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수적 피해 - 지구화 시대의 사회 불평등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정일준 옮김 / 민음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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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다소 혼란스러웠던 20세기가 낳은 위대한 사회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은 폴란드 태생의 유대인으로 바르샤바 대학에 교편을 잡고 있던 중에, 폴란드 정부의 박해를 받고 영국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이후, 유동하는 현대와 그에 따른 신자유주의적 이행이 초래한 여러 사회 문제와 경제적 불평등 문제에 천착했던 그는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사회전반에 도덕적 원칙의 필요성의 의무를 남긴 채, 지난 2017년 1월 영국 리즈에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지금에 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그의 살아 생전에 노엄 촘스키와 만나 서로간의 의견을 교환하는 작은 대담의 자리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고민해봅니다. 촘스키와 더불어 바우만도 여러 대담집을 책으로 펴내기도 했는데요. 이 세기의 두 지성이 세계와 사회에 대한 서로간의 의견을 나누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굉장하고 의미있는 일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또한, 이 코로나 창궐 시기에 바우만이 살아 있었다면 우리에게 뭔가 올바른 방향을 제시했을 것 같기도 한데요. 아마 많은 분들이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참고로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바우만의 이 글은 2010년부터 2011년까지 있었던 강의를 책으로 엮은 것이기도 합니다. 각설하고, 이 책은 ˝Collateral Damage : Social Inequalities in a Global Age˝라는 원제로 2011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년뒤인 2013년 번역 출판되었으나 현재는 절판된 상황입니다.

제목대로 이 부수적 피해라는 점은 현재 신자유주의적 이행에 따른 세계화의 파행으로 나타나고 있는 심각한 사회경제적 불평등 상황에서 이 도덕적 범주의 사회 바깥에 있는 수많은 좌절된 하위 계층이 직면한 상황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불평등 문제를 꺼내는 자들은 하나같이 그 이유와 변명이 똑같다고 비아냥대기도 합니다만, 여기에서 고찰해 볼 수 있는것은 사회 현상의 문제에서 어떤 불합리하고 모순적인 면이 나타난다면 마땅히 그것을 개선하는데 힘써야 하지만 사실상 시장이 정부의 역할을 대신하면서 시장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준 이후, 우리는 그저 견뎌내는 데에만 온 힘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이에 바우만은 1장에서 ˝경제적 부유층이든 그 반대 있는 계층이든 공통적으로 우려하는 것은 자신의 존엄성이 훼손당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할 수 밖에 없는 세태˝를 강조하고 있는데요. ‘손쉬운 이익‘을 선호하고 이것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본가와 부유층의 배타적인 경제 활동을 통한 전반적인 지위 획득이 그 내면에는 자신의 권리 보장(기본권을 포함한)을 공고히 하고 수많은 선택의 문제에서 자원의 우위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바우만은 이 점에 대해서도 ˝현대의 일개 개인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삶을 선택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일반적인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이 우리가 스스로 선택에 대한 수월하고 만족스런 자원을 쟁취하는 건 현재로선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며, 이러한 ‘정치적 자유가 전무한 경제적 자유‘는 모두에게 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경제학이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거나 반대로 이를 은폐했다고 봐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 책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바우만은 그 뿐만 아니라 모두가 바랬던 현대의 근본적인 의미란, ˝임마누엘 칸트의 정언 명령이 함축하는 바와 같이, 우리가 우리의 양도할 수 없는 재능인 이성을 발휘할 때, 우리는 도덕적 판단을 제기할 수 있고 자연법으로서 보편적으로 따르고 싶은 종류의 행위를 유발할 수 있다˝는 취지의 가능성을 8장에서 언급하고, 이러한 인간 진보의 희망이 현대의 출발 시점에서 그리고 상당한 부분에 걸쳐 전개되기를 바랐던 인간사의 모습처럼 되지 않았다는 것이 우리의 불행일 것입니다. 칸트가 말하는 이성은 자신 뿐만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에게 모두가 함께 나아갈 수 있는 방편이자 의무였지만 ‘현재의 시장은 거의 불의에 가깝습니다.‘ 과거의 포드주의적 자본주의의 이행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미 우리는 총체성과 사회와 공동체라는 개념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에 밀턴 프리드먼은 시장이 다 알아서 해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으나, 개인의 합리적인 이기심의 정도와 범위라는 것이 인간의 복지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자율 조절될 것이라는 믿음이 거의 40여년간 사회를 지배해 왔지만 그것의 결과는 어떤식으로 나타났는지는 거의 명백해 보입니다. 이와 같이, 바우만은 4장에서 ˝우리의 (공중의) 태도는 사실상 매우 쉽게 조작 가능하다˝고 단언하고 사회의 진실이라든지 이 세계가 돌아가는 작동원리의 진정한 이면을 감추는 데 몰두하는 세력은 마땅히 그들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현재의 경제학이 이러한 흐름에 사실상 동조한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고 볼 수 있을겁니다.

이러한 시장 우위 시대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부분은 시장에서 정치가 제거된 이후, 국가의 책임은 그만큼 자유롭다는 점입니다. 바우만은 이에 대해 시장이 시민의 안전망과 같은 이념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게 되었지만 이 이면에는 분명 국가가 이러한 일들에서 손을 떼기로 결정되었지만, 마냥 결정 자체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국가가 이를 다시 회복해야만 우리가 국가의 의무를 요구할 수 있으며, 바우만의 인식대로라면 ˝인간이 불활실성과 취약성˝을 갖고 있는 본성의 존재라면 이를 등한시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천적인 문제들의 틈바구니에서 - 이를테면 유럽의 이슬람 이주민 문제, 첨예한 경제적 불평등 상황에서 부수적 피해로 국한지어질 하위 계급들, 아무리 안전을 부르짖어도 마땅히 충족되지 않는 사람들- 오로지 국가만이 이를 (그러니까 안전과 평안) 보장할 수 있을 겁니다. 사실 바우만이 ‘유동하는 현대‘를 개념화했던 것은 19세기를 넘어 정착되었던 국민국가 개념의 강제적 탈출과 자본주의의 꽤 강압적인 이행이 국가의 기능과 의무를 점차 제거했고, 이에 권력이 정치를 배제하면서 동조하기도 했습니다. 이 부분도 역시 현재의 ‘정치없는 권력‘에 대한 비판을 바우만은 강도높게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습니다.

