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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지성인 - 개정판
에드워드W.사이드 지음, 전신욱.서봉섭 옮김 / 창 / 2011년 6월
평점 :
세기를 뒤흔들었던 명저, ‘오리엔탈리즘‘의 저자인 에드워드 와디 사이드는 공공 지식으로서의 자신의 책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던 지식인입니다. 그는 팔레스타인 계 미국인으로 프린스턴과 하버드를 거쳐 2003년까지 컬럼비아에서 후학을 지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사이드는 중동과 관련된 미국의 외교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해 왔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논저가 탄생되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에드워드 사이드가 새뮤얼 헌팅턴과 완전 다른 대척점에 있는 학자로 이해되고 있는데요. 사회체제 안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권력에 대한 비판을 지식인들이 가면 갈 수록 해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 책무를 다하는 지식인의 존재는 실로 귀중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의 이 글은 서문에도 간략히 소개되고 있는 것처럼, 1948년에 버틀란드 러셀이 주도한 영국 BBC의 리스 강좌 Reith Lecture 에 출연한 사이드의 강의를 묶어 출판한 된 것입니다. 따라서, ˝Representations of the Intellectual˝이라는 원제로 지난 1993년에 처음 출판된 이 책은, 국내에는 1996년 초도 번역이 이뤄졌습니다. 이후 2011년, 개정판이 국내에 출간되었습니다. 우선 뒤에도 차차 다루겠지만 번역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을 수가 없겠습니다. 정말 개정판이라는 말이 아까울 정도로 이 책의 편집 자체는 처참한 수준인데요. 단언컨대, 이 책을 펴낸 출판사의 편집 인원들이 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실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 편집 오류에 대해선 글을 마무리하고 따로 기록하겠습니다. 그리고 원제를 충실히 번역하지 않은 국내 번역본의 제목에 대해 비판을 하고 싶은데요. 글 전체의 문맥을 좀 더 완벽하게 이해하는데 있어서 책 제목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번역 제목의 취지는 공감이 될 만한 부분이 있기는 합니다만 책 판매고를 위해서인지 원제와 동떨어진 제목 번역은 한국 출판계의 자기들 스스로의 관행이었으니 제목 문제는 이쯤에서 마무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지성인 Intecllectual 에 대한 쥘리앙 방다의 강고한 정의를 먼저 밝혀보자면, 그는 자신들의 말과 글에 권력에 의해 화형을 당할 각오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 지성인 계층의 의무라고 표현했습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할말을 할 수 있어야만 지성인의 책무를 다할 수 있다는 관점은 오늘날 사회와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는 부분이라고 많은 분들이 그리 여기실텐데요.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 에드워드 사이드가 글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그만큼 사회의 도덕성과 정의감이 상당 부분 쇠퇴해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이상적인 목적 자체에 대한 현실 괴리라는 측면의 부정하는 사조 자체가 사회 전반에 너무나 강고하게 깔려있으며, 모든 각계 각층이 이 ‘현실적인 조건‘에 대해선 끊임없이 입아프도록 발언하면서도 앞으로 다음 세대나 혹은 인류 전체가 나아가야 될 방향을 규정하는 이상향에 대해서는 밑도끝도 없는 거부감이 바탕이 되어 있는 것은 그 자체로 부정하기 힘든 현실일겁니다. 이와 관련해 사이드는 지성인이라는 부류가 ˝자유와 정의를 위해 행동할 의무˝가 있으며, 특히 재현 Representation 즉, 불의한 상태에 있는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지식인들이 마땅히 이들을 대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대한 오늘날의 사회 전반을 분석해 보자면, 인류가 지난 역사에서 걸어왔던대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마땅히 보장 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만 하는 부분은 충분히 공감할 만합니다. 그러한 노정 가운데 이 지식인들(앞선 의무를 제대로 하지 않는점에서 저는 지식인이라 지칭하겠습니다)은 자신들의 이익을 먼저 챙기는 쪽으로 타협하게 됩니다. 이 점과 관려해 저자는 5장에서 권력과 보다 밀착한 지성인들의 사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권력의 요구와 방향성에 스스로 순종하면서 그에 대한 반대급부를 끊임없이 추종하는 현대의 지식인들의 자화상은 만약 쥘리앙 방다가 이를 목도하게 된다면 과연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과거 장 폴 사르트르는 지식인들이 대학의 바깥에서 홀로 존재해야만 한다고 했던 것은 그 자신의 도도함을 위해서가 아니라 보다 이익에 자유로워진 상태에서 지식인의 책무를 다하라고 요구했던 것으로 이해됩니다. 물론 사이드는 이런 사르트르의 입장을 완전히 지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여기에서 소개되고 있는 노엄 촘스키처럼 할말은 해야하고 누구 눈치도 볼 필요도 없이 비판은 서슴치 않는 그런 정신만은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듯 보였습니다.
