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헌영 평전 역사 인물 찾기 27
안재성 지음 / 실천문학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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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박헌영이라는 이름을 처음알게 된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김두한을 비롯한 극우파 미화 논란이 심했던 드라마 야인시대를 정주행 하면서 부터였다.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박헌영이 첫등장 했던 것은 50화 이후 해방정국 파트였고 거기서 그려진 박헌영의 모습은 말 그대로 '김두한의 친구 정진영을 공산주의에 세뇌시켜 남조선을 공산화 시키려는 사악한 빨갱이'였다. 박헌영이라는 존재가 궁굼했던 나는 위키피디아를 비롯한 인터넷에서 그의 정보를 찾아보았다.


 그러던 중 대학 동기 형의 추천으로 드라마 서울1945를 보게 됐는데 거기서도 박헌영이 등장했었다. 드라마 서울 1945는 일제시대와 해방전후사 그리고 한국전쟁까지의 우리 현대사를 좀 더 균형적인 시각에서 다룬 수작이었기에 박헌영을 '김일성과 더불어 한국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비판을 했지만 독립운동가와 사회주의 혁명가로써의 박헌영'도 나름 중립적인 시각에서 조명했었다.

서울 1945에서 신구할아버지가 연기한 여운형 선생에 매우 감명받았던 나는 2015년 부터 몽양 여운형 선생을 매우 존경하게 되었지만 일제시대때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이끌고 해방 이후 사회주의자들의 우상이기도 했던 박헌영에 대해 나름의 호기심을 갖기도 했었다.


 2015년 말에서 2016년 초 나는 청년독립군이라는 학생단체에서 한 5,6개월 정도 있었고 각종 시위에도 열심히 참가했었다. 청년독립군에서 활동하면서 청년독립군쪽 NL성향이 강한 분들과 항상 상반되는 견해를 가진 주제가 있었다. 하나는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이었고 다른하나는 한국전쟁 이후 김일성이 단행한 박헌영 숙청에 대해 바라보는 시각이었다. 당시 내가 가지고 있던 관점은 "박헌영은 억울하게 숙청된 사회주의 혁명가"였다. 2016년 3월 초 일본 도쿄 여행을 떠나기전 박헌영 평전을 구매했고 5박6일간의 도쿄 자유여행을 마친뒤 돌아온 첫째날 부터 안재성 저자의 박현영 평전을 펼쳤고 주말 오전 편의점 알바를 했던 나는 편의점 알바중에도 이 책을 매우 재밌게 읽었다. 당시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깨우쳤던 진실의 감격을 잊을 수 없었고 서평을 적어보고 싶었기에 오늘 이 책의 서평을 쓰게 됐다.


1. 박헌영 일대기


박헌영은 1900년 충남의 몰락한 양반집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 학업성적이 좋은 박헌영은 대흥소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고보에 진학했고 YMCA에서 활동하기도 했었다. YMCA에서 영어를 알게된 박헌영은 10대 후반에 미국유학을 준비하기도 했었다. 1919년 전국적으로 3.1운동이 일어나자 박헌영도 3.1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퇴학될 위기에도 몰렸었지만 퇴학은 모면했고 간신히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유학 준비에 열을 가했다. 미국유학이 매우 어렵다는 현실을 직시한 박헌영은 미국유학의 꿈을 포기한뒤 1920년 상하이로 망명했다.


중국상하이 망명생활중 후에 동지가 될 김단야와 임원근을 만났고 1921년 독립운동을 하던 중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에 입당했다. 1922년 여운형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 피압박 민족대회에 참가했고 국내로 귀국하게된 박헌영은 1925년 주세죽과 결혼했고 경성의 유명한 중국집 아서원에서 조봉암을 비롯한 동지돌과 함께 조선공산당을 창당했다. 1925년 제1차 공산당검거사건이 터졌을 당시 상해에 있던 여운형과 모스크바에 있던 조봉암에게 보내려고 했던 보고서가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면서 재판기간 도중 고문을 받기도 했다. 당시 재판 기간 도중 박헌영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똥까지 먹어가며 미친척을 제대로 했고 결국 1927년 11월 석방됐다. 