끝으로, 바우만의 유작인 ‘레트로토피아‘에서 ˝상대방에 대한 무조건적인 책임˝을 우리와 같은 남은자들에게 그는 의무의 유산으로 남기기도 했습니다. 18세기 계몽주의 시기가 꽃을 피웠지만 이내 애덤 스미스를 오역한 이들이 도덕적 전통까지 퇴출시켜왔던 그 결과가 현재의 모습입니다. 자본주의에 의해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가 제약되어 왔다는 것을 새삼 언급하지 않더라도 단순히 평등의 문제 뿐만 아니라 지금의 고삐풀린 시장 자유의 이행이 과연 금융 위기 하나만으로 끝날지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테러의 방지라는 일념 하나로 미국에서 이행된 시민의 무차별적인 기본권 침해와 정당한 시민권을 보유한 시민들조차 정보당국에 의해 신변이 위협받는 상황은 개인이 보유한 자원의 문제라는 측면에서 주변부로 갈수록 권력은 멀어지는 것과 같은 폭력적인 배제의 정치를 낳게 되었습니다. 부수적 피해 취급을 당하는 사람이 있는 사회를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는 공감대를 확산시키고 그것에 대한 어떠한 죄책감도 갖지 않게 하는 것을 포함한 이 반사회적인 움직임이 결코 근절되지 않는 이유에는 아마도 그 합리적이라는 이성이 실종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아마도 바우만은 이러한 자본주의적 경제의 양적 확대만으로는 이러한 현상을 시민이 올바르게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이 책을 내놓은 것 같습니다. 앞선 괴이한 흐름의 여러 원인들을 고찰해보면서 바우만은 8장에서 카를 슈미트를 지목하고 있기도 한데요. 이 예외 상태를 향한 고결한 결단주의는 아마도 현재의 일부 권력층에게 양심의 회피를 위한 근거가 되지 않았나 추정해 봅니다. 이와 관련해선 따로 글을 빼서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거의 7시간에 걸쳐 이 책을 정독했는데, 레트로토피아도 그랬지만 역자의 번역은 뭐랄까 쉬이 눈에 잘 들어오지는 않았습니다.

-장 자크 루소가 인간의 불확실성을 강조했던 봐와 같이 이 글 전반의 해석 수단은 바로 ˝인간의 불확실성과 취약성˝이기도 합니다.

-바우만은 종전의 ‘복지 국가‘라는 개념 보다는 ‘사회 국가‘라는 개념을 새로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정치권력의 이러한 처방은 오늘날 과거로 후퇴하고 있다. ‘복지 국가‘ 제도는 점진적으로 붕괴되거나 폐지되고 있고, 기업 활동과 자유로운 시장 경쟁과 그것의 비참한 결과에 부과되어썬 제약은 하나씩 제거되고 있다.

인간의 취약성과 불확실성은 모든 정치 권력의 기호다

현재는 전례없는 탐욕과 광신적인 자본주의의 시기이다

존경받는 도덕철학자인 레비나스는 "사회는 도덕적 충동이라는 무기이자 부담을 가지고 있으며, 상대방에 대한 무조건적인 책임을 떨쳐버릴 수 없다"고 강조했다

소비 시장은 양심의 가책을 완화하거나 심지어 눌러 버릴 수 있으며 그렇게 하고자 한다

윤리적 책임은 인간 유대를 구축하는데 주요한 재료이자 수단이다

자본주의는 인간 욕망의 잠재적 무한성에 판돈을 걸었으며, 그 무한한 성장을 만족시키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러한 시장 자유주의적 이행에서, 국가는 자유시장의 논리 (보다 정확히는 논리의 결여)에서 파생되는 취약성과 불확실성에 대해 책임이 없다는 태도를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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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파이어
카밀라 샴지 지음, 양미래 옮김 / 북레시피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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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의 카라치에서 태어나 현재 스스로 무슬림 정체성을 갖고 작품 활동에 매진하고 있는 여성 작가 카밀라 샴지는 안티고네의 현대적 버젼인 ‘홈 파이어‘로 근래 명성을 얻고 있습니다. 그녀는 뉴욕의 사립 리버럴 대학인 해밀턴 대학과 저명한 공립 대학인 메사추세츠 대학에서의 예술인들을 위한 MFA 프로그램을 수료하고 이후, 여러 단편 소설과 1998년 처음 출판한 장편으로 영국을 비롯한 미국과 서유럽 문단에 큰 기대를 받은 바가 있습니다. 저에게는 지금까지 매우 생소한 작가이기도 했는데요. 최근에 서평을 쓴 슬라보예 지젝의 논저에서 그녀가 받은 불합리한 처사가 글에서 소개되어 한번 이 책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손에 책을 잡은지는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처절한 저의 게으름으로 인해 이제야 키보드를 들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이 글은 지난 2017년, ˝Home Fire˝라는 원제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대략 3년 뒤인 2020년 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개인적으로 샴지의 이 장편을 최근에 출간된 리얼리즘적 소설들 가운데 우리가 처한 현실을 아주 극명하게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특히, 다소 설명하기 어정쩡한 지하디스트 아버지를 둔 세 남매의 각기 다른 행보가 유럽에 존재하는 일반적인 이슬람 가정들의 ‘현지의 벽‘과 유럽 백인들에 의한 인종주의적 편견을 가감없이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도 높은 평가를 하고 싶습니다. 이미 많은 분들은 이 책과 관련된 여러 신문사들의 서평을 통해 책을 읽지 않은 기자들의 그저 단순한 ‘페미니즘적 소설‘ 운운에 속으실수도 있는데요. 샴지의 이 글은 페미니즘과는 거리가 먼 유럽과 이슬람, 현지인들과 이주민 그리고 과연 이 시대의 국민국가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해 성찰하게 해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구조적인 측면에서 이 글을 고찰해 봤을 때, 크게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주요한 시점과 행적들을 소제목으로 구분해 서로 교차시키는 기법으로 작가는 글을 이끌어 가고 있으며, 각기 인물들의 보다 깊은 이해를 위해서는 오로지 이 책을 완독해야만 그 결과를 얻을 수 있기도 합니다. 사실 처음에 맏딸인 이스마의 도입 부분만을 봤을 때는 단순하게 작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로 오해할 법했으나, 이 이스마라는 인물은 아직 현지 세계에 미처 수용되지 못한 평범한 이슬람인들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녀 자신의 만학에 대한 욕망이라든지 학문을 대하는 태도 등은 이스마라는 한 이슬람 여성의 아주 전형적인 인물상을 구현해 내기 위한 장치이기도 했습니다. 책 몇장을 채 보지 못한 기자들은 이것만으로 페미니즘 소설 운운을 한 것이었죠.

