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4일 뒤면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서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있을 예정이다. 비록 이번 베트남에서 열리는 회담은 북한과 미국과의 정상회담이지만, 북한과 휴전선을 맞대고 있는 우리나라도 이번 정상회담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 최근 북한과 한반도 정세 관련한 글을 써오며 누누이 강조했던 거지만, 2018년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한반도의 정세는 점차 평화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 이번 북미정상회담이 순조롭게 잘 성사된다면, 남북관계가 변화가 있을거라는 얘기가 있듯이 말이다. 분단 세월 70년이 흐른 지금 한반도는 다시 한번 평화의 길을 모색하고 있지만, 한반도가 남북한으로 분단되기 이전 좌우갈등과 미소대립을 극복하고 통일정부수립을 꿈꿨던 태양과도 같은 지도자가 있었다. 그가 바로 몽양 여운형이다.

 

몽양 여운형은 여로모로 다재다능하고, 매력적인 인물이다. 을사조약 이후 자신의 집에 있던 노비들을 전부해방시켰던 그는 1918년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1919년 김규식을 파리에 파견함으로써, 3.1운동의 불씨를 제공했었다. 일본의 그 어떠한 회유와 억압에도 견뎌냈던 그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친일로 변절하던 시기 일제의 패망을 내다보고 대비를 했던 인물이다.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여 국내 치안을 유지했고, 모스크바 삼상회의 이후 좌우갈등이 극심해지자 좌우합작을 전개하여 분단을 막고자 했다.

 

이렇듯 몽양 여운형은 업적에 비해 일반인들에게 너무나도 잊혀진 존재다. 최근들어 한반도 관계가 평화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보니, 더더욱 그의 정신을 본받고 싶어지고, 그의 염원이던 분단극복과 통일이 빨리오길 보다 더 바라게 된다. 따라서 오늘은 그를 기억하는 차원에서 지금까지 내가 읽은 여운형 관련 서적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1. 여운형 평전

 

몽양 여운형의 비서로서 활동했던 저자 이기형 선생께서 쓴 여운형 평전이다. 저자 이기형은 암울하던 전두환 정권 시기 통일운동을 했었고 ,그 시기 몽양 여운형의 평전을 집필했다. 2013년 별세하기 전까지 통일운동을 전개했던 저자는 통합진보당에서도 활동했었다. 1988년 그가 쓴 여운형 펑전은 2004년 실천 문학사에서 이 책을 새로 출판했다. 사실 평전이라기보다는 인물 사나 회고록 성격이 강하다. 여운형 생애에 대한 웬만한 자료는 다 있다.

 

 

 

 

 

 

 

 

 

 

 

 

2. 찢겨진 산하

 

백범 김구, 몽양 여운형 그리고 민주화운동가인 장준하가 사후에 만나 한국 근현대사와 통일을 논한다는 전개를 가지고 있는 책이다.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있혀진 역사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3. 혈농어수

 

여운형 사망 60주기를 앞두고 여운형이 고마신사 방명록에 남긴 친필 혈농어수(피는 물보다 진하다)를 제목으로 삼아 3권으로 묶어 출간한 정치 소설이다. 1945년 일제가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하는 시점부터 1947 몽양 여운형이 암살될때 까지가 대부분의 내용이다. 그리고 1945년 당시에 대한 내용이 굉장히 방대하다. 다만 해방전후사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그의 일제 시절 독립운동이나 몽양 여운형의 전반생애에 대한 내용은 굉장히 짧게 넘어간다. 책을 읽다가 심심해질때쯤 꼭 한번씩 야한얘기가 나와 읽는이의 정신을 번쩍들게 만든다. 당시 해방 전후사를 아는데 있어서 좋은 책이다.

 

 

 

 

 

 

 

 

 

 

 

 

4. 여운형 평전

 

전독립기념관장이자, 민주화운동가인 김삼웅 선생께서 쓴 여운형 평전이다. 광복 70주년인 2015년에 출판됐다. 저자 김삼웅에 따르면 여운형 평전이 기존에 꽤 많이 나왔지만 대개는 너무 학술적이거나 대개는 해방 전후사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기에 일반 시민들이 접근하기 쉽고 이해하기 쉽도록 여운형 평전을 다시썼다 한다. 저자가 한국근현대사 인물 평전을 30권 이상 쓴 사람이라 책 또한 굉장히 잘 썻다.

 

 

 

 

 

 

 

 

 

 

 

5. 몽양 여운형

 

산하 출판사에서 나온 여운형 평전이다. 서문은 해방의 그 날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시작한다. 그 다음에는 여운형의 생애를 이야기 하고, 끝부분에선 그의 암살과 그의 딸 여연구 여사의 아버지 묘소 방문을 다룬다. 기존의 인물 평전이나 몽양 여운형 관련 서적을 읽는 것이 버겁다면, 입문격으로 읽어볼만 하다.

 

 

 

 

 

 

 

 

 

 

 

 

6. 나의 아버지 여운형

 

몽양 여운형은 비명횡사하기 전 자신의 두딸을 북조선으로 보내 김일성 위원장에게 맡겼다. 그의 두딸 중 하나인 여연구 여사가 쓴 책이다. 따라서 북에서 출판된 책이기도 하다. 그의 딸인 여연구 여사가 본 몽양 여운형에 대해 알 수 있다. 그러나 북조선의 입장이 많이 반영되기에 "김일성 축지법"이나 "일본 천황에게 조선 독립을 역설했다."는 믿기 힘든 얘기도 나오니 이런 부분은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 그래도 그의 딸이 썻다는 점에서 대채로 참고할 만한 내용들이 적지 않다.

 

 

 

 

 

 

 

 

 

 

7. 건국투쟁

 

뉴라이트 계열 학자인 박명수가 쓴 책이다. 주로 이승만과 박정희 찬양에 열을 올리고 있는 백년동안이라는 출판사에서 출간했다. 여운형 관련 서적이라기 보단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 대해 다루고 있다.저자의 성향 답게 건국준비위원회를 반공이데올로기적인 시각에서 조명하며 친일파의 집합체인 한민당 계열을 마치 독립운동을 계승한 집단처럼 왜곡하는 결정적인 오류가 있다. 이 책의 내용을 보면 "대한민국은 여운형의 인민민주주의를 선택하지 않고 송진우와 한민당 세력이 주장하던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했기 때문에 북한같은 지옥의 나라가 되지 않고, 부자나라 됐다는 것"이 핵심이다. 즉 뉴라이트들이 이승만 세력에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자주 하는 주장인 "좌우합작은 공산화의 길이다."라는 식의 메카시즘적인 주장을 그대로 계승한 셈이다.