이듬해인 1928년 박헌영은 아내 주세죽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출했고 모스크바로 가던 중 딸 박비비안나가 태어났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박헌영은 1929년 엘리트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국제 레닌학교에서 유학했고 이 시기에 박헌영은 자신의 호를 이정이라 지었다. 1931년 박헌영은 모스크바를 떠나 상해로 갔고 1932년 윤봉길의사의 4.29의거 이후 상해에서 일본경찰에게 체포된 뒤 국내로 압송됐다. 재판에서 6년형을 받았으나 5년만인 1939년 석방됐다. 1939년 석방된 박헌영은 이관술, 김삼룡과 함께 경성콤그룹을 창설했다. 경성콤그룹을 창설한 박헌영은 비밀활동을 계속하며 소련쪽과 교신하면서 기관지를 발행하는등 여러 사회주의적 활동을 비밀리에 하였다. 1941년 경성콤그룹이 일제의 검거로 해체되었고 박헌영은 전라도 광주로 피신했고 태평양 전쟁시기 광주 벽돌공으로 위장하여 1945년 일제가 패망할 때 까지 자신의 몸을 숨겼다.


1945년 서울로 올라온 박헌영은 처음에는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와 협력했지만 여운형과의 의견 갈등을 빚었고 결국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게 되었다. 해방 이후 박헌영의 노선은 대체로 소련의 노선을 고수했고 폭력투쟁노선를 고수했다. 1945년 12월 박헌영과 조선 공산당은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국내에서 소련의 노선을 지지하는 바람에 한민당을 비롯한 친일세력으로 부터 민족반역자 취급받으며 공격받기도 했다. 1946년 3월 제1차 미소공동회의 당시 박헌영은 미소공동회의를 지지했지만 제1차 미소공동회의가 결렬되자 다시 노선을 폭력투쟁으로 전환했다. 1946년 여름 정판사 사건으로 조선공산당이 탄압받았지만 신전술이라는 강경한 대중투쟁 노선을 바꾸지는 않았다. 1946년 미군정 아래 여운형과 김규식의 좌우합작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박헌영은 이승만 세력과 마찬가지로 좌우합작을 방해했고 이는 결국 좌우합작운동이 실패로 끝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한편으론 박헌영을 따라 조선공산당은 미군정에 맞서 파업과 투쟁을 계속했고 그 상황에서 박헌영은 월북했지만 9월 총파업과 대구10,1사건과 같이 미군정에 맞선 대투쟁이 남한에서 일어났다. 


1946년 11월 박헌영은 남로당을 창설했지만 1946년부터 3.8선을 왔다갔다하다 북한에 정착했다. 1947년 여운형이 암살된 뒤 남북은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쪽으로 흘러갔고 1948년 4월 박헌영의 남로당 세력이 제주4.3 봉기를 일으키기도 했지만 1948년 8월에는대한민국이 9월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됬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상은 김일성이 부수상은 박헌영이 선출되었다. 1948년 정부수립이후 김일성과 박헌영은 전쟁으로 인한 통일을 생각하게 됐지만 초반에 스탈린은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1949년 국공내전이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이 승리하고 1950년 미국의 애치슨 라인에서 한국이 제외되면서 스탈린은 남침을 허용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전쟁이 시작되는 동시에 남조선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날 것이다"라고 희망없는 거짓말을 했다. 박헌영의 말을 믿은 김일성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은 기습 남침했다. 전쟁초기 T-34전차를 앞세운 인민군은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계속 거침없이 진격했다. 미군과 유엔군의 지상부대가 참전했지만 8월에는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다. 그러나 전쟁기간동안 남한내에서는 민중봉기가 일어나지 않았고 1950년 9월 15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은 밀렸고 10월 25일 중국군의 참전으로 1951년 초 38선 부분까지 유엔군을 몰아냄으로써 전쟁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박헌영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국내의 빨치산 세력은 남한내에서 게릴라 투쟁을 전개하다가 결국 대부분이 소탕당했다.


