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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하우스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50
니콜 크라우스 지음, 김현우 옮김 / 민음사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니콜 크라우스는 미국 뉴욕 주 롱아일랜드 출신으로, 영국계 유대인인 어머니와 미국계 유대인인 아버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외조부모는 독일과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나 나중에 영국 런던으로 이주했고, 친조부모는 각기 헝가리와 벨로루시 태생으로, 여기에 등장하는 각각의 지명들은 2005년에 출판된 '사랑의 역사'에서 그 배경이 됩니다. 크라우스는 1992년에 스탠포드 대학에 등록했고, 그 해 가을 그곳에서 조셉 브로드스키를 만나게 됩니다. 그녀와 브로드스키는 근 3년 동안 교류를 지속합니다. 이후 1996년에는 마샬 장학금을 받고 옥스포드의 서머빌 칼리지에서 석사 과정에 등록하고, 미국 예술가인 조셉 코넬에 대한 논문을 작성합니다. 그녀에게 큰 명성을 안겨다 준 4편의 작품은 '남자가 방으로 들어간다','사랑의 역사'.'그레이트 하우스','포레스트 다크'로 유대인들의 역사와 그들의 정체성 문제 등을 다루면서, 특히 언어로 매개된 기억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보통 그녀를 평가할 때, 포스트모던 문학으로 자주 그녀의 작품 세계를 한정하기도 하는데요. 다만, 여기에서 밝히고 싶은 부분은 이 '유대인의 정체성' 이라는 부분 역시 그녀에게 있어 중요한 문학적 주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원제, "Great House"로 지난 2010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1년 7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 작품의 전체적인 서사 형태는 4명의 화자가 서로 두번씩 자신의 이야기를 건네는 형태로 진행됩니다. 여기에는 무엇보다 각자가 지난 삶에서 체화된 경험과 그런 기억이 긴 나레이션을 통해, 온전히 재발견되어,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는 부분이 이 작품의 백미이기도 합니다. 특히, 다니엘 바스키라는 인물과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되는 '책상'은 서로 맞물려, 이와 연관된 인물들의 숨겨진 배경이 곳곳에 드러나 극은 마치 음악의 절정처럼 몹시 요동치게 됩니다. 전자의 다니엘 바스키는 태생이 유대인으로 직접적으로 두 명의 인물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비극적인 실종과 더불어, 후자의 책상은 30년 이상의 시간을 두고 몇 명의 소유주와 상이한 지역을 거치게 됩니다. 여기서 책상은 일종의 '상실의 비극'을 은연중에 내포합니다. 즉 책상의 '전해짐과 상실'은 극에 등장하는 소설가인 로테 버그와 시인인 나디아의 뜻하지 않은 불행을 초래하는데요. 또한 책상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중부 유럽 유대인의 역사적 비극, 그리고 당사자인 '미스터 와이즈'의 가족사는 분명 우리 인류가 기억해야 될 상흔이기도 합니다. 작중 어떤 화자의 독백에서, "유대인은 항상 죽음과 가깝다.","유대인에게 죽음의 의미는 기독교와 불교와는 상이하게 다르다"라는 표현은 인간의 전체 역사에서 이들이 얼마나 거짓된 모함과 편견으로 여타 다른 민족으로부터 핍박을 받아왔는지 이를 여실히 드러내는 대목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어떤 한 민족이 마땅히 누려야 될 삶의 본질 그 자체가 아니라, 항상 음습한 마음으로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는 맥락의 아픈 서사는 저의 마음을 절로 먹먹하게 만들었습니다.
