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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권수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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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기억은 사람의 존재처럼 금새 사라진다. 반대로 말해야 할까. 사람의 존재는 사람의 기억만큼이나 금새 모습을 감춰버린다. 기억 역시 존재의 생리를 닮아서일지 중요한 것이라 여긴 것이든 아니듯 어느 순간 군중 속으로 사라지는 사람처럼 수많은 기억속으로 사라져서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사는 동안에도 사그라지고 죽은 이후에는 구별되는 것이 더 어렵다. 파트릭 모디아노는 그 소멸이 안타까웠던지, 아니면 그 사이에 숨쉬는 인간의 고독이 안타까웠던지. 소설의 초점을 사라지는 기억들과 존재들에게 맞춘다. 그는 마치 기억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듯한 문체를 사용하여 그가 생각하는 ‘기억’의 특성이 작품안에서 숨쉬게 했다. 그 점이 다른 작가들이 기억과 사건을 다루는 방법과 다른 점이었다. 이야기는 기억처럼 밀려들어왔다가 기억처럼 뚝 끊겼다. 한 사람의 기억을 엿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기억을 되새기는 것처럼 이야기를 시작하면 마치 옆에서 살아 숨쉬는 인간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내 기억과 뒤섞여서 또 하나의 변주를 일으켰다. 소설의 이야기에 이끌리기보다, 나 자신의 기억을 더 자극받아 생각의 나래가 펼쳐졌다. 

소설은 듬성듬성 무언가 빠져 있는 것 같으면서도 이야기를 이끌어나가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고 매끄럽다. 그래서 마치 직조된 인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물을 대하는 듯한 긴장감을 준다. 그 어조를 부드럽다고 칭하기에는 어쩐지 부족하고, 여성적이라 하면 ‘여성’이라는 단어를 다시 정의해야 하니 뭐라고 말해야 적당할 지 좋은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마초적이지 않다고 해야 하나. 거대한 논리구조를 구축하여 독자를 압박해서 당위적인 설명에 굴복하도록 만드는 문체가 아니다. 마치 내 기억처럼 조용하게 스며든다고 해야 할까. 그걸 말하는 데 전혀 장황하거나 지루하지도 않다. 공감하고 쉬어갈 수 있을 정도의 분량에 담아낸다. 조각을 만들 때 정을 두드려도 정을 두드린 흔적을 내보이지 않는게 미덕이었던 시절도 있었는데, 이 작품 역시 내면에 담은 이야기를 말하려고 ‘기억’으로 비추어지는 ‘정’모양을 제외하고는 그런 방식으로 쓰여진 걸지도 모르겠다. 기억을 만드는 방법, 기억을 떠올리는 방법대로 소설이 정교하게 구축되어 있다. 이것이 기억이라는 듯 표면으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 순간 이후의 그들의 얼굴, 그들의 목소리는 마르가레트의 얼굴을 제외하곤 긴 세월 속으로 사라진다. 돌아가던 음반은 끽끽 소리를 내다가 일순간 뚝 멈추고 만다. 그게 아니라도, 이름을 왜 ‘르 피르마망’이라고 붙였는지 보스망스가 영원히 알 수 없을 그 카페는 곧 문을 닫을 시간이었다. 

두 사람은 지하철역까지 걸었다. 그날 밤 마르가레트 르 코즈는 새 직장을 구해서 리슐리외 대행사 및 방금 만난 동료들과 완전히 연을 끊고 싶다고 보스망스에게 털어놓았다. 매일 구인광고를 읽으며 자신에게 또다른 지평을 열어줄 문구가 눈에 띄기를 고대한다면서, 오페라 광장에 도달하니 지하철 입구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드문드문했다. …32p<<지평>>”

