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전쟁과 평화 - 핵무장국가 북한과 세계의 선택
이삼성 지음 / 한길사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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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림대학교 정치행정학과 교수이자 국내의 국제정치학자로 명성을 얻고 있는 이삼성 교수의 최근 출간된 ‘한반도 전쟁의 평화’를 약 5일에 걸쳐 읽었는데요. 개인적으로 이삼성 선생의 글을 접했던 것은 당대에서 출간한 ‘미래의 역사에서 미국은 희망인가’ 와 지금은 절판된 한길사판 ‘세계와 미국’ 정도 입니다. 앞의 ‘미래의 역사에서~’ 의 출간물은 당대총서 시리즈로 조희연, 김동춘, 도진순 등 당시에 주목받던 학자들의 연구물로 나름 유명했는데요. 저도 그때 약간의 시류에 편승에 관련된 여러 책을 구입해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세계와 미국’ 역시 꽤 좋은 평가를 받았던 이 교수의 글로서, 읽기를 한번으로 끝내서 지금에는 잘 기억이 희미합니다만 대체로 저자의 입장이 ‘용미주의와 이념에 상관없는 미국에 대한 객관주의적 시각을 피력’했던 것으로 생각납니다. 사실 지금도 우리 정치권과 정치인들이 이 ‘용미’가 잘 되지 않아서 문제인데요. 이 분단의 시기라는 것이 이렇게 국가간의 외교와 국제정치에서도 객관적인 태도가 불허되는 상황을 만들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이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 는 여러모로 의미가 되는 글이 되었는데요.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서 매우 우리의 현실과 상황에 대한 면밀하고 객관적인 분석을 통해 독자들에게 작금의 모습의 이해를 도와주고 우리가 그것을 평가할 수 있게 아주 적절한 시기에 나온것을 먼저 뽑아 보고요. 이 주석과 출처를 포함한 900페이지가 넘는 상당한 분량의 이 선생의 글은 정말 많은 자료와 저작들, 또 곱씹고 복습해 볼 수 있는 여러 사건들과 이론들을 아주 잘 버무려서 우리의 시각에 간혹 덧칠해져 있는 것들을 제하고 객관적으로 현실을 볼 수 있는 큰 도움을 제공하고 있다고 감히 언급하고 싶습니다. 아마 평생의 시간을 들여 관련 연구를 끊임없이 해 온 저자의 노력과 열정이 이러한 결과물을 내놓았다고 여겨지는데요. 여러모로 의미있는 출간물이 되지 않았나 저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여겨집니다.