 

 

 

 

 

 

 

 

 

 

 

 

8. 여운형을 말한다

 

2007년 몽양 여운형 서거 60주년 해서 개최했던 몽양 학술 심포지엄의 논문 자료집이기도 하다. 논문 뒤에 몽양 여운형의 생각과 행적을 보여주는 글과 자료들을 연도별로 실어 연구자들의 참고 자료가 되도록 했다. 따라서 몽양 여운형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자료다.

 

 

 

 

 

 

 

 

 

 

 

 

 

9.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한국 현대사 교수이기도한 서중석 교수가 쓴 책이다. 이 책은 여운형만을 주제로 다룬 책은 분명 아니지만, 해방 전후사 파트에서 여운형에 대해 나름 심도있게 다뤘다.

 

 

 

 

 

 

 

 

 

 

 

 

10. 여운형

 

한국 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기획한 독립운동가 시리즈 교양 서적중 하나다. 지금으로 부터 2달 전인 2018년 12월에 출판됐다. 주로 몽양 여운형의 독립운동 업적을 잘 정리했다. 말 그대로 교양차원에서 입문하기 위해 읽어볼만 하다.


 

 

 

 

 

 

 

 

 

 

 

 

11. 여운형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정치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는 명예교수이자, 한국 독립운동사와 여운형, 이승만, 박정희등을 주로 연구한 이정식 교수가 쓴 책이다. 지금까지 나온 몽양 여운형 관련 서적 중에 가장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책이다. 그만큼 자료조사가 철저하다.  다만 저자가 몽양 여운형을 긍정적으로 보면서 이승만과 박정희도 동시에 좋게 보는 인물이라, 이승만 관련 서술은 좀 걸러볼 필요가 있다. 그래도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 보단 훨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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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야샤 1
다카하시 루미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2년 3월
평점 :
품절


말이 더 필요한가. 지금봐도 씹띵작!!!!! 만화도 애니도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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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세계대전 당시 전세를 뒤집었던 대전투가 있었다. 이 전투로 인하여 세계대전의 정세는 추축국에서 연합국에게 유리해졌고, 나치 독일은 점차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패주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의 승승장구한 진격을 단번에 역전시킨 미드웨이 해전(Battle of Mid-way)과 과다카날 전투(Battle of Guadalcanal)가 있었다면, 유럽전선에선 독일군과 소련군이 맞붙었던 스탈린그라드 전투(Battle of Stalingrad)가 있다.

 

1. 배경  

1941622일 바르바로사 작전(Operation Barbarossa)을 통해 소련 영토로 깊숙이 진격해가던 독일군은 194112월 모스크바 외각까지 진격한다. 100년 전 나폴레옹 군대가 모스크바 전투에서 패배했듯이 히틀러의 독일군도 모스크바 전투에서 패배한다. 모스크바 전투 이후인 1942년 우크라이나를 점령한 히틀러의 독일군은 코카서스 유전지대를 점령하기 위해, 다시 한 번 거침없는 진격을 이어갔다. 19426월 청색작전을 실행한 독일군은 A군과 B군으로 나누어 A군은 코카서스 지대로 향하게 했고, B군은 볼가강을 끼고 있는 스탈린그라드로 향하게 했다. 그렇게 해서 19428월 독일군은 스탈린의 도시 스탈린그라드에 도달했다.

 

2. 독일의 스탈린그라드 진입 

19428월 스탈린그라드 외각에 도달한 독일군은 도시 진입에 앞서 독일 공군인(Luftwaffe)를 투입하여 도시를 폭격한다. 탱크 사냥꾼이자 급강하 폭격기인 슈튜카와 융커스 폭격기로 이루어진 2천여대의 독일 항공기가 투입되어 스탈린그라드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공군의 지원을 받은 독일군은 남쪽에 있던 제4기갑군과 합류하여 차츰차츰 소련군을 격파해 나갔다.

 

그러나 도시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도시는 스탈린의 도시였고, 스탈린과 소련의 고위 간부들은 이 도시를 무조건 지키고자 했다. 그에 따라 스탈린그라드에 투입된 소련군 병사들은 폭격기의 폭격으로 파괴된 도시의 잔해 속에서 독일군에 맞서 격렬하게 저항했다. 스탈린그라드에 진입한 독일의 기갑군단은 파괴된 잔해 속에서 진격이 늦춰졌고, 건물에서 대기하고 있던 소련군의 기습을 받았다. 이후 스탈린그라드의 지휘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는 예비대까지 투입했으나,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점점 더 치열해졌다.

 

결국 히틀러는 코카서스로 가던 A군의 일부를 스탈린그라드에 투입하고, 소련군도 보다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하면서 이 전투는 양측 150만 이상의 병력이 투입되는 상황까지 오게 된다. 194210월 독일군은 소련군과의 교전에서 점점지쳐갔지만, 도시를 점차 점령해갔고, 10월 말 독일군은 도시의 90% 차지하는데 성공한다.

 

3. 소련군의 반격

 

194211월 독일군이 볼가강 교두보로 내몰린 소련군 잔존 세력들을 소탕하고 있던 사이, 150만 이상의 소련군이 스탈린그라드를 공격하고 있던, 독일군 사이로 집결한다. 소련의 게오르기 주코프 장군과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장군은 루마니아군이 방어하고 있던 독일군의 측면을 공략하기로 결정하고, 남북에서 독일군을 포위할 계획을 세워놓았다. 대규모의 소련군이 남쪽과 북쪽에서 루마니아군을 향해 덮쳐왔고, 194211월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에 있는 수십만의 독일군을 포위한다. 포위된 독일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는 히틀러에게 전화하여 탈출할 것을 보고했지만, 히틀러로부터 온 답변은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하라는 명령이었다.

 

194212월 소련군에게 포위당한 수십만의 독일군을 지원하기 위해, 만슈타인 장군이 이끄는 기갑부대가 출동했지만, 파울루스는 총통의 지시를 따랐다. 결국 만슈타인이 보낸 부대는 스탈린그라드로부터 철수했고, 파울루스의 군대는 탈출할 수 있는 기회마저 잃게 된다.  

19431월 파울루스가 이끄는 독일군을 향해 소련군의 공세가 시작된다. 파울루스는 결국 히틀러에게 항복을 허가를 요구했다. 이를 거절한 히틀러는 130일 파울루스를 진급시켰으나, 194322일 극심한 추위와 식량 고갈 그리고 소련군의 포위로부터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고 판단한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는 결국 자신이 지휘하던 25만 명 이상의 군대와 함께, 소련군에게 항복한다. 이로써 6개월간 지속되던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소련군의 승리로 끝이 난다.