그들의 얼굴 그들의 목소리는 ‘마르가레트’의 얼굴을 제외하곤 긴 세월속으로 사라져버린다. 이름을 왜 ‘르 피르마망’(창공)이라고 붙였는지 보스망스가 영원히 알 수 없을 그 카페. 그곳에서 나와 그녀는 또다른 지평을 열어줄 문구를 찾으며 걷는다. 보스망스가 기억하려고 하는 마르가레트를 제외한 배경들은 덧붙여 설명하지 않고 ‘긴 세월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그런데 작가는 그게 안타까웠는지. 당연하게 기억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점들을 당연하게도 택스트로 끌어올려 적어둔다. “이름을 왜 ‘르 피르마망’이라고 붙였는지 보스망스가 영원히 알 수 없을 그 카페”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재차 말함으로서, 굳이 그 카페를 왜 그렇게 지었는지 궁금해하며 직접 물어보지도 않지만, 궁금해 할 수 있을 만한 것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그 기억에 ‘영원히’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소중히 여기는 것 만큼이나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도 영원히 사라져버린다는 것에 연민을 가지는 듯이 조용하게 붙어있다. 이 소설의 독특한 ‘기억의 문체’는 이런 식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이런 서술은 억지로 모든 것을 기억하려고 시도하는 사람을 주된 타겟으로 삼은 이야기가 아니라 삶을 살아내려 노력하는 ‘보통’사람의 이야기임을 보여준다. 무수히 많은 사람 중 하나. 그 중에서도 세계의 흐름에 곁다리로 밀려나 부단히 살아내려 노력하는 사람 중 한 명의 기억을 쫓는다. 


소설 안에서 드러나는 인물들은 자신이 사는 시대에 지쳐있다. 자신을 두렵게 하는 것으로부터 도망치면서 삶을 이어나가고, 적극적으로 야망을 가지고 개척하겠다는 힘이나 의지는 이미 깎여나가버린 것처럼 노쇠해 보인다. 그래도 그 저변에 깔린 생명의 힘은 전혀 약하지 않았다. 뭐든지 다 해내겠다는 듯이, 무모하게 뻗어나가지 않을 뿐이었다. 스스로를 확신할 수 없다 해도, 연인에게 모든 것을 말하라고 캐묻지 않는다 해도 살아갈 뿐이었다. 그 일례로 보스망스는 마르가레트가 무서워하는 대상에 관해 자세히 물어볼 수 없다고 느꼈음에도 그녀와 긴밀하게 연결된 연인이었다. 그런 모습이 어쩐지 이국적으로 느껴지면서도 익숙했다. 자신이 사는 시대에 지친 상태로 앞으로의 미래가 지금보다 더 나을 것이라고 꿈꾸지 않는 요즘 세대와 비슷해보였다. 


“……그리고 마르가레트와 나, 우리 둘 역시 무허가로 캠핑중이었다. 대체 어떤 계기가 있어야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잘 태어나 잘 자란 사람들, 자신 있는 입술과 눈빛으로 부모에게 사랑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그 한결같은 자신감과 적자다운 당당함을 가질 수 있는 것일까?……168-169p<<지평>>”


 “이본 고셰는 그 질문에 미소를 지었다. 미래…… 지금의 보스망스에게는 날카롭고도 신비한 울림을 주는 말. 하지만 그때의 우리는 한 번도 미래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가진 가능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영원한 현재 속에 있었다. 170p<<지평>>” 


