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으로부터의 해방 - 탈성장 사회로 가는 길
니코 페히 지음, 고정희 옮김 / 나무도시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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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북부 니더작센 주의 공립대학인 올덴부르크 대학의 생산과 환경학과 교수이자 독일 생태경제학회 회장 및 국제금융관세연대의 자문을 맡고 있는 니코 페히의 중점적인 탈성장 경제론을 담은 글을 일독했습니다. 원제는 ‘Befreiung vom Uberfluss’ 이며, 2012년 독일에서 출간된 것입니다. 번역은 고정희씨가 맡았습니다.

이 글의 전체적인 요점은 무분별한 소비에 대한 개인들의 절제와 성장 지상주의와 같은 대량의 에너지 투입과 환경파괴가 필연적으로 비롯되는 비타협적인 경제 논리에 대한 재검토라고 볼 수 있는데요. 에너지 집약적 라이프스타일을 재고하고 ‘지루하거나 힘겨운 삶의 대안’으로 소비와 여행 등과 같은 환경 파괴가 초래되는 일종의 위안 대체제를 멀리하고 자기 스스로의 내면에 행복을 먼저 찾는 것 등이 중요하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여기서 언급된 여행은 항공 수송이 이산화탄소의 배출과 석유 자원의 소모를 동반하고 비행기와 같은 항공 운송 수단의 기술 발전이 ‘지구촌’이라는 글로벌화를 가져 왔지만 반대로 지구 환경에는 좋지 않은 결과를 불러 일으켰다고 의미 확장이 되고 있는데요. 물론 대체로 저자의 논리가 옳습니다.

다만 약간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었는데요. “신자유주의자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모두 발전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사람의 노동으로 창출해 낸 소득의 공평한 분배에 대해서만 싸우고 있다”라고 언급한 것이 다소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신자유주의화를 일단 차치하고, 인간이 자본에 대한 개념을 받아들이면서 노동의 원칙과 이를통해사회의 재구성이 이뤄졌습니다. 개인들의 노동력 제공이 자신들의 삶과 가족 구성원을 부양하는 시스템으로 따로 대안을 만들 수 없을 정도로 오래 진행되어 와서 기본적인 민주주의 사회에 항상 이 개인들이 제공하는 노동력에 대한 본질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어왔습니다. 자본과 금융이 날로 고도화되어 그만큼 빈부의 격차가 심각해졌고 민주주의를 채택하는 각국의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기본적인 평등의 요건에서 소득의 문제는 쉽게 넘어갈 것은 아닙니다. ‘공평한 분배’에 힘쓰는 것이 불편하다면 어떤 대안이 있어야 하는데 소득의 격차가 계급의 격차와 다를바 없는 상황에서 이것을 해결하지 않는다는 것은 학자의 양심과 관련된 문제가 아닐까요. 저자도 자기 입으로 한 말은 아니겠지만, “독일과 같은 부강한 나라가 부채와 부채 국가를 모른척 하는 것은 반사회적이다’ 라고 글에 인용한 것처럼 말이죠.

물론 동의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지구 환경 문제와 관련하여 이산화탄소 배출과 관련해 이미 대기중의 농도가 400 ppm을 넘어선 이 시기에 이 부분은 신속하게 해결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많은 과학자들이 이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데요. 결국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의 매커니즘은 지속적인 환경 파괴와 에너지 소모를 동반했고 자본주의의 전체적인 체제에서 앞으로 후세와 현재의 세대를 위해 이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은 있어야 합니다. 바로 ‘에너지 노예’와 같은 언급이 이런 취지일 것입니다. 다만, 글에서는 따로 나오지는 않지만, 앞으로 중국인들과 인도인들이 자국의 경제 발전과 더불어 북미와 유럽 수준의 소비 생활에 더욱더 가까워지고 있어 앞으로 이 지구가 얼마나 견뎌낼 수 있는지는 매우 불확실합니다. 이대로 쭉 계속 간다면 말이죠.

