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리얼리즘 - 대안은 없는가
마크 피셔 지음, 박진철 옮김 / 리시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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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마크 피셔는 영국 출신의 진보적인 사회철학자이자, 비평가, 문화이론가 및 저명한 언론인이기도 한데요. 더욱이 사적인 측면에서는 개인 블로그를 통해 영국의 여러 현안에 대해 글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스마트한 글쓰기‘를 몸소 실천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를 뜻하는 ‘k-punk‘는 꽤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저자가 오스트리아 출신의 진보적 언론인 로버트 미지크와 비슷하게 공통된 관심사, 유사한 방향성을 가진 인물로 해석되기도 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그는 여러 언론사에 직접 칼럼 형식으로 글을 기고하기도 하였으며, 여러 편저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피셔는 스스로 우울증 증세로 인해 48세라는 매우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는데요. 이에 역자 역시 이에 대한 안타까운 소회를 남기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자본주의의 사회병리적 현상을 논하면서, 영국의 우울증 관련 치료비 청구가 이미 건강보험공단에 들어가 있다면서 몇번이나 이 사례를 소개하고 있는데요. 피셔 역시 자신의 우울증을 극복하지 못하고(물론 극복할 수 없는 케이스도 있습니다) 생을 마감한 것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슬라보예 지젝 역시 이 글에 대한 특별한 헌사를 남기고 있었는데요. 촉망받는 학자이자 사회학 이론가가 이리 빨리 세상을 등진 것은 적잖이 불행한 일로 여겨집니다. 아마도 영국에서 그의 유고집이 출판된 것으로 보이는데요. 국내에도 빨리 번역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이 책은 원제 ˝Capitalist Realism : Is There No Alternative?˝로 지난 2008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8년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비교적 의미심장한 부제인 ˝대안은 없는가˝는 약간의 중의적인 의미로 마가렛 대처를 비판하기 위한 의미도 갖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지젝과 바우만의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한 탐구심과 대체로 일맥상통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자본주의는 유명무실한 포스트 포드주의를 거쳐 성공적으로 신자유주의와 결합되어 지금의 시기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이에 저자는 ‘보모 국가‘, ‘거대한 정부‘에 대한 일련의 신자유주의자들의 공격을 논하면서, 이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안무치하게 2008년 적극적으로 정부의 도움을 받았다면서 맹렬히 비판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들 신자유주의자들이 견고하고 내면화 된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다면, 일찍이 거대한 거품을 안고 있던 금융시장을 경고한 누리엘 루비니와 라구람 라잔을 일언지하에 일축한 저들이 천연덕스럽게 정부의 ‘특별한 구제 금융‘을 받은 것은 그 자체로 아이러니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과거 구소련의 공산주의를 무너트린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승리라는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저 ‘역사의 종말‘과 매우 비슷한 어감이 느껴집니다. 더욱이 어느 정도 자본주의가 모순을 안고 있지만 이를 대체할 대안이 명확하지 않다는 수많은 ‘안정주의자들‘과 신자유주의를 정부와 시민들에게 사실상 강요한 파시즘적 신자유주의자들을 우리는 양껏 비판하면서도 언제든지 ˝우리가 자본주의적 거래에 쉽게 응할 수 있는 환경에 놓여있다˝는 저자의 일침은 많은 사람들의 부실한 양심을 칼로 난도질 하는 것과 유사한 의미겠죠. 사실 이러한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합에 따른 파행과 사회의 파편화에 대해 오로지 ‘건전한 비판을 상실한 좌파의 몰락‘이라는 핑계로 그동안 죄의식을 애써 떨쳐 왔는데요. 여기서 분명한 것은 우리는 피해자이자 동시에 가해자라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조지 소로스를 비롯한 수많은 체제 안정주의자들은 우선 자본주의가 일으키는 수많은 사회병리적 현상을 애써 무시하면서, 자신의 양심과는 아랑곳 없이 이러한 현상을 오로지 개인의 문제로 국한시키는 신자유주의자들과는 사뭇 다르기는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들 역시 적당히 인정하고 타협하며 ‘적잖은 자본을 소유‘ 하기에 이릅니다. 이처럼 안정주의와 반대의 격렬한 신자유주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이익에 따라 구분되기도 합니다. 마크 피셔는 이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창안하면서 어쩌면 신자유주의 자체의 문제는 오로지 이익을 맹종하는 그 이데올로기 자체로서 다른 정치적 이데올로기들 및 신념을 쓸모없는 고리타분한 영역으로 몰아세우는 데 있을겁니다. 이것은 그동안 수많은 사회학자들이 밝힌, ˝신자유주의 자체가 시장에서 정치를 몰아내는데, 온갖 파렴치한 노력을 기울인 과정˝에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것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인 ˝레이건주의적 인간 homo reaganus˝이 시사하는 바는 그래서 극적입니다. 사실 저에게는 이러한 논증보다 더 관심을 끈 부분은 왜 보수주의자들이 신자유주의와 쉽게 결탁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서였습니다. 앞선 물음에 대해 마크 피셔 만큼 정확히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 같기도 한데요. 물론 자신의 생각이 담겨 있기도 하지만 알랭 바디우와 데이비드 하비의 입을 빌어 말합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 정치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계급 권력 및 특권으로의 복귀와 관련되어 있다˝ 는 해석입니다. 즉, 오늘날의 각지의 보수주의는 바로 민주주의 내에서 소유한 자본으로 인정받는 일종의 특권 정치를 하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동안 첨예화 된 능력주의 meriotocracy 와 연계되어 있으며, 자본 이익의 극대화와 이기적인 소양에 대한 전반적인 긍정적 효과를 강조하는 일련의 사회적 작업이 모두 포함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애덤 스미스를 ‘시장 자유 경제학의 화신으로 만드는 작업‘도 이 지점에 포함되었다고 할 수 있겠죠.

