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민주주의 가이드 - 대표제를 통해 알아보는 민주주의의 본질
하야카와 마코토 지음, 김찬현 옮김 / 이김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본 요코하마 출신의 정치학자인 하야카와 마코토는 도쿄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동 대학의 법학정치학 대학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현재는 일본 도쿄에 소재한 사립대학인 릿쇼 대학의 법학부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일본 특유의 정치 체제라고 할 수 있는 대표제 민주주의와 현대 정치 이론 및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연구로도 유명한 학자입니다. 좀 더 그에 관해 검색을 해보니 특이하게도 선거 개표 방송에 패널로 출연하기도 하고, 일반 토론 프로에도 참여한 이력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국적을 막론하고 다수의 정치학자들은 현실정치에 관심이 많기도 하는데 어쩌면 그 점은 당연한 부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은 원제 ˝代表制という思想˝로 지난 2014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최근인 2020년 6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책 제목이 지칭하는 이 ‘대표 민주주의‘에 대한 정확한 개념 정리가 필요해 보입니다. 불행하게도 저자는 이 대표 민주주의에 대해 ‘이렇다‘ 정도의 개념 규명을 해 놓지는 않았는데요. 어느 정도 독자들이 이해할 만한 수준의 정의는 ‘현재 일본의 정치 제도라 할 수 있는 의원내각제에 기반한 대의제 민주주의‘를 뜻하는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저자가 한국어판 서문에서 우리나라의 직접 선거의 대통령제 역시 일종의 대표 민주주의 범주 안에서 해석하는 것으로 보아 아주 크게는 일반적인 대의 민주주의 제도를 아우르는 말로도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본문은 총 6장의 주제별로 구성되어 있는데, 서장과 총 4장의 주제를 뒷받침하는 논증과 마지막 결론의 형식상 구조로 글 전체는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1장과 2장은 현재 일본의 의원내각제에 대한 비판적 분석과 최근에 논의되고 있는 일본 총리를 직접 일본 국민이 투표로 뽑는 ‘수상공전제‘에 대한 분석을 담고 있으며, 3장은 한나 피트킨의 대표제 이론이 집약된 ‘대표의 개념‘과 그녀의 대표 사상인 권위부여형 권력제에 대한 실재와 분석을, 4장은 이러한 대표제에 대한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고 보는 카를 슈미트와 조지프 슘페터의 몇가지 정치 이론을 살펴보고 마지막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저자는 일단 ˝일본에서 총리대신으로 선출될 수 있는 인물은 국회의원으로 한정되어 있다˝고 언급하면서 현재 이러한 당의 내부 계파를 아우르는 정치력을 겸비한 인물이 일본 총리가 되는 정치체제에 대해 해설을 하고 있는데요. 저자가 분석하기로는 이러한 내부 결집을 위한 (이를테면 자민당 내부가 되겠죠) 명민한 정치력을 발휘하는 인물이 근래까지 일본 수상의 자리를 차지했는데, 단순히 민주당 집권기를 제외하고 고이즈미 총리가 일본의 수좌가 되면서 이러한 흐름은 일단 전환기를 맞이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즉, 고이즈미 총리의 등장은 우리 나라가 그동안 직선제로 대통령을 뽑고 있는 것과 유사한 지도자형(혹은 카리스마) 권력의 등장으로 여기고 있는 듯 합니다. 이 글을 통해 저자가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는 이 대표 민주주의 체제에서 시민의 민의가 도대체 얼마만큼 이들 엘리트 정치인들에게 반영되고 반대로 이 정치인들이 얼마나 시민의 의지를 체현할 수 있는가에 대해 대표제 전반의 작동 원리와 법칙에 대해 살펴보고 명확히 그 의미와 한계에 대해서도 분석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민주 정치에서 리더는 평등한 국민을 통해서 탄생하지만 국민을 지도한다는 모순적인 입장에 처할 것을 요구 받는다˝는 1장의 분석에서 현재 일본의 의회민주주의가 다수의 시민들에 의해 불신을 받고 있는데, 이러한 인식속에서 최근의 ‘수상공선제‘와 같은 움직임에 대해 1장 내내 살펴보고 있는데요. 이 글을 읽으면서 문득 들었던 생각은 일본 정치는 변화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고, 고이즈미 준이치로 정권하에서 일종의 낙하산 선발과 유사한 정권의 나팔수들이 때로는 지역 사회에 일정 부분 기여하는 등의 간혹 민의의 수발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을 낙하산 제도의 긍정적인 부분으로 해석하는 것은 다소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더욱이 사실상의 직접 선거로 볼 수 있는 ‘수상공선제‘에 대해 포퓰리즘적 인식을 저자가 보이고 있는 것은 우려할 만한 수준이라고 여겨졌는데요. 이 글의 4장에서 아테네의 민회를 비롯한 직접 민주주의에 대해 분석을 하면서 이 아테네 시기의 직접민주주의가 민의와 가장 근접했던 부분인 ˝누구나 마땅히 대표가 될 수 있다˝는 당위는 그것이 현재 대의 민주주의하에서 굳이 조지프 슘페터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현실 정치가 그렇지 못한 상황은 일견 대의제의 한계라 할 수 있을겁니다. 바로 이러한 인식을 보이고 있는 저자가 ‘수상공선제‘를 단순하게 포퓰리즘 논법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은 아쉬울 따름인데요. 찰스 틸리도 모든 시민이 평등하게 공직 선거에 출마할 자격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을 고려해 본다면 민의와 관련된 이 피선거권과 이를 간접적으로 뒷받침하는 정치 권력을 위한 공개 선거는 대표제 민주주의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라 생각됩니다.

