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경제자유주의자인 클로드 프레데릭 바스티아의 ‘국가는 거대한 허구다’ 를 일독했습니다.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넘기다 발견한 흥미로운 점이 있었는데요. 바스티아의 이 책을 번역 출간한 출판사의 ‘국가란 무엇인가?’ 시리즈 물의 3개의 번역작의 제목과 저자들이 의미심장하더군요. 허버트 스펜스와 라이샌더 스푸너 다음에 바스티아의 이 책이 자리하고 있는데요. 제가 평소에 생각하고 있는 국가와 정부론과는 사뭇 그 시도와 이해가 다르지 않나 싶었습니다. 프랑스 혁명 즈음에 태어난 바스티아는 1850년에 숨을 거두었는데요. 당시에는 큰 조명을 받지 못하다가 2차대전을 거쳐 동서 냉전이 극심한 시기에 많은 자유주의자들과 경제학자들에게 각광을 받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뒤에 하이에크의 그에 대한 소개글이 실려 있는걸 봐서도 그렇습니다.전체적으로 5개 분량의 논문을 실은 형태로 1장이 도입의 형식으로 2장의 정의와 박애, 3장의 재산권과 법은 뒤이어 나오는 4장의 법에 대한 주제를 받쳐주기 위한 글로 저는 해석이 되었습니다. 5장은 당시 프랑스의 정치 경제 시스템에 대한 조목조목한 글이었습니다. 특히 5장은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당신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5장은 반복 정독이 필요해 보였습니다.바스티아는 오늘날에 국가는 부를 모든 사람에게 분배하기 위해 세워졌다는 원칙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분석하면서 이러한 일종의 변화된 국가의 역할과 그 기능에 약간의 제한을 두려고 합니다. 경제학적인 접근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은 본디 이기심을 갖고 있는데 그것을 물리적인 방법, 즉 법을 통해 제약하는 것은 인간의 이기심이 발휘되어 파생되는 몇 가지 결과물들을 봤을 때 옳지 않다고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더불어 자유 또한 주어진 권리 형태의 자연발생적인 토대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으며 여기에는 정의가 지배하고 법이 보호하는 조건이 중요하다고 또 언급합니다. 개인의 이기심이 동시에 개인의 자유가 우선되어야 그 바탕이 온전하다는 측면에서 국가와 법, 그리고 정치경제학이 이에 대한 보장을 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다만 당시 프랑스의 상황이 지금의 현대의 자본주의를 토대로 한 일련의 민주주의 국가들과는 사뭇 다르고. 그런 측면에서 평등과 부의 분배에 대해 다소간 언급하지 않고 있는 것이 이를 대변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부의 재분배 측면에서 ‘부자들에게 세금을 걷어야 한다’고 밝히는 것으로 보아 이기심과 경제적 자유에 대해 이론적인 한계 개념은 갖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싶은데요. 여기에 대한 바스티아의 추후 설명이 뭔가 추상적이어서 판단을 내리기는 어려웠습니다.이어 법에 대한 그의 고찰에서는 일반적이고 이론적인 관점에서 법의 임무는 상호적인 권리들의 경계를 확인하고 존중하게 하는 것이라 받아들이고 있는데요. 여기에 프랑스 혁명에서 중요한 가치인 박애는 자유롭고 자연발생적이어야 하며 그것을 법이나 다른 수단이 강제로 강요하는 것은 노동을 한 자체의 권리를 고려하지 않고 박애의 가치관으로서 부의 재분배가 이뤄진다면 그것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어떻게 실행될지 알 수 없으며 이로인해 과연 사회가 존재할 수 있겠냐 우리에게 되묻고 있습니다. 이처럼 마지막에 하이에크가 강조한 것처럼 바스티아의 기본적 사고방식은 개인의 이기심과 재산권, 자유에 대해 간섭하지 않고 자율적인 판단을 보장해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봐야겠죠. 확실히 아직 고전적인 경제학의 학문적 한계에서 바스티아가 옳다고 믿는 그러한 불간섭과 (이기심과 재산권 추구를 비롯한) 자유 보장이 오늘날 적용해서 받아들이기에는 세계의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경제학의 의무는 자본주의의 시장 경제 시스템에 대한 폭넓은 연구와 그에 따른 이론적 받침이라 볼 수 있을텐데요. 