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행동의 논리 : 공공재와 집단이론 한국문화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707
멘슈어 올슨 지음, 최광.이성규 옮김 / 한국문화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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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98년 심장질환으로 작고한 멘슈어 올슨 교수의 이 ‘집단행동의 논리’라는 글은 사회과학 전반, 특히 경제학, 정치학, 역사학 등의 연구를 하고 있는 학자들로부터 빈번하게 인용이 되었는데요. 공공재와 집단이론이라는 부제와 함께 당시 꽤 신선한 이론이었던 ‘집합재’와 그와 관련된 창조적 해석으로 찬탄을 받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오늘날 ‘특수이익 집단’과 기득권자들에 관한 일종의 이론적 해답을 찾고자 이 책을 손에 들었습니다.

범위를 한정지어 ‘인간의 이기심’과 관련하여 개인들은 각각 이기적으로 사익을 추구하는 것이 오래전부터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다만, 개개인의 이러한 사익추구를 위한 행동 때문에 마찬가지로 집단도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고 하는 약간의 묵시적인 가정에 근거하는 한, 널리 퍼져있는 견해는 정당성을 잃게 된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는데요. 즉, 달리 말하면 사익 추구를 전제하는 개개인들이 모여 이룬 각 집단들이 마찬가지로 단순히 이익추구화의 목적으로만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이익이나 집단이익에 따라 행동할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을 전제로 소규모 집단과 나아가서는 대규모 집단의 각기 다른 여러 특성들을 많은 이론과 근거를 통해 확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논리는 어쩌면 귀스타브 르 봉의 ‘군중심리’에서 크게 대표적으로 주장하는 개인이 합리적일지라도 이런 개인들이 모인 군중은 그렇지 않다는 논의는 비슷하게 연계되어 해석되는 부분이겠죠. 물론 양자의 표면상의 연계 유사성만을 놓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올슨 교수가 지적하는 집합재는 일종의 개인 이익과 공동 이익 및 혜택이 융합된 것으로 생각되는데요. 사익화의 개인들이 모인 이러한 집단에서의 개인은 다른 사람들이 집합재 공급에 드는 모든 비용을 지불해 주기를 바라며, 대체로 자신들은 비용의 일부를 부담하거나 전혀 부담하지 않더라도 집합재가 제공되는 혜택만 받으려고 한다는 일종의 ‘무임승차론’에 대해서도 밝히고 있습니다. 이 무임승차는 이 책이 출간되고 나서 집합재와 더불어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요. 많은 학자들로부터 이 ‘무임승차’와 관련된 용어 자체와 해석 등이 인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집단 안에는 소수가 다수를 착취하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하며, 정치적 담합과 같은 정치행위도 보여지는데, 정치적 담합은 특히 경제학에서 말하는 기업의 과점 추구 욕구와 그 궤를 같이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집단의 규모로 구분되는 소규모 집단과 대규모 집단은 양적으로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다르며, 대규모 집단의 존재는 소규모 집단의 존재를 설명하는 데 사용되는 요소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올슨 교수는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뒤이어 노동 조합과 같은 대규모 집단과 관련된 부분은 미국의 노동 조합을 예를 들어 논리를 뒷받침하고 있는데요. 노동 조합의 소속된 노동자들이 궁극적으로는 ‘고용의 통제’를 목표로 두고 있고, 이러한 과정이 ‘고통의 통제’라고 부르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더군요. 그러니까 노동 조합의 대의적인 측면의 주장이 본질적이라기 보다는 이익의 통제라는 측면에서 ‘고용의 통제’를 효과적으로 발현시키기 위한 목적도 분명 있다고 밝히는 것이겠죠. 그리고 본질적으로 비대한 권력을 갖고 있는 특수 이익 집단과 기득권층에 관련해서는 다수결 원리에 기초를 둔 민주정치에서 정치적 힘이 유산계급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이 왜 자연스러우며 필연적일까라는 질문과 함께 산업적인 측면에서 과점적 규모의 형태와 그러한 산업 집단에 힘이 쏠려 있어 어쩌면 의사협회와 같은 소수의 전문가 집단에게 그러한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타당한 해석일 것입니다. 이는 과거 부패 혐의로 물러났던 탁신 친나왓 전 태국 총리 사태 때 태국의 의사와 변호사 등의 기득권들이 농촌의 농부와 저소득층에게 투표권을 제한하라는 주장을 한 사례와 유사합니다.