물론, 저자의 우려대로 ˝공선제에서 리더에게 공치를 전부 맡겨버리는 것˝은 위험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시민들의 단순한 정치적 효능감을 차치하더라도 시민의 위임을 받는 정치 권력을 직접 선출하는 등의 제도가 뒷받침되지 않고 말로만 떠드는 것은 그만큼 공허한 일이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저자가 앞서 분석한대로 일본의 의원내각제 하에서 총리가 선출되는 과정이 시민의 민의를 보다 더 반영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자가 아니라 당의 내부 정치와 계파간의 정치력이 뛰어난 자를 일본 총리로 낙점하는 등의 현재의 일본의 민주제가 과연 요시다 독트린을 시초로 그 전통을 떠나 과연 어떤 식으로 개선을 해야될지는 과거 정치 이론의 직접 민주주의 맥락 안에서 찾기보다는 좀 더 일본인들의 의지가 반영되는 쪽으로 가야되지 않나 생각해 봤습니다. 이를테면 일본 의회가 ‘주민소환제‘와 같은 제도 등을 2장의 담론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를 ‘숙의‘하는 것도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일본 역시 이 ‘숙의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저자는 분석하고 있고, ˝현재 일본 의회 비판과 관련해서는 특히 고도상정기 이후 각 사회 집단에 대한 이익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된 것이 문제시 된다˝고 인정하는 부분 또한 시민들의 이익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것과 일맥 상통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저자는 이 숙의 민주주의와 관련해 기존의 하버마스의 입장을 긍정하면서도 오늘날 다양성의 시대에 종래의 대표 민주주의가 종종 이해집적형 민주주의라고 해석되는 수준에서 더욱 토론과 대화를 통한 이 숙의 민주주의가 필요한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직적 민주제 하에서 이러한 기능을 했던 ‘민회‘가 오늘날 실제적으로 현실화가 가능할 것인지에 대해 심도 높은 토론과 현실화 방안이 모색해야 된다고 여겨지는데요. 어차피 네트워크화가 상당히 진행된 오늘날의 네트워크 기술을 고려해 봤을 때, 전자의 고려가 아예 터무니없는 것은 아님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직접 민주주의와 대표제 민주주의를 면밀히 구분해 양자 사이의 장점 만을 도출해 내고자하는 것만으로는 오늘날의 민주적 정치 제도를 개선시켜 나가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끝으로, 저자 뿐만 아니라 최근의 정치학자들과 정치이론가들은 현대의 민주주의와 관련해 대표성을 떠나 실질적으로 엘리트 정치체제에 의한 ‘인민 주권‘의 파편화에 이르렀다고 보는 시각이 우위를 보이고 있습니다. 미국과 같은 경우는 더욱더 금권 정치로 매몰되고 있으며, 저자가 4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렇게 엘리트들과 기득권들이 교묘하게 외치는 주장과 인식이 마치 다수 시민들의 이익인양 왜곡˝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확실히 이 시점에서 조지프 슘페터가 역설적으로 돌려 말했던 바와 같이, ˝다수의 엘리트들이 과연 자신들의 계급 이익과 정치를 외면하고 과연 다수 시민의 이익을 위해 행돌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회의적인 의견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인식하에 더이상 현실 정치를 소수의 엘리트 정치인들과 기득권들에게 내맡기지 말고 마찬가지로 매우 지난하고 품이 많이 드는 일이지만 각자가 자신의 인생을 위해 스스로를 교육하고 건전한 시민들이 모여 확실한 연대를 구축하는 것이 앞으로 우리 정치를 위한 설득력 높은 해결책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본문 77페이지에 띄어쓰기가 잘못된 부분이 있었습니다. 제가 매번 쓰는 말이지만 정말 편집을 제대로 하지 않는 출판사는 대오각성을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글 서두에 저자는 민영화를 비롯한 신자유주의의 이행을 약간의 필연적인 시선으로 보고 있는데, 자유 보수 우파의 대변인이라고 여겨지는 프랜시스 후쿠야마 조차, 그의 저서에서 ˝다소 복지 지출에 힘들어 하고 있던 당시 서구 정부들에게 복지 지출을 대폭 감소시킬 수 있는 이 신자유주의 이론을 선택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다˝고 보는 해석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뭔가 신자유주의적 운명론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이는 다수의 이론가들은 이런 점에서 비판적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어보입니다.

-한국어판 서문을 마무리하면서 저자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교류가 정체된 상황에서 다시 양국의 교류가 활발해지기를 기원하며˝라고 쓰고 있는데요. 한일 양국이 단지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지금 정부 차원 뿐만 아니라 민간 차원의 교류조차 힘들어진 상황일까요. 에밀 뒤르켐의 말대로 어떤 문제에 대해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내는 것이 지식인의 책임감이라고 한다면, 이 부분의 인식 또한 그저 아쉬울 따름입니다.

-4장에서 카를 슈미트를 인용하면서 ˝나치에도 관여했다˝고 표현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루 빨리 한나 피트킨의 ˝대표의 개념˝이 번역되기를 일개 독자로서 간절한 바람을 가져봅니다.

공선형 리더는 현대 민주주의의 일반적인 상황에서 의회제보다 우위인 입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사회의 분단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숙의가 필요하다

직업 정치가는 정치 세계의 특수한 논리에 물들어 일반 시민이 지닌 보통의 감각을 잃어버리게 된다

유권자로부터 독립이 허용되었다는 것은 대표의 판단이 유권자 개인의 판단보다 적절하다고 여기는 셈이다

의지가 아니라 판단을 중시할 경우에도 대표제가 직접제에 비해 유리하다고 볼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본주의는 윤리적인가? - 우리 시대의 몇 가지 우스꽝스러움과 독재에 대한 고찰
앙드레 콩트 스퐁빌 지음, 이현웅 옮김 / 생각의나무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이 책의 저자인 앙드레 콩트-스퐁빌은 프랑스 내에서 일찍이 매스컴의 주목을 받은 대중 철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나 파리 1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수여 받기도 했는데요. 이 파리 1대학에서는 부교수로 재직하며 강의에 집중하다, 2003년에는 대학을 나와 현재까지 대중들을 상대로 열린 철학 강의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영국의 줄리언 바지니와 비슷한 입장에 있는 학자가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하는데요. 철학자들이 지식인의 그룹에서 갖는 특별한 지위를 고려해 봤을 때, 그가 강단을 떠나 대중들의 품안에서 철학을 강의하는 의미는 일반 학자가 상아탑 안에서 집필하고 강의하는 것 이상의 가치가 있지 않나 평가해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책의 서지 정보와 관련해서 저의 부족한 분석으로 대체하고자 합니다. 일단 콩트-스퐁빌의 이 책은 일종의 강연을 바탕으로 편저된 글로 볼 수 있는데요. 2004년에 판권이 승인되었고, 국문으로 번역된 책 표지에는 영문으로 ˝Is Capitalism Ethical?˝로 표기되어 있으나 이 문구가 원제라고 볼 수 있는 근거가 희박합니다. 정확히 아시는 분이 계시면 댓글로 관련 정보를 부탁드려 봅니다. 국내에는 2010년에 번역 출판 되었고, 현재는 절판된 상태입니다.

