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민중사 세트 (2권 세트)
하워드 진 지음, 유강은 옮김 / 이후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지난 7월 노동자 연대에서 개최한 맑시즘에 참가했었다. 1년에 한 번씩 열리는 맑시즘에선 항상 북카페를 여는데, 그 북카페에서 파는 책들 중에는 위대한 혁명가 마르크스나 엥겔스 레닌이 쓴 사회주의 관련 혁명 서적들도 있지만, 노엄 촘스키나 하워드 진 같은 미국의 진보학자들이 쓴 책들도 적잖게 팔았다. 난 그중에 하워드 진이 쓴 미국민중사를 샀고, 맑시즘이 끝난 뒤 이 책을 읽었다. 책은 총2권으로 구성되어 있고 2권의 분량을 합치면 총 1200페이지나 된다. 올해 4월 하워드 진이 쓴 <만화로 보는 미국사>를 읽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던 나는 그가 쓴 <미국민중사> 또한 아주 감명 깊게 읽었다.

일반인들이 인식하는 미국의 역사는 대체로 미국 주류사회의 시각을 반영하는 것 같다.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한 미국의 역사, 유럽에서 종교적 박해를 받던 사람들이 자유와 신앙적 권리를 찾아 아메리카라는 땅을 찾아갔던 역사, 영국의 식민지배에 맞서 독립을 쟁취한 역사, 흑인 노예제에 반발하여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을 선언한 역사, 새 삶을 찾아 서쪽으로 향했던 자랑스러운 서부 개척의 역사,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연합국을 승리로 이끈 자랑스러운 미국의 역사.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나치독일과 일본을 패망시키고 파시즘으로부터 세상을 구한 미국의 역사, 소련이라는 공산 세력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킨 미국의 역사 그리고 이슬람 극단주의에 맞서 세계평화에 기여한 미국의 역사, 이게 바로 소위 미국사회와 한국의 자칭 보수주의자들과 미국의 주류역사학자들이 상상하는 미국의 역사일 것이다.

미국의 진보학자를 대표하는 하워드 진은 미국 주류사회와 주류학계가 주장하는 이와 같은 제국주의적인 시각과 “역사를 일부 정치인과 제국주의자들의 전유물”인냥 해석하는 시각을 단호히 배척하고 미국의 역사를 민중의 시각에서 해석하고자 했다. 즉 하워드 진은 미국의 역사를 일부 주류 정치인과 인물의 역사로 보지 않고, 신항로 개척시기 제국주의자들에게 억압받던 피지배계급과 노예들의 시각에서, 남자들에게 성적으로 사회적으로 차별받던 여성인민들의 시각에서, 백인사회로부터 노예화되어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았던 흑인 노예들의 시각에서, 스페인 미국 전쟁 당시 지배받던 쿠바인들의 시각에서, 산업화 시기 대자본가들에게 무제한 착취 받던 노동자들의 시각에서. 1차 세계대전 당시 사회주의 이론에 따라 전쟁에 반대 했던 미국 사회주의자들의 시각에서,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에 반대했던 평화주의자들의 시각에서, 1950년대 사회적으로 차별 받던 흑인들의 시각에서, 베트남 전쟁 시기 베트남 반전운동에 나섰던 반전 운동가들의 시각에서 그리고 미국의 폭격으로 가족과 이웃을 잃은 베트남 인민들 의 시각에서, 1990년대 미국의 제제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어 갔던 이라크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리고 9.11 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 당시 미군의 무차별 폭격을 받아 수많은 민간인이 죽어가는 것을 보았던 중동 인민의 관점에서 미국사를 서술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제대로 알지 못했거나(혹은 수박 겉핥기식으로 알았거나)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책의 내용을 얘기 해볼까 한다.

책의 첫 시작은 콜럼버스의 신항로 개척과 더불어 그 이면에 정복자 콜럼버스가 토착 원주민들에게 저지른 추악한 만행에 대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책을 읽다보면 우리가 알던 개척자 콜럼버스는 개척자가 아닌 정복자였다. 콜럼버스는 그 지역 원주민들을 무자비하게 노예로 부려먹고, 학살했으며, 원주민 부녀자들을 마음대로 겁탈했다. 콜럼버스와 그 일행의 악행으로 수많은 원주민들이 도륙됐다. 토착 원주민을 본 콜럼버스는 항해일지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내가 칼 한 자루 보여주자 아무 생각 없이 칼날을 쥐다가 손을 베이기도 했다. 이들에게는 철이 없다. 이들의 창은 막대기에 불과하다. 이들은 좋은 하인이 될 듯하다. 50명만 있으면 이들 모두 정복해서 마음껏 부릴 수 있을 것이다.”(미국민중사1 p.15)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17세기 들어서 유럽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미국이라는 나라에 건너 왔다. 미주대륙으로 이민 가게 된 이민자들은 노예를 대리고 왔고, 그 지역 원주민들을 노예로 부리려고도 했었다. 17세기 중후반 현재 미국의 버지니아 지역은 옥수수와 수출용 담배를 재배하기 위해 노동력을 필요로 했고, 따라서 자신들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노예를 필요로 했다. 여기서 엄청난 인권유린과 억압이 있었다.

“노예소유주들은 노동력 공급과 자기들의 생활방식을 유지하기 위해서 복잡하고 강력한 통제체제를 발전시켰다." "노예들은 규율을 배웠으며, '자신의 분수를 알고', 검은색을 종속의 징표로 보며, 주인의 힘을 경외하고, 자신의 개인적인 욕구를 버리고 주인의 이익을 자신의 이익이라 인식하도록 자신이 열등하다는 사고를 끊임없이 주입받았다. 법률의 힘과 감독의 직접적인 힘을 통해 태형, 단근질, 수족절단, 사형에 처하는 방법이 필요했다.”(미국민중사1 p.77)

1700년대 중후반이 되자 미국에서도 영국의 지배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게 결국 조지워싱턴을 비롯한 소위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미국의 독립을 선포하고 영국과의 전쟁을 선포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몇 년간의 전쟁을 통해 미국은 영국을 몰아냈다. 1776년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의 선포한 미국 독립선언서의 시작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신은 그들에게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몇 가지 권리를 부여했다.”라는 멋진 말과 함께 시작하지만, 미국을 건국한 소위 건국의 아버지들이 인식하는 평등에 개념은 참으로 저급한 수준이었다. 저자 하워드 진은 책에서 다음과 같은 자신의 견해 밝힌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훌륭한 균형을 이루려고 노력한 현명하고 공명정대한 사람들이었을까? 실제로 그들은 현상을 유지하는 것 즉 당시 지배세력 간의 균형을 제외하고는 다른 균형을 원하지 않았다. 확실히 그들은 노예와 주인, 무산자와 유산자, 인디언과 백인 간의 평등한 균형을 원하지 않았다.”(미국민중사1, p.186)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들은 독립선언서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신은 그들에게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몇 가지 권리를 부여했다.”라고 써놓고서 인디언들이나 흑인들 그리고 여성들에게는 평등한 인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19세기 들어서 미국 남부는 목화 산업으로 먹고 살았고, 따라서 미국 남부사회는 부를 축적하기 위해 흑인들을 노예로 부려 먹었다. 흑인들은 백인 지배계층에 의해 엄청난 착취와 억압(심지어 흑인 여성들은 백인 지배자들로부터 성적 노리개가 되기도 했다.)을 당했다. 남부의 비인권적인 흑인 착취에 맞서 흑인들을 해방시키고 구출하기 위한 흑인들의 투쟁도 전개됐지만 노예 제도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남북전쟁 시기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 링컨이 “노예 제도를 반대하여 흑인 노예를 해방시킨 영웅”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대통령 링컨은 그런 인간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연방주의자였다. 따라서 링컨은 연방을 유지하기 위해선 노예제 따위는 남부 연방 꼴통들에게 양보할 인간이었다.