 

4. 의의

19432월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소련군의 승리로 끝나면서 2차세계대전의 전세는 연합국에게 유리하게 전개된다. 그리고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있고 난 뒤, 소련군은 이에 힘입어 독일군을 향해 모든 전선에서 진격하게 된다. 따라서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2차세계대전의 방향을 바꾸고 역사를 새로 쓴 전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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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2-20 2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슈타인과 파파 호트의 구원군이 스탈린그라드
부근까지 접근했지만, 총통의 멍청한 사수 명령
으로 결국 탈출하지 못하고 독일군 최정예 6군
의 괴멸을 가져온 것이 전쟁 국면의 대전환점
이었죠.

파울루스를 원수로 진급시킨 건, 명예롭게
자결하라는 의미였다고도 하더군요. 독일 국
방군 원수 중에 적에게 항복한 장군은 없었
다라는 이유로 말이죠.

NamGiKim 2019-02-20 22:08   좋아요 0 | URL
탈출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죠.
 
셀마
에바 듀버네이 감독, 톰 윌킨슨 외 출연 / 비디오여행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1960년대 미국의 민권운동을 이끌었던 사람이 있다. 그는 백인과 흑인의 연대와 공존을 주장하며, 평화를 추구하고 억압받고 차별받는 사람들의 권리를 쟁취하고자 했다. 그가 바로 30대의 젊은 흑인 목사 마틴 루터 킹이다. 19세기 남북전쟁 이후 미국 정부는 법적으로 흑인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했었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남부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흑인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하지 않으려 했고, 이는 1960년대 까지도 그러했다.

 

영화 제목인 셀마는 말 그대로 1965년 마틴 루터 킹과 흑인들 그리고 진보주의자들이 흑인들의 투표권을 위해 투쟁을 시작했던 곳의 지명이기도 하다. 인종평등과 투표권을 요구하는 그들의 목소리에 대한 미국 남부사회의 대응은 무자비하고 잔인했다. 그들은 과거 노예를 다뤘을 때처럼, 채찍으로 때리고, 곤봉을 휘갈겼으며, 단순히 피부가 검다는 이유로 그들을 멸시했다. 심지어 총으로 쏴 죽이는 일도 있었다. 흑인들에 대한 백인들의 대응은 폭력과 멸시 그리고 억압 그 자체였다.

 

마틴 루터 킹은 그들에 맞서 투쟁도 하고, 협상도 하며, 많은 이들과 연대했다. 비록 비폭력에 의존한 투쟁이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엘라베마 주에서 흑인들의 투표권을 쟁취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적잖게 많은 눈물을 흘렸다. 경찰과 인종주의자들에게 무차별 폭행당하는 흑인의 모습과, 마틴 루터 킹의 연설은 나도 모르는 사이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영화 셀마의 주연은 분명히 마틴 루터 킹이지만, 그가 했던 그 유명한 연설인 ‘I have a dream'으로 시작하는 그 명연설은 등장하지 않는다. 킹도 킹이지만, 권리를 위해 투쟁했던 수많은 흑인 대중들을 이 영화는 극중에서 절대 외면하지 않는다. 그들을 보여줌으로서, 개개인이 모여 단체가 되었을 때 수많은 이들의 목소리가 어떻게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지를 영화는 보여준다.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무신론자이긴 하나, 그의 설교는 날 매우 감동하게 만들었다.

 

투표권을 찾기 위한 그들의 행진은 셀마에서 시작하여 몬트고머리에서 끝난다. 그러나 위대한 목사 마틴 루터 킹은 이것은 절대 끝이 아니다라는 것을 분명 밝히고 강조한다. 그렇다. 더 좋은 사회를 위한 세계인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영화가 말했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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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기 생애

 

호치민 그는 1890년 응우옌 신삭이라는 사람의 아들로 꿍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태어났다. 아버지는 가난한 유학자였고 어머니는 서당 훈장의 딸이었다. 그의 가족의 형편은 그리 좋지 않았다. 호치민이 4살 때인 1894년 그의 아버지는 과거에 응시하여 크 냔(천거 받은 사람)’을 취득했다. 명예로운 학위를 받은 사람은 제국 관료 체제 내에서 관직을 얻어 자신의 영광을 구하고 가족을 부유하게하는 것이 상례였지만 그의 아버지는 공부를 계속하면서 동네에서 고전을 가르쳐 약간의 수입을 얻는 쪽을 택했다. 호치민이 10살이 되던 해 그의 어머니는 병으로 사망한다. 1895년 그의 아버지는 국가 최고 등급 과거인 티 호아를 보았지만 급제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제국의 수도 후에에 살기로 결정했고, 그의 아버지는 응에 안에 잠깐 돌아와 두 아들과 부인을 데리고 후에로 떠났다. 이 때 호치민은 후에까지 여행하며 그의 아버지에게 신화적인 동물이나 베트남 역사의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호치민이 10살이 되던 해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타인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준다. 이 시기 호치민은 아버지와 함께 고전 공부를 계속했지만, 그의 아버지 친구가 가르치는 지역 학교로 가게 되었다. 그 시기 호치민은 <삼국지><서유기>같은 책들을 읽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호는 중국의 한자와 유교를 공부하였지만 새로운 문물을 알기위해 17세가 되던 1907년 베트남 도시 후에에 있는 프랑스식 국립학교인 국학에 들어간다. 당시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던 시대였고,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호치민은 반프랑스 시위에 참가한다. 당시 프랑스어를 할 줄 알았던 호치민은 통역을 맡았다. 결국 호치민은 시위에 참가했다는 이유때문에 국학에서 퇴학당했다.

 

퇴학당한 호치민은 공부를 포기하고 교사가 되기 위해 사이공에서 동쪽으로 160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판티에트라는 항구로 갔다. 그 이유는 판 보이 쩌우가 그곳에 있는 학교의 교사자리를 얻도록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호치민은 1910년 초 그곳에서 교사로 활동하다 1911년에 그만 두고 그해 6월 사이공에서 프랑스의 기선 아미랄 라투셰 트레빌 호에 주방 보조로 취직함으로써 베트남을 떠났다. 이렇게 해서 호치민은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미국, 남미 등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2. 세계여행과 프랑스에서의 활동

 

1911년 호치민은 사이공에 있던 프랑스의 기선 아미랄 라투셰 트레빌 호(해외를 돌아다니는 프랑스 선박이었다.)에 주방보조로 취직하여 약 2년간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 등을 여행한다. 19117월 호치민은 프랑스 마르세유에 도착한 뒤, 프랑스 하층민들의 생활상을 직접 보게 된다. 그는 세네갈에 있는 다카르에서 폭풍우가 몰아치는데도 프랑스인들의 명령에 따라 배까지 헤엄쳐 가던 아프리카인 몇 명이 죽는 광경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 시기 호치민은 미국으로 건너가 보스턴에 있는 호텔 옴니 파커 하우스(Omni Parker House)’에서 요리사로 일했고, 노동자로도 일하며 흑인인권운동에도 관여했다. 1914년 영국에서는 청소부 요리사 보조 등 온갖 일을 하며 노동조합 활동에 관여했다.