따라서, 과거 자유주의의 이행과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의 강요는 이처럼 완전히 다른 체제일텐데요. 전자의 이행은 계몽주의적 시각에 입각해 인간을 진정한 해방에 이르게 하는데 힘쓴 것이며, 후자는 다수 시민의 자유나 권리에는 별 관심이 없으면서 오로지 돈을 가진자들의 자유, 시장을 완전히 법으로부터 탈피시켜 진정한 자유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제가 이런 글을 쓰면서도 오싹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수가 없었는데요. 무슨 묵시록과 같은 음모론을 피력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포스트 포드주의를 거쳐 이행된 자본주의의 유일성은 그렇게 간절히 믿고 있는 것만큼이나 병리현상 내지는 심각한 모순을 초래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많은 경제학자들은 반대하고 있습니다만, 현재에 극도의 빈부격차와 경제적 불평등 및 사회적 격차는 건전한 자본주의를 위한 도덕주의적 관점과 민주적 통제를 손쉽게 제거함으로써 발생한 결과입니다. 이 민주적 통제에 경기를 보이는 경제학자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고, 이에 많은 정치인들이 동조하고 있는 것도 현실입니다.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에 반해 우월한 위치를 획득함으로써 먼저 자본주의를 고려할 것을 모든 정부들이 강요 받았습니다. 물론 저는 이를 완벽히 타파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본주의 체제를 공들여 좀 더 인간적으로 만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수많은 이론적 잣대와 정치적 가능성들을 배제시켜 왔던 것에 큰 문제가 있는 것이죠. 마크 피셔가 몇번이나 영국 내에서 우울증을 건강보험공단의 헤택을 받을 수 있는 질병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은 인간성을 상실한 자본주의 자체가 시민들의 건강을 해치고 있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수년간 누적되어 온 이러한 결과들이 사회와 나아가서는 국가 자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본래의 사회 계약과 시민의 삶을 위해 정부가 필요한 당위성 등을 고삐풀린 자본주의가 위태롭게 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으며, 신자유주의를 비롯한 시장자유주의적 경제이론에 마땅한 비판을 거부하는 행태로 이어져 왔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저자인 마크 피셔가 경제학적인 인간의 태동 같은 것을 마땅하고 자연적인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자크 라캉의 정신 분석을 통해 비판하고자 하는 점은 꽤 특별한 부분이라 할 수 있을겁니다. 이를 통해 슬라보예 지젝의 또다른 독창적인 연구의 진면모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인데요. 지젝이 그만큼 라캉에 대해 연구하고 알린 것만큼 ˝많은 시민들이 그게 당연한 것이다˝라고 여기지 않게 되는 매개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지젝의 작업은 마땅히 찬탄을 받을만 하며, 이러한 지식인의 존재는 전세계인의 입장에서는 실로 귀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논의를 더 이어가자면 신자유주의의 이행에서 비롯된 관료주의적 이식은 ˝자본이 필요한 데로 정부가 협력할 필요가 있다˝는 식의 혁명이 되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이러한 경제사회적 매커니즘은 모든 자유주의 경제를 채택한 나라들에서 보여지고 있고, ‘복지의 다운사이징‘을 차치하더라도 자본의 축적 가능성과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거대한 소수 자본가들에 의해 세계 체제가 좌지우지 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저자가 단순히 오늘날의 세계를 ‘포스트 모더니즘적‘ 세계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거의 다른 용어로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고 밝힌 것입니다. 정말 훌륭한 해석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앞선 1장에서 간략하게 의미를 밝힌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대안은 없다‘라는 마거릿 대처의 독트린이 야만스러운 자기-충족의 예언이 되었다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도덕주의적 관점을 자본주의에 새롭게 강요하는 것을 골자로 한 일부의 사상적 움직임이 있기는 합니다만 신자유주의자들의 조직적인 거부는 이미 정평이 나 있습니다. 결국 지젝의 예언대로 ˝자본주의가 망하는 것보다 전세계가 멸망하는 것이 빠를 것이다˝라는 뭔가 앞뒤가 바뀌어 버린 것 같은 건전하지 않은 의구심을 정립시키는 것 같은데요. 전세계가 망하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자본주의가 바뀌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문장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것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가 초래한 정부의 주변화라는 결과는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면서도 보모 국가는 지속적으로 적대시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고 저자는 일침하고 애초에 이 신자유주의자들이 이데올로기 자체를 배격하는 것에는 사실상 이들에게는 이데올로기 자체가 없기 때문일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의미는 양가성이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만 문제는 이들의 힘이 이미 너무나 거대해 일반 시민들이 최소한의 견제에 나설 수 있는 토양을 이미 상실했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피셔의 논의대로 오늘날의 현실이 과연 어떠냐로 시작해 이를 어떤 식으로 이해해야 할 것인가로 종결될 만큼 녹록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자본주의 자체를 더 강화시키는 이유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자본주의의 개선의 필요성은 있으나 참고 기다려라 라거나, 시장 자유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배격한다 는 양자간의 택일을 강요받는 상황이 역사적 진보와 어떤 연관이 있을지는 매우 불명확합니다.

일찍이 애덤 스미스는 생산 능력의 확대가 인류의 비약적인 발전을 비롯한 여러가지 청사진을 기대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나날이 발전하고 있던 영국의 사회상은 역시 그를 고양시켰을 수도 있겠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미스는 당시 설익은 시장이라는 개념 자체에도 ‘도덕‘을 제외시키는 것은 필사적으로 반대했을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지식인들이 어용이 되지 말아야 하지만 이미 로버트 미지크가 비판한대로 자본에 종속된 지식인들이 대부분인 것은 오늘날 우리를 위협하는 대량 살상 무기 만큼이나 일방적인 상황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피셔의 이 책은 귀중한 글이며, 그의 짧은 생애가 더욱 아쉽게 느껴지는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약간의 논외로 네트워크 시대가 도래한 지금의 정치적 변화가 우리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개선 가능성이 될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피셔는 이에 대해서도 소위 종래의 자본주의 문화를 비판한 ‘힙한 문화‘ 조차도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와 밀착할 수밖에 없었다며 진단하고 그저 이 세계가 매트릭스 따름이 아니라는 자포자기로 끝나기 전에 뭔가 희망이 보여야 하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본문의 보모 국가와 관련해 당시 신자유주의적 정부가 유포한 복지의 여왕이 얼마나 터무니 없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 조차도 자신의 저서에서 당시 대처와 레이건은 복지 예산을 삭감하는 것은 아주 손쉬운 조치였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베를린장벽이 붕괴된 후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큰소리로 외쳤던 악명 높은 ‘역사의 종언‘에 우리 자신이 처해 있음을 깨닫고 있다

자본주의가 나쁜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는 동안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자유롭게 자본주의적 교환에 가담할 수 있다

진정한 정치적 행위 능력을 되찾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욕망의 층위에서 자본의 무자비한 분쇄기 안에 들어가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은 사회주의에 반대하면서 종종 하향식 관료주의가 계획경제에서나 볼 수 있는 제도적 경화증과 비효율성을 야기한다며 맹비난했다

시장의 명령과 관료주의적으로 정의된 ‘목표‘의 이같은 결합은 현재 공공서비스를 규제하고 있는 ‘시장 스탈린주의적‘ 실천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알랭 바디우와 데이비드 하비) 두 사람이 보기에 신자유주의 정치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계급 및 특권으로의 복귀와 관련되어 있다

