영주들 중심의 일종의 선정권을 갖고 있는 중세 왕정으로 구분된다고 보고 있는데요. 이는 로마 교황이 봉건 왕정에 대한 정당성 답보에 관여했으며, 14세기 이전까지도 왕이라 지칭되는 자들이 완전한 중앙 집권체를 이루지 못했기에 봉신의 권리만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에 봉건 국왕들이 자신들 위에 신을 제외하고는 거의 유일한 존재임을 피력하는 루이 14세와 찰스의 시기까지는 교황권에 대한 쇠퇴에 따른 일종의 권력 공백이 이들 봉건 왕들의 정치적 권력 확대와 더 나아가서는 17세기 이후 로마 교황의 권한까지 억누르는 상황으로 이어졌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는 격렬한 종교 개혁과 그 흐름에 따른 사회 변혁이 봉건적 왕들의 이익 확대에 부차적으로 기여한 것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하였는데요. 단순히 자신들의 군주를 뽑고 옹립할 권리를 종교 개혁 와중에 일어난 것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당시 만연된 로마 가톨릭의 부패와 터무니 없는 민중들에 대한 착취는 국왕과 교황권이라는 권력의 교체를 추동했던 요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에, 저자는 바로 중세 시대 이후의 유럽 시기를 주권의 시대의 시작으로 파악하는 듯 보였습니다. 특히 저자 자신이 엄청난 변화라고 인지한 군주 체제에 대해 점차 인정되는 주권과 기독교 공화정이라는 체제로의 해체과정은 수세기에 지속된 것으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14세기에서 15세기에 걸친 이탈리아 반도의 도시국가 체제와 각 봉건 영주들이 자신들이 신성을 부여 받은 존재라는 의미로 “기독교 신이 인정한 권리에 의해 통치한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는 측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체제적 유지는 유럽이 근대 초기에 이를때까지 지속되었으며, 외형적으로는 유럽의 세력 균형이 시작된 시기이며, 그런 연유로 베스트팔렌 체제 자체가 이러한 변화를 설명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신성의 유지와 신성한 권력이라는 이름의 각 국왕들의 주권체가 뒤이어 ‘제국 주권체’라는 미명하에 식민지 건설과 인종적으로 차별을 지우는 식의 권위와 정치적 선점이라는 오명을 낳기도 하였습니다.

뒤이어 4장에서는 ‘국민의 이름’이라는 대중 주권체에 대해 기록되는데요. 개인적으로는 3장과 4장은 집중해서 읽어야 되는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토머스 페인의 인간의 권리라는 대목에서 시작된 이 대중 주권체는 후에 프랑스 혁명이후로 초래된 나폴레옹 보나파트트의 전체주의적 민주주의로 전달됩니다. 이 대중 주권체는 정치적으로는 과거 제국 주권체와는 달리 매우 다변하고 복잡한 양상을 띄게 됩니다. 영국의 명예 혁명과 미국 독립 혁명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중이 스스로 주권을 챙취하게 되는 과정은 녹록치 않았으며, 더욱이 프랑스 혁명 이후 발생한 프랑스의 나폴레옹 제정은 전 유럽은 전화의 불길로 이어지게 만들었는데 이 과정에서 미국의 의회 주권체라는 개념이 발생한 게 아닌가 문득 예상해 보게 되었습니다. 초기에 대의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프랑스 혁명을 목도하고 난 이후에 그것의 폭력적 결과를 얼마간이라도 방지하기 위해 의회의 주권 개념이 도입된 것이 아닐까 하는데요. 이 ‘대리인 정치’가 일반적인 대중들을 대신해 반대와 첨예하게 싸워 나가는 개념으로 일정 부분 인정한다면 이러한 체제의 발전이 아주 터무니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이런 의회 정치와 의회 주권의 시기에는 “국민의 이익, 공공재, 공익, 국가안보, 시민권, 공공복리 등이 내포하는 정치 사회의 규범적 기준에 의한 주권체”를 등장하게 하였습니다.

현재의 국민 국가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는 민족 자결주의와 관련해 ‘동일 민족 동일 국가’라는 의미하에 양차대전 이후 이러한 정치 결사체의 획득이 시도되었습니다. 이를테면 전 유럽에서의 국민 국가 개념의 발생일텐데요. 특히 이 부분은 저자가 밝히는 대로 캐나다의 ‘두 개의 민족 그리고 한개의 민족 자결’을 제외한다면 대체로 배타적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오늘날에는 세계화의 범람 가운데 이 국민 국가의 축소 내지는 쇠퇴가 예견되어 왔는데요. 물론 저자의 논법과는 약간 벗어난 경우일 수도 있겠지만, 근래 중동에서의 테러리즘 발호는 이러한 국민 국가의 쇠퇴를 여실히 증명하는 사례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사실 그동안 초강대국 미국과 국제연합이 주도하는 ‘인도적 개입’들이 경우에 따라서는 테러리즘의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는 해당 지역에서의 주권 약화를 불러일으켰다 이해해도 크게 어긋나지 않습니다. 애초에 주권 개념을 국제 연합의 지위나 국제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배타적이 고유한 개념으로 이어져 내려 왔다면 많은 실패 국가에서 보여지는 내전과 전쟁에서 고통스런 인명 피해와 무분별한 살상을 막기 위해 이 인도적 개입이라는 명분이 바로 앞선 측면에서 주권의 쇠퇴를 가져왔고 더불어 세계화의 흐름속에서 이어지는 탈국경화 역시 여기에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저자가 의문을 표하는 부분인 이러한 세계화의 시스템에서의 세계시장과 같은 초국가적 활동이 과연 평화를 불러왔는가에 대해 우리 모두가 깊은 성찰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미국의 블랙 워터와 같은 민간 군사 조직이 초래한 여러가지 혼란과 갈등을 보더라도 애초에 국민 국가의 주권적 쇠퇴가 과연 환영받을 만한 일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할 거리들이 있다고 여겨지는데요. 국헌적 체제 하에 공인된 시민들의 주권 개념이 명목상으로만 우선되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아주 전반적인 국민 국가 개념의 퇴출은 있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물론 이 글의 결론에서도 국민 국가의 시스템이 완전히 역사의 뒤안길로 가지는 않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습니다만 한 국가와 국민 그리고 이들이 모인 국제 체제에서의 주권체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들이 최소한 외부요인에 의해 붕괴에 이르지 않기 위해 제도의 마련이나 인식의 재정비가 필요하지 않나 하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기본 권리와 이익이라는 것에도 귀결되며 다소 곁가지일지도 모르겠지만, 서두에서 일찍 저자가 확언한 바와 같이 어쩌면 주권 개념이 현실 정치의 포퓰리즘을 극복하는 데에도 매우 유용할 수 있겠습니다.