전체적인 이 책의 내용은 재래식 전쟁의 종말이라고 볼 수 있는 핵무기 개발 역사와 냉전, 여러 국가들의 핵개발 역사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미국이 몇몇 국가들을 상대로 선제 핵공격의 독트린을 강조한 것은 다른 핵보유 국가들보다 핵무기 우위서고, 그것을 국제 정치 상황에서 유리한 카드 내지는 미국 패권의 수단으로 사용했던 것이고 그러한 배경에서 아마도 북한의 핵개발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북한이 그렇게 심각한 다년간의 경제 위기 상황에도 체제 안전이라는 미명하에 줄기차게 핵개발과 미사일 개발에 나선것은 아마도 핵 보유가 갖는 상징적인 의미와 자신들의 발언권에 대한 국제사회의 진지한 대접을 바랐던 것이라 볼 수 있을텐데요. 과거 우크라이나와 리비아의 사례를 봤을 때, 핵의 보유는 북한에게 있어서 중요한 학습 효과를 불러 일으켰고, 북한 정권의 사활적 안정과 유지라는 체제적 특성으로 비춰 봤을 때 주민들의 일반적인 상황을 도외시하더라도 그 특권과 안정을 절대 놓칠 수 없기에 그러한 논리로 아주 집요하고 끈질기게 핵개발에 나섰다고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과거 콘돌리자 라이스 전 장관이 “북한 주민들이 영양 실조와 억압 그리고 고립에 시달리면서도 김정일 정권에 반란을 일으킬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언급했듯이 과거 백악관과 네오콘들, 지난 10년 간의 우리 보수 정권이 북한의 붕괴를 철썩같이 믿어마지 않았지만, 그 예측된 결과는 정반대였고, 오히려 일본과 같은 경우는 정권의 차원에서 북한의 핵개발을 자신의 안보와 해결되지 않은 역사 문제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지원을 받아 점차 보통국가화에 나섰고, 또한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 또한 별다른 실효성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이 교수는 미국의 ‘군산복합체’를 ‘군산정복합체’로 지칭하고 있는데요. 이러한 미국의 군산정복합체의 이익 또한 북한의 붕괴나 남한에 의한 점진적 흡수 통일 보다는 현실 유지가 꽤 이익인데요. 이것은 지난 몇년간 폭발적으로 늘어난 한국의 무기 구매가 반영한다고 생각합니다. 전체적으로 이러한 매카니즘은 한미간의 군사동맹과 이를 바탕으로 미국이 한국에게 적잖은 안보를 제공하지만 이것은 절대 공짜가 아니며 그만큼 직간접적으로 미국의 이익이 되기도 하는데요. 북한의 ICBM 개발이 오로지 괌이나 로스엔젤레스 또는 시애틀의 위협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일본과 한국을 안보 울타리에 더욱 긴밀히 포섭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동북아시아 지역의 미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는데 이용되어 왔습니다. 저는 이것을 양가적 특성이라 지칭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삼성 선생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북한의 핵개발과 그에 따른 배경 및 미국의 정치적 예측과 동북아시아에 대한 지정학적 정치 행위를 여러 사례들을 통해 독자들에게 주지시키고 있습니다. 특히 핵무기에 의한 정치가 어떠한 파국을 일으킬 수 있는지, 몇가지 이론들을 통해 설명하고 있는데요. 과거 1995년에 노르웨이가 쏘아올린 기상 로켓을 미국이 잠수함에서 발사한 탄도미사일로 오인한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핵가방을 열고 고민했던 사례를 들며 케네스 월츠가 주장한 전세계 핵무기의 확대가 그만큼의 균형을 가져다 준다는 주장을 이처럼 여러 사례를 통해 반박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책에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과거 오바마 대통령은 파키스탄의 핵무기를 가리키며 ‘무엇보다도 잘 관리되고 있다’고 언급했는데요. 여러 글들에서 읽은 각국의 정보 단체에서 평가하는 파키스탄의 핵무기는 테러 단체에 ‘더티 밤’으로 유출될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섞인 목소리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핵억지라는 미명하에 불안정한 정권이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은 그것 자체로 억지가 되지 않으며, 2001년 9월 11일에 목격된 이슬람의 교조주의적 테러가 일반적인 국가간의 직접적인 무력 대응보다 심각하다는 것이 경험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러한 테러 행위에 핵무기가 동원된다면 그것의 결과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교수가 밝힌 파키스탄의 핵개발 대부 압둘 카디드 칸의 북한 핵무기 개발에 도움을 줬다고 밝힌 과거의 자백에 대한 입장이 번복이 있었다는 점과 그 자체로 파키스탄 정보부가 미국측에 자백했다는 식의 전언에 불과하다는 점이 충격이었는데요. 저는 그동안 압둘 카디드 칸의 북한 핵개발 연루설이 나온 책들을 수없이 접해왔습니다. 정설이 사실이 아닐수도 있다는 점에서 혼란스럽더군요. 그리고 이삼성 선생은 조심스럽게 과거 천안함 사태에 대해 재조사가 필요하다고 피력하고 있는데요. 사실 여러 각계에서 이와 관련된 미심쩍은 증거를 밝히면서 재조사 요구가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다만 저 개인적인 의견은 사실 여부와 관련없이 재조사는 하지 않는게 아주 조금 한국의 국익에 부합되지 않나 싶습니다. 재조사를 통해 진실을 밝히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될 수도 있겠지만 어떤 후폭풍이 생길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것이 저어되어 생기는 걱정입니다.

앞서 언급해드렸지만 이 책에는 정말 이 교수의 자료 수집이 대단할 정도로 여러 분야를 아우르는 정밀한 글들이 놓여 있습니다. 어느 한 부분 그냥 넘어가지 못할 정도로 대단한 흡인력을 갖고 있죠. 어쩌면 북한이 왜 쓸데없이 그런 핵개발을 하느냐에 대한 언론 기사의 판에 박힌 대답들 보다 더 정확한 대답을 독자들에게 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부분에서 저자의 노력이 저절로 보이고, 각자의 주장들이 실상 전혀 판에 박히지 않아 적지 않은 생각할 거리들을 갖게 해줍니다.그래서 아마 많은 분들이 지금도 이 책을 읽고 계시리라 추측해봅니다.