또한, 과거 자크 랑시에르가 언급했던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고립되고 소외되어 있는 이슬람 청년들의 문제를 작가가 잘 받아서 파베이즈라는 인물로 잘 풀어내고 있는데요. 아주 계획적으로 움직이며 유럽 내의 19세에서 23세에 이르는 이슬람 청년들을 포섭해왔던 최근의 IS의 수법이 매우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여기에는 미처 아버지의 제대로 된 정을 받지 못한 ‘결핍된 한 청년‘의 비참한 결말까지 낱낱이 밝혀내고 이러한 불행한 한 개인의 문제를 지금의 서구 언론들이 가증스러운 프로파간다로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지 글에서도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2001년 이후 진행된 ˝법원 영장 없이 진행된 이슬람인들에 대한 구속과 고문˝과 세련된 국민국가 시대에 엄연히 시민권이 부여된 이슬람인들에 대한 소위 구별짓기가 과연 무엇을 위한 수단인지 깊이 고심해 보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에 유입된 알제리 출신의 이슬람인들이 당시 사양길에 들어서고 있는 프랑스 산업 전반에 투입되어 그 목숨줄을 이어가게 했다면 최소한 이 사람들이 프랑스 사회에 기여한 점은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 뿐만은 아니죠. 전반적으로 이들이 현지 사회에 적응하지 않으려고 했다기 보다는 종교적인 문제에서 양 세속 사회가 첨예하게 서로간의 이해없이 대립되어 왔고 나중에는 이슬람을 백안시 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러한 국민국가의 어두운 면을 과연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해 모두가 숙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단순히 지그문트 바우만을 비롯한 프레카리아트 문제로 소급된 것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이슬람 사회가 단절되어 있으며, 이것은 뭔가 미국에서 하류층의 냄새나는 흑인 거주지로 이해되는 것과 유사한 시각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비참한 결말의 파베이즈와 쌍둥이 남매로 나오는 아니카 또한 영국의 명문인 런던정경대의 장학금을 받으면서 현실 사회에 잘 적응하는 것으로 일면 그렇게 묘사되지만 그녀 역시 보통 여성이 직면할 수밖에 없는 ‘성과 섹스에서의 수단화라고 불리우는 저급한 편견‘에 집중되고 영국 정계의 유력한 정치인의 아들에게 접근한 일련의 과정이 일견 글의 복선으로 이해되기도 했습니다만 아마도 작가는 고학력의 이슬람 여성은 영국사회에서 그다지 개인으로서 사회구성원으로서 전혀 미미한 존재라는 점을 밝히고 싶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나중에 철저하게 파베이즈와 의식적으로 표면적으로 단절하게 되는 이스마 역시 기본적인 개인의 자아실현과 이를 지켜보는 영국 사회의 진정한 태도와 시선이 무엇이느냐에 따라 가족까지 저버릴 수 있는 인물상을 글에서 구축해 냈습니다. 결국, 파베이즈가 깨달은 ˝아버지가 파베이즈 자신보다 더 보살핌을 받아야 마땅했던 가족 전체를 버린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마침내 깨닫게 되었다˝는 문장은 아무리 대의와 개인의 정의로움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가족의 문제는 현실이며, 더욱이 IS와 같은 현실의 모순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이들의 목적 의식과 관념적 추구는 그 자체로 허망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시신조차 끝내 영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현실을 그려내고 있는 결말에서 저는 뭔가 먹먹함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파베이즈라는 인물이 이슬람이라는 뭔가 고아하고 품격있는 가치에 몸을 맡겼다기 보다는 철저하게 계산된 행동에 이용당한 인물이어서 그 자체로도 매우 안타까운 배경속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현실을 도외시하는 신념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자들이 과연 어떠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러한 우리가 신봉하는 종교 자체가 한 가정을 파괴에 이르게 했다는 점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건일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입가에 감도는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지금까지도 죽은 사람들을 통해 증오의 역사를 되물림시키는 자들이 사라지지 않는 현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하겠죠.


-본문 62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의문이기도 한데, 몇몇 문장에서 서술어미가 삭제된 채, 명사형으로 완료된 문장들이 있었습니다. 그냥 눈에 거슬린다기보다는 왜 이런식으로 번역이 되었는지 약간 의문이 드는군요. 구어체를 따로 다른 글자체로 표기된 문장에서는 초성체까지 나오는데 역자의 노력이 조금 과하지 않았나 싶었습니다.

-쿠바 관타나모 수용소에서의 포로들의 고문 장면이 간혹 등장하기도 했는데요. 파베이즈가 자신의 아버지가 어떠한 지옥속에 있었는지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장면에서 작가가 꽤 많은 준비를 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자유 민주주의 국가가 이런 전근대적인 ‘선진심문기술‘이라는 것을 만들어 낸 것은 과연 이후 역사가 이를 어떻게 평가할 지, 수많은 미국인들은 이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은 비밀을 만드는 것이 습관이 되면 다른 것들도 망가진다는 사실이란다

폭력을 가하는 이들이 존중하는 유일한 대상은 더 극심한 폭력일 뿐이란다

복지국가란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쌓아 올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민자들을 쫓아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환영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기 시작했을 때였지. 그런 나라에 사는 게 어떨지 상상해봐.

