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 역사의 진실》 출판후원 보고와 2차 후원을 요청드립니다

 

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 역사의 진실(김남기 저 어깨걸고 전국노동자정치협회 발행출판 후원을 해주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성심성의껏 추천사를 써주신 분들께도 존경의 마음을 담아 감사를 드립니다.

지금까지 총 38분이 후원하고미주양심수후원회해방세상 두 단체에서도 출판 후원을 해주셨습니다.

그 동안 1474천 원의 출판 후원금이 걷혔습니다.

현재 출판 등록을 한 상태이며막바지 편집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공식 출판은 9월 27일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공식 출간 전까지 2차 후원을 요청드립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미제국주의 패배에서 보듯미제국주의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습니다미제의 쇠퇴는 역사적 필연입니다그러나 인간사는 종국적으로는 격돌하는 인간들 상호 간의 투쟁 속에서 그 법칙이 실현됩니다.

미제국주의가 쇠퇴하는 국면이 다가오면 올수록 미제는 그 퇴장을 늦추기 위해 격렬하게 저항하고그럼으로써 더 추악하고 반동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곳에서도 미제의 역사적 퇴장을 앞당기기 위해 투쟁해야 할 것입니다.

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 역사의 진실이 그 역사적 과업을 수행하는데 도구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 후원은 1만 원부터입니다.

 

◎ 1, 2차 출판 사전 후원을 해주신 전체 후원자들께는 한국사회와 변혁의 길을 출판한 책과 같이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1, 2차 후원자들 중 2만원 이상 후원자들께는 [맑스레닌주의 총서2] 맑스주의와 무정부주의를 같이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출판 사전 후원자들 중 출간된 책 여러 권이 필요하신 분들은 따로 요청해 주기 바랍니다.

 

◎ 책을 보내드릴 주소와 이름연락처와 필요한 권수를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 문의

010 2533 3083

 

◎ 후원 계좌

229301-04-187600

국민은행김남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댓글저장
 

(이 글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에 나오는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미국의 세균전 문제는 전쟁 2년째인 1952년 초 불거졌다그해 2월 22일 북의 박헌영 외무상은 미군이 세균무기를 사용하고 있다고 유엔에 항의했다박 외무상은 세균을 지닌 다량의 곤충이 1월 28일부터 북측 지역 상공에서 미군기로 살포되었다면서 전 세계 인민에게 간섭주의자들의 불법행윌르 조사할 것을 호소했다이틀 뒤인 2월 24일엔 중국의 저우언라이 총리가 미국에게 세균전 중단을 촉구했다저우언라이 총리는 또 미군 비행기가 2월 29일 이래 중국의 화북과 동북부에서 세균전을 벌이고 있다고 3월 8일 거듭 비난성명을 발표했다.

 

그러자 당시 소련의 야코프 말리크 대표가 유엔 총회에서 북과 중국의 입장을 지지한 반면 미국의 대표인 벤자민 코헨(Benjamin Cohen) 대사는 그들의 주장은 진실성이 없다고 일축하면서 미국정부는 이런 불성실하고 경우 없는 비난을 예상하고 있었다고 부인했다.

(스티븐 엔디콧의 저서 <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

 

이렇게 불븥은 미국의 세균전 논란은 파문을 일으켰다세균(생물할)무기는 1925년 6월 체결된 제네바의정서(Geneva Protocol)에서 화학무기와 함께 이미 전쟁 때 사용이 금지됐다그런데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731부대가 만주지역에서 생체실험을 벌이고 세균전을 자행한 사실이 드러나 큰 충격을 주었다결국 전쟁범죄로 규정되고 관련자들이 처벌받은 터인데 다시 불거진 미국의 세균전 문제는 국제사회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논란이 식지 않자 미국은 유엔을 통해 세계보건기구(WHO)가 국제적십자사의 현지 방문조사 등을 제안했지만 북과 중국은 이를 거부했다세계보건기구는 당시 북·중국과 교전 중인 유엔의 기구였고 또 국제적십자사의 경우 유력 회원인 스위스 국제적십자위원회(ICRC)가 2차 대전 당시 히틀러의 가스 수용소의 존재를 은폐한 전력이 있었다더욱이 당시 ICRC위원장은 바로 문제가 된 2차 대전 당시의 적십자위원이었다.

