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탈원전을 결심했나
간 나오토 지음, 김영춘 외 옮김 / 에코리브르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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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11일 발생한 동일본 지진으로 인한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의 멜트다운 및 수소폭발 사태에 당시 일본 총리였던 간 나오토의 최근 출간된 후쿠시마 사태에 대한 글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실로 적절한 시점에 한국에 번역 출간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 후쿠시마 원전 사태에 관련하여 가장 상세하고 폭넓은 정보를 제공하는 오시카 야스이키의 ‘멜트다운’에 언급된 간 나오토 총리의 처한 상황을 보고 저는 절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는데요. 그런 측면에서 간 나오토 전 총리의 이 글이 기대되었습니다.

오시카 야스이키의 ‘멜트다운’에서는 일본의 도쿄전력이 당시 간 나오토 총리에게 상황 보고를 제대로 하지 않고, 아마도 의도한 상황이겠지만 총리를 거의 정보 격리를 시켰는데요. 이에 간 나오토 총리는 전문가 그룹을 따로 만들정도로 도쿄 전력을 다소 불신하기까지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책에서도 구소련 체르노빌 원전 사태 당시 서기장이었던 고르바초프의 입을 빌어 “원자력 분야의 폐쇄성과 비밀성이 목격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는데요. 제가 읽었던 ‘멜트다운’에서도 일본 원전 마피아의 노골적인 정보 폐쇄성에 실로 충격을 받기까지 했습니다. 어떤 인사는 원자력에 대한 정보 공개는 일본의 국익에 이롭지 않다고 밝혔는데요. 일전에 노엄 촘스키는 어떤 소수의 이익 집단이 막대한 이익을 나눠갖고 있다고 의심되는 정황이 있다면 거기에는 폐쇄적이고 집단적인 그들만의 비타협적 정보 공유가 있다고 밝힌바 있습니다. 그러니까 공익적인 측면에서 다수의 이익을 위한 그런 정보가 아니라 자신들의 거의 반항구적인 이익 공유를 위한 정보 폐쇄가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보호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죠.

다시 2011년 3월 11일의 후쿠시마로 돌아가보자면, 당시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의 원전 6기 중 1호기와 3호기가 수소 폭발하여 각각의 원전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붕괴 위험까지 내포되어 크게 볼때 동일본 전체가 앞으로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될 지경에까지 이를 수 있고 이는 일본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예상이 당시 간 나오토 총리의 분석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너무 상황을 비관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냐는 관료들과 도쿄 원전 관계자들의 주장과 전면적인 주민 대피를 고려하는 것은 너무 무리가 아니냐는 의견까지 보이는데요. 저는 당시 일본 정부의 전체 입장을 싸잡아서 재단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일본의 관료 사회는 뭔가 민주주의의 정보 개방성과 시민의 안전에 대한 원칙에 있어서는 문제가 있어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 나오토 총리는 도쿄 원전의 직원들과 관료들을 이끌고 피해 상황 복구에 나서 큰 노력을 기울인 것은 일견 당연해 보이지만 방사능 피폭의 가능성까지 염두해두면서 현장을 일일이 챙긴 것은 그나마 일본 국민들에게는 큰 위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자위대가 보유한 장비만으로는 부족해보여 도쿄도에 있는 관련 장비를 수소문하기 위해 당시 이시하라 신타로 도지사에게 직접 연락하지 않고 그 긴박한 시간에 사람을 거쳐 연락을 시도한 것은 뭔가 납득이 되지는 않더군요. 일본인들 간의 예의 차원에서 지인을 통해 연락하는 것이 인간관계의 측면이라면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러한 긴박한 시간에 총리가 도지사에게 몇다리 건너 연락하고 있는 상황은 뭔가 문화충격이었습니다. 물론 이시하라 도지사와 연락이 되고 나서 정파를 초월해 협력해왔다고 평가하긴 했습니다만 일본인들의 그런 상황에서 일본인들의 예의 차림은 신선하긴 하군요.

