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마오쩌둥은 1893년 중국 후난 성샹탄에서 농민 마오이창과 그 부인 원(文)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불교신자 집안이었고, 집안 형편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8살이 되던 1900년 그는 마을 서당에 입학하여 유교경전의 기초지식을 익혔다. 14살 때 부모의 명령을 따라 혼인을 했으나 이를 거부했고, 결국 집을 나와 현립 둥산 고등소학교에 입학했다. 그 뒤 장사의 주성 중학에 입학하였고, 독서를 즐겼다고 한다. 그러던 1911년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마오쩌둥 또한 신해혁명에 참가했다.

신해혁명 이후 후난성 공립 고등 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1918년 스승이자 후의 장인이 된 양회중 교수를 따라 베이징대학에서 약 2년간 보조 사서로 근무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은 중국 젊은이들은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공부하게 됐고 “수많은 중국의 젊은이들은 사회주의를 중국에서 실현하겠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을 당시, 20대의 마오쩌둥 또한 마르크스나 레닌이 쓴 서적들을 접하며 이에 심취했고, 혁명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 중국공산당 창건과 대장정

1921년 중국 공산당 1차 전당 대회에 후난성 대표로 참석했다. 한편 창립 초기 공산당은 쑨원의 뜻에 따라 국민당과 연합(1차 국공합작)을 하고 있었고, 공산당원들은 개별적으로 국민당에 가입하고 있었다. 마오쩌둥도 공산당적을 가지고 국민당에 가입했고, 국민당 정부의 명령을 받아 후난성의 향촌 조사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이때부터 마오쩌둥은 농민의 혁명 역량을 주목하게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손문의 주도로 제1차 국공합작이 진행되었지만, 1925년 손문이 사망하고 그 밑에 있던 장개석이 1926년 중산함 사건을 시작으로 1927년 4월에는 군대를 동원하여 상하이를 장악한 뒤 공산주의자들을 대량으로 검거하고 숙청하면서, 그해 8월에는 공산당의 주도로 난창봉기가 일어나는 등 제1차 국공내전이 일어났다. 제1차 국공 내전 당시 공산당은 중국 국민당에게 무기나 자원 병력 규모에서 밀렸지만, 16자 전법을 기반으로 하여 유격전으로 국민당군에 맞서 싸웠다. 정강산 투쟁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그리고 1931년에는 중화소비에트를 만들어 투쟁을 전개했다.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영토를 정복해 나갔음에도 국민당군은 중국공산당을 토벌하는데 여념이 없었고, 결국 공산당은 국민당군의 극심한 토벌에 맞서 싸워야 했다. 결국 전력에서 밀리게된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국공산당 간부들은 국민당군의 토벌에 맞서 기상천외한 작전을 구사한다. 그게 바로 그 유명한 대장정이다. 1934년 10월 마오쩌둥의 홍군은 인류역사상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는 작전을 전개했다. 대장정 시기 마오쩌둥의 홍군은 설산과 고원 사막 그리고 호랑이와 같은 맹수들이 사는 숲을 가로지르며 굶주림, 고통, 자연 그리고 수백 대의 비행기를 동원한 국민당군에 맞서 싸우며 10000km를 1년간 걸었다. 그 과정에서 장정에 동참했던 부대는 10만 이상에서 2만 이내로 줄었지만, 중국인민의 민심을 사로잡았다. 일본이 만주에서 진격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장개석의 국민당은 공산당 토벌을 지속하였다. 그러나 이는 결국 1936년 까지였다.

3. 제2차 국공합작과 중일전쟁

1936년 시안사건이 발생했다. 시안사건 이후 장개석은 다시 공산당과 힘을 합쳤다. 중국에서 일본제국주의를 축출하기 위해 제2차 국공합작이 성사된 것이다. 1937년 노구교 사건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일본군은 초반에 국민당의 수도 남경을 점령하면서, 연전연승을 기록했다. 그러나 전쟁이 지속될수록 일본군의 연전연승도 점점 줄어들기 시작됐고 중국인들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을 시작으로 침략자 일본에 맞서 싸웠다.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주로 연안일대에서 활약했다. 그리고 1940년 마오쩌둥의 홍군은 백단대전에서 대승을 거둔다.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결국 1945년 8월 15일 연합국에게 항복하면서, 중일전쟁 또한 끝이 났다.

