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과잉 민주주의 - 양극화 사회에서 정치의 자리
로버트 B. 탈리스 지음, 조계원 옮김 / 버니온더문 / 2024년 3월
평점 :
로버트 B. 탈리스는 미국 뉴저지 출신으로 뉴욕 대학 (NYU) 에서 석사를, 그리고 뉴욕시에 있는 공공 연구 기관이자 대학원인 뉴욕시립대학교 대학원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현재 그는 테네시 주 내슈빌에 위치한 사립 연구 대학인 벤더빌트 대학의 W. 알튼 존스 철학과 교수이자 정치학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대중에게도 가까운 철학자이자 정치 이론가로 민주주의 이론과 정치 인식론에 기반한 다원주의 정치와 정치적 양극화 등에 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의 이름을 건 12권의 논저와 100편 이상의 논문으로 왕성한 집필 활동도 해오고 있는데요. 이런 현대 철학자가 바라 본 민주주의의 본질이 무엇인지 문득 궁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의 만연된 정치적 양극화에 대해 어떤 적절한 조언을 해줄지 큰 기대를 안고 그의 이 논저를 읽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글은 원제, "Overdoing Democracy"로 지난 2019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4년 3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책 제목으로 인한 여러분의 오해를 좀 풀기 위해, 저자가 말하는 "과잉 민주주의"에 대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는데요. 이에 탈리스 교수는 좀 더 건전하고 개선된 민주주의를 위해, 역설적으로 시민들이 정치적 민주주의에 과도한 집중과 몰입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일종의 당위로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4장에서 좀 더 면밀히 논증 되겠지만 이러한 시민들의 '과잉된 정치 참여'가 결국 정치적 양극화를 심화시킨 원인이라고 저자는 보는 듯 했습니다. 물론 기본적인 시민 의식 없이 상대를 적대화하는 '반정의적 시민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정치적 양극화의 근본 원인은 정치 무대 자체가 아니라, 이 무대에서 시민들에게 표를 표집하는 일부 '자기 이익적 선동 정치인'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소위 엘리트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지지세를 결집시키기 위해, 반대편에 있는 다른 정치인을 악마화 하는 한편, 이런 양극화 구조를 더욱 조장하고 부채질을 해왔는데요. 이 부분에 대한 비판적 인식 없이 시민의 의무라고 볼 수 있는 '정치 참여'를 어느 정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무래도 근거가 조금 불충분하지 않나 생각해 보게 됩니다.
물론 이 논저는 종래의 제임스 브레넌이나 가렛 존스의 '과잉된 민주주의' 담론과는 그 결이 다른 것이기도 합니다. 저는 무엇보다 에즈라 클라인이 문제 제기를 했던 현 정치의 극단적인 분위기인 "우리 편이 맞고 너희는 틀리다"식의 무분별한 정치적 양극화 시대에 대한 일종의 경고라고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전반적으로 탈리스 교수가 제기한 서두의 현 민주주의 정치에 대한 여러 고질적인 문제들에 대한 언급은 대체로 동의할만 했는데요. 단순히 민주주의의 이상과 그 가치에만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민주주의 체제를 구성하고 있는 사회의 본질적 문제들을 다루면서 과연 우리 시민이 어떠한 인식을 갖고 좀 더 나은 정치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가를 우리에게 이 책은 명백히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2부 4장에서 면밀히 다루고 있는 만연된 '양극화 문제'는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앞선 현 정치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한 서두에서, 우리 사회의 정치적 분열과 갈등은 이미 심각한 수준이고, 현 정치 전반을 구성하고 있는 정치인들과 이들 각각을 지지하고 의견 공유에 나선 시민들이 심각한 양극화 상황에 처해 있다고 저자는 판단하고 있었는데요. "이들 모두가 타협과 조정, 생산적인 의사소통 기반이 전혀 없는 상태인 양극화"에 놓여 있고 이러한 상황은 더욱 심각해지고 있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이와 관련해, 탈리스 교수는 "미국 시민들은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속한 사람의 생각이 잘못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안녕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고 여기는 경향이 어느 때보다 높다."고 언급하고 이러한 분위기 하에 반대당과 연계된 시민을 비이성적이고 , 부정직하며, 부도덕하다고 여기는 경향이 높다고 첨언합니다. 이는 우리의 상황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저자가 '숙의 민주주의' 담론을 다루고 있는 것은 다소 의미심장해 보이기도 합니다. 이는 좀 더 확장된 민주주의라는 기본 테제를 달고 있는 2장의 논증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지만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숙의 민주주의에 대한 주제로도 읽히는데요. 