- 118페이지의 텔리랜드라는 인명이 나오는데요. 이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의 전후 복구에 참여했던 탈레랑 Talleyrand 을 뜻합니다. 매우 공공연하게 알려진 탈레랑의 인명 표기를 영문 표기로 글에 실는 것은 실망스러운 부분입니다. 마찬가지로 1장에서는 당트레브 d’Entreves에 대한 표기는 정확한데 이걸보면 기준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21페이지의 에드먼드 버커 역시 에드먼드 버크로 표기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2장부터 등장하는 레그나 Regna라는 개념을 번역하지 않고 그냥 레그나라고 표기한 것에 대해서도 의문이 듭니다. 107페이지에는 아예 레그나를 왕국으로 표기하는데 여기에서도 기준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110p의 더취의 반란이라는 표기도 손쉽게 번역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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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국가의 조건
프랜시스 후쿠야마 지음, 안진환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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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출신으로 일본계 3세의 미국인인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냉전 종식의 시기에 ‘역사의 종언’이라는 주장으로 자유 시장이 기반이 된 서구의 자유 민주주의의 정당성과 우위성을 설명한 학자로 유명합니다. 동시에 그는 코넬대와 하버드대를 거쳐 조지 메이슨, 존스 홉킨스, 스탠포드 대학 등에서 강의하며 국가 발전론과 국제 경제학 및 국가 건설과 민주화에 대한 연구를 평생에 걸쳐 수행해 오고 있는 인물입니다. 이런 그에게는 약간의 관변 학자라는 이미지도 투영되어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민주주의를 굳게 신봉하는 자유주의자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면에서는 다른 보수 우파 지식인들과 큰 차이를 보인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어찌됐든 그는 학계 전체적인 측면에서 자유주의 정치학 분야에 큰 획을 그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을겁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State Building”이라는 원제로 지난 2004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이듬해인 2005년 3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다만, 현재로서 이 책은 절판된 상황입니다.

우선, 총 3부의 비교적 얇은 소고라 부를 수 있는 후쿠야마의 이 논저가 실질적으로 주장하는 바는 바로 “약한 국가의 통치력 향상과 민주적 정통성 제고 및 자립적인 제도 강화 등의 방법과 관련된 주요한 과제”로서 살펴보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 후쿠야마는 약한 국가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강한 국가를 설명하고 바로 이러한 점의 기본 조건으로 ‘훌륭한 통치와 (성숙한) 민주주의’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많은 정치학자들이 민주주의의 양가적 특성이라 할 수 있는 다원주의와 불협화음에 대해 비교적 부정적인 시선을 보여주기도 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쿠야마는 일견 보기에 그것이 명목적이라 할지라도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1장의 도입에서 설명하고 있는 1980년대 신자유주의의 파고에 대해 “당시 공공부문의 지출에 몸살을 앓던 대다수 선진국들은 이런 신자유주의를 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평가하고 또한, “공공부문이라고 해도 규모를 줄일 분야가 있는가 하면 오히려 강화해야 할 분야도 있다는 점을 (아마도 당시 정책권자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는 점도 그는 따로 후술하고 있는데요. 확실히 강한 국가의 건설이라는 측면에서 잠정적인 민주주의의 쇠퇴를 불러온 신자유주의에 대한 꽤 객관적 판단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후 신자유주의적 이행 과정 가운데 비롯된 민영화에 대한 부분에 있어서도 “민영화는 국가 기능 범위를 축소하는 것을 포함하는 한편, 높은 수준의 국가 역량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라고 그는 더불어 강조합니다. 2차대전 이후 유럽의 열강에 의해 식민지 치하에 있었던 아프리카 대륙의 국가들과 전쟁의 폐허에서 갓 출범한 대만과 한국, 일본이 전자와 다른 성취를 보였던 이면에는 성공과 성장을 바라는 국민들의 조직적인 기대와 노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와 관련해 후쿠야마는 중국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국가들이 특유의 국가 정체성을 갖고 여기에 정부가 강력한 힘을 발휘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데요. 이것과 관련해 3장에서는 약간 광범위한 속단일수도 있으나 “유럽인이나 일본인은 자국이 민주 국가가 되기 훨씬 이전부터 역사를 공유해 온 국민이다. 이들은 정치가 아닌 다른 원천에서 정체성을 느낀다”고 다른 국가들과 구별되는 점을 진술합니다. 이것은 중국과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신자유주의화는 다른 측면에서도 부작용을 낳았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당시 워싱턴의 정책 입안자 가운데 어느 누구도 적절한 제도가 없는 상태에서 진행하는 자유화는 위험하다는 논지를 적극적으로 펼친 바 없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로 설명됩니다. 즉, 많은 후진국과 실패 국가들이 최소한의 제도적 뒷받침 없이 시장 자유화와 세계화에 뛰어들게 되었고, 여기에는 후에 나오겠지만 사실상의 베스트팔렌 체제적 국민 주권 국가의 약화와 국제 권력을 손에 쥐고 있는 선진국들의 (광범위한) 방만한 원조 등이 번영과 발전을 바라는 전자의 국가들에게 일종의 대실패를 맛보게 한 것이 아닌가 짐작해봅니다. 이것과 관련해 3장에서는 미국이 최근에 대외 원조와 관련해 일종의 인센티브를 제공하면서, 일정 수준의 개혁과 성장에 실패한 국가들에게 원조를 제공하지 않는 등의 변화가 이뤄지고 있지만 이것의 이면에는 아예 그런 공감대와 개혁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실패 국가들의 국민들에게는 꽤 가혹한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는 해석을 후쿠야마는 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1998년에 한국이 IMF에 의한 구제 금융을 받을 때 당시 미국 클린턴 정부가 분명 우리나라가 외환 자유화 전면적인 외환 거래를 준비할 제도적 수준의 준비와 기관의 유치가 되어있지 않음에도 그것을 강요한 것은 분명 문제점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즉, 사실상의 경제적 국제 규범으로써 ‘워싱턴 컨센서스’가 이를 수행하는 관료조직의 애매한 인식과 미흡한 대처로 한국과 같은 국가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던 결과는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을 일종의 편의주의로 받아들여야 할지는 불명확합니다만 어찌됐든 우리나라의 사례로 봐도 자유화 자체에는 최소한의 준비와 기준이 필요하다는 점은 확실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뒤이어, 2장은 일반 조직론에 입각해 개인과 조직간의 설명과 그런 개인들이 구성되어 나타나는 조직의 근본 특성과 분석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 조직론에 대한 연구는 성공한 국가 조직과 건설을 위한 선제 조건으로써 이를 준비하는 데 필요한 분야로 후쿠야마는 보는 듯 했는데요. 여기에는 각 개인들의 이기심들과 구성원들의 조직적인 협력의 문제와 주인과 대리인의 관계에 따른 여러 문제점과 의의 등을 상세히 살펴보고 있습니다. 즉, 본격적으로 조직을 구성시켜 제도를 뒷받침하고 국가 전반을 다루게 되는 상황에 이를 때, 국소적인 측면에서 기업의 조직 발전론과 이를 확장시켜 어떻게 하면 국가 조직으로서의 효율적인 성공을 이뤄낼 수 있는가에 대한 여러 논의들과 논저들을 통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산재한 많은 조직들은 주인과 대리인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각 개인들이 자신들의 이기심을 갖고 있고 오로지 서로간의 공적인 이익을 달성하기 위해 어떻게 하면 협력을 추구할 수 있겠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과제와 질문들을 구성원에 대한 인센티브와 확장시킨 공공 행정 분야의 의미까지 다루게 됩니다. “보통의 법치국가들은 기술적인 전문 지식과 결단력 있는 행동의 필요성이 결합된 군사 지휘권이나 금융 정책권 같은 특정 재량권을 행정력에 다시 포함할 수 있는 방법을 조심스레 모색하고 있다”고 후쿠야마는 덧붙이고 있는데요. “공공행정이 나라마다 다르고 포괄적인 일반화가 쉽지 않다는 걸 전제”하면서도 여기에는 특이성의 문제, 이를테면 공공교육이나 국방과 같은 산출과 효과의 관계에 따른 그래프와 도표 등을 글에 수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선진 국가들 가운데 꽤 모범적인 모델로 불리우는 덴마크의 사례를 일반적으로 발전 국가들이 차용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에는 각 구성원과 조직, 그리고 그를 뒷받침하는 제도 등이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일겁니다. 이런 측면에서 과거 미국은 일본과 한국 필리핀 등에서 자신들의 국가 기능적 전반을 이식하기 보다는 일반적인 선출된 민주적 정부의 기능과 기본적인 체계만을 만들어 놓은 것은 물론 단순한 외형적 결과론이겠지만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점은 분명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여기에는 미국이 이러한 체계를 이식한 전후 국가들 가운데 오로지 한국만이 특별하게 성공을 했으며, 이것은 미국의 도움이라기 보다는 오로지 한국민들의 노력의 성과라고 저자는 평가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것과는 별개로 후쿠야마의 주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었는데요. 글의 2장에서 영국이 과거 인도와 싱가포르에 남긴 유산으로 말미암아 인도는 짧은 기간내에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고, 싱가포르는 효과적인 헌법 체계를 만들었다고 평가합니다. 더불어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은 한국과 대만의 일례를 들면서 “일본 또한 대만과 한국을 점령했던 시기에 견실한 제도를 몇개 남겼다”고 평가하는데요. 저는 이것이 당시 일제의 쌀수탈로 농민 자신들 마저 곤궁기에 먹을게 없었던 정도로 행해졌던 조선의 자원 기지화에 대해 정확한 성찰 없이 저런 정도의 언어를 구사하는 것에 대해 매우 실망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여기에다 “한국인들은 일본에 대해 크나큰 증오심을 품고 있다”고 뭔가 이상한 뉘앙스의 문장을 들여다 놓기도 했는데요. 물론 그를 일본계 3세의 미국인이라는 이유 만으로 판단해서는 안되겠지만 조직론과 관련된 그렇게 많은 원전을 책에 소개했으면서도 이 정도의 역사 인식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아예 일본이 한국에 대만에 남겨 놓은 견실한 제도에 대해 조금이라도 설명을 해놨으면 어느 정도 살펴볼 이유라도 되었겠지요.