끝으로 최종적인 논의의 확장이었던 압력 단체와 관련된 다원주의적 이론의 뒷받침과 해석이 다소 이들에게 면죄부를 주었으며, 오늘날 미국의 로비 단체에 의한 금권 정치는 다수의 공동 이익을 해치는 결과로 귀결되었고, 궁극적으로는 민주 정치의 의도하지 않은 훼손이라 판단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로비 단체를 뒤에 업은 정치가들의 정치적 담합이 경제학에서 말하는 과점의 효과와 다름없다는 올슨 교수의 해석은 정치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익 추구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대의적인 측면에서의 민주주의적인 여러 가치의 함양과 주장은 말 그대로 겉으로 드러난 것이고 사회를 이루는 개개인의 사익 추구의 측면을 고려해 봤을때, 정부가 자경 기능에 국한되지 말고 법과 제도를 명확하게 세워 이러한 사익 추구를 적절하게 규제해야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어차피 애덤스와 같은 부류의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그 한계가 드러났고 무턱대고 정부의 역할을 줄여나가자고 하거나 시장에게 맡기자는 주장은 가려 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올슨 교수가 국가는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강력한 원천이 많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존재라고 언급한 것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매우 명료하고 군더더기 없는 저자의 주장들과 깔끔한 번역은 또한 적지 않은 즐거움을 주는데요. 역자가 소개한대로 올슨 교수의 이 책은 20세기 통틀어 매우 중요한 저작이라고 느껴졌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조만간 한번 더 정독을 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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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과 집단기억 RICH 트랜스내셔널 인문학총서 11
아키코 다케나카 지음, 박찬승 엮음, 한양대학교 비교역사문화연구소 기획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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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가 기획하고 한양대 사회학과 박찬승 교수가 한국을 비롯한 미국, 일본, 중국 등 2차대전의 공통된 주제로 당시 시대 상황을 겪고 또 후세대에 되물림이 되었던 소위 ‘집단기억’에 관한 아주 의미있는 글들로 엮은 이 책을 우연히 접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세계 1,2차 양차대전에 관한 전쟁사론에 대해 관심이 있어 몇몇 관련 책들을 구해 읽어보기도 했는데요. 다만 이 책은 전쟁을 겪은 세대와 그 이후의 사회에서 그 기억들이 어떻게 ‘집단기억’의 형태로 남게 되는지에 대해 독자들에게 폭넓은 이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집단기억’이란 한 집단이 상징적 기호와 행위를 통해 가지는 특수한 기억이라 정의하고 있는데요.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의 측면이 아니라 2차대전 당시 전쟁을 통해 적지 않은 처참한 기억을 체험한 민족과 국가들사이에는 그 소속에의 특수한 기억들이 공통된 현상으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세대를 초월해 이러한 기억이 학습되고 때론 구전되어 당시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이후의 후세대들도 그러한 전쟁의 기억을 자연스럽게 얻게됩니다. 다행히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 독자들은 우리 나라 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미국, 독일, 영국 등의 그 밀도의 차이는 있지만 각각의 ‘집단기억’이 어떤 형태인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는데요. 저는 특히 일본의 2차대전에 대한 집단기억에 관한 미국 켄터키대학교 역사학부 아키코 다케나카 교수의 글이 눈에 띄었습니다. 현재의 일본 내의 역사수정의 움직임과 관련된 해석을 담은 이 다케나카 교수의 글은 그가 일본 내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면 글로 나오기 어렵지 않았을까 추측이 들었는데요. 일본인들이 보기에는 절로 긍정하기 힘들거라고 여겨지고, 이러한 배경에는 아마도 제대로 된 역사 교육을 하지 않는 일본의 역사 교육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오늘날 일본의 역사 수정주의적 문제는 여러가지 상황이 혼합된 부조리한 결과라고 생각하는데요. 서구 제국주의에 맞서 일본을 중심으로 대동아공영권이 구축되어 대항했고, 거기에 참여했던 많은 민족들이 일본인들과 비슷한 입장이었다고 자위적으로 해석하고, 이에 진주만 습격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당위적으로 받아들이며, 도쿄 대공습과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이르는 일본 민간인들의 대량 희생들로 피해자 인식을 각인시켜, 난징대학살과 위안부 문제 등을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죠. 종전 이후에 미소간의 이념 대립이 점차 노골화 되면서 일본 자체가 전략적으로 중요해짐에 따라 당시 미국 정부와 군부에서 주축국이었던 일본의 죄과의 범위를 수정하고, 급격하게 일본을 보통국가화로 진행한 것도 이러한 왜곡주의적 현상에 원치않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2015년 아베의 종전 담화는 이 모든것을 담고 있습니다. 원래는 무라야마 및 고노 담화를 무력화 시켜 자신이 그토록 강조하던 ‘자학사관’을 극복하려고 했는데, 당시 워싱턴의 압력이 무시못할 수준이라 아베는 대상과 행태를 모호하게 갖고 가면서 피해를 입힌 행위와 사과에 대해서도 아주 적당하게 대처해 대내외적으로 비난을 받은 바 있습니다. 다케나카 교수는 이런 측면의 역사수정의적 입장이 피해자적 역사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일본 헌법 9조의 존재는 그들의 과거 침략의 그림자를 묵인하고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며 이를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가해자의 입장에서 피해자로 가치 전도시키고 이를 기존의 선명한 역사를 ‘자학사관’으로 규정해 도합 2천만이 희생된 태평양 전쟁과 대동아 공영의 피의 결과를 완벽하게 부정하는 것입니다.