그리고 개인들의 삶의 만족감이란 “인간관계 및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한 소속감, 능력을 인정 받는 것, 자기 구현, 건강, 안전 및 온전한 환경 등에 근거한다”고 저자가 인정했듯이 이제 유일한 사회경제체제로서 자본주의가 이식된 오늘날의 현대 사회에서 기존의 것을 백안시 하고는 달성하기 힘든 것이 각자의 삶에서의 만족입니다. 기본적인 절제만으로는 복잡한 인간의 욕구를 제한하는 등의 가능성을 온전히 설명하는 것은 어려워 보입니다. 개인의 노력 뿐만 아니라 사회의 재구성도 필요한 것인데 해결해야 되는 부분은 한두가지가 아닌 실정이죠.

최소한의 기본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 좀 더 성장이 요구되는 국가들도 아직 산재해 있고, 다시 자연친화적이고 탈에너지주의의 성장의 반대편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또 얼마간의 조정 기간과 타협의 시간 등이 아주 많이 필요할 것입니다. 과도한 소비를 위한 과대 생산에 이미 물들어여 있는 우리가 극복해야 되는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만 지구 환경이 날로 악화되고 있는 상화에서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될 것들을 먼저 처리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처럼 선택의 중요도가 먼저 동반되어야 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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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외상태 What's Up 6
조르조 아감벤 지음, 김항 옮김 / 새물결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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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들어 국내에도 이름을 알리고 있는 이탈리아 출신의 철학자인 조르지오 아감벤은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미학이론의 선구자였던 발터 벤야민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유명한데요. 이탈리어판 벤야민 전집 편집자로도 이름을 알리고 있고, 자크 데리다 등과 사상적 교류를 통해 철학자로서의 사유를 깊이 한 바가 있습니다. 바로 그의 이 책은 이탈리아어 판을 토대로 번역한 글인데요. 역자인 김항씨는 이탈리어에 대한 어려움이 있어서 여러 언어 판본을 대조하여 참고했다고 후기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도서출판 새물결의 What’s up 기획물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크게 6장으로 되어 있는데요. 1장은 법률적 차원의 의미인 예외 상태와 이것을 개념화한 카를 슈미트의 해석 전반에 대해 다루고 있고, 2장은 카를 슈미트의 ‘정치 신학’에 대한 진정한 논의와 자크 데리다의 ‘법률의 힘’과 관련된 해석과 3장은 로마 시대의 유스티티움 (법의 정지)에 대한 논의를 4장은 발터 벤야민이 친히 ‘파시스트 공법학자’로 지징한 카를 슈미트의 예외 상태 개념과 독재, 폭력 및 비폭력에 대한 논쟁과 이견, 해석차이 등을 담고 있고, 5장은 최고 권력과 주권자 및 주권 관계에 대한 해석과 논의, 6장은 권위와 권한에 대한 분석으로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아감벤의 글은 처음 접하는 것이었는데요.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간략한 메시지에 심오한 자신의 개념들을 풀어내고 있는데요. 흔히 자신을 사전적인 철학자라고 여기는 지는 모르겠지만 철학의 본질은 그 하나만으로 사유해서는 통찰에 이르기 어렵다는 버틀란드 러셀의 말대로 정말 다방면의 지식과 숙고를 통해야만 우리 세계와 인간의 삶의 진실을 맞닥뜨릴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아감벤의 사유가 바로 이와 같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기의 글은 아마도 ‘파시스트 공법학자’ 카를 슈미트의 ‘예외 상태’에 대한 아감벤의 고유한 해석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일단 저는 자신의 입으로 ‘반유대주의자’라고 말했던 카를 슈미트의 저작들을 평가절하하지 않고 그 법철학 분야의 성과만으로 판단해야 될지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습니다. 슈미트는 국내 뿐만 아니라 세계의 법학자들로부터 수없이 인용되고 있고 1933년의 나치 독일을 주권 독재 상황에 있는 것으로 보고 그것을 일종의 예외 상태로 규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즉, 어떠한 기준을 갖고 있던 간에 히틀러와 관련된 과거 나치 독일에 대한 이와 같은 슈미트의 판단은 ‘인간적인 반감’을 저절로 일으키게 됩니다. 제가 이 정도의 반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먼저 밝히고 싶군요.