인물들은 ‘지평’어딘가에서 걷다 서로를 발견하고, 헤어지고 다시 떠올리며 만나려는 과정을 거친다. 작가는 “지평이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포개져 혼재하는 시공간”이라고 했다고 한다. 제목은 작품에 흐르는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기억을 붙잡으려 해도 붙잡아지지 않고 그저 흘러가면서 혼재되어 있듯이, 인물들도 그렇게 등장하고 사라지고 만나고 헤어진다. 시간에 의해 공간이 뒤섞이고 모든 것이 혼재하는 공간. 그렇게 살피고 나니 책 표지도 잘 고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이 시간을 살고 있는 나도 지평을 걷고 있는 지도 모른다.  여전히 가능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그것을 인지하려면 똑같은 인생을 두번 살아봐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서라도 그저 모든 것이 한꺼번에 섞인 시공간안에서 숨을 쉰다. 기억만큼이나 나라는 존재 역시 금새 잊혀지고 사그라져버릴 테지만 그럼에도 보스망스처럼 어떤 누군가를, 일생에서 귀중한 무언가를 찾으려고 돌아다니고 있다. 그렇기에 시간을 흘려보내는 게 쎄한 기분이 들면서도 익숙하다. 반드시 무엇을 해야 겠다는 당위성도 시간에 홀려 없지만 그럼에도 안타깝다. 가느다란 끈을 들고 떠난 그녀를 찾아서 책방에 찾아간 보스망스처럼, 펼쳐진 유리 수족관 안에서 어떤 것을 구별해내고, 아직은 나도 모를 무언가를 만나고 쫓아 갈 수 있을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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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만들다 - 특별한 기회에 쓴 글들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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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지식`이 존재한다는 관념에 갇혀있던 나를 바꾸어버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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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천명관 지음 / 창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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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는 한 달 전에 읽었는데, 책장을 넘기면 내용이 다시 생생하게 내게 다가온다. 마음 깊숙히 숨겨둔 감정을 끌어올리는 좋은 책이다. 그런데 막상 리뷰를 쓰려니 뭐라고 서두를 써야 할 지 모르겠다. 과장되지 않은 문장으로 탄탄한 서사를 메꾸었다. 라는 말은 이 소설을 표현하기엔 불충분하다. 시적이고 아름다운 문장으로서 기억에 남았던 것도 아니고, 독특한 서사로서 기억에 남는 것도 아니며, 사유로서 기억에 남는 것도 아니라 미묘하다. 


읽으면서 위로가 되었다는 것을 특징으로 꼽아야 하련지도 모르겠다. 소설이 이야기하고 있는 지점은 각박하고 우울한 지금이며, 주인공이 소설 안에서 무언가 해방될 수 있는 지점을 찾은 것도 아니다. 아마도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역시 지금을 사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비슷할 것 같은 내일을 마주할 것 같다. 그래서 카타르시스도 없지만 소설과 삶이 별개로 갈라져버리지도 않는다. 대리만족을 하게 만듦으로서 값싼 위로를 행하는 것도 아닌데 이 소설집을 엮은 이야기꾼이 왜 위로를 한다고 느낀 걸까?


나는 이 책을 통해 세상에 살고 있는 누군가의 고통을 본다. 그들의 고통은 극적으로 해방되지 않을 것이다. 사회가 쉽게 바뀌지도 않을 것이고, 그들은 사회가 변하기를 바란적도 없다. 애초 ‘사회가 변한다’는 개념도 후대에 와서 역사가들이 ‘변화하는 사회’라는 것을 기점으로 정리한 까닭에 사회가 변화하였다고 ‘믿는’것인지도 몰랐다. 게다가 ‘사회’라는 것은 얼마나 불분명한 것인지 눈에 보이지도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지만 누군가는 사회에 대해 논평을 하고 변혁을 꿈꾼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무엇을 통해 변할 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사회’라 지칭되는 추상적인 것들을 신경쓰지 않는다. 각기 개인적인 고민들을 치열하게 하면서 어떻게든 암담한 현실을 하루라도 살아낸다. 그리고 각기 가진 작은 고민들에 대한 그 순간만을 위한 답을 찾아내고 앞으로도 수없이 닥쳐올 것들에 대해 미리 고민하지 않는다. 그들은 소설의 마지막에서 ‘순간’을 겨우 넘겼을 뿐이다.