끝으로, 많은 실패를 겪고 있는 국가들과 발전 과정에 있는 국가들에게 필요한 부분은 견실한 제도와 민주주의의 확립이 될 것입니다. 물론 민주주의 체제의 확립은 어느 정도 경제적 발전이 수반되어야 하겠지만, 후쿠야마가 2장에서 밝힌, “해당 국가의 엘리트들이 개혁에 대한 상당한 수준의 수요를 느끼지 않는 한 좀처럼 효과가 없다”는 점과 오히려 “리콴유와 같은 인물이 통치하는 권위주의 국가가 사실상 나을 수 있다”는 점은 민주주의 체제 확립의 복잡한 이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마찬가지로 “미국과 유럽의 극명한 차이에서 주권 민주 국가의 결정은 아무리 올바른 절차를 거친다 해도 그것만으로 공정성 또는 보편적인 자유주의의 가치와 합치한다고 보장할 수 없는 것과 민주적 다수가 타국에 무서운 결과를 안겨주는 결정을 내릴 수도 있고, 인권을 침해하거나 (자기들 민주적 질서의 바탕이 되는) 인간 존엄의 규범까지 어길 수도 있다”는 점은 우리가 꽤 곱씹어야 되는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후쿠야마는 논의 전개 과정에서 과거 국민 국가가 한계에 이르거나 그 의미가 축소되어 해당 개별 국가가 자신들의 주권을 보위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고 그러한 결과가 과거 유고슬라비아 사태와 몇몇 아프리카 국가들에게서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현재 미국의 일방주의에 기인한 것도 있기 때문에 많은 유럽인들이 주장하는 대로 “민주적 정통성이 얼마간의 개별 국가보다 더 큰 국제 공동체의 의지로부터 나온다”고 하는 것을 디스토피아적인 것으로 너무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고 여겨집니다.사실상, 국내적인 민주적 통치로서의 기반과 국제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정당성은 서로 밀접한 관계이기 때문에 이것을 역으로 고찰해본다면 민주주의를 이행하는 국가들에게 국제 사회 차원의 행정적 지원과 이식의 실질적인 방안을 선진 민주 국가들이 고려해 보는 것이 어떨까 끝머리에서 다소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큰 의미는 없겠지만, 76페이지에 오타 한 곳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문장들 가운데 핵무기와 관련된 표현이 있었는데, 꽤 인상 깊어 적어보려고 합니다. “병 속에 도로 집어 넣기 어려운 ‘지니’로 대변되는 핵무기”

-또한, 조지 W. 부시의 선취주의 즉, 예방 차원의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선제 공격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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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파된 정신 - 정치적 반동에 관하여
마크 릴라 지음, 석기용 옮김 / 필로소픽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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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릴라는 근래들어 학계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정치철학자입니다. 최근에 제가 두루 읽었던 책들에서도 심심찮게 인용된 마크 릴라를 발견할 수 있었고 더욱이 미국 언론에서도 그의 동향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아마도 ‘뉴욕 서평’과 ‘뉴욕 타임즈’에 기고하는 그의 이력 때문일 수도 있겠는데요. 특히 뉴욕 서평에 대한 마크 릴라의 집중은 꽤 유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현재 미국의 컬럼비아 대학의 인문학 교수를 맡으며 자유주의와 계몽주의에 대한 학문적 관심과 연구를 지속해오고 있습니다. 이 책은 지난 2016년에 “The Shipwrecked Mind”라는 원제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9년 9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마크 릴라의 이 글은 일종의 비평집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마지막 3부를 제외하면 그가 밝히는대로 과거 “뉴욕 서평”에 게재했던 논고들이기도 합니다. 이와는 다르게 3부는 2015년 1월 7일에 있었던 ‘샤를리 에브도’지의 이슬람인들에 의한 충격적인 테러 사건에서 비극적인 영감을 받아 작성한 글로 언론인인 에리크 제무르와 소설가 미셀 우엘벡의 ‘복종’을 기반으로 한 글입니다.