이런 예외상태에 대해 아감벤은 “공법과 정치적 사실의 불균형점”이라 시사하고 이것과 비슷한 긴급 사태 등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와 관련해 “정치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라는 질문에 적절한 답을 해보고자 이 글을 내보내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유럽의 여러 국가들의 헌법 등에 보장된 기본적인 자유를 누릴 권리가 시민에게 있다고 전통적인 헌법의 시민의 권리에 대한 보장을 열거하고 이 특수한 예외상태가 계엄, 전시상태, 혁명 등에 법의 공백과 같은 성격으로 사실상 많은 민주주의 국가가 이 예외상태를 언급하고 받아들이면서 일정 부분 시민의 주권적 권한까지 침해하는 문제 상태로 여겨집니다. 여기에 한술 더떠서 아감벤은 민주주의 제도하에 전통적인 삼권분립이 행정부의 과도한 예외상태 부여로 입법부의 본질이 퇴색되었고, 미국의 링컨 대통령과 윌슨의 사례를 예로들며, 자신들의 민주주의를 확산시키고자 하는 유럽과 미국의 정치권이 자기 모순에 빠진 것이라고 일침을 가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예외상태가 법질서 바깥에 있는 것도 안에 있는 것도 아닌’ 자기 모순에 빠져 있는 것은 긴급 사태에도 법률을 갖지 않는 것과 동일시되며, 이러한 해석 불가의 예외상태를 어떻게 견제할 수 있는지에 대한 필요성이 요구된다고 느낍니다. 여기에 소개된 이탈리아 헌법은 “공권력이 헌법에 보장된 권리와 기본적인 자유를 누릴 권리를 침해할 경우 억압에 저항하는 것은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이다”라고 명시하는데요. 독일 연방 공화국 헌법 또한 “자유 민주 헌정 질서를 파괴하려고 하는 모든 이에 맞서 모든 독일 국민은 다른 시정 수단이 없을 경우 저항권을 갖는다”라고 나옵니다. 예외 상태와 비슷한 혁명은 ‘규정상 아무리 정당하더라도 반법률적이다’라는 주의도 특히 우리에게는 매우 의미심장한데요. 최근의 전직 대통령의 이 ‘예외 상태’ 권한 실행 여부가 미디어에 온갖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죠.