자본주의가 심각한 모순을 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유수의 경제학자들 조차도 필요한 비판에 입을 닫고 있는 실정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과거 동서 냉전시기에 바스티아가 자유주의자들과 작은 정부로 대표되는 폭넓은 시장 경제주의자들에게 인용되고 지지받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사실상 그러한 신자유주의가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를 자초한 것으로 증명된 것처럼 자유 분방한 시장이 더이상 민주주의의 기본 이념을 침해하는 것을 수수방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프린스턴 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중인 마틴 길렌스의 ‘왜 미국인들은 복지를 싫어하는가’ 를 일독했습니다. 원제도 Why Americans hate Welfare 로 의미가 명백히 독자들에게 전달되고 있습니다.우리의 지난 대선에서 뿐만 아니라 정부의 복지 지출에 대한 쟁점이 현안으로 나올 때마다 미국 사회의 복지에 대한 자료들이 여기 저기에 나오는데요. 국내의 보수를 자임하는 정치권이나 그 지지자들이 특히 이런 미국의 복지에 대해 논하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미국 내의 전반적인 복지 제도와 가치관에 대해 미국인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게 생각해 왔는데요. 그런 궁금증을 채워줄 역할을 바로 길렌스 교수의 이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전체적으로 이 책의 구성은 이론과 그에 수반되는 자료와 설문조사 통계 등을 제공하여 독자들에게 폭넓은 이해를 구하고 있는데요. 미국인이 아닌 국외의 독자들이 미국의 일반적인 현실을 알려주고 있어 꽤 흥미로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주 직접적으로 왜 미국인들이 복지와 복지제도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그 뿌리깊은 연원과 분석을 하고 있는데요. 그들은 원칙적으로 복지에 대해 동의하고 있지만 세부적인 사항에서 빈곤층에 대한 현금과 현물을 포함한 지원에는 부정적인 의견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이러한 지원이 개인을 게으르게 만들고 소위 복지여왕과 같은 다소간의 프로그램에 대한 감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물론 미국 사회에 신자유주의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건국 이래로 개인에게 더 많은 자유를 보장하려는 기저에 깔린 인식과 부와 관련된 부분은 개인에게 더 재량을 부여해야 한다는 가치관도 언급하고 있는데요. 이런 부분은 전세계에서 일본을 제외하면 가장 작은 정부의 복지 지출로 표출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길렌스 교수의 분석에 잠시 의아했던 것은 복지 제도 자체에 대한 문제를 포퓰리즘적 문제로 바라 보고 있는 한국의 현실과는 사뭇 대비되는 것으로 여겨지는데요. 이처럼 미국인들의 복지에 대한 반감은 꽤 오래되고 묵은 가치관의 문제인 것으로 생각됩니다.그렇지만 복지와 그 대상 계층에 대한 왜곡된 시선도 존재하는데요. 그것은 미국 사회에서 빈곤층의 대부분이 흑인이라는 편견과 지난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각종 잡지와 텔레비전을 비롯한 매체에서 왜곡된 시선으로 이를 조장했고, 이러한 편견이 결국에는 인종적 악의로 확장되었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미국 사회의 빈곤층 가운데 흑인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약 30% 내외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기에다 흑인들의 대부분이 직업 윤리가 결핍되어 있고, 게으르고 일을 하지 않는다는 다수의 백인들에게 편견으로 남아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편견이 오늘날에는 다소간 불식되고 있지만 아직도 노령층과 백인 중산층에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복지 자체에 대한 핵심적인 논점 일탈과 더불어 왜곡 해석된 논쟁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높아 이에 대한 해결책이 미국 사회에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미국 사회는 오랫동안 아메리칸 드림으로 대표되는 개인주의적 이상의 발현과 성공에 매달려 왔고 아직도 개인의 노력으로 부와 성공을 거머쥘 수 있다고 생각하는 미국인들이 아직도 많습니다. 