 

1917년 호치민은 프랑스 파리로 돌아와 베트남 노동자들을 선동하는 작업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1914년에 시작됐던 제1차세계대전은 191811월 독일 제국의 항복으로 끝이났다. 이후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승전국들은 전후 처리문제로 인하여 프랑스에서 회담을 갖게 되었고, 이는 결국 식민지 국가들에게 있어서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겨졌다.

 

19191차 대전 이후 열렸던 파리강화회의를 염두에 두었던 호치민은 안남애국자연합을 결성한 뒤 안남 민족의 요구를 그해 6월 베르사유 회의에서 응으옌 아이 쿠옥이란 가명으로 발표하였으나 프랑스를 비롯한 제국주의 국가들은 안남 민족의 요구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 시기 프랑스 파리에서 김규식과 조소앙을 비롯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도 교류했었다고 한다. 서구 열강들이 수많은 식민지 국가들에게 실망을 안겼을 때 또 다른 세력은 식민지 국가들을 돕고자 했다. 바로 1917년 사회주의 혁명으로 탄생한 레닌의 혁명 러시아다.

 

레닌과 볼셰비키들은 국제 혁명을 촉발시키기 위해 3인터내셔널1919년에 창설했다. 1920년 제2차 코민테른 대회에서 러시아의 레닌은 민족과 식민지 문제에 대한 태제를 발표했고, 이는 서구 열강의 식민 지배를 받던 국가의 독립운동가들에게 지지를 받았다. 1920년 호치민 또한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하고 제3인터내셔널 협력위원회 의원이 되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여파가 젊은 호치민에게도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1921년 호치민은 국제식민지연맹을 결성하기도 했으나, 베트남 식민지배에는 반대하지만 베트남 자체에는 무관심 했던 프프랑스 공산당하고 많이 갈등했다고 한다.

 

1922년 호치민은 <르 파리아>를 창간하고 편집인으로써 활동했다. 르 파리아의 신문사는 주로 프랑스의 식민정책을 비판하고 특히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를 비판했다. 이런 신문이었기에 프랑스 당국은 이 신문사를 탄압했고, 호치민을 체포하려 했었다. 그 외에도 호치민은 파리에서 발행되는 다른 좌파 신문이나 정기간행물에도 꾸준히 글을 썼다.

 

3. 모스크바 유학과 중국에서의 활동

 

19236월 호치민은 프랑스에서 도망처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로 탈출하면서 체포는 면했다. 그 대신 그가 이끌던 르 파리아는 해체되고 만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호치민은 코민테른 극동국에서 근무하였고, 그해 12월 호치민은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강의를 들었다.

 

1924년 레닌이 사망했다. 그는 사회주의 혁명가 레닌을 만나고 싶어 했으나, 끝내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모스크바에 있던 시기, 레닌의 아내 크룹스카야와 후에 스탈린의 심복이 될 보로실로프 장군 그리고 비운의 혁명가 트로츠키하고 만나 교우하기도 했었다. 19246월 호치민은 제5차 코민테른 대회에 참석한다.

 

레닌 사망 이후 코민테른이 점차 소련의 하부조직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당시 호치민은 베트남 독립에 열정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코민테른과 소련에게 있어 베트남 문제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192412월 호치민은 중국 광둥 성 광저우로 갔다. 1925년 호치민은 베트남 혁명 청년회를 결성하고 광저우에 세워진 혁명 단체에서 교사로 활동한다. 그리고 거기서 호치민은 교사로 활동하면서 1926년 베트남 혁명 교과서인 <혁명의 길>을 집필하고, <시험대에 오른 프랑스 식민주의>를 출간했다. 당시 중국은 손문의 지도하에 국공합작이 진행되고 있었다. 당시 호치민 또한 19261월 광저우에서 열린 중국 국민당 제2차 전국대표대회에 참가하여, 조선의 독립운동가 몽양 여운형과 더불어 아시아인 대표 중 한 사람으로서 연설에 참여했다.

 

그러나 손문이 사망한 뒤, 그 뒤를 이은 장개석은 중산함 사건과 난창 봉기 진압을 통하여 공산당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호치민은 1927년 공산당이 국민당으로부터 탄압 받자 호치민은 홍콩을 거쳐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로 도피했다. 11월 파리, 베를린 등에 머물며, 12월 반제국주의 동맹 집행위원회에 참석했다.

 

4. 인도차이나 공산당 창당과 활동

 

1929년 태국에 있던 호치민은 1930년 베트남의 사회주의 조직들의 분파 싸움을 해결하고, 베트남의 안남공산당과, 인도차이나 공산당 그리고 인도차이나공산주의 연맹을 통합하여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창당한다. 창당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베트남의 통킹과 안남지역에서 프랑스의 식민지배와 착취를 반대하여 베트남 국민당을 중심으로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이에 공산당도 동참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군대와 전투기를 동원하여 이를 야만적으로 진압했고, 말미암아 봉기는 실패로 끝났으며, 프랑스는 베트남 독립투사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했다. 그러던 19316월 호치민은 홍콩에서 체포된다. 그리고 1년 뒤 석방된다.

 

1934년 호치민은 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레닌대학에 입학했다. 1935년 호치민은 모스크바로 건너가 코민테른 제7차대 회에 참가 했고, 스탈린 대학교에서 교사로도 활동했다. 이 시기 그는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과 레닌의 <좌익 소아병>을 베트남어로 번역했다. 그러나 호치민이 모스크바에 있는 동안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지도자들과 많은 이들이 프랑스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따라서 호치민은 다시 아시아로 돌아가고자 했으나, 코민테른은 이를 거부했다. 결국 호치민은 1938년이 되어서야 모스크바를 떠났다.