4. 국공내전과 중국 통일

2차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난 이후 미국은 중국의 국공합작을 성사시키고 그들간의 중재를 위해 조지 마셜 장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중국의 제2차 국공합작은 1946년 그해 여름 장개석의 국민당군이 먼저 배반하면서 결렬됐고, 이는 결국 내전으로 번졌다. 장개석의 국민당군은 파상 공세를 통하여 한때는 공산군의 근거지인 옌안을 점령하기도 했다. 미국으로부터 탱크나 비행기를 지원받았던 국민당군은 이번에도 병력면에서 공산당을 압도했다.

그러나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민심을 제대로 잡지 못했던 국민당 덕분에 국공내전의 전세는 중국공산당에게 유리해졌고, 국공내전 시기 중국공산당군은 국민당군 50만 이상을 섬멸하는데 성공했고, 마오쩌둥은 1949년 10월 1일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포한다. 이로써 마오쩌둥은 내전에서 승리한 뒤, 인민공화국을 건국하게 된 것이다.

5. 한국전쟁과 대약진 운동

중국이 건국되기가 무섭게 냉전의 화약고가 한반도에서 터졌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공격으로 시작된 전쟁은 미국을 따르는 유엔군이 가세하면서 10월 1일에는 한국군이 38선을 넘고 19일에는 북한의 수도 평양을 점령하게 된다.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하는 것을 매우 경계했던 중국은 그해 10월 25일 북한에 지원 병력을 보냈다.

자신들의 참전으로 동맹국 북한을 지키고 유엔군을 38선 밑에까지 밀어내는 데 성공했지만, 이 과정에서 전후복구는 늦어졌고, 북한과의 국경지대는 미군의 폭격으로 피해를 입었으며, 마오쩌둥의 아들 마오안잉의 미군의 폭격을 맞고 전사했다. 그리고 한국전쟁에서 중국 또한 수십만 이상의 병력을 잃었다.

한국전쟁 이후 중국은 경제재건에 돌입했고 초반에는 스탈린식 공업화를 선호했다. 1953년 스탈린 사망이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된 니키타 흐루쇼프는 1956년 스탈린 격화운동을 진행했다. 이때부터 소련과의 관계가 나빠지기 시작했고 마오쩌둥은 기존의 스탈린식 경제개발계획을 포기한 뒤 1958년부터 대약진 운동을 전개했다. 대약진 운동은 1962년까지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3천만 명 이상이 아사했다. 그 이유는 바로 마오의 잘못된 정책에 있었다. 대약진 운동 시기 재사해 운동으로 참새를 학살한 결과 참새가 먹는 해충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고 벼생산량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칼텍에서 수학을 전공한 천재과학자 춴쉐썬이 주장한 벼 빽빽이 심기와 같은 짓도 벼 생산량에 크나큰 타격을 입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오쩌둥은 대약진 운동의 실책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6. 문화대혁명과 중소분쟁 그리고 사망

1964년 중국은 낙후된 경제에도 불구하고 핵폭탄을 자력으로 만들었다. 1966년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을 전개했다. 문화대혁명은 사회주의 강화라는 명분아래 시작되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의 결과는 마오쩌둥 개인을 위한 정적 숙청과 독재권력 강화였다. 문화대혁명의 홍위병들은 자신들의 학문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을 주자파로 몰아 숙청했고 그 과정에서 한국전쟁의 영우 팽덕회와 류사오치를 비롯한 마오쩌둥의 혁명동지들이 숙청당했고 15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죽었다. 문화대혁명은 1969년에 공식적으로 끝났다.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 이것이 마오쩌둥의 저지른 가장 큰 과오다.