이후, 총리에서 물러난 간 나오토 전 총리는 자신 스스로가 탈원전 지지자가 되어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일본 국민들에게 앞으로 탈원전 계획의 당위성과 재생 에너지 필요성에 대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데요. 현재 일본에 54기의 원전이 있다는 것은 지진과 화산 활동에 취약한 일본 상황에는 불안한 측면이 있어 보이긴 합니다. 끝으로 이런 후쿠시마 원전 사태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은 분들은 앞서 제가 언급한 오시카 야스이키의 ‘멜트다운’을 참고해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간 나오토 전 총리의 이 책은 전반적인 후쿠시마 사태의 일본 정부와 도쿄 전력, 비상대책위원회 등의 상세한 상황 정보는 다소 미흡하긴 합니다. 참고가 되셨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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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주하는 일본의 극우주의 - 재특회, 왜 재일 코리안을 배척하는가
히구치 나오토 지음, 김영숙 옮김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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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쿠시마 대학의 종합과학부 준교수인 히구치 나오토의 ‘폭주하는 일본의 극우주의’를 시간 가는줄도 모르고 완독을 했는데요. 평소에 저는 일본 내에서 이슈화되고 있는 역사 수정주의와 지속적인 혐한론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특히 그 연원이라든지 배경을 명확히 알고 싶던 찰나에 우연히 여기 히구치 나오토 선생의 글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책을 다 읽고 갑자기 들었던 생각은 저자가 일본에서 살해 위협을 받고 있지 않을까 그런 걱정이 들었습니다. 최근에 나온 야스다 고이치의 ‘거리로 나온 넷우익’도 그런 취지의 글인데요. 여기에서도 적잖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히구치 나오토 선생은 ‘거리로 나온 넷우익’의 해석과 주장에 비판을 가하고 있기도 한데요. 그것은 뒤이어 소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얼마전에 읽었던 조관자 선생의 ‘탈 전후 일본의 사상과 감성’ 에서 (일본 내부에서) 역사 수정주의란 ‘태평양 전쟁 사관/도쿄 재판 사관’을 부정하는 것이라 밝히고 있는데요. 최근의 일본 내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소위 재특회에 의한 재일 한국인들에 대한 폭력적 혐오 운동은 배외주의와 역사 수정주의가 결합되어 나타난 것이며, 배외주의 운동이 보수주의에서 기인한다기보다는 역사 수정주의의 한 변종이라고 저자는 정의 내리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재특회에 나서고 있는 회원들이 저학력, 저소득 및 하위 계층이 주도하고 있다고 보는 ‘거리로 나온 넷우익’의 야스다 고이치의 주장을 잠정적으로 반박하고 있는데요. 기본적으로 저학력자들이 교육을 통해 진보적인 의식을 갖지 못하고 권위주의적인 태도를 고수하게 된다고 앞서 정의내리고 있지만, 재특회에서 활동하는 대다수의 인원이 저학력 혹은 저소득자들은 아니고 매우 계층의 스펙트럼이 다양한 각계에 속한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유럽에서는 일본의 재특회와 같은 극우주의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고, 특성상 포퓰리즘과 비슷한 경우가 많은데 일본은 자민당 보다 더 오른쪽에 있는 극우가 이념적으로 비타협적인 배외주의와 하등 연관이 부족한 재일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삼고 있어서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더욱이 재특회가 주장하는 재일 한국인들읱 특권은 대표적인 차별제도라 할 수 있는 통명제도와 통계로 나와있는 것처럼 그들 거의가 화이트 컬러 계층이라기 보다는 다수가 직업을 자영업으로 갖고 있고 오히려 재일 중국인들이 훨씬 고학력의 화이트 컬러 계층이라고 자료가 보여주고 있는데요. 식민지 시기를 거쳐 일본에 정착한 조선인들과 그 후손들이 다수인 한국인들이 일본의 패전 전까지만 해도 순혈 일본인들과 달리 이등 국민이었지만 일본 제국 시절에는 같은 국적이었음에도 이제와서 한국인, 조선인으로 분리시켜 특권 운운하는 것은 그 이념적 한계가 명확하다고 봐야 하겠죠.

‘속국 민주주의론’에서 봤던 일본인들이 생각하는 태평양 전쟁과 대동아 공영에 ‘그래도 한때는 일본인과 조선인이 같은 편에 서서 유럽과 미국에 싸우지 않았나요. 그런거면 동료였던 건데’ 라고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저는 적지않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일본에서 얼마나 역사 교육이 제대로 되고 있지 않은지 이 사례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히구치 나오토의 이 책에서도 바로 그러한 관점으로 태평양 전쟁과 2차 대전 종전을 보고 있는 일본인들이 많더군요.