흔히 우리는 보수의 반대를 진보라고 잘못 알고 있지만, 사실은 ‘반동’이 정확한 표현입니다. 여기에 마크 릴라는 “반동의 정신은 난파된 정신이며, 반동주의자들은 보수주의자가 아니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시대와 역사의 반동을 특유의 신랄함으로 써가고 있는 그는 ‘반동’을 약간의 처연한 시대착오의 감정으로 보고 있는 듯 싶기도 했습니다. 1부인 사상가들에서는 2차대전을 거쳐 유대주의와 유대교에 집중한 프란츠 로젠츠바이크와 기독교에서 주변의 신앙과 종교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기 위해 고도화 된 언설 내지는 이론으로 집약된 ‘그노시스주의’와 그 아래에 있었던 ‘학문주의적 다작가’ 에릭 뵈겔린 그리고 그의 수많은 제자들에 의해 다소간 잘못된 인식을 받고 있는 히틀러의 학자 ‘마르틴 하이데거’ 친구, 레오 스트라우스를 중심으로 과거의 노스텔지어에 대해 저자는 서술하고 있습니다. 사실 조금 부끄럽게도 마크 릴라의 이 글을 통해 제가 갖고 있던 레오 스트라우스에 대한 편향된 해석을 반성할 수 있었는데요. 그동안 네오콘의 대부로 알려져 있던 스트라우스에 대해 적지 않은 음모론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여기에는 스트라우스가 고대 그리스 철학부터 각종 원전에 능통하여 갓 인문학의 토대를 잡아가고 있던 당시 미국 대학의 많은 제자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릴라가 소개한대로 기본적인 원전과 가감없는 문단과 해석에 집중했던 스트라우스의 교수 방식이 뭔가 그로데스크한 음모론을 만들어 낸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를테면 조지 W. 부시 시대에서 기력을 떨친 네오콘들이 자신들의 스승인 레오 스트라우스가 남긴 어떤 원전과 숨겨진 지령을 갖고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비밀 결사와 같은 태도로 임하고 있다는 허무맹랑한 해석 같은 것들 말이죠. 물론 이건 약간의 농담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하실 겁니다.

아주 간접적인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마크 릴라가 해석하는 반동주의의 이면에는 아마도 직접적인 ‘계몽주의 프로젝트’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계몽주의가 신이 국가에 개입하지 못하게 만들었지만 문명을 처음 생겨나게 한 신격화의 관행을 철폐할 수는 없었다”는 그 특유의 한계와 마르틴 하이데거가 굳게 믿었던 “오늘날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것은 파시즘이 인류와 존재의 신뢰 관계를 되찾아 줄 것”이라는 망상에 기반하고 있는데 이것또한 어떻게 보면 계몽주의의 한계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논의가 확대되는 2부에서 과거 정교일치 사회인 중세 기독교에서 교황들간의 권력 투쟁, 현실 정치와의 갈등, 교회가 탐욕에 물들어 민중들을 피폐한 상태로 몰고간 이면에는 물론 교회의 타락이 존재하지만 계몽주의 자체가 가톨릭계의 최후 저지선인 양극의 조화 complexio oppositoru - 일견 모순적이고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서로 어울려 균형을 이룬다는 생각- 를 해결하지 못한 것은 일종의 역사가 반복되는 행태를 나은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예를들면, 2차대전 당시 교황 비오 12세가 히틀러에 대해 보인 태도를 보면 이를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과거 기독교가 숙명적으로 쇠퇴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오늘날 많은 민주주의 국가들이 용인하는 개인들의 삶에 어떤 종교적 안식으로 기여하는 역할에 변화를 수용했다면 좀 더 일찍 인류가 ‘어둠의 시대’를 탈출했을지도 모릅니다. 굳이 ‘계몽주의적 프로젝트’가 아니어도 말이죠. 그리고 현 시대에서 가장 큰 문제인, 마찬가지로 저자인 마크 릴라도 인정하는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정합성의 도덕주의적 원칙”을 세우는데 기독교가 사실상 실패했으며, 이것은 자본주의의 폭력적 이행 가운데 인간이 인간임을 포기하지 않는 튼튼한 도덕적 원칙을 정립하는 데 실패로 귀결되어 현재 우리가 직면한 사회 문제들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물론 후쿠야마와 같은 보수적 자유주의자들은 탈기독교적 이행이 이러한 파행을 만들었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의 본질은 기독교가 자신들의 밥그릇 싸움에 집중한 나머지 어린 양들을 돌볼 시간이 없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많은 신정보수주의자들처럼 대중영합주의적 전환을 시도한다”고 비판하는 것이 도덕적 다원주의의 혼란을 만들었다고 저자가 일침을 가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만, 여기에는 양가적인 측면이 존재하는 게 앞선 계몽주의 프로젝트가 기존의 건전한 전통이 “도덕성을 뿌리내리는 일을 도맡아온 모든 건강한 사회의 노고까지도 무효가 되었다”고 마크 릴라는 평가합니다. 사실상 반동의 이면에는 이러한 전통주의적 과거에로의 향수가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며, 이는 종교의 측면에서도 현재의 가톨릭 고위층들이 터무니 없는 정교일치 사회로의 회귀를 부르짖는 것은 아닐지라도 좀 더 자신들의 영향력을 키우고 싶은 마음은 작든 크든 존재할 것입니다. 역대 교황들이 벌인 퇴조와 망령과 같은 일들에 대한 저자의 신랄한 풍자와 비판은 섣부른 과거로의 향수가 어떤 의미인지 짐작케 합니다. 뒤이어 2부 후반부에 저자는 프랑스와 유럽에서 보여지는 특별한 알랭 바디우 현상에 대해 비판하고 있습니다. “알랭 바디우는 1970년대에는 급진적인 마오주의자이자 캄보디아 크메르 루주 정권의 옹호자였으며, 이제 거의 여든이 다 되어서도 여전히 중국의 문화혁명을 따뜻하게 묘사하는 글을 쓴다”고 저자는 바디우의 가려진 본질을 설명합니다. 특히, 카를 슈미트의 ‘정치 신학’에 대한 가차없는 분석과 곁들여 이에 바디우와 동질화시키고 있는데요. 마오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희생당한 수많은 피해자들에 대한 감상을 단순히 ‘혁명의 노정에서 벌어질 수 있는 낭만적인 일’로 받아들이는 것은 철학자의 태도는 분명 아닐 것입니다. 레오 스트라우스의 평가에 따르면, “가장 현명한 철학자란 자신이 공동선을 생각하는 정치적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한 자다”라고 했을 했을 때, 그동안 바디우가 진보주의에 갖고 있던 영향과 가능성을 고려해 본다면 이는 아쉬운 면모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마크 릴라가 진단하는 오늘날의 좌파는 “거의 전적으로 하계에만 존재하는 역설적 형태의 역사적 노스텔지어가 전부이며, 그것은 바로 ‘미래’를 그리워하는 노스텔지어이다”라는 뼈아픈 함축적 문맥을 부정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3부는 프랑스의 전통적인 관용의 가치에 살해와 폭력이라는 이름으로 앙갚음 했던 이슬람 교조주의에 대해 논하고 있습니다. 2015년 1월에 무함마드를 풍자했던 ‘샤를리 에브도’에서의 충격적인 테러 사건과 그 결과에 적극적으로 시류에 결탁해 나선 반동주의적 언론인 ‘에르크 제무르’를 꼬집어 저자는 분석하고 있는데요. 그는 ‘프랑스의 자살’이라는 책을 써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이런 이슬람에 대한 선동적인 문구로 죽음의 위협을 받아 경찰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또한 미셸 우엘벡 역시 국내외에 특별한 관심을 받은 ‘복종’이라는 장편으로 프랑스 수상이 그를 비난해 나섰고 이후 증오의 대상으로 점철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에 대한 감상을 남긴 기고문이 수록된 것이 바로 3부가 되겠습니다. 앞선 제무르는 자신의 글로 수많은 독자들의 분노에 찬 절망감을 자극했고, 어쩌면 프랑스 극우주의가 원하는 논법을 때마침 제시해 준 것으로도 읽혀졌습니다. 또한 현재 유럽의 붕괴와 무슬림의 유럽 부흥을 비극으로 봐달라고 했던 우엘벡의 작품 역시 자신의 취지와는 상관없이 프랑스 사회에 격렬한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으로 이 책을 접했던 분들은 마크 릴라의 서평을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를 논하는 것은 꽤 마술적이고 묘한 매력을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여기에 갖가지 이론을 붙여 뼈와 살을 만들어 주요한 논제로 만드는 것 또한 지성의 요청에 부응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에 언급되는 인물들과 사건의 실체처럼 인류가 걸어왔던 노선에 후퇴를 초래하고 자신의 나르시스즘적인 만족에 치중해 다수에게 필요한 진실을 오도하게 만드는 반동에 대한 분별이 있어야만 하겠습니다. 보수주의가 누리는 마땅한 근거성을 반동주의가 결코 바래서는 안된다는 점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단순한 현재의 절망감으로 비롯된 분절된 과거로에 대한 무분별한 향수는 반동 자체의 모순적 결론이며 그것의 파급은 가까운 미국과 프랑스에서 충분히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크 릴라는 우리에게 충실한 목격자가 되었던 것은 아닐까 합니다.