어쩌면 ‘순간’을 겨우 넘긴 인물들의 삶이 나의 삶을 닮았기에 ‘위로’를 받았는지도 모른다. 이야기꾼이 그들의 고통을 처절하게 다루지 않았기에, 독자로서 그들의 고통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던 것도 ‘위로’에 한 몫을 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끔찍하게 보이는 일도 ‘순간’과 ‘순간’을 넘기면 어느새 다른 해방감이 있기라도 할 듯, 소설은 끝이 난다. 무사히 ‘순간’이라도 넘겼기에 작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순간’을 넘기면 지금의 고민이 해결될 지도 모른다.라는 문장은 당연한 공식처럼 내 일상을 위로해왔다. 정말 그런지는 어떤 일이 지나고 나야 안다. 그렇게 따져보면 고민이 해결되었던 적도 있고 그렇지 않았던 적도 있다. 지금의 믿음이라는 것은 과거의 경험으로 빗대어 살피면  추측하려는 시도가 무안하게도 쉽게 하찮아진다. 하찮아지지 않기를 ‘지금’ 바라고 있을 뿐이다. ‘바란다’는 것은 ‘영원’과 ‘완벽성’과는 관계가 없다. 완벽하지 않다고 판명되더라도 바랄 수밖에 없고, 바람으로서 지금의 삶을 버티고 앞으로라는 ‘추상적인’ 무언가를 향해 다가갈 수 있으니 기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불완전한 점에서 어쩌면 소설과 나는 서로의 삶이 맞닿아 통했다고 느끼고 위로를 얻었는 지도 모르겠다. 하루 하루 살기도 벅차서 좌절하지만 삶의 흐름에 몸을 맡기게 되는 것처럼. ‘바람’에 몸을 맡기고 살아내는 것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이기 때문에. ‘순간’을 넘기는 것은 중요했다. 그건 개인적 불행의 총량이 더 많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내가 견뎌야 할 것이기 때문에 무거운 것 뿐이라 쉬쉬하며 지냈던 것이었는데 이 소설을 쓴 이야기꾼은 내가 가진 이야기보다 더 무거운 이야기를 가볍게 전개한다. 마치 농담처럼 느껴졌다.


이미 충분히 ‘삶’이 부담스러워서, 거대한 카타르시스를 ‘회의’하는 삶을 살고 있어서, 이 소설이 어울리는 곳에서 살고 있기에 소설로부터 위로받았을지도 모른다. 이야기꾼이 이야기를 심각하게 다루지 않아서 무거운 이야기를 농담처럼 쉽게 읽었으며, 오래 마음에 남아도 부담스럽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농담같은 위로는 던져졌을 뿐이라, 나는 책장을 덮고서 마음에 남은 위로로 다음 ‘순간’을 향해 간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외치며 부러진 팔로 아이의 어깨를 힘껏 끌어안았다. 삼십팔 킬로그램의 여자가 한 생명을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었다. 흠뻑 젖은 소년의 몸은 파충류처럼 차가웠다. 하지만 가슴을 뚫고 튀어나올 것처럼 심장이 거세게 팔딱거리고 있었다. 수억수천만년간 박동을 멈추지 않은 심장이었다.

.

.

이번엔 절대 그냥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눈을 감은 채 자신의 결심을 주문처럼 되뇌는 동안 그녀는 물속에서 소금이 녹듯 스스르 잠들었다."

-파충류의 밤106-107p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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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미날]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제르미날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1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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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상이 잘 재현된 이야기다. 구성도 매끄럽다. 제르미날은 노동자들의 파업과 실패의 과정을 그려낸 작품이다. 큰 얼개는 뻔할지라도, 세세하게 짚어낸 구체적인 설정과 행동들이 이 이야기를 뻔한 이야기가 아니도록 만들었다. 전체 서사의 방향을 기억하지만 그 서사 안에서 살아 숨쉬는 개별적인 인간을 모두 존중하려고 노력한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책에 나오는 인물을 미화하거나 매도하려 하지 않은 시도들이 곳곳에 보이니 인간적이었다. 예를 들자면 어떤 이상적인 사회를 향해 노력하는 것에도 모순점이 존재한다는 걸 빼놓지 않고 표현하려 했던 것도 그것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또 여기 등장하는 부르주아 역시 인간은 끝없이 원한다는 모순때문에 고통받고 있으며, 가난한 사람들도 얼마 안되는 살림살이들로도 우열을 가리며 서로를 헐뜯기도 한다는 것들이 인간적이었다. 작가는 그런 묘사를 통해 인간은 어떻게 해도 영원히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는 절망적인 이야기를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최소한 인간이 인간답게 노동할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작품 전체에서 말하고 있지만 어느 인간도 소외시키지 않는 묘사와 희망을 언급하는 마지막 부분으로 작품을 마무리했다. 