박현영의 거짓말에 분노한 김일성은 1953년 그를 체포했고 박헌영을 미제 간첩으로 몰았다. 그의 측근이라 할수 있는 리승엽과 이강국은 미제 간첩혐의로 숙청됐고 북한내에 있던 남로당 세력들은 1955년 쯤에 사실상 씨가 말렸다. 남로당 세력이 사실상 전멸했음에도 소련과 중국의 압박으로 김일성은 박헌영을 쉽게 죽이지 못했지만 1956년 종파사건 이후 김일성이 연안파와 소련파를 대대적으로 숙청을 하면서 박헌영도 1956년 12월에 총살당한다.


2.박헌영은 미제 간첩일까?


박헌영은 남한에서는 빨갱이 북한에서는 미제스파이로 비판받는 인물이다. 남북모두에게 잊혀졌기에 남북 모두다 제대로된 연구를 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지지 못했다. 그렇다 할지라도 북한의 박헌영 미제 스파이론과 심지어 그가 일제시대부터 일제와 미제에 빌붙어 간첩노릇을 해왔다는 이중첩자론은 입증할 근거가 희박하다. 저자 안재성씨는 수많은 자료를 토대로 하여 박헌영의 미제 간첩론을 반박했다. 북한이 제시한 자료중엔 "1941년 광주의 벽돌공으로 숨기전 미제간첩질을 하다 자기 혼자 살기위해 일제에게 동료들을 팔아먹은 뒤 도망쳤다."는 허무맹랑한 자료도 있을 정도다.이 글을 반박하자면 1941년은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공격하여 미국하고 전쟁을 사작하게 되는 시기인데다가 박헌영이 미제간첩이기때문에 적국 일제에게 동료들을 팔아먹는다는 설정자체가 오류고 일제에게 팔아먹었는데 일제를 피해 광주의 벽돌공으로 위장한다는 설정 자체부터가 오류다. 이렇듯 북한에서 제시한 미제간첩론은 터무니 없는 주장들이 많다.


 북한말대로 박헌영이 미제간첩이라면 도데체 어떻게 1929년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에서 유학하고 1948년 북한의 부수상 자리에 오르고 북한에서 숙청되고 난뒤 왜 남한에서는 미제를 위해 간첩질을 한 박헌영이 어떻게 칭찬받지 않고 빨갱이라 욕을 먹는 것에 대해 도데체 어떻게 설명이 가능한걸까? 따라서 박헌영은 미제 간첩일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보고 개인적으로 박헌영은 미제간첩이 아니라고 본다. 즉 북한의 주장은 근거가 부족하고 오히려 미제 스파이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쪽이 더 논리적으로 사실에 가깝다.


3. 글을 마치며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청년독립군 내에서 김일성의 박헌영 숙청에 대한 입장에서 갈등하면서 부터 정말 북한의 주장이 맞는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한국전쟁 이후 김일성 정권이 박헌영을 비롯한 수많은 사회주의 혁명가들을 숙청하면서 일인독재를 구축했다는 사실을 잘 알게 됐다. 책을 보다보면 당시 조선의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사진과 이력을 정리한 페이지가 나오는데 거기 나온 인물중에 70%는 북한정권에서 숙청된 인물들이었다. 북한 정권이 그들을 제거하기 위해 내세웠던 논리는 바로 스파이 혐의 였지만 과연 그들 중에 정말 미제간첩이 있기는 한건지 의심이 된다.