다군다나 이 재특회라는 프레임은 조금만 관련된 지식을 찾아봐도 진위여부를 쉽게 확인할 수 있을텐데 여기에 속한 많은 젊은이들이 그런 것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일본 학계 내에서도 역사 수정주의적 입장을 널리 펴고 있는 서적들이 출간되고 있는 것 같았고, 이른바 ‘자학 사관’이라는 입장에 동조하는 일본인들도 적지 않아 보였습니다. 자민당을 지지하고 있는 일반인들과의 인터뷰가 바로 이러한 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책 서두에 북한 핵문제와 일본 역사문제가 해결된다면 그야말로 동아시아는 평화로울 것이라고 언급되어 있는데요. 재특회에 근간에 배외주의가 겉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결국 본질은 역사 수정주의가 사실을 부정하고 자신들이 오히려 피해자라고 여기게 만드는 그리고 이웃나라인 중국과 한국이 얼마나 자신들을 피곤하게 만드는지 그러면서 동아시아의 불신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어쩌면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일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한국인들이 무조건 이 책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재특회를 비롯한 혐한론과 일본 사회의 외국인 전투적인 배체에 대한 충분한 사례와 증거를 밝히고 있고 그것에 동조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어떻게 다소 심하게 말하면 ‘세뇌’ 되었는지 그 본질을 명확히 알게 해줍니다.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이 책을 봐야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외국인에 대한 테러, 특히 한국인들에 대한 폭력, 외국인 참정권에 대한 말도 안되는 해석과 피해주의 등으로 봤을 때 선진국이라는 일본의 시민 사회의 모습은 전혀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반대로 한국에서 조직적인 움직임과 폭력적인 시위로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에게 집단 린치를 가하는 경우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면에서 이 책은 우리에게 이해하기 힘든 충격을 안겨주면서도 단순히 정치권의 역사 수정주의와 배외주의라는 측면이 아니라 일본의 일반 시민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알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하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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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지정학과 미국의 패권전략
조지 프리드먼 지음, K전략연구소 옮김 / 김앤김북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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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국제정치학에서 다소간 이단아 취급을 받고 있는 국제 정세 분석가이자 예언가로 자주 일컬어지는 조지 프리드먼의 최근 번역 출간된 이 책을 접할 수 있었는데요. 개인적으로 프리드먼의 글은 ‘100년 후’에 이어 두번째입니다. 이 100년 후는 여러 논란을 불러 일으킨 출간물인데요. 이것으로 프리드먼은 국제 정치계의 샤먼이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참고삼아 언급드린다면 경제학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밀턴 프리드먼과 구분해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책의 뒷표지에 실려 있는 소개 문구들과 얼마간의 정보들이 저자인 프리드먼이 한국에 앞으로 10년 이후의 국제 정치학적인 환경 변화에 조언을 하기 위한 것처럼 나와 있지만, 여기에 소개된 글들은 오로지 앞으로 미국의 국제 정치학적인 측면의 분석과 첨언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한 한국이 포함된 내용은 그리 많지는 않아서 이 점을 감안하시면 좋을 것 같군요.