영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국민들의 빈곤 문제가 자본주의의 모순과 사회적 문제로 발생하는 요인이 크다고 보고 있지만 미국 사회는 이러한 인식에 동의하지 않고 있다고 봐야겠습니다. 일찍이 토크빌은 ‘의기양양한 개인주의가 사회의 퇴보를 이끌 수 있다’고 경고한 것처럼 개인의 이기심과 개인주의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은 미국의 사회 발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우리 사회에서의 복지 제도에 대한 논의를 자칭 보수권에서 포퓰리즘적 잣대로 받아들이고 있는데요. 이를 불식시키기 위한 폭넓은 연구가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더불어 복지 프로그램에 대한 적절한 감시와 연구도 선행되어야 한다고 하겠죠.
한국 전쟁을 진지한 학술 연구의 시초로 닦은 ‘한국 전쟁의 기원’의 저자이자 미국 시카고대 석좌 교수인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최근 출간작인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전쟁’ 을 일독했습니다. 그는 80년대에 미국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한국전쟁에 대한 수정주의적 입장을 견지했는데요. 박명림 교수를 비롯한 국내의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한국 전쟁에 대한 ‘실제 역사’가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최근에 러시아가 공개한 구소련 시절의 스탈린과 마오쩌둥, 김일성 간의 외교적 대화와 기록들이 공개되면서 당시 김일성의 행적이 낱낱이 검증되어 논란이 불식되었습니다. 1950년 초에 스탈린이 김일성의 요구를 잠정적으로 인정하면서 김일성이 주도한 북한군의 38선 이남 남진이 사실로 밝혀졌죠. 지금도 한국의 많은 관련 학자들은 커밍스 교수의 한국 전쟁론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밍스 교수는 특유의 노력으로 미국이 보유했지만 그동안 잊혀져 있던 수많은 한국 전쟁 자료들을 발굴해 내었기에 이 부분 만큼은 인정 받을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책에서도 1999년에 공개된 남측에 의한 대규모 민간인 학살에 대한 사진 자료들이 일부 실려 있고, 책 후반부에 이 주제에 대한 글이 다뤄지고 있습니다. 제가 고교 시절에 배웠던 국사 교과서에도 나와있던 소쉬 ‘애치슨 라인’ 이 간접적으로 북한의 남침을 제공한 것으로 설명되는데, 커밍스 교수는 ‘한국 자체로서 대 공산주의 대결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라는 것을 애치슨을 비롯한 트루먼 대통령이 인식하고 있었지만, 이것을 표면적으로 밝히는 것이 어려웠다. 그 이유는 이런 미국의 입장을 내세워 이승만이 겁없이 전쟁을 시작할까 두려웠기 때문” 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전쟁 기간 내에 맥아더와 트루먼의 대립은 익히 알려진대로 그러했지만, 숨어있던 내막은 트루먼이 맥아더를 그 자리에서 끌어내렸던 이유는 미국 정부가 핵폭탄 사용을 결정하면 햔직에 더 신뢰할 만한 지휘관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근에 번역 출간된 데이비트 핼버스탬의 ‘콜디스트 윈터’에서 보여지는 맥아더, 트루먼의 일련의 갈등의 본질을 잘못 끄집어 냈다는 것으로 여기는 모양입니다. 그외에도 핼버스탬이 미국 정부에 있어서 한국 전쟁에 대한 실제적 이해에 대해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으로 커밍스는 받아들이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이에 애치슨의 표현대로 ‘한국 전쟁은 발발하여 우리(미국)를 구한 위기’ 였다고 평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봐야겠죠. 