자본주의적 기업들이 사회를 책임지고 보살핀다는 공식 문화와 다른 한편으로 기업들은 사실 부패하고 무자비하다는 등의 널리 퍼진 앎 사리의 분할이 그 특징이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가 초래한 정부의 주변화라는 결과는 받아들이기 거부하면서도 보모 국가는 지속적으로 적대시하는 태도는 불신을 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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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믿는 자들의 민주주의
제랄드 브로네르 지음, 김수진 옮김 / 책세상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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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출신의 사회학자이자 작가인 제랄드 브로네르는 파리 디드로 대학의 교수이자 프랑스 인지 사회학 분야의 저명한 이론가이기도 합니다. 특히 그는 인종 혐오와 종교적 맹신과 같은 사회 현상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으며, 특히 프랑스 정부가 주도한 ‘지하디스트 급진화 예방 프로그램‘에 참여한 바가 있습니다. 물론 저 지하디스트 급진화 예방 프로그램‘이 과거 미군에 의해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수용소에서의 전쟁 포로 학대와 같은 음험한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만 이 프로그램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으리라 됩니다. 프랑스는 이웃 국가인 영국과 유사하게 중동에 있어서 이해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종교가 어떻게 인간을 폭력적이고 급진적으로 만드는 것에 대한 관심일 뿐만 아니라 근래 몇년 동안 유럽 사회학 학계에서도 이와 같은 맹종과 맹신에 대해 관심이 많기도 했습니다. 특히, 프랑스는 알제리와 튀니지 출신의 이슬람 이주민들이 이미 상당수가 유입된 상황이기에 자국내에 현존하는 이슬람 사회와 정치문화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 상황임은 다들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이런 면에서 저자는 ‘혐오감에 대한 사회학적 의미‘와 같은 논문을 쓰기도 했고, 지금 소개해 드리려는 이 책에서도 개략적으로 포용된 민주주의 및 민주정치가 어떻게 ‘쉽게 믿는 자들에 의해 위태로울 수 있는가‘에 대한 앞선 함의가 일정 부분 연관되어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저자가 언급하는 민주주의의 3요소인 ‘알 권리와 말할 권리 그리고 결정할 권리‘의 기본적인 토대가 악용될 수 있다는 점을 꽤 신중하게 의견 피력을 하는 것으로 일단 짧게 나마 이 책의 주요 주장을 갈음해 보려고 합니다. 이 책은 지난 2013년 원제, La démocratie des crédules 로 프랑스에서 출간 되었으며, 국내에는 2020년 12월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오늘날 광범위한 인터넷 검색 시스템을 비롯한 손쉬운 정보화 시대에 있어서 구글과 같은 거대 인터넷 기업이 편의적인 검색 체계를 도입해 일종의 ‘인지 시장‘을 주도하는 상황을 저자는 꽤 회의적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검색을 통해 제공되는 정보 자체의 신뢰성을 차치하더라도 페이지에 나타나는 글 전체를 제대로 보지 않고 대략 특정해서 받아들이는 시민들의 행태에 대해서도 저자는 우려를 금치 못하고 있었는데요. 이 글의 1장과 2장은 이러한 매커니즘에 대한 신랄한 평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책의 제목이 말하고자 하는 ‘쉽게 믿는 자들‘이라는 관점은 ˝과거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의 과학자들이 이미 완성한 화성 식민지에 임기내에 몇 번이나 방문했다˝와 같은 음모론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로 이 귀가 얇은 자들이 인지 편향과 확증 편향을 통해 ‘신념화‘하는 과정을 2장에서 소개하는 ‘찰스 포트‘를 통해 약간의 이론화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소개하는 찰스 포트는 자신이 이 세계의 모든 지식을 흡수해 두각을 나타내 보이겠다는 황당한 야망을 가진 사람이었는데요. 이러한 그의 집착은 후에 ‘포티언‘이라는 일종의 괴현상을 발생시키기도 합니다. 이 찰스 포트는 지구가 평평하다는 주장을 철썩같이 믿기도 했습니다. 그에 대한 저자의 첨언에 의하면 그는 ˝미치광이도 그렇다고 바보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결국 이런 음모론자들이 정신병이 있거나 편집증적인 증상이 있을것이라는 추측은 상당 부분 잘못된 것이죠.

이와같이 근래 대표적인 음모론의 역사는 ‘9.11 테러를 미국의 CIA가 일으켰다‘는 주장과 유사한 것들입니다. 많은 증거를 갖고 있는 지극히 당연한 사건에 대해서도 의심을 갖고 파헤치는 수많은 인터넷 탐정들과 이것을 조장하는 많은 시민들, 그리고 심지어는 ˝그 어떤 부류의 직업보다 정보의 신뢰성과 경쟁 간의 모호한 관계에 직면한 당사자들‘인 기자들에 의해서도 이러한 분위기는 더욱 조장됩니다. 이를 아주 간단히 얘기하면 이러한 가짜 정보들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돈이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이를 획책하는 이들에게는 과도한 관심과 지명도 혹은 업계의 선구자와 같은 허위로 과대 포장된 일종의 정신적 고양감을 가져다 주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단순히 세상에 너무나 할일 없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는 모든 걸 일축해 버리는 소리로 비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불행하게도 이러한 광범위한 현상의 결론에는 ‘전체주의‘가 좀 더 가까워지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기에 이는 우리의 민주주의 정치에서 뿐만아니라 인류의 역사에서도 꽤 불안한 현상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즉, 히틀러에 의해 시작된 나치는 처음부터 단순한 궤변을 넘어서는 황당한 논리들로 다수의 독일인들을 세뇌시켰기 때문입니다.