그동안 이 숙의 민주주의를 다룬 논저들이 많이 출간된 것은 그만큼 민주주의가 위기라는 것을 반증한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민주주의가 수많은 사람의 갈등을 먹고 산다는 다소 체념적인 진술을 넘어, 기본 인식으로서 그만큼 시민들 사이의 협의와 토론이 중요하다는 의미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이렇게 가짜 뉴스와 대안적 진실과 같은 원하지 않는 정보들의 홍수 속에 숙의된 민주주의가 더 필요한 시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숙의가 제대로 현실에서 이어지기 위해서는 시민들 모두가 정치적 변별력은 물론 자신들이 스스로 비합리적인 의견이나 상황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저 평등한 투표 정도로 왜곡되는 민주주의 정치에서 정확한 정보와 그것에 근거한 투표 행위, 그리고 이렇게 구축된 정치 체제의 전반은 기계적 합리주의자들이 주장하는 합리주의 보다 더 상위의 실천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는 것이 모두 정치가 된다."는 선언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 그리고 이것이 기반이 된 행동과 더 나아가 그런 정치는 건전한 숙의 민주주의의 전제 조건이라고 생각됩니다. 저자는 이런 숙의 민주주의를 단순히 소급해서 받아들이고 있지만 아마 건전한 토론과 서로 간의 다양한 의견 개진이 기반이 된 숙의 민주주의는 우리가 생각하는 민주주의 정치의 이상향과 좀 더 가까워진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요. 물론 민주주의 자체도 권력을 구성하는 여타 배분 문제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현실을 도외시 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숙의 민주주의는 어떻게 보면 문제의 해결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 전반의 올바른 구축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사실 민주주의 체제 하의 기본적인 정치 담론 뿐만 아니라 정치 자체는 저자의 반복된 분석처럼 소위 권력을 다루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런 연유로 정치에 참여하거나 정치 자체를 매번 인식하고 공유하고 있는 시민들이 단적으로 극단적인 신념화 문제에 놓일 수 있다고 저자는 판단하고 있었는데요. 이에 동종애 Homophily 와 관련된 논증은 단순히 자극적인 논증 이상의 질문을 우리에게 하고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사람은 '비슷한 부류를 선호한다'는 이런 인간 사회학의 기본적인 인식은 몇 백 세대를 거친 지금도 유효한 인식이며, 무엇보다 정치 전반에 이러한 통용은 보기보다 심각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시민들 사이에 구별되는 정치 인식과 지독한 편향성, 그리고 현실 문제에 대한 근본적 차이는 어쩌면 정치적 변별력을 상실한 채, 인터넷과 가짜 뉴스 등으로 강화될 가능성이 있으며, 이렇게 비합리주의적 신념에 매몰된 시민들이 기본 성찰을 도외시하고 갈등을 심화시켜 체제 전반을 오염시킬 수 있다는 것이 상당히 타당한 진술로 보입니다. 즉, 이런 극단적인 신념화는 같은 의견을 공유하고, 비슷한 신념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더욱 '타협과 검증을 무시할 수 있는 단일 체계로 몰아 갈 수 있으며, 하버마스나 다른 정치 이론가들이 강조했던 시민들 사이의 생산적인 토론과 서로 간, 최소한의 의견 교환이 가능해지지 않는 실로 편협한 정치적 분위기를 조장하게 되는데요. 물론 이 모든 것이, 정치에 과몰입한 시민들의 문제로만 국한 하기에는 앞서 언급했던 바대로 단순하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특히 시민들 간의 이해 부족이라든지, 정치적 신념과 지향하는 이데올로기의 극명한 차이로 인해 서로 간의 오해와 불신은 민주주의가 강화 될수록 만연해 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저자가 제시한 여러 자료로 증명된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에 저자는 일관되게 시민들로부터 '과몰입 정치'를 배제하고 '정치가 없는' 활동을 서로 공유할 수 있어야 '민주주의'가 건전해 질 수 있다고 강조하기에 이르는데요. 물론 이러한 맥락의 주장이 아주 허무맹랑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신념의 양극화 놓인 시민들이 어떻게 하면 정치적 변별력을 다시 찾을 수 있는지 그것을 위한 실효적인 제안이 먼저 있어야 하지 않나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것이 이론이든 실질적 실천 방안이든 말입니다.
앞서 에즈라 클라인이 자신의 논저에서 분석했던 바대로, 현실 정치에 대한 참여 욕구가 높은 일반적인 시민들 보다 그런 기존 현실정치에서 소외된 시민들이 이런 극단적인 주장과 반정치와 다름 없는 체제 선동적 외침에 더 쉽게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경고는 우리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우리는 이러한 극단적 주장에 과몰입하고 더 나아가 신념화 단계에서 더욱 강고해진 일부 시민들이 처한 환경과 이들의 목소리에 좀 더 귀 기울일 필요가 있어 보이는데요. 우리에게 정치적 참여와 그에 기반한 정치적 자유 및 평등은 우리의 권리이자 의무임을 이미 명백하게 잘 알고 있습니다. 저자의 말마따나 민주주의 하에서, 평등한 투표권 이상의 정치적 평등이 모든 시민에게 요구되는 것은 특히나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 정치 상황에서 더 중요합니다. 저자는 이를 전혀 다루고 있지 않지만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초래한 이 경제적 불평등이 삶의 통제와 건전성을 해치고 정치 참여에 대한 '시민의 의무'를 허황되고 신선 놀음과 같은 것으로 이들 시민들이 정치에서 더욱 멀어지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경제적 조건도 개선하지 못하는 자들이 무슨 정치 운운이냐" 이런 폭력적 주장들이 바로 신자유주의가 조장한 것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현실 정치의 문제와 우리의 삶은 어떻게 보면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이건 거의 명확한 진리에 가깝지 않나 매번 제 자신에게 거듭 되물어 보기도 합니다.