한때 너무나 평화롭고 행복했던 자신의 유년 시절과 당시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소재한 '가족의 집'에 불현듯 나치 독일의 재앙이 들이닥쳤던 그 날의 기억은 마땅히 안온함으로 채워져야만 했던 어린 와이즈의 삶을 그대로 산산히 부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성년이 되어서도 필생의 과업으로 지난날 조부와 아버지가 구축한 가족의 세간살이 즉, 유산을 찾기 위해 전 세계를 떠돌게 되는데요. 이런 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그의 자식들은 이렇게 '인간의 정'을 상실한 아버지와 결코 가까워질 수 없게 됩니다. 일찍 세상을 떠난 아내와의 유일한 자식들인 요아브와 레아 남매의 억눌리고 주눅든 성격, 이 뿐만 아니라 요아브의 여자친구이자 4명의 화자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한, 이사벨이 이런 와이즈을 평범한 사람의 감각으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는데요. 이런 자신의 가족사를 쉽게 털어놓을 없었던 요아브를 그녀는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데요. 요아브와 잠시 떨어졌던 이사벨이 결국 다시 그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진지한 고백은 그럼에도 이 둘 사이에 놓여진 사랑의 끈이 그만큼 굳건했다고 봐야 할 텐데요. 이에 저자는 한편으로 지난날 비극적인 유대인의 가족사를 치유하는데 있어 중요한 힘은 서로를 진정 이해하게 만드는 사랑이며, 이것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가 되기도 합니다. 사랑에 의한 치유는 굴절된 기억, 몸에 새겨진 슬픔과 상처, 그리고 인간성을 상실하는 증오를 역사의 진정한 치유와 함께, 중요한 회복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이 극에서 중요한 인물로 여겨지는 다니엘 바스키는 칠레 출신의 유대인으로 자신의 모국이 곧 중대한 위기를 직면하게 됩니다. 그것은 익히 알려진 바대로 CIA와 시카고 보이스가 협력한 피노체트의 불법적인 군부 쿠데타 획책이었습니다. 바스키는 결국 극에서 몇번이나 중요하게 언급되지만 결국 피노체트 군에 끌려가 행방불명 됩니다. 칠레가 아닌 미국의 폐쇄적 이익과 자신의 영달을 위해 쿠데타에 나섰던 피노체트는 훗날 영국에서 등 수술을 받다가 당국에 체포되었다는 짤막한 기사를 통해, 이날의 비극이 얼마나 보잘것 없이 희화화 될 수밖에 없는지를 여실히 드러내는데요. 작가인 크라우스가 신변의 비밀을 안고 있는 바스키의 실종을 피노체트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는 점은 유대인으로서 과거 나치 독일의 히틀러와 분명 대비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극중에 하인리히 힘러가 짤막하게 언급되는 부분은 그대로 의미심장하다고 느껴지는데요, 또한 다른 화자들의 서사를 통해, 피노체트가 벌인 극단적인 군사 행동에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 바스키의 안위의 문제와 결부되어, 당시 칠레의 상황에 깊은 우려를 표하는 것을 보면 칠레 사태가 그저 한 자락의 뉴스꺼리만은 아닌 것으로 이해됩니다. 작가인 크라우스 본인이 유대인의 디아스포라적 운명 자체에 있어, 이들 민족이 역사의 부침에 의해 산산히 흩어지는 것을 도식적으로 수용한 것은 아닐 겁니다. 역사가 유대인의 궤멸을 바란다는 식으로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이 아닌 다른 세상의 사람들이 느끼기에도 이들이 겪은 지난날 역사의 고난은 참으로 입에 담기 어려운 고통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다시금 강조하지만 말입니다.
또한 작게는 이 '책상을 둘러싼 복잡한 기억들'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이것의 여파가 때에 따라 화자들과 연관된 인물들의 말 못할 비밀과 면밀히 연계됩니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소설가의 남편이자 화자 중 한 사람인 아서 벤더가 아내가 죽음으로써 드러난 충격적인 '비밀'이 이 부부의 삶에서 떠난 그 책상으로 말미암아, 두 사람의 관계가 본질적으로 변화를 맞게 되고, "과연 아내를 제대로 알고 있었던 것일까"라는 자포자기한 감정에 빠집니다. 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예전의 삶을 숨기고 이중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연유에는 바로 2차 대전 당시의 '뉘른베르크에서의 기억'이 있습니다. 이 증오의 전쟁은 당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파괴했고, 동시에 처절한 현장에 버려진 수많은 사람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마음의 골에 아로새기게 됩니다. 