-마크 릴라는 이 글에서 카를 슈미트의 ‘정치 신학’에 대한 고유한 비평을 하고 있는데요. 크게 참고할 만하다고 여겨졌습니다.

-마르틴 하이데거와 레오 스트라우스 그리고 한나 아렌트를 비롯한 유대인 지성인들이 2차 대전 전후에 등장해 세계의 지성사에 한 획을 그은 것은 언제봐도 놀랄만한 일인 것 같습니다. 특히 마크 릴라가 해석하는 하이데거와 스트라우스의 비교될만한 행적 역시 꽤 인상이 깊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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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 - 존엄에 대한 요구와 분노의 정치에 대하여
프랜시스 후쿠야마 지음, 이수경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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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역사의 종언’ 내지는 ‘역사의 종말’이라는 구절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프랜시스 요시히로 후쿠야마는 일본계 미국인 3세로 과거 첨예한 냉전시기에 견고한 자유주의라는 프레임으로 자유진영의 사상계에 영향을 끼친 인물이기도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헨리 키신저와 후쿠야마를 자주 비교해서 보기도 하는데요. 특히 후쿠야마는 조지 W. 부시 행정부 당시 지대한 영향을 끼친 네오콘들이 자주 인용하고 학문적 영향까지 받은 산파로도 매우 유명합니다. 사실 후쿠야마가 네오콘들의 각광을 받는 것에 대한 어떤 개인적 소회를 피력한 바는 없었지만 조지 W. 부시 행정부에 사소한 조언이라도 했던 것을 보면 그런 인정에 대한 그의 감정을 잠시나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그는 코넬대와 하버드 그리고 스탠포드를 거치면서 국제 정치경제학과 국가 발전학과 관련된 연구를 지속해 왔고 관련된 많은 저작들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아주 간단히 그를 설명한다면 미국 자유주의 보수 우파 지식인들 가운데 꽤 중요한위상을 갖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 책은 지난 2018년 원제, ‘Identity’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최근인 4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출판한 곳 때문에 잠시 구입을 망설였는데요. 먼저 원서를 구입해서 읽어봐야 하나 싶었지만 다행히도 번역 자체는 크게 문제가 될 만한 곳은 없어보였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될 부분이 있어 보입니다. 그것은 번역된 책 제목과 관련된 부분인데요. 다들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후쿠야마의 이 책은 현재 미국의 진보에서 집중하고 있는 정체성 정치 및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일종의 비판적 분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에다 후쿠시마는 예상외로 신자유주의 여파로 인한 불평등 문제에 대해 눈을 감고 있지는 않습니다. 뭐 소위 ‘레이건과 대처의 신자유주의 혁명’이라고 이상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만 그만큼 비판적으로 읽어야 될 부분은 분명 있어보입니다. 그냥 단순하게 그의 이 글 전반은 꽤 논리적 근거가 있고 전개 자체는 거의 미려하다고 봐도 될만큼 문장의 가독성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가 자유주의 우파의 지식인인 것만은 분명하게도 11장에서 밝히는 ‘진보주의 세력의 한계 내지는 이론적 근거의 불명확성’은 꽤 교묘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이를테면, 미국의 공화당이 티파티 운동과 같이 극단적으로 변화되고 있음에도 반대편도 사실상 마찬가지였다는 양비론적 근거는 어처구니가 없기도 했는데요. 전세계를 포함해서 진보좌파가 사실상의 지리멸렬한 상황인데 이 한줌 안되는 이들이 어느 정도로 극단화가 이뤄졌는지에 대한 근거가 희박하며, 더욱이 과거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혁명을 외치는 진보 좌파는 거의 없다고 아니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미국의 진보주의에 이런 혁명 분자들이 있을지는 저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후쿠야마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경제 성장의 수혜를 받은 것은 주로 고학력 엘리트 층이었던 것이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물론 앞서 언급해 드린대로 레이건과 대처의 신자유주의 혁명과는 다소 매치가 안되는 설명이지만 심각한 불평등 문제를 인지하고 (하지만 인식에 대한 약간 다른 관점을 보이지만) 경제적 수준의 극단적 상황을 대체로 인정하는 편이기도 합니다. 다만, 이어지는 논리적 전개로 9장 ‘보이지 않는 인간’에서 “존엄과 남에게 인정받는 것”이라는 존엄성의 문제로 이 경제적 불평등을 그는 해석하고자 합니다. 여기에는 경제적 불평등의 그 현안의 문제보다도 그것을 통한 자신에 대한 비참함과 “가난한 것은 곧 다른 동료 인간들에게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과 같다”고 주석을 덧붙이기도 합니다. 또 여기에는 다음 10장, ‘존엄성의 대중화’에서 과연 존엄성이 일반적으로 대중화되는 것에 대한 어떠한 영향이 있을 것인가에 대한 도덕적 판단은 주저하고 있습니다. 물론 10장의 결론에서 “자유민주주의는 모든 국민이 하나의 ‘개인’으로서 갖는 존엄성을 평등하게 인정하는 전제로 한다”는 자유주의 보수주의자들이 보이는 꽤 광범위한 인식을 깔고 있습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이후 현재 미국의 정체성 정치를 논하는 11장과 12장을 거치며 존엄성과 개인의 자유를 서로 연계시키는 인상을 다소 받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전개 과정에는 초반 1장과 2장을 거치며 루소와 헤겔 그리고 투모스라는 개념을 통해 원래 인간 본성에 대한 이론이 “각자가 속한 다양한 공동체의 규범 및 관습에 뿌리를 둔 특성이 아니다”라는 점으로 규정하고 그가 밝히는 바대로라면 현재 사회를 구성하는 각 개인들의 경제적 요구와 그 인식적 판단에 따른 여러 정치 행위들이 그 자체로 경제적 자원 문제와는 무관하며, 바로 여기에는 이 존엄성 개념과 존엄성 정치가 기반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주장된 논의들을 조합해보면 현재의 이 경제적 불평등에 따른 인간성의 상실은 불평등 자체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그로인해 초래되는 인간 존엄성의 상실로 귀결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 존엄성 개념을 가지고 현재의 도널드 트럼프의 나르시즘과 그로 인한 포퓰리즘 정치를 해석하는 수단으로도 이해할 수 있겠는데요. 이 부분은 먼저 11장과 12장에 논의되는 ‘정치적 올바름’과 ‘정체성 정치’에 대해 먼저 언급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트럼프는 기존의 미국 정치 무대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후쿠야마의 표현대로라면, “각 개인들이 자유의사에 따라 사견으로 히틀러의 나치즘을 찬양하고, 흑인들에 대한 인종주의적 편견을 피력할 수도 있지만, 정치인이 그것을 공개적으로 주장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합니다. 이는 미국 헌법의 평등의 문제에 위반되는 것으로 그는 이해하고 있었는데요. 이런 인식의 차원에서 고찰해보면 현재 트럼프의 진면목은 정치인이 공적 무대에서 해서는 안되는 언행을 아주 여실히 해대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것을 그의 지치층들은 속시원하다 혹은 솔직하다 라고 여기고 있지만, 이것 자체는 미국 정치의 후퇴 정도가 아니라 매몰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혹자들처럼 트럼프의 언행과 정치 과정을 “불량배 정치”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단순히 정치인의 급과 도를 무슨 도덕주의적으로 언급하기 보다 과거 18세기 계몽주의가 발전시킨 정치 발전 과정에서 이러한 반문명의 (정치적) 잔재물들을 제거하기위해 노력했던 것에 대한 사실상의 반동이라 할 수 있을겁니다. 이러한 트럼프의 언행과 정치 발언에 대해 그의 지지층들이 자신들의 존엄을 간접적으로 회복하는 일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포퓰리즘 정치 전반이 후쿠야마 역시 (약간 애매하지만) 인정했던 민주주의적 다원주의에 위배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를 통해 포퓰리즘과 전체주의가 한 배를 갖고 있는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뜬금없게도 후쿠야마는 이런 트럼프에 대해 “우리 시대를 정의하는 자기 진실성이라는 윤리를 완벽하게 실천하는 인물이다”라는 표현은 그가 14장의 대미를 장식하는 “정체성 정치가 오늘날의 포퓰리스트 정치를 치료하는 해법일 것이다”라는 것의 모순된 자기 부정이 아닌가 합니다.