그리고 벤야민과 슈미트의 예외 상태 뿐만 아니라 폭력의 전반적인 의미에 대한 지면 논쟁과 데리다의 법률의 힘에 대한 의미. 법의 적용에 대한 해석, 법이 힘을 갖고 있는가에 대한 의미 등 법 자체에 대한 저자의 다층적인 해석을 볼 수 있습니다. 권력이 일찍이 뒤르켐이 밝힌 아노미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에 대한 분석 또한 흥미로웠습니다. 로마 시대부터 법과 아노미 사이에는 은밀한 제휴가 있었다는 사례들을 열거하고 있고, 규범과 아노미, 법률과 예외 상태를 묶어 법과 생명의 관계에 대해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할 때가 왔다고 일종의 ‘의미 전개의 확장’에 도달하면서 법과 인간사회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한 저자의 노력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결국 여기 이 책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선 카를 슈미트의 ‘독재론’과 ‘정치 신학’ 과 벤야민의 몇가지 시론, 국내에 아직 번역되지 않은 여러 법학자들의 글도 필요한데요. 특히 카를 슈미트의 ‘독재론’은 절판이 된 상태라 아쉽습니다. 좀 더 기회가 된다면 아감벤의 다른 글도 찾아 읽어보고 싶은데요. 어떻게 될지는 정확히 모르겠군요. 결국 이 책의 의의는 권력과 정치인들이 시민의 권한을 다소 제한하고 법을 일종의 ‘조정적인 상태’에 두려는 예외상태에 대한 개념을 독자들에게 제공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법철학적인 해석도 다분하게 들어 있어서 이해의 폭이 어려울 수는 있으나 적당한 배경지식과 정독으로 해결하실 수 있지 않을까 감히 짐작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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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공화국 - 트럼프는 어떻게 권력을 사용하는가
데이비드 프럼 지음, 박홍경 옮김 / 지식의숲(넥서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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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에 대통령 연설문 작성자이자 특별 보좌관을 역임했던 데이비드 프럼은 현재 언론인으로서 MSNBC의 토론자로 활동하고 있는데요. 그는 미국은 오바마 대통령에 이어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임기가 절반을 지난 지금 꽤 의미있는 글을 내놨는데요. 이 책의 원제는 Trumpcracy : The Corporation of the Amercan Republic 입니다. 보시면 알겠지만 원제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즉, 내용과 거의 다를바 없는 제목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도널드 트럼프가 집권하게 된 이유와 그 현상은 포퓰리즘과 반지성주의가 결합해 생성된 미국 민주주의적 정치에 첨예한 극단주의가 배경일텐데요, 더 쉽게 표현하자면 시민의 분노와 좌절에 기대어 이것을 자양분 삼아 전체적으로 한 개인의 영달에 이용한 것이 본질입니다. 보통 정치인들은 미디어나 공개 석상에서 드러난 화법이 앞으로 있을 행동에 혹여 걸림돌이 될까봐 모호하고 알맹이 없는 발언을 정치적 수사라고 일컬어 왔습니다. 그에 비하면 도널드 트럼프는 그야말로 ‘날 것’ 그 자체로 볼 수 있을텐데요. 저자인 데이비드 프럼은 이렇게 정화되지 않은 트럼프의 여러 매체와 연설상의 발언들을 자료삼아 이 대통령을 분석하는데 쓰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정치적 평론글과는 조금 다른 형식의 글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이것 자체 만으로도 읽는내내 흥미로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물론 불유쾌한 감정도 마찬가지로 딸려 왔습니다.

저는 여러 트럼프와 관련된 글들을 접하면서 그가 아버지로부터 인종주의적 편견을 물려받고 여성차별주의적이고 나르시즘적 자기 만족과 기만과 거짓말을 수단 삼아 일생을 살아온 인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일찍이 임대 사업을 하면서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들에게 임대를 주지 않았고 트럼프 자신도 거리낌없이 내색할 정도로 심각한 인종차별주의자입니다. KKK단에 대한 매우 애매모호한 태도, 연방 대법원에 판사 임용과 관련하여 “흑인이 합당한 판결을 할 가능성이 적지 않냐”는 식의 발언 등은 그가 얼마나 시대착오적인 인종편견에 틀에 갇혀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 틀을 일부러 안 벗어나고 싶은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트럼프가 지금의 백악관을 차지하게 된 원인에 대해서 저자인 데이비드 프럼은 “트럼프가 대선 출마를 발표하기 전부터 미국 정치는 극단주의와 불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고 평가하며 거기에다 경쟁자였던 힐러리에 대한 여성차별주의적 기만 전술과 전임 대통령인 오바마 대통령의 출생 의혹과 바티칸 교황이 자신을 지지하고 있다는 거짓 주장까지 일삼으며, 유권자인 미국 시민들을 허위로 선동했다는 측면에서 ‘포퓰리즘적 정치인’의 대표젹이고, 이러한 토대는 미국인들의 ‘반지성주의적 배타성’에 흐름이 더해진 결과라고 요약하는 것과 같은 내용들을 책에 담고 있습니다.

