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학의 포로들 - 세계의 패권 싸움은 지정학의 문제다
정의길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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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출간된 신간들중에 저의 관심을 절로 끌었던 이 책은 한겨레 신문 국제부 선임 기자를 역임한 정의길씨가 저자인데요. 이분의 이름이 그리 낯설지가 않아서 잠시 검색을 해봤는데, 여러 매체를 통해 저에게도 역시 꽤 익숙한 분이었습니다. 요즘 시절이 어수선하여 아마 많은 분들도 국제정치학에 관심이 있으실텐데요. 국제정치학에 올곧이 지정학을 붙인 저자의 의도가 너무 궁금하여 금새 책이 제 손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약 490여페이지 분량의 글은 다소 소화하는데 시간이 좀 걸리지 않을까 싶었는데 짐작보다는 일찍 완독을 했습니다. 문장들은 거의 군더더기 없이 명료했는데요. 아마 이 때문에 수월하게 읽혀졌던 것 같습니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주된 내용은 온전히 국제정치의 범위에 지정학이라는 관점을 녹여 새롭게 해석한 것이 아니라 대체로 그동안의 소개된 일반적인 사례들을 평이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좀 더 엄밀하게 말씀드리면 과거 세계 역사에서 큰 반향과 전환이 되었던 세계 정치 외교사의 사건들을 중심으로 풀어나가고 있는데요. 어떻게 보면 191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세밀한 세계 근현대사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크게 소위 ‘그레이트 게임’이라고 지칭하는 3가지의 사례를 중심으로 글을 풀어가고 있는데요. 즉, 제1,2차 세계대전에서의 독일과 냉전시기의 구소련, 오늘날 중국 등을 그레이트 게임의 주된 행위자로 저자는 밝히고 있습니다. 물론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라든지, 특히 러시아의 팽창과 미국의 독립과 그 과정과 관련해서 여느 책에서는 좀체 알 수가 없었던 상세한 이해를 독자들에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과거 러시아 제정부터 소비에트 혁명 전까지의 러시아 역사를 이렇게 개략적이나마 세밀한 역사를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는 것은 특별히 좋은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역사적 사례들과 더불어 당시 각국의 이해관계와 행적에 대해 ‘지정학’이라는 수단으로 해석 평가하는 것에도 좋은 평가를 하고 싶군요.

다만, 여러 내용들 중의 저자의 판단 중에, “소련의 경제 악화는 경제 정책과 운용의 실패라는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러시아의 지정학적 상황이 결부된 체제의 한계’ 라는 부분은 다소 납득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당시 소련의 정치 권력이 어떠한 실패를 답습했고 자신들의 정치 권력 유지를 위해 또 어떤 일을 벌였는지 찾아보면 앞의 이 소련의 붕괴가 단순히 미국의 대소 봉쇄와 그로인한 한계 때문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물론 구소련의 해체로 인한 냉전의 소멸은 정말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그 과정에서의 소련 정치권이 국민들을 여러가지 방법으로 한계까지 몰아간 것은 결국 이러한 내부 모순과 피폐한 국가주의가 돌이킬 수 없는 역사의 흐름을 자초한 것이죠. 최종적으로 고르바초프도 소련이 과거의 체제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책 말미에 대중화 세력권이라는 삽입된 한 지도에서 일본과 인도는 그러한 세력 전이에 저항하는 국가로 표기하고 다른 지역내의 국가들에 대해서는 소위 중화 세력권으로 편입되는 식으로 판단한 듯 한데요. 현재 중국 경제권이라는 측면이 점차 가시화되고 있고 미국 측에서도 한국과 일본도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에 벗어 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지만 정치외교적으로는 아세안 국가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도 순순히 이러한 중화 세력권에 편입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미 동맹은 계속 유지가 되어야하고 저는 앞으로 급변하는 안보 변화의 측면에서 더욱 한미간의 상호방위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인도나 일본이 중국의 지역 패권국의 지위를 차지하고자 하는 열망에 반대하는 이유는 서로간에 다르고 아세안 국가들 중 특히 캄보디아는 중국 영향력에 있다고 봐도 무방하지만 점차적으로 중국의 영향력이 확대됨에 따라 과거 중화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는 국가들이 분명 많은 만큼 이러한 중국의 ‘중국몽’이 달성될 상황은 비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중국 내부 모순이라든지 이런 것은 따로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글의 전체적인 논지가 대체로 균형이 잡혀 있어서 글 서두에 지정학을 바탕으로 현실주의적 국제정치를 그려보고자 했던 저자의 목적이 대체로 부합되었다고 여겨집니다. 오늘날 미국이나 과거의 소련 등이 배후에 안보 불안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으려는 목적이 이러한 지정학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공인된 5개 핵강국과 그외 몇개의 핵 보유국이 있지만 1945년 이후 오늘날까지 국제 정치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자신들의 국익을 부분적이나마 배타적으로 사용한 국가들은 미국과 러시아, 중국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오늘날 이런 측면에서 지정학을 바탕으로 자신들이 처해있는 국가적 상황과 판단을 능동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정말 소수에 지나지 않나 싶습니다. 만약 이러한 가정이 틀렸다면 냉전 시기에 왜 많은 국가들이 제3세계에 자청해서 속하려고 했는지 그 속에 진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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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내 생계를 위협하는가 - 누가 진보를 죽였는가!