세상 사람들이 휴지 조각 취급하는 여권을 갖고 살아가는, 혹시라도 비자 발급 신청이 거부될까 봐 아무런 빌미도 잡히지 않으려고 노심초사하며 살아가는 우리들 삶은 보이지도 않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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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패닉 - 코로나19는 세계를 어떻게 뒤흔들었는가 팬데믹 시리즈 1
슬라보예 지젝 지음, 강우성 옮김 / 북하우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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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유고 지역인 슬로베니아 출신의 유명한 현대 철학자인 슬라보예 지젝은 오늘날 전세계에서 속된말로 팝 아티스트와 같은 인기와 위상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일반적인 자유주의 우파에게 공격의 대상이 되어 왔으며, 비슷한 사상적 체계를 갖고 있는 진보 좌파에게 있어서도 큰 공감을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요. 이런 연유에는 그가 양비론을 신봉하는 궤변론의 철학자라기보다는 자유주의 우파는 물론이고 반대편인 좌파에게도 동일하게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기 때문일겁니다. 좌파에 대한 비판과 관련해서 지젝 역시 현실과 사회에 괴리되어 있는 관념적 좌파와 자본주의 자체를 백안시하는데 몰두하는 비생산적인 좌파에게 그는 비판을 놓지 않았습니다. 여기에는 그가 류블랴나 대학과 이후 파리 8대학을 거쳐 천착한 철학과 정신분석학으로 말미암아 여느 사상가와는 다른 꽤 다양한 사상적 스팩트럼을 스스로 완비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헤겔과 푸코, 라캉에 이르는 그의 학문적 연계는 능수능란한 논지와 이론화의 근거가 되었고, 이를 보는 많은 독자들은 그의 달변에 적지않게 놀라기도 했는데요. 물론 로버트 미지크와 같이 지젝이 한때는 자신의 논리적 허점을 인식하고 철회하는 경우가 있어 이를 희화화하기도 합니다만 이를 좋게 해석하면 리처드 J. 번스타인이 주장했던 가류주의의 긍정적 측면이라고도 할 수 있으니 저로서는 크게 개의치는 않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Pandemic! COVID-19 Shaken the World˝라는 원제로 올해 출간되어, 국내에도 최근인 7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번에 번역된 지젝의 이 글은 특별히 국내 번역판에 3편의 글을 수록했고, 번역은 서울대 강우성 교수가 맡았습니다.

현재의 전세계적 상황과 맞물려 최근 출간된 지젝의 이 글은 일종의 짧은 현상에 대한 시론으로서, 일반적인 독자들이 보기에도 상당히 평이한 수준이라 여겨집니다. 지젝은 여기에서 현재의 진단과 그가 명백히 밝힌 ‘재난 자본주의‘의 부정적인 파급적 효과와 앞으로 이 코로나 시기가 과연 어떤식으로 귀결될 것인가에 대한 일종의 복잡한 전망까지 함께 실려있습니다. 앞에서 제가 단순하게만 글이 평이하다고 평가했습니다만, 현실적인 맥락에서는 지젝의 통찰력이 들어가 있기도 했는데요. 이를테면, 현재 단계에 이르러서는 식량 문제가 크게 문제가 되지 않겠으나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 국가별로 식량문제가 대두될 수도 있으니 이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언급합니다. 이런 연유로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 종사자들의 신변 안전과 사실상의 격리가 필요하다는 등의 제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외에도 부유층과 자본가들이 이런 상황에도 개인 제트기를 이용해서 국가를 넘나드는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인가에 대한 도덕적인 판단도 독자들에 따라서는 스스로 판단해 볼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2019년 말 중국 우한에서 코로나 사태가 터지면서, 미국의 트럼프와 같은 인종주의적 포퓰리스트들은 여기에 음모론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이들 인종주의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우파 포퓰리스트들은 전세계에 그 저변이 상당하며,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도 그 일면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젝은 이에 대해 일축해 마지 않고 있습니다만, 그가 인용한 ‘홈 파이어‘의 카밀라 샴지의 경우에서 그녀가 비교적 온건한 이스라엘 반대 운동을 지지했다는 이유 만으로 지역 문학상 하나를 수여받는 것을 거부당했지만, 반대로 보스니아에서의 세르비아계의 군사작전을 대놓고 지지했던 페터 한트케는 2019년 노벨 문학상을 별 무리 없이 수여 받은 것을 봤을 때, 이를 지젝은 단순히 ‘정치적 올바름‘의 강요된 형태로 인정하는 것 이상의 이데올로기적 측면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즉, 앞선 트럼프의 저런 공개적 발언이 그 스스로는 단순히 마땅히 증오를 받을 대상에 대한 단순한 지시라고 볼 수 있겠으나 이러한 정치 지도자의 수신호가 이데올로기화 된다는 점이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마치 과거 히틀러에 의한 유대인 학살과 마찬가지로 증오의 대상을 선별해 그 책임을 내재된 인종주의적 편견과 함께 전가시키는 트럼프의 행태는 지극히 비정상이라고 부를 만할 것입니다.