(2010년 아랍 언론계 알 자지라에서 방영했던 한국전쟁 세균전 관련 내용 보도)

 

대신 북과 중국은 1952년 3월 29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세계평화의회에 중립적인 과학자들이 참여하는 국제조사단 구성과 그를 통한 현지조사를 제안했다세계평화의회 집행위원회는 이를 받아들여 영국과 프랑스이탈리아소련 등 6개 국적의 지명 과학자 7명으로 된 국제과학위원회(위원장 조지프 니덤(Joseph Needham))를 파견했다국제과학위는 그해 7월부터 두 달 가까이 중국과 북에서 현지조사를 벌이고 피해자와 목격자그리고 미 공군 포로들을 직접 인터뷰했으며 중국과 북측 보건의료 관계자들도 만났다국제과학위는 현장 방문 결과와 수집 자료 등을 토대로 670(요약문 64쪽과 부록 605)에 이르는 한국과 중국에서의 세균전에 관한 국제과학위원회 사실 조사보고서(Report of the International Scientific Commission for the Investigation for the Facts Concerning Bacterial Warfare in Korea and China, 약칭 니덤 보고서라 불린다)’를 작성해 중국에서 발간했다일부 내용을 소개한다.

 

조사단(국제과학위원회)은 결론적으로미 공군은 일본군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질병을 널리 퍼뜨리기 위하여 사용했던 그것과 정확히 같은 것은 아니더라도 거의 유사한 방법을 한국에서 사용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따라서 조사단의 의견으로는 괴질병에 걸려있는 많은 곤충들이 1952년 4월 4일부터 5일에 걸쳐 야밤을 통해 비행기로 강남지방으로 운반되었음이 분명하다이 비행기는 미국의 F-82 쌍발 야간 전투기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상기의 사실로 보아 조사단은 탄저열균을 가진 곤충과 거미는 3월 12일에 요동지방의 이 작은 도시 가까이에 적어도 1대의 미국 항공기에서 적어도 1개의 특수한 용기를 통해 투하되었다고 결론 내리지 않을 수 없다.”

북조선과 중국의 인민은 실제로 세균병기의 목표가 되었다이들 병기는 목적에 따라 대단히 다종다양한 방법을 구사하는 미군 부대에 의해 사용되었다이들 방법에는 일본군(저자 주:731부대)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사용했던 것을 개발한 것도 있을 것이다조사단은 일보일보 전진하여 이런 결론에 도달하였다그것은 마지못한 가운데 이루어졌다왜냐면 조사단원들은 이런 비인도적인 기술이 세계 인류의 비난을 무시하고 실시되었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즉각 공산주의자들의 음모라고 반발했다메튜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 미국동군 사령관은 “(공산주의자들의)온갖 악의에 찬 거짓선전 중에서도 세균전 주장은 미국인들과 자유세계에 대한 가장 터무니없는 경고라고 반박했다.

 

반면 북은 미군이 이미 1950년 겨울부터 세균전을 벌였다고 주장한다.

 

놈들은 쫓겨 가면서 일시적으로 강점하였던 공화국 북반부지역(평양시평안남북도함경남도강원도황해도)에 천연두 병균을 살포하였다그리하여 당시까지 천연두가 전혀 발생한 일이 없었던 이 지역들에서 천연두 환자가 급격히 늘어났다. 1951년 4월에 이르러 천연두 환자는 3,500여 명에 이르렀으며 그중 10%가 사망하였다.”