“링컨은 1861년 3월의 취임연설에서 남부와 탈퇴한 주들을 회유했다. "나는 남부 주들에 존재하는 노예제도에 대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간섭할 의사가 없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내게는 그렇게 할 법적 권리가 없으며 또 그렇게 할 의향도 없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넉 달째 이어지면서 프레먼트 장군이 미주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연방에 저항하는 노예주인들의 노예는 자유인이 될 것이라고 말하자, 링컨은 이 훈령을 철회했다. 링컨은 메릴랜드, 켄터키, 미주리, 델라웨어 등 4개 노예주를 연방에 묶어두려고 안달이 나 있었다. 전쟁이 점점 격화되면서 사상자가 급증하고, 승리에 대한 절망감이 고조되고, 노예폐지론자들의 비판이 링컨을 떠받치는 너덜너덜한 연합세력을 갈가리 찢어 버릴 태세를 보이자, 링컨은 그제야 비로소 노예제를 반대하는 행동에 착수했다”(미국민중사1 p.333)

남북전쟁은 북부의 승리로 끝이 났다. 남북전쟁 이후 흑인들은 노예제도로 부터는 해방이 됐지만, 자본주의 치하에서의 “사실상 노예와 다를 게 없이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상황”에선 큰 개선이 없었다. 미국사회는 흑인뿐만 아니라 여성도 억압했다.(흑인이 투표권을 가진 것이 19세기인 데에 비해 여성은 1920년대 들어서 투표권이 생겼다.) 19세기 산업혁명의 여파에 따라 미국도 산업혁명의 영향을 받았다. 거기다 19세기 미국은 서부개척에 나섰고, 그 결과 엄청난 영토를 차지 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의 자본주의는 노동자들의 엄청난 착취와 억압을 토대로 하여 자라났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인권은 유보됐고,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대자본가들은 자신들의 부를 축척하기 위해서 더더욱 노동자들을 착취했다. 마치 19세기 산업혁명을 거친 유럽 국가들이 그랬듯이 말이다. 그와는 별개로 자신들의 땅을 빼앗긴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무장투쟁은 19세기 후반 까지 계속되었다. 1890년에는 운디드니라는 곳에서 백인들에 의해 수백 명의 원주민들이 무차별 학살당했다.

“인디언들은 서부의 평원에서 영원히 쫓겨났다. 1890년의 어느 추운 겨울날, 미 육군 병사들이 사우스다코타 주의 운디드니에 있는 인디언 막사를 습격해 300명의 남성과 여성, 어린이를 살해했다. 이 학살은 콜럼버스와 함께 시작된 400년간의 폭력 중에서 정점을 이루었고, 이로써 이 대륙은 백인들의 소유임이 굳어졌다.”(미국민중사1 p.504)

19세기 미국의 팽창은 서부개척으로 멈추지 않았다. 1867년 미국은 러시아가 소유하고 있던 알래스카를 저가에 매입했고, 1890년대에는 하와이 섬을 완벽히 합병했으며, 1898년에 터졌던 미국 스페인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쿠바를 사실상 미국의 식민지 국가로 만들었고, 필리핀 또한 미국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19세기 수많은 유럽 국가들이 제국주의국가가 되었듯이 미국 또한 제국주의국가가 되었다. 이런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쟁탈전이 거세지고 20세기 초에 들어서자 전 세계에 크나큰 전쟁의 먹구름이 나타났다. 1914년 유럽에서 터진 제1차 세계대전이 바로 그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그 나라를 중심으로 한 동맹국들에게 물자와 무기를 지원하며 그저 지켜만 봤다. 그러던 1917년 전쟁에 참전했고, 1918년 승리했다.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미국은 강대국으로 성장할 확실한 발판을 마련했다.

“1914년 미국은 경제불황에 시달렸지만 1915년에 이르면 연합국(대부분 영국)의 군수품 주문이 경제를 자극하면서 1917년 4월까지 20억 달러 이상의 상품이 연합국에 팔려 나갔다. 호프스테터의 말처럼, "미국은 전쟁과 번영의 숙명적인 결합 속에서 연합국들과 이해를 같이하게 됐다.”(미국민중사2 p.16)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은 그저 경제적인 호황을 누렸다. 1920년대는 과잉과 풍요 그리고 흑자 연속의 경제였다. 그걸 바탕으로 미국 정부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활동이 활발했던 노동자들의 파업과 투쟁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파업 주동자들과 투쟁한 노동자들을 쉽게 연행하고 구속시킬 수 있었다. 그러던 1929년 미국에게 최악의 위기가 닥쳤다. 경제대공황이 바로 그것이다. 경제대공황으로 인하여 미국은 적자와 실업이 극에 달했다.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경제적으로 궁핍해졌다. 1930년대 세계는 파시즘의 물결에 휩쓸렸다. 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킨 뒤 국제연맹에서 탈퇴했고, 1933년 독일에선 히틀러가 등장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났고, 1939년에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1940년엔 제국주의국가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군사적인 동맹을 맺고, 여러 나라를 침략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고, 나치독일과 일본을 패배시키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러나 그 기간 동안 미국 또한 엄청난 인권유린과 억압이 존재했다.

“제2차 대전 기간 동안 제정된 미국의 여러 정책 가운데 하나는 파시즘의 복사판에 가까운 것이었다. "루즈벨트는 1942년 2월에 대통령령 9066호에 조용히 서명함으로써 영장이나 기소절차, 심문과정 없이도 태평양 연안지역의 모든 일본계 미국인─11만 명의 남자, 여자, 어린이─을 체포해 그들이 살고 있는 집에서 소개시키고 내륙의 수용소로 이송해 감옥과 동일한 조건 아래 구금할 수 있는 권한을 군에 부여했다.”(미국민중사2 p.112)

“애국심과 전쟁 승리에 대한 전면적인 헌신이라는 압도적인 분위기가 넘쳐났고 미국노동연맹과 산업별조직회의가 무파업서약no-strike pledge까지 했지만, 기업의 이윤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데 반해 임금은 동결되는 데 좌절한 이 나라의 많은 노동자들은 파업을 벌였다. 전쟁 기간에 1만 4,000회의 파업이 벌어져 총 677만 명의 노동자가 참여했는데, 이것은 미국 역사상 어떤 시기보다도 더 많은 수치였다.”(미국민중사2 p.114)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소련과 경쟁하는 냉전체제에 돌입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자신들의 세력 유지를 위해 1947년 그리스 내전에 개입하여 진보정권이 권력을 잡지 못하도록 방해했고, 중국내전에선 국민당을 지원해줬다. 소련과의 경쟁이 시작됨에 따라 미국사회는 반공주의라는 광기에 휩싸였다. 거기다 1949년 중국의 국공내전이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의 승리로 끝이 나고,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미국 내의 반공주의는 극에 달했다. 자칭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반공이라는 명분아래 수많은 지식인들을 공산주의자로 낙인찍었고, 심지어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목숨을 잃기까지 했다.