독일의 메르켈 총리는 이스라엘 총리가 보는 앞에서 홀로코스트에 대한 독일의 책임을 최소화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거부한다는 내용의 연설을 했습니다. 여기에 글로 인용된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 사학과 피터 프리체 교수는 독일인들의 전후 체제와 나치가 자행한 유대인들에 대한 인종말살의 증거들로 유대인에 대한 박해와 살해같은 혼란스러운 기억을 관리하려는 바로 그 노력을 통해 그러한 관리가 궁극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고 언급하고 있는데요. 이 독일인들의 사례는 과거 인간의 역사들중에 생생하게 남아 그것을 부정하고 외면하는 것이 얼마나 인간의 이성으로써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 나타나고 있습니다.

비슷한 사례가 될지는 르겠지만 미국 내에서 점차 희미해지는 태평양 전쟁에 대한 글을 쓴 플로리다 주립대학교 역사학부 부교수인 커트 피엘러는 태평양 전쟁 시기 캘리포니아 주 등에서 미국 시민권과 영주권을 갖고 있는 일본인들을 간첩행위 문제 등으로 강제 수용소에 대량 수용한 역사를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보고 있는데요. 물론 이런 이유 때문에 미국 내에서 태평양 전쟁에 대한 기억이 노르망디를 비롯한 유럽 전선의 참전 보다 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의 일본과의 동맹 관계 때문에 가급적 간소하고 조용히 보내고자 하는 이유가 있을 겁니다. 미국인들조차도 위법한 일본인들의 강제 수용과 관련해 솔직한 평가를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당시 일본인들에 대한 인종 차별과 관련해서도 대체로 숨김없이 역사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있는데요. 중국이 장제쓰 국민당 시절의 항일 투쟁을 무위로 만드는 것이나 구 소련 시절의 수많은 민간인 희생들을 당면한 어쩔 수 없는 결과로 치부하고 오로지 정권의 합리화에 이용하는 것은 역사 문제에 이념과 정치가 결부되면 그것이 또 집단기억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겠죠.

일독을 하고 나서 드는 생각은 많은 분들께서 이 책의 제2장의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적 입장에 대한 배경과 그 이해를 다룬 글을 접해보셨으면 한다는 점입니다. 이 글과 관련해서 작년에 국내에 출간된 시라이 사토시의 ‘영속패전론’도 꽤 훌륭한 글이지만 아키코 다케나카 교수의 이 글도 같이 중요한 글이라 여겨집니다. 역사를 제대로 인식하지도 않으면서 앞으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에 같이 공동 대처하자고 뻔뻔하게 또한 한국은 너무 중국에 경사되어 있다고 자기들 입으로 거리낌없이 말하는 다수의 일본 지식인들을 보면 제 짧은 머리로 이 일본인들의 정신세계를 이해하기란 문득 어려운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우리를 비롯한 참혹한 2차대전을 겪은 몇개의 민족과 국가들의 각기 다른 기억의 입장과 해석은 달리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군요. 각각 상이한 종전의 기억이 정치 논리화 되고 이념화 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씁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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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아 2018-04-02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조된 기억으로 집단적으로 반복 학습하는 일본, 네, 저도 꼭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글 진심으로 감사히 읽고 갑니다~