 

1938년 호치민은 중국 구이린 성에 있는 팔로군 본부에서 일했다. 그는 기자 일을 하면서 보건 담당 간부로도 일했다. 그 시기 호치민은 또한 반프랑스 독립운동 세력과의 연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5. 베트민 창설과 태평양 전쟁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19406월 프랑스는 나치독일에게 점령당했다. 그때부터 호치민은 베트민 조직을 창설하고 호치민이라는 가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40년 호치민은 운남성에서 팜 반동과 보 응우옌 지압을 만났고, 이때부터 호치민은 중국식 이름인 호치민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됐다. 1941년 호치민은 30년 만에 베트남으로 돌아와 비엣 박에 해방구를 만들고 베트민 사령부를 만들었다. 나치독일의 프랑스 점령 이후 나치의 동맹국 일본은 베트남을 침략했다.

 

이때부터 호치민 휘하의 베트민은 프랑스와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41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이 전쟁에 참전하게 되자 태평양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걸 계산한 호치민은 1942년 중국의 도움을 얻기 위해 중국으로 갔다가 스파이로 오인하여 중국 경찰에게 체포당했다. 감옥생활을 하면서 <옥중일기>를 집필한다. 오인으로 인한 체포였기에 19439월에 석방됐다.

 

19439월 호치민이 감옥에 있던 사이 2차 세계대전의 전황은 급격히 변해갔다. 독일은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대패한 이후 후퇴를 거듭하기 시작했고, 일본은 1942년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국에게 패배한 이후부터 미군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했다. 1943년 석방되고 난 뒤 호치민은 중국국민당의 도움을 받아 중국 남부에 혁명 운동 기지를 건설하고 2차 세계대전이 사실상 막바지이던 194412월 보응우옌지압의 지휘하는 베트남해방군이 창설됐다. 1945년 중반쯤에는 보응우옌지압 장군의 지휘하는 베트민 군대의 규모는 10000명 까지 늘었을 정도로 세력이 형성됐다.

 

태평양 전쟁 막바지인 1944~45년 미국 정부는 후방인 베트남에서 동맹군을 찾고 있었다. 미국은 호치민과 연락하면서 그곳에서 일본군의 전력을 약화시킬 방법을 찾길 바랐다. 그래서 미국은 베트민의 지도자 호치민과 접선하기 위해 미국 CIA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OSS(Office of the Strategic Services)팀을 만들어 베트남에 보냈다. 이후 호치민과 접선한 OSS는 호치민이 이끌던 베트민 조직에게 탄약, 무기, 식량 등을 지원했다.

 

호치민은 당시 베트남에 와있던 OSS의 패티 소령에게 미국이 필요하다면 인도차이나에서 언제든지 약 1000명의 베트민 게릴라를 지원할 수 있다.”고 제안했을 정도로 미국에게 우호적인 감정을 들어냈다. 실제로 미국의 OSS는 인도차이나에서 최초의 미군 군사작전을 계획하고 있고, 그들이 이끄는 사슴팀(Dear Team)'까지 만들어 준비했다. 1945716일에는 앨리슨 토머스 소령이 이끄는 50명의 OSS 게릴라 부대가 낙하산으로 투하되어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이 지휘하는 게릴라 부대와 함께 작전을 수행했다. 자동소총, 기관총, 수류탄 등으로 무장한 지압장군의 게릴라 부대가 몇 개의 일본군 외곽 초소를 공격했고, OSS사슴팀은 베트민과 계속 공동 작전을 펼치면서 관활 지배 지역을 확대해 나갔다.

 

6. 일제의 패망과 독립 선언 그리고 프랑스의 재점령

 

2차 대전이 거의 끝나 가던 1945년 미국은 대일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베트남에 있는 베트민 세력을 이용하기로 하고 OSS 요원들을 베트남에 파견하여 베트민들을 훈련시켰으나, 19454월 히틀러의 자살과 독일 항복 그리고 오키나와 전투 이후 전세는 급격히 변해갔다. 이를 염려했던 호치민은 태평양 전쟁 말기 빠르게 변해가는 전세를 걱정하여, 베트남 내부에서의 총 봉기를 준비했다. 그러던 1945815일 일본은 항복했다. 일본의 항복 하루 뒤인 816일 총 봉기를 일으켜 822일에는 북부 대부분을 장악했다. 이후 호치민을 중심으로 한 내각이 구성되었고, 194592일 전함 미주리호에서 있을 일본의 공식적인 항복서명 날에 맞춰 호치민은 하노이 광장에서 베트남의 독립을 선언한다. 호치민의 선언한 베트남 독립 선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 그들은 창조주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생존, 자유, 행복의 추구 등이 그러한 권리이다.이 불멸의 선언은 1776년 미합중국의 독립선언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넓은 의미에서 이런 뜻입니다. 지상의 모든 민족들은 날 때부터 평등하며, 모든 민족은 생존의 권리, 행복과 자유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1791년 프랑스 혁명의 인권선언문에는 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모든 사람은 자유롭게,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으며, 이 자유와 평등의 권리는 평생 유지되어야 한다.”

 

출처: 호치민 평전 p.483~484

 

그러나 연합국들은 이를 무시하고 일본군 무장해제라는 명분아래 베트남을 16도선을 기점으로 북쪽에는 중국의 국민당군이 남쪽에는 영국군이 베트남에 주둔하도록 만들었다. 중국의 국민당군은 국공내전이 일어나면서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영국군 또한 철수했지만, 영국군은 베트남을 재식민지화 하려던 프랑스를 위해 프랑스군이 다시 들어올 수 있게 환경을 만들어 놓고 난 뒤 철수했다.

 

프랑스는 베트남을 다시 식민지화하고 싶어 했다. 1945년 프랑스군이 다시 들어오자 호치민은 프랑스와의 협상을 통해서 독립을 유지하고자 했다. 호치민은 당시 베트남 주둔 프랑스군 사령관인 장생트니와의 협상을 이어나갔다. 프랑스와의 타협기간 동안 호치민은 연립정부를 구성하여 주석으로 선출되었고, 19467월 호치민은 프랑스의 퐁텐블로에서 열린 평화회담에 참석했다. 퐁텐블로 협상은 말처럼 쉽지 않았기에 확실한 타협점을 양측 모두 보지 못했고, 그해 9월 회담은 결렬됐다.