끝으로 남북간의 역사적인 ‘판문점 선언’으로 그동안 수없이 읽었던 관련 서적들과 보낸 시간이 뭔가 추억으로 남을 심산이 커지고 말았습니다. 물론 아쉽거나 원망스럽기보다는 정말로 이러한 진정스런 평화가 도래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감격스럽기도 합니다. 선생은 책의 끝부분을 제법 공들이면서 앞으로 우리 한국이 추진해야 될 대책들과 균형적인 시각을 밝히고 있는데요. 북한의 비핵화와 안전보장 수단에 대한 문제, 한국 정부의 유연한 대북 정책과 강대국들에 대한 균형적인 시각, 주체적인 태도 등을 요구하고 있는데요. 궁극적으로 우리 후세대들이 핵무기가 없는 환경에서 살게 해야된다는 사명감과 핵무기 체제 자체가 전혀 억지 전략으로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학자의 경험으로 비추어 그것을 널리 알리고자 하는 것이겠죠. 한편으로는 스스로 실소를 금치 못하는 것은 미국의 백악관 주인이 된 트럼프 대통령을 저는 너무나 예측 불가하고 충동적이라 가뜩이나 국제 정치 무대에 어떠한 문제를 만들어낼지 그와 관련된 책들을 읽으면서 고민해 봤는데요. 그동안 누구도 해보지 않은 북한 정권의 일인자와 선뜻 대화에 나선다니 제가 알고 있는 전통적인 백악관의 정치가로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한반도의 ‘급격한 전환’ 이 과연 어떻게 끝맺음을 하게 될지는 약간의 기대를 하면서 지켜볼 일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여러분도 그 길에 동참해보시는 게 어떨까 감히 제안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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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적인 미국의 세기
존 다우어 지음, 정소영 옮김 / 창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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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T의 역사학 명예교수이자 미국의 대외 관계와 일본의 근현대사 연구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존 다우어의 The Violent American Century, 즉 ‘폭력적인 미국의 세기’를 읽었습니다.

이 책은 2차대전부터 냉전을 거쳐 9.11 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 이후 미국이 벌여온 폭력에 관해 객관적으로 가감없이 쓰고 있는데요. 이에 저자는 서문에서 “나는 세계를 그와는 다른 좀더 비극적인 방식으로 계량하고 군사적 폭력을 다양한 시각에서 검토함으로써 그것의 원인을 보여주려 했다”는 고백에서 이 글의 전체적인 성격을 짐작해볼 수 있었습니다. 좀 더 해석을 가미하면, 미국이 전세계의 패권을 유지하던 기간에 어떠한 정당성을 갖고 다양한 폭력을 수단으로 삼았는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그로 인한 수많은 인명피해와 그 외에도 아직도 드러나지 않은 CIA와 미국 정부의 여러 사보타주와 같은 비밀 작전 등에 대한 저자의 비판이 글에 담겨져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미국의 지식인이 이러한 상식적인 태도를 보이며 단순히 집단해석과 같은 수준에 그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물론 미국이 세계 패권에 대한 노골적인 의지가 없었다고 밝히는 지식인들의 존재를 감안하더라도 자국의 안보를 위해 벌여왔던 일들이 어느정도 긍정적인 부분이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기도 합니다. 제가 이러한 입장에 도덕적 면죄부를 주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미국의 패권’이 양가적 측면이 있고, 명백하게 그 명과 암을 함께 이해하고 분석하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을까 싶군요.

일단 여기에 나와 있는 내용들은 2차대전 당시 집단적으로 자행된 일본, 한국, 베트남 등지의 항공 폭격과 냉전 시기, 어느날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었던 핵전쟁의 공포, 냉전시기에 자행된 세계의 독재정부와 비민주 정부에 대한 비윤리적 상황의 지원, 마찬가지로 각종 은폐된 군사 작전 등과 9. 11 테러 이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하며 발생한 수많은 민간인들에 대한 ‘부수적 피해’ 같은 익히 알려진 것부터 민감한 내용들까지 저자는 여러 자료들의 분석을 통해 미국의 어두운 측면이 주된 내용인데요. 그레나다 침공이라든지 쿠바 피그마 침공, 니카라과의 콘트라 반군 지원과 같은 사료들도 빠짐없이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 미소 냉전시기에 소련에 의한 미국의 안보 위험은 대 공산권의 봉쇄와 핵무기 경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봉쇄작전이 현재의 전세계 미국의 패권에 대한 초기 이해로 여겨지고, 그로인한 해외의 미군 기지와 전세계 각지에 파병된 15만의 미군들의 존재가 그렇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9. 11 테러는 미국의 안보에 대한 민감하고 타협할 수 없는 관념을 주지시켰고 그 확장으로서, 네오콘과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대 테러 전쟁이 귀결로 나타난거죠. 이러한 안보에 어떠한 타협과 대화는 전혀 필요치 않았고 그러한 전제로 자신들의 이익과 안보를 위해서라면 국제 기구나 협정 같은 공인된 체제를 이용하지 않고 물밑과 비선으로 합법과 비합법을 넘나드는 행태를 보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론 이러한 과거 미국의 행적을 절대 두둔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우어도 역시 공통된 인식으로 앞서 설명드린 대로 미국 정부가 벌여온 일들로 인한 특히 그 무차별적인 인명피해에 대해 날선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이죠.