당시 매카시즘의 광풍에 휩싸여 있던 미국 정계에서도 이 한국 전쟁의 의미는 단순히 먼 아시아의 내전으로만 한정하기에는 어려웠을 겁니다. 더욱이 자신들의 태평양 안보에 있어서 중요한 일본을 재건하는데 한국전쟁을 십분 이용함으로써 미국의 정치권에게는 실로 적절한 위기였다고 해석하고 싶군요.그리고 미국인들이 우리에게 갖고 있던 인종주의적 편견에 대해서도 2008년에 출간된 커밍스 교수의 공저 ‘악의 축의 발명’에서 언급된 공통된 인식이 들어가 있는데요. 특히 당시 남한에서 군정을 수립하고 거기에 참여했던 미군과 그 수뇌부들이 갖고 인종주의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데요. 제가 느끼기에는 제주에서의 사건, 여수와 대전, 수원 등지에서 자행되었던 한국군과 경찰에 의한 민간인 학살에 이러한 인종주의적 편견으로 인식되어 정치적으로 또 물리적으로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은 당시 현지의 (권력을 지닌) 미국인들에 대한 비판입니다. 물론 일차적인 책임은 이승만 정권과 그에게 부역했던 권력이 무고한 민간인들을 확인되지도 않은 사상의 껍데기로 싸잡아 처단해 아직도 진실과 화해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는 미국에게도 공통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노근리 사건에서 보여졌던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의 대응을 봤을 때 이러한 화해는 앞으로도 많은 시간이 지나야 가능할 것 같습니다.그외에도 한반도 전체를 ‘달 표면’과 마찬가지로 만들었다는 미 공군에 의한 무차별 폭격과 먼 미래에 이라크에 대해 1945년의 한국과 거의 동일한 과오를 저질렀다고 자기 고백하는 미국인 커밍스 교수의 언급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한국 전쟁의 진실은 아직도 많은 부분이 가려져 있지만 커밍스 교수의 용기가 느껴지는 이 단행본은 조금이나마 우리가 과거의 동족 상잔의 비극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약간의 논외지만 미일 동맹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많은 미국의 연구자들과 학자들과 달리 일본에 의한 냉혹한 한국 식민 통치와 ‘아베는 근본적으로 고노 담화를 거부한다’ 고 평가하는 그의 진심은 약간의 학자적 양심을 느껴지게 했습니다. 그래서 정치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역사와 진실을 날 것 그대로 마주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어려운 듯 싶습니다.
2003년 부터 미국 외교 협회의 회장으로 재임하고 있는 미국 외교가의 존경받는 이론가인 리차드 하스의 최근 출간된 ‘혼돈의 세계’를 일독했습니다. 원제는 A World In Disarray 입니다. 개인적으로 리차드 하스의 글은 두번째 접하는데요. 지난 2005년에 국내에 출간된 ‘미국 외교 정책의 대반격’ 을 작년경에 읽었는데요. 전체적으로 이번 책은 배경과 주장이 얼마전에 출간된 브레진스키의 ‘전략적 비전’과 유사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현실주의적 측면에서 세계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은 아직도 필요하며, 어느 국가도 이를 대체하기 어렵다는 분석과 앞으로의 세계 질서가 그렇게 부정적이지는 않다는 해석도 브레진스키의 논리와 비슷합니다. 전체적인 내용은 과거 냉전시기의 국제 정치와 그 이후의 세계 질서의 흐름과 변화, 특히 탈냉전 시기를 거치는 과정의 지역별 국가들의 정치외교적 행위, 그리고 이를 대체로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있는데요. 저자인 그가 설명하고 있는 내용들은 편향되거나 치우치지 않고 있는데요. 이런 점은 글을 읽는 내내 긍적적인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실 그동안 접한 미국의 나름 권위있는 학자들의 이론적 주장에는 ‘전세계에 대한 미국의 역할론’에 대해 다소 주관적이고 배타적인 내용들이 들어있기도 한데요. 하스는 그런 부분에서는 호주의 국제정치학 권위자인 휴 화이트와 유사하지 않나 싶습니다. 