 

7. 1차 인도차이나 전쟁과 디엔비엔푸 전투

 

호치민과 프랑스 간의 기나긴 협상기간 동안 베트남 내에 있던 프랑스군과 베트민군 간의 긴장관계는 점차 높아져 갔고, 몇 차례 교전이 일어났다. 19461123일 프랑스군은 북베트남의 항구인 하이퐁(Hai Phong)’을 군함으로 포격을 가했다. 포격으로 인하여 최소 600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그리고 1달 뒤인 1219일에는 수도 하노이에서 프랑스군과 베트민군 사이의 교전이 벌어졌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전쟁 초기 전세는 프랑스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194710월 프랑스군은 비엣박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호치민을 체포하려 했고, 프랑스군은 2차대전 당시 나치독일과의 전쟁으로 단련된 군대였던 데에다가, 화력도 베트민보다 훨씬 우수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게릴라전이 위주였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프랑스에게 있어 불리한 전쟁이었다. 기본적으로 민중은 프랑스를 지지하지 않았고, 프랑스군은 도처에서 약탈과 강간 그리고 민가에 폭격을 가했다. 따라서 민중은 독립투쟁을 전개하는 베트민 편이었다.

 

1949년 중국공산당이 내전에서 승리하면서 베트민을 보다 적극적으로 돕기 시작했다. 1950년에는 마오쩌둥의 중국과 스탈린의 소련이 호치민의 베트남공화국을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중국은 프랑스에 맞서 독립투쟁을 전개하던 베트민에게 물자를 지원하고, 중월 국경 근처에서 베트민의 군사훈련을 지원해줬다. 그덕분에 19509월 중순 베트민 부대들은 국경지역 전체에 걸쳐 프랑스의 취약 시설에 대한 일련의 기습을 개시했고, 중월 국경지대에 있는 동케를 점령했고, 더 나아가 그해 12월에는 홍 강 삼각주까지 탈환하기에 이른다.

 

195012월 베트남은 프랑스와의 전투에서 나름의 유리한 위치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이에 힘입어 1951년 보 응우옌 지압이 이끄는 베트민은 공세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하여 하노이 해방을 목표로 전면 공세를 시작했다. 그러나 프랑스군 사령관 장 드라트르 드타시니 장군은 1951년 베트민 부대들이 가하는 총공격에 맞서 미국으로부터 지원 받은 전투기와 네이팜탄으로 맞섰고 공격은 실패로 끝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격화되자, 미국은 호치민의 요청을 무시하고 노골적으로 프랑스편을 들기 시작했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1946년에 일어나자 미국은 지원군을 보내지는 않았지만, 프랑스에게 전쟁 물자를 지원했다. 1949년 중국의 내전이 마오쩌둥의 승리로 끝나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남에 따라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대한 물자 지원량은 점차 늘어났고, 한국 전쟁 휴전 협정이 막 시작되던 1951년 시점에는 프랑스 전쟁 비용의 80%를 미국이 지원하게 됐다. 따라서 미국은 전쟁에 군사를 파병하지만 않았지 사실상 전쟁에 개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프랑스는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물자를 전쟁에서 사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1952년 타시니 장군이 악화된 지병 때문에 프랑스로 귀국하고, 베트민 부대들이 호아 빈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다시 전세는 베트민 측으로 기울어진다. 1953년에는 북부 지역을 거의 장악하고, 베트남과 중국의 국경지대를 완전히 장악한 후, 라오스 국경지대까지 프랑스군을 몰아내려고 하자 프랑스는 디엔비엔푸에서 승부를 보기로 하게 된다.

 

1954313일 디엔비엔푸 전투가 시작됐다. 베트민 부대들은 디엔비엔푸 요새를 포위하기 위해 순수히 인력만으로 중포를 산에다 숨겨놓아 포위망을 만들어 놓았고, 이들은 프랑스 비행기의 감시를 피하며 진군했다.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의 지휘아래 베트민군이 공격을 개시하자 프랑스군은 맥없이 무너졌고, 19545756일간의 포위 끝에, 전투는 베트민의 승리로 끝이 났다.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처참하게 패배한 프랑스는 8년이라는 전쟁기간동안 7만 명이나 되는 군대를 전투에서 잃었고 결국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디엔비엔푸 전투가 프랑스의 대패로 끝이 나면서,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승자는 베트민이 되었다. 디엔비엔푸 전투에서만 프랑스군은 2300명 이상이 전사했고, 1만 명 이상이 항복했으며, 8년간의 전쟁 기간 동안 프랑스군은 총 74천 명 이상이 전사했다. 물론 베트민 측의 전사자는 이보다 더 많았지만, 독립과 승리를 쟁취했다.

 

8. 분단과 토지개혁

 

베트남과 프랑스가 디엔비엔푸에서 전투를 치르는 동시에 제네바에선 평화회담이 열렸다. 결국 베트남은 제네바 협약에 따라 17도선을 기점으로 북과 남으로 나뉘게 되었다. 제네바 협약에 따르면 분단 이후 2년 이내에 남북을 아울러 통일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해야 했고, 호치민과 북베트남은 처음에는 제네바 협약을 기초로 한 통일정부를 위한 2년 이내의 선거를 주장했다.

 

그러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때부터 반공주의적인 관점에 따라 베트남 문제에 지속적으로 개입해오던 미국은 만일 총선이 치러지면 민중의 80%가 호치민을 지지할거라 예상했다. 따라서 미국은 통일선거를 치르지 않기 위한 목적으로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을 지속적으로 지원했다. 이를 대비하여 북베트남의 호치민은 우선 북베트남부터 경제국유화, 토지개혁을 비롯한 정책을 북베트남에서 우선적으로 실행하였다. 그러나 토지개혁 과정에서 60만이상의 가톨릭교도들을 포함한 80만 이상의 사람들이 월남했고, 대략 15천명 이상이나 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특히나 토지개혁 과정에서 가톨릭 신자들의 피해가 매우 컸다. 물론 토지개혁 과정에서 숙청당한 가톨릭 중엔 프랑스 식민지 시절 외세에 빌붙었던 민족반역자들도 분명 있었으나, 반프랑스 항전을 도와줬던 사람들도 희생자가 되기도 했었다. 그 이면엔 당시 가톨릭에 대한 북베트남의 인식도 반영되었다. 그 과정에서 가톨릭 계열 봉기가 일어나기도 했었다.

 

소련에서 흐루쇼프 서기장의 스탈린 비판이 있고 난 후, 스탈린 격하 운동이 벌어지던 1956년 호치민은 토지개혁의 참상을 인정하고, 책임자 추옹친을 해임시키며 철저한 자아비판을 통하여, 실책에 대한 책임을 줬다. 물론 토지개혁 시기 한계가 분명 있었지만, 갈등이 있던 가톨릭들의 신앙의 자유를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해주고, 토지개혁을 통하여 최소한의 먹고 사는 문제와 지주 계급의 부패를 청산함으로써 제2차세계대전 당시 제국주의와 지주계급의 극심한 착취로 인하여 200만 이상이 굶어 죽게 만드는 사회적인 시스템을 없앴다. 이는 분명 호치민 토지개혁의 장점이었고, 결과적으로 호치민과 북베트남 정부는 토지개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했다.