크리스 헤지스 지음, 노정태 옮김 / 프런티어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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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0년 ‘Death of The Liberal Class’ 라는 제목으로 미국에서 출간된 전직 뉴욕타임스 기자이자 현재 비영리 미디어 센터인 네이션연구소에 재직중인 크리스 헤지스의 ‘누가 내 생계를 위협하는가’를 읽었습니다. 국역된 제목이 원래 제목과는 상이한데요. 일종의 ‘리버럴 계층의 죽음 혹은 몰락’ 이라면 번역된 제목은 ‘중산층 시민의 몰락’이 진보 및 리버럴 지식인들과 그 계층의 책임이라고 에둘러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었습니다. 모든 책임이 그들에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정 부분 책임을 벗어 날 수 없는 것은 자명해보입니다.

1980년대 부터 미국 사회가 이전의 베트남 전쟁과 냉전시기의 국가가 다소 안보를 위해 급격히 정치적인 보수화와 경제적으로는 개인의 이기심과 시장주의에 맡기자는 신자유주의적 입장으로 오늘날까지 이러한 정치경제 기조가 미국 사회를 지배해 왔습니다. 신자유주의적 기조와 그러한 경제 정책이 어떠한 혜택도 답보하지 않는 사기임에 들어났어도 이러한 파워 엘리틀이 견고하게 구축한 정치경제적 시스템에 ‘제도화된 진보주의자들’ 이 이런 흐름에 편승해 본래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이 책의 주된 내용입니다. 더욱이 일반적으로 민주주의 사회의 중산의 시민 계급이 특히 경제적으로 사회에서 이탈하게 된다면 이것은 심각한 상황이라고 봐도 이상하지 않는데요. 기본적으로 진보와 (관습적으로 쓰이는) 리버럴 지식인들이 사회 시스템의 모순과 정부의 불합리한 정치 행태, 기업과 한층 가까워진 언론들에 대한 적극적이고 마땅히 해야하는 비판과 견제를 왜 포기하고 등한시했는지에 대한 인과관계 또한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게 비교적 자세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헤지스의 이 글이 인상에 남은 것은 그가 언론인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독서를 해 온 것을 여기에 소개되어 있는 원문과 많은 주석의 출처 등이었는데요. 이러한 점은 저자가 언론인으로서 겪은 체험과 거기에 주장하는 근거의 이론 등이 더해져 이런 부분이 전체적인 글의 요지를 일관되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고 여겨집니다. 또한 번역도 크게 나무랄데가 없어서 저는 읽는내내 편안하게 읽었는데요. 다만 저도 이 책을 구입할 때는 인지하지 못했다가 조금 검색을 해보니 2014년에 ‘진보의 몰락’이라는 제목으로 신판이 재출간이 되었더군요. 혹여 책을 읽어볼까 고민인 분들은 신판으로 구입하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사회와 관련하여 진보에 요구해 왔던 것은 기득권과 정치 권력 및 경제 엘리트들에 대한 건전한 비판과 견제였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진보나 좌파에는 반대에 있는 부류들과는 달리 사회에 대한 소명의식과 건강한 양심이 뒷받침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사회전반적으로 자본주의화가 고도로 이행되면서 진보 계층 및 지식인들이 기존의 자신들이 마땅히 비판하고 견제해야 될 대상들의 권역으로 편승되기 위해 소위 ‘제도권 및 제도화되어 공인된 지식인’이 되고자 하는 욕구가 분명 있었습니다. 요즘에는 이러한 경계에 교묘히 오고 가면서 회색 박쥐와 같은 처신을 하고 있는 진보 지식인들이 많은데요. 단순히 양심의 유무와 단순히 맹세를 어겼다는 측면에서 극단의 양면적인 비난을 하기에는 이러한 지식인들의 ‘개인적 삶’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긴 하지만 그 이면에는 적극적으로 편승하고 있는 지식인들도 사뭇 많아 그것을 기득권과 권력층이 교활하게 이용하고 있는 상황이 오늘의 현실일겁니다.