저자인 브로네르는 이같은 병적인 현상들에 있어 과연 대중이 특유의 비범함을 보이며 일축시킬 수 있겠는가에 대한 질문에 다소 확답을 피하고 있었습니다. 다수의 목소리를 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고 이것은 그 사람들의 교육 수준과는 상관이 없는 어느 정도 순수한 증오가 기반되어 있죠.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역사에서 전체주의를 통해 생생히 목격을 한 바가 있고 오늘날 비일비재한 인종혐오라든지 성차별 및 소수자에 대한 증오는 맹렬힌 포퓰리즘과 결합해 현재 유럽 사회에서는 분명 심각한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조심스레 저자는 ‘신념화에 대한 맹신과 맹종에는 부족한 교육 수준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습니다만 민주주의의 상대주의적 관점도 이를 ‘다양한 의견의 개진‘이라는 압묵적인 수용도 분명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독일과 프랑스에서 보이는 ‘과거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인정하는 않는 수많은 의견들˝에 대해 법적인 처벌을 하고 있는 연유에는 건전한 사회를 터무니 없는 파편화에 이르게 할 수 있기 때문일겁니다. 사회의 안전성을 거부하고 불안과 폭력을 조장하는 수많은 음모론들의 이면에는 민주주의 자체에 거부감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주 사회가 이만큼 취약하니 ‘말할 권리‘로 포장하여 일종의 인간의 불확실성을 더욱 조장하는 것이겠죠. 그러다가 소수 전문가의 권력이라든지, 더 나아가서는 엘리트들의 소위 과두제의 필요성의 불이 붙을 것입니다. 여기에 버틀런드 러셀은 그다지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인간이 불확실한 존재‘임을 특유의 휴머니즘적 관점으로 설명한 바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회 계약이라는 것도 인간들의 불확실성을 의한 불안 요소를 방지하고자 고안한 장치일 수도 있을테죠. 물론 오로지 자신들의 주장만 존재하는 (과학적 증거와 논리적 근거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음모들과 거짓 정보들에 대해 시민들이 어떠한 분별력을 가질 수 있겠느냐에 대한 물음은 이러한 인터넷 시대의 우울한 측면임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회의적인 측면을 넘어서 민주주의 자체를 위협하는 것으로 분화되고 확장되고 있는데요. 일례로 ‘고삐풀린 정보 자유주의‘에 기반한 폭력적인 정치 현상인 ‘포퓰리즘‘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과거 도널드 트럼프가 오바마 전 대통령에 대한 출생지 불분명과 같은 주장에 대해 이면에 담긴 인종혐오와 더불어 이같은 거짓 정보를 심지어 우리나라 정치인들까지 인용하는 것을 보면 단순히 교육 수준과 지능의 문제에 국한된 것은 아님은 확실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하자고 하는 것은 분명 안될 일일 것입니다. 다만, 이 글 5장에서 밝히는대로 ˝전문가들의 평가가 대체로 안전한 정치적 결정을 기반해주는 현실˝과 관련된 사항 전부를 토론의 장으로 초대됨으로서 이 세계에는 전문가의 권위와 과학의 실효성이 점차 거부되고 있는 것도 분명해 보입니다. 사실 전문가들의 권력 자체가 남용되는 것은 민주주의 자체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반대로 특정한 전문 영역에 대한 일반인들의 논증 없는 거부감 또한 전반적인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죠. 저는 이 부분에 대해 저자와 약간 생각이 다른 점이 민주주의가 일찍이 모든 문제들에 대한 다양한 토론에 대해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을 결코 부정해서는 안되며, 특히 정치와 관련된 문제는 그 매커니즘이 전문가의 영역에 걸쳐 있다 하더라도 시민들이 다양한 의견을 개진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전문가 역시 증거에 기반한 논법과 제안을 피력하고 마찬가지로 이러한 증거에 기반한 결정 사항에 판단을 내린 정치 권력 자체에 반감을 가져서는 안되지만 전문가들이 자신들의 돈과 권력에 굴하지 않고 자신들의 양심에 의거해 발언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중요합니다. 바로 막스 배버가 비슷한 취지로 소위 전문직종의 양심을 강조한 이유일 것입니다. 따라서 테크노크라시‘와 같은 문제를 시민들이 합리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환경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전문가의 권위가 다소 퇴색되더라도 민주주의의 공개적 발언의 장이 마련되어 오용되는 전문 지식을 구별하고 견제하는 기능이 한편으론 마련되어야 합니다.

인류에게 있어서 민주주의가 완벽한 정치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수에 의한 소수의 억압과 같은 문제와 민주주의 성격상 혼란한 정치 상황 자체는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주장되어 왔습니다. 오늘날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진 베트남이 자신들의 정치 문제에 대한 어떠한 논의도 공개적인 자리에서 할 수 없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수많은 의견을 포용하거나 혹은 인정할 수 없는 그룹이나 특정 계층을 민주주의가 어디까지 수용할 수 있겠느냐의 물음도 있겠지만 보편적 상대주의라는 것은 소수를 억압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 장치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이처럼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자들 조차도 민주주의의 이러한 보편적인 상대성에 말할 권리를 보장받은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수많은 경제학자들에 의해 보호받고 있지만, 민주주의는 적나라한 비판까지도 수용할 수 있어야만 하는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민주주의 자체가 많은 결함을 가진 불완전한 사상이라고 힐난하기 이전에 이러한 건전한 기반을 거리낌없이 이용하는 자들을 일차적으로 먼저 비핀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4장에서는 ˝귀가 얇아 쉽게 믿는 자들의 민주주의는 새로운 형태의 포퓰리즘이 꽃필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저자는 전제하며, 포퓰리즘이라는 용어 자체가 가장 명예롭지도 못하면서도 가장 많이 공유되는 성향에 주어지는 정치적 표현이라는 다소 온건한 설명을 곁들이고 있습니다만 이 포퓰리즘이 우리의 판단 착오로부터 기생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와는 별개로 저자의 통찰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증오와 분노를 자양분으로 삼고 있는 이 포퓰리즘이 과연 어떤식으로 귀결되지에 대해 그리고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적지 않은 사람들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해서는 아마도 더 많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앞선 독일과 프랑스의 나치 부정에 대한 볍률과 마찬가지로 포퓰리즘이 돌이킬 수 없는 어떤 폭력과 죄없는 자들의 막대한 희생을 치루고서 겨우 ‘포퓰리즘 방지법‘과 같은 터무니없는 사후 약방문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뭔가 수사에 불과해 보일지도 모르는 우리의 지식 정보 사회가 일정 부분 제도권의 교육이 하지 못하는 일들도 하고 있기에 이른바 선한 행동을 추동하는 집단 지성의 존재 등과 같은 긍정적인 신호 또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저 모두가 자신들의 이성이 현명한 정치로서 발휘될 수 있도록 간절히 바랍니다.

같은 사회적 공간에 소속된 주체들 사이에 엄격한 협정을 맺어야만, 자유화가 진행 중인 다른 인지 시장에서 나타나는 주된 경향을 저지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인민을 배신할 가능성이 있는 정치권력의 통제를 위해 다소 형식적인 공간을 늘 마련했다

여성학자이자 정치학자인 캐럴 패이트먼이나 사회학자인 벤저민 바버 같은 이론가들은 시민 모두가 공적 사안에 뛰어드는 것이 진정한 정치적 자유의 조건이라고 보았다

다시 병에 대한 비유를 빌려 말하자면, 필자는 민주주의가 특벙한 기술적 여건 아래에서만 드러나는 유전병을 앓고 있다고 표현하고 싶다

한 집단이 사화적 가변성의 관점에서 아무리 다양하더라도, 인간의 사고를 이루는 불변요소들 때문에 오류를 향해 수렴할 수 있다는 가능성 말이다

어떤 포퓰리즘은 인미의 외국인 혐오증을 먹고 살고, 또 어떤 포퓰리즘은 부자와 권력자에 대한 인민의 혐오를 먹고 살며, 또 다른 포퓰리즘은 평등에 대한 인민의 지나치게 단순화한 인식을 먹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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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 - 인류의 재앙
프레데릭 마이어 지음, 임호일 옮김 / 소명출판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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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프랑크푸르트 출신의 교육학자이자 철학자였던 프레데릭 마이어 (혹은 메이어)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레드렌즈 대학 등 여러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는데요. 특히 평생에 걸쳐 영향력있는 인본주의자로 명성을 얻기도 했고 창의력 및 교육 문제에 관심을 갖고 많은 저술활동을 한 이력이 있기도 합니다. 이런 왕성한 그의 집필활동은 교육을 통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목적에 거침없이 일생을 헌신한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2007년 7월에 세상을 떠난 그를 그리며 전방위적인 사회 교육과 관련된 ‘프레드릭 메이어 소사이어티‘가 설립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책은 지난 2010년 원제, ˝Vorurteil - Geißel der Menschheit˝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6년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먼저 저자는 ‘편견‘과 관련된 해석과 관련해 ˝인간 상호간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적개심의 행동표본˝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사실 일반적으로 불특정 다수의 인간들이 모여 있는 사회 곳곳에 어떤 특정인들에게는 이성과 양심을 가진 인간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사고와 행동을 하는 케이스를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는데요. 애초에 각 개개인은 성별과 인종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만큼 자연적인 법칙을 인간이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한 편입니다. 평범한 자들조차도 가난한 사람들을 터무니없이 증오하는 경우와 중세시대부터 이어져 온 유럽의 반유대주의, 가깝게는 미국의 흑인들에 대한 혐오와 반발심, 심지어 여성에 대한 모멸적이고 증오에 가까운 도발은 무지몽매한 편견이라는 이름으로 서술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저 그런 터무니없는 편견에 가득찬 인사들을 단순히 ‘무지의 베일‘에 가려져 있다고 배려를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저들의 지능을 낮춰 보는 일이 될 텐데요. 이 글에서 소개하고 있는 일련의 폭력을 수반하는 편견에 대해 책의 원제대로 ‘인류의 재앙‘이 될 수도 있는 일이겠지요.