1969년 중국은 소련과의 전쟁위협에 휩싸였다. 1969년 전바오섬(다민스키섬)에서 중국군과 소련군의 유치한 패싸움으로 시작된 갈등은 탱크와 수십만을 동원한 전면전으로 번졌다.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위기에 놓였다. 그러나 미국의 중재로 소련은 중국과 협상하는 쪽으로 노선을 바꿨고 1969년 9월 호치민의 장례식장에 참석했던 소련의 수상 알렉세이 코시긴이 베이징에서 저우언라이 총리를 만나 회담을 가지면서 중소 국경 분쟁은 끝이 났다. 소련과의 관계가 좋지 않던 중국은 소련을 견제할 목적으로 미국과 회담했고 1972년 닉슨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하면서 중국은 미국과 수교를 맺은뒤 서방국가들하고도 수교하게 되었다. 1972년부터 마오쩌둥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됐다. 그러던 1976년 저우언라이 총리가 사망하고 주더가 사망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오쩌둥도 1976년 9월 83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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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 - 독립과 통일 의지로 일관한 신뢰의 지도자 독립기념관 : 한국의 독립운동가들 88
변은진 지음,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 역사공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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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조선을 이끌어나갈 저도자"를 선택하는 여론조사에서 이승만과 김구를 재치고 단연 1위를 한 지도자가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 집에 있는 노비를 해방시켰고, 1919년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보내 3.1 운동의 불씨를 제공했으며, 해방 후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햐여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었다. 그가 바로 몽양 여운형이다.

 

해방 정국 시기 그의 인기는 참으로 대단했었다.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 전쟁을 거치면서 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 노선에서 친일로 변절할 때, 일본제국주의의 회유와 억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지조를 지켰던 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인 1944년 8월 국내에서 건국동맹과 농민동맹을 조직하여 일제의 패망을 국내에서 대비했던 인물이었다. 마치 나치독일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프랑스의 레지스탕스가 좌우연합하여 나치독일에 맞서 파리 해방을 미리 대비했던 것 처럼 말이다. 비록 광복군 국내 탈환 작전이 성사되지 않아서,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동맹이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민중봉기를 일으켜 그 민중의 군대가 일본군을 무장 해제 시키지는 못했으나,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친일파들이 일본 제국주의의 전쟁을 미화하며 그들조차 속고 있었을 시기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그 이후를 대비했다는 사실 자체가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 그는 총독부의 엔도 류사쿠 정무 총감과 협상하여 총독부로 부터 행정권을 이양받고, 일본 천황의 항복 소식과 동시에 감옥에 있던 정치범들을 석방시켰다. 자신의 조직인 건국동맹을 건국준비위원회로 발촉시켜 무정부 상태를 막고, 전국적으로 치안유지와 조국건설 사업을 추진해나갔었다.

 

그랬던 여운형이기에 해방 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거의 다 아는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와, 임시정부 초대 총령이자 대한민국 제1공화국 대통려인 이승만보다 더 인기가 높았던 것이다. 일제시기에는 독립운동 해방 이후에는 좌우합작과 남북통일정부수립에 힘을 썼던 그는 안타깝게도 12번의 테러 끝에 혜화동 로터리에서 괴한의 총탄에 맞고 비명횡사했다. 그가 암살로 생을 마감한 이후인 1948년 남북분단정부가 수립되고, 1950년에는 우리 역사의 비극인 한국전쟁이 일어나 수백만이 죽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봤을 때 그의 죽음은 너무나도 안타까운 사건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그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시기 잊혀진 인물이었고, 아직도 많은 이들이 그의 이름을 모른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2005년 공로를 인정받고, 2008년에는 대한민국장 1급에 추서됐으나, 일반사람들에게 있어서 그가 이룬 업적에 비해 많이 잊혀졌다.

 

해방정국 시기가 아닌 그의 독립운동 행적만 보더라도 몽양 여운형은 분명 이룬 업적에 비해 많이 잊혀졌다는 주장은 맞는 말이다. 위에서 상술했듯이 젊은 시절 그는 을사조약 이후 자신의 집에 있던 노비들을 전부 해방시켰고,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했다. 경술국치 이후 그는 중국으로 넘어가 유학했고, 1918년에는 신한청년단을 조직하여 3.1 운동에 불씨를 제공했으며, 임시정부의 일원으로써 일본으로가 일본고위급과의 회담에서 조선독립을 역설하였다. 그는 1920년대 초 한국 노병회를 조직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했었고, 모스크바에가 레닌과 트로츠키를 만나 조선 독립의 필요성을 설득했다. 1920년대 중국에서 활동하며 중국의 손문, 마오쩌둥, 장개석을 비롯한 중국의 좌우를 아우르는 인물들 사이에서 제1차 국공합작에도 일부분 기여했고, 베트남의 호치민과도 만나 교류했었다. 1930년대에는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있으면서 언론활동을 통해 일제시대의 현실을 비판했고, 1936년 일장기 말살사건을 주도했다. 그리고 일제가 패망하기 1년 전인 1944년 건국동맹을 결성하여 일제의 패망을 대비했었다.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그를 빼놓고 논하는 것은 사실상 주연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그가 꿈꾸던 남북통일정부수립은 우리에게 있어서 현재진행형이다. 현재 한반도는 평화를 향해 변화해가고 있다. 최근 들어 북한과 미국간의 제2차 정상회담이 베트남 다낭에서 열릴것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이는 한반도의 정세가 대립에서 평화로 바뀐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지금으로 부터 70년 전 좌우와 남북의 통일을 꿈꾸던 그를 돌아보는 일은 필요하다. 그를 다룬 대중적인 영화나 드라마가 나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바라며 서평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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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와 로마 제국 세계 석학들이 뽑은 만화 세계대역사 50사건 11
김창회 지음, 진선규 그림, 손영운 기획 / 주니어김영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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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 차원에서 읽어 봤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읽어보는게 낫지만, 읽기가 귀찮아 청소년용인 이 책을 읽었다.