 무엇보다 일제시대부터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자신의 똥까짐 먹어가며 투쟁한 박헌영을 미제스파이로 모는 북한의 주장에 대한 나의 입장은 저자 안재성씨와 같은 입장이다. 거기다 한국전쟁 이후 북한정권에서 정적들을 숙청했던 방식이 1930년대 스탈린이 소련 공산당을 장악하고 나서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주체들을 하나 둘씩 숙청해나간 방식과 1940년 멕시코에서 죽은 트로츠키를 숙청한 스탈린의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는 사실 또한 알 수 있었다. 2년전 박헌영 미제 간첩론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주사파들의 주장에 매우 반대했던 나는 그들이 혐오스럽기 까지 했었다. 물론 현재는 그들의 입장도 나름 존중하는 쪽이다. 그러나 아닌것은 아니라고 얘기하고 싶고 한국전쟁 이후 김일성이 했던 스탈린주의식 정적 숙청에 대한 그들의 옹호를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이 책을 2년전에 읽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당시의 감정은 지금도 생생하다. 저자 안재성 선생의 필력이 매우 좋았기에 재밌게 그리고 이해하기 쉽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해방 이후 여운형의 좌우합작 운동 시기 좌우합작을 방해했던 박헌영의 행적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고 거기에 대한 비판 또한 없었던것 같다. 그래도 북한의 터무니 없는 주장을 반박하는 박헌영 관련 서적으로선 매우 좋은 책일 것이다. 조선의 사회주의자이자 혁명가인 박헌영을 알고 싶은 이에게 적극 권하고 싶은 책이다. 앞으로 박헌영 선생의 독립운동 업적이라도 어느정도 재조명 받기를 기대하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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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 이야기 - 다윈에서 뇌과학까지 생물학의 모든 것
김웅진 지음 / 행성B(행성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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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을 안읽어 봤지만 저자 김웅진이 종북주의자이기 때문에 별 한개준다. 이 저자 페이스북 들어가보면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에 대한 찬양이 국내에 있는 일반주사파들을 초월한다.

가장 웃긴 것은 미국국적을 가졌으면서 자신의 조국을 북조선이라 생각한다. 미국에서 받을 혜택은 다 받으면서 북빠질을 일삼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하다.

심지어 2016년 뉴스에서 김웅진의 북빠질을 보도했던적이 있는데 김웅진의 북빠질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런 저자가 남조선에 책을 파는것 자체가 웃긴일이다.

페이스북이나 인터넷에 김웅진 쳐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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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쓴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 세상에서 가장 쉬운 임승수의 마르크스 자본론 강의 원숭이도 이해하는 시리즈
임승수 지음 / 시대의창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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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마르크스나 레닌에 대해 보다 더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됐던 것은 3년전부터였다. 지금으로부터 2년전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은 2,3번씩 읽었지만 마르크스의 대표적인 저작이라 할 수 있는 자본론을 읽고는 싶었는데 너무나 압도적인 분량과 경제학 용어 때문에 읽을 염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임승수 선생의 원숭이도 이해할 수 있는 자본론이라는 책을 알게 되었다. 원숭이도 이해 할 수 있다는 말에 끌려 사서 읽게 되었고 책 내용에 매우 만족했다.

사실 난 전형적인 문돌이이기에 수학이나 경제학에 대해 굉장히 무지하다. 그런 내가 이 책의 내용을 웬만큼 이해 할 수 있었고 재밌게 읽었다. 매우 좋은 자본론 입문서다. 그러나 원숭이라는 단어를 자꾸만 보다보니 웬지 내가 이 책을 이해못하면 원숭이 보다 무식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까닭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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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자 김근태 평전 - 희망을 남기고 간 한 아름다운 투사의 생애
김삼웅 지음 / 현암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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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1,2년 전)까지만 해도 김근태라는 사람이 누군지 몰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무슨 일을 했는지 어떠한 일을 했는지 잘 몰랐던 것이다. 그러던 중 알라딘에서 김삼웅 선생의 서적들을 검색하다 내 눈에 가장 인상적으로 들어온 책 제목이 있었다. 바로 ‘민주주의자 김근태 평전’이다. 민주주의자라는 그 단어가 가장 끌렸다. 그리고 이 책을 사서 최근에야 읽게 됐다.


우선 김근태의 행적을 소개해볼까 한다. 김근태 그는 1947년 부산 소사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학교 교장선생님이었고 그 살기 힘든 시절 그의 집안 형편은 살만했다고 한다. 집안 형편은 먹고살 만 했지만 아버지의 직업이 교장선생이었기에 자주 이사를 하여 학교에 제대로 정착할 수 없었다. 그래도 성적은 우수했기에 1965년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 1965년은 박정희 정권이 한일회담을 단순히 경제적 이익을 위해 졸속으로 끝내려 했던 시기이다. 청년김근태는 박정희 정권이 졸속 협상에 반대하여 다른 대학생들처럼 박정희 정권에 저항하였다.