과거 역사에서 미국은 양차 대전을 거치며 고립주의적 입장에서 필요에 따라 개입의 의지를 보여 왔는데요. 프리드먼은 여기에 미국이 직접적인 영향력을 위해 힘을 투사하거나 분쟁에 개입하는 것을 다시 지양하고 과거의 ‘역외 균형 전략’에 의거해 조정과 국가 균형과 같은 간접적인 방법으로 돌아가야 하며 이러한 목적을 위해 미국 대통령은 마땅히 마키아벨리즘을 적극적으로 현실 이론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보고 있는데요. 루즈벨트와 레이건과 같이 술수와 허위를 배제하지 않고 적극적인 수단으로 이용했듯이,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벌인 테러와의 전쟁과 같은 중동에 대한 직접 개입을 간접적으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다만 2001년 9월의 테러 이후 미국의 정치 상황이 완전 돌변하여 개입의 필요성이 있긴 했으나 결과적으로 미흡한 결론에 이르렀다고 그는 판단하고 있는데요. 특히 중동에서 후세인의 이라크를 제거하여 종래의 지역 패권국의 등장을 미연에 방지하는 역외 균형 전략에 반대되는 결과로 이란의 야심을 키우게 되는 원치 않는 반대 결과가 있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미국에게 이스라엘의 존재 이유가 중동의 아랍 국가들의 야심을 조절하기 위한 기존의 해석보다 구 소련과의 냉전시기에 미국의 대소 봉쇄 전략의 일환으로서 그리스와 터키가 매우 중요했는데, 터키에 대한 압력 분산의 의미로서 이스라엘이 긴요했다는 평가와 더불어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관계 개선이 일종의 분수령이 되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꽤 흥미로운 주장이라 저는 몇 번이고 되새겨 보게 되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현재 전세계의 국제 정치학적인 환경과 앞으로 10년간의 전망을 함께 조망하고 있고 설득력이 높은 주장들도 있어서 흥미롭고 다채로운 인상을 받았습니다. 독일이 점차 러시아가 자국에 제공하고 있는 천연가스와 산업에 필요한 막대한 러시아의 부존 자원, 반대로 독일의 기술을 원하는 러시아는 양국 간의 협력과 연대의 이유가 분명히 있다는 측면도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물론 독일과 러시아가 동맹에 준하는 관계로 확대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전망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요. 마찬가지로 동아시아에서 떠오르는 중국과 그 중국을 복잡한 시선으로 보고 있는 일본이 중일간의 협력으로 이어지기는 어려운 것처럼 일견 자명한 부분입니다. 또한 부상하는 중국과 관련해서도 일본을 통해 견제하는 것과 한국, 호주, 싱가포르와 긴밀히 협력하고 특히 한국과 같은 경우는 중국과 일본에게 있어서 비수와 같은 존재라 미국 대통령은 한국을 배려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일종의 전통적인 미국의 역외 균형 전략에 철저히 부합하는 경우라 봐도 무방합니다.

전체적으로 프리드먼의 이러한 주장들은 앞서 헨리 키신저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가 언급했던 ‘미국의 세계 전략’ 에 대한 비슷한 형태의 맞춤 글입니다. 근래에는 종잡을 수 없는 중국에 초점이 맞춰져 이를 미국의 전세계 영향력과 연계해 많은 이론가들이 글을 쓰고 있는데요. 여기에는 중국 보다는 앞으로의 러시아를 비교적 상세히 분석하고 있습니다. 푸틴의 장기집권과 관련된 기사들이 헤드라인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단순한 자원 수출국 경제와 몸에 맞지 않는 비대한 군사력으로 연명하고 있는 오늘날의 러시아가 푸틴이 원하는 바대로 구 소련의 붕괴가 현대사에 있어서는 안될 사건이었다고 언급했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이런 글들을 통해 예측해 볼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프리드먼의 미국이 과거의 균형 전략 대로 적극적인 개입보다는 외교 전술과 국가간의 관계를 조정하여 앞으로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또한 미국의 패권과 영향력이 급격히 축소되지는 않을 것이라 진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이 앞으로 미국과 관련된 정치 외교적인 문제에서 어떻게 분석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우리 같은 일반 독자들이 요긴한 지식을 이 책은 분명 제공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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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 : 권력의 논리
후베르트 자이펠 지음, 김세나 옮김 / 지식갤러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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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공신력과 명성을 떨친 ‘데어 슈피겔’의 전 편집자이자 독일 방송계로 진출해 정치 관련 방송 활동을 하고 있는 후베르트 자이펠은 러시아 푸틴 대통령과 개인적인 관계를 갖고 있는데요. 현직에 있는 정치인의 기록물이 만들어지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여기 독일 기자의 정치인 푸틴에 관한 글이 번역 출간되어 구해 읽게 되었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는 그동안 정치인 푸틴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곤 했습니다. 특히 미국은 언론을 통해 러시아의 현재 정치에 대해 권위주의적이고 비민주주의적이라고 비판을 가하기도 했는데요. 이러한 푸틴의 악마화에 대해 저자인 자이펠은 명백한 반대의 입장이라기 보다는 소모적인 것으로 여기는 듯 했습니다. 러시아 정치 체제 대해 실체적인 분석을 시도하기 보다는 도덕적 우월론에 빠져 가치 판단에만 급급하고 있다는 입장인데요. 사실 미국의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입장은 설사 과거 CIA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적지 않은 여러 민주 정부들을 굴복시키고 독재 권력이나 정당성이 전무한 정치인들을 지원했던 것과는 별개로 자신들이 세계의 모범이 되는 민주주의 국가의 지위에 있다고 보고 있죠. 국제 정치를 배경으로 각국의 이익과 이권을 위해 움직이는 수단들은 도덕적으로 정당성을 매번 획득하는 것이 아님에도 특히 미국은 그동안 푸틴의 러시아에 대해 자신들의 무결점 도덕적 가치관으로 평가 및 판단해 왔습니다. 아마도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 이러한 소모적이고 도움이 안되는 서구의 도덕적 우월 이데올로기를 탈피하고 푸틴이 어떤 정치인이고 어떠한 배경과 목적을 갖고 있는지 살펴보자고 하는 듯 합니다.