초중학생을 위한 책 치고는 내용이 꽤 탄탄했다. 그 많은 내용을 집약적으로 잘 썻다. 만화의 첫 시작은 스파르타쿠스의 반란부터 시작한다. 자유를 위해 싸웠던 스파르타쿠스의 이야기 부터, 폼페이우스 그리고 카이사르의 등장과 몰락까지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율리우스 시저를 읽으면 드는 생각이 있다. 전략가로서는 뛰어난 명장이지만, 지도자로서는 황제를 꿈꾸었던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그는 독재관을 지내다가 갈리아 내전기 포로로 잡았던 브루투스에 의해 살해당했지만 말이다.

이 책은 시저가 암살당하면서 끝이난다.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그가 이룩하고자 했던 개혁과 정복전쟁에서의 공로 그리고 독재자로서의 모습을 얘기하며 과연 위대한 지도자인지 혹은 독재자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아마 이후에 나타날 마키아벨리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그리고 베니토 무솔리니가 카이사르를 꿈꿨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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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역사학 비판 - 『환단고기』와 일그러진 고대사
이문영 / 역사비평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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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역사학 비판 서평: 유사역사학은 파시즘의 변형된 형태다.

내가 환단고기를 처음 알게 됐던 것은 대학교 1학년 때다. 당시 고구려사를 전공한 모 교수님은, ˝한국에도 대마도 회복을 외치는 모 집단이 있다.˝ 혹은 ˝환단고기라는 판타지 위서를 추종하는 집단이 있다.˝라고 주장했었다. 당시 환단고기에 대해 모르던 필자는 ˝무슨 소고기 이름이냐˝하고 그냥 넘겼던 것 같다.

그로부터 2년 뒤인, 2016년이었다. 당시 페이스북을 굉장히 열심히 했던 필자는 굉장히 많은 사람들과 페친을 맺었다. 이를 통해서 굉장히 많은 환빠들이 우리나라에 존재하고, 이런 말도안되는 주장들을 진서라며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2017년 대전에 있는 증산도라는 사이비 종교를 알게 됨으로써, 그들이 참으로 위험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시중에 나온 책들 중엔 환단고기와 유사역사학을 비판하는 책들은 찾기가 힘들었다. 심지어 수많은 서점에서는 소위 환빠 교주 안경전이 저자인 환단고기와 개벽과 같은 종교화된 서적들이 시중에 나도는 모습을 보았고, 굉장히 거부감을 느꼈다.

그렇게 해서 난 가끔씩 환빠들을 까는 글들을 SNS를 올렸다. 2018년 소방서 사회복무요원을 마치고 그 기념으로 1달간의 미국여행을 갔다오고 나서였다. 내가 미국여행을 마치고 귀국했을쯤 이 책이 출판되었고, 책의 저자인 이문영 선생을 SNS를 통해 알게 됐다. 그를 통해서 ‘유사역사학 비판‘을 알게됐고, 궁극적으로 환빠들에 대한 위험성과 비판부분에 대해 보다 정확히 알기 위해 이 책을 읽었다.