“1950년에 공화당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나 '공산주의 전선'임이 드러난 조직을 등록시키기 위한 국가보안법Internal Security Act을 발의했을 때, 자유주의적 상원의원들은 이에 정면으로 대항하지 않았다." "1947년에 트루먼은 충성에 관한 대통령령을 반포, 법무부로 하여금 "전체주의나 파시즘, 공산주의, 정부전복의 성격을 갖거나 ····· 위헌적인 수단으로 미국의 정부형태를 바꾸려 하는 것으로" 확인된 조직들의 명단을 작성하도록 했다." 국가적인 반공 분위기를 고조시킨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은 1950년 여름에 있었던 줄리어스 로젠버그와 이설 로젠버그 부부에 대한 기소였다.”(미국민중사2 p.138-9)

냉전시기 미국의 군사개입은 한국전쟁에서 그치지 않았다. 1950년 한국전쟁에 개입했던 미국은 그로부터 15년 뒤 아시아에서 일어난 또 다른 전쟁에 개입했다. 그게 바로 베트남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베트남의 독립운동가 호치민은 독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베트남을 다시 식민지화하기 위해 들어왔고, 그 때문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났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가 대패하면서 끝났다. 그러나 도미노 이론에 빠져있던 미국은 베트남 문제에 개입했고, 남베트남의 반민중적인 응오딘지엠 정권을 지속적으로 후원했다. 그래도 남베트남 정권이 무너질 기미가 보이자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다. 최신식 무기를 동원한 미국은 베트남에 엄청난 폭탄을 퍼붓고 고엽제를 투하해가며 베트남 민간인에게 테러를 가했지만, 결국 호치민이 이끄는 민족주의 세력에게 패배했다. 세계 최강의 제국주의 국가가 베트남의 혁명적 민족주의 운동을 파괴하는데 실패함으로써 패배한 것이다.

“1964~1972년까지, 세계역사상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나라가 한 작은 농업국가의 혁명적 민족주의 운동을 파괴하기 위해 원자탄을 제외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군사적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패배했다. 이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에서는 일찍이 이 나라가 경험해보지 못한 거대한 반전운동이 있었고 이 운동은 전쟁을 종식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미국민중사2 p.207)

베트남 전쟁은 결국 1975년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승리로 끝났다. 이후 미국은 베트남 전쟁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1980년대 미국의 레이건 정부가 들어섰다. 레이건 정부는 다시 강력한 반공정책과 군비증강 하는데 있어서 온 노력을 기울였다. 뿐만 아니라 1970,80년대 미국은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명분아래 남미에 있는 수많은 우익독재국가들을 지원했다. 1991년 걸프전쟁을 일으킨 미국은 이라크군을 박살내면서 베트남 트라우마를 사막에다 묻어버렸다. 미국은 이라크를 경제적으로 봉쇄하여 무려 100만이나 되는(이중 50만은 어린이와 유아) 이라크인 들을 아사시켰다. 2001년 9.11테러가 일어나 무려 3000명이나 되는 무고한 민간인이 사망했다. 미국의 부시 정부는 이를 계기로 미제국을 또 한 번 발호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았다. 그래서 미국은 2001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고, 2003년 이라크를 침공했다. 그리고 이런 중동분쟁은 현재진행형이 되어버렸다.

“2001년 9·11 사태가 벌어지자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즉시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테러리스트들과 그들을 숨겨주는 나라들을 똑같이 다룰 것입니다." "의회는 헌법이 요구하는 선전포고 없이 군사행동에 착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시에게 부여하는 결의안을 서둘러 통과시켰다. 이 결의안은 상원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됐고 하원에서는 단 한 명─아프리카계 미국인인 캘리포니아 출신 바버라 리─만이 반대표를 던졌다.”(미국민중사2 p.552-3)

“곧이어 "의회에서 통과된 '미국애국자법'은 단순한 혐의만으로도 기소 없이, 그리고 헌법에 규정된 정당한 법 절차에 따른 권리 없이 시민권이 없는 사람들을 구금할 수 있는 권한을 법무부에 부여했다. 이 법에 따르면 국무장관은 어떤 집단이든 '테러리스트'로 지정할 수 있으며, 그런 조직의 성원이거나 자금을 제공한 사람을 체포하고 구금, 추방할 수 있었다.”(미국민중사2 p.557-8)

하워드 진의 미국민중사는 미국이라는 한 제국주의국가가 국내의 문제가 있을 때 마다 어떤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노동자의 파업투쟁과 다른 나라의 자주적인 역량을 어떻게 짓밟고, 자신들이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내세워 어떻게 그 이면에서 수많은 백색 독재국가들을 지원했는지를 아주 낱낱이 보여준다. 역사라는 학문을 한 인물과 정치집단 혹은 제국주의 국가의 전유물로만 생각하는 관점을 배척했고, 제국주의의 침략과 착취아래 고통 받고 억압받고 착취당하던 민중의 입장에서 재조명 했다.

지난 2015년 대한민국의 박근혜 정부는 “좌편향 교육은 잘못됐다.”는 시각을 가지고 국정교과서 사태를 초래했었다. 수많은 학자들이 반대했음에도 박근혜 정부는 이를 시행했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교과서 사태를 지지하던 일부 뉴라이트 계열 교수들과 극우집단들이 내세우던 논리는 아주 심플했다.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가 바로 그것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들은 역사라는 학문 자체를 국가주의라는 맹목적이고 전근대적인 사상에 그대로 대입해서 본 것이다. 역사는 정직하다. 정직하기 때문에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를 있는 그대로 사실에 근거하여 기록해야지 그들이 얘기하는 대로 단순히 자랑스러운 국가의 역사 따위를 일부 정치인들 입맛에 맞게 만들기 위해서 역사를 집필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일이다.

하워드진의 미국민중사를 읽으며 필자는 “역사라는 학문은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해야 하는가.”를 이 책을 통해서 제대로 배웠다. 미국민중사는 미국이라는 사회와 역사를 이해하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되는 책이다. 일부에선 이 책의 편향성을 문제 삼을 것이다. 하워드 진도 이 책을 쓰면서 그리고 책 후기에서 밝히는 대로 이 책은 철저히 억압받던 민중의 입장에서 서술된 책이기에 중립성을 보장하기 매우 힘들뿐더러 애초에 보장 할 수가 없는 책이다. 중요한건 이러한 문제를 인식해야한다는 중요한 교훈이지 중립성 따위의 문제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하워드 진의 말을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달리는 기차위에 중립은 없다(You Can't be Neutral on a Moving Tr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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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의 사상
토니 클리프 지음, 조효래 옮김 / 책갈피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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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115일 밤 독일의 자유군단은 한 여성을 체포하여 소총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쳐 살해했다. 그 여자가 바로 독일의 유명한 사회주의 사상가이자 혁명가인 로자 룩셈부르크다. 마르크스 전기 작가인 프란츠 메링은 로자 룩셈부르크를 마르크스 이후 최고의 사상가라고 주장했다. 20세기 스탈린과 스탈린체제에 반대했던 사회주의 계열 세력들은 5명의 사회주의 혁명가들로부터 사회주의의 정통성을 세우고자 했다. 그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정통성을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트로츠키 그리고 로자 룩셈부르크에서부터 찾았다. 이렇듯 로자 룩셈부르크가 사회주의자들에게 준 영향력은 적지 않다. 그렇다면 로자 룩셈부르크는 어떠한 인물이었을까?