단순히 신문 기사나 티비 뉴스에서나 등장하는 전쟁은 몸소 체험해 보지 않는 이상, 이것의 파멸적 의미를 누구든 이해하기 힘든 것인데요. 바로 이 책상의 복잡한 의미가 앞서 제가 설명한 '비극적인 상실의 의미'를 폭력적으로 내포하게 된 연유이기도 합니다. 결국 나치에 의한 유대인들의 학살과 그로 인한 지극히 평범한 가족의 파괴와 절멸은 침묵으로 일관하는 책상과 매개되어 있고, 이것이 여러 사람을 거치면서, 책상을 '상실한' 화자들의 불안한 삶과 더 나아가 예기치 않는 불행으로까지 귀결됩니다. 그저 일상에서 봄직한 사소한 불행이라고 치부할 수 없을 만큼 이들의 삶에 분명한 흔적을 남기게 되는데요. 소설가 아내의 굴곡진 인생과 그것을 수동적으로 대면한 어떤 화자, 자신의 삶에 오롯이 서지 못한 인물들의 서사,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환경들이 만만치 않다는 점은 마치 우리의 불안한 삶을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누구에게나 찾아 올 수 있는 그런 불확실성 말입니다. 분명 이 책상의 주인이기도 했던 다니엘 바스키, 그의 생사불명과 존재성을 두고 얽히게 되는 숱한 오해의 문제들은 화자 한 개인에게만 국한되지 않는 파생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그의 실종과 갈 곳을 잃은 책상의 존재는 단순히 오고감의 단절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는데요. 극의 서사를 이끄는 이 축은 결국 4명의 화자와 깊이 연관되어 있고, 그러면서 이들 각자의 삶에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것은 진실의 대면이거나, 과거의 드러남이거나, 혹은 추악한 비밀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끝으로 작가는 이 노련한 작품을 쓰기 위해, 어느 정도 자신의 외가와 친가의 불행한 가족사를 참고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요. 현재 이런 유대인들이 정착한 이스라엘이 어떤 의미로 '불완전한 정착지'라는 점에서, 수많은 유대인들의 불행은 근본적으로 그 끝을 맞이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뭐 이것을 단순히 역사에서 예정된 '유대인의 고난'쯤으로 가볍게 치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와 다른 누군가에게 쉽게 전해지는 것은 무엇보다 '증오'이며, 이것을 지워내고 희석시키는 것에 필요한 요소는 무엇보다 '더할 나위 없는 큰 사랑'과 이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어쩌면 인류에게 사랑의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의미는 자기 파괴적인 폭력과 증오를 제어하고 제한하는 역할이라고도 읽힙니다. 그런 의미에서 극중 요아브와 그를 이해하기 위해 부던히 노력하는 이사벨의 사랑과 그 결실은 무엇보다 우리에게 중요한 울림을 안겨준다고 여겨집니다. 이와 상반된 결말을 맞이한 인물들인 로테 버그와 나디아의 사뭇 의미심장한 파국은 극의 중요한 문법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거의 나무랄 데 없는 번역과 그에 따른 밀도 높은 서사의 울림 자체는 이 작품의 크나큰 장점으로 여겨졌는데요. 여기에 여러 의미로 쓰인 상징적 장치들도 충분히 공감이 되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꽤나 훌륭한 작품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처음엔 듣지 못한 어떤 배경음 같은 것. 혹은 아침에 일어날 때, 잠에서 빠져나와 깨어 있는 세계로 넘어오는 바로 그 순간에 그 소리가 들린 적도 있어요.
무슨 일이 생겨서 지금까지 자기가 읽은 모든 문학 작품이 머릿속에서 지워진다면, 머리와 영혼에서 지워진다면 어떤 사람이 될지 한번 생각해 보라고요.
너의 눈이나 살짝 기울어진 입꼬리에 무언가가, 고통, 아니 정확히 고통이라곤 할 수 없고,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처음 연애를 시작할 때부터 아내는 자신의 자유에 대해 이런저런 요구를 하지 말 것을 분명히 했고, 내 쪽에서도 그럴 생각은 없었다.
와이즈 씨는 1944년의 그날 밤 게슈타포가 부모님을 체포해 갈 당시, 부다페스트의 아버지 서재에 있던 물건들을 되찾으려고 애썼고, 자신의 서재에 있는 가구나 물건들은 모두 그렇게 되찾아 온 것들이었다.
그때, 왜 바로 그 순간에 움슐라그 광장에 모인 유대인들 사진이 떠올랐는지 생각났다. 그러니까, 링겐블룸에 대한 자료를 조사하던 바로 그 시기에, 게슈타포가 추방 혹은 처형을 당한 유대인의 집에서 약탈해 온 가구나 가재도구를 보관하는 창고 역할을 한 유대인 사원이나 공장 사진들도 함께 보았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한때는 닮은 점이 있었지만, 삶에서 겪어야 했던 그 모든 일 때문에 뒤틀려서, 이젠 알아볼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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