우선, 아주 간단히 이 책의 주제를 뽑아 본다면, ˝자본주의는 윤리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능한 우리가 윤리적이 되어야 한다˝는 짦은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이 윤리는 시장에서 사고 팔수 없다는 측면에서 인간이 마땅히 윤리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책의 외형적인 구성면에서는 이 책의 주요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사실상 본문인 1부와 일종의 독자들과의 대담을 수록하고 있는 2부, 끝으로 몇몇 반론에 대한 대답을 요약해 기록한 결론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책 제목과 마찬가지로 본래 가장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1부에서는 오늘날 자본주의에 대한 문제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측면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분석과 그 한계 그리고 윤리라는 가치의 쇠퇴 문제로 야기된 사회적 퇴행에 대해 정치와 경제 전반에서 이를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차원의 경계와 같은 자본주의의 윤리 문제를 빗대어 해석하는 제2장은 독자들이 집중해서 읽어야 하는 부분으로 여겨졌습니다.

18세기 이후, 경제가 인간이 이룩한 국가와 사회에 등장하게 됨으로써, 자유와 더불어 개인주의는 명백히 자본주의와 호응되었습니다. 이 양자는 서로를 떼고 해석할 수 없을정도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요. 후에 4장에서 다루고 있는 이타심과 연대와 관련해, 저자의 분석대로 이 ‘이타심‘이 ‘개인들의 이기심 시대‘ 다소 시대착오적인 단어로 취급되면서 개인주의의 범람에 따른 이타심의 쇠퇴는 사회학적인 측면에서는 그 인과를 부정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기본적으로 ˝어떤 행위가 윤리적일 수 있는 조건은 우리가 각자 아는 것처럼 그 행위가 이해관계를 떠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저자는 진단하고, 현대의 인간들의 사회적 관계가 이 이해관계에 맞물려 있으므로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 자본주의 시스템의 윤리적 이탈을 대신해 우리가 더 윤리적이 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은 충분히 그 근거를 갖추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또한, 3장에서 저자는 ˝우리 자신은 충분히 윤리적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현재의 자본주의를 거의 봉건제 국가와 다름없다고 여기는 저자의 논법에서는 이런 인간의 윤리 회복은 시민이 법에 대해 갖는 의미와 동일하게 저에게는 꽤 중요한 맥락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우리가 시장과 경제에 갖고 있는 여러 통념들이 자본주의의 모순과 만나서 사실상 이성으로 되돌리기에도 어렵게 견고화되고 있습니다. 어떤 상식 조차도 그것이 규명되기까지는 충분히 비판과 분석이 있어 왔다고 말할 수 있겠는데요. 마찬가지로 저자가 강조하는대로 이 자본주의 시스템 역시 결코 그 체계가 완벽하지 않다는 점과 많은 모순을 안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아야 되지만, 과거 공산주의와의 대결에서 1980년대의 서구 유럽이 자본주의 하에서 생생히 아름답게 보였다는 의미와 더불어 소련의 체제를 역사의 뒤안길로 보냈다는 결과론에 기대어 ‘사실상의 자본주의의 승리‘라는 인식이 현재의 시스템에 어떤 면죄부를 주지 않았을까 하는 인상도 받게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4장에서 구별해 내고자 하는 ‘자유주의자와 극단적 자유주의자‘에 대한 구별이 왜 이렇게 필요한지는 과거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또한, 저자는 파스칼을 곳곳에서 많이 인용하고 있는데요. ˝우리 시대의 몇 가지 우스꽝스러움과 독재에 대한 고찰˝이라는 부제에서도 이를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즉, 4장에서는 이에 대한 특별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파스칼은 ˝나는 강하다. 따라서 사람들은 나를 신뢰해야 한다˝고 말하는 왕, 혹은 ˝내 말이 옳다. 왜냐하면 나는 고용주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고용주도 우습다는 의견을 피력합니다. 흔히 무도한 독재자가 다른 사람의 의견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의지대로 권력을 휘두르면서도 한편으로는, 국민의 사랑과 신뢰를 바라기도 한다는 점은 이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광경이 아닌가 파스칼을 통해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현재의 자본주의에 빗대어 생각해볼 문제이고, 자본주의가 많은 사람들의 신뢰를 잃었던 이면에는 그만큼 자본주의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자 역시 탈자본주의화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저역시 그 점은 마찬가지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저자의 분석대로 ‘연대‘가 이타심을 소기의 목적에 맞게 재조정하는 과정이라면 우리는 정치와 사회 등 여러 측면에서 연대에 나서야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타심을 철지난 계몽주의 정도로 퇴락시켜버린 어떤 음모론에 제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의 사회에서 자본주의화가 노골적으로 진행시켜 온 그 ‘합리적 이익‘이라는 맹신과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믿음은 이제 그만 역사의 뒤안길로 보낼 필요가 있다는 점은 새삼 강조하고 싶습니다.

끝으로, 저자가 4장에서 강조했던, ˝월스트리트가 주권을 갖는 일은 베제되어야 한다˝는 짧은 문장에 우리가 이를 사소한 것으로 치부해서는 안됩니다. 애초에 많은 정치학자들이 신자유주의자들의 폭거에 반해 시장에서 다시 정치적인 가치를 되돌려 놓아야 한다고 했던 것과 이는 그 궤가 일맥상통하며, 저자 역시 ˝시장이 본래의 자리를 벗어나 왜곡될 경우에는 법의 제어를 마땅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은 앞선 논의의 중요한 근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당위성의 문제이며, 자본주의가 윤리적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하고 그 시스템 안에 있는 자본가와 노동자들을 비롯한 구성원들이 거창하게 공리주의적 기조를 손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윤리적인 (이해와 거리가 먼) 문제에 집중해야 된다고 여겨집니다. 이러한 시도가 이어진다면 크게는 전반적인 세계화의 문제와 작게는 인간의 파편화에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4장에서는 지난번에 서평을 썼던 낸시 매클린의 ˝벼랑끝에 선 민주주의˝에서 서술된 미국 엘리트들의 ˝칠레 피노체트 프로젝트˝에 대한 간략한 역사적 서술이 나오고 있습니다. 냉전이라는 특수한 시대를 감안하더라도 자신들의 이익과 관련해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미국 정치권의 인식은 이처럼 세계 곳곳에 불행한 역사를 초래했습니다.