베터라이프 2018-04-02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리아님/ 제가 짧게 요약해 많이 빼먹은 내용들보다 더 유익한 부분이 많았습니다. 오늘날 전방위적인 일본의 역사 수정주의는 실로 심각한 상황 같습니다. 하여튼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4의 혁명 - 우리는 누구를 위한 국가에 살고 있는가
존 미클스웨이트 외 지음, 이진원 옮김 / 21세기북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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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블룸버그’의 존 미클스웨이트와 ‘이코노미스트’의 에이드리언 울드리지가 함께 공저로 지난 2014년에 출간된 ‘The Fourth Revolution’ 을 2015년 국내에 번역 출간한 것인데요. 국역의 제목이 원래 제목과는 다를 줄 알았는데, 출판사 측에서 따로 수정을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가 이런 의구심을 갖은 데에는 본문의 내용과는 달리 제목에서 약간의 괴리감을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런 혁명류나 새로운 사조를 뜻하는 제목의 책들은 주장하는 바가 거의 짜맞춘 듯 비슷한 부분이 제법 많기에 저도 선뜻 이 책을 붙잡기가 망설여졌었는데요. 다행히 예상과는 달리 꽤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았습니다.

우선 서두에 토마스 홉스와 존 스튜어트 밀, 베아트리스 웹과 밀턴 프리드먼이 언급되어 나오는데요. 이들의 사상을 간추려봤을 때, 개인의 자유, 야경 국가론, 소극적 정부에 관한 내용이 주된 논의로 나오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자료들로 하여금 더 의미 확장이 될 줄 알았으나, 이것과는 달리 이 두 저자의 주장이 다소 장황한 면이 분명 있습니다. 글 전체를 이끌어가는 논점은 왠만하면 일관되고 흐트럼 없는 것이 유리한 것인데요. 뒤이어 싱가포르와 인도, 중국의 사례에서 밝히고 있는 것들은 다소 권위주의적 정부의 주도권하에 이루어진 제도와 정책들 위주입니다. 더욱이 스웨덴과 덴마크 사례를 또 언급하면서 이들의 모델이 싱가포르 모델보다 완벽하지 않다고 단정짓는 언급에 저는 더 난해해졌습니다. 이렇게 일관된 것은 정부가 이익들간의 조정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점과 리콴유의 입을 빌어, “인간은 안타깝게도 본질적으로 사악하며, 이런 사악함은 통제되어야 한다”고 꼬집어 인용한 것은 더욱더 저의 이런 의심을 부추겼는데요. 결론만 놓고 말씀드린다면 이 두 저자는 일종의 효율적인 정부와 복지 차원에서 낭비되지 않고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형태의 주장을 가다듬고 있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오늘날의 민주주의가 이들의 말대로 끊임없이 상쇄되어 변질된 형태로 진화한 것이라면 그것의 주된 원인은 엘리트주의적 정치의 엄연한 실패와 제도상의 선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기득권층의 존재 때문일겁니다. 전자는 2008년 소위 폐쇄된 정보 독점을 누린 경제 엘리트들이 저지른 세계금융위기로 나타났고, 후자는 현재 미국에서 소득 상위 1% 를 이루는 계층중 절반이 전문의들로 밝혀졌다고 소개하는 부분에서 사회 기득권의 배타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민주주의가 세습된 계급 형태로 정체되어 그것이 나날이 견고화 되고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인간의 이익추구화가 노골적으로 변질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봐야겠습니다. 제러미 벤담이 다수의 행복을 통해 사회 이익의 확대로 소수의 차별받는 구성원들 없이 사회의 전반적인 선순환적인 사이클을 기대했던 것이라면 사회학의 원칙은 토크빌이 앞서 주장한 대로 개인의 이기심을 적절히 견제하는 것이겠죠.