한일협정 반대 학생운동에 참여하면서부터 김근태는 학생운동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1967년 서울대 상대 대의원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 해 9월 대통령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벌이다 연행됐고 학교에서 제적당한 뒤 군대로 끌려갔다. 1970년 병장으로 만기 전역한 김근태는 다시 학교에 복학했다. 그가 복학하기 무섭게 박정희는 장기집권을 위한 절차를 밟았고 김근태는 이에 반대하여 박정희 독재에 저항하였다. 1971년 그는 서울대 내란음모 사건으로 수배당했다. 그때부터 기나긴 수배 생활을 하였다. 수배 생활 도중 위장 취업하여 돈도 벌었고 후에 부인이될 민주화 동지인 인재근을 만나 결혼하였다. 1979년 박정희가 자신의 부하 김재규에게 총에 맞고 사망하였다. 18년간 지속되던 유신독재는 막을 내렸고 김근태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박정희 밑에서 세력을 키워나간 전두환을 비롯한 군부들은 12,12 쿠테타를 감행하고 1980년 광주를 피로 물들였다. 전두환 독재에 반대한 김근태는 1982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결성하고 초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때부터 김근태는 조직적으로 민주화운동을 전개해 나갔고 83년 기관지 <민주화의 길>을 창간하였다. 그러던 1985년 8월 서울대 민주화추진위 배후 조종 혐의로 체포되어 전기고문, 물고문, 통닭구이, 구타를 비롯한 인간으로서 버티기 힘든 아주 잔혹한 고문을 22일간 당한다. 그 잔인한 고문을 가장 악랄하게 한 이가 바로 이근안이다. 그 고문 사실은 후에 면회를 왔던 그의 아내 인재근 씨를 면회한 다음날 폭로되었다. 그러나 잔악한 전두환 정권은 그에게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여 5년형을 선고한다. 수감 중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일어나고 1987년 6.10민중항쟁으로 전두환 독재는 막을 내린다.

1988년 그는 2년 만에 석방되었고 옥중수기 [남영동]을 출간한다. 1989년 그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을 창설에 참여하여 정책실장을 맡는다. 그러던 1990년 민자당 반대시위를 하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2년형을 받고 1992년 석방된다. 그 뒤 여러 활동을 하다 1996년 제 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1997년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그리고 1999년 김근태는 국민정치연구회를 창립하여 지도위원을 맡고 2000년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으로 당선된다. 2002년 당시 대선에선 대통령 후보로 나왔다 노무현 후보에게 힘을 보태었고 노무현 대통령 당선 뒤 그는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로 선출됐다. 2004년 김근태는 보건복지부장관에 취임하여 약 2년간 가난한 사람들과 빈민들 노숙자들의 편의와 권리를 위해 헌신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했던 김근태지만 한미FTA협상당시 빈부적 양극화를 우려하여 노무현의 한미FTA협상에 반대 했고 국민들과 함께 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2008년 이명박 집권당시 한양대에서 한국정치학을 초빙교수로 강의 하였지만 이명박의 미국산 쇠고기 파동에 반대하여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에도 아주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그 외에도 많은 집회에 참가하여 힘없는 약자들 시민들을 위해 항상 투쟁하였다. 그러던 2011년 민주화 운동 당시 고문으로 생긴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2012년을 점령하라”라는 말을 남긴 채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김근태 그는 박정희 전두환 시절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고 민주화 이후에는 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해 서민들이 보다 더 잘사는 세상을 위해 헌신한 사람이다. 군사독재 하에서 그는 잔혹한 고문을 버텨냈고 그 이후 이 나라의 민주주의와 없는 이들을 위해 투쟁하였다. 2000년대 당시 그는 정치권에서 여러 직책을 지냈지만 절대로 사치를 즐긴 적이 없다. 부자들의 인기 스포츠 골프를 하지 않았고 매주 주말마다 동네 사람들과 축구를 즐겼다. 2004년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던 그는 노숙자 체험을 직접하며 그들의 고생을 덜어주기 위해 노력하였다. 뿐만 아니라 80년대 자기를 아주 잔인한 수법으로 고문했던 이근안을 넓은 마음으로 용서해주고자 했다. 만일 내가 김근태였으면 죽었다 깨어나도 용서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김근태는 용서했다. 이것이야 말로 김근태가 가장 대단한 이유라고 본다. 박정희 전두환 독재정권 시기에는 정치적인 민주주의를 위해 2000년대에는 못사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한 이가 바로 김근태다. 막심한 고문을 당했던 그의 과거와는 다르게 그는 항상 밟게 웃었다. 그리고 불의에는 항상 저항했다. 2008년 광우병 사태때 2009년 용산 참사때 그리고 그 외의 수많은 불의한 일이 벌어질 때 그는 투쟁을 지속했다. 김근태 평전을 집필하신 김삼웅 선생님의 목격담에 의하면 그는 시위도중에도 항상 젊은이들을 시민들을 챙겼고 추운 겨울에 집회할 때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따뜻한 커피와 음료를 옆 사람에게 다정다감하게 나눠줬다 한다. 그만큼 그는 친 서민적이었고 탈권위주의적이었다. 김근태가 죽기 전 그는 박근혜의 당선에 대한 예상을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보았고 “2012년을 점령하라”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염원과는 다르게 박근혜는 집권했고 대한민국을 박정희 시대로 몰고 갔다. 2016년 이대총장 사퇴시위로 시작된 박근혜 퇴진 집회로 국민들은 박근혜 정권을 몰아냈고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김근태는 2012년을 점령하라 했지만 우리는 2017년을 점령함으로써 그의 바람을 성공시켰다. 적어도 난 그렇게 믿고 싶다. 무튼 김근태 평전을 집필해주시고 일일이 자료를 김삼웅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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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메탈 자켓 : 스탠리 큐브릭 콜렉션 - [할인행사]
스탠리 큐브릭 감독, 아담 볼드윈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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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메탈 자켓 감상평