이 책을 통해서 또 한번 느끼게 되는 것은 냉전 시기의 미소 핵무기 경쟁이 높은 가능성으로 전 지구적 파멸을 불러일으키는 ‘핵전쟁’으로 비화될 수도 있었고, 오늘날에는 인도와 파키스탄, 이스라엘이 핵무기 선제 사용이 가장 높은 나라들로 이 글에서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핵무기 자체가 전세계에 어떤 안정에도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으로 다시금 인식됩니다. 국제기구를 통한 NPT 체제 역시 이러한 안보에 명확한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고, 40여개국 이상이 언제든지 핵무기를 만들 능력이 있다고 보는 저자의 분석은 앞으로 인류가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될 과제가 이 핵확산의 위협이 아닐까 판단해봅니다.

글 전체로 봤을 때, 존 다우어의 판단은 여러 안보론자들이나 전문가들이 미국의 패권이 불가피했다는 측면의 주장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시카고대 브루스 커밍스 교수와 비슷한 ‘미국의 패권’에 대한 역사주의적 비판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미국 내의 리버럴이나 보수주의자들 할 것 없이 자신들의 국익을 위한 일정 부분 불가피한 점과 그러한 미국의 활동이 전세계 안보에 부분적으로 도움이 되었다고 여기는 시각과는 분명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한국과 관련하여, “한국전쟁 자체는 1910년 부터 45년까지의 일본 제국주의 지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민족내의 심각한 분열에사 나왔다” 고 분석하고 이에 미소간의 한반도 분할 점령이 기폭제가 되었다고 보고 있는데요. 한국인들의 민족 분열과 같은 수사는 어디서 많이 접해봤던 익숙한 부분이라 거듭 읽는 내내 적잖이 불쾌하더군요. 물론 이러한 일제 식민지 시기의 한국인들에 대한 인식을 확대해석할 의도는 없지만 일본 근현대사를 연구한 학자 줄신이라는 배경이 무의식적으로 작용되는건가 하는 생각을 잠시 해봤습니다. 약간의 불만족스러운 부분을 잠시 언급한 것이니 이해를 부탁드려봅니다. 그렇지만 저자의 이런 연구는 충분히 좋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고 여겨집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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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안보론 - 국제 안보 연구의 형성과 발전
배리 부잔 지음, 신욱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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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근래들어 국제정치학에서 자주 이름이 오르고 있는 런던정경대 석좌교수인 베리 부잔과 코펜하겐대 정치학과 교수인 레네 한센의 국제안보(학)-ISS-의 이론적 기반과 일종의 연보를 중심으로 거의 최초로 체계화한 ‘국제 안보론’을 읽었습니다. 이 책은 지난 2010년 을유문화사에서 번역 출간된 것인데요. 불행하게도 현재는 절판이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최근에 다시 재출간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요. 2010년 출간되었고, 신욱희 선생이 번역에 참여한 책이 금새 절판된 것이 조금 이해가 되지 않기도 하고, 요근래 북한 핵문제와 그로인한 국제정치의 복잡성을 고려했을때, 해당 전공자들 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에게도 난해하고 복잡한 국제 정치의 기본적인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이 책이 재출간의 요구가 되지 않을까 싶군요.