과거 보리스 옐친에 의해 정치적으로 발탁된 푸틴은 오랫동안 첩보를 다루는 위치에 있다가 공개된 정치 행위의 일선으로 나서 그동안 러시아 인들에게는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정치인으로 평가받게 되었습니다. 좀 더 이전으로 들어가 살펴본다면, 독일 통일 전후에 미국이 주도하는 나토의 동진은 없을 것이라는 확약을 받고 독일 재통일을 승인하고 소련의 해체가 이어졌는데요. 푸틴은 이 시기의 미국의 확언은 그것이 문서화가 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교훈을 깨닫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러시아는 반대의 입장이 되기도 했는데요. 미국과 합의한대로 규모로만 본다면 당시 배치된 핵무기들의 3위 규모였던 우크라이나에 배치되어 있던 핵무기들을 다시 러시아로 불러들이고 우크라이나를 비핵화로 만들면서 두 강대국이 확약했던 안보 보장이 한낱 유명무실해진 것처럼 여기서 그려지는 푸틴은 실로 완벽한 현실주의자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올리가르히를 제거하고 조지아와 우크라이나에 개입, 시리아 문제와 관련하여 미국과 선을 달리하는 것을 보면 푸틴 역시 조지 W. 부시와 다를바가 없었습니다. 이 두 명의 거물 정치인이 서로 몇십차례 만나며 적지 않은 관계를 쌓은 것은 아마 이러한 유사성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 자이펠의 이 독특한 글은 푸틴은 둘러싼 생생한 러시아 정치에 대한 이해와 서구가 푸틴의 러시아에 대해 갖는 정치적 배경과 연원에 대해서도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서술되는 관점들은 딱히 치우치지 않아 정치적 사건에 대해 객관적인 접근을 도와줍니다. 각종 굵직한 사건들은 따로 위키 백과 등으로 검색을 해봤는데요. 그동안 단순히 지정학적이거나 표면적인 러시아 정치를 접해왔다면 그런 측면에서도 꽤 이 책은 도움이 될만하다고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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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배반
쥘리앙 방다 지음, 노서경 옮김 / 이제이북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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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파리에서 처음 출간된 쥘리앙 방다의 이 책은 그 시기를 지나 오랫동안 여러 시간을 거쳐 반향을 일으켰는데요. 당시 유럽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불온한 기운, 즉 파시즘과 그것에 동조했던 수많은 지식인들과 앞서 1898년의 프랑스에서의 드레퓌스 사건과 같이 명백하게 맨 얼굴을 드러냈던 프랑스 지식계의 패거리 행태를 보면서 일찍이 14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로 꽃피웠던 진정한 인문주의와 그러한 근원적 지식인의 토대에 반하는 지식인 무리들에 대한 아주 냉엄한 비판이 방다의 이 글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프랑스에서만 139만명이나 희생되었던 1차 대전의 참혹한 실상과 그 이후의 또 다른 대전에서 보여졌던 선명한 인간 스스로의 악의 측면과 독일 뿐만 아니라 당시 유럽의 상당수가 그러한 폭력에 스스럼없이 동조했던 역사적 현장에 제일 먼저 앞장섰던 지식인들에 대해 처음으로 느꼈던 좌절이 1946년 판 서문에 깊게 남아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인간 자유의 기본 입장에 반하는 지식인들과 그것을 경멸해 마지않는 무리들에 대한 비판을 역사와 종교적 교리, 식민주의 등으로 부분 대 개념 해석으로 방다 자신의 고유한 해석이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특유의 직설적이고 무차별적인 문장은 진정성이 깊게 느껴지는데요. 