우리는 비록 민주적 방식으로 태어난 권력이라 할지라도 이 권력에 저항할 수 있고, 심지어 그렇게 할 필요가 있다

개인주의는 명백히 자본주의와 호응한다

주권을 가진 것이 어떤 형태를 띠든지 간에, 그 주권을 가진것으로 하여금 모든 권리를 갖는 것을 금지하는 것은 양심이다

과학주의는 과학이 모든 것을 충족 시킬 수 있기를 희망하는 특히 과학이 윤리를 대체하기를 희망하는 이데올로기이며, 그 자체는 과학적이지 않다

민주주의에서 결정권을 갖는 것은 충분한 지식을 갖든 갖지 않든 다수들이다

순수주의는 야만만큼 위험하고, 어떤 경우에는 야만보다 위험하다

스탈린은 인간의 행복을 위한다는 이유로 수백만의 사람들을 죽음의 수용소로 보냈다

경제, 사회, 정치적으로는 연대가 더 필요하고, 효과적이고, 시급하게 필요한 과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털 엔진 견인 도시 연대기 1
필립 리브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국 브라이튼에서 태어난 필립 리브는 오늘날 뛰어난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 및 아동 소설 작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앵글리아 러스킨 대학에서 일러스트레이터를 공부하고 이후 브라이튼 대학의 학생 연합 잡지에 만화를 주제로 여러가지 작품들을 그리면서 만화와 일러스트 작업 등에 주목하게 됩니다. 몇몇 책에 만화를 제공하면서 명성을 얻기도 하는데요. 특히, 그런 자신의 진로에 큰 전환점을 가져다 준 작품이 있었으니 바로 지금 소개하는 견인 도시 연대기의 첫번째인 ‘모털 엔진 Mortal Engines 입니다. 따라서, 이 책은 지난 2001년 위의 동일한 제목으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8년 이전에 초도 번역이 이뤄진 것 같은데, 제 능력 부족으로 정확한 서지 정보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읽은 판본은 피터 잭슨의 영화가 개봉한 즈음에 나온 개정판으로 2018년 판본입니다.

앞서, 설명해 드린 바와 같이 이 모털 엔진이라는 작품은 저자인 필립 리브의 ‘견인 도시 연대기‘의 첫번째 장을 장식하는 글입니다. 일단,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도 주문을 하긴 했습니다만, 과연 모털 엔진 만큼의 이야깃거리를 줄 수 있을지 이 시점에서는 약간 걱정이 들기도 합니다. 그만큼 이 모털 엔진이라는 작품이 대단하다고 봐야 할 것 같은데요. 스토리의 구성상 마지막에 드러나는 반전과 꽤 치밀한 스토리 라인의 개연성은 단순한 SF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의미심장했습니다. 사실 이런 류의 디스토피아적인 소설은 작가들에 따라 다소 틀에 박힌 설정과 구성상의 진행이 많이 시도 되었는데요. 그와는 반대로 저자인 필립 리브가 글을 쓰기에 앞서 꽤 많은 시간을 공들여 정치와 사회학의 여러 모티브들을 소설에 녹여낸 점은 칭찬을 해주고 싶습니다.

대략 3000년 전에 있었던 60분 전쟁으로 고대인들이라 불리우는 과거 그 시기의 과학 문명이 절단나고 나서, (아마도 지독한 환경 훼손 때문인지) 이후의 인류가 땅과 대지가 아니라 도시 밖을 나가지 않음으로써, 이 소설의 큰 이데올로기인 ‘도시진화론‘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약육강식의 야만적인 이념으로 이들 주류에 맞서 ‘반견인 도시 연맹‘이라는 땅과 대지에 정착한 반대의 세력이 등장하게 됩니다. 단순히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으로 저자는 양자의 대결을 그리지 않고 맹목적이지는 않지만 거의 도시들의 야만화에 따른 생존의 문제로 이를 그리고 있습니다. 자원과 식량은 나날이 부족해지고, 특히 견인 도시 세력이라 불리우는 움직이는 도시들은 약한 마을이나 도시를 약탈해 이를 근근히 이겨내는 식으로 버텨내게 됩니다. 여기에 작중 (더 큰 악에게 이용되어 반항하지 못하는) 악으로 나오는 밸런타인의 딸인 캐서린이 왜 다른 도시들과 거래나 대화를 통해 이러한 위기를 벗어나려고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밸런타인은 ˝도시진화론은 그런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일변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이 소설에는 암울한 우리의 미래도 그려내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에서 말하는 삼권분립과 유사한 일종의 지배체제가 런던에서 보이는데요. 엔지니어 길드-역사학자 길드-상인 길드 간의 삼권의 체제가 첨예화된 계급사회로 이를 떠받들고, 약탈이든 뭐든 간에 쟁취하고 강탈한 달콤한 꿀은 ‘하이 런던‘의 계층만이 온전히 누릴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계급간의 이동은 출신 성분으로 인해 매우 어려우며 이런 구조속에 기술 관료 지배체와 같은 ‘테크노크라트‘의 상명하달의 독재로 도시 전체가 굴러가고 있습니다. 흡사 이것은 우리가 가장 우려하는 ‘과두체제‘와 너무나 닮아있지 않습니까. 더욱이 과거 많은 지식인들이 도덕주의가 일방적으로 결여된 과학 문명의 귀결점에 대해 예측한 바와 같이, 여기에서도 이 길드 지배 체제가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과거 60분 전쟁 이후, 전 인류가 절멸에 이르게 되었고, 이후 살아남은 생존자들과 그 후손들은 아무래도 권력의 소유물이 되어 도시 전체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게 되는 ‘구조적인 합리화‘의 희생양이 됩니다. 사실 이런식의 견고한 디스토피아적인 소설은 찾아보기 힘들텐데요. 그런점에서 작가의 사전 작업이 어떠했는지 어느 정도 짐작할 만했습니다. 그리고 이 테크노크라트가 위력을 발휘하는 연유에는 종래의 기독교 소멸이 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었는데요. 소설 속에는 이미 업적을 남긴 사람을 신으로 받들고 또한 이미 다신교의 분위기였습니다. 이들 각 신전은 이미 정치 권력에 예속되어 있는 상황이었고, 전체적으로는 종교가 이들 계급 정치에 자정 기능을 하지 못하는 실정이었습니다.