이 책이 내리는 결론은 자명하다. 유사역사학은 우리나라의 역사와 외세에 대한 알 수 없는 열등감에서 부터 시작된다. 즉 한국 역사는 대륙을 정복하지 못한 역사이기에, 과거의 영토들 왜곡하고 과장해서 ‘민족의 위대함‘을 보여주고, 더 나아가 정상적으로 학문을 연구하는 세력들을 죄다 ‘이병도 제자‘라는 프레임을 씌워 마녀사냥을 한다.

그들에게 있어 다른 나라의 유사역사학자들이 한 얘기는 그리 큰 문제가 안된다. 왜냐하면 그들의 주장에서 주어와 목적어만 약간 변형시키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 캐임브릿지 대학에서 인정한 하버드대 한국사 교수가 한국의 과도한 민족주의를 비판하면 유사역사학은 입에 개거품을 물고, 성난 침팬지들 처럼 날뛴다.

참으로 재밌는 사실은 그들이 그리도 진실이라 하고 싶은 환단고기를 진실로 규정한다면 그건 역으로 과거에는 위대했으나 중국에게 털려 시간이 갈수록 영토가 줄어든 열등한 역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과거의 위대함만을 고수하는 그들에겐 그런건 전혀 상관없다.

과거에도 했던 생각이지만, 이들의 사상은 전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은 나치와 비슷하다. ˝아리아인의 위대함˝을 외치던 그들의 구호에서 주어만 바꾸면 환빠가 된다. 20세기 역사가 증명하듯이 민족우월주의와 과도한 민족주의에 경도된 나치독일과 일본은 세계대전을 일으켰고, 6천 5백만명의 목숨을 빼았았다. 그렇다. 이 처럼 위험한 사상이 바로 유사역사학이다.

몇몇이들은 이들도 종교니까 종교로서 인정하면 된다고 한다. 그것은 이들에 대한 위험성을 인식하지 못하고서 하는 소리다. 그렇다면 네오나치도 허용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유사역사학은 학문과 사실관계를 자신들 멋대로 조작하여 식민사학과는 무관한 역사학계를 공격하고, 자신들의 추종하는 파시즘을 대중들에게 이식시킨다.

따라서 굉장히 위험하다. 물론 여기에는 역사학문이라는 것을 대중들과 소통하지 못했던 학계의 잘못도 있다. 어쨋든 유사역사학은 굉장히 위험하다. 이를 알고 비판적인 의식을 길러야 한다. 이문영 저자님의 저서 ‘유사역사학 비판‘은 올바른 길을 제시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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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레닌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건 3년 전 이맘 때 쯤이었다. 지금으로 부터 4년 전 마르크스가 쓴 '공산당 선언'을 읽고 감동했었던 필자는 러시아 혁명을 성공 시킨 레닌을 알고 싶었다. 그때 까지만 해도 사회주의나 혁명사에 대해 지식이 전무했던 필자는 레닌 하면 뭔가 찬양을 하고 사상을 따르기에는 알 수 없는 이상한 거부감 같은 것이 존재했던 것 같다. 현 민중당 계열에 가까운 어떤 단체에서 활동 하면서, 개인적으로 여러권의 책을 읽었던 2016년 필자는 레닌을 알기 위해 처음에는 현 노동자 연대 대표가 쓴 '러시아 혁명과 레닌의 사상'이라는 책을 읽었다. 그러나 그 책은 레닌과 러시아 혁명에 대해 처음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한 입문서 정도였기에, 이쪽 출판사에서 출간한 레닌 전기를 읽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읽게 된 책이 책갈피 출판사에서 출간한 레닌 평전이다.

 