스스로를 지식인이라고 자임하는 자들은 그렇지 않은 수많은 대다수를 위해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아주 교과서적인 입장을 열거하고 비교 분석과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정치 정념에 스스로 동조하여 대중이 이에 스스로 편입되게 하기 위함이나, 형이상학적인 가치에 대한 아주 노골적인 경멸, 정의로운 자들과 정의롭지 못한 자들을 가려내기 위해 힘써야 함에도 그렇지 못한 것, 민족 정념이 야심에 따라 얼마든지 폭력적, 배타적이 될 수 있음에도 그것을 경고하지 않는 것, 특수한 것을 숭배하고 보편적인 것을 경멸하는 것, 악이 정치에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도 악은 언제나 악인 것인데 그것에 대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 것, 지식인이라면 마땅히 부조리에 격렬히 저항해야 하는 것, 개인주의와 개인적 견해를 집단주의를 옹호함으로써 터부시하고, 공리주의에 대한 비판적 입장인 개인주의를 침해하는 것에 대한 경고를 하지 않는 것 등에 대한 사례를 일일이 방다 자신이 알고 있는 역사적 내지는 철학적 의견 등을 대입해 단순히 논거와 주장으로 끝나지 않고 그의 묵직한 진정성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약간의 논외이지만 방다가 인문주의적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은 인간의 악의 측면이 개선될 수 있다고 믿고 그것에 반대하는 일반 지식인들에 대해 날선 비판을 가한 부분입니다. 즉, 지식인이라면 인간의 선한 측면을 옹호하고 발전시켜 그것을 거부하고 경멸하는 자들에게 마땅히 격렬하고 사력을 다해 비판을 가해야하지만 니체나 베르그송과 등과 같이 인간의 이성에 대한 측면의 불신을 주의로 삼은 철학자들과 다른 학문적 연구자들이 마찬가지로 보편적 도덕에 대한 불신이 저 역시도 이해하기는 힘들었습니다.

다만, 방다가 여기서 주장하는 것을 다소 단순화 시켜서 말씀드린다면, 인간과 사회의 기본적 개념을 경멸하는 태도와 그러한 주의화에 대한 저항이 아무래도 지식인들이 가져야하는 책무임은 아주 당연하지만, 전세계가 고도로 민주주의화의 길과 자본주의 시장체제로 나날이 확장되고 있는 환경에서 개인의 이기주의적 측면의 현실과 그러한 현실주의가 그 기본 임무를 어렵게 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지식인들의 명예와 출세에 관한 부분이 바로 이러한 측면이겠죠. 물론 방다의 주장은 매우 당연한 것으로 앞서 제가 해석한 현실주의에 면죄부를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러한 부분이 이상주의적 가치관이라고 해석되어 폄하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개인적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지식인들이 속해 있는 사회의 범주에서도 최종적으로 정치의 범위에 속속 항복을 하고 편입되는 지식인들의 현상을 오늘날에도 많은 만큼 최소한 이것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하지 않고 최소한 인간의 기본적 토대인 이성, 도덕, 자유, 평화 등을 보존하기 위한 대책과 연구가 절박하게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방다 역시 이러한 현실주의에 대한 고민을 풀어놓기도 했는데요. 어쩌면 이기적 현실에 편입되지 않고 격렬히 저항하는 지식인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역으로 좀더 건강한 사회를 위한 필수불가결한 일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약간의 사족입니다만, 개인적으로 학부 시절이었던 지난 90년대 말에 어느 헌책방에서 이 책의 오래된 구판을 발견했습니다. 당시에 집어든 그 책의 몇 장을 넘겨보고선 고리타분한 도덕 논쟁과 비슷한 글로 보여 금새 바닥에 놓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돌아서 만나 읽게 되었던 이 책은 제 머릿속에 제법 오래 기억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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