 

1. 개혁이냐 혁명이냐

 

개혁이냐 혁명이냐 하는 쟁점은 현재도 사회주의자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 사이에서 큰 논쟁과 대립하게 되는 이유다. 현재 존재하는 진보세력들이 개혁과 혁명이라는 의제를 가지고 대립하듯이, 19세기와 20세기의 사회주의자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 또한 그러했다. 물론 작금의 사회주의자들이 추구하는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추구하는 사회민주주의는 19세기나 20세기 사회주의자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추구했던 세상과는 다르긴 하지만, 지금도 같은 주제를 가지고 대립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19세기 마르크스주의가 탄생한 이후 사회주의자들 중에는 에뚜아르뜨 베른슈타인이나 칼 카우츠키처럼 사회주의 사상을 수정하는 쪽을 택한 사람들이 생겼다. 이들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같은 당 내에 있으면서 수많은 논쟁을 거쳤고, 사상적인 부분에서 많은 대립을 겪었다.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소부르주아나 개량주의자들로 간주했고, 자신이 속한 당 내에서 사상적인 뜨거운 논쟁과 투쟁을 거치며 그들의 사상에 맞서 싸웠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그 시기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개량주의적인 관점과 관념론적인 이상을 비판하며 자본주의를 일부분 수정하는 개혁보다는 자본주의 체제를 갈아엎는 혁명을 추구했다. 실제로 로자 룩셈부르크는 1차세계대전 시기 혁명을 준비하기 위해 스파르타쿠스단을 비밀리에 조직하고 1차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인 191811월에 독일 혁명을 일으켰다. 즉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신의 사상을 실천에 옮겼던 것이다.

 

2. 제국주의 전쟁에 맞선 투쟁

 

1914년 유럽은 제1차세계대전이라는 먹구름에 휩싸였다. 이 전쟁으로 강대국인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 영국, 러시아, 오스만 제국과 같은 군사강국들이 죄다 참가했다. 19세기 산업혁명과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발전된 과학기술은 전쟁을 학살로 바꾸어 놓았다. 특히 기관총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는데, 그 시기 전쟁 지휘자들은 기관총을 처리하기 위해 구식 전법을 고집하는 바람에 기관총을 향해 돌격하는 병사들은 대량 학살당했다.(이런 짓거리를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할 거 없이 다 했다.) 그리고 이런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보충되는 병력은 자국의 노동계급으로부터 나왔다.

 

그러나 19141차세계대전이 터지자 제2인터내셔널에 있던 대다수의 지식인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자국 방어라는 논리를 내세워 제국주의 쟁탈 전쟁을 찬성했고, 선동했다. 이 시기 독일에 있던 로자 룩셈부르크는 전쟁에 반대했다. 당시 로자 룩셈부르크는 사회주의자는 제국주의와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고, 제국주의와 제국주의 전쟁을 종식시키려면 오직 문제의 원인인 자본주의를 타도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전쟁 찬성론자들의 입장에 반대하며 그들의 논리를 논파했다.

 

자본주의가 팽창하지 않고도 존속할 수 있다는 이론은 특정한 전술적 의도를 위한 이론적 정식화에 불과하다. 이 이론은 제국주의 국면을 역사적 필연으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결정적 투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소수 이해집단의 악의에 찬 발명품이라고 여긴다. 이 이론은 제국주의와 군국주의가 심지어 부르주아적 이해관계라는 측면에서도 손해를 끼친다는 사실을 부르주아지에게 인식시키려 한다. 이렇게 되면 쇠위 한 줌도 안 되는 이해집단을 고립시키고 프롤레타리아가 다수파 부르주아지와 동맹을 맺어서 제국주의를 억제하고 부분적 군축으로 약화시키고 독침을 제거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서 말이다. 쇠퇴기의 부르주아 자유주의가 무식한군주가 아니라 계몽된군주에게 호소한 것처럼 마르크스주의 중간파는 이제 비합리적부르주아지가 아니라 합리적부르주아지에게 제국주의라는 파멸적 정책을 버리고 군축을 위한 국제조약을 체결하라고, 세계 지배를 위한 무력 쟁탈전을 그치고 민주적인 국민국가들의 평화로운 연방 체제로 나아가라고 호소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와 자본주의 사이의 해묵은 원한, 즉 양자 간에 존재하는 커다란 모순의 해소가 자본가 국가들 간 제국주의적 모순의 완화를 위한 목가적 타협으로 해소된다는 것이다.”

 

제국주의 전쟁을 반대한 로자 룩셈부르크는 1차세계대전 당시 독일제국 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몇 년간의 감옥생활을 했지만, 전쟁이 끝날 때 까지 전쟁에 반대했다.

 

3. 자본의 축적

 

독일의 사회주의자이자 혁명가인 로자 룩셈부르크는 마르크스나 엥겔스 레닌과 더불어 수많은 글을 많이 집필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자본주의를 분석한 위대한 철학서적인 자본론을 집필했듯이, 로자 룩셈부르크 또한 자본주의를 분석한 서적을 썻다. 그것이 바로 자본의 축적이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저서 자본의 축적은 자본주의라는 체제가 잉여생산을 통해서 자본이라는 것을 어떠한 방법으로 축적해 나가는지를 분석한 책이다. 이 저작은 룩셈부르크의 주장에 대한 동의 여부를 떠나 의심의 여지 없이, “자본론이후 마르크스주의 경제 이론에 대한 가장 중요한 기여 가운데 하나이며 독창적인 저작이다.

 

그러나 이 책은 마르크스가 쓴 자본론을 잘 알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경제학 서적이자 철학 서적이라는 한계가 있다.

 

4. 로자 룩셈부르크를 생각하며

 

마르크스의 전기 작가인 프란츠 메링이 로자 룩셈부르크는 마르크스 이후 최고의 사상가라고 말한 것은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또한 로자 룩셈부르크는 지적 능력만을 노동계급의 운동에 바친 것은 아니었고, 로자 룩셈부르크는 모든 것, 곧 정렬, 강인, 한 의지 , 삶 자체를 바쳤다.

 

무엇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혁명을 추구하던 혁명적 사회주의자였다. 혁명적 사회주의의 위대한 지도자와 교사 중에서도 룩셈부르크는 독특한 역사적 위치를 점한다. 마르크스나 레닌 그리고 사회주의를 개인적으로 공부를 해봤지만, 로자 룩셈부르크를 깊이 공부해보진 못했다. 이번에 토니 클리프가 쓴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상이라는 책을 읽으며 현실에서 투쟁하며 실천하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혁명가적인 모습과 제국주의를 분석하며 비판하는 그녀의 글에서 정만 많은 걸 느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죽음이 너무나도 마음이 아팠고, 독일혁명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독일의 자유군단과 우익들에게 크나큰 분노를 느꼈다. 왜냐하면 그들의 반동적인 행태가 로자 룩셈부르크를 죽음으로 내몰았고, 그로부터 14년 뒤 최악의 독재자이자 대학살자인 아돌프 히틀러와 그가 이끄는 나치독일이라는 파시즘적인 국가를 건설하는데 이바지했기 때문이다.