물론, 다시 11장에서 후쿠야마가 비판하는 진보 세력에 대한 비판은 다소 귀담아 들을만합니다. “일부 진보 세력에게 정체성 정치는 대부분의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갈수록 심화돼온 30년간의 추세를 반전시킬 방법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대신하는 편리한 대용물이 되었다”는 평가는 딱히 부정할 만한 곳이 없었는데요. 후쿠시마는 미국 헌법의 자유주의 정신을 먼저 언급하면서 흑인에 대한 인종적 수사나 나치의 히틀러를 찬양할 개인적 권리들을 갖고 있다고 보았지만, 이 뿐만 아니라 동성애와 페미니즘 운동 등과 같은 부분에서도 수많은 보수 우파들과 전통주의자들이 이들에 대한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비난을 해왔던 것을 우리가 양극단의 첨예한 정치 갈등을 눈을 감고 그냥 개인적 차원의 자유 발언 권리에만 집중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들기도 합니다. 현재의 미국 정치가 정체성 정치 및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경직성에 매몰되어 정치인들을 비롯한 정치에 참여하는 수많은 시민들의 발언의 주저를 그는 언급하는 듯 합니다만 앞선 동성애와 페미니즘에 대한 뿌리깊은 경멸과 혐오를 감안한다면 이에 대한 발언의 신중은 꼭 필요해 보입니다. 뭐든지 새로운 정치적 행동과 인식이 도입될 수록 그것에 대한 거부는 항상 있어왔으며, 대다수의 민주주의적 다원론자들은 열린 다원주의 사회를 위해 모두가 존중받는 구성원으로서의 가치를 바로 세우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후쿠야마 역시 10장에서 “개인 해방이 행복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대신에 강한자가 약한자를 억누르고 지배하는 탈 기독교시대의 도덕 체계로 향하는 것”이라고 언급한 바와 같이 일반적인 사회의 도덕 체계는 반드시 필요하며, 도덕적 가치와 개인의 자유에 대한 개별 사항에 대한 한쪽의 우선만은 이것이 사활적 문제가 아니라 공개된 수준에서 논의가 진행될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끝으로, 다시 한번 후쿠야마가 진단한 오늘날 좌파들의 문제는 “그동안 특정한 형태의 정체성들에 초점을 맞춰오며 노동자 계층 또는 경제적으로 착취당하는 이들과 같은 커다란 집단을 중심으로 결속을 강화하는 대신, 특정한 방식으로 소외된 점점 더 작은 집단들에 집중해온 것이다”라고 그 한계를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후쿠야마가 그동안 이행되어 온 신자유주의적 결과에 대한 여러 문제들에 대해 어느 정도 개선의 필요성이 있다고 여기는 듯 했으며, 미국 정치 전반에 있어 포퓰리즘의 대두와 나르시즘 정치에 대한 우려를 분명 이 책을 통해 밝혀내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몇가지 통찰들도 분명 있었는데요. 우리의 계몽주의적 공화정치에 기여를 해 온 장 자크 루소와 관련하여, “외부 사회의 관점 및 공통된 규범 보다 개인의 주관적인 내면을 더 중시했던 장 자크 루소가 있다는 점은 상기할 필요가 있다”는 언급은 꽤 색다르게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사실 루소가 개인 스스로 외부와 단절된 사색적인 삶에 대해 집중했던 것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사회 계약과 정부의 수립이라는 우리의 개별적 권리들에 대한 이론적 근거가 되었던 그의 주장들이 오히려 홉스가 바랬던 “도덕주의적 공동체 이익의 실현”과 토크빌의 “이기적인 개인들의 출현”에 대한 경계가 어떻게 보면 루소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다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앞서 제가 언급한대로 저자는 꽤 교묘한 근거와 그에따른 논리의 함정이 있어서 이에 대한 독자들의 정확한 일독이 무엇보다 필요해 보입니다.


