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위스키, 100년의 여행 - 오늘은 일본 위스키를 마십니다
김대영 지음 / 싱긋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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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긋 출판사에서 일본 위스키를 주제로 쓴 두꺼운 책을, 그것도 저자 친필 사인까지 된 책을 보내주셨다. 검색해보니 위스키의 세계적인 인기에도 불구하고 이와 관련된 책은 출판된 적이 없다고 하는데 싱긋에서 국내 최초로 버번 위스키 전문 서적을 펴냈으며, 이번에는 국내 최초로 일본 위스키와 관련된 이 책을 출간한 것이다. 이런 책을 받았으니 참 의미가 깊다.



문제는 내가 위스키와 같은 증류주에 굉장히 약하다는 것! 요즘 말로 위..(위스키를 알지 못하는 자)라는 것이다. 이 책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읽어야 할까, 읽기 전부터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이 참에 위스키를 한 잔 해볼까? 아니다, 그럼 며칠간 숙취에 시달릴 테지, 그럼 어쩐다?! 일단 진하게 끓인 보리차에 얼음을 타서 온더락(On the rock)인 양 즐겨본다. 그리고 이 책은 일본 위스키의 역사를 배운다 생각하고 읽기로 했다. 나는 역사를 참 좋아하니까.

 

우선 일본 내 위치한 22곳의 양조장을 직접 취재하며 이 책을 완성한 작가 분의 덕력에 감탄했다. 홋카이도부터 오키나와까지 발품을 뛰며 양조장의 역사, 생산방식, 각 위스키의 특징과 페어링 등 정말 위스키 사랑이 굉장하다는 생각을 했다. 중요한 것은, 단순한 개인적인 애정으로 시작했을 작품이 일본 위스키의 2024년 미슐랭 가이드처럼 느껴질 만큼 상세하다는 것이다. 물론 허가를 받았겠지만 특징 있는 시설의 사진까지 함께 한 각 양조장의 특징은 직접 그 곳에 간 것과 같은 인상을 준다.

 

책 속 마스터 블렌더, 마스터 디스틸러 등 실무 담당자들과의 인터뷰는 뭇 Food & Lifestyle 잡지에서 봄직한 내용이었다. 이 책은 이런 인터뷰 내용과 더불어 증류소 주변에 위치한 가볼 만한 곳에 대한 정보와 위스키와 관련된 축제정보까지 담고 있다. 그간 커피나 맥주에 대한 책들을 읽어보았지만 대부분 개인적인 취재 내용이나 기록된 역사 기록, 또는 주관적인 감흥 등을 정리한 것이 대다수였다. 반면 일본 위스키 전반에 대한 정보와 함께 놓치지 말아야 할 알짜배기 정보까지 전달하는 이 책의 구성과 내용을 통해 前 NHK 서울지국 기자라는 작가 분의 이력이 빛을 발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해 전 무라카미 하루키의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을 읽으며 위스키를 즐기기 위해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까지 여행했던 무라카미 하루키 부부의 열정이 참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그런데 우리나라에도 이런 열정을 가진 작가가 있다. 힘든 시간 내 안의 불씨를 살려내려고 처절하게 공기를 불어넣는 일(14)”로써 위스키 정보와 테이스팅 노트를 적었던 작가 분의 노력이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책으로 나온 것이다.


 30대 중반부터 거의 매해 수술과 재활을 받아온 이래로 맥주를 물처럼 마시던 습관이 사라졌다. 음주를 귀하게(!) 하다 보니 술 한 잔을 마시더라도 하나의 의식이라 생각하고 음미하고 즐기는 습관이 생겼다. 그래서 요즘은 맥주도 흔히 마시는 브랜드가 아닌 것을 마셔보려고 애쓰는 편이다.


이 책은 어쩌면 새로운 것도 시도해보라는 하나의 시그널일지 모른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하이볼이 유행이라 하는데 너무 달달한 건 과음의 위험이 있으니 작은 잔으로 위스키 한 잔을 천천히 음미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라 생각해본다.


(엊그제 새로 갱신한 여권을 받았다. 비록 위스키는 잘 모르더라도 위스키를 핑계 삼아 일본으로 출국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왠지 일본의 선술집에 앉아 나도 모르는 언어 가운데에서 온더락으로 조금씩 마시는 위스키가 참 맛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좋은 핑계다!!))