 

토니 클리프가 쓴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상은 로자 룩셈부르크에 대해 입문하는 차원에서 읽어볼 가치가 있다. 이 책 또한 읽는 것에 비해 얻는 것이 많다. 다만 영국의 사회주의자 토니 클리프는 냉전시기 존재했던 사회주의 국가를 자본주의 국가로 규정하기에, 이 부분은 좀 걸러볼 필요가 있다. 그래도 로자 룩셈부르크를 알기위해선 읽어볼만하니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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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 전쟁의 기억과 분단의 미래
브루스 커밍스 지음, 조행복 옮김 / 현실문화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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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들어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의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최근에는 대통령 문재인이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고 난 뒤, 잠시 50% 중후반의 지지율에서 다시 70%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남북회담을 아주 극찬했다. 이로써 남북관계와 한반도 정세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2018년인 올해는 남북한 정부가 수립된 지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48815일에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고, 194899일에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됐다. 그리고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분단은 계속되고 있으며 아직까지는 휴전 상태다. 남북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지만, 일반 국민들의 인식하는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은 아직까지는 크게 달라지고 있지 않다. 즉 미국과 한국의 공식 견해인 스탈린의 지원을 받은 김일성이 1950625일 전쟁을 시작했는데 미국이 성공적으로 막아냈고 대한민국을 지켰다는 것이다.”로써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은 무조건 악으로만 간주되어야 하고, 대한민국은 선으로 간주돼야만 하는 시각에서만 바라보는 것 같다. 대체로 우리 국민들이 이해하고 있는 한국전쟁에 대한 인식이 아직은 거기까지 밖에 안 된다는 얘기다.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을 주제로 한 국내에서 출판된 논문이나 서적들 중에는 대체로 우익적이고 보수적인 시각이 반영된 것들이 많다.

 

작년 12월 한국전쟁에 대한 권위 있는 연구자이자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에 비판적인 브루스 커밍스의 새 책이 한글로 번역되어 출판됐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80년대 한국전쟁의 기원이라는 책의 저자로 유명한 브루스 커밍스가 2010년대 들어서 쓴 한국전쟁 서적이다. 분량은 그리 많지 않지만 한국전쟁의 핵심을 아주 잘 정리했고, 기존의 반공주의적인 시각에서 많이 벗어났다.

 

1. 미국에게는 잊혀진 전쟁

 

우리에게 있어서 6.25라고 불리는 한국전쟁은 19506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됐다. 한국전쟁은 19537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전쟁이다. 즉 어느 누구도 승리하지 못한 전쟁이라는 얘기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전쟁에 대한 명칭은 각 나라마다 다르다. 대한민국의 경우 북한군이 T-34탱크를 몰고 내려온 날인 625일에 시작됐다고 하여 6.25전쟁이라고 부른다. 전쟁이 터지자마자 곧바로 개입한 미국은 이 전쟁은 자신들이 지키고자 했던 국가 한국이라는 이름을 따서 한국전쟁(Korean War)라고 부른다. 이 전쟁을 먼저 시작한 북한의 경우 이 전쟁을 미제국주의를 몰아내고 남조선 괴뢰 도당을 몰아내는 전쟁혹은 민족해방전쟁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북한은 이 전쟁을 조국해방전쟁이라 칭한다. 반면 북한의 멸망할 위기에 놓이자 항미원조 보가위국의 기치를 내걸고 100만 대군을 참전시킨 중국은 이 전쟁을 항미원조전쟁이라 부른다. 이렇듯 한국전쟁의 주축이 되었던 국가들 마다 이 전쟁을 부르는 명칭은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시점부터 사실상 참전했던 미국은 19537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기 까지 전쟁에 참전했다. 많은 병사들이 한반도에 파병되었고, 전쟁기간동안 약 36천명의 미군이 전사했다. 수많은 병력이 동원되고 전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에게 있어 한국전쟁은 잊혀진 전쟁이다. 미국사회는 한국전쟁에 대해 그다지 크나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한국전쟁이 잊혀졌다는 얘기는 미국 민중의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았던 제2차세계대전이나, 미국 민중의 가장 많은 비난을 받았던 베트남 전쟁에 비해 잊혔다는 얘기도 된다.

 

저자 브루스 커밍스의 주장에 따르면 체계적인 억압과 검열 때문이라고 한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미국 사회는 매카시즘이라는 극단적인 반공주의에 빠져있었고, 수많은 지식인들이 공산주의자들로 낙인찍힐까봐 두려움에 떨던 시대였다. 따라서 그 전쟁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은 사회적으로도 큰 위험이 뒤따랐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과 소련의 핵개발로 인하여 미국사회는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있었다. 이를 통해 미국은 한국전에 큰 장애물 없이 참전할 수 있었다. 매카시즘 덕분에 미국은 한국전쟁 반대세력을 크게 형성하지 않을 수 있었고, 한국전쟁도 1951년 춘계공세 이후 다시 38선 부근에서 벌어지는 고지 쟁탈전 위주의 전투로 바뀌고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미국 사람들 관심사에서 사라졌다.

 

따라서 한국전쟁 시기 한반도에서 미국의 벌인 만행과, 19452차세계대전 이후 조선반도에 들어온 미군정이 저지른 만행이 미국 내에서 크게 논쟁거리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현실 속에서 냉전 이후 미국은 북한이라는 나라를 악의 축으로 결정하는 실책을 범하였다.

 

2. 전쟁의 기원과 남북한 각 정부의 수립 과정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은 한국전쟁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 한국근현대사를 책에 아주 잘 정리했다. 브루스 커밍스는 스탈린과 마오쩌둥으로부터 병력과 물자를 지원 받은 김일성이 1950625일 대한민국을 기습했다.”는 프레임에서 벗어나 한국전쟁 이전인 남북분단정부 수립과 해방 후 분단의 비극을 매우 잘 조명했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통치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 식민지 통치 시기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했던 세력과 만주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세력이 나중에 분단 속에서 남북한 분단 정권을 수립했다는 얘기다. 이 과정에서 브루스 커밍스는 북한의 지도자이자 독재자이기도한 김일성과 북한 초기 내각 거두들의 항일무장투쟁을 잘 재조명 했다. 김일성이 후에 저지른 과오를 떠나서 그의 항일무장투쟁을 과장 없이 충실하게 재조명한 건 분명 대단하다. 커밍스의 주장에 따르면 북한의 주류 정치세력들은 만주항일무장투쟁 세력들로 구성된 반면 대한민국의 주류 정치 세력들은 대체로 친일파들이었다. 이와 같은 브루스 커밍스의 주장은 일리가 없는 주장이 절대 아니지만, 한 가지 놓친 부분이 있다.