 

9. 남베트남 정권의 부정부패와 혼란

 

북베트남의 호치민의 토지개혁을 실행해 나갈 시기 남베트남에서는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은 응오딘지엠이 정권을 잡았다. 베트남이 남북으로 분단되었을 시기 응오딘지엠은 프랑스가 세운 허수아비 황제 바오다이를 축출하고 대통령 자리에 올라섰다. 정권을 잡은 응오딘지엠은 자신이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로 초대내각을 가톨릭 신자로만 구성하며 가족정치를 펼쳤다. 응오딘지엠 정권은 농민이 대다수였던 베트남에서 농민들의 반발을 대량으로 사며 토지를 가톨릭 신자들에게만 우선적으로 할당했다. 그리고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고,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죽이고 구금하고 고문했다. 무엇보다 민중의 90%라 할 수 있는 불교를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응오딘지엠의 통치로 인한 그의 가족들과 내각 그리고 군부의 부정부패는 극에 달했다.

 

응오딘지엠 정권은 자신의 동생 응오딘뉴를 앞세워 백색경찰국가를 만들었다. 수많은 사람을 공산주의자로 몰았고 이 과정에서 5만 명을 이상이 죽었다. 그런 봉건주의적 정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공산당의 승리와 한국전쟁을 경험한 미국은 도미노 이론을 내세워 공산주의를 막겠다는 명분하에 응오 딘 디엠 정권을 지속적으로 지원했다. 결국 남베트남은 응오딘지엠 세력을 중심으로 한, 상류층들만을 위한 부패한 사회가 되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응오딘지엠 정권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에 맞서 대불항전을 전개하던 베트민 잔존세력들까지 탄압했다. 베트민 잔존세력들에 대한 탄압과 더불어 불교를 탄압하며 석가탄신일을 금지시키는 둥 아주 막장에 가까운 통치를 보여줬다. 이는 결국 남베트남에 있던 불교도들의 집회가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고, 19636월에는 틱광둑이라 불리는 남베트남의 고승이 자신의 몸에 기름을 붙고 소신공양을 하는 충격적인 일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응오딘지엠의 재수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중놈이 바비큐가 된 거다.”라고 하며 고인을 능욕하는 파렴치한 행위까지 보였다. 결국 응오딘지엠 정권은 미국 CIA 정권의 지원을 받은 내부 쿠데타로 무너진다. 이후 남베트남은 10번 이상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고 19657월 응우옌 반 티우가 정권을 잡으면서 끝이 났다.

 

10.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과 미군의 개입

 

1956년 토지개혁이 끝난 뒤, 호치민은 1957~58년 사이 동독을 비롯한 구공산권 나라들을 방문하며 외교활동을 했었다. 그러던 1959년 호치민과 북베트남 지도자들은 남부 통일을 최우선 순위로 선정한다. 훈련받은 요인들을 남으로 침투시키는 이른바 남부해방을 제1의 목표로 삼게 된다. 침투한 일부 요인들과 응오딘지엠의 독재정치와 친 가톨릭 정치에 불만을 품은 남베트남 사람들이 모여 만든 내부조직이 바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이른바 베트콩이다.

 

베트콩(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196012월에 남베트남에서 자생적으로 창설되었다. 베트콩이라는 단체는 초기에 응오딘지엠 정권 축출을 목표로 했다. 그리고 북베트남은 이를 지원하는 형태였다. 베트콩은 남베트남에 맞서 무장투쟁 및 각종 투쟁을 이어나갔고, 프랑스군 출신의 남베트남 군 관료들은 베트콩과의 전투에 있어서,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처럼 프랑스에 협력했던 민족반역자들로 구성된 군대는 전투에서도 무능력 했다. 응오딘지엠 정권을 지속적으로 지원해오던 미국은 남베트남에 군사고문단을 파견하면서 지속적으로 지원했고 1960년대 케네디 정부가 들어섰을 때는 군사고문단 숫자 또한 3 만 명의 규모로 늘어났다. 그런 미국의 인적 물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남베트남군은 베트콩과의 전투에서 무능력한 모습을 보여줬다.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는 것이 19631월에 일어난 압박 전투인데, 그 전투에서 1500명의 남베트남군이 300명의 베트콩에게 대패했다.

 

11. 통킹만 사건과 베트남 전쟁의 시작

 

응오딘지엠의 쿠데타로 축출된 이후 CIA의 지원을 받았던 두옹반민이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그가 정권을 잡기가 무섭게 남베트남은 지속적으로 군부의 쿠데타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케네디 정부가 암살된 이후 이를 지켜보고 있던 린든존슨은 전쟁에 전면적으로 개입하기 위해 19648월 통킹만 사건을 일으켜 전쟁에 개입하는 자작극을 벌였다.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미국은 북베트남에게 선전포고하고 1964년에는 비엔호아 공군기지와 1965 중부고원 지대 플레이쿠에 있던 미군기지가 공격을 받자 미국은 롤링썬더 작전이라 하여 이른 바 북폭에 나선다.

 

베트남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미국은 베트콩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남베트남 정글에 무분별한 고엽제를 살포하여 산림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많은 민간인들을 죽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베트남군이 전투에서 무능력함을 보이자 미국은 19653월 다낭에 첫 지상병력을 파견한다. 이에 따라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과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그리고 태국도 남베트남에 군대를 파병한다. 19667월 호치민은 '자유와 독립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 구절은 북베트남인들의 통일전쟁에 대한 의지를 버리지 않는 주제, 구호가 되었다.

 

12. 구정 공세와 호치민의 사망

 

1965년부터 1967년까지 미군은 사실상 전선 없는 전쟁을 남베트남 안에서 치렀다. 1967년 말까지 약 2만 명이 넘는 미군 전사자가 속출했다. 구정 공세가 일어나기 한 달 전인 196712월 호치민은 당 지도부가 계획한 '총 공격과 봉기'를 승인 했다. 그의 승인에 따라 1968131일 베트남의 대명절 구정때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대대적인 대규모 공세를 감행하였다. 구정공세가 바로 그것이다.