"세계의 앞선 위스키 제조기술에 일본인의 자질과 일본에서 재배한 원재료, 그리고 자연환경이 더해진 것이 일본 위스키라 할 수 있다." - P25

"위스키는 시간이 드는 음료입니다. 길게 오랫동안 사귀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좋은 위스키를 만들려면 좋은 소비자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오랫동안 위스키를 사랑해주는 것이 위스키를 계속 만드는 원동력이 됩니다. 앞으로도 위스키를 계속 사랑해주시면 좋겠습니다." (267쪽 5장 치치부 증류소 Q&A 중) - P267

"우리나라는 그동안 소주, 맥주, 막걸리를 편애해왔다. 전 세계에는 위스키, 럼, 테킬라, 아가베, 진, 칼바도스, 코냑, 시드르, 와인 등등 소주와 맥주의 형제들이 아주 많은데 이들을 등한시했다. 이제부터라도 이 술들에 사랑을 주고, 모두가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다. 모든 술은 형제니까 사이좋게 지내자! (이챠리바쵸-데- : 한번 만나면 형제")" - P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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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위의 직관주의자 - 단순하고 사소한 생각, 디자인
박찬휘 지음 / 싱긋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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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첨단의 기술이 집약된 자동차는 시대의 흐름과 기술의 진보를 가장 직접적이고 가시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 이런 대상의 외관을 기능뿐 아니라 심미적 요소, 지역적인 특징 등을 고려하여 완성해야 하는 디자이너의 시각은 단순히 예쁘면 되지에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을 쓴 작가 분은 이름만 들으면 아아 하고 말할만한 곳에서 공부하고 일한, 현재 전기 자동차 회사의 수석디자이너이다.


 개인적으로 inspirational writing을 읽는 것에 취약하다. 청개구리 애티튜드가 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할 것이다’, ‘~해야 한다라고 쓰인 글을 보면 내가 왜?!”라는 질문부터 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몇몇 부분에서도 ?”라는 질문에 빠지기도 했다. 혹여 인생의 지침서가 아닐까 하는 기우 때문이기도 했는데 읽다 보니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과 디자인이 가진 특색, 그리고 작가 분의 경험을 통한 깨달음이 정리되어 있는 책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특히 가장 직관적인 글에 마음이 많이 갔는데 1장 중 디자인과 예술의 차이를 정의하는 부분에서 그동안 디자인이 예술의 일부라고 생각했던 것이 해소되었다. “인간은 의지와 감정을 재료로 진정성을 담아 예술을 창작하며, 그로써 위로 받아야 한다. (63)”는 문구는 창작이 가지는 무게감에 대해 말한다. 혁신과 진보를 보여주되 세상에 타협하는 적정성을 가져야 하며, 그 안에 인간성을 함축해야 인정받는 것이 디자인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작가는 현대 디자인에 대한 자조와 나아갈 길에 대해서도 고민한다. 그러면서 현재 대한민국의 교육체계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고, 하나의 틀에 자신을 맞추는 것보다 생각과 태도의 다각화에 대해서 언급하기도 한다. 경험을 기반으로 한 깨달음과 철학적인 사유 등이 잘 어우러져 있어, 읽으면서 과연 이 책이 자동차 디자이너가 쓴 책인가 하며 놀라게 된다.


 잉여된 관계보다 고독이 필요하다.” (172)

 

 비록 북스타그램이라는 이름 하에 글을 쓰고 있고 좋아요의 수에 글의 성과를 의지하는 입장에 놓여있지만 이 작은 틀 안에 묶여있는 개개인의 현실에 대해서 고민하였다. 과연 우리는 독자성과 개성을 유지하며 살고 있을까? 자신을 찾기 위해서는 고독을 통해 각성해야 한다는 이 문구를 되뇌어 본다. 스마트폰이라는 작은 세상 속에서 타인의 삶을 나에게 빗대며 자존감이 점점 작아지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 현실에 대한 반성 또한 말이다.


 책의 표지처럼 단순하고 사소한 생각직관적으로 쓴 것 같지만 읽다 보면 생각이 많아진다. 읽고 나서 더 나은 생각의 길로 향하게 된다는 건 그만큼 좋은 글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니 천천히 완독하고 또 재독하면 좋을 것이라 생각된다.


"디자인은 시공을 초월한 단정함을 이루는 일이다."