 

대한민국 초대 내각이 꼭 친일파들로만 구성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비록 임시정부의 주석이라 할 수 있는 백범 김구가 대한민국 초대내각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 외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적잖게 대한민국 초대 내각에 들어갔다. 신익희, 이범석, 이시영을 비롯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적잖게 대한민국 초대 내각에 참여했고, 사회주의자였던 죽산 조봉암도 대한민국 초대 내각에서 농림부 장관으로 활동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브루스 커밍스 교수가 책에 서술하지 않은 부분은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계열 세력들이 큰 힘을 발휘했던 것은 아니었고, 김일성을 중심으로 뭉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친일파들을 웬만큼 처벌했던 데에 비해 대한민국은 친일파들을 하나도 청산하지 못했다. 그랬기 때문에 북한은 대한민국의 친일파 청산을 문제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책 저자인 브루스 커밍스가 이 점을 놓치긴 했지만, 분단과 한국전쟁의 본질을 잘 파악했다는 점에선 결코 부족함이 없었다. 브루스 커밍스는 해방 이후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만든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를 미군정이 해산한 것부터 시작하여 친일파들을 앞세워 각종 노동자 농민 투쟁을 피로 물들이고 대구와 제주도 그리고 여수 순천을 피바다로 물들인 미군정의 잘못을 아주 정확히 지적했다. 김종원을 비롯한 우익 파시스트들과 친일파들이 벌인 악행도 아주 잘 정리했다. 즉 미군정의 제국주의적인 정책을 일목요연하게 비판했다. 이와 같은 커밍스의 해석은 아주 정확하고 훌륭하다.

 

3. 전쟁의 성격과 민간인 학살

 

3년간 지속되던 한국전쟁은 민간인 학살로 얼룩져 있다. 전쟁 초기 대한민국 이승만 정부에서 벌인 최악이 민간인 학살인 보도연맹 학살로 인하여 최소 30만 명이 3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학살됐다. 저자 커밍스는 미국의 동맹국 대한민국이 벌인 민간인 학살을 낱낱이 밝혔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한국군과 이승만 정부에 의해서 학살당한 사람이 6.25 전쟁 당시 인민군의 학살로 인하여 죽은 사람의 숫자를 훨씬 능가한다고 한다.

 

저자 브루스 커밍스는 인민군의 양민학살 또한 책에서 소홀히 다루지 않았다. 그 또한 전쟁 시기 인민군의 저지른 양민 학살 또한 잘못된학살이라는 사실이라 책에서 알려주고 있다. 인민군에 의해 학살된 사람(민간인뿐만 아니라 포로도 포함된다.)은 한 몇 만 명 정도 된다고 한다. 다만 인민군의 학살은 국군이나 미군에 비하면 어느 정도 기준이 있었다. 2000년대 만들어진 진실화해위원회는 북한이나 남한의 좌익에 의한 처형도 똑같이 다루었는데, 그들의 조사에 의하면 공산주의자들의 잔학 행위가 전체 사례에서 대략 1/6에 지나지 않으며 이들이 사람을 가려가며 처형했다고 한다. 한 예로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군과 그 협력자들은 서울, 대전, 청주 등지에서 수백 명씩 살해하여 전부 1100명을 살해했는데 대개는 억류되어 있던 경찰과 우익 청년단체 회원들이었다. 반면에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조사한 국군학살에서 수천구의 시신을 찾아냈는데, 이중 10살 미만의 어린이의 시신도 수십 구씩이나 발견되었다.

 

저자 브루스 커밍스는 자국인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저지른 민간인 학살 또한 낱낱이 밝혔다. 19507월 미국 제1기병사단에 의해서 200명이나 되는 민간인이 노근리에서 학살되었다. 그리고 미군은 한국군의 노골적인 학살을 하도록 방지했고, 절대 막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제거하고자 했던 대상을 포로로 잡아 대책없이 넘기며 그들의 학살을 돕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한국전쟁 시기 미군이 저지른 최악의 민간인 학살은 무차별 폭격이라 할 수 있다. 2차세계대전에서 태평양전쟁 구역 전체에 투하된 폭탄 총량이 503000톤이었다. 이중 20만 톤은 일본본토에 떨어졌다. 그러나 1950~53년까지 미국이 한국전에 참전하면서 퍼부은 폭탄의 량은 635000톤이다. 거기다 북한에 쏟아 부은 네이팜 폭탄은 32000톤이고, 이걸 다 합치면 667000톤이 된다. 네이팜탄의 파괴적 효과는 베트남보다 북한에서 더 힘을 발휘했다. 그것은 북한 인구가 조밀한 도시와 도시 산업 시설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2차세계대전에서 일본 도시 60곳이 평균 43퍼센트 수준으로 파괴된 반면, 북한 도시와 마을이 파괴된 정도는 40~90퍼센트까지로 추산된다고 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한국전쟁 당시 미국은 북한을 무차별 폭격하며 북한이라는 땅을 달의 표면과 같은 땅으로 만들었다. 당시 미공군을 지휘했던 커티스 르메이의 증언에 따르면 100만 명이나 되는 민간인이 폭격으로 죽었다고 한다. 이 수치가 과장이든 아니든 간에 미국의 인정사정 없는 폭격으로 수많은 민간인이 죽은 것은 사실이다.

 

4. 이제는 반공주의적인 시각에서가 아닌 '한국전쟁이 왜 일어났는가'라는 생각을 가지고 한국전쟁을 보아야할 때이다.

 

책의 저자 브루스 커밍스는 이 책을 통해서 스탈린과 마오쩌둥으로부터 병력과 물자를 지원 받은 김일성이 1950625일 대한민국을 기습했다.”와 같이 한국전쟁을 누가 시작했는가?’라는 질문에 초점을 맞추는 시각이나 견해에 반대하여 한국전쟁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했다.

 

그리고 저자 브루스 커밍스는 지난 한국전쟁 시기 북한을 굴복시키기 위해서 미국이 저지른 무차별 폭격에 대해 조리 있게 비판했다. 이와 같이 그가 가지고 있는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은 분명 미국의 주류역사학계가 가지고 있는 시각과는 완전히 상반될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국내에 있는 알라딘 인터넷 서점의 책 평점과 amazon(미국의 인터넷 소매점)에 나와 있는 이 책의 평점을 잠깐 찾아보았다. 두 사이트에서 이 책에 대해 평점을 매우 낮게 준 사람들이 이 책에서 문제 삼는 공통점은 이 책이 좌편향 적이다.’라거나 저자가 빨갱이라는 것이다. 이렇든 이 책은 한국이나 미국 일반인들이 가지고 있는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하고는 사뭇 다르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을 평가 절하하는 세력들은 기존의 반공주의적인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1953년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끝난 이후 전쟁의 위협은 한반도를 맴돌았다. 그리고 실제로 전쟁이 일어날 뻔 했다. 19681,21사건과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때, 1994년 클린턴 정부가 북폭을 준비했을 때, 2003년 이라크 전쟁 이후 부시 정부 안에서 북한도 공격해서 없애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을 때, 2010년 연평도 포격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리고 2017년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은 화염과 분노에 휩싸일 것이다.’라고 했을 때 말이다. 그 외에도 크고 작은 긴장은 한반도를 둘러싸고 늘상 일어났고, 한반도에 사는 국민들을 긴장관계로 몰아넣었다.