이러한 급격한 과정은 특히 미국 사회에서 결정적으로 드라났는데요. 저자인 헤지스도 인정하고 있지만 부시 행정부 때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개입의 명분이 ‘타협할 수 없는 필수불가결한’ 문제라기 보다는 일종의 이익 문제의 측면이 컸고, 당시에 미국 사회의 상황은 언론을 교묘히 통제하며 홍보를 지속한 당시 정치권력의 왜곡의 프로파간다였음에도 마땅히 그러한 상황에 침묵한 진보 지식인들이 많았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봐야겠습니다. 특히 뉴욕타임스와 같은 일부 언론은 기사로 내보내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목록을 갖고 있었다는 헤지스의 주장을 접하고 보니 당시의 그런 연결고리가 얼마나 견고했는지 짐작이 되었습니다.

일찍이 토크빌은 민주주의 시민 사회에서 개인들의 이기심을 적절하게 제어하지 못하면 그것이 재앙을 초래할 것이라고 밝힌바 있습니다. 인간들의 브레이크 없는 경제적 팽창에 지구가 병드는 환경 문제라든지, ‘대량살상 금융무기’라고 불러도 무방한 각종 금융시장에서 발휘되는 투기적 증권화와 한도와 제한없는 투기 거래 등과 이렇게 벌어지는 이권의 명백한 당사자들의 돈과 영향력에 굴복해 투쟁하지 않는 진보에 대해 전체적인 일관된 어조로 크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지금에서라도 진보와 좌파는 ‘진실과 아름다움 (아마도 마땅히 지켜야 될 가치)’을 약탈적 이익 계층으로부터 지켜내야 한다고 특히 강조합니다. 다만 한가지 안타까운 점은 이러한 상황의 얼마간 책임이 있는 진보 지식인들이 그들에게 멍청하게 속아 넘어 간 것이라고 비판의 정점을 찍는 발언이었습니다. 장 자크 루소는 지식인의 역할이 공화주의를 왜곡하는 이들에 대한 감시와 견제라고 규정했는데요. 견제하기는 커녕 아예 자발적으로 속아 넘어간 것이라면 지식인의 사전적 의미를 고쳐야될 정도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이것을 확대 해석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것이 오늘날 ‘이익 사회’의 단면이 아닌가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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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검은 돈은 스위스로 몰리는가 - 조세피난처의 원조, 스위스 은행의 비밀
장 지글러 지음, 양영란 옮김, 홍기빈 해제 / 갈라파고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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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이 곳 리뷰에서 장 지글러의 ‘유엔을 말하다’에서 잠시 언급했던, “왜 검은 돈은 스위스로 몰리는가” 를 읽었습니다. 이 책과 관련해서 소개된 해외 기사들도 있고, 저자 본인도 약간의 후일담으로 꺼내긴 했습니다만, 장 지글러는 1990년 출간 당시 자신의 모국인 스위스에서 수많은 살해 위협, 입에 차마 담을 수 없는 매국노라는 취급까지 받으며 더불어 민사 재판에 피소되어 법원까지 드나들어야 했었는데요. 이 글의 도입부에서도 “관계 당국이나 당사자들 그리고 법원에서 이 글이 밝히는 주장에 어떠한 허위성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히고 있는데요. 그래서 1989년 당시 스위스 금융과 관계 당국, 사법 당국의 행적과 구조 등을 통해 어떻게 전세계 마약 자금 등과 같은 검은 돈이 스위스에 몰려 들었는지에 대해 이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단순히 유럽 한복판에 영세중립국이라는 입지 만으로 이 지역의 은행들에 돈을 맡기면 안전할 것이다 라는 속념과는 좀 더 상세한 구조적 개념을 알 수 있는데요. 확실히 돈이 있는 곳에는 일종의 카르텔이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유럽의 스위스는 전세계 민주주의 역사에서 오래된 실질적 연대가 있는 국가인데요. 특히 직접 민주주의의 측면에서 시민들이 특별한 사안에 대한 ‘직접 투표’와 이런 기본 토대를 바탕으로 꽤 견고한 연방주의적 통치구조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방을 구성하는 각 주의 고유한 통치를 법적으로 보장하고 있는데요. 이를테면 여기서 소개되는 연방 검사제도에 있어서 프랑스나 미국과는 달리 각 주의 사법 체계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으로 이것은 각 연방법에 관련한 사안에도 주정부에 상당한 권한이 있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리고 스위스 금융 카르텔은 스위스 내의 정치권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고, 그런 연유에는 스위스 경제에서 이 국제 금융업은 적지 않은 자본을 창출하고 이것을 스위스 국내에 재창출을 하는 즉, 시민들에게도 실질적 혜택이 돌아가는 등의 견고한 정치경제적 시스템인데요. 이러한 과정에는 대체로 정치권의 지원이 있을 수 밖에 없을 겁니다. 더 엄밀히 말하면 이러한 시스템에 정치권이 보조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봐야겠죠.