1945년 2차대전 종전 이후 미소간의 냉전시기가 도래하면서 이와 관련된 학문적 연구들이 국제정치학 및 외교학 분야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전체적으로 세계 정치의 중요 행위자였던 미국에서 유능한 성과가 이뤄집니다. 바꿔 말하면 이러한 연구들의 주무대가 미국이었는데요. 그러한 점을 인식하고 있는지, 유럽의 두 학자가 미국이 아닌 유럽인의 시점으로 국제 정치학과 국제 안보에 대한 계보를 처음 시작하고, 저자들은 크게 3 시기로 나누어 국제안보 (ISS)를 이론적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냉전 시기, 둘째는 냉전 이후와 9. 11 사태 이전, 셋째는 9.11 공격과 이어지는 ‘테러와의 전쟁’ 인데요. 세계대전 이후 냉전이 촉발되면서 세계 각 국가들은 해당 시민들의 안전과 안보 뿐만 아니라 외교 형태에서 주안점을 두게 되는 ‘국가 안보’가 자리 잡게 되고, 이것을 국가 간 즉, 양자간이나 포괄적인 국제기구 내에서의 여러 안보 이론 등의 배경을 설명하고 있고, 더 나아가 약간의 계보 형태의 분석으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이 국제 안보 이론이 어떻게 발전되고 변형되어 왔는지 여러 학문적 성과들을 인용하며 객관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과거 베스트팔렌 체제와 그 이후의 국민국가로의 발전화가 양차 대전을 거치면서 전통적인 국제 정치 이론이 냉전의 시작과 미국으로부터 시작된 핵무기 개발로 거의 전면적으로 수정 내지는 전환이 됩니다. 그 이전에는 핵무기가 초래하는 ‘대량 살상 상태’가 규정하는 아무도 승리자가 없는 핵전쟁의 파국적 결과에 전통적 이론들이 대체적으로 유명무실화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잘 알려진 신현실주의자인 케네스 월츠와 같은 학자들이 이러한 국제 정치 이론의 전면적 수정 분위기에 나타났고, 탈구조주의화와 같은 아주 급변적인 전개도 이뤄졌습니다. 사실 핵무기 개발로 인한 여러 이론적 변화들은 매우 당연하게도 당면한 문제들을 야기했고, 미소 냉전 시기의 양 강대국의 아주 조그만 표면적 대립조차도 세계 안보의 크나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적지 않은 전문가들조차도 미소간의 핵전쟁이 전 지구의 파멸화의 결과를 가져올 것이고, 이러한 예측이 전혀 불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그 전까지 접해보지 못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구소련의 붕괴와 그로 인한 자연스런 미국의 단극 체제는 그 이후 ‘군사적 케인스주의’에 입각한 우월한 군사 외교적 지위를 위한 미국의 ‘군사복합체적 주도 상황’과 동시에 군사 기술의 우위를 유지하려는 국가 욕망이 어우러져 중국이 실질적으로 대두하기 이전인 1990년대 말까지 지속되었는데요. 이후, 2001년 9. 11 테러로 인한 미국의 세계 정치에 있어서 공세적 변화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 이은 테러 전쟁은 또 핵무기 개발 초기와 같은 환경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미국은 종래의 제한적 개입에서 다소 적극적 개입으로 전환되었고, 과거 ‘고립주의적 전통’이 완전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시기였습니다. 탈냉전기의 분석이 9.11 테러 이전의 상황에 대한 주류였다면, 미국의 테러 전쟁 수행이 시작된 2002년 이후부터는 무기명 테러 단체의 핵무기 보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한 목적까지 포함한 적극적 대 테러 전쟁이 미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안보’의 붐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부잔은 ‘안보’가 한편으로는 현실주의 전략 연구의 ‘권력’과 다른 한편으로는 평화 연구의 ‘평화’사이의 게념적 만남의 장소로서 활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는 불행한 일이라고 주장하는데요. 마찬가지로 안보 문제가 국내 문제에 대한 상당한 영향력 때문에 권력을 극대화 할 수 있을 전략 공간을 정치, 군사 엘리트에게 제공하는 위험이 있다는 것은 안보 측면의 어두운 부분일겁니다.