따라서, 사이드가 무엇보다 강조하는 지성인의 과업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성인의 절대적으로 중요한 과업으로 추가해야 할 것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지성인이 자신의 국민들의 집단적 고통을 재현하고, 그 고통의 극심함을 입증하고, 고통의 지속적인 존재를 다시 확인하고, 고통에 대한 기억을 강화하는 것과 같은 의무가 있음에 틀림없다는 점이다˝라고 강조합니다. 현재의 세계가 권위적인 정부들에 의해 수많은 시민들이 억압받고 있는 상황을 충분히 인지한다면 앞선 방다의 날선 주장은 결코 허언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지성인의 양심은 내가 아니라 다수의 계층이 핍박받고 고통을 받는 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다는 목숨을 걸어야 될 정도로 중요한 일이라고 파악했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지성인들의 노정이 ˝인간의 자유와 지식을 발전시키는 것˝에 있다는 자체가 ˝여전히 변함없는 진실˝이라고 확신하는 점은 더할 나위 없이 진정성을 갖추고 있다 생각됩니다. 지성인 개인의 권리나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정치인들이 공익 앞에서 자신의 사익을 저울질하며 정치 전반을 반정치로 퇴행시킨 원동력이었다는 점에서 지성인이 자신들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을 경우, 사회의 미래 자체가 어떻게 될지는 무슨 아마겟돈과 같은 상상속의 산물이 아니라 충분히 파괴적인 결말을 예측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4장에서는 정부와 하나가 된 지성인들의 맹종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했는지 보여주는 사례가 등장합니다. 종전의 제임스 뷰캐넌과 같은 지식인이 CIA의 의도에 장단을 맞춰 칠레의 민주 정부를 전복시켜 미국의 뜻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를 세운 것은 의미심장한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제3세계의 정책을 지원하기 위해 수행된 반게릴라 연구 가운데 일부의 경우는 은밀한 활동, 사보타지, 심지어는 노골적인 전쟁에 직접적으로 적용되었고, 도덕성과 정의 문제들은 그러한 계약들이 충족될 수 있도록 뒤로 제쳐졌다˝고 사이드는 이와 같이 강조합니다. 사실 이익을 앞세우는 행위의 전반적인 사조는 도덕성과 정의를 뒤안길로 내몰았고 그러한 행태 자체가 꽤 영리하고 존경받을만한 것으로 포장되어 왔습니다. 밀턴 프리드먼과 같은 인물들의 이해는 바로 그러한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라이트 밀즈가 권력은 끊임없이 견제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에는 바로 그와 같은 파행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일겁니다. 그 견제를 주도할 수 있는 자들은 지성인들이며, 그 의무에 대해 반감을 조장하거나 다른 말로 곡해시키는 자들은 거의 선동과 다름없다 여겨도 의미가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5장에서는 소위 전문화와 직업전문주의의 시대에 대해 사이드 특유의 통찰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말과 현실의 괴리˝는 차치하더라도 이 엘리트주의에 대한 맹신은 ‘전문지식을 다룬다‘는 전문 직업 계층의 입장과 발언을 가면갈 수록 맹신할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가 고착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제가 반엘리트주의자로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은 소위 그 분야에서의 리더라고 하는 자들이 허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무엇이든지 수용하고 길들여진다˝는 사이드의 맥락에 동의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이 엘리트주의에 있어서 다수의 보편성과 보편주의는 허용이 되지 않기 때문에 자신들의 폐쇄성을 용인하는 것 자체가 특수성이라는 논법으로 사실상 사회의 계층화를 초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자본주의는 계급주의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 