- P23

"예술은 구구절절 사연을 가져도 되지만, 디자인은 이러저러한 설명이 추가되는 순간 이미 망했다고 봐야 한다. 희망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예술가와 디자이너가 하는 일은 관객이든 고객이든 그들의 감동을 자아내기 위해 아무것도 없는 공간과 백지에 ‘신상’ ‘신작’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디자인이 예술의 범주에 속해 있다거나 디자인과 예술을 같은 영역으로 착각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 P45

"디자인이 온전히 빈 종이 위의 ‘창조’보다 타협’의 일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새로운 것에 대한 해결책을 상상으로 ‘답변’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에 대한 ‘질문’에서 찾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질문이 긍정적 방향을 취할 때 더욱더 긍정적인 답변을 얻게 되는 법이다. 세상이 유토피아를 건너 디스토피아의 암흑으로 빠져나갈지 아닐지는 우리의 긍정의 힘에 달려 있다."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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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사람이다 - 꽃 내음 그윽한 풀꽃문학관 편지
나태주 지음 / 샘터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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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참 이상하다. 봄이 오는 건지, 아직 겨울이라고 외치는 건지, 오늘은 영하 5, 내일은 영상 15도 오락가락 하는 날씨가 반복되다 보니 땅 속에 잠자고 있는 씨앗들도 고민하고 있겠구나 싶다. 그래도 살 에이는 추위와는 달리 볼에 와 닿는 바람의 느낌이 사뭇 보드랍다.


봄과 함께 <꽃 내음 그윽한 풀꽃문학관 편지>라고 정겹게 부제가 붙여진 책 <꽃이 사람이다>를 받았다. 광화문 광장 금빛 건물에 크게 붙여진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라는 시 <풀꽃>으로 친숙한 나태주 시인의 산문집이다.


충남 공주에 위치한 풀꽃문학관에서 보내는 따뜻한 일상을 머위꽃, 민들레, 벚꽃과 같은 꽃들과 개구리, 스승님, 디딤돌, 거리 등 정겨운 소재를 통해 그리고 있다. 몇몇 꽃들의 이름은 참 생소하다. 도시 한가운데에서 자란 나에게 익숙한 꽃은 그나마 개나리, 진달래, 심지어 진달래는 철쭉과도 헷갈릴 정도이고, 피면 피었거니 지면 지겠거니 하며 참 무심했다.


글을 읽으며 잊었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동네언니오빠들을 따라 진달래를 따서 꿀 먹은 것, 그리고 사루비아라는 꽃의 꿀은 더 맛있다는 것을 배운 것이다. 진홍빛 사루비아 꽃씨를 사서 키워보고 싶었는데 엄마가 우리 집은 지하실이라 햇볕이 들지 않으니까 소용없을 거라고 했던 말에 볕이 잘 드는 길가에 있을 법한 사루비아를 찾아 다녔던 기억도 난다.


예술을 하는 분들의 감각은 남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때론 너무 난해해서 생각의 단계를 몇 번 거쳐야 나올 것 같은 작품들도 있다. 하지만 작가님의 작품은 직관적이다. 돌려 말함 없이 마음 속 느낌 그대로 표현한 문장들이 책 속에 가득하다. 이 차가운 세상에서 그냥 지나칠만한 것들도 시선을 나눠주고 이름과 의미를 붙여주는 것에 그간 지친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이 책을 받아 읽는 중 교통사고가 났다. 단순 충돌이라 생각했는데 얼마 안 가 온몸이 아프기 시작하더니 머리가 너무 아파서 무엇 하나 집중하기가 참 힘들었다.


그래도 가방 속에 이 책을 꼭 가지고 다녔다. 틈틈이 문장을 읽고 선 하나하나 다른 색으로 예쁘게 칠한 삽화를 들여다 보았다. 책 속 문장이 곧 위로였고 약이 됐다. 꽃들도 땅속에 한껏 웅크리고 있다가 자신만의 예쁨을 봄볕에 틔우며 뽐내지 않은가.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는데 역시 책이 큰 위로가 되니 내 세상은 언제나 봄 같아 좋다.


#서평단


"올해도 내가 살아서 봄의 사람인 것이 그럴 수 없이 고맙고 기쁘다."