그리고 1990년대에 많은 유럽의 연구자들이 냉전 시기 소련의 이후, 미국에 맞서 중국이 대두할 가능성을 예측했고, 1990년대를 거쳐 2000년대의 경제 부흥 시기를 성공적으로 달성한 중국은 비로소 G2시대로 명변되는 미중 시기를 (아직은 미흡하지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미중간의 관계는 1970년대 소련의 봉쇄를 목적으로 잠시 협력한 기간을 제외한, 미국의 중국 봉쇄가 공산주의 진영에 대한 미국의 전략 전반의 한 요소였다는 점에서 부분적으로 냉전의 잔재라고 분석하고, 중국의 시장 자유화가 마침내 더 자유주의적인 정치 사회를 만들것이라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더 진지한 사색이 필요하다고 밝히는 것에서 오늘날 현실적으로 구전되는 미중간의 전략적 불신이 바로 이러한 점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사실상 각 국가들의 안보 요구와 기대치는 앞서 언급한대로 ‘군사적 케인스주의’와 크게 안보적으로 위협을 받지 않고 있는 상황임에도 그것을 극대화 시키는 일본의 사례를 비추어 봤을 때, 실제적으로는 그 이론화가 합리적이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국제 정치 이론이 무정부주의적이고 모순적인 경향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더라도 그 연원의 안보 이론 또한 이러한 성격을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간략히 언급한 것 말고도 이론적으로 중요한 학문적 성과를 이룩한 여러 학자들과 그들의 이론, 그리고 주장들에 대한 꽤 객관적인 지표와 자료를 이 책은 제공하고 있습니다. 국제 정치에 있어서 그 계보학은 아직 크게 진전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원래 학문적 연구로 시작된게 얼마 되지 않았고, 어떻게 보면 통일된 이론들이 각 연구자들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이해되는 부분이 좀 명확하지 않은 부분도 이러한 학문적 초기 상황과 유사해보입니다. 크게 냉전 시기의 미소간의 핵전쟁과 관련된 ‘전지구적 파멸의 가능성’에 몰입해 있었던 상황적 한계도 있었고, 이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강대국 정치 논리에 의한 꽤 폭력적인 수준의 행위들도 상당해서 우리 한국과 같은 국가들에게는 아주 다방면의 이론적 접근을 통해 면밀하게 분석을 해야만 하는 부지런함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 외에도 이 책의 한 권이 같은 분야의 학자들의 연구 형태를 간략하게 나마 이해하게 만들어준다는 점에서도 좋은 평가를 하고 싶습니다. 판권의 문제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면 빨리 재출간을 출판사 측에서 해주시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여러 리뷰어들이 밝힌대로 약간의 번역상의 매끄럽지 못한 부분들이 있긴 했는데요. 개인적으로 5장 이후의 번역이 좀 더 문맥을 이해하는데 좋지 않았나 싶습니다. 처음 이 책을 접하는 분들은 이 분야의 다소간의 배경 지식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어려움을 느끼실 수도 있는데요. 좀 더 관련된 글들을 읽어 기본적 배경 지식을 갖추시고 이후에 읽는 것을 추천합니다. 물론 그것보다 재출간이 먼저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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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과 제도 - 한국형 민주ㆍ복지ㆍ자본주의 체제를 생각한다
김순영 외 지음, 최태욱 엮음 / 후마니타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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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정치경영연구소 소장인 최태욱 교수가 ‘왜 한국에서는 경제성장과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사회 갈등이 심화 및 확대되어 왔는가?’ 라는 불유쾌한 한국 사회의 현실을 민주주의와 경제, 복지, 제도 등에서 합리적인 답을 찾기 위해 여러 필자들과 함께 ‘갈등과 제도’라는 제목으로 책으로 엮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책을 처음 접하자마자 깔끔한 디자인의 겉표지 눈에 들어왔는데요. 또한 ‘우리시대 학술연구’라는 이름으로 후마니타스에서 꾸준히 내고 있는 연구 시리즈이기도 합니다. 딱히 큰 수입이 되지 않으리라 봐도 무방한데, 이런 노력을 하고 있는 출판사 관계자 분들에게 감사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이제는 연구 주제로 곧잘 회자되는 우리 나라의 경제 성장 과정은 정부 주도의 경제 개발로 시작하여 1990년대 OECD 가입과 GDP 3만불을 달성함으로서 선진국에 준하는 기준 지표를 달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경제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모두의 삶이 일반적인 행복의 기준에 도달하는 지향이 되지 못하고 있는데요. 오랜 시간 분단되어 정치가 이념화되어 과거에는 반공 이데올로기로 적지 않은 시민들이 고초를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1987년에 민주화가 되었지만 민주사회의 계급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고, 1997년 외환 위기와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를 거치면서 이러한 경제적 불평등과 빈부 격차가 여실히 심화되면서 한국 사회 자체가 상당히 파편화과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서도 민주주의 사회에서 갈등은 있을 수 밖에 없고, 이것을 억누르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수많은 갈등들이 올바른 방법으로 조절되고 협의가 되어야 하는데 우리 사회에는 그러한 현실적 배경이 존재하지 않지요. 이것의 원인과 배경은 과연 무엇일지에 대한 합리적 설명이 여기에 참여하고 있는 학자들의 글이 될 것입니다.