이러한 스위스 전체의 정치경제적 외부돈으로 인한 경제 순환행태가 그동안 이 검은 돈을 적극적으로 유치하게 된 요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상 남의 돈으로 자본의 재창출을 해왔던 것으로 지난 2차대전 기간에 유대인들이 맡긴 돈을 관련 증언이 나타나기 전까지 모르쇠로 일관했던 사례나 각종 범죄 단체의 검은 돈을 캐내기 위해 유럽의 여러 수사당국들이 스위스 당국에 수사 요청을 해왔을 때도 그것을 갖은 수단으로 무시해 왔던 연유에는 이러한 기조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2018년 현재에는 스위스-EU가 맺은 범죄와 관련된 계좌 사실 확인 협정이라든지 2008년 이후에 미국의 검은돈 추적과 관련된 미국 사법 당국에 의한 압력에 다소간 굴복해 스위스 금융권이 ‘계좌인의 사실 관계 통보’와 같은 정보 제공에 나서고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장 지글러가 이 글을 쓸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아마도 마약 자금과 같은 비윤리적인 검은 돈을 아무런 윤리적 양심 없이 마구잡이로 받아들이고, 이것을 통해 스위스 은행들이 막대한 수익을 올려왔고, 그리고 이러한 카르텔에 연계되어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스위스 정치권의 부패와 비윤리적 개입을 폭로할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 스위스의 많은 변호사들이 이러한 검은돈을 관리하는 ‘페이퍼 컴퍼니’를 위해 일하는 등의 윤리적 문제는 아마도 덤이었겠죠. 지글러 자신의 의원으로서 그리고 학자적 양심으로 진실은 알려져야만 한다는 절박한 소신이 이 글의 출판의 원동력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외부에 꽤 훌륭한 민주주의 정치로 어느 국가 못지않게 부유하고 부강한 나라로 알려져있던 스위스 국민으로서는 장 지글러의 이 책이 매우 못마땅했을 겁니다. 더군다나 이러한 이익과 관련된 자들이 그를 죽이겠다고 수없이 협박하고 있었던 상황이었으니까요. 더군다나 1991년에는 이 책으로 의원으로서 면책특권까지 박탈당했으므로 저같은 평범한 사람은 그의 고된 개인사를 참으로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일에 선뜻 나선 저자의 노력에 찬사를 보내고 싶습니다. 저는 ‘노엄 촘스키’와 비견될 만한 지식인이 또 존재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 ‘검은 돈은 왜 스위스로 몰리는가’는 그러한 평가를 받을만 하다고 여겨지네요. 끝으로 얼마 전 제러드 듀발의 글에서 봤던, ‘성찰과 행동을 결혼시키자’ 는 문구가 문득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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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을 말하다
장 지글러 지음, 이현웅 옮김 / 갈라파고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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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에는 ‘탐욕의 시대’와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 장 지글러의 최근 번역된 ‘유엔을 말하다’를 읽었습니다. 장 지글러 교수는 적지않은 이력을 갖고 있는데요. 1934년생으로 스위스에서 교수로 시작해 스위스 연방 의회의 의원, 그리고 유엔에서 식량특별조사관을 역임하고 현재 유엔인권이사회의 위원으로 일하고 있는데요. 처음 그를 접하는 분들은 겉으로 보이는 이력만으로 명예를 추구하고 출세지향적인 인물이 아닐까 여기실 수도 있지만, 그는 제가 언급한 전자의 삶과는 거의 상반되는 즉,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그것을 위해 사력을 다한 삶을 산 인물이라 평가 받을 만 합니다.