지젝은 이에 대해 ˝포퓰리즘적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전성기를 맞을 것이다˝라고 지적하며, 여기에는 현저하게 유럽의 통합을 방해하는 러시아의 푸틴과 터키의 에르도안의 국민을 억압하고 외부의 현실을 왜곡시키는 ˝동일한 정치체제의 다시 없을 두가지 변종˝이라 지칭합니다. 현재의 세계에서 이 두 정치 지도자의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 세계의 이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이 둘의 왜곡된 권위주의 정치의 파급과 더불어 현재의 중국 정치가 이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중국 공산주의의 붕괴를 가져올 것이라는 추론이 널리 퍼져있다˝는 현상에 대해 지젝 역시 다소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과 같이 아무말이나 내뱉으려고 하는 비정상적인 행태가 이 코로나 사태를 타고 확산되고 있는 것 또한 확실해보입니다. 여기에는 이들 비정상적인 정치 행위의 측면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병은 시장 중심의 지구화의 한계만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고, 완전한 주권을 주창하는 국수주의적 포퓰리즘의 훨씬 더 심각한 한계 또한 알려준다˝는 지젝의 진단 또한 일정 부분 설득력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좌파 진영이 점진적 통제 상황과 같은 현재의 모습을 ˝트럼프의 중국 바이러스˝ 언급처럼 노골적인 인종차별주의적 요소들과 결합된 사회적 통제의 실행으로 해석하는 것에는 ˝극우 진영과 사이비 좌파˝라는 수식어로 비판하고 있는데요. 바이러스 통제를 위해 각국이 나서고 있는 정부의 노력을 단순히 시민을 권위주의적 통제 범위 안에 집어 넣으려고 하는 일종의 전체주의적 발상으로 오해하는 이들 ‘사이비 좌파들‘의 존재는 사회 통합에 큰 걸림돌로 다가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가 주목하는 경제 시스템과 관련해 지젝은 ˝바로 경제를 통제하고 규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필요하다면 국민 국가의 주권에 제한도 가할 수 있는 전 지구적 형태의 조직˝이라는 측면의 이론적 필요성에 대해 논하고 있기도 한데요. 저 역시, 앞선 재난 자본주의에 대한 인식에는 일정 부분 동의를 하고 있으나, 과연 얼마간의 대안 없이 국민 주권주의와 기존의 경제 체제를 파격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이 위기가 정도 이상의 파급력을 지니고 있을지는 좀 더 고찰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현재의 유럽의 통제 상황에 사실상 거부하며 밖으로 향하고 있는 다수의 유럽인들이 자신들의 ‘자유‘ 만큼이나 타인들의 자유와 권리에 신경을 쓰는 ‘이타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의 탄생이 필요한 것인데요. 이런 경제적 위기가 초래할 수 있는 심각한 시기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와 같은 우파 정치인 내지는 우파 포퓰리스트가 일정 부분 사회 압력을 동반하는 개혁에 나서는 것이 진보에 있는 정치인이 개혁에 나서는 것보다 반대와 저항이라는 측면에서는 한결 유리할텐데요. 이는 과거 로널드 레이건과 리처드 닉슨이 소련과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던 역사에서 당시 미국의 유권자들로부터 증명된 바가 있습니다. 만약 반대로 필요한 개혁을 위해 오바마 대통령이 팔을 걷었을 경우, 아마 우파 성향의 지지자들이 극렬한 저항을 했을겁니다. 반대로 현재의 트럼프가 지젝의 제안대로 개혁적인 정치경제적 행동에 나섰을 경우, 아마 그를 지지하는 소수의 핵심지지층을 제외한다면 아마도 다수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을 수도 있을 겁니다. 아마도 이 점 역시 지젝의 고유한 통찰력이라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끝으로, ˝감염병으로 인해 불가피해진 조치들을 푸코 같은 사상가들이 설파했던 감시와 통제라는 통상적 패러다임으로 즉시 환원하지 말아야 한다˝는 그의 경고는 이 시대의 불가피한 환경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이러한 변화된 체제에서 민중이 국가기구들 바깥에서 지역 차원으로 자기 조직화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린 것˝으로 섣부른 판단을 하는 것도 좋지 못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을겁니다. 물론 이러한 개인의 자유주의를 함의한 자본주의적 재난의 상황에서 모두가 자신의 안전과 평안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의 안전과 건강을 위해 좀 더 조심하고 성찰할 필요가 있는 것은 자명합니다. 모두가 현상에 대한 틀에박힌 동일한 논리로 무장하는 획일적인 사회는 전체주의와 더 가까워지는 우려를 불러일으키는 것과는 반대로 우리의 민주주의와 보다 개선된 경제 체제에 대한 면모를 담은 지젝의 아이디어를 얼마간은 되짚어 볼 만한 가치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토록 비상한 시기에 발빠르게 글을 쓴 한 철학자의 노고에 감사를 전하면서 저급한 저의 글은 이정도로 마무리 할까 합니다 .

-역자의 번역에 대해 말들이 있는 것 같은데요. 저는 아웃소싱을 ‘외부위탁‘과 같이 번역한 역자의 노력과 더불어 본문 대부분의 번역이 꽤 괜찮았다고 여겨집니다.

-저도 역시 조르조 아감벤이 지젝의 이 글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몹시 궁금한데요. 이탈리아 출신의 아감벤이 모국이 처한 상황에 직면했을때, 그가 느끼는 감정을 일축해 단순화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일겁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병은 시장 중심 지구화의 한계만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고, 완전한 주권을 주창하는 국수주의적 포퓰리즘의 훨씬 더 심각한 한계 또한 알려준다

우리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인류 중 노인, 약자, 병자를 제거해서 전 지구의 건강 증진에 기여하는 이로운 감염병이라고 보고 싶은 유혹에 빠질 수 있다