 

최근 들어 한반도는 다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전쟁을 불사하겠다던 북미관계도 차츰 완화되어 2018612일에는 사상최초로 북미정상회담이 싱가폴에서 개최되기 까지 했다. 소위 보수 꼴통으로 유명한 도널드 트럼프가 김정은과 북한에게 보인 반응은 정말 의외였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지도자 김정은과 남한의 대통령 문재인을 극찬했다. 그리고 얼마 전인 2018918에는 대한민국의 문재인 대통령이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을 이어 평양을 방문했다.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정상 회담은 잘 진행되었다. 이번 정상 회담에서 김정은은 조만간 서울을 방문할 것이라 입장을 표명했다. 미국의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이번 회담에서 보인 반응은 아주 긍정적이었다. 작년의 북미관계를 고려해보자면, 생각하기 힘들었던 일이 올해 들어 일어났다. 이렇듯 한반도는 다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즉 한반도 관계가 다시 변화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아직까지 일반 사람들이 인식하는 한국전쟁의 본질을 보지 못한 채 지극히 우익적인 관점에 빠져있다. 남북관계와 한반도 정세가 바뀌듯이 한국전쟁에 대한 일반적인 시각도 앞으로 보다 더 넓어져야 한다고 본다. 그러기 위해선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과 같은 책들이 앞으로 더 많이 나와야 할 거고, 그런 책들이 대중들에게 많이 읽혀야 할 것이다. 이번 남북관계과 개선되는 것을 보면서 희망을 한번 가져본다.

 

분단적폐 물리치고 가자 평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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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9-27 09: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국은 건국 이래 국지적 전투에서는
졌어도 전쟁에서는 진 적이 없는 나라
였습니다.

한국전쟁은 미국이 처음으로 이기지
못한 전쟁이었습니다.

미국에게는 잊혀진 전쟁이 아니라
어쩌면 잊고 싶은 전쟁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NamGiKim 2018-09-27 10:08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미국이 최초로 이기지 못한 전쟁이죠. 그리고 미국은 베트남에서 깨지죠. 이후 미국은 승리하지 못했던 트라우마에 빠졌지만, 걸프전쟁으로 자존심을 회복했죠.

겨울호랑이 2018-09-27 19: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Ho Chi Minh 님 글을 읽다보니, 두 사람이 싸울 때 ‘누가 먼저 주먹을 휘둘렀느냐‘보다 ‘왜 싸웠는가?‘가 중요함에도 한국전쟁에서 이 질문은 제기되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NamGiKim 2018-09-27 20:03   좋아요 1 | URL
오 그랬군요.ㅎㅎㅎ 사실 그런 질문이 던져지지 못한 것은 분단이라는 현실이 가로막았기 때문이라 봅니다. 지금까지 분단이라는 모순속에서 서로에 대한 적대감을 계속 키워왔고, 그 상황에선 생각치 못한 것이겠죠. 그리고 울나라 사람들은 한반도 분단의 책임이 미국에게도 있다는 사실을 너무 쉽게 넘기는것 같습니다. 김칫국 부터 마시는 얘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한반도의 정세가 더 좋아지면 그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좀 더 생기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블루레이] 7월 4일생
올리버 스톤 감독, 톰 크루즈 출연 / 유니버설픽쳐스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주의 이 감상평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제 저녁 집에서 영화 ‘7월 4일 생’을 봤다. 아버지께서도 워낙 추천하는 영화고, 톰크루즈가 연기파 배우라는 사실을 증명한 영화이기도 해서 몇 주 전부터 이 영화를 꼭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영화를 보고난 뒤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고, 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에서 만든 베트남 전쟁 영화들은 대부분 반전성향의 영화들이 많다. 올리버 스톤이 만든 ‘7월 4일 생’또한 그 반열에 들어갈 것이다.

미국에게 있어서 7월 4일은 독립기념일이다. 1776년 영국 식민 통치에 반발한 미국인들은 7월 4일에 미국 독립 선언을 채택했다. 그 날을 기념하여 미국에서는 7월 4일을 미국의 독립기념일로 잡는다. 이렇듯 7월 4일은 미국인들에게 있어서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조국을 생각하는 날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미국인들이 의미를 두는 날인 7월 4일에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참전용사들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했던 그는 “언젠간 자신도 조국을 위해 싸우겠다.”는 대단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아버지는 2차대전 참전용사였고, 그의 집안이 다니는 교회 또한 굉장히 보수적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주인공은 베트남 전쟁이 격화되자 거리낌 없이 해병대에 자원입대한다.

그러나 그가 참전한 베트남 전쟁은 자신의 아버지가 참전했던, 2차세계대전과 같은 전쟁이 아니었다. 1967년 다낭항에서 전투를 치르던 주인공은 미군에 의해 죽거나 부상당한 베트남 민간인들을 목격한다. 그 상황에서 살아있던 아기를 구하려 했지만, 결국 후퇴하라는 상관의 명령 때문에 후퇴했고, 거기 있던 갓난아기는 미군의 포격에 죽고 만다. 다낭에서 전투를 치르던 주인공은 크게 부상당했다. 결국 그는 휠체어 신세가 되어버렸다. 1968년 구정 공세 이후 미국 내에서도 반전운동이 격화 됐다. 워낙 보수적인 가정에서 자랐던 주인공은 초반엔 반전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베트콩 지지자들로 간주하며 매우 경멸했다.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돌아왔을 당시에는 매우 기뻤지만 둘로 분열되어 있는 미국을 보게 되었고, 초반엔 전쟁 지지자들을 지지한다. 그러나 그는 미국 정부가 국민들을 속였다는 사실을 점차 알게되었고, 그가 어릴 때부터 인연이 있던 여자친구를 만나 반전운동에 참가했다가 반전 참전용사들과 반전운동가들을 대하는 미국 정부의 대응을 보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벌어지는 미국 정부의 무차별 폭력을 본 뒤 자신이 믿었던 가치관이 점차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를 계기로 주인공이 가지고 있던 베트남 전쟁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그와 동시에 그는 베트남에서 받은 충격으로 인하여 PTSD로 고생한다.

온갖 고생과 정신적 충격을 받은 끝에 주인공은 반전운동가가 된다. 주인공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베트남 전 참전용사로써 반전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닉슨의 정책을 비판한다. 닉슨의 재선을 시도하자 그는 연설현장에 찾아가 베트남 전의 진실을 호소한다. 무었 때문에 왔냐는 어느 기자의 질문에 주인공은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제가 여기 온 건 이 전쟁이 잘못됐다는 걸 말하기 위해섭니다. 이 사회는 나와 내 형제들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 나라가 국민들을 기만했습니다. 우린 그 거짓말에 속아 10000km나 떨어진 베트남까지 가서 가엾은 소작농들에 맞서 전쟁을 치렀습니다. 당당한 저항의 역사를 가진 자신들의 독립을 위해 지난 천 년간 투쟁해온 베트남 사람들과 말입니다. 이 정부의 지도자라는 자가 얼마나 역겨운지 말로 표현하기조차 힘듭니다. 사람들은 미국이 맘에 들지 않으면 떠나라고 합니다. 전 미국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현 닉슨 정부에 대해서는 사랑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 정부는 부패하고 썩어빠진 도둑집단입니다. 저들은 강간범이자 강도입니다. 이제는 묵인하지 않겠다는 말을 하기 위해 우린 여기까지 왔습니다. 진실을 말하려고 여기 까지 왔습니다. 베트남에 있는 미군들을 살해하고 있는 저들에게 진실을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닉슨 지지자들은 진실의 불편함을 느끼고 주인공과 일행들에게 “빨갱이”라는 욕설을 퍼붑는다. 영화 ‘7월 4일 생’은 베트남 전쟁이 미국인들에게 어떻게 다가왔고, 어떻게 사회적인 변화를 불러왔는지를 아주 잘 보여준다. 무엇보다 애국심에 빠져있던 일반 미국인이 어떻게 해서 반전운동에 나서게 되었는지를 아주 잘 보여줬다. 영화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서 미국 사회의 깊은 반성과 전쟁의 비극, 전쟁이 개인에게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미치는 영향 그리고 “우린 잘못된 전쟁에 참가했다는 사실”을 얘기해 주고 싶었던 것 같다.