소개할 이 책은 온전히 유엔의 정치적 배경과 학술적인 측면의 접근이라고 보기에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자의 개인적 체험이 글 곳곳에 들어가 있어서 유엔에 대해 좀 이론적이 아닌 실체가 잘 드러난 부분이 많아 개인적으로는 꽤 흥미롭게 여겨졌습니다. 아예 국제정치학적인 관점에서 유엔에 대한 일반적인 입장과 제안, 한계점 같은 것을 기대하셨다면 그것을 풀어내는 방법이 앞에서 서술한 것처럼 많이 다르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여기서 보이는 유엔은 현재의 그 한계와 최초의 설립 취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곳에 속했있는 국가들의 첨예한 국익 다툼과 예를들면 기업의 이사회의 최고위직에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상임이사국 5개국의 행태 등으로 국제 무대의 현실정치가 역시 상상하는 만큼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자 역시 유엔에서 상이이사국 5개국의 거부권 부여가 마땅히 해야할 일을 어떤식으로 무산 시키는지에 대한 사례 또한 이것을 정치 논리와 이들의 국익의 현실적인 측면으로만 인지하는 것이 저로서도 부당하게 느껴질 정도니까요. 꽤 실질적인 부분에서 유엔의 자정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지글러 교수는 지난 유엔에서의 활동 기간에 팔레스타인 지역의 식량실태에 관한 현실적인 보고서로 이스라엘에 의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는데요. 실질적으로 그가 한 행동은 진실과 정의의 측면에서 매우 옳은 결정이었으나, 이스라엘 측은 지글러 교수를 ‘반유대주의’에 매몰된 위험한 인물로 여론 몰이를 해, 이스라엘과 미국으로부터 기피인물로 여겨졌습니다. 과거 부시 해정부 시절에는 더 노골적으로 저자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있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로 말하면, 계속 저항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글 말미에 자신의 의지를 적고 있습니다. 본문 중간에 장 폴 사르트르와의 인연, 일종의 같은 연구회에서 일하고 있는 노엄 촘스키에 대한 언급을 봤을 때, 장 지글러가 어떤 사람인지 알겠더군요.

약간의 논외지지만 지글러는 스위스 연방의회의 의원으로 재직시에 ‘왜 검은 돈은 스위스로 몰리는가’로 1991년에 면책 특권을 박탈당했습니다. 또한 그것과 관련하여 이 책에서도 과거 스위스 은행 연합이 2차대전 당시 유대인들이 보관했던 예금에 대한 일종의 지급 거부로 유엔과 유럽에서 문제가 되었을 때도 자신의 모국인 스위스와는 반대되는 입장에 있었는데요. 미국 상원 청문회에 증인으로도 출석하고 자신이 정의라고 믿는 것에 마땅히 행동을 한 것인데 이런 ‘세계의 양심인’에게 반유대주의로 이스라엘과 유대주의 단체가 그를 매도한 것을 보니, 유럽의 양심과 합리주의는 어디로 갔는지 개탄할 수 밖에 없더군요. 이것이 어쩌면 정말 사족이겠지만 한국인 출신으로 유엔의 사무총장을 역임했던 사람에 대한 그 정치적 배경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고 그에 대한 평가도 있었습니다. “사무총장을 맡은 사람은 코피 아난에서 생명력 없는 엑스트라 같은 인물로 대체되었다.” 라는 평가와 그는 미국으로서는 남한이라는 가신 같은 공화국 출신의 국민이라는 점이 호재였다는 부분이 유독 가슴이 아팠습니다. 간혹 제3세계의 국가들이 한국을 일본과 같이 한 세트로 묶어서 그렇게 취급한다던데 물론 과거와는 달리 현재 우리의 국력이 그들과는 차이가 있지만 저로서는 딱히 반박할 여지는 없어보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오탈자가 한군데 보였는데, 이 부분은 옥의 티라고 볼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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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스트 데모크라시 - 소셜 네트워크 세대는 민주주의를 어떻게 바꾸는가
제러드 듀발 지음, 이선주 옮김 / 민음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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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 있는 싱크탱크인 데모스(Demos) 소속 연구원인 제러드 듀발의 소위 웹 2.0 기반의 우리 세대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에 대한 예측과 평가를 담은 책 ‘넥스트 데모크라시’를 어렵게 구해 읽었습니다. 어렵다는 표현은 어쩌면 짐작하셨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책은 현재 절판된 상태입니다. 