감염병으로 인해 불가피해진 조치들을 푸코 같은 사상가들이 설파했던 감시와 통제라는 통상적 패러다임으로 즉시 환원하지 말아야 한다

좌파 진영은 트럼프의 중국 바이러스 언급처럼 노골적인 인종차별주의적 요소들과 결합된 사회적 통제의 실행으로 해석한다

이 위기를-국가권력은 본연의 임무를 해야 하고 우리는 그 지시글 단지 따르기만 하면 되는-탈정치적 국면으로 보면서 머지않은 미래에 어떤 형태로든 일상성이 회복되길 바라는 사람들의 태도는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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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이 돌아온다 - 공공적인 것의 귀환을 위하여
댄 하인드 지음, 노시내 옮김 / 마티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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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출신의 언론인으로 특히, 언론 개혁과 관련한 문제에 관심이 많은 댄 하인드 (혹은 댄 힌드)는 전작인 논저 ‘이성에 대한 위협 The Threat to Reason‘으로 영국 보다는 미국에서 큰 관심을 받은 바 있습니다. 다만, 아쉽게도 하인드와 관련된 학력과 기타 정보를 찾기 위해서 구글에서 검색을 해봤지만 위키 백과에는 그의 정보란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개인 트위터 계정과 몇장의 사진은 구글에서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그 외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하인드와 관련해서 개인적으로는 시민의 적극적 언론 참여라고 볼 수 있는 ‘공공주문취재 제도‘가 눈길을 끌었는데요. 이는 시민이 기존의 언론과 별개로 개방성과 공공성을 목표로 적극적인 취재 활동에 대한 취지 등을 담고 있었습니다. 또한, 하인드의 이 글에서 주요한 개념으로 등장하는 ‘공중‘과 관련해, 얼마전에 서평을 쓴 존 듀이의 ˝현대 민주주의와 정치 주체 문제˝의 현대적 버전의 보론이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이 책은 원제, ‘Return of the Public‘으로 지난 2010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2년 3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근래, 대중 정치와 관련해 큰 이슈가 되고 있는 ‘공중 The Public‘과 관련해 저자는 라이트 밀스의 독착정 개념인 ‘대중 The Mass‘와 ‘공중 The Public‘을 통해 우리가 궁금해하는 공중에 대해 대략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밀스가 해석하는 전자의 대중은 기존의 엘리트체제에 적극적으로 동화되어 공공성을 잃어버린 일반 대중들을 뜻하고 후자의 공중은 자신의 이성을 바탕으로 사회와 체제에 관심을 두고 공공성을 추구하며, 최종적으로는 모두가 바라는 정의로운 사회에 목표를 두고 있는 계몽된 대중입니다. 저자인 댄 하인드는 이 책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 ‘공중‘을 바탕으로 기존의 신자유주의 시대를 거쳐온 현재 언론의 대체물이 될 수 있는 개혁의 실마리까지 잡는 것으로 논증 가운데 이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즉, 1부는 과거 인류의 정치사적인 측면에서 시민과 이들이 주체가 된 정치 관념에 이르는 고대 로마부터 현대에 이르는 정치적 과정을 살펴보고, 2부는 앞선 1부 5장에서 논의된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퇴락한 공공성과 그 가운데 발생한 개인들 간의 심각한 불평등 문제와 도를 넘어선 민영화의 이행을 바탕으로 어떻게 오늘날의 정치가 상업주의의 근간에서 어떻게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렸는지에 대해 논하고, 3장은 이러한 현실적인 조건 가운데 어떻게 하면 다시 공중을 되살리고, 언론이 과거 토크빌이 강조했던 바와 같이 어떻게 하면 ˝다시 건강한 민주주의의 조건˝으로 회귀할 수 있겠는가에 대해 현실적 방안을 살펴보는 것으로 하인드의 이 글은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장 자크 루소의 ‘인간의 이원적 본성론인 인간의 욕심과 정의감‘ 과 임마누엘 칸트의 ‘인간의 사적 이성과 공적 이성이라는 구분‘으로 대다수의 인간은 3부에서 저자가 확언하는 바와 같이 ˝누구나 정의로운 사회에서 삶을 영위하길 바란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굳이 전제 왕권을 교수대에 보냈던 지난날의 영국이나 베르사유 궁전의 주인을 단두대에 보낸 지난날의 프랑스인들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것이 꼭 인간에 대한 계몽주의의 반사적 혜택에 불과할지라도 우리는 이성과 감정을 바탕으로 스스로의 굴레를 벗어왔습니다. 바로 1장은 이러한 인식 가운데 시민과 공화주의를 시작으로 ‘정치적 인간사‘의 일면을 살펴봅니다. ˝신경증에 가까운 경계심은 공화국 시민의 자연스러운 상태다˝라는 당시 자유에 대한 일념과 이를 성공적으로 쟁취하기 위해 광범위한 연대에 나섰던 시작점을 저자는 언급합니다. 뒤이어 이러한 공화주의를 시작으로 현대에 민주주의 국가를 이룩했음에도 자본의 영향력에 놓인 다수의 시민들에게 경제적 생존권이 정치적 자유와 정치적 신뢰와 마찬가지로 중요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한 것은 차차 뒤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다수의 시민들이 이러한 배타적 경제적 이행과 관련해 저자인 댄 하인드는 한가지 색다른 의견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면 자신이 놓인 처지에 더욱 불만을 느끼게 마련이다˝라는 주장입니다. 사실 몇 번이나 뇌리에 되내이면서도 왜 시민들은 이렇듯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게 되는가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점은 이 글의 3부에서 ˝주요 언론매체에 의존하는 대다수 국민은 신자유주의 정책에 의해 빈부격차, 세계무역 불균형, 그리고 최근 금융위기의 주범은 금융규제 부재가 완전히 자리잡았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들어보지 못했다˝고 단언하는데요. 외형적으로는 언론에 화살을 돌리고 있지만, 같은 장에서 일반 시민이 세계의 진실을 강구하기 위해 스스로 진실을 찾아야만 한다는 일련의 논점에 저자는 일단 회의적인 시선을 던지면서 왜 시민들이 결국에는 자신의 삶을 희생해야 되는 종착점에 이르는 이러한 노정을 오로지 개인의 책임으로만 두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합니다. 마찬가지로 칸트는 ˝우리가 국가를 포함한 사적 기관들이 부과하는 제약을 극복하고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소통할 수 있을 때에만 계몽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처럼 이것에 이르는 과정은 오로지 일개 개인의 힘만으로는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즉, 앞선 1장에서 논증되는 바와 같이 ˝자유인은 공동으로 한 국가의 주체를 이루어 집합적 의지를 행사하기 때문에 자유로운 것이다˝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체제에서 자신의 자유와 사회의 정의를 위해 ‘다수의 자유인들‘과의 연대는 중요하며, 각자는 정치와 정치인들에 대한 극도의 경계심을 갖는 동시에 쉴새 없이 자신의 입을 여론의 도구로 삼는 것이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3부에서는 노동자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뒤로하고 ‘사심없는 정의에 이르는 길‘을 논하고 있습니다. 앞선 루소의 말대로 인간은 개인의 이기심과 더불어 정의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엘리트 계급은 피지배자의 동의에 기반을 두는 정부라는 존 로크의 사상을 수용하고 나면 새로운 감수성을 갖추고 등장한 공중의 판단을 무시할 수 없고, 그런 의미에서 공중의 의견은 압도적인 중요성을 띠게 된다˝고 이와같이 밝힙니다. 그동안 대다수의 엘리트 계급과 이들의 이익에 적극 수렴한 지식인들은 ˝대중은 ‘무의미한 존재‘이다˝라고 설법해 왔습니다. 더불어 소수 기득권층과 이 엘리트들은 대중이 주도한 정치가 종래에는 군중정치로 파급될 가능성이 있으며, 좀 더 면밀한 이성과 합리적인 주도력을 가진 엘리트들의 판단을 대중은 믿고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소위 다수의 ‘언론‘을 통해 이러한 인식을 퍼뜨린 바도 있습니다. 더욱이, 지난 1980년대 이후로 ˝국가는 시장의 작동에 감히 제한을 가할 수 없었다˝는 지난 신자유주의의 우울한 음영이 지금까지도 정치는 시장에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불문율을 재계와 금융 엘리트 들에 의해 주입되어 왔습니다. 사실 우리가 알아야 할 명백한 사실은 바로 무식하고 쓸모없는 대중으로부터 시작되는 이러한 왜곡된 인식을 무너뜨리고 각자 모두가 정치적 및 경제적 자유를 갖고 있는 자유인임을 명백히 인식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하인드의 글을 통한 저의 이러한 해석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공화주의 전반의 가치가 현재에 이르러서는 퇴색되어 버렸다는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애덤 스미스가 ˝정치인들에게 공공성을 맡기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로부터 시작된 경제 전반의 정치에 대한 불신과 쓸모없음은 그로부터 어떤 자들이 이익을 얻었는지에 대해 숙고해 볼때 그 결론은 아주 명확합니다. 지금의 신자유주의적 체제가 무슨 만고의 진리이자 불변의 진실인양 받아들이는 요즘의 세태에 대해 지그문트 바우만은 ˝대체 인류의 역사에서 경제가 인류의 태동과 더불어 발생했다고 철썩같이 믿는 사조˝에 대해 개탄을 금치 못한 바가 있습니다. ˝고도로 교육받은 엘리트들이 과연 공정하게 이성을 발휘할 것인가˝와 더 나아가서는 이들이 자신들의 사적 이익에 연연하지 않고 공공성과 공공의 이익을 보존하고 추구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 관대한 시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정부-시장-언론에 이르는 이 견고한 삼위일체가 소위 ˝합리적 이성과 그에 따른 소수의 이익˝으로 귀결되었다면 이제 이 시점에서 시민인 우리가 다시 ‘공중‘이 되어 이러한 시스템에 대해 반기를 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우리가 정의로운 사회에서 살고 싶은 아주 기본적인 욕구에 대한 대답˝이며, 이 책의 저자가 스스로 언론계의 개혁을 통해 근본적으로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이기도 합니다. 끝으로, 과거에 스치듯 지나가며 봤던 어떤 이의 ‘신자유주의가 자유주의에 반하거나 배신을 한 것은 아니다‘라는 단언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것인지 저는 하인드의 이 책을 통해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사적 이익을 좇다가 붕괴 직전에 놓인 금융 시스템을 국가가 구제하는 순간, 정책 수립에 있어서 일반 대중의 의미 있는 역할을 부인하던 주장은 설득력을 잃었다