책에서 그가 밝히고 있는 내용들중에 통찰력이 느껴지는 부분은 만약 중국의 경제 성장이 조금이라더 더디게 된다면 내부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이를 보상하려고 더욱 민족주의적 정책을 추진할 수도 있다는 부분과 중동의 시리아가 명백하게도 다수의 민간인들에게 화학 무기를 사용했음에도 당시 오바마 대통령이 어떠한 행동에 나서지 않은 것은 미국과 동맹을 맺고 있는 국가들에 대해 우려를 안겨주었다는 잠정적인 분석에도 크게 긍정했습니다. 더욱이 오늘날 북한으로 비롯되는 핵개발 문제점에도 국제 사회에 NPT 체제를 오랫동안 유지시키면서도 강력하게 핵을 보유하려는 국가들의 시도를 전혀 막지 못했다는 점에서 오늘날 지역 질서를 포함해 세계 안보에 위기를 안겨준 이러한 몇 가지 사건들의 분석이 탁월하다고 느껴되더군요. 덧붙여, 파키스탄이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가 잠정적으로 세계 안보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동의하는데요. 파월 전 국무장관의 입을 통해 파키스탄의 핵이 주변으로 유출되지 않고 통제가 가능할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은 과거 오바마 대통령이 ‘파키스탄의 핵은 안전하다’고 발표한 것과 교차되어 ‘안전하지 않은 파키스탄의 핵무기’ 에 대한 반증이 아닌가 싶더군요. 뭐 미국 정부로서는 그렇게 밖에 대외적으로 밝혀야만 했을 겁니다. 그 입장은 충분히 이해합니다.그러면서 어쩌면 당연하게도 러시아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리아 문제와 우크라이나와 조지아의 나토 가입 등과 관련된 정치 외교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대해 미국 정부가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하면서 강력한 민주주의 체제를 통해 발전하고 있는 여러 양자간 동맹국들과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만 ‘미국이 동맹국에 대해 안보를 제공하므로, 이 국가들은 무모하거나 도발적인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단언하는 것은 다소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요. 특히 일본의 경우는 위의 금언이 절실히 필요한 국가임에도 미국이 잠재적으로 동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정치 군사적 역할 증대를 원하고 있는 상황에서 뭔가 모순된 상황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약간의 괴리감이 들어서 반박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물론 글의 맥락은 대만을 빗대어 말하는 것으로 나와 있었지만 사실상 미일 동맹은 일본의 재무장을 제한하는 측면의 효과도 있었기에 과거 키신저와 저우언라이의 미중 수교 교섭에서 이러한 사실이 논의되었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차드 하스의 이번에 출간된 글은 독자들에게 현실주의적 국제 정치에 대한 관심을 일으키면서 동시에 대체로 이해하기 쉽게 서술되어 있어서 좋은 평가를 주고 싶더군요. 어쩌면 국제 정치 이론에서 논의되는 이론적 주장들 가운데에서는 독자들에게 기본적인 배경 지식을 제공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리차드 하스가 결론적으로 주장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아직은 전세계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은 얼마간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최근 몇년간의 미국 경제 악화로 인한 국방비 감소로 인한 재정적 상황이 좋지 않아 이 점이 우려스러운 부분입니다.