이런 일화들 중에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2015년 FOX 와의 인터뷰 이후 사회자 메건 켈리에 대해 “그 여자는 입만 열면 웃기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합니다. 그녀의 눈이 충혈되어 있던데 아마 다른 곳에서도 출혈이 있었을 겁니다”라고 트럼프는 CNN에서의 전화 인터뷰에서 이렇게 발언을 하는데요. 여성에 대해 이런 인식을 갖고 있는 자가 어떻게 대통령 후보에 나서고 유권자들이 마땅하게 이런 인간을 걸러내야 함에도 ‘정상적인 정치적 여과’가 이뤄지지 않은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또한 국내 정치 문제 뿐만 아니라 저자는 트럼프를 국제 시스템에서 현재까지 미국이 추구해 온 글로벌 체제를 붕괴시키려고 하는 위험한 인물로 실증하고 있는데요. NATO에 대한 전통적인 미국의 방위 선언을 모호하게 처리하고, 오바마 행정부 시기에 러시아에 의해 자행되었던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러시아에 ‘정치적 봉쇄’를 하고 있는 시점에서 부적절하게 푸틴과 러시아에 근접하고 있는 행동도 미국의 동맹국들에게 좋지 않은 신호를 안겨주는 것으로 분석합니다.

데이비드 프럼의 이 책은 과거 공화당 행정부에 각료로 참여했던 인사가 어찌됐든 공화당 간판을 달고 미 대선에 당선된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담았다는 측면애서 여느 다른 글들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한국과 관련된 내용에서도 사드 배치와 관련된 10억 달러 분담 강요와 한미 FTA재협상 압박 등으로 동맹국에 모욕과 좌절을 안겨줌으로써 한국 대선에서 선출된 신임 대통령이 사드 재배치와 북한과의 대화를 선결 과제로 발표함으로 아마추어 대통령의 발언을 문제 삼고 있는데요. 미국과 미국인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말고 순순히 협조해야만 하는 한국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의 말도 안되는 입버릇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는 식으로 여기는 것 같은데요. 공화당 인사의 전형적인 한국을 보는 시각이라 저는 느껴져서 입맛이 꽤 씁쓸했습니다. 약간의 이 부분을 제외하면 트럼프와 트럼프 일가의 속성을 외부의 독자들이 좀 더 자세히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데 큰 조력이 되지 않나 싶습니다. 각주를 제외하면 320여페이지 정도이고 본문의 활자와 구성에도 제법 여유가 있어서 보다 쉽게 일독하실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한 국가의 정점에 있는 정치인이 속을 잘 드러내지 않고 모략과 술수에 국한된 것도 문제겠지만 현 자유 세계의 리더와 같은 거짓말과 기만에 아무런 가책이 없고 오로지 믿을 만한 건 자신밖에 없다는 인식의 다소 괴랄한 정치인의 탄생은 시대의 요구인지 정치의 종말인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군요. 다만, 이 정치인에게 우리의 안보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 우리로서는 정말 난감한 일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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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투스 세계문학의 천재들 7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 지음, 정창 옮김 / 들녘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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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것이든 막론하고 소설 리뷰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지키지도 못할 약속의 증거인 두번째의 그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은 따로 서평은 쓰지 않았지만 몇년전에 ‘차가운 피부’를 인상깊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 ‘차가운 피부’ 또한 판이 바뀌어 국내에 꽤 많은 판매고를 올린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판매량이 작품 수준을 보장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 책의 저자인 피뇰은 충분히 좋은 평가를 받을만한 작가가 아닌가 싶습니다.

소개할 이 책의 제목은 저 유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를 약간 변형한 것인데요. 특히 ‘바르셀로나’를 지칭해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이 작품의 배경은 1701년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 시기의 카탈루냐와 바르셀로나를 삼고 있습니다. 저는 그동안 스페인의 올바른 국호는 에스파냐라고 생각해왔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은 이 에스파냐라는 국호는‘카스티야’에 한정된 것이었습니다. 카탈루냐인들은 아마도 오늘날까지도 이것을 인정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하여튼 바르셀로나 출신의 작가가 얘기하는 카탈루냐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글의 장점이라 지칭해도 무방할 것인데요. 갑자기 드는 생각은 지금 스페인의 카탈루냐와 바르셀로나는 이를테면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와 같은 입장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만큼 양자가 이질적이라는 것입니다.