그리고 국가의 복지 모델에 대한 북유럽 사례를 들면서 그래도 싱가포르 모델이 효율적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그러한 국가 모델이 과연 현실적으로 부합될 수 있는 것인지는 좀 더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가까운 미국은 복지 지출과 관련해 OECD 평균 통계와 비교해봐도 아주 미흡하고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위 ‘복지여왕’과 같은 사례보다는 제도의 외곽에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는 알려지지 않은 소외된 사례가 훨씬 더 많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또한 미국은 그동안 인종주의적 편견과 재생산으로 ‘흑인들이 직업적 책임감이 결여되어 있고, 게으르고, 무책임하다는’논리로 복지 예산을 이것과 비슷하게 싸잡아 비난해왔습니다. ‘리콴유는 공짜 보편적 복지를 혐오한다’는 주장 만으로는 그동안 복지관련 비용이 아주 과대하고 낭비되어 왔다는 측면의 해석은 되지 못합니다.

앞으로 견고한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정부들의 최우선 과제는 복지 지출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와 혐오가 아니라 얼마만큼 효율적으로 조세 정의를 확립하고 곳곳에 도사리고 았는 관료들의 부패 문제와 낭비되는 예산을 적절히 포착하여 돈이 새는 구멍을 막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의 세계 경제가 다소 위축되어 있다고 하나 차이나 머니를 비롯한 중국의 폭발적 경제 성장 붐으로 2009년부터 지금까지 큰 문제로 여겨질 만한 것은 없었다고 봐야겠죠. 포퓰리즘과 같이 제가 엘리트 정치를 배격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이제는 많은 부분에서 수정과 재설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정부의 효율적 관리나 개인과 경제적 주체들의 이익과 자유 보장을 위해 정부의 그것을 재편하자는 이런 논의는 꼭 ‘혁명’이라 불릴만큼 전세계 많은 사람들의 삶에 동일하게 적용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끝으로 이 두 저자가 경제적 그리고 다소 안일한 외형적 규모로 중국과 인도의 사례를 끄집어 안에 도사리고 있는 ‘비민주적 권위주의’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에 저는 동의하기 어려웠습니다. 인도가 현재에 민주주의 국가로 알려지고 있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보면 그 실체가 어떠한지는 아주 자명한 것이죠. 그래서 단순히 이런 ‘상명하복’의 체제적 권위주의의 겉보기 만으로 평가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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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 4대 마약을 끊어라
유종일.권태호 지음 / 페이퍼로드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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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출신의 경제학자로서는 그 이력이 대단한 KDI 국제정책대학원 유종일 교수와 한겨레 신문 논설위원인 권태호 기자의 일종의 주제별 대담집을 묶어 출간한 ‘한국 경제 4대 마약을 끊어라’ 를 접했습니다. 현재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는 김상조 원장과 더불어 유종일 교수도 한국 사회에서 경제 민주화와 소득 재분배 원칙의 소신을 밝히고 있는 몇 안되는 경제학자 인데요. 경제학은 그 태생적 위치로 인해 이 분야의 연구를 하고 있는 많은 학자들이 자유 방임주의를 성경의 유일신 사상과 비슷하게 동일시 되고 있는데요. 자유 방임의 역사가 19세기와 밀접하다고 하더라도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과 그 역할에 대해 의심을 보이는 학자들이 또 많지 않은 것도 사실이죠. 특히 정부와 경제 주체 간에 어떤 역할 관계가 있어야 되는지에 대한 논쟁은 오늘날 끊임없이 대체로 소모적인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우리 나라는 사회적인 면에서 꼭 재벌이 아니더라도 기업 친화적인 행태를 보인 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삼성 공화국이라는 말이 괜히 생겨난게 아니죠.