더욱이, 두 주인공인 톰과 헤스터의 성장에 이르는 과정은 특히 주목할 만했는데요. 여기에 캐서린까지 더하면 세계의 숨겨진 진실을 찾아가는 이 어린 아이들의 발걸음과 톰과 같이 사뭇 갈등하면서도 자신이 해야할 일을 명백히 인식하고 깨닫게 되는 길 또한 관심을 갖고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주인공 톰은 본디 내면의 나약함과 주저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평범한 소년이었으나, 행로중에 여러 인물들과 흔치 않은 경험을 하면서 자신의 길을 찾아 가는 훌륭한 인물로 성장하게 됩니다. 다만, 톰의 부모님에 대한 사건이 뭔가 복선으로 나타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시장에 의해 약간 언급만 되는 것으로 그치고 마는데요. 다음 권이나 다다음 권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끝으로, 추천의 글을 쓴 홍인기 교수는 ˝심지어 신자유주의의 격류에 휩쓸려 파편화되어 가는 삶을 힘없이 응시하고 있는 한국의 소설가들에게도 들이밀고 싶다˝고 추천사 마지막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마르셀 프루스트가 ˝인간은 마땅히 대지위에 발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는 말을 스쳐지나갈 뿐이라고 생각해도 이것의 의미는 명확합니다. 어떤이들이 그렇게 부르짖는 자유 역시 오롯한 인간의 결정으로 남겨놓아야겠죠. 보이지 않는 손이라든지 합리적인 계산이라든지 정치 없는 시장이라든지 이런것들은 도리어 인간을 파편화에 던져버리고 말았으니, 적잖은 경제엘리트들이 자신들의 손으로 정치까지 좌지우지해 사실상의 민주주의를 파괴하려고 하는 시도에 소설이든 뭐든 나서야 하지 않을까요.


-글 본문인 121페이지에 주인공 톰을 통해 약간 인종차별적인 문장이 보였는데 번역상 오류인지 아니면 제가 문맥상 잘못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약간 아쉬운 부분이라 느껴졌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좌파들의 반항 - 마르크스에서 마이클 무어에 이르는 비판적 사고
로버트 미지크 지음, 서경홍 옮김 / 들녘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로버트 미지크는 언론인이자 저술가 및 정치이론가로 자신의 모국인 오스트리아를 비롯해 국경을 넘어 독일까지 명성이 알려진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 점은 지난날 독일 특파원으로서의 경력이 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지금에서는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정당 정치간의 이념적 차이가 극명하지만, 과거에는 오스트리아 정당과 독일 정당간에 많은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타게스차이퉁과 프로필과 팔터에 고정적으로 칼럼을 기고하고 있으며, 저술에 있어서는 글 형태상 보편적인 논저를 쓰기보다는 르포르타주에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꽤 보기 드문 사상가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제게는 어쩌다 보니 그의 글 서평이 세번째이기도 합니다만, 미지크의 글을 평가해 본다면 다소 에둘러 표현하는 법이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특히, 이 책은 독일 공영방송 ZDF의 토론 프로그램 ‘철학 사중주‘에서 꼭 일독해야 할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이 책의 원제는 ˝Genial Dagegen, Kritisches Denken Von Marx Bis Micheal˝로서, 지난 2005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지난 2010년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약간 예상을 하기도 했지만, 이 책 역시 현재 절판된 상황입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먼저 원서의 제목과 달리 번역된 책의 제목을 이 정도로 밖에 쓰지 못한 출판사에 유감을 먼저 밝히고 싶습니다. ‘좌파들의 반항‘이라는 제목이 아마도 이 책의 판매고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짐작되는데요. 뿐만 아니라 뉘앙스 역시 썩 좋지 못해서, 오해를 살 만한 소지가 충분히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제목 평가는 이 정도에서 끝내고, 미지크의 이 책은 간단히 설명하면 일종의 문화비평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기본적인 바탕은 21세기의 대량 생산의 포드주의와는 달리 변형되고 진화한 ‘자본주의 시스템‘과 이런 현실에 마찬가지로 변화를 맞고 있는 세계 좌파들에 대한 보편적인 분석서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책의 내용이 가볍거나 단순한 시대사회적 현상만을 수박 겉핥기 식으로 단순 나열에 그치지 않고, ‘시스템과 그 구성원들‘에 대한 꽤 세밀한 르포르타주인 것은 분명합니다.