 

"그의 발밑, 깊은 땅속에는 고집스레 리블렌을 두드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그의 동료들이 모두 그곳에 있었다. 에티엔은 그의 걸음마다 그들이 따라다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탕무밭 아래에서는 위윙거리는 통풍기 소리에 묻힌 채 허리가 부서져나가도록 일하고 있는 라 마외드의 거친 숨결이 들려왔다. 왼쪽, 오른쪽 그리고 더 먼 곳에서도 또 다른 동료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에티엔은 밀밭 아래, 산울타리 아래 그리고 어린나무 아래에서까지 도처에서 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그리고 또다시, 여전히, 땅가 가까워지는 것처럼 동료들이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또렷이 들려왔다. 뜨겁게 달아오른 햇살이 비치는 젊은 아침에 전원이 잉태한 것은 바로 그 소리였다. 사람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복수를 꿈꾸는 검은 군대가 밭고랑에서 서서히 싹을 틔워 다가올 세기의 수확을 위해 자라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머지않아 그 싹이 대지를 뚫고 나올 것이었다. " 제르미날 2 369p-370p


책의 뒷면에 에밀졸라가 빚어낸 자연주의 문학의 최고봉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어서 자연주의가 무엇인지 찾아보았다. “자연주의는 야비한 일상적 현실을 묘사한 극단적 사실주의의 한 형식이다. 자연을 유일의 현실로 간주하는 입장으로 개인의 운명은 자유 의지가 아니라 유전과 환경에 의해 주로 결정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인물에 대한 과학적 접근을 발전시켰던 문학의 학파를 설명하기도 한다. 그 결과 자연주의 작가들은 인물이 어느 정도 야만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설정하면서 개인을 내적 혹은 외적 힘의 희생자로 그린다.”([네이버 지식백과] 자연주의 [naturalism, 自然主義] (영화사전, 2004.9.30, propaganda)) 에밀졸라는 책에 잠시 등장하는 인물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내면풍경과 외면 풍경을 사실적으로 그리려고 애를 썼다. ‘부르주아’의 입장도 ‘광부’의 입장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추악한 부분과 긍정적인 부분 모두를 서술하였다. 게다가 당시 광부들은 이 책을 읽고 에밀 졸라의 장례식 때 제르미날을 외쳤을 정도로 열광했다고 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사회주의 혁명 역시 그 당시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광부혁명과 흡사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책은 총 7부로 나뉘어있다. 1부에서는 광부들이 굶주리면서 부당한 임금으로 광산에서 일하는 모습이 나오고, 2부에서는 광부들의 생활이 얼마나 피폐한지 묘사되며, 3부에는 에티엔이 광부일에 적응해가며 사람들과 친해져서 혁명을 도모하려는 내용이 나온다. 4부는 광부들이 피폐한 생활을 극복하기 위한 한 방안으로 파업을 알려주고 실행을 계획하는 장이다. 5부에서는 파업을 실재로 이행하고 6부에서는 파업이 경과한 결과 피폐해진 광부들의 삶이 나오며 7부에선 그들의 파업이 실패한 이후 피폐한 생활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극복하려고 사회적으로 노력할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언급하며 마무리된다. 이렇게 큰 얼개로 나누는 것이 조금 억지스럽기도 하다. 장이 나뉘어있고 분위기는 대략적인 얼개에 따라 나뉘나 그것들을 만들어가는 것은 그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이고, 사람의 행동은 각 장이 나뉜다고 나뉘어지는 부분이 아니었다. 작은 얼개로 보면 에티엔과 카트린의 사랑이야기 이며, 넓게 보면 더 나은 삶으로의 노력실패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희망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 얼개가 포함하지 못하는 것이 많이 있다. 전에 일어난 일이 다음 일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게다가 이 책은 주인공 몇명의 감정과 불합리성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 인물들이 될 수도 있는 인물들의 상황과 행동까지 빠짐없이 다루려고 노력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자신의 의견을 표면으로 강하게 어필하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좋은 소설이었다. 작가가 표면에 드러나서 말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인물들이 잘못 알고 있었던, 그 시대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서 소설 안에 녹아있기 보다 작가의 무지로서 드러나서 소설을 읽는 데 약간 방해되었다. 이는 작가가 전지적 작가 시점을 활용한 까닭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소설 특성상 전지적 작가 시점 이외의 시점으로는 전개가 어려웠을 것을 감안할 때, 그런 점들이 있더라도 어쩔 수 없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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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의 축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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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얇은 책이다. 짧지만 굵다. 유의미의 무의미, 무의미의 유의미. 단순하게 말하여 삶 안의 어떤 것도 무의미하지 않다는 뜻으로 들린다. 단어나 에피소드가 넘치지도 않는다.  문장 하나에 신경을 쓴 티가 났다. 어렵지는 않은데 허투루 넘어가는 것들이 없었다. 