- P23

"그 정성과 생명력이 얼마나 기특한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그저 잡풀이라고 눈여겨보지도 않고 그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해 주지 않지만, 계절의 변화에 따라 어김없이 꽃을 피우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꽃이다. 사람이 알아주거나 말거나 저들의 삶을 사는 것이다." - P118

"얘들아, 좋은 봄이야. 너희들이 추운 겨울을 벌벌 떨면서 지켜주고 견뎌줘서 찾아온 봄이야. 너희들이 만들어준 봄이라고 할 수 있겠지. 너희들도 이 좋은 봄날 한철 예쁘게 꽃을 피우면서 잘 놀다가 가거라. 분명 민들레들도 내 말을 속으로 알아들었을 것이라 믿는다."
- P106

"눈여겨보는 사람에게만 봄은 봄이고, 미세하게 느끼는 사람에게만 봄은 봄이고, 또 마음을 다해 기다리는 사람에게만 봄은 봄이다."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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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국 인문 기행 나의 인문 기행
서경식 지음, 최재혁 옮김 / 반비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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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기행문을 보며 가슴이 먹먹하고 목이 메인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까. 읽는 내내 고국을 떠나 생활하는 내 가족과 지인들이 떠올랐다. 한국인이라는 정체성과 외국인 노동자이자 이방인이라는 두 가지 명찰을 지니고 살아야 하는 그들의 깊은 고독감을 나는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공감empathy과 연민sympathy이라는 인간 고유의 감정을 생각하노라면 서경식 작가님의 유작인 이 책의 내용이 아프게 다가올 수 밖에 없었다.

 인권단체 방문만으로 말할 수 없이 지쳤지만, 미술관이라는 특별한 장소가 피로를 배가시켰다. 좋은 작품과 만나기라도 하면, 흥분 지수가 올라서 내 쪽에서 기가 빨리는 듯한 피곤함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디를 가도 미술관에 들르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 일종의 병적인 심리 상태이다.” (99)

 작가님의 미국기행은 시간을 오간다. 군사독재 정권 아래 감옥에 있었던 두 형(서승, 서준식)을 비롯한 한국의 양심수에 대한 지원을 호소한 1980년대 여행부터, 트럼프가 위대한 미국이라는 기조 하에 이방인에 대한 차별을 캠페인으로 앞세워 대통령이 되었던 2016년까지.

그 가운데에는 늘 예술이 존재한다. 마치 이성으로 쌓인 좌뇌의 스트레스를 예술의 우뇌로 해소하는 것 같다.

 서구를 중심으로 한 범유럽 세계의 지도자와 주류 미디어, 체제 친화적 지식인의 레토릭에는 자신의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보편주의에 호소하려는 언사가 넘쳐난다. 그들이 타자(상대적으로 빈곤하며 발전도상에 있는 국가의 국민)’와 관련된 정책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특히 그러하다.” (137)

이 글을 읽으며 (위험한 인상을 주는 질문일 수 있으나) 민주주의의 진정한 정의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일종의 허상이 아닌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을 위하여 정치를 행하는 제도라고 하지만, 이 명분 하에 작가님의 두 형은 인혁당 사건으로 말미암아 부당한 옥살이를 하며 생사를 오가는 옥고를 치뤄야만 했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민주화 운동을 하던 이들을 빨갱이스파이로 규정짓고 사형을 선고하며 소위 사법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작가님이 다녀온 미국 역시 미국(국제금융자본)이 제3세계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쌓아나간 부정과 비리의 역사가 자리하지만, 그 사실에는 굳게 입 다문 채 미국 본위의 서사를 이야기하고 (217)”있는 모순이 자리잡고 있다.

선한 아메리카란 과연 존재하는가? 인종차별주의자 대통령의 당선에 맞서 모마는 입국금지조치가 내려진 7개국 출신 화가의 작품전을 기획했다. 이런 투쟁에 대하여 예술은 언제나 어떤 악몽의 시대에도 관용, 연대, 공감을 추구하려는 인문 정신이 살아 있음을 가르쳐준다. (157)”라고 말하며 예술에게 남겨진 과제를 언급한다.

 사람은 승리를 약속 받았기에 싸우는 것이 아니다. 넘쳐나는 불의가 승리하기 때문에 정의에 대해 되묻고, 허위가 뒤덮고 있기에 진실을 위해 싸운다. 단적으로 말해 사이드는 우리에게 현대를 살아가는 자에게 있어 도덕의 거처는 어디에 있는지 묻는다.” (233)

 

 작품의 원고를 정리할 무렵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의 학살이 심화되고 있었다. 자신과 동일한 자기 분열 상태(243)의 정체성을 가진 에드워드 사이드를 통해 작가님은 다양한 형태로 확산되는 이산디아스포라에 대해 이야기한다. 책 속 사코의 말을 인용하자면 전쟁이란 자유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큰 부자가 되기 위한 짓거리(175)”이다. 자유와 평화를 위한 시작인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갈등은 사실 누군가의 잇속을 위한 것이며, 이로 인해 고통 받는 것은 나약한 군중일 뿐이다.