(주의 이 감상평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스텐리 큐브릭이 만든 영화 풀 메탈 자켓을 봤다. 베트남 전쟁을 주제로 만든 미국영화 중에는 지옥의 묵시록, 플래툰, 디어헌터와 같은 반전과 평화를 호소하는 명작 영화들이 많다. 큐브릭의 영화 풀 메탈 자켓도 명작 영화 부류에 속한다. 풀 메탈 자켓은 구성은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있다. 1부는 징집된 신병들이 거치는 8주간의 빡센 훈련소에서의 생활이고 2부는 구정공세 전후와 후에(Hue) 전투에 참전한 이야기다.



영화 첫 시작에서 징집된 병사들의 삭발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들의 앳된 얼굴은 대부분 겁에 질려 있거나 주눅 들어있는 얼굴이었고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은 그들의 겪게 될 운명을 암시하는 것만 같았다. 이는 마치 끈질긴 적 베트콩을 상대하다 지친 미군 병사들의 얼굴과 비슷해 보였다. 훈련소에 들어온 병사들은 시작부터 매우 권위적이고 스파르타적인 교관을 만나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욕설과 모욕을 받으며 8주간의 훈련을 받는다. 교관 하트먼 상사가 그들은 빡세게 훈련시키는 목적은 단 하나였다.



그들을 살인마로 만들어 지옥의 베트남으로 보내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교관 하트먼 상사는 병사들에게 “너들은 킬러가 될 것이다.”와 같은 말을 지속적으로 세뇌시키고 병사들은 “피 피 피 살인 살인 살인 혹은 우리는 적을 죽이기 위해 해병대로 태어날 것이다” 와 같은 구호를 지속적으로 반복한다. 징집된 병사 중 약간 덜떨어져 보이는 파일이라는 신병이 있었는데 그는 뚱뚱하다는 이유로 교관에게 뚱땡이라 불리고 교관의 빡센 훈련을 받을 때 마다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로 교관에게 인격모독과 협박 무시당한다. 결국 교관은 영화 주인공 조커이병에게 파일의 모든 것을 담당하게 했고 훌륭하게도 조커 이병은 파일에게 정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파일 이병도 점차 바뀌어 갔지만 어느 날 손발톱 검사하던 중 하트먼 교관은 파일 이병의 사물함에서 도넛을 발견했고 그때부터 파일이 잘못이나 실수할 때 마다 파일에게 얼차려를 주기보단 파일을 제외한 부대 전체에게 벌을 주었다. 그 결과 분노가 차오를 만큼 차오른 병사들은 새벽에 단체로 파일을 폭행했고 주인공 조커도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채 같이 동참해버린다. 그날 이후 파일 이병의 눈빛은 살기가 가득 찬 눈빛으로 바뀌어버렸고 파일 이병은 사격과 총기 손질에서 하트먼 상사에게 재능을 인정받는다.