이 책은 영국 트로츠키주의 계열 사회주의자인 토니 클리프가 쓴 레닌 평전이다. 토니 클리프에 대해 조금 소개하자면 그는 사회주의 계열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국가 자본주의'라는 이론을 창시해낸 인물이다. 국가 자본주의란 무슨 뜻이냐면 레닌 사후 등장한 소련의 스탈린 체제가 사회주의를 져버리고, 국가라는 시스템이 주도적으로 자본주의를 컨트롤 한다는 얘기다. 즉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소련, 중국, 북한과 같은 국가들은 당과 관료계급이 자본주의 국가에서 자본가들이 하는 역할을 대신 하기에, 구공산권 국가들은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는 얘기다. 이는 비운의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가 창설한 제4인터내셔널이 주장하던 "소련은 타락한 노동자 국가"라는 이론과는 다른 해석이다. 박노자가 쓴 '러시아 혁명사 강의'에 따르면 토니 클리프가 이끌던 사회주의 단체는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다른 사회주의 단체들이 이를 '민족해방전쟁'이라는 관점에서 지지했던 것과 달리 그 어떠한 지지도 표명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확실히 드러난다. 즉 그 당시 토니클리프 계열의 단체들은 한국 전쟁을 "미국과 소련 간의 제국주의적 전쟁"으로 봤고, 따라서 국가 자본주의 대 미제자본주의의 전쟁을 지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1991년 소련 해체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를 사회주의의 실패로 생각했을 때, 이들은 국가자본주의의 몰락으로 봤고,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트로츠키, 로자 룩셈부르크 그리고 안토니오 그람시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를 내세웠다. 즉 현재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국내의 노동자 연대라는 단체가 이쪽의 이론을 그대로 계승한 셈이다.

 

따라서 토니클리프가 쓴 이 4부작 짜리 레닌 평전은 당연히, 레닌 사후 건설된 소련 체제와 정권을 잡은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 책이 사회주의로의 이행 단계였다고 보는 시기는 1917년 러시아 혁명부터 1924년 레닌이 사망하기 이전까지이다. 즉 그 이후는 스탈린이 정권을 잡았기에 사회주의가 아닌 국가 자본주의로 갔다는 얘기가 된다. 물론 스탈린에 대한 그들의 비판을 문제 삼지는 않는다. 다만 비판을 하는 방법과 전술에 있어선, 분명한 오류가 있다. 스탈린의 권위주의적 독재체제나 대숙청은 분명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스탈린이 건설한 체제는 자본주의 체제가 아니었다. 이는 분명히 사회주의 체제였다. 당시 소련엔 자본가 계급이 없었고, 스탈린 체제는 사회주의로의 이행 단계인 제1차 과제인 국유화를 마침으로서, 사적소유 철폐에 기반한 공업화를 이루어 냈다. 그 이면엔 일부 관료들의 부패가 존재하였으나, 현 자본주의 체제에 있는 재벌들 처럼 수십억 달러를 벌어들이는 자본가는 없었다. 비록 양질은 아니더라도, 사회주의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복지, 의료, 주거, 교육이라는 것이 적어도 자본주의였던 박정희 정권보다 우선시 되었고, 이는 대기업 위주의 박정희식 경제성장과도 분명한 차이가 있다. 따라서 필자는 토니 클리프가 주장하는 국가 자본주의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고, 책을 읽을 때 이런 부분은 좀 걸러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과거 소련 시절 스탈린 체제가 만들어낸 필요이상의 우상화 된 레닌의 이미지를 조리있게 비판했다는 것이다. 그저 절대적이고 사실상 전지전능적인 인물로 묘사되던 레닌도 실수도 하고, 프롤레타리아적 대의를 위해 헌신도 하는 인간이자 혁명가였던 레닌을 잘 재조명 했다. 그리고 적백내전 당시 백군 파시스트들과 제국주의의 침략과 테러에 맞서 볼셰비키들이 왜 체카를 창설하여 맞서 싸운 것은 당연하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또 혁명의 비극인 크론슈타트를 왜 레닌과 볼셰비키들이 진압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잘 설명했다. 그 외의 독일 혁명 당시 독일 사민당의 배신이나 코민테른의 변질화 또한 잘 조명했다.

 

즉 토니 클리프의 레닌 평전은 5~6개월전 필자가 읽었던 영국 우익 학자 로버트 서비스가 쓴 레닌 평전하고는 확실히 다르고, 보다 진보적인 관점에서 레닌의 생애를 잘 조명해냈다. 과거 우리는 반공주의라는 전근대적인 사고에 빠져 레닌이라는 인물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비록 토니 클리프의 레닌 평전은 일부 오류가 있긴 하지만, 혁명가 레닌을 알려주는 좋은 책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주의 체제는 실패했다고 한다. 그건 단순히 소련 해체라는 표면적인 현상만 가지고 판단한 생각일 뿐이다. 사회주의의 실패는 자본주의의 성공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본주의의 부패와 제국주의의 악랄함을 고발하는 역할일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사회주의를 공부해야 한다. 혁명가 레닌의 생애는 사회주의를 원하는 이들에게 분명 영감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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