1장은 한국의 사회 갈등의 모습과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에 관하여 개괄적으로 논의를 시작하면서 2장의 경제적 측면의 한국 자본주의의 과정과 결론, 3장은 노동문제, 4장은 복지체제, 5장은 한국의 절차적 민주주의의 문제와 해결 가능성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조혜경 선생의 글인 2장이 마음에 들었는데요. 한국의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이식되고 각 시기의 정부에서 이뤄진 경제 정책과 분석을 비교적 독자들이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정부 주도의 개발 경제와 그 시기즈음에 대폭적인 지원을 통해 성장한 대기업들이 소위 한국식의 자본주의를 이끌었지만 미국과 영국의 주주 중심의 수평적 이사회 제도가 한국에서는 재벌 총수가 자신의 행사하는 권한에 상응하는 법률적 책임을 지지 않는 파행적 소유 지배 구조를 (일반적인) 주주 자본주의로는 설명할 수 없으며, 개발 연대의 유산인 대기업 중심의 제조업과 수출에 의존하는 성장 모델이 정권의 성격과 개혁 의도와는 상관없이 국가의 자율성에 구조적 제약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은 거의 한국 사회의 경제 불평등에 관한 내용으로 봐도 무방했습니다. 대기업들이 무차별적으로 각 분야로 확장하여 중소기업 내지는 소규모 상인들의 분야까지 침범하는 현실은 경제 기득권을 갖고 있는 대기업들의 영리를 사회경제적 균형에 맞게 자생적 조정으로는 명백하게 불가능하며, 마찬가지로 그것을 정부가 제대로 해내기란 어려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소수의 대기업이 막대한 부를 수집하는 우리의 상황은 현실적으로 경제 기득권들의 권력을 더욱 강화시켜주는 일이 되어버렸고 정부의 과세만으로는 그 한계가 틀림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대기업 위주로 오랫동안 한국 경제가 견고하게 재편되면서 노동계의 존립 또한 여러 태생적인 요인들로 한계가 있었는데요. 특히 1997년 위환 위기로 그동안의 고용 안정성 무너지면서 김대중 정부가 노사정 협의를 제안하면서 기업의 노동자 해고를 법제화하고 노동계의 입장을 잠정적으로 거부한 상황은 당시의 우리 기업들의 현실이 그들이 언급하는 사활의 상황이었다 하더라도 일반적인 서구 국가들보다 정부 주도의 일방적 친기업 정책이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특히 이후 정규직-비정규직을 갈등 표면화 시켜 일종의 무차별적 프레임화에 노동계가 분열되고 아직까지도 비정규직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경제 안정성을 해치는 일이 되었습니다. 원할한 해고, 기업들의 인건비 감축의 측면에서 비정규직 확대는 실로 일방적으로 사회에 그 부담을 전가시키는 결과였다고 봐야겠죠.

여기에다 소수 정당인 노동 정당이 원내에 진입하기 어려운 소선구제 상황, 절차적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 그리고 실질적인 복지 혜택이 돌아가지 않는 현재의 복지 제도와 더욱더 소외되고 외곽으로 밀려나는 경제적 약자들의 상황이 왜 우리 나라는 잘살게 되었는데, 우리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는가 라는 의문의 배경들이 되겠죠. 실로 민주주의가 가치를 권위적으로 배분함으로서 사회적 갈등을 관리, 조정하는 제도라고 말한다면 그 민주주의 본연의 기능을 우리 사회에 적용시켜야 할 때입니다. 이미 기득권과 그렇지 않은 사회 구성원들의 권력 차이가 상대가 되지 않을 만큼 기울어졌으며, 이것의 심각성과 문제를 정부가 제대로 인식하고 갈등의 갈등이 도처에 확산되고 피폐화되어 사회를 끊임없는 충돌로 파산시키기 전에 의회 정치 뿐만 아니라 갈등을 조절하고 서로간의 협의에 이를 수 있게 하는 제도적 장치와 공감대가 시급히 조성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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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일본 - 사이에서 근대의 폭력을 생각한다 아이아 총서 7
요네타니 마사후미 지음, 조은미 옮김 / 그린비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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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대를 졸업하고 도쿄외국어대학의 교수로 재직중인 요네타니 마사후미씨는 과거 일본 제국 시기의 식민지 경영과 중국과 한국에 자행했던 근대 폭력에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여 ‘비판과 연대를 위한 동아시아 역사 포럼’의 멤버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저자의 그런 활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글로서 지난날 아시아 지역에 무수한 고통을 안겼던 일본 제국주의와 그 연원의 사상에 비판을 가하고 있는데요. 저는 꽤 흥미롭게 읽었는데요. 역사를 통한 진정한 화해가 아직도 이뤄지지 않고 있고, 그 역사가 정치 논리에 철저히 이용당하고 있기 때문이겠죠.