  이 책의 번역가인 최재혁 님이 남긴 여는 글 F. 후나하시 유코(서경식 작가님의 파트너) 선생이 조문객에게 건낸 인사말 중 한 문장이 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는 인간으로서의 죄를 두고 내내 괴로워한 사람이었습니다.” (9)

 이 문장을 통해 영화 <그린마일>에서 흑인이고 살인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억울한 누명을 쓴 뒤 확실한 증거 없이 사형을 선고 받았던 존 커피(John Coffey)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는 사형집행 직전 자신의 결백을 알고 있는 간수들에게 말한다.

“I’m tired, boss. … Mostly I’m tired of people being ugly to each other. I’m tired of all the pain I feel and hear in the world, every day. There’s too much of it. It’s like pieces of glass in my head, all the time”. 라고 하며 잔혹한 세상에 고통 받아 지쳤기에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인다. 영화의 극적인 장면을 작가님에게 대입하기엔 과한 감이 적지 않으나 그의 고뇌하던 삶이 투영되는 것 같았다.

이 책은 작가님의 유고작이자 나에게 있어 서경식이라는 분을 알게 해 준 첫 작품이다.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듯 그의 과거 작품을 하나씩 읽어보려 한다. 그것이 진정한 애도라 생각하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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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용어의 탄생 - 역사의 행간에서 찾은 근대문명의 키워드
윤혜준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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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이 패권을 잡기 시작한 2차 세계대전 이전 세계 권력의 중심은 대영제국, 즉 영국이었다. 책의 머리말에 언급된 것과 같이 “‘시대는 영국을 기준으로 영국이 근대로 이행할 준비 단계인 17세기부터 해가 지지 않는제국주의 전성시대인 19세기까지가 중심축 (8)”이며 그 중심은 18세기에 있다. 오늘날 흔히 사용하는 단어의 탄생배경과 의미의 변화 등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아래의 작가 소개 글에 쓰여진 것과 같이 오랜 시간 공들여 쓰여진 산물이므로 여타 단어의 정의를 그린 책들과는 구분하여 읽어야 할 것이다.


 지난 30여 년간, 서구 근대문명에 대한 종합적이고 깊이 있는 탐구를 시도하며 문학과 함께 역

사와 철학을, 그리고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함께 공부해온 내력과 결실이 이 책에 담겨있다.” (책 날개글의 저자 윤혜준 소개 중)

 

 알파벳 순서대로 미국(America)으로 시작하여 비즈니스(business), 자본주의(capitalism)를 거쳐 마지막 유토피아(utopia)까지 24개의 근대 용어를 역사와 함께 설명하는데, 그 단어가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도 화두를 던져주기 때문에 단어가 가지는 영향력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democracy, 99)라는 주제에서 첫 문장을 헌법 제1조 제1항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로 시작하며 북한, 중국의 공식명칭 속에도 민()과 주()가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이를 통해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내려야 할지 스스로 가볍게라도 생각해본 뒤 본격적인 내용을 접하며 환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각각 단어가 현재 우리 사회에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대해서도 스스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인 근대문명의 키워드들은 바로 이와 같은 비코식 탐구의 이정표다. 각 이정표는 말들이 쓰이고 행동한 역사적 실상으로 독자를 이끈다. 비코가 말한 그대로 특정 시간들 속에서 특정 방식으로 탄생된원문들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것이 저자의 역할이다. 저자는 역사를 주관하는 그분의 섭리를 말할 자격까지 감히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행간에서 그것을 읽어낼 여지는 남겨두었다.” (머리말 12)

 

 얼핏 사전이라 오해할 수 있으나 이 책은 흐름을 제시한다. 고로, 읽는 이들은 그 흐름을 타고 학습하고 이해하며 인용하고 활용하면 될 것이라 생각된다.


 단어를 깊이 있기 이해하면 멋진 문장을 구사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나와 같은 인문학을 사랑하는 독자 외에도 취직이나 이직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이 책이 입사 면접이나 구술시험, 논술 등에 큰 도움을 주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심화 토론의 주제 속에 언급되는 단어들을 심도 있게 학습했다는 것만으로도 큰 점수를 받지 않을까…?!

 

 경제활동의 일환으로 소비가 정당화되기 시작하던 시대에 도덕적 소비의 중요성을 강조한 운동도 함께 등장했다는 사실은 시장경제에 기초한 사회가 단순히 자본의 논리로 매사를 정당화하는 자본주의만을 추앙하지 않음을 상기시킨다. (84-85소비consump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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