다만 출판사가 민음사이니 어쩌면 재간행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2000년대 이후 전세계의 웹 기반이 눈부시도록 발전하면서 오늘날 민주주의가 과연 어떤 식으로 변화되고, 민주주주의의 토대인 시민들도 또 어떻게 바뀌게 될런지에 대한 여러 연구가 있어 왔습니다. 저역시 관심을 갖고 보고 있는데요. 만연한 양비론과 정치 불신이 더 심각해질 것인가 아니면 시민들의 좀 더 직접적인 정치 참여가 원할해지면서 민주주의가 가치 측면에서 건실해질 것이다 라는 서로 구분되는 예측들이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신자유주의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적 고도화와 발달된 인터넷과 망으로 인해 시민들이 더욱더 현실 정치와 멀어지지 않을까 조심스레 짐작했는데요. 근래 유튜브에 대한 많은 참여와 활성화 각종 SNS 등이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더 정치에 대한 관심을 유발시키지 않았나 평가를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저자인 듀발의 미국의 현실은 우리와는 조금 다르긴 하지만 오늘날 웹 기반의 보편적인 상황이 민주주의에 있어서 나쁘지 많은 않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몇년 전, 미국 루이지애나 주에 들이닥쳤던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뉴올리언스를 비롯한 여러 지역이 수몰로 인한 재산피해와 적지 않은 인명 피해를 겪은 것을 잘 아실겁니다. 늑장 대응으로 비판 받았던 조지 W. 부시와 해당 업무에 전혀 연계가 없던 인사를 연방 재난 관리청 청장으로 마이클 브라운을 앉힌 것과 당시 이라크 전쟁 등으로 주 방위군을 비롯한 군대가 제대로 투입되지 못해 사설 보안 회사 인력들이 현지 치안을 담당해 많은 무리수를 두었던 것도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그 와중에서도 현지 주민들의 적극적인 복구 참여와 시 당국과 주 정부를 통해 주민들의 목소리를 전달하기 위해 대중의 민주주의 참여를 촉구하는 단체인 ‘아메리카스피크스’와 함께 실시간 직접 투표와 집계가 가능한 기기를 도입해 이를 이용한 것은 민주주의 정치 참여의 새로운 일례가 되었습니다. 저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한 사실인데요. 뒤이어 오픈 소스 형태로 커널을 공개해 핀란드의 대학생이었던 리누스 토르발스가 ‘리눅스’를 만들어 오늘날 웹 기반의 원조가 되었던 것 또한 이러한 시민들의 참여에 대한 신선한 계기의 기반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 일종의 온라인 혁신에 관한 부분이 제법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어서 이 부분에 관심 있는 분들은 꽤 흥미로우실 것 같습니다.

현재는 이러한 웹 상황에서 진행되고 있는 현실 정치 참여는 주로 기후 변화와 관련된 주제로 이뤄지고 있는데요. 미국이나 유럽의 풀뿌리 민주주의 단체들은 트럼프의 거부로 촉발된 기후 협약 무산에 대해 우려와 그에 대한 대책 등을 웹 상에서 활발히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직은 전반적인 정치 참여 측면에서는 아직 걸음마 단계이지만 지난 2003년 대선에서 하워드 딘 캠프가 성공적으로 선보였던 웹 민주주의 라든지 투명성과 열린 정치 참여를 기조로 개인 블로거와 소규모 언론 사이트, 많은 학생들이 관심을 갖고 하고 있는 여러 활동등에 듀발은 상세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이 벌이고 있는 이런 현실 정치 참여가 감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겠죠.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시민들의 웹 기반의 적극적 정치 참여가 투표율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심각한 정치 불신에 매몰되지 않고 건실한 민주주의를 위한 토대가 되기를 바라는 희망 때문일겁니다.

끝으로 이 책의 책장을 넘기면서 과연 우리나라의 현실은 어떠한가 하는 고민을 해봤습니다. 촛불 민주주의로 부패한 정치를 종식시켰던 우리 시민들이 이러한 단일된 행동에 SNS가 큰 역할을 한 것은 부인할 수 없겠죠. 다만 아직도 정치 권력이 온라인을 통해 개입한 전력이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측면이 있어서 대중들의 판단이 아직 호불호가 있는 듯 합니다. 정치 권력이 이러한 식으로 개입한 전력은 앞으로 우리나라 웹 기반의 현실 정치 참여에 큰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우려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일단은 희망을 갖고 보는 것이 중요하겠죠. 웹 2.0 기반의 민주주의가 널리 많은 시민들에게 민주주의 2.0으로 진화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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