책은 재미있게 읽었는데 그 이외의 설명을 보탠다는 것은 식상하고, 재미없다. 작가가 이미 지나치게 명료한 어떤 주제에 대해서 가볍게 이야기를 풀었다. 책을 읽는 것이 가장 재미있는 설명이 될 터였다. 


그래도 설명을 덧붙여야 한다면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라몽의 나르키소스에 관한 언급부터 시작해보고 싶다.


“ 다르넬로를 만나면 보잘것없는 인물이 아니라 나르키소스를 상대하게 될 거야. 이 말의 정확한 의미에 주의해야 해. 나르키소스라는 건 거만한 사람이라는 게 아니야. 거만한 사람은 다른 이들을 무시하지. 낮게 평가해. 나르키소스는 과대평가하는데, 왜냐하면 다른 사람 눈에 비친 자기 모습을 관찰하고 더 멋있게 만들고 싶어하거든. 그러니까 그는 자기의 거울들에 친절하게 신경을 쓰는 거지.(25p-26p) ”


다르넬로는 책 안에서 나르키소스로 묘사된다. 이 책 안에서 라몽에게 나르키소스인 다르넬로는 ‘위대한 진리의 엄숙함에 애착을 가진 인물(149p)’이다.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보았다. 라몽은 다르넬로가 위대한 진리를 좋아하는 것은 그가 나르키소스이기 때문이라 여긴 것은 아닐까?


“ 스탈린 자신이 답한다. ‘나는 말이오, 동지들, 인류를 위해 나를 바친 겁니다.’ 

모두들 마음이 놓인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이 거창한 단어들을 인정한다. 카가노비치는 박수를 치기까지 한다. 

‘하지만 인류가 뭐죠? 전혀 객체적인 것이 아니고 나의 주관적 표상일 뿐, 말하자면 내 주위에서 내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던 것이지. 그런데 내가 내 눈으로 노상 봤던 게 뭘까요, 동지들? 당신들, 당신들이라고!’ (118p-119p)


이 책에서 나오는 스탈린 역시도 ‘인류를 위해 나를 바친다’라는 개념을 비웃고 있다. 스탈린 본인이 인류라는 것을 주관적인 표상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위대한 진리의 위대함을 뒤집는 발언이다.