저자인 마이어는 이런 편견의 증오와 관련해 우선 시민들이 ‘프로파간다‘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는데요. 마찬가지로 현재 유럽에서 발생하고 있는 인종 혐오의 극우 포퓰리즘이 저런 말도 안되는 프로파간다의 전형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계층들의 사회에 대한 불만,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표면적인 증오, 분노의 감정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을만한 수단 등은 오늘날 포퓰리즘이 품고 있는 반사회적인 다의입니다. 이런 것들은 거듭 제가 밝혀 왔습니다만 최소한 인간이 인간임을 드러내는 이성과 양심이 있다면 충분히 분별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프로파간다가 아무리 귓가에 달콤하게 들린다 하더라도 그동안 읽어왔던 독서와 사고의 깊이와는 상관없이 최소한의 이성을 갖고 있는 인간이라면 충분히 제어할 수가 있겠지요.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얼마전에 구글이 공개한 자료들을 보면, 특히 2차대전 당시 나치가 자행한 유대인 학살과 관련해 이것이 날조되었다고 믿는 계층이 상당수라는 것은 그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단순히 믿고 싶은 것만을 믿는 행위 정도가 아니라 역사를 부정하고 진실에 눈을 가리는 행위일텐데요. 이러한 결과물들은 거의 프로파간다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을겁니다. KKK라든지 백인우월집단 등과 같은 무리들 말입니다. 지금은 미국의 티파티 운동이 꽤 그럴싸한 외형을 갖고 있지만 처음에는 저들도 진보주의에 대한 뜻모를 혐오와 자유시장에 대한 극한의 맹종을 거리낌없이 드러냈던 인사들입니다. 그래서 극단의 정치, 극단의 사상이라는 것은 저렇게 위험하다고 여기는 거겠죠.

물론 저자인 마이어 교수가 주장하는대로 저런 편견에 가득찬 인종주의와 정치 노선에 대해 그 반대편에 있는 건전한 시민들이 비폭력과 평화주의를 강조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자는 말컴 엑스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일례를 들며 증오와 혐오로 점철된 자들과 대항하는 입장에 서더라도 건전한 시민들은 결코 폭력에 물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익히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나치 치하의 수많은 시민들이 이 파시즘에 대해 봉기하지 못한 것은 사실상 ‘권위주의 상태‘에 승복하는 기류에 있었고 권위적인 인간들 반대에 있던 일반 시민들이 행동에 나서지 못한 것은 단순히 폭력 문제를 넘어서 단순한 행동조차도 꺼리게 되는 파시즘의 조직적인 분위기가 그만큼 어려운 문제였을 겁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에 대한 터무니없는 증오와 그들이 독일과 독일인들의 해악이 될 것이라는 선전 문구에 몸을 맡긴 자들을 차치하더라도 당시 일반 시민들조차 대응하지 못할 정도로 전체주의의 분위기라는 것은 애초에 그런 단계에 진입하지 않아야 하는 당위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약간 다른말이지만 마누엘 카스텔이 행동에 나서는 시민들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 공권력에 대한 공포라고 했었는데요. 새삼 정확한 말이라고 여겨집니다.

더 첨언하자면, 당시 나치 독일의 정치적 분위기와 히틀러에 의한 유럽 대전의 문제에서 외부 세계에서 (이를테면 미국과 같은) 이득을 얻는 자들이 있었고 오로지 경제 생산적인 측면에서는 돈이 되었기 때문에 히틀러의 나치가 어떤 식으로 규정할 지 혼란이 있었던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이에 저자는 파시즘 지도자들이 강조하는 자신들의 ‘무오류성‘을 그 반대의 의견을 애초에 제거하는 양상을 띠었기에 ‘자신만이 오로지 옳다‘는 주장을 펼치는 정치인들을 견제해야하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극우가 아닌 평범한 우파나 보수주의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극우 포퓰리즘 인사들이 내뱉는 이 선동과 정치질에 대해 최소한의 자정 작용을 할 수 있는 역할을 해야 할 텐데요. 현재 미국과 유럽에서 볼 수 있는대로 보수 정치인들 자체가 돈이 될 수 있는 것들과 자본이 따르는 데로 입을 맞추는 것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사실상 건전한 보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끝으로, 나날이 가중되고 편중되어 가는 이 극도의 편견의 시대에 저자가 그나마 해법으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진정한 민주주의의 발전이었습니다. 서로 대립되는 사람들이 혹은 서로 상대를 갖고 있는 정치적 단체들이 원할하고 진지한 대화를 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은 민주주의를 대체할 수 있을 만한 어떤 다른 정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하고 민주주의 자체가 어떤 정치나 그 결과물의 상위에 있다는 것을 그는 강조하는 것인데요. 사실상 건전한 민주주의자들이 많은 사회는 반대로 앞선 극렬한 병리현상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이유가 되기도 하겠죠. 물론 이는 조지 오웰보다 더 이상적인 관점입니다. 하지만 그나마도 건전한 대화라도 될 수 있는 사람들이 매우 적다는 것과 자본주의의 완전 무결성과 완전한 시장 자유와 같은 터무니 없는 것들을 비판없이 맹종하고 있거나 저들이 카를 슈미트를 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로지 우리 아니면 적이라는 논법은 우리의 민주주의를 외길로 모는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글을 이런 식으로 끝맺음 하는 것은 무슨 묵시록의 아류작과 같아 보이는데요. 이상하게 요즘은 유독 지그문트 바우만이 그의 유작 레트로토피아에서 예견했던 일들이 간혹 떠오릅니다. 우리의 정치에도 아직 희망은 있는 것일까요?