주인공 마르티 수바리아는 꽤 흥미로운 이력을 쌓게 됩니다. 전혀 종래의 귀족이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는 프랑스의 귀족 보방에게 공병에 대한 교육 뿐만 아니라 당시 평민으로서 받을 수 없는 여러 혜택과 호의를 얻게 됩니다. 속세의 틀에 박힌 관념과 거리를 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귀족의 상이 바로 이 보방일텐데요. 마르티는 이 처음의 스승에게 영혼에 새겨진 고마움을 간직하게 됩니다. 뒤이어 프랑스 군에 복무하게 되고 모종의 사건으로 다시 아버지와 자신의 모태라 볼 수 있는 바르셀로나로 돌아오게 되는데요. 주인공 못지 않은 비중을 갖고 있는 바예스테르와의 인연을 미리 암시하기 위해 좀 더 뒤이어 나타나는 주인공의 행적과 사뭇 이해하기 힘든 사건을 피뇰은 안배하는데요. 어쩌면 속세와 탈속이 크게 의미없다는 식의 설정이든지 아니면 반대로 다 수렴한 인물상을 만들기 위해서인지는 책을 다 읽고 나서도 판단하기는 어렵군요. 그리고 이 바예스테르는 1918년 카탈루냐 독립파들이 사용하는 분리주의 깃발 ‘에스테랄다’를 도안한 비센스 알베르트 바예스테르와 묘하게 연관있어 보이는데요. 주인공 수바리아와 바예스테르는 둘 다 현실적 인식에 저항하지 못하다가 결국 그것을 극복하는 공통의 인물로 바라봐도 될 것 같습니다.

카탈루냐인들에게는 자신들의 불행한 역사인 이 에스파냐 왕위 계승전쟁을 같은 바르셀로나인인 피뇰이 끄집어 내왔다는 점에서 이것을 다룬 다른 작가들과는 달리 덜 표면적인 진정성이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왕정에 예속되고 자신들의 권리를 빼앗긴 채 이후 운명의 바깥에서 소모되어 왔다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일 겁니다. 지금도 독립은 커녕 자치정부 마저 스페인 정부로부터 타도되었으니까요. 한 가지 더 충격적인 점은 이 때의 영국은 ‘세력균형’이라는 미명하에 여기저기 물타기를 했고 끝내 바르셀로나를 방치했는데요. 자구력이 존재하지 않는 민족에게는 냉엄하고 가차없는 국제 정세가 기다리고 있다는 점은 정말 뼈아픈 교훈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지저기에서도 이 왕위 계승의 진정한 승자는 영국이라고 모두 손꼽고 있습니다. 참으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자들이죠.

끝으로 출판사 관계자 분들께 감사드리고 싶은 것은 이 8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글을 나눠서 몇권으로 내놓지 않고 오로지 한 권으로 출판한 점입니다. 요즘 같은 도서정가제 시대에 한 권으로 퉁친 것은 독자들에게 정말 매우 이로운 혜택이라 생각됩니다. ㅋㅋ (초성체는 안쓰려고 했지만 이번만큼은 삽입해야겠군요) 토요일과 일요일에 걸쳐 이 책을 붙잡고 있었는데 저자의 글로써만이 아니라 번역의 질도 좋아서 매우 수월하게 읽혀졌던 것 같습니다. 곳곳의 글 분위기는 문득 카잔차키스가 생각나서 더욱 좋았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느낌이죠. 그리고 판타지 소설을 쓰려고 하는 분들은 이 책을 꼭 읽어보시길 권유합니다. 왜냐하면 이 시기의 여러 전쟁 방법들과 전략전술적인 측면의 소개들이 적잖게 들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저자인 피뇰이 많은 사료와 당시 전쟁 자료들을 참고한 것이기 때문일텐데요. 특히 주인공이 공병 교육을 받는 1부와 본격적인 바르셀로나 공격전이 벌어지는 3부는 동일한 측면으로 큰 도움을 받으실 것 같습니다. 소설이어서 어떠면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가급적 최소한으로 스토리 라인의 소개를 한정시켰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대부분 역사적으로 실존했는데 피뇰은 이들에게 매우 생생한 입체적 분석을 시도했습니다. 전형적인 틀로 이뤄지는 인물묘사 아니어서 읽는 내내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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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응과 저항을 넘어서 - 이승만과 박정희의 대미정책
신욱희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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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관계 및 미국과의 외교에 있어서 권위를 갖고 있는 이삼성 교수와 한중관계에 천착하고 있는 성균관대 이희옥 교수, 주재우 교수와 더불어 국내 국제정치학계에서 의미있는 연구와 후학을 가르치고 있는 서울대 신욱희 선생의 과거 우리의 독재 권력이었던 이승만과 박정희 시기의 한미 외교 관계 분석이라고 봐도 무방한 이 ‘순응과 저항을 넘어서’를 일독했습니다. 신욱희 선생의 글은 번역한 책까지 포함하면 이번이 3번째 서평인것 같은데요. 신 교수의 번역은 최근에 리뷰한 베리 부잔의 ‘국제 안보론’입니다.