주인공이 베트남으로 가기 전인 영화 초반에 베트남에서 미군을 지휘하던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의 인터뷰가 나온다. “2차세계대전 당시 그리고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일본군과 프랑스군에 맞서 싸워 이긴 베트콩들을 제거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어보는 기자의 질문에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동굴에 사는 건 모두 제거 될 수 있습니다.”라고 답변한다. 그러나 현실을 그게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장면을 그리 깊게 보지는 않겠지만, 미국의 베트남에서 저지른 제국주의적 실수를 아주 정확히 보여주는 장면일 것이다. 정말 감동적이고 깊은 여운을 남겨주는 영화를 봤다. 영화 ‘7월 4일 생’은 앞으로도 반전을 호소하는 명작으로 기리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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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9-26 1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얼마 전 빔 벤더스의 사진집에서 원작자와
뉴욕에서인가 당구를 치는 것을 보고
원작을 찾아본 기억이 나네요.

아무런 대의명분도 없이 시작한 전쟁에서
결국 망신만 당한 두 제국의 민낯을 드러
냈다고나 할까요.

NamGiKim 2018-09-26 21:06   좋아요 0 | URL
베트남 전쟁에 대해 공부하다 보면 정말 제국주의 국가들의 뻘짓이 보이죠. 프랑스도 미국도요
 
폭력적인 미국의 세기
존 다우어 지음, 정소영 옮김 / 창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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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 폭력, 전쟁, 무기개발, 제국주의로 얼룩진 미제국주의의 추악한 역사>

미국이라는 나라가 초강대국으로 부상하게 된 계기는 제2차세계대전 이후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나치독일과 일본제국을 패망시키는데 이바지했던 미국은 전쟁이 끝나고 난 뒤 소련과 경쟁했다.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미국은 자신들의 적이 사라졌다 생각했지만,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1991년 걸프전쟁을 기점으로 미국은 중동분쟁에 개입했고, 2001년 9.11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에 개입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중동분쟁은 현재진행형으로써 아직도 미국은 중동분쟁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이 책은 미국이라는 한 제국주의 국가가 1945년 제2차세계대전 이후부터 지금까지 저질러 제국주의적 폭력과 비상식적인 무기개발 그리고 자신들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들이 저질러온 침략과 학살에 대해 낱낱이 고발하고 규탄한다. 그 중 하나는 ‘대리전과 대리 테러’라는 제목의 장에서 다루는 음험하고 추악한 만행들이다. 냉전기 미국은 남미에서 자신들을 지지하는 친미괴뢰정권들을 세우기 위해 남미에 있던 사회주의 세력과 혁명세력들을 무력과 친미파들을 앞세워 박살냈다. 마치 8.15 해방 이후 제국주의 국가 미국이 남조선에서 이승만이라는 미제국주의자와 총칼을 앞세워 여운형 선생과 같은 좌우연합 통일 세력의 염원과 당시 제국주의에 맞서 저항하던 사회주의 세력과 수많은 노동자 농민의 투쟁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듯이 말이다. 쉽게 말해 남미에서도 4.3항쟁이나 여순항쟁 그리고 대구 10.1 항쟁같은 반제국주의 투쟁과 노동자 농민의 항쟁이 있었고, 미제와 미제 앞잡이들에 의해 아주 철저히 짓밟혔다는 얘기다. 그리고 미국의 저지른 그런 제국주의적인 만행은 “하나같이 반공주의의 이름”아래 일어났다. 그러나 이런 미제국주의의 탄압과 전술전략이 남미에서 실패한 사례가 있다.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라 일으킨 쿠바혁명이 바로 그것이다.

쿠바혁명으로 인하여 미국은 바티스타 친미괴뢰정권을 지키는데 완전히 실패했다. 그러자 미국은 쿠바를 봉쇄했고, 심지어 망명자들 출신들을 동원하여 쿠바를 침공했었다. 그리고 처참히 패배했다. 냉전 후반기라 할 수 있는 1970년대 중반에서 1980년대 후반 사이 미국은 ‘콘도르 작전’을 개시하여 친미반공국가를 만드는데 이바지했다. 그 과정에서 수만 명 이상이 남미에서 학살당했다. 마치 한반도에서 수많은 민간인들이 반공이라는 이름아래 목숨을 잃었듯이 말이다. 미국이 자신들의 반대세력을 고문하기 위해 만든 매뉴얼이 있는데, 이는 너무나 끔찍해서 읽다보면 눈이 돌아갈 정도다.

미국의 이러한 만행들은 1991년 걸프전쟁 이후에도 반복됐다. 2001년 9.11테러로 인하여 충격에 휩싸였던 미국과 호전광 조지 부시는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했다. 그리고 미국은 여러 전쟁범죄들을 일으켰고, 지속적으로 중동분쟁에 군사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21세기 초반부터 오늘날 까지 치른 중동분쟁에서 사망한 미군 병사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합치면 대략 7000명 이상이 된다. 특히 아프가니스탄은 아직까지도 엄청난 교착상태에 빠져 전투가 지속되고 있고,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고 있다.

이 책에서는 2차세계대전과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전쟁에서 미군이 행한 무차별 미간인 폭격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일본에게 행한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각각 수십만의 민간인이 사망했다고 한다. 독일의 드레스덴 폭격과 일본의 도쿄 대공습만 보더라도 적어도 2만에서 10만사이의 민간인이 미군의 폭격으로 무차별 학살당했다. 베트남 전쟁에서는 남북합쳐 약 200만명의 베트남 민간인들이 사망했다. 이들 중 대다수는 미국의 융단 폭격과 고엽제 투하로 인하여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무차별 폭격은 베트남에서 보다 한국전쟁에서 더 효율적이었다 한다. 2차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서 전략폭격을 지휘했던 커티스 르메이 장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북한과 남한 양쪽에서 도시란 도시는 거의 다 불태웠어요. 100만 명 이상의 민간인들을 죽였고 700만 명 이상을 고향에서 내몰아서 그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더 많은 비극이 일어나게 된 거죠. (폭력적인 미국의 세기p.73~74)

커티스 르메이 장군이 제시한 수치가 과장이든 아니든 간에 한국전쟁 시기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학살당한 민간인은 엄청 많았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미군의 무차별 폭격은 걸프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전쟁에서도 반복됐고, 지금도 계속 미국에 의하여 반복되고 있는 중이다.

“폭력적인 미국의 세기”는 이와 같은 미국의 만행을 아주 잘 고발한 책이다. 저자는 풍부한 지식과 통계 자료를 바탕으로 책 두께에 견줘 많은 것을 알려 준다. 미제국주의의 역사가 궁금한 독자에게 아주 유용한 참고서가 될 것이다. 200페이지 안팎의 짧은 분량이지만 그 짧은 분량 안에 정말 많은 내용을 압축적으로 잘 담고 있다. 책 분량에 비해서 읽으면 얻는 것이 훨씬 더 많은 책이다. 단점보다 장점이 더 큰 책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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