부와 권력을 가진 자에게 맹목적으로 의지하는 자는 결국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면 불의에도 눈 감는다

현 시대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칸트가 말한 의미, 그리고 일반적인 의미에서 공적으로 이성으로 발휘할 수 있을지, 즉 어떻게 사심없는 개인으로서 타인과 성공적으로 소통하는 방식으로 이성을 발휘할 것인지에 대해 숙고하라고 촉구한다

공중에 봉사한다는 공공 서비스 정신은 점차 그 내막과 동기가 불분명한 ‘국가에 봉사하는 정신‘으로 변질되어 갔다

신자유주의에 적극적으로 영합한 영미의 군산복합체는 정부 고용, 로비 활동, 기업 경영, 개인에게 유리한 순환계로 이해된다

과거 조지 W. 부시 정권은 핵 테러 위협으로 사회적 히스테리를 조장하고, 불안감 해소용 선입관을 꾸준히 만들어내 국민이 진실을 못 보고 화려한 총천연색의 도덕적 감상에만 젖어 국가가 하는 일을 긍정하게 만들었다

신자유주의 교리는 온갖 진지한 외양을 갖추고 국민에게 반복적으로 주입되었다

미국에서는 공화 민주 양당에 대한 오랜 재정 지원을 통해 재계는 정치 논쟁이 일정한 선을 넘치 못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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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천장의 비밀 - 남자 일과 여자 일은 따로 있는가? 다윈의 대답 시리즈 4
킹즐리 브라운 지음, 강호정 옮김 / 이음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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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즐리 브라운은 미국 덴버 대학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샌프란시스코에 소재한 로펌인 모리슨 & 포스터를 거쳐 현재 미국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시의 웨인 주립대학의 법과대학 교수로 재직중에 있습니다. 그는 남녀 고용 차별법에 대한 관심과 남녀간의 진화론적인 차이에 따른 사회적 및 법적 영향 들을 다루는 글을 주로 써왔는데요. 몇가지 그에 대한 기사를 살펴보니, 페미니스트들에게 상당한 공격을 받고 있기도 했습니다. 얼핏 이 정도 맥락이면 그가 엄청난 여성 차별주의자로 오해할 수도 있겠는데요. 전혀 그렇지 않고 특히, 인간의 본성 자체에서 남녀의 구분을 진화론적이고 사회학적인 측면에서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학자일 따름입니다. 이 책은 지난 1999년에 원제, ˝Divided Labour : An Evolutionary view of Women at work˝로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1년 12월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또한, 이 ‘유리천장의 비밀‘이라는 책은 동 출판사의 ‘다윈의 대답‘이라는 시리즈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일단 먼저 한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 있는데요. 출간 당시에 인쇄소에서 문제가 있었던지 아니면 편집이 잘못되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페이지 맨 상단에는 글자 인쇄가 짤려 나온 흔적이 있습니다. 제가 구입한 판본만 이 지경인지는 모르겠지만, 책을 보는 내내 뭔가 어처구니가 없는 기분이 들기도 했는데요. 여기서는 이 정도까지만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킹즐리 브라운의 다소 얇은 분량의 이 책은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고 있는 기업들에서 고위 임원직으로 나아가는 여성들이 남성들에 비해 현저하게 낮은 비율을 보이고 있는 것에는 사실상 ‘유리천장‘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진화론적이고 지극히 현실적인 반론을 담은 글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저에게는 저자인 브라운이 진화론적인 차이, 유전학적인 대비 및 사회학적인 기준으로 이 페미니스트들의 왜곡적인 인식을 반론하는데 할애하고 있으며, 이러한 논증 가운데 중요한 부분은 바로 오랜시간 동안 인간의 남녀가 진화론적으로 분화되어 이룩한 인간 본성의 따름이라는 점이 매우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결국, 1장에서 그가 규정하고 있듯이, ˝가부장적인 사회구조는 성차의 결과물이지 원인이 아니며, 마찬가지로 이러한 논증 가운데 중요한 점은 인간의 성차가 사회화에 따라 발생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거의 문제 제기가 없으면서도 그 성차가 생물학적인 원인에 근거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다분히 회의적인 의견을 제시하거나 면밀한 증거를 요구˝하는 반대에 있는 다수의 이중적인 태도를 꼬집고 있습니다. 사실 이 지점에서는 인간의 사회화만큼이나 오랫동안 이어져 온 진화론적인 측면이 등한시되고 있다는 점을 저역시 인지할 수 있었는데요. 굳이 에밀 뒤르켐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어떤 현상이나 이론에 긍정하든 반대하든 그것을 통해 자신이 적절한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그에 수반하는 많은 정보와 이론이 필요합니다. 외눈박이 이론이 그 자신 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사회를 병들게 했다는 점은 지난 역사에서 수도 없이 그 사례를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인식적 측면에서 브라운의 이 글은 단순히 반론에 이르는 결과물을 넘어 학문을 추구하는 모든 지식인이 갖춰야 하는 태도라고 여겨집니다.