포스트 포드주의적인 상황으로 오늘날 21세기의 자본주의는 꽤 놀라울 만한 모습으로 진화를 거듭했습니다. 이와 같은 면모에는 ˝인간이 생산한 물질 세계는 인간을 지배할 뿐 아니라 인간을 적대하고, 인간을 자신의 형상에 따라 형성하며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탈인간화 된 존재‘를 창조한다˝고 미지크는 분석합니다. 이것은 단적으로 자본주의가 왜 개인주의를 신봉하게 되는지에 대한 일종의 사념적 근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찬가지로 글 서두에서 ˝자본주의는 얽히고설킨 개인들을 옭아매는 구속의 토대위에서 개인주의를 생산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기도 합니다. 조금 관점이 벗어나는 얘기기도 하지만, 합리적인 이성이라는 미명하에 자유 시장 경제와 소극적 정부를 지지하는 자유시장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의 강력한 근거가 되는 이 ‘개인주의‘가 자본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개인주의가 사회적으로 성장했던 부분에는 인간이 어느정도 전통적인 권력에서 해방되고, 좀 더 면밀한 자유를 되찾게 되었다는 점은 확실히 인정할 만합니다. 이것과 더불어 미지크가 글의 후반에서 피력하는 ˝참된 삶, 진실한 느낌, 내적인 풍요에 대한 욕망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숨어 있지만 그 욕망은 인간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그것도 바로 현존하는 사회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간과하면 안 된다˝는 점도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자본주의적 산물의 열거를 통해 이것들의 역설을 찾아보려고 강력하게 애쓸 필요가 없다는 취지의 글의 목적이 저자인 미지크가 밝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렇게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적극적으로 내면화 되어 더할나위 없이 진행된 자본주의의 이행에 있어 그것과 동시에 현재 세계의 좌파들도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저는 그동안의 여러 서평을 통해 샹탈 무페와 지그문트 바우만의 입을 통해 ‘좌파의 지리멸렬‘에 대해 수없이 언급해 오기도 했는데요. 복잡한 사회 구조속에 자본주의가 강력하게 강요하는 규범들과 계급화에 대해 기존의 좌파들이 대중들과 시민들에게 괴리되어 있었고, 이들이 교조주의적이 되고 사변적으로만 틀 안에 갇혀 있었던 점이 그 반대에 있는 ‘배타적인 현실의 본류들(이를테면 시장 자유주의자들이나 자유 시장을 부르짖으며 자신의 이득을 찾으려고 하는 보수 정치인들)‘을 마땅히 견제해야만 하는 책무를 다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물론 엄혹한 신자유주의화에 대한 시민들 개개인의 노력도 중요하겠지만 이 문제가 시민들 손에 쥐어지기 전에는 바로 많은 지식인들과 학자들의 비판과 설명이 있어야 했지만, 마찬가지로 지식인들의 자본주의적 영합도 충분히 소모적인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다만,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오늘날 밝혀지고 있는 좌파의 아이콘들은 정치적인 권력하에서 이를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탈취하기 보다는 대중문화속에서 혹은 학술 강연과 시민 강의 등을 통해 시민들의 삶의 변곡점들을 살펴보고 이들이 더 나은 삶과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는 등의 노력으로 변화되어 왔다는 점을 미지크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마이클 무어 현상과 ‘슈퍼스타‘ 슬라보예 지젝의 예시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어는 하층 계급을 위로하고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 이 시스템 전체를 공격하기 보다는 거대 기업의 소유자나 권력의 선두 주자 등을 희화화와 모욕 주기 등으로 문화적 아이콘이 되었고, 세계화 된 자본주의 문화에 전반적인 불편한 심기를 보이면서 비판하는 지젝의 경우는 그가 많은 학계의 구성원들에게 때로는 비웃음을 사기도 하지만 ˝냉소가이자 광적이고 정치적으로 오류를 지닌 그가 한편으로는 위대한 도덕주의자˝라고 평가하는 점은 미지크가 보이는 곳곳에 드러나는 수사의 날것에 일부 독자들은 얼굴을 찌푸릴 수도 있지만, 그가 학자와 정치이론가 및 언론인의 여러 경계에 발을 걸치고 있는 인물임을 감안한다면 크게 화가 나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지젝에 대한 약간의 희화화에 대해 저역시 지젝을 사상적으로 크게 지지하고 있는 입장에서 마냥 유쾌하지는 않았습니다. 미지크가 지젝을 뭔가 팝스타처럼 묘사하고 있긴 합니다만, 그에 대한 진정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젝은 작고한 바우만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적인 소비 지상주의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으며, 자본주의가 전통주의적인 도덕적 원칙을 휴지통에 던져 버린 것 또한, 강하게 비판한 바가 있습니다. 우리가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이 소비 지상주의의 근거가 되는 개인의 합리성 원칙의 괴상한 초월은 몇몇 신자유주의 이론가들에 의해 자아 표현과 개인의 만족이라는 이유를 들어 자본주의의 아주 낙관적인 현상이라고 간혹 설명해 내고 있습니다만, 이것의 결과가 지난 40여년간 어떠했는지는 모두가 충분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만연한 소비 지상주의에 대한 건설적 대안이라는 것이 그저 좀 더 덜 소비하는 것밖에 없는 시점에서 이것을 대놓고 비판하고 이를 사상적 기반으로 만들어 나간다는 것은 꽤 노곤한 작업임은 분명합니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대로 이렇게 변화되고 변질된 우리의 자본주의는 ˝영원히 모순과 결부되어 있고, 지배를 원하며, 후기 자본주의적 조건 하에서 타도라는 문제는 시스템 자체의 기능을 개선하기 위한 타도라는 데 있다˝고 카챠 디펜바흐의 입을 빌어 미지크는 좀 더 본질적으로 언급합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좌파들의 변화가 과연 일시적일 것인가, 아니면 종래의 과격한 사회 변혁을 부르짖을 것인가에 대해 우리가 지금으로선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지만, 뒤에 미지크가 팝 문화에 대해 설명하듯이, ˝비즈니스에 반하는 노래를 부름으로써 더 좋은 비즈니스를 할 수 있다˝는 다소의 역설은 시사하는 바가 분명합니다. 이를 통해 더 많은 돈을 벌면서 이 점을 자아실현과 연계하는 이 자본주의의 구조적 변화가 ˝어떤 점에서는 이 구조들이 지닌 좀 더 많은 인간성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정신적 삶에 더 깊이 파고든다˝는 점은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인간이 인정받으려고 하는 욕구,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는 욕망, 재화로 측정되는 자신의 소유물에 대한 값어치를 절대적으로 과신해 이를 자아 실현과 연계하는 보다 직접적인 자본주의의 내면화는 앞으로 이미 규명된 모순과 문제점을 대처하는 방식에 대해 좌파 뿐만 아니라 모든 시민들의 변화된 대응이 필요해지고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물론 네트워크 자본주의화가 거대 인터넷 기업들을 통해 진행되면서 이러한 변화 요구는 그 이전부터 요구되어 왔지만, 인터넷과 개인의 욕구 그리고 그 둘 사이를 연계하는 자본주의의 급격한 혼종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이에 대한 꽤 집요한 연구가 필시 있어야만 한다고 여겨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지크의 글의 후반부의 결말은 누구나 한번쯤은 꼭 일독해봐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이 책의 재간행이 있어야 할 텐데, 이 부분은 오로지 출판사의 몫으로 남겨두고 싶군요.