끝으로 이 논저의 결론이라고 볼 수 있는 3부에서 극단적 신념화 그에 따른 양극화 문제, 정치의 분절과 같은 현실의 모양새는 민주주의적 가치가 더욱 요원해 질 수 있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체제의 불안정성이 시민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될지는 거의 명약관화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자는 이에 "민주적 관점에서 평등한 시민들 사이의 정치적 불일치는 정치가 지닌 냉혹한 사실 중 하나"라고 강조하고 있는데요. 저 진술은 단순히 불편한 논증 이상의 진실을 저자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각기 다른 신념과 정치적 식견을 지닌 각각의 시민들이 서로간의 '우애'를 쌓을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만 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고, 이는 그만큼 시민들에게서 탐욕의 정치와 멀어지게 만든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인간 사회에서 그만큼 서로 간에 증오와 몰이해가 앞선 극단적인 요인 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의 복합적인 요소 때문에 더 심각해지고 있는 상황이니 만큼 우리는 서로를 좀 더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것은 고명한 정치적 담론이 아니라 사회를 구성하는 대다수 시민들 각자의 안온한 삶을 위해서도 중요한 과제로도 읽히는데요. 저는 민주주의의 기본 이념이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 글에서 찾는다면 우리가 동의하거나 지지하지 않은 사람이 시민들의 투표로 정치 권력을 획득했다 하더라도 민주주의를 위해, 이것에 대한 의견과 문제 제기를 끊임없이 하는 것이 '시민의 의무'로 여긴 저자의 탁월한 분석이었습니다. 이것이 설사 민주주의 정치의 근본적인 '불협화음'이라고 할지라도 서로 존중하고 이해하는 시민들 사이의 '불협화음'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저자의 이상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시험해 볼 수 있는 '시험의 장'이 열린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앞선 시민들 사이의 기본적 '우애'를 만들기 위한 여러 외부 활동과 비정치적 모임과 유사한 체계들 말이죠. 이렇게 우리의 민주주의는 도덕적 정의 뿐만 아니라 정치적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고, 비지배적 자유를 가능케 하는 장(場)입니다. 물론 민주주의 이상의 가장 중요한 점은 모두가 동의하는 선(善)에 가까워질 수 있게 한다는 점입니다. 정치적이든 도덕적이든 무엇이든 간에 말이죠. 이것이 바로 철학자가 인식하는 민주주의가 아닐까 셍각해 보게 됩니다.
경험적으로 민주주의는 다른 종류의 주요한 사회적 선의 생산과 높은 상관관계를 가진다.
민주주의 사회는 시민의 자유와 기본권을 보다 잘 보호하며, 인권 관련한 기록도 상대적으로 훌륭한 편이다.
현상 유지를 묵인하는 것은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 만연한 불의를 체념하는 것이므로 공모와 같다고 본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치적 견해가 이성에 근거하고 있다고 믿는 한편, 우리가 동의하지 않는 사람드르이 견해는 정보가 부족하고 잘못 판단한 것이며 수정 가능하다고 여긴다.
민주주의의 범위 내에 있는 것으로 명시된 일부 활동들은 민주 시민에게 요구된다고 여겨지기에 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거나 전혀 수행하지 않는 사람은 시민으로서 비판의 대상이 된다.
노동자와 학생도 시민으로서 참여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서 이들을 대상으로 정치적 발언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들어야 하는 정치 메시지에 반대하거나 단순히 의문을 제기하고 싶은 노동자와 학생은 실제로 그러한 목소리를 낼 수 업삳.
모든 형태의 사회적 상호작용을 민주적 시민성을 실천하는 것으로 이해하게 될 때 민주주의의 과잉이 일어난다.
결론은 분명하다. 많은 곳에서 정렬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빨간색과 파란색,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 사이의 익숙한 정치적 분열과 적대감이 사회 환경의 기본 구조의 일부가 되어, 항상 쉽게 인식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실제로 효과적인 방식으로 평상시 우리의 일상적인 상호작용을 분리시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 진보주의자는 더 철저한 진보주의자가 되고, 보수주의자는 더 강경한 보수즈의자가 되며, 페미니스트는 더 열렬한 페미니스트 입장을 갖게되고, 인종주의자는 인종적 편견이 강화되며, 정치적 시위를 옹호하는 사람은 더 극단적인 형태의 정치 행위러 기울게 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민주주의를 정치적 포화 상태로 이끄는 원동력 중 하나는 공적으로 참여하는 시민들이 평등한 존재로서 스스로를 통치하는 사회라는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이다.
즉, 시민들은 각자가 지닌 이성적 근거를 알 수 있어야 하며, 공직자의 견해와 정부의 행위뿐만 아니라 서로의 견해에 대해 비판하고, 논쟁하며, 질문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등의 교류 과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