“개인들은 종종 경제적 곤경을 물질적 결핍이 아니라 정체성 상실이라는 의미로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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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andante 2020-04-30 18: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멋진 리뷰 잘 읽었습니다. 후쿠아먀는 역사의 종말로만 알고 있었는데 주목할 만한 책이네요. 후쿠야마의 통찰에 대해서는 좀 의심스러웠는데, 베터라이프님의 리뷰 덕에 다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듯 합니다^^

베터라이프 2020-04-30 19:20   좋아요 1 | URL
오랜만에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확실히 후쿠야마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어느 정도 보이긴 합니다만 (물론 이념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와 관련된 논의에 대해서는 보수적 자유주의자의 논법이 분명이 있으며, 본글에서는 탈기독교주의에 대한 여파와 인식에 대해서도 약간 애매한데요. 탈기독교주의에 따른 도덕주의의 쇠퇴인지인지에 대해 명확하지 않은 측면이 개인적으로는 보이더군요. 기존의 좌파에 대한 비판도 일정 부분 들을만한 부분도 있었지만 우파와 좌파의 양극단이라는 논법은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저도 이 참에 후쿠야마에 대해 좀 더 글을 읽어보려고 합니다. ^^ 하여튼 오랜만에 뵈어서 반가웠습니다~
 
쿠데타, 대재앙, 정보권력 -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새로운 신호들
데이비드 런시먼 지음, 최이현 옮김 / 아날로그(글담)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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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의 북부 지역인 세인트 존스 우드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줄곧 성장한 데이비드 런시먼은 캠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를 거쳐 현재 켐브리지 정치학과 교수로서 정치학과 역사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특히, 영국 국내에서 큰 관심을 받은 ‘정치적 위신’, ‘정치’, ‘대표’ 등의 6개의 주요 저작과 더불어 여러 영국 언론에 글을 기고하면서 자신이 운영하는 팟캐스트 ‘토킹 폴리틱스’에서 토마 피케티, 주디스 버틀러, 존 란체스터 등을 초대해 정치적 현안과 시대적 요구에 대한 활발한 토론을 구성한 바가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일전에 서평을 쓴 ‘자만의 덫에 빠진 민주주의’에 이어 두 번째 글이 되었습니다. 이 책은 원제 “How Democracy Ends”로 지난 2018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근래인 2020년 4월 초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본격적인 글에 들어가기에 앞서 런시먼의 이 글에 대한 한줄 평가를 다음과 같이 먼저 하고 싶은데요. 아주 간략히 말해, 이 책은 ‘정치적 수사의 거의 모든 것’이라는 저의 개인적 평가입니다. 이를테면 이 글 3장에서 주요 논지로 비판하고 있는 반동주의자들에 대한 그의 평가 “싫어하는 모든 것에 대한 경멸감이 대안을 설명할 수 있는 능력보다 훨씬 크다”와 같은 수사적 비유는 꽤 시의적절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달리 말하자면, 앞의 비유는 ‘포퓰리스트 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라고도 생각됩니다. 물론 이에 못지 않게 많은 정치학자들과 인문학자들의 논저들이 인용되고 있는데요. 이 점 역시도 글의 주장을 뒷받침하는데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는 것을 밝혀두고 싶습니다. 사실 이러한 미덕이 단순한 단편 소설을 쓰더라도 그것의 기반이 되어야 한다는 점은 몇번이나 강조를 해도 부족하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글의 구성적인 측면에서 이 글은 총 4장의 주제로 (논증적 측면에서) 서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다만, “앞으로 민주주의를 위태로운 지경에 빠트릴 수 있는 요소와 그 가능성을 찾아보고, 뒤이어 대안과 해결방안이 포함된 결론”이 중요한 큰 틀이긴 합니다만 단순히 정치학적인 접근 뿐만 아니라 정치철학적 분석과 이에 대한 문제점과 현실 정치에서의 다소간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는 면에서는 서로 연관되어 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경계가 구분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정치와 정치철학 및 사회구조학적 측면의 논증과 서술이 그렇습니다. 먼저, 1장에서 런시먼은 오늘날 민주주의를 위협에 빠트릴 수 있는 쿠데타의 가능성에 대해 먼저 그 실마리를 찾아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런시먼은 이에 1967년의 그리스에서의 쿠데타와 비교적 최근인 2016년의 터키에서의 총리 에르도안의 친위 쿠데타를 살펴보고 있는데요. 최종적으로 민주주의를 사망 선고에 이르게 하는 소위 ‘군부 쿠데타’의 가능성 역시 문제지만, 설사 “구경꾼 민주주의”가 아닌 실제 시민들이 쿠데타를 성공적으로 종식시켰을 때, 그 파장으로 도래할 수 있는 보존된 기존의 권력에 의한“행정권 남용 내지는 행정권의 확대” 역시 민주주의의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진단합니다. 사실 이런 측면에서 민주주의는 기만적인 요소를 갖고 있으며, 민주주의가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마음을 일부러 비틀려고 작정한 독재자가 지배하는 (사실상의) 전체주의 사회”를 근본적으로 제거하기 위한 수단이 필요해 보입니다.

물론 이 시점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과연 이 시대에 쿠데타의 위협과 전체주의에 빠질 가능성이 있겠느냐는 점이겠죠. 사실 런시먼이 진단하는 쿠데타와 관련해 그가 민주주의에 대한 위험요소로 보는 것이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쿠데타”입니다. 뭐 이 점은 보는 관점에 따라 허무맹랑하다고 볼 수 있겠으나 여기서 중요한 부분응 민주주의가 오랜 시간에 걸쳐 고사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한 취지입니다. 다시 앞의 질문으로 돌아가보면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겠느냐에 대한 가능성은 부분적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과연 보다 성숙한 민주 사회에서 과연 군부 쿠데타가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본질적인 문제겠죠. 즉, 이집트와 터키와 같은 국가들 - 민주주의가 성숙하지 않고 정치 체제상 권력 분산의 제도적 근거가 미약한 - 에게서는 그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순 없을 것입니다. 다만, 저자도 동의하듯이, 미국과 같은 국가가 군부 쿠데타에 이르기는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이 점은 미국이 군산복합체에 영향력이 전무하다고 볼 수 없다는 측면에서 꽤 비현실적으로 다가오기도 하는데요. 이것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고안하고 제도적으로 200년간 지속되어 온 민주주의에 대한 제도적 견고함과 시민의 인식이 뿌리 내렸기 때문일 겁니다.