8주후 자대배치를 앞둔 마지막 날 밤 불침번을 서고있던 주인공 조커는 화장실에서 파일 이병을 발견했다. 파일 이병은 큰소리를 외치며 총을 장전했고 자신을 살인괴물로 만든 하트먼 교관을 죽인 뒤 파일 이병 자신도 그 모든 배설물들이 모여드는 화장실에서 자살하며 1부가 끝난다.



1부가 끝나며 갑자기 배경은 베트남으로 바뀌며 2부가 시작된다. 종군기자가 된 주인공 조커는 따분한 군생활을 이어갔고 베트남 창녀와의 매춘과 방탕한 생활에 찌들어 있었다. 그러나 1968년 1월 31일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구정시기 전국적으로 대공세를 가하며 “베트남 전에서 이기고 있다는 미군의 선전”이 가짜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보여주었다. 종군기자인 조커는 후에로 가라는 상관의 명령을 받고 헬기에 오른다. 헬기에 오른 조커는 광기에 휩싸인 어느 미군병사를 목격한다.



헬기 기총사수는 민간인들에게 총을 쏘며 얘기한다.



미군병사: “죽어, 죽어, 죽어”



미군병사 “뛰는 놈들은 다 베트콩이고 안 뛰는 놈들은 고단수의 베트콩이야!!”



미군병사: “니들은 나에 대한 기사를 좀 실어봐”



주인공 조커: “내가 왜 당신에 대한 기사를 실어야 하지?”



미군병사: “왜나하면 나는 매우 끝내주니까! 내가 지금까지 죽인 베트콩이 157명이고 공식집계야! 50마리의 물소도 마찬가지고”



주인공 조커: “여자나 아이는?”



미군병사: “가끔”



주인공 조커: “어떻게 여자와 아이를 쏠 수 있지?”



미군병사: “왜냐고? 그들은 느려서 잡기 쉬우니까! 전쟁이 그런 거 아니야? 하하하하하”



광기에 휩싸여 군인과 민간인을 구분하지 않으며 학살했던 미군의 만행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 명장면이었던 것 같다. 후에 도시에 도착한 조커이병은 훈련소에서 만났던 동기를 만나 잠깐은 기뻤지만 그 기쁨은 잠시었고 전투에 휩싸인 후에에서 조커와 미군병사들은 죽음과의 공포와 싸우게 된다. (다 스포 할 수는 없으니 2부얘기는 여기까지)





이처럼 풀 메탈 자켓은 베트남 전쟁의 잔혹함과 광기 그리고 오직 적을 죽이기 위한 목적으로 평범한 인간을 살인기계로 만드려는 군대문화를 아주 예리하게 비판한 영화다. 어느 한 이병을 통해 군대문화와 군대폭력을 아주 예리하게 비판했고 전쟁의 광기에 휩싸여 적과 민간인을 구분안하고 헬기에서 M-60 기관총을 갈겨대는 어느 미군 병사를 통해 베트남 전쟁의 참상과 미군의 광기를 아주 예리하게 비판했다. 장면 하나하나 마다 정말 많은 메시지를 던져주는 영화였다.



개인적인 의견을 덧붙이자면 풀 메탈 자켓은 내가 본 베트남 전쟁 영화 중에서 단연 최고의 베트남 전 영화인 것 같다. 영화 풀 메탈 자켓은 베트남 전쟁의 참상을 비판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징병제와 군대문화를 예리하게 잘 분석했기 때문이다. 현재 징병제 문제로 신음하고 있는 대한민국 군대가 겪고 있는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를 감상 할 수 있는거 자체가 매우 영광이다. 앞으로도 두고두고 보게 될 영화다.



영화 점수는 10점 만점에 10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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