 

1968131일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남베트남 전역에서 공격을 가했다.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을 비롯하여 여러 도시들이 베트콩의 공격을 받았다. 베트남의 옛 수도 후에는 베트콩이 1달 간 점령했고, 케산은 제2의 디엔비엔푸 전투를 연상시켰으며, 수도 사이공은 잠깐이기는 하지만 베트콩 공격부대가 미대사관1층을 점령했다. 그러나 구정공세 1달 기간 동안 북베트남과 베트콩은 3만 명 이상이 죽었던 데에 비해 미군 2천명 이상이 사망하고 3천명이 부상당했다. 그러나 구정공세는 전투 사상자로만 봐서는 미국의 승리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베트남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고 거짓 선전을 한 미국의 거짓말이 드러나는 대공세이기도 했다. 구정공세 이후 베트남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는 미국의 선전이 구정공세를 통하여 거짓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미국국민들은 분노했다. 이후 미국에서 반전운동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구정 공세 이후 린든 존슨은 196811월 하노이에 대한 폭격을 일시적으로 멈춰야 했고, 결국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하는 데 실패한다.

 

19683월 구정 공세로 인한 반전 운동으로 미국이 고민에 빠져있을 당시 호치민은 베이징에서 구정 공세의 결과를 보고 받았고, 베트남 정치국 국원인 레둑토가 "구정 공세 이후의 상황을 평가하기 위해 곧 남부로 출장을 갈 것"이라고 얘기하자, 호치민 또한 함께 내려가겠다는 강한 의지를 나타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 시기 호치민은 자신의 건강 때문에 요양 차원에서 중국을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이었기에 직접 남부에 내려가지는 못했다.

 

그러던 196992일 호치민이 심장병으로 사망한다. 사실 호치민은 1960년대부터 건강이 안 좋아 요양과 치료를 위해 수차례 중국을 방문했으나, 전반적으로 업무나 일상생활에 있어선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었다. 이는 죽기 전날도 마찬가지였다. 즉 호치민은 갑작스러운 심장병으로 사망한 것이다. 그가 사망하자 베트남은 슬픔에 잠겼다. 그의 장례식은 99일 오전 7시 영상 41도의 더위 아래 거행되었다. 광장에 모인 10만 명의 인파는 한없이 흐느꼈고, 군악대는 남부를 해방하라라는 베트콩 국가를 연주했다. 당시 외신기자로서 베트남 하노이에서 호치민의 장례식을 지켜본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저자 마이클 매클리어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남겼다.

 

위대한 지도자를 잃은 비탄과 감동, 혼란이 함께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넋을 잃은 듯이 행동했다. 한 사람의 훌륭한 정치 지도자를 잃고 애도하는 그런 슬픔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들이 슬픔을 꾹 참고 견디는 모습이었다. 호치민의 인민들은 호 아저씨가 부르기만 하면 누구라도 달려와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순간들이었다.”

 

출처: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 444

 

공교롭게도 호치민이 사망한 92일은 1945년 호치민이 일본제국주의를 몰아내고 나서 독립을 선포했던 날이었고, 1969년은 미국의 닉슨 정부가 미군을 단계적으로 철수를 감행하던 해이며, 베트남 전 당시 미군이 저지른 조직적인 민간인 학살인 미라이 학살의 양심 있는 기자에 의해 세상에 드러났던 해이기도 하다. 무튼 호치민은 미국과의 전쟁 도중 베트남의 통일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13. 베트남의 통일

 

구정 공세 이후 미국 내에서의 반전운동의 규모는 커져만 갔다. 미국 대통령이 된 리처드 닉슨은 1969베트남화 정책을 실행하여 7월부터 단계적으로 미군 철수를 감행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미국은 1970년 캄보디아를 침공했고, 1971년에는 남베트남군과 공군력을 앞세워 라오스를 침공하기도 했다.

 

반전운동의 여파로 구정공세 이후 북베트남 공습은 일시적으로 멈추기도 했고 미국은 군대철수를 1969년부터 단계적으로 절차를 밟기 시작했지만 미국과의 전쟁은 1972년까지 계속 되었다. 1972년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대규모 공세인 부활절 공세(Easter Offensive)’를 감행하였다. 미군은 중국과 소련으로부터 지원 받은 수백 대의 탱크와 장갑차를 동원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공격을 막강한 공군력으로 막아낸 뒤, 라인베커 작전을 개시했다. 그리고 1972년 미국은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약11일간 마지막 대규모 폭격을 북베트남에 감행하여, 북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와 항구도시 하이퐁을 비롯한 북베트남의 도시들을 초토화 시켰다. 그러나 베트남은 미국의 마지막 공세에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19731월 미국은 북베트남과 파리평화 회담을 통해 베트남에서 완벽히 철수 한다. 베트남 전쟁기간 동안 미국은 58천명에 가까운 병사들이 사망했고 26만 명 이상이 부상당했으며 지상군 탱크 및 장갑차 800대 항공기 3700대와 헬기 4800대를 베트남과의 전쟁에서 잃었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100만 이상이 죽었지만 결국 베트남에서 물러난 쪽은 미국이었다.

 

197412월 북베트남 정부는 남베트남을 통일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19751월 북베트남군은 실험삼아 남베트남군이 있는 푹롱 성을 공격했고 3주 만에 점령했다. 1975310일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남베트남군의 주요거점지인 부온마투옷을 점령함으로써,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으로 가는 길을 확보했고, 1975326일 중부에 고립된 최대의 기지이자 도시인 다낭이 함락되고, 남베트남군은 궤멸된다. 197547일에는 사이공 동쪽 64Km 부근에 있는 쑤언록에서 남북베트남군은 전투를 치렀고, 420일 남베트남 지휘부는 쑤언록을 방어하던 군대에게 수도 사이공으로 후퇴를 명한다.

 

당시 대통령이던 티우는 부정축재로 모은 금괴 2톤을 몇 대의 비행기에 실은 뒤, 베트남을 탈출했고, 1975430일 북베트남군과 베트콩 군대가 사이공으로 진군하고, 대통령궁에 59식 전차를 진격시킴으로써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로써 베트남 전쟁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승리고 끝난다. 즉 베트남 민족해방전쟁은 오랜 기간의 전쟁 끝에 통일을 이룩한 것이다. 비록 호치민은 통일되기 6년 전인 1969년 통일을 못 본채 사망했지만, 호치민을 믿고 따랐던 북베트남 지도부와 북베트남의 인민들은 호치민의 그토록 바라던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이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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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화 2019-02-13 14: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우 이렇게 디테일하게 서평을 쓰시다니 멋져요

NamGiKim 2019-02-13 14:44   좋아요 0 | URL
서평이라기 보단 인물 일대기 정리죠.^-^

NamGiKim 2019-02-13 15:07   좋아요 0 | URL
무튼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