여기의 유종일 교수는 얼마전 출판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 ‘MB의 비용’의 공동 저자이기도 합니다. 일전에 출간한 책의 주제도 그렇고 요즘 세간에 널리 회자되고 있는 그 분의 구치소 수감과 맞물려 이 즈음에 뭔가 의미가 되는 글을 쓰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단순히 MB의 구속과 그의 의심되는 과거 여러 위법한 상황에 대한 결과는 일단 지켜보더라도 이 사건 자체가 한국 사회에 꽤 의미있는 과정임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권태호 기자와 유종일 교수가 지난 이명박 정부부터 박근혜 전 대통령 임기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는 여러 사회 경제적 주제들을 갖고 제법 평이하고 이해하기 쉬운 대담집이 결과물로 나왔더군요. 저와 같은 일반인이 이러한 여러 주제들의 논점들을 읽고 받아들이는데 수월한 글로 쓰고 싶었다는 취지의 문장이 있었습니다. 제 개인적인 느낌은 이 두 분이 바로 옆에서 흥미로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을 몰래 엿듣는 기분이 들 정도였습니다.

짧게나마 몇가지 요약을 해본다면,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 시기의 정부는 너무나 일관된 화법으로 정부와 외교 및 경제에 관련된 거짓말을 해왔고, 이명박 전 대통령의 이권을 위한 전방위적 행동, 박근혜 전 대통령의 요상한 측근의 부적절한 국정 개입은 결과적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산을 정리하는 데 일조 했다고 보고 있는데요. 이러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산인 교조 자본주의 즉, 정부가 경제에 관여해 지도, 조정, 통제하는 것으로 그러한 한국 전체의 전방위적인 과정을 통해 성장 우선과 과도한 경쟁이 내면화 되었는데 그것이 오늘날까지 우리 사회를 대표적으로 정의하는 모습이 되었습니다. 또한 이명박, 박근혜 양 대통령의 과거 청산이라고 볼 수 있는 이른바 ‘적폐 청산’은 고위 공직자라도 위법을 저지른 행위에 대해 엄벌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을 강력히 보여주는 의미가 있다고 평가하고 있는데요. 이것은 일찍이 미국과 유럽이 거짓말을 일삼는 정치가들과 부패한 경제인들에 대한 엄벌적 처벌로 보여줬는데요. 법에 의한 지배를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우리 나라가 이제서야 마땅히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유 교수도 여권이 정치 논리에 뜸들이지 말고 해야 될 건 확실히 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요. 국민이 여태 요구하고 지지했던 데로 나아가면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 경제에는 유종호 교수가 설명하는 4가지 마약이 있는데, 투자 만능주의와 수출 우선주의, 단기 성과주의, 그리고 선택과 집중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해당하는 각 주제 대해서는 상세한 설명과 자료를 더해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저는 이 취지에는 심히 동감하지만, 경제 발전 단계에서 어쩔 수 없이 가치 함몰된 측면이 있으므로 이제라도 문재인 정부에서 특히 시민의 삶을 매몰시키는 소득 불균형 문제와 비정규직 문제, 건강한 자본주의와는 다소 맞지 않는 왜곡된 부동산 성장주의 등과 같은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한 각 주체들간의 경제 활동에 대한 형평성을 보장하고 정당한 세금 부여와 소득 불균형 문제를 바로잡아 시민들이 자신의 삶을 잘 영유할 수 있는 기본적인 기반을 정부가 제공한다면 지금 가장 심각한 문제인 저출산 문제 등과 같은 시급한 선결 과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여기서도 유 교수가 언급한 바 있지만 한국의 오늘날 저출산 문제는 다른 어떤 문제들보다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신생아 출산, 1.06 명 정도로 추산되는 자료를 여기서 봤는데요. 이대로 이어지는 추세라면 한 4~50년 뒤에는 국가 기반 자체의 존립이 위태로워지지 않을까 추측해봅니다. 사실 현재 우리 경제와 규모로 봤을 때 아직 사회 기반 제도가 미흡하고 전반적인 우리 시민의 삶의 문제를 개인적 문제로 치부하는 경향이 너무나 커 이런 것들을 점차 제도적으로 개선시켜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이런 글들이 좀 더 확대된 논의의 형태로 많이 출간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기대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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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민주주의 - 정치인.관료들은 왜 사익만 추구하는가?
이몬 버틀러 지음, 이성규.김행범 옮김 / 북코리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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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영국의 권위 있는 정책 싱크탱크로 알려진 ‘애덤 스미스 연구소’의 소장으로 일하고 있는 이몬 버틀러의 이 책 ‘나쁜 민주주의’를 접했는데요. 2012년 영국에서 출간된 원제 ‘public choice a primer’를 번역 출간한 것인데요. 이러한 한국어 제목이 배치된 것은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다 읽고 나서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정치인 관료들은 왜 사익만 추구하는가?’ 라는 부제도 조금 자극적으로 느껴지는데요. 이 책의 주된 내용은 민주주의 체제의 정치 개념을 경제학으로 해석하여 제도하의 발생되는 문제점과 행위자들간의 논리에 관한 아주 기본적인 분석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기대와는 달리 흥미로운 부분도 제법 있었습니다.