이 글을 쓴 타마라 손은 미국 조지타운대학교에서 이슬람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정통한 이슬람 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지금까지 100편이 넘는 논문과 글을 썼다고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는데요, 그래서 조금 기대를 안고 보게 되었습니다. 책은 작은 문고판 크기의 200페이지가 안되는 얇은 분량입니다. 원제는 Is Islam An enemy of The West 인데요. 구글에서 검색을 해보니 원서판과 지금 이 국역판의 표지가 똑같더군요. 제목의 의미도 크게 벗어나지 않게 번역을 한 것으로 나오는데요. 개인적으로는 여기 제목에서 이슬람을 서구의 적으로 대비시켜 표현되어 원제와는 달리 자극적으로 만들어 놓은게 아닌가 싶었는데 이것은 저의 오해였습니다. 우선 책의 전체적인 내용은 평이한 편입니다. 흥미롭다거나 새로운 인상의 논점은 거의 없었는데요. 다만, 명백하게 이슬람인들과 이슬람주의적 테러 단체와의 구분을 명확히 해줄 것을 독자들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이 책이 나오게 된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저자의 의도에는 공감하는 편입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대로 이슬람을 믿는 평범한 이슬람교도들은 민간인들에 대한 테러와 살해에 동의하지 않는 편이고, 이것을 코란이 내세우고 있다는 테러단체들의 주장에도 반대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죠. 더 본질적으로 저자는 알 카에다와 같은 이슬람주의 테러 단체가 코란을 비롯한 종교 해석과 이론 연구를 무시하고 오로지 마오쩌둥 식의 정치투쟁으로 일관하고 있다고 꼬집고 있는데요. 이는 얼마전에 사실상 격퇴당한 IS가 칼리프가 통치하는 이슬람 국가를 세우려고 한 것과 같은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와 메디나를 아우르는 칼리프 국을 건국하려는 거의 실현 가능성이 없는 욕망을 기저에 놓고 있는데요. 여기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라고 봐야겠죠. 과거 이란이 팔래비 왕조를 무너뜨리고 정교 일치 국가를 세운것처럼 이란의 적대적이고 파괴적 형태가 IS 모델이 아닌가 싶습니다. 유럽이나 미국에 거주하는 즉, 민주주의 사회에서 삶을 보내고 있는 이슬람인들은 세계의 민주주의 원조 국가인 미국이 다소 전제주의적이고 독재체제를 보이고 있는 중동의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 등을 국익의 명목으로 후원하고 지지하는 것에 대한 격렬한 비판 의식을 갖고 있는데요. 물론 2차대전 이후 냉전시기를 거치면서 핵전쟁의 위협을 안고 있던 동서 대립의 시기에 미국이 안보를 이유로 많은 독재국가를 묵인하고 지원한 것은 사실입니다. 거기에다 이스라엘을 위한 배타적이고 일방적인 정책을 미국 정치권이 그동안 보여왔기에 그런 부분에서도 많은 이슬람인들에게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타마라 손도 이 부분을 언급하고 있는데요. 2차대전 이후에 영국과 미국의 소위 ‘이스라엘 건국 지원’ 이후 수십만의 팔레스타인 난민을 발생시키고 자신들의 안보를 위해서라면 무슨짓이라도 하는 이스라엘을 보노라면 현실적인 분노를 느낄 수 밖에 없을겁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슬람인들의 국가가 인권과 민주 정치를 외면하고 현실 정치에 종교를 잣대로 삼는 비이성적인 행위들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것은 자신들도 되짚어 봐야하는 문제인데요. 종교인 이슬람 교리가 현실에 우선해 이를 기반으로 해석하는 것은 많은 이슬람인들이 생각해봐야 될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많은 유럽인들이 유럽에 이슬람인들의 이주가 증가하면서 종내에는 강고한 배타적 이슬람주의가 기승을 부려 역겨운 파시즘으로 오도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것에는 이 점이 문제라고 봐야겠죠. 아직도 서구 유럽인들과 이슬람인들이 이렇게 서로 터부시하는 시선과 몰이해의 측면이 이런 뿌리깊은 내재적 갈등을 수반하지 않았나 하는 해석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테러주의를 표방하는 이슬람 테러단체에 대해 반대하는 이슬람 내부의 일관된 태도가 있어야만 하고, 좀 더 세속의 일에 종교를 끌어들이는 일을 자제하면 좋겠지만 코란의 규율이 이런 반세속주의에 도움이 되지는 않겠죠. 그만큼 교리를 신봉하는 이슬람인들이 절대 다수이기 때문에 어려울 가능성이 높을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