2장에서는 이러한 논증이 전개됨에 따라 왜 인간의 남성과 여성이 기질적으로 다른가에 대해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본문 4장과 5장에서도 언급되는 바와 같이 남성이 그 특유의 본성, 즉 ˝공격성, 야망과 추친력, 강력한 경력 추구성 및 위험 부담에 대한 각오˝를 갖고 있으며, 여성은 반대로 안정지향적이고 무조건 댓가에 따른 반대급부를 원하는 등의 성향차이가 오늘날의 기업 경영자들이 보다 많은 남성 임원을 뽑는데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남성은 이러한 출세지향적이고 욕망의 일선에 한가운데 있는 반면, 여성은 아이와 가정의 안위에 몰두하고 이런 여성들이 결혼을 해 가정을 꾸렸을 경우 보다 더 안정 지향적이 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물론 2장에서 호르몬의 영향과 태아 시기에 발생하는 성세포의 확장과 성의 확정 등을 통해 의학적인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로 근거를 확대하고 있습니다만, 아주 여실히 현실적으로 봤을 때 다시 앞선 기업의 경영자들이 ˝높은 책임감을 보이는 사람에 대한 보상을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저자는 단언하고, 이러한 자본주의적 기조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체제 전반을 다 뜯어고쳐야 하는데 과연 기업 경영인들이 이들 페미니스트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일 것인가에 대해선 매우 회의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더불어, 5장에서도 ˝여성이 직업에 대한 외골수적인 헌신을 보이지 않는 주요한 이유는 아이들에 대한 헌신 때문이다˝라고 단정하고 반대로 그 고위 임원에 오르는 40대 후반에서 50대의 남성 임원들이 사실상 여성들 뿐만 아니라 더 많은 같은 처지에 있는 남성들을 딛고 올라선 결과물로서 이 점 또한 망각해서는 안된다고 그는 강조합니다. 즉, 이 위치에 있는 고위직 남성들 또한 그런 비슷한 유형의 수많은 남성들과의 경쟁에서 그 자리를 쟁취한 것으로 이러한 배경이 자본주의적 경쟁 체제의 본질적인 측면이라는 점을 사회학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면, 오히려 백안시하며 이 체제를 뒤집어 엎으라고 말을 하는 용기를 보이거나, 아니면 이러한 경쟁에서 밀려난 남성들과 여성들을 모두 구제할 수 있는 사회적 안전 장치를 만들어 내는데 목소리를 높이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더 현실적인지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이해될 것입니다. 물론 제가 터무니없이 무조건 자본주의 자체를 옹호하고자 쓰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자의 인식과 논증대로 우리 인간의 본성 가운데서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아예 단 한가지 사회적인 측면의 사회화에 따른 남성 위주의 가부장제도가 악이 되었던 것이 아니라 고대 수렵시기의 부족사회부터 인간의 오래된 역사를 통해 각자의 DNA에 이어져 내려왔고 이러한 인식적 배경 없이는 이 남녀의 근본적인 차이를 이해하는 데 불가능하다는 점을 밝히고 싶습니다.

그런 부분에서 더 많은 자원을 가진 남성과 결혼을 하려는 많은 여성들의 기본적인 욕구가 이것을 속물 근성이라는 사회적 잣대로 몰아가기 이전에 이미 우리의 조상들은 이러한 최소한의 가정에 대한 안전책을 되물림해 왔으며, 이 지점에서도 마찬가지로 사회학적으로는 이를 쉽게 용인하기는 힘드나 그러한 배경이 있다는 점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이런 이해 가운데 오랫동안 인류의 결혼제도가 유지되어 왔고, 심지어 지참금 제도와 같은 각 문화의 고유성들은 앞선 안정을 지향하는 여성들의 본성 문화적으로 내면화시켜 왔다는 아주 현실적인 증거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저자의 논증이 수용할 만큼 설득적이었다면 결론에 이르러 저자가 써내려간 ˝여성을 오늘날의 사회구성의 희생물로 규정하는 대신 남성을 불리한 성으로 모는 것도 쉬운일이다˝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따라서, ˝유리천장보다 더 적절한 비유는 ‘거미줄천장‘일지도 모르겠다. 여성이 ‘볼 수‘ 있는 벽이지만 지나가고자 하는 사람을 잡아두기에는 너무 약한 벽 말이다˝라는 5장의 결론과 글의 전체적인 결론이라 할 수 있는 ˝인간 본성 자체를 바꾸려는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기보다는 인간 본성과 합치되도록 환경을 변화시킴으로써 성공적인 해결책을 찾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라고 모두에게 제언하는 이 말 한마디는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는 매우 명백하다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더 한마디를 덧붙인다면, 지금의 부화뇌동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이러한 사회학적인 결과물에 집착해 무턱대고 어떠한 고려 없이 체제의 변화만을 요구하는 것은 과거 사회진화론자들이 인간의 급을 나눠 자본주의에 더 용이하도록 고안한 이론을 전파하는데 지식을 사용했던 것과 별반 다름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대 페미니스트들이 여성 해방의 대해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은 성 역할을 제거하고 여성을 가사노동의 의무에서 해방시키는 일이라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본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시간 할애와 열정을 던질 것에 대한 각오가 있느냐의 여부는 직장에서 임원 지위로 진입하는 필요한 중요 조건이다

고용주들은 높은 책임감을 보이는 사람에 대한 보상을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여성의 낮은 비율 (고위 임원)이 조직내의 결함으로 인해 나타난다는 것은 더 불분명하다

남녀간에 가장 일관되게 나타나는 차이 중의 하나는 공격성 aggressiveness 에 관한 것이다

만일 여성이 자신의 경력을 위해서 가정을 희생시키려는 의지를 줄인다면 이 결정은 자유 선택의 결과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집에 머물러 있으며 아이들을 돌보길 원하고 오랜 기간에 걸쳐 부인에게 의존하기를 원하는 남성은 매우 드물다. 또한 그런 남편을 부양하면서 그가 성적으로 매력이 있다고 느끼는 여성은 더욱 드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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