그렇다면 다음은 우리에게 왜 민주주의가 필요한가 라는 질문에 답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고대 그리스에 시작된 민주주의는 플라톤이 그렇게 혐오해 마지 않았지만 권력 분산을 효과적으로 이행할 수 있는 정치 체제가 발견되지 못했거나 그 적절한 대안이 없기 때문일겁니다. 이에 대해 런시먼은 이 글 4장에서 “실용주의적 독재가 대안이 될 수 있는가”에서 이에 대한 작은 실마리를 찾고 있습니다. “중국 국민은 인도 국민보다 절대적 빈곤과 그 결과 (영양실조, 문맹, 조기 사망) 때문에 고통받을 가능성은 적지만, 무책임한 국가 공무원의 손에 희생당할 확률은 더 높다.”고 비유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즉, 원칙적으로 꽤 실용적이고 현실을 벗어나지 않는 독재 정치라고 하더라도 소수의 손에 어떠한 합법적 장치 없이 이행되는 정치 권력이 공공선이라든지 도덕적 원칙을 제대로 지킬 수 있겠는가에 대한 회의가 먼저 수반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물론 런시먼 역시 “개인적 평안함이라든지, 부의 안락함” 등을 무조건 경멸해서는 안된다고 밝히고 있듯이 여기에는 양자 사이에 균형감각이 필요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또한, 현재의 ‘공격적이고 만연된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시대’에서 도리어 개인의 경제적 이익 추구나 그에 따른 안락함의 인정 등이 공공선의 측면이라든지 전통적 도덕주의적 환원을 비교적 등한시하는 결과를 낳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제레미 벤담의 ‘판옵티콘’과 같은 잃어버린 것에 대한 획일적 강조를 기계적으로 요청하기 보다는 존 듀이가 일전에 언급한대로. “시민들이 스스로 관심을 갖고 재교육에 이르는 그 과정”이 자발적으로 필요한 것이 여기서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대 정치 및 현대의 위협은 크게 기후 문제와 같은 민주주의가 해결하기 힘든 난제와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미국의 트럼프의 정치 일선 등장은 참으로 복잡한 환경을 조성하게 되었는데요. 그가 파리 기후 협약을 탈퇴하고 소위 미국 우선주의로 스스로의 독트린을 만들어 낸 것은 사실 찰스 틸리가 말한 “예측할 수 없는 정치 지도자”의 전형이라고 할만합니다. 도널드 트럼프의 탄생이 현대 민주 정치의 종말이라는 평가를 차치하더라도 트럼프의 스스로에 대한 나르시즘과 기존의 체제와 제도를 불신하는 태도는 그것 자체로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일종의 신념 체계로 작동하여 핵무기 사용과 같은 극단적인 단계에 이르러 과거 케네디와 흐루스초프와 같은 한발 물러섬을 과연 단순히 패배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을지는 매우 불확실합니다. 이러한 도널드 트럼프의 여정을 지켜봤을 때, 런시먼이 다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은 ‘포퓰리즘’의 문제는 민주주의의 정치의 사활적인 역설이라 할 수 있을겁니다. 단순히 기존의 엘리트 지배 체제에 대한 불신과 경멸만 갖고는 포퓰리즘적 지도자의 카리스마에만 의존하는 것은 꽤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동안 왜곡되어 인식된 민주적 제도 하에 숨겨진 엘리트들의 의사 결정 과정만을 놓고 이것을 타도의 대상으로만 삼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도 지나치면 과두제에 이르게 만드는 엘리트 지배 체제에 대한 비판을 그동안 꾸준히 해왔습니다만, 여기에도 다음과 같은 평가가 이어지는데요. “고학력자들을 포함해서 교육받은 사람들로 다른 사람들 만큼 자주 도덕적 정치적 사고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점에 의문의 여지가 없다.”는 것은 그가 무조건적으로 고학력에 대한 맹신과 더 나아가 엘리트 지배 체제를 쉽게 용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 평범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루즈벨트의 내각이 당시 정치경제적 위기를 극복한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처럼 극도의 불안과 경멸만을 지닌채 어떠한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는 포퓰리즘 정치에 대한 본질을 우리가 결코 경시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카데와 같은 입장으로 런시먼 역시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고 보고 있습니다만 원칙적인 측면에서 이를 과도하게 해석하는 일부 학자들과 인사들이 문제일 것입니다.

발전된 기술과 지식인에 의한 통치 혹은 기술 관료 집단의 지배 체제라고 볼 수 있는 소위 테크노크라시가 민주주의에 대한 대안이 되지 못하는 점을 밝힌 런시먼의 의도는 매우 명확합니다. 그가 본질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주의자이자 현실주의자이긴 합니다만 오늘날 우리의 민주주의가 어떠한 식으로 귀결될 것인가에 대한 본질적 질문은 결국 지식인들이나 정치인들에 달린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책임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각계 각층의 이익이 충돌하고 서로에 대한 불협화음과 경쟁, 갈등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혼란한 상태를 만드는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큰 장점은 “특유의 정치적 포용력과 다원주의 정치를 가능케 하는 원동력”에 있습니다. 약간의 논외지만, 영국의 어느 언론에서 내일 있을 우리 선거에 대해, “주요 민주주의 국가중 코로나 사태에 가장 먼저 치러지는 선거”라고 하는 점은 꽤 마음이 설레기도 했습니다. 실질적으로 30년이 조금 넘은 우리 민주주의 정치가 주요한 민주주의 국가들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은 우리가 이집트나 중국, 가나, 인도와는 확연히 다른 점이라 할 수 있겠죠. 쓰다보니 이번에도 꽤 장황한 글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만, 런시먼의 이 책은 현재 우리가 직면한 민주주의의 위협과 앞으로 미래의 민주주의와 더 나아가 우리가 겪게 될 정치 체제에 대한 여러 가능성 등을 꽤 합리적인 근거로 잘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더불어 그의 말대로 “다른 사람의 폭력에 의해 희생당하지 않도록 국가가 보호한다”는 논법이 옳다면 이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 우리의 민주제도라도 생각됩니다. 법과 제도로서의 국가와 다양성을 포용하고 권력의 분산을 효과적으로 이행하는 민주주의는 어찌됐든 매우 중요한 가치임에는 분명합니다. 반대로 민주주의를 불신하는 ‘질서와 통제를 우선하는 이들’에게도 그 필요성은 마찬가지라고 여겨집니다.


- 1. 본문에 핵 종말의 네기사 the four horsemen of the nuclear apocalypse 에 헨리 키신저, 조지 슐츠, 윌리엄 페리, 샘 넌 이 포함되어 있는데 개인적으로 키신저가 저기에 들어가 있다는 게 충격이었습니다. 그리고 four horseme은 성경 요한게시록에서 인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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