-본문 172페이지에 띄어쓰기가 잘못된 곳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보통 교육에서 ‘흑인들은 검은 영혼을 갖고 있다‘는 식의 윤색된 인종주의에 대해 저자가 비판하고 있었는데요. 한숨이 절로 나오는 구절이었습니다

민주주의는 하나의 통치양식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다. 민주주의는 정당 및 정치적 논쟁보다 상위개념이다. 심지어 민주주의는 자유를 위한 노력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닌다. 민주주의는 삶의 양식을 위해 있는 것이고, 경제적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관점에서도 인간적인 제반 관계 형성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파시즘에서는 유일무이한 통치자의 무오류성에 대한 신념이 매우 중요하다

소수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무조건 더 모범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개인의 광기는 전 문명사회의 광기와 비교해 보면 조족지혈에 불과하다고 니체가 설파한 바가 있다

보다 건설적인 미래를 맞이하려면 우리는 슬로건이나 선동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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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민주주의를 읽다 - 우리의 민주주의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유유 서양고전강의 5
양자오 지음, 조필 옮김 / 유유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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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타이완 대학의 역사학과를 졸업한 대만 출신의 대표적 인문학자인 양자오는 대만 내에서 시민들을 위한 열린 강연 및 활발한 저술활동을 펼치고 있는 등의 진보적 학자입니다. 그는 특히 대만의 여러 정치 외교적 문제를 다루는 데 탁월했으며, 시민들이 정치 바깥에 머물며 그저 수동적인 삶을 보내는 것에 대한 문제 의식이 큰 인물이기도 한데요. 일반적으로 제도권 바깥에 있는 지식인들을 반대로 제도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와 같은 활동을 경시하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규정된 상아탑 내에서의 확실한 지위만을 갖고 학문을 쌓는 것만이 능사이고 합법이던 시절은 오래전에 역사의 뒤안길로 저물었지만 아직도 제도권의 분위기는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어느 나라나 비슷한 모양입니다. 하여튼 저자인 양자오는 시민들 스스로의 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인물이며, 이 책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연결될 수 있는 논저라 생각됩니다. 이 책은 지난 2013년 원제, ˝以平等之名: 托克維爾與民主在美國˝으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8년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양자오의 이 글은 전문적인 학술서라기 보다는 대체로 평이한 정치학 입문서 정도로 여겨지는데요. 무엇보다 미국의 민주주의를 독해하는 목적을 갖고 있지만 대체로 알렉시스 토크빌이 바라본 미국의 민주주의를 쉽게 풀어내는 데 지면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토크빌의 역작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민주주의‘를 읽기 전의 독자라면 양자오의 이 글을 한 번 접해보는 것도 크게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평등과 민주주의의 사회적 요인을 분석해 본 7장이 다소 집중해서 읽어봐야 하는 지점으로 생각되었는데요. 이미 많은 학자들이 민주주의와 평등의 관계에 대한 여러가지 관점으로 논의를 한 이력이 있습니다. 그만큼 민주주의가 평등의 문제를 등한시 해서는 안된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반대로 민주주의에 대한 터무니 없는 의구심을 갖고 있는 엘리트주의자들이나 기득권에 대한 반대되는 이론적 근거를 쌓기 위해 노력한 결과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 부분은 지극히 정치적인 시선으로 고찰해 본 것이고, 아주 기본적인 접근에서는 민주주의와 평등을 따로 분리해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여기서 밝혀두고 싶습니다.

미국의 민주주의를 몇 마디 단어로 국한시킬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무리를 해서 적어본다면 아마도 ‘분권주의‘일 것입니다. 미국의 독립혁명 이후 건국 당시 ‘건국의 아버지들‘이 다수에 의한 소수의 핍박이나 권력이 특정 세력에 독점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 여러 측면에서 제도 수립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부분은 특히, 미국이 유지하고 있는 의회의 상하원제와 대통령을 선거인단의 합계로 선출하는 전통적인 선출 제도가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 글 1장에서도 잠깐 언급되고 있지만 연방 대통령이 각 주정부에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는 이유도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분권의 역사‘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최근에 행정 명령이라는 미명하에 주정부에 관여를 하려던 트럼프 전 대통령의 비화 또한 그러한 맥락입니다. 이것은 인구가 상대적으로 거대한 주가 그렇지 못한 주를 ‘인구의 수‘로 밀어부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상원을 각자 균등한 인원으로 분배했던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

바로 이런 특수한 상황에서 미 연방을 이룬 주들이 외교권과 대표권을 갖지 못하고 이를 연방 대통령이 대신 한 것도 주 정부의 자치를 보장하지만 그 이상의 권력은 부여하지 않은 꽤 면밀한 균형적인 제도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고유한 정치권력을 보장하는 각 주정부의 권리는 인정하면서도 그 위에는 ‘연방의 특별한 가치‘를 훼손할 수 없으며 (에이브러함 링컨 대통령의 경우일테죠) 이를 위반할 경우에는 응분의 대가가 따른다는 역사의 결과도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토머스 제퍼슨 시기까지 연방 대통령 조차 이러한 균형을 해치는 일들에 대해 경계하고 두려워하기도 했는데요. 특히 토머스 제퍼슨이 대통령령을 들어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사들인 것에 대한 일종의 자책감이 든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아마도 그는 앞선 일이 헌법이 보장하는 대통령의 권한을 넘어서는 일이라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유럽과 다른 미국만의 고유한 정치제도가 마련되는 시기에 이처럼 견고한 양심을 가진 지도자가 미국 건국 초기에 있었다는 것은 저자인 양자오가 유럽 종교에서 분리된 청교도들이 세운 나라라는 특성을 주요한 이유로 들고 있습니다만 일개 개인으로 국한해서 보더라도 꽤 대단한 일면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자신의 모국에서 사실상 실패했던 민주주의에 대한 실험으로 뭔가 좌절감을 맛보았을 수도 있는 알렉시스 토크빌은 당시 미국의 곳곳을 돌아보며 느꼈던 점을 가슴에 안고 귀국길에 오릅니다. 그는 ˝구체적으로 민주주의의 효과와 이익을 분석하고 가능한 한 솔직하고 담백하게 민주주의를 선택했을 때 도대체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게 되는지 설명했다˝고 저자는 밝히며 이러한 토크빌의 냉정한 태도를 사뭇 진지하게 분석합니다. 우리 프랑스인들에게 민주주의가 어떤 점에서 좋고 또 어떤 점에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지 일개 몰락 귀족에 불과했던 토크빌의 분석은 민주주의의 흐름 자체가 역사의 진보 가운데에 있는 큰 과정이라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저 소수의 인원에게 집중된 권력 정치 자체가 1720년대 이후 프랑스 역사에 부르봉 왕가의 복귀 혹은 나폴레옹에 의한 제정 수립 등 여러가지 정치적 부침 속에 있었던 민중들의 생활이 어떠했는지 그도 역시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의 속내를 여기서 다 밝힐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민주주의가 평균의 행복과 더이상의 악순환을 끊어낸다는 점에서 모두에게 이익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만큼은 분명해 보입니다.