요즘 국제정치학계에서 많이 인용되는 학자들로는 월츠와 월트, 코헤인 정도가 될텐데요. 아시겠지만 위의 학자들 뿐만 아니라 많은 국제정치학 관련 학자들의 유명한 주저들이 국내에 번역이 안되고 있습니다. 전공자들은 원서를 구입해서 직접 일독하거나 과거 지도 교수들이나 관련 국내 학자들의 논문들을 찾아보는 것이 일반적일텐데요. 이런 측면에서 저와 같은 일반 독자는 전반적인 접근의 문제가 있습니다. 모쪼록 국내에 이들 도서의 번역 출판이 이루어졌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소개해 드릴 이 책은 총 4장의 분량으로 되어 있고 2장과 3장이 주요 네용이라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장은 한미 동맹과 같은 대표적인 비대칭 동맹 관계에서 양자 관계가 어떻게 순응과 저항이라는 매개로 한국과 미국의 외교 관계를 분석하고 이에 따른 학자들의 몇가지 이론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코헤인의 비대칭 동맹 연구라든지 후견-피후견 관계, 동맹의 무임승차론 등의 한미동맹 초기부터 대체 한국에 있어서 이 한미동맹은 어떠한 의미이고, 정치외교적으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현실적 분석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우리는 한국 전쟁을 치루고 냉전이 심화되는 시기에 안보적 불안을 갖고 있던 상황에서 한국의 후견국 역할까지 도맡아야 했던 미국과 그 이 한미 동맹 관계를 여러 방면에서 이용 및 차용했던 약소국 한국의 입장을 이승만 독재 시기부터 상세히 논하고 있습니다.

3장은 바로 그 역사와 사례를 살펴본 부분인데요. 트루먼 행정부 이후 아이젠하워가 집권하면서 미국의 국외 정책이 시시각각 변화되면서 ‘제국의 변방에 속해 있는 위성국과 같은 위치에 있던 한국의 상황’과 그 위성국의 통치자였던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그는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기 보다는 냉전체제에 있어 자유진영의 지도자 중 하나로 생각하고 있었고” 또한 ‘북진통일론’ 수시로 언급하는 일종의 예측불가의 갈등 소지자로 한미 동맹 자체가 현실주의적 시각에 기반하는 동맹 이론과 한미 동맹 자체의 특수성이라는 양자의 상충적인 측면을 안고 있는 것에서 꽤 양국에게 불안요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승만의 국내적인 상황은 차치하더라도 전쟁 이후, 자국의 안보 상황에 기초해 일본에 더 집중하려는 미국과 한국에 주둔하던 주한미군을 감축시키려는 시도 자체를 외교 관계 뿐만 아니라 국내 정치에 있어서도 불리했던 것은 확실해보입니다. 더군다나 경제적 측면에서 한국이 일본과 수교를 하거나 그에 버금가는 진전되는 회담을 바랬던 미국의 입장으로서는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 탐탁치 않았던 이승만 정권은 면밀한 관리대상이었겠죠. 한가지 이해가 안되는 점은 이승만 스스로가 친일파 및 친일부역자의 지지로 탄생한 독재 정권인데,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는 부정적이었다는 입장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군요. 과거 하와이나 미국 본토에서의 독립 운동 및 상해 임시 정부에서의 정치 활동은 이미 드러난 사료가 많아서 이승만 스스로가 과연 정말 패망한 조국의 독립이 목적이었는지는 순수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습니다.