공공선택학은 정치와 정부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탐구하기 위하여 경제학의 방법과 수단들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정의 내리고 있는데요. 특히 이러한 관점에서 사익이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그러한 동기의 이행을 (자유로운) 시장제도에서 찾고 있는데 공공선택학에서 분석하여 우리의 민주주의 정치를 판단하는 느낌은 사익과 이익추구는 각각의 행위자들에게 아주 명백하게 보여지고 있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과 각 제도내의 행위자들의 ‘소위 정치적 결정들이 비용과 편익들간의 선택’이며 좀더 나아가 이러한 과정들의 정치적 행동이 크게 보면 이익이 오고가는 부분으로 결론 내리고 있습니다.

즉, 여기서 말하는 다분한 이익 거래로 볼 수 있는 투표 거래인 로그롤링과 소수의 강력한 이익집단이 출현하여 정치 행위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로비 제도와 그것에 적극적으로 편입해 정치적 행위를 양산하고 있는 의원 및 입법부의 모습이ㅕ 정치 이상적인 측면에서 다수의 이익을 위해 정치적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보다는 정치인들에게도 사익은 분명 존재한다고 규정짓고 그러한 일상적인 면을 부정하기보다는 인정하고 따라서 이렇게 정착된 시스템 전체를 면밀히 분석하고 좀 더 개선시키려고 하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여기서 논의되는 정부의 역할과 입법 사법, 행정 간의 관계 문제, 관료제에서 관리들이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는 경향의 측면에서 개인이 서로간의 이익을 교환하는 것이 합리적인 상황인가에 대한 의문 등이 나오는데 엄밀히 따지면 그에 대한 적절한 해답은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이런 면은 이 책의 한계라고 볼 수 있겠군요.

1960년대 이후부터 유럽과 미국에서 ‘공공선택학’의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어 왔습니다. 자본주의하의 경제학이 날로 발전되면서 정치학 전반의 이러한 경제 수단의 분석은 제법 효과가 있었는데요. 민주주의 제도와 시스템의 설정은 유럽과 미국의 것을 따르고 있어서 저자의 글에서 보여지는 평가가 우리에게는 조금 맞지 않을 수는 있겠습니다. 다만 의사와 변호사 등의 소수 엘리트 층의 이익단체 등이 사회 전반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것과 이러한 소수 집단의 영향력이 시민 일반의 이익에 부합되기 어렵다는 측면의 평가는 이해할 만합니다. 한가지 이 책에서 보이는 한가지 불확실한 점은 시민 일반의 이익을 소수의 편파적인 이익 단체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정부가 개입하게 되는 것인데 이것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보이지는 않습니다. 개인의 사익 추구가 사회에 긍정적인 부분이라고 저자가 받아들인다면 기본적인 인식에서 시장에서 뿐만 아니라 제도하의 정치적 문제를 두고 벌이는 행위자들의 이익 갈등에 정부의 개입이 마냥 마땅하다고 여기지는 않겠죠.

하지만 공공선택학에서의 제도와 정치속의 개념들의 설명이 아주 명료하고 정치인들이 사익을 추구한다고 명확히 규정한다는 점, 투표로 선출된 정치인들이 대의적인 정의를 위해 일하는 것보다는 자신이 속한 정당이나 단체의 권력과 이익을 보편적으로 추구하기 위해 행동한다는 평가 등은 실로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치 이상적인 이해는 거의 배제되어 있다는 것이 오늘날 우리 민주주의 제도의 명암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고 시민들이 정치를 균형있게 받아들이게 하는 수단을 제공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마지막 부분이 이 책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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