오늘날 민주주의 제도 하의 ‘삼권분립‘과 같은 견고한 정치 견제는 바로 미국의 건국 혁명의 정신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미국이 ‘전세계 민주주의의 맏형‘이라는 수식어를 받게 된 것도 무리가 아니겠지요. 다만, 토크빌을 비롯한 한참 정착해 나가고 있던 당시의 미국 정치와 민주주의가 건국 초기에 심각한 정치적 갈등을 분권에 이양하고 각자의 삶과 정치적 자유를 연방이라는 이름하에 보장했던 것은 기득권이나 거대한 부유층이 없었던 그 시기에서나 가능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더욱이 미국 역사에서 흑인들을 노예 제도라는 틀에 몇 십년간을 얽매이게 한 채, 백인들만의 정치적 국가를 유지시킨 것은 산업 혁명 이후에 불어온 경제적 훈풍에도 불구하고 매우 불행한 일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온전히 경제권을 보유한 다수 백인들만의 민주주의라는 게 지금의 식견으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제가 아닐겁니다. 이 흑인들의 인권과 정치적 권리는 지금에도 큰 논란이 되는 것은 안타깝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끝마치며, 우리의 민주주의는 일부에게는 큰 이득이 되면서 다수에게는 인내와 인고를 강요한 파행된 자본주의로 인해 큰 위기에 봉착한 것은 분명합니다. 소위 보수주의자라고 자임하는 자들이 과거 역사의 진보를 이루었던 계몽의 결과인 공화와 민주주의를 목숨을 걸고 수호하지 않고 오로지 ‘보이지 않는 손‘만을 신봉하는 것은 일견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단순히 정치적 반대에 있는 사람들을 궁지에 몰아 세워 정치적 이익을 얻는 등의 건전하지 못한 정치 무대가 유사 민주주의의 그것으로 귀결한 건 실로 유감이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지금도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민주주의 자체를 공격하는 것에 어떠한 신념이나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는 그 맹목적인 관점을 과연 우리가 어떻게 봐야할지 의문입니다. 모두가 장미빛 전망으로 그려왔던 네트워크 시대의 민주주의가 온갖 가짜뉴스와 극한의 혐오, 인종 차별, 무지 몽매로 일그러져 가는 것은 자본주의 자체의 모순을 해결하여 권력을 잃었던 민주주의를 되돌리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문제임은 자명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가 없습니다.


-글 2장에서 몽테스키외를 인용하며 민주 공화제를 서술하고 있는데요. 백성은 언제라도 단결해 군주를 내쫓을 수 있다는 첨언은 장 자크 루소와 같은 입장이었습니다. 케네도 그러했지만 참으로 에둘러 말하지 않는 프랑스인들입니다.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하고, 국민은 국가를 이루는 형식을 결정한다

이러한 전 세계적 변화를 이끌어 내도록 자극하고 고무한 것이 하나의 주요한 힘, 곧 미국의 경험, 미국의 민주주의이며, 미국이라는 나라가 이토록 강대국이 됐다는 사실이다

토크빌은 자유를 두 가지로 나누어 이 문제에 답한다. 하나는 자연적 자유 natural liberty, 다른 하나는 시민적 자유 civil liberty 또는 공민적 자유이다

사회가 평등할수록 그 구성원의 자아가 갖는 가능성도 커진다. 다시 말해 자기 상상의 공간이 확대된다. 이러한 사회에서 그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면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 분명하고 엄격한 틀에 속박되지 않기 때문이다

토크빌은 평등하고 민주적인 사회는 차이를 별로 따지지 않고, 따라서 세부를 따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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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 - 도덕을 추구했던 경제학자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다카시마 젠야 지음, 김동환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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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저명한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였던 다카시마 젠야는 기푸현 출신으로 도쿄 상과 대학을 거쳐, 전쟁이 끝난 직후 도쿄 상공회의소의 교수를 역임한 바가 있습니다. 또한 히토쓰바시 대학 및 간토 가쿠인 대학의 명예 교수를 지냈습니다. 그리고 왕성한 저술 활동과 더불과 강단에서의 경력을 마쳤던 그는 지난 1990년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이력에서 조금 흥미롭던 부분은 경제학자로서 일본 제국주의 시기를 온전히 경험했다는 점과 사회주의 운동으로 당국에 투옥된 이력도 있었는데요. 이런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본 학자 치고는 미국과 유럽에 이름이 알려져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 책과 관련해 개인적으로 평가하고 싶은 부분은 저자인 그가 오랫동안 마르크스 연구를 해왔던 학자이고 마찬가지로 마르크스 연구를 위해 애덤 스미스의 연구까지 오랫동안 해왔던 부분은 꽤 적절한 객관성을 답보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해 보였습니다. 앞선 일본 제국주의를 살다간 지식인으로서 일본의 근대화를 짤막하게 논하고 있는 부분도 꽤 의미가 있지 않나 생각해 봤습니다. 이 책은 1968년에 초판, 이후 1990년에 개정판이 나왔으며, 일본의 유명한 지식 관련 출판 시리즈인 ‘이와나미 시리즈‘의 구성 도서로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국내에는 2020년 2월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우선,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저자인 다카시마 젠야가 많은 지식인들의 틀에박힌 애덤 스미스에 대한 연구를 약간 비튼 것으로 보이는, ˝이들 모두는 자신이야말로 스미스를 가장 잘 파악, 발전시키고 있다고 자신만만해 하고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흔히 신자유주의의 이론가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밀턴 프리드먼이 자유시장 경제학의 사조로 이 애덤 스미스를 무분별하게 인용하고 있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데요. 여기서 무분별이라는 단어는 애덤 스미스의 사상이 어떤 계층에 의해 너무 획일적으로만 이해되고 있다는 점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는 약간 다른 부분이지만 저는 한때 레오 스트라우스에 대한 매우 편파적인 입장을 갖고 있기도 하였습니다. 후에 여러 다른 독서를 통해 스트라우스가 그래도 사회과학 발전에 일정 부분 기여한 점을 인정하게 되었는데요. 물론 저들의 애덤 스미스에 관한 오독과 잘못된 이해를 앞선 스트라우스의 경우에 빗댈 수는 없겠지만 한가지 확실한 점은 이 신자유주의자들이 애덤 스미스의 사상을 의도적으로 곡해하고 있으며, 원래 스미스의 입장과는 달리 ‘무차별적으로 축적되는 자본가 계급의 이해‘를 마찬가지로 스미스가 동조했다는 식의 여러 불합리한 서술이 비슷하게 중요한 주장으로 발전되어 왔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여기 다카시마 젠야의 이 책이 이러한 애덤 스미스에 대한 일부 인식의 편의주의와 오해를 불식시키는 데 일정 부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애덤 스미스는 영국 도덕철학의 사조인 데이비드 흄과 개인적으로 가까웠던 것으로 이 책에서 서술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점을 들어 애덤 스미스의 ‘도덕주의적 인식론‘을 연결시키는 것은 그 범위가 조금 과도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원래 그는 사상가이자 도덕철학자로 이름을 알린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스미스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오랜 정치적 갈등 그리고 1707년에 이르러 두 국가가 합병이 이루어지면서 이러한 정치적 혼란기에 가톨릭 사회와 그 반대의 사회의 결합, 그리고 그러한 사회상의 도덕주의 문제를 꽤 중요하게 관찰했던 것으로 짐작되는데요. 18세기 계몽주의 시대가 꽃을 피우기 전에 인간 관계 및 사회 구조 전반의 고찰을 요구했던 이 ‘도덕주의 철학‘의 필요성은 스미스에게도 중요했던 모양입니다. 물론 많은 신자유주의자들은 스미스의 이 도덕철학의 함의를 일정 부분 알리지 않는데 주력하고 있기도 합니다. 저들이 보기에는 자유 방임주의자가 도덕 철학을 운운하는 것이 뭔가 맞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이겠죠. 마찬가지로 저자는 6장에서 당시 독일 경제학자인 프리드리히 리스트의 스미스 비판을 재반박하면서 여러가지 입장을 재정립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스미스가 ‘자유방임‘의 신봉자라고 판단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고 있습니다. 국부론에서 인용되고 있는 바와 같이 스미스는 꽤 노동자에 대한 애정을 피력하고 있었으며, 경제학과 관련한 스미스의 근본 사상은 ˝모든 시민은 본래 자유롭고 평등해야 하기 때문에 같은 양의 노동 (생산물)은 같은 양의 노동 (생산물) 과 교환되어야 하며, 이는 자유경쟁이 완전하게 이루어진다면 반드시 실현될 결과인 동시에 정의의 법과도 통한다˝고 언급합니다. 이는 스미스가 말하는 가치법칙의 본질적 내용이며 때때로 등가교환의 법칙의 주된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진술과 구체적으로 반대되는 것은 많은 신자유주의자들이 ˝적잖은 노동력의 소모가 있다 하더라도 무조건 자본가에 이득이 되면 그만˝이라는 입장입니다. 그동안 왜곡된 자유주의자들과 신자유주의자들이 꽤 공을 들여 애덤 스미스를 ‘자본가의 이론적 화신‘으로 홍보해 왔는데요. 이 부분에서의 본질적인 문제는 애덤 스미스의 이론을 곡해하는 것을 넘어 그의 저서를 반쯤 혹은 절반에 미치지도 않는 몇가지 짜맞추기식으로 자신들의 사조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인용해 왔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지점에서 신자유주의 자체를 어떤 ‘악(惡)‘으로 규정할 수는 없지만 자신들이 말하고자 하는 주장을 강화시키는 것에 너무 제한적이고 부분적으로 사상가의 저서를 인용하는 것은 문제라는 것이죠. 즉, 열 가지의 진실은 그 열가지 진실이 모두 밝혀졌을 때 진정성이 있는 것이며, 그 중 다섯 가지나 여섯 가지를 말하면서 진정성을 논하는 것은 크게 양심을 벗어나는 일이라 밝혀두고 싶습니다.