미국의 페리 제독에 의해 1854년 2월, 일본은 흑선이라 불리우는 중무장한 함대에 의해 강제로 개항하게 되는데요. 도쿠가와 막부의 쇄국이 끝나고 자신들이 ‘문명화’라 부르는 서구식의 개화를 도입하고 확대하게 됩니다. 그 이전의 일본이나 바다 건너 조선, 청나라는 각각의 정체를 바탕으로 독립적인 왕조 국가로 통치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전통적인 중국 중심의 조공 통치 체제로 당시에 조선이 종속되어 있다는 식으로 일본측에서는 조선의 자주적 통치를 폄하했는데요. 사실 명백한 것은 3국이 서로 적절하게 관여하지 않고 각자 스스로의 정치를 해왔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봉건주의의 왕조 국가라는 한계와 특수성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주되게 밝히고 있는 1854년을 기점으로 일본은 소위 ‘문명화’가 되었고, 아직도 문을 닫아 걸고 있는 청나라와 조선은 일본에 비해 미개하다는 식의 시각은 소름끼치게도 유럽이 아프리카를 보는 관점과 동일해 보였습니다. 저는 서양의 자연 과학을 바탕으로 사회 전반에 큰 전환을 갖고 온 산업혁명과 그 이후의 기술 문명에 대해 무조건적인 비판을 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 문명이라는 것은 비교하여 미개하다 그렇지 않다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봉건적인 국가 시스템을 유지했지만 동시에 고유의 문화와 문명을 발전시킨 것이죠. 왕조 문명 자체를 격하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도 일본에서 존경과 추앙을 받고 있는 후쿠자와 유키치는 처음에 다 같이 잘 살아보자는 ‘흥아론’에서 나중에는 ‘탈아론’으로 급격히 변질되는데요. 그것은 여기에 저자도 언급하지만 당시 조선의 김옥균이 일으킨 갑신정변이 청의 개입으로 인해 무위로 끝나고 그것은 곧 청과 조선이 함께 개화 문명이 되기는 어려운 것이며 그로인해 일본이 독자적으로 청과 조선을 개화시키고, 결국에는 서구의 개입과 침입으로부터 아시아를 쟁취하는 것으로 일본은 아시아의 한 국가이기 보다는 유럽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대한 나라로 스스로 격상시킵니다. 이처럼 일본이 주도하는 강제적 시스템에 조선과 중국 대륙 일부가 편입되지만 실상은 역사가 보여주는 그대로 입니다. 일본 제국 시절 조선인들은 2등 국민의 처지가 아니었습니까. 만주 진출의 교두보였으며, 각종 수탈과 매우 계획적인 병참기지화 전략이 조선의 실제 모습이었죠.

이러한 일본의 사상의 근원에는 조선과 중국에 불평등조약을 강요했던 그 자신이 불평등조약에 벗어나는 것과 상관관계가 있었으며, 그것에 그치지 않고 ‘정한론’을 들고 나와 당시 전통적인 조공 질서를 개변시켜 새로운 국제 질서를 창출하려는 본질이 여기에 있다고 저자는 보고 있습니다. 조선을 비롯한 오키나와와 타이완을 식민지로 삼은 것은 병합했던 지역의 백성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유럽의 제국주의를 그대로 답습해 자신들도 영국과 프랑스와 같은 위치에 있는 아시아 유일의 문명국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어했습니다. 동아시에 대한 유럽의 진출은 더욱더 받아들이기 어려웠겠죠. 이것은 선점의 문제로 그렇게 폭력과 차별, 억압을 통해 주변 민족을 지배하게 됩니다.

앞의 인식은 1903년 오사카에서 열린 1903년 오사카 내국권업박람회의 학술인류관에 아이누인, 타이완 선주민, 류큐인, 조선인, 중국인, 인도인, 자바인을 재현한 주거 내지 풍속, 관습과 함께 실제로 살아있는 사람을 전시 및 진열하여 관객의 시선을 끌고자 했던 ‘인류관 사건’이 글에 인용됨으로 나타는데요. 어처구니 없게도 당시 이 일본인들은 주변 민족들을 아프리카 원주민과 다를바 없이 여겼던 것 같습니다. 유키치의 ‘탈아론’이 어떤 의미인지 저는 여실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즉, 일본이 주변 민족에게 혜택이 되었다던 근대화와 개화는 결국 폭력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요네타니 마사후미 교수의 일관된 목소리입니다. 일본을 중심으로 동아시아가 협동해 잘 살아보자는 것은 한낱 허구에 지나지 않았고, 진실은 일본을 위해 너희가 마땅히 희생하라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제국 시절의 일본의 통치는 철저했고, 가혹했으며 ‘대동아공영’이라는 미명하에 2천만명이 넘는 아시아인들을 희생시킨 것으로 증명되었습니다.모두가 다 아는 이 사실을 일본만 인정하지 않는 꽤 ‘불유쾌한 시기’를 우리는 지금도 살고 있습니다.

끝으로 ‘일본의 근대’가 어떠했는지 사상사의 형태로 독자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는 아마도 학자의 양심이라고 생각됩니다. 난징대학살과 위안부 문제를 적극적으로 부인하고 부정하는 일본 학자들이 많은데요.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요네타니 마사후미 교수 같은 연구는 ‘진실의 접근’이라는 측면에서 평가받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일본인 특유의 섬세한 시각과 어조는 더 설득력이 높았습니다. 이와 비슷한 글들의 출판이 앞으로도 더 활발하게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을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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