농담의 중요성에 대해, 농담은 무의미한 것으로부터 온다는 것에 대해 명료하게 주장하는 이야기가 있다. 중간에 삽입된 것 중 스탈린이 한 농담에 관한 것이다. 스탈린은 자신이 자고새 24마리가 나무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12발 남은 총으로 자고새를 다 쏘았다고 했다. 그러고서 13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집에 가서 탄창을 가져와 나머지 12마리가 앉아있는 나무를 향해 쏘아 모두 24마리를 잡았다고 말한다. 현대인은 이것을 농담으로 받아들이고 웃지만, 그의 측근인 호루쇼프는 스탈린의 거짓말이 역겹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이 이야기를 말하는 등장인물 샤를은 스탈린 주위의 사람들이 농담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게 되었기에, 새로운 역사의 위대한 시기가 도래하였다고 말한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위대한 시기라는 단어로 그 당시를 표현함으로써 ‘위대한 진리’를 좋아하는 다르넬로를 조롱했듯 그 ‘위대한 시기’를 조롱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가 무의미가 귀중하다는 것의 증거로 내놓은 다른 예시를 보자. 알랭의 어머니는 알랭에게 말한다.


“저 사람들 전부 좀 봐라! 한번 봐! 네 눈에 보이는 사람들 중 적어도 절반이 못생겼지. 못생겼다는 것, 그것도 역시 인간의 권리에 속하나? 그리고 한평생 짐처럼 추함을 짊어지고 산다는 게 어떤 건지 너는 아니? 한순간도 쉬지 않고? 네 성(性)도 마찬가지로 네가 선택한 게 아니야. 네 눈 색깔도. 네가 태어난 시대도. 네 나라도. 네 어머니도. 중요한 건 뭐든 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권리들이란 그저 아무 쓸데없는 것들에만 관련되어 있어, 그걸 얻겠다고 발버둥치거나 거창한 인권선언문 같은 걸 쓸 이유가 전혀 없는 것들!(133p) ”


이것은 다르넬로의 엄숙함과 나르키소스 적인 면을 한차례 다른 예시로 비웃는 대목이다. 책에서 말하고 다르넬로가 좋아하는 위대한 진리는 ‘인권선언문’같은 것인데, 알랭의 어머니가 중요한 것들은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것들이라고 한다. 그리고 ‘인권선언문’은 쓸데없는 것에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


라몽은 다르넬로에게 이렇게 말하는 대목이 있다.


“하찮고 의미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 하지 않는 곳에도, 그러니까 공포 속에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말이에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인정하려면,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147p) ”


이 대목으로 무의미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못을 박는다. 


책은 이제까지 의미있다고 여겼던 모든 것들이 무의미한 것들을 무시하고서 그 위에 선 것이었다고 말한다고 여겼다.

각자는 삶을 사는 데 필사적인 투쟁을 하고 있다. 살면서 삶의 불행을 가지고 농담거리로 삼는 사람은 봤어도, 삶의 불행 자체가 없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아마 있다고 해도 극소수라서 내 주변에는 없었는 지도 모른다. 굳이 특정지어 마음에 담아둘 대목은 아니지만, 자기 자신 이외의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은 투쟁을 한다는 점에서 마음에 들어서 게시한다. 


“나는 우리 거리들에 이름을 장식한 이른바 그 위인이라는 자들은 관심 없어. 그 사람들은 야망, 허영, 거짓말, 잔혹성 덕분에 유명해진 거야. 칼리닌은 모든 인간이 경험한 고통을 기념하여, 자기 자신 외에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필사적인 투쟁을 기념하여 오래 기억될 유일한 이름이지. (44p)”



도가철학자들이 무위자연을 말한 것이 생각난다. 모든 것에 가치가 있기에 모든 것에 가치가 없다. 어떤 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이고, 무의미한 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도 인간이다. 더 이상 가치구분의 의미가 없어지는 지점. 그래서 그것을 가치구분하지 않고, 무의미한 존재 그대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지점. 그것이 삶의 축제를 가리키는 말이 아닐까. 참 모순적으로 들리지만.. 도가도 비상도에 의하면 진리는 '말'로 풀이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는 것 역시도 모순이 되어버리는 것이 함정일지라도,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는 걸!) 이제는 너무 자명한 것으로 자리해서 더는 말이 필요없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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