-글 중반부에 장 지글러와 체 게바라의 일화가 소개됩니다. 그가 1960년대에 2주간 체 게바라의 운전수를 했다는 것은 실로 흥미로운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현대의 자본주의가 차갑고 합리적이며 모든 관계를 사물화 한다면 인간 ‘그 자체‘는 따스함, 친근함, 친절함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순진하고 낭만적이며 일견 보수주의적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들은 시장영역에서 신자유주의적인 주체들에게 요구하는 바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 비추어볼 때, 새로운 반역도 자본주의를 넘어서거나 폐지하지는 못할 것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은 사람은 자신을 희생하고 자신을 교육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인간들 사이의 모든 교류를 노골적인 현금 지불로 환원시킬뿐더러 그 밖의 다른 인간적 유대들을 해체시키고, 모두를 하나의 작은 경제단위로 간주한다

인간이 생산한 물질세계는 인간을 지배할 뿐 아니라 인간을 적대하고, 인간을 자신의 형상에 따라 형성하여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탈인간화된 존재를 창조한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살면서 오래 버틸 수 없다는 것은 지난 시절의 포드주의로 대변되는 자본주의의 일면이기도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둑맞은 세계화 - 지구민주주의 선언
죠지 몬비오 지음, 황정아 옮김 / 창비 / 200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의 저자인 조지 조슈아 리처드 몬비오는 영국 출신의 칼럼니스트이자 환경문제와 정치활동과 관련된 글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옥스포드에서 동물학을 전공하고 난 이후, BBC의 라디오 프로그램 프로듀서를 거쳐 자연사에 대한 탐사 보도 전문 기자로 인도네시아, 브라질 그리도 동아프리카 등지에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현재에는 영국 가디언지에 고정 칼럼을 쓰고 있으며, 2004년 이후에는 정치 활동에도 적잖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외에도 생태학과 자연보호 및 세계화 정치에 대한 저작들을 꾸준하게 출판하고, 최근에는 ‘사로잡힌 국가 Captive State‘로 전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바가 있습니다. 그의 이 책은 원제, ˝The Age of Consent : A Manifesto for a New World Order˝로 지난 2003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3년 뒤인 2006 3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잠시 글을 더 진행하기에 앞서 한가지 번역에 대해 언급하고 싶은데요. 여기에는 역자가 번역한 외래어 가운데, ˝꼴롬비아, 써비스, 꾸바, 프롤레따리아, 스딸린, 엘리뜨, 뽀르뚜갈˝이라는 한글 표기가 등장합니다. 서평을 쓰기전에는 저자가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출신이어서 외래 고유 명사에 된소리 표기가 저런식으로 된 줄 알았는데, 이 책은 런던에서 출간되었고, 저자 역시 영국인이기 때문에 아마 영어로 출판되었을 것이라 추측해 봅니다. 그렇다면 역자가 예전인 1970년대에 ˝종속이론이나 재3세계 정치˝ 이론서에 등장했을 법한 외래어 표기를 저렇게 한 것에 대해 비판보다는 뭔가 이해가 되질 않네요. 그래서 역자의 한줄 답변이라도 듣고 싶은 심정입니다.

우선, 저자가 글 서두에서 밝히는 이 글의 기획 의도는 다른 여타의 글과는 달리 매우 명확한 관점으로 독자들에게 주지시키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은 ‘전지구적 민주주의화‘를 위해서, 저자는 총 네 가지의 제언을 하고 있는데요. 첫째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세계의회, 둘째 현재의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 부여된 권한을 제거한 민주화된 유엔 총회, 셋째 무역적자를 자동으로 소멸시키고 채무 축적을 예방하는 국제청산동맹, 넷째 부자 나라를 제약하고 가난한 나라를 해방시키는 공정무역기구 등이 그렇습니다. 아마도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은 과연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에 대해 의구심을 갖으리라 생각됩니다. 저자 역시, 앞선 해법들은 매우 도달하기 어려운 것이며, 다만 이것 이외에 건설적인 다른 대안이 도출될 수 있다면 언제든지 입장을 바꿀 수 있다고 첨언합니다. 사실, 2차대전 종전 이후 케인스의 용맹한 ‘다 같이 잘 살수 있는 경제 해법‘이 미국에 의해 거부됨으로써, 브레튼우즈 체제를 거쳐 현재에 이르는 소위 ‘자유 무역‘과 ‘각국의 최소한의 민주정치‘가 요구되는 국제 체제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개발 도상국에게도 천편일률적으로 적용하는 이 자유 무역 체제는 기존의 G7국가는 말할것도 없이 우리나라와 대만, 중국 역시 경제 발전 초기에는 국내 시장 보호와 산업 보조금을 비롯한 보호 무역 체제로 내수를 방어하고 수출에 올인하는 정책을 펼친바가 있습니다. 이 책의 6장에서 언급되고 있는 바와 같이, 제국주의 시기의 영국 역시 자국의 면화 사업을 보호하기 위해 네덜란드와 인도 및 벨기에 등의 관련 산업을 각종 수단을 동원해 고사시킨 경험이 있으며, 최근에, ˝방글라데시는 의류 판매 특권에 대해 해마다 미국에 3억 1,400만 달러를 지불해야 한다˝는 점은 개도국에 비해 산업 우세를 보이고 있는 선진국 역시 대외적으로 표방하는 자유무역이라는 본질이 얼마나 자신들의 이익에 기반되어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저자인 조지 몬비오가 제안하는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지구적, 국제적 문제의 다수가 지구적, 국제적 민주주의의 부제에서 나온다는 사실이 자명˝하므로, 오히려 진정한 세계화를 위해 앞선 네 가지의 해법을 고려해보자고 주장하는 것이라 이해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세계의회 건설을 위한 꽤 실효성 있는 제안을 담은 4장과 저자의 표현대로 거의 ‘자유주의에 의한 전체주의적 강요‘를 일삼고 있는 IMF에 대한 비판과 많은 개도국들의 무역 역조로 인해 발생한 부채 해결을 위해 국제청산연맹과 같은 제시는 꽤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다음에서 살펴보겠지만, 5장에서 서술되는 IMF 국제통화기금의 본질이 어떠한지는 1997년부터 1998년의 태국과 한국에서 여실히 잘 드러났으며, 국제 금융주의자들의 의견에 벗어나지 못하는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 정부와 국제 금융 체제가 어떤식으로 이들 국가의 금융 시장에 대한 빗장을 제거하면서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재편에 몰두했는지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서술됩니다. 물론 5장의 서술이 리처드 피트의 ˝불경한 삼위일체˝ 만큼이나 적나라 하지는 않지만, 그동안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제기하고 피력한 IMF체제에 대한 개혁의 필요성이 공감이 되지만, 미국과 서유럽이 쥐고 있는 IMF와 세계은행에 대한 주도권을 과연 이들이 포기할 수 있겠느냐에 대해선 희의적입니다. 물론 말레이시아가 IMF가 요구한 반대로 자본 시장의 통제를 통해 1997년 이후의 위기를 벗어났지만, 이러한 사례는 극히 희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6장에서 비판하고 있는 WTO의 사례에서 G7국가가 주도하며, 밀실 행정이라고 봐도 무방한 WTO의 그린룸에서 이들 서방 선진국가들이 어떻게 개도국들의 대사들을 손에 쥐락펴락 하는지 나오는 것으로 보아, 국제 경제 체제 내에서도 민주주의화가 필요하며, 이 민주화에 대한 선결이 전체적인 국제정치와 세계경제 측면의 맥락에서 제일 시급히 달성되어야만 하는 과제과 동일한 것으로 취급해야 하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러한 이행 가운데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가난하고 약한 자들의 삶을 지배하는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의 능력을 지구적 차원에서 효과 있게 억제할 방도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보주의적 운동에 공감하는 많은 활동가들과 세계 시민 다수들을 실망에 빠트리는 조건이기도 할텐데요. ˝세계의 식량이 과잉 생산되고 있는 실정이지만, 식량 살 돈이 없는 8억 4,000만명은 영양 실조인 것으로 공식 집계된다˝는 점 역시, 세계가 공유하고 있는 무역 조건하에, 기득권을 갖고 있는 유리한 국가는 무조건 이러한 흐름속에서 이익을 추구하려 할 것이며, 여기에는 그동안 세계 정치가 분실한 도덕주의적 가치와 국제 정치 무대에서 힘있는 권력 국가가 다른 국가들을 여러 기만과 술수로 자신의 이익에 동조하게 만드는 그런 당위성을 어떻게 하면 타파할 수 있겠는가가 큰 과제인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세계의회의 달성이 시급히 요구되지만, 미국의 국제정치와 기본 기조를 고안한 조지프 나이 뿐만 아니라, 저명한 경제학자인 대니 로드릭 역시 이것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축한 바가 있습니다. 이 세계의회의 가능성에 대한 저자의 다각도의 분석에서 특히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점은, 인구 비례에 따른 의석수 배정과 민주주의국가와 비민주주의국가로 분류해 비민주주의 국가가 민주정치의 국가들과 달리 좀 더 적은 의석수를 갖는 등의 전세계의 민주주의 달성을 위한 이런 장치들이 물론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지만 충분히 도달할 수 있는 과제로 여겨졌습니다. 이것은 베이징 컨센서스로 도출된 중국의 경제 발전이 ‘민주화 없는 성장‘으로 서구의 우려를 강화시켰던 것으로 국제 정치 무대가 민주화에 대한 해법을 인식하고 있다면, 중국 역시 그러한 기조 아래 자신들의 정치를 민주화 해야만 그에 합당한 국익을 달성할 수 있다는 말과 다름 없습니다. 다만, 이 지점에 대한 인식 역시 상당히 이상주의적 이해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에 그 세계의회에 대한 요구를 많은 NGO들이 국제 무대에서 뒷받침해야 하며, 특히 세계 패권을 쥐고 있는 미국의 시민들이 고결한 민주주의에 대한 의식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국가가 민주주의에 반하는 국가 정책에 대해 반대할 수 있는 공감대가 마련되어야 하겠죠.