4.19 이후 전면적인 경제 발전 정책을 요구했던 미국은 이 때 탄생한 장면 정부가 박정희에 의한 군사 쿠데타로 붕괴되고 이후 박정희 독재 정권 또한 이승만 정권과 유사한 대미 외교 체계를 보이게 됩니다. 주한 미군을 정권의 안정을 위한 담보로 여기고 국내 정치적으로는 반공 독재 체제를 강화하여 미중간에 데탕트의 분위기가 고조되지만 당시 박정희 정권은 북한과의 대화를 거의 전면적으로 거부, 공산진영인 중국과의 관계에서 유연한 대처를 하고 있던 닉슨 행정부와 키신저의 다소간의 오해를 사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닉슨 독트린 발표 이후 주한 미국 감축과 관련된 불안을 불식시키고자 미국은 제스처를 보내지만 박정희 정권도 마찬가지로 주한미군 감축을 용납할 수는 없어서 결국 핵개발과 같은 무리수를 두게 되죠. 1970년 당시 “미국은 이미 북한과의 직접적 협상을 꺼리는 한국 정부의 입장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고” 어떻게 보면 북한의 통미봉남 술책에 이 시기에는 자초한 경향이 있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미국 측은 북한의 김일성이 단독으로 남침을 다시 시도하기란 어렵다고 봤으나, 이미 김일성은 두 차례나 중국 측에 남침을 할 때라고 주장한 바가 있습니다.

독재 정권이었던 박정희 시기의 대미 관계 및 관련된 외교 정책들이 너무나 미국 의존적이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1973년 이후 차츰 남한의 국력이 북한을 초월하기 시작해 한국 스스로 북한에 대한 자위 능력에 대한 자신감과 미국산 무기를 비롯한 막대한 미국의 군사 지원 등이 수행되면서 한미 동맹 자체가 변화해 왔습니다. 앞서 이 글의 도입부에서 한미 동맹 자체가 대표적인 비대칭동맹이어서 양자가 방기와 연루의 위협에 자유로울 수 없었으며, 한국 전쟁 이후 두 나라의 외교 관계가 이를 증명하는 과정이었다고 여겨집니다. 특히 우리에게 있어서 미국에 대한 의존성이 심화되었고 이런 상태가 북한과의 종합적인 관계에 있어서 스스로 능력을 제한하게 되는 원인이 되지 않았나 싶네요. 오늘날의 시점에서도 국격의 상당한 상향을 달성했지만 한미 관계에 있어서는 아직도 비대칭적인 동맹 관계이기도 합니다. 워싱턴은 한국의 번영을 미국의 시스템하에서 이룩한 훌륭한 업적이라고 자부하기도 합니다. 분명 이것은 일정 부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고 앞으로 당면한 북한 핵문제와 중국의 대두 시점에서 우리의 한미 동맹이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될지는 앞으로 많은 연구가 필요하리라 여겨집니다.

약간의 논외로 이제 북한의 핵개발 문제는 트럼프 행정부의 의지로 첫 삽을 뜨긴 했는데요. 이 시기 역시 한국 정부의 냉정하고 현실적인 대응이 요청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남북대화는 매우 필요하고 적대관계 해소 또한 민족적 당위성입니다만 정확한 상황 인식은 전제되어야 하지 않나 싶군요. 이런 상황에서는 미국 측 또한 한미 동맹이 매우 중요하며, 북한의 핵문제 나아가서는 중국의 노골적인 지역 패권국 지위 획득 시도에 우리의 한미 관계가 매우 중요한 문제로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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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터라이프 2018-08-30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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