물론 저 역시도 애덤 스미스가 중요시했던 사유 재산의 문제라든지 스미스가 살았던 당시의 꽤 진취적인 경제 활동에 대해 거의 동의하는 편입니다. 지금처럼 왜곡된 소비 자본주의에 바우만과 같은 사회학의 거장들은 이를 비판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충분한 소비 또한 필요하다고 여기는 사람중에 하나인데요. 문제는 5장에서 언급되고 있듯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더이상 장미빛 낙원을 약속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자유주의 경제에 경도된 지식인들과 학자들이 이 보이지 않는 손을 자신들의 입맛대로 인용한다 하더라도 현실은 결코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겠죠. 역시나 이 부분에서도 파악되는 것은 신자유주의자들 대부분은 거대 자본 계급의 이익과 노골적인 자본 축적을 옹호하는 이론으로서의 애덤 스미스를 오용했던 것으로 이해됩니다. 일반적으로 토마스 멜서스가 가난한 계층에 대한 혐오와 소위 생태사회적 격리에 집중했던 것은 신자유주의자들이 권력 상황에서 주도권을 상실한 저소득의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에 별반 관심이 없다는 것과 일맥 상통합니다. 이 책에서도 짧게 논의되고 있습니다만 찰스 다윈을 오독한 사회진화론자들이 인간을 분류해 ‘낙오시키고 격리시키고자 하는‘ 잣대로 계층을 이해한 것도 마찬가지로 아주 명백한 관점입니다. 체제 자체를 ‘인간성‘을 제외하고 ‘도덕‘을 제거해 오로지 자본 축적의 용이함만을 찾는 것은 그야말로 전체주의보다 더 위험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끝으로, 이 책을 일독하게 됨으로 제가 얻은 한가지 귀중한 인식은 애덤 스미스가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인간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프랑스 혁명에 대한 그의 의견이 오늘날에 전해지지는 않지만 반대로 혁명 자체를 그가 좋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젠야 교수가 언급하는 스미스의 사상 곳곳에는 노동자들과 인간에 대한 애정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약간 상이한 예이기도 하지만 스미스가 일반 인민에게 맡겨서는 안 될 주권자의 의무에 대해 ˝첫째는 국방의 의무이고, 둘째는 사법의 의무이며, 셋째는 공공 토목사업 및 청소년 교육에 관한 의무˝를 들고 있습니다. 이는 종래의 스미스가 오로지 ‘야경 국가‘로서의 국가론만을 견지하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반론이 되기도 하겠습니다. 물론 앞선 두번째의 의무는 민주주의 정치에서 법의 지배에 따른 다른 형식으로 구현되고 있기도 합니다만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 봤을 때, 스미스가 진보적인 근대화 내지는 일정 부분 미래의 시민사회의 단편을 그려본 것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마지막으로 스미스가 말하는 인간의 이기심이 어떤 식으로 작동해야 하는지에 대해 좀 더 건설적인 연구가 필요하며, 노골적인 자유 방임을 부르짖는 일반적인 다수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는 자들의 터무니 없는 주장들에 대해 변별력을 가질 수 있는 시민들의 건강한 판단력이 무엇보다 필요한 시기로 생각됩니다.

시민사회란 전 시대의 사회에 비하여 합리적이고 민주적이며 문명화 된 사회을 의미한다

스미스가 자유경쟁이 공정하게 이루어지기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사유재산의 절대불가침을 강력히 요청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실에서 자유경쟁이란 것은 먹느냐 먹히느냐 하는 약육강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사회상태가 아니라 홉스가 말한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상태, 즉 자연상태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아닌가

스미스는 지주나 자본가에 대해 이렇듯 엄격한 태도를 취했던 반면 노동자에 대해서는 지극히 따뜻한 심정을 드러냈다

사실 방임이라는 말은 별로 어감이 좋지 않은 데다 자유주의나 개인주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는 근원이 될 수도 있다

지금도 정부는 값싸고 작을수록 좋다는 것이 자유주의자가 갑는 일반적 견해인 것으로 통념화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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