끝으로, 이 책에서 제시되고 있는 바와 같이 공정 무역에 대한 가치에 대해. 특히 ˝가난한 나라 그리고 가난한 나라만이 자신들의 경제 일부를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론적 주장이 받아들여진 지는 이미 오래됐다˝는 부분과 동일하게 이들 국가들이 자신들의 자원을 온전히 국민들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기반과 동시에 이에 대한 선진국들의 이해 관계를 철회할 수 있어야 하며, 이것은 단순히 국제 기구와 선진국들의 얼마간의 경제 원조 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일인당 국민 소득이 천달러에도 미치지 못하는 국가들에게 오로지 자유 무역의 원리만 강조하는 것은 더많은 경제적 차취를 불러일으키는 결과 밖에는 도출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케인스의 주장대로 개도국 국가들을 일정 수준의 경제 규모로 달성시켜 이들 국가들이 성공적인 소비 자본주의의 구성원으로서 참여하면 그것 자체만으로도 선진국들의 이익에 규합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역시 중요한 것은 이들에 끈질긴 인내가 바탕이 된 충분한 시간이 주어져야 하며, 신자유주의에 기반한 자유 무역이 사실상의 약탈 무역으로 오도되지 않기 위해, 국제 사회가 민주주의적 가치를 먼저 고려하는 풍토가 조성이 되어야 하겠죠. 글 서두에서 저자는 무정부주의와 자유시장주의가 결과적으로는 같은 목적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 근거에는 바로 이러한 자유 무역의 퇴행적 결과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애초에 이들 타협 불가의 자유시장주의자들과 신자유주의자들이 고려했던 것은 이와 같은 불균형한 무역 구조속의 국제 경제 체제를 더욱 고착화 시켜 자신들의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삼고자 하는 이들이 결코 입밖으로 내뱉지 않는 내심이 이에 담겨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적나라하게 WTO의 그린룸에서 이뤄지고 있으며, IMF를 비롯한 이런 이해관계가 아직도 구조적 모순을 안고 있음에도 개선되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해관계와 극명하게 일치하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누군가에게 지옥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더할나위 없이 천국이 될 수 있다는 점은 충분히 환경을 개선할 수 있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논리와 영합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자는 이 책 2장에서, 시민의 깨어있는 삶 mindful living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요. 실로 진정한 민주주의를 소망하는 사람들의 바람은 국적과 인종을 떠나 다를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책이 2006년 출간된 이후로 변변한 서평 한줄 없이 지금까지도 절판되지 않고 판매되고 있다는 점은 뭔가 신기하게 느껴졌는데요. 출판사의 이름값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는 생경한 현상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민주주의 통치가 무정부주의 보다 정의를 실현하기에 적합한 이유는 그것이 강제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적어도 원칙적으로 반대 의견의 기회를 제공하는 유일하는 체제라는 것이다

1945년 이래 미국은 200 차례도 넘는 군사작전을 개시, 그 중 대부분은 세계 평화를 고취하는 일과 무관하고 자국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증진하기 위해 행한 것이다

오늘날 권력을 잡은 거의 모든 정부는 오직 금융 시장이 받아들일만한 정책만 제시하므로 실상 지구적 자본을 대표한다

민주주의가 우리가 생각하는 올바른 결과를 가져올지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부재가 잘못된 결과를 가져오리라는 점 만큼은 장담할 수 있다

케인스가 이미 제공했으나 지금껏 받아들이지 않았던 선물은 가난한 나라가 부자나라의 지시에 따르지 않을 수도, 또 계속 가난하지 않을 수도 있는 세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