이념이었음에도 충분히 변질되어 왔으며, ˝잘 사는 자들의 이익˝, ˝고도로 교육받은 자들의 이익˝, ˝전문 직업에서 일하는 자들의 이익˝ 등 아주 노골적으로 주장되지는 않고 있지만 사회 전반이 이들의 이익을 거의 용인하고 있는 상황이며, 그것을 능력주의나 자아 실현 등으로 포장되어 교묘하게 자신들을 소수라 규정하고 다수의 횡포에 어떻게 맞설 수 있겠느냐로 사회적 발언 자체가 왜곡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권력 구조 자체가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에 있어서 부유층과 전문 직업 계층과 다수 시민들의 심각한 불균형적 상황을 그저 자본주의의 원초적 모습이다 혹은 그것이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것이다 라고 하는 점은 이미 사회가 모순의 심각한 지경으로 치닫고 있는 게 아닌가 판단해봅니다. 애초에 보수라고 불리웠던 자들이 초기 자본주의에서 극렬하게 저항했던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지성인 뿐만 아니라 시민들 모두가 아마추어 정신을 갖고 사회를 비판하고 정의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주장은 꽤 설득력이 있기도 합니다. 권력 자체를 지향함으로써 대다수 언론인들이 비판 의식을 결여한 작금의 상황은 자본과 결탁한 정치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시민들이 자본주의에 반항하지 못하도록 길들이는데 막대한 자금이 투하된 것이 한몫 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는 개인의 지향 목표를 오로지 보유한 재산으로 평가받게 하는 탁월한 계산도 이바지했으며, 사익을 추구하는 것 자체에 대한 경계심을 상당히 유명무실하게 만듦으로써 아이러니하게도 사회가 자본에 의해 건전해지지 않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사회가 주체가 되어 자본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하지만 엘빈 토플러의 말대로 자본이 전 세계의 제1 권력이 된 것은 절대 과장이 아님을 이해하게 됩니다. 일전에 신자유주의의 파행을 제대로 견제하지 못했던 것은 유럽의 진보 좌파의 몰락이라고 언급했던 바가 있는데요.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 보니, 시민과 좌파 사이의 조직적인 이간질은 차치하더라도 소수의 좌파가 스스로 이와 같은 거대한 파고를 견제할 수 있는 능력이 아예 없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모두 죽을 각오를 하고 저 파고에 대항하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측면으로 봤을 때는 지나친 요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한편으로 들기도 합니다.
-본문 72페이지, 78페이지, 89페이지에 띄어쓰기 오류, 알베르 카뮈에 대한 통일되지 않은 호칭 (카뮤, 까뮈), 96 페이지에 등장한 헨리 키신저에 대한 성명 오타 (킨시저), 나중에는 키신저로 표기, 92페이지에서 93페이지에 레반트, 러반트의 통일되지 않은 지명 등 확실히 출판사의 편집인이 제대로 책을 검수하지 않은 점은 확실해 보였습니다. 더군다나 이런 불완전한 상태의 책을 개정판이라고 내는 처사는 실로 어처구니가 없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지성인은 약하고 대변되지 못하는 자의 편에 속해야 한다는 나의 생각에는 전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지성인의 절대적으로 중요한 과업으로 추가해야 할 것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지성인이 자신의 국민들의 집단적 고통을 재현하고, 그 고통의 극심함을 입증하고, 고통의 지속적인 존재를 다시 확인하고, 고통에 대한 기억을 강화하는 것과 같은 의무가 있음에 틀림없다는 점이다
권력으로부터 보상을 받은 그러한 전문직업인의 위치에 있게 된다는 것은, 나의 관점에서 볼 때 지성인이 기여해야 하는 분석과 판단에 있어서, 비판적이고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정신을 행사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항상 느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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