 

북은 또 미군 비행사 포로들에 대한 심문 등을 근거로 세균전이 실험단계와 작전단계로 나뉘어 진행됐다는 분석을 내놨다. “첫 단계(실험단계)에서는 주로 효과적인 세균탄 투하의 목표를 선정하며 투하방법 및 세균전 전술을 련마하는데 목적을 두었다면 둘째 단계(작전단계)에서는 오염지대를 설정하고 집중적인 투하를 일층 강화할 것을 계획했다는 것이다그리고 실험단계가 1951년 10월 시작됐다고 하는데 이와 관련된 흥미로운 해외보도가 지난 2010년에 나왔다그해 3월 17일 아랍권 위성채널 <알 자지라>가 한 다큐멘터리에서 미군이 한국전쟁 당시 북에서 세균전 실험을 명령한 문서를 발견했다며 작전 상황에서 특정 병원체의 효과를 알아보기 위해 대규모 현장실험을 시작할 것을 명령한 미국 합동참모본부의 1951년 9월 21일자 문서를 공개한 것이다이 문서는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찾았다고 한다미군의 세균전 실험단계가 1951년 10월 시작됐다고 밝힌 <조선전사> 27권이 출간된 시점이 1981년이다세균전에 관한 그 기록의 신빙성을 입증하는 미군의 비밀문서가 30년 만에 한 아랍계 언론의 탐사보도로 세상에 공개된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 살포된 것으로 추정되는 벼룩들)

 

작전단계는 1952년 5월 하순부터였다고 한다특히 이때엔 조산빈더 중부를 횡단하는 한 개의 감염지대를 설정하고 이 지대에 일상적으로 세균탄을 투하함으로써 전염병을 만연케 하여 우리의 후방공급이 이 감염지대에서 차단되여 전선에 도달되지 못하게 하려는 악랄한 목적을 추구하였다고 주장한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세균전 실행 지도)

 

북은 세균 공격이 1953년에도 계속됐다고 한다북은 “1953년 1월 9일 함경남도 혜산군 장락리에는 1평방메타당 1만 마리의 파리거미개미딱장벌레들이 투하되였으며 3월 10일에는 북청군내 19개 리와 신창군의 8개 리함흥시 주변 3개 리에 파리벼룩거미개미 등 12종의 새균독충들이 산포됐고, “2월 14일부터 4월 24일까지 2개월 동안에 평안북도 곽산군태전군녕변구느 정주구느 박천구느 황해도 안악군황주군옹진군금천군토산군재령군 등지에 20여 회에 걸쳐 거미파리모기딱장벌레 등 9종의 세균 독충이 산포되였다고 주장했다.

 

북은 이런 미군의 세균전이 오랜 세균전의 경험을 가진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적극적인 협력 밑에 감행됐다고 본다즉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조선 침략전쟁에서 미제 침략자들에게 야만적인 세균전 계획 작성을 적극 도와주었으며 일본 령토를 세균전의 공격기지공급기지로 내맡기였을 뿐 아니라 세균무기 연구와 세균탄 제작그리고 세균전 감행방법 등의 경험과 그에 대한 새로운 연구성과들을 제공해주었다고 단정했다.

(한국전쟁 당시 세균전을 규탄하는 중국 측 선전물)

 

북은 미군이 화학전도 벌였다고 주장했다주로는 전선과 그 린접 지대들에서 화학무기를 사용했다는데 시작은 “1951년 5월 6일 평안남도 남포시에(미공군기가)일반 폭탄과 함께 독가스탄을 투하한 것이라는데 이로 인해 1,370여 명의 주민이 사망했다고 한다같은해 7월 6일과 9월 1일엔 원산시 풍포리와 황해도 여러 개 지구에 최루성 및 질식성 가스탄이 투하되여 수십 명의 중독자와 희생자가 발생했고 이듬해인 1952년 1월 9일 강원도 문천군 울림면 학성리의 수십 호 농가들에 “5발의 질식성 가스탄을 투하하여 평화적 주민을 즉사시키고 83명을 중독시켰다고 했다또 그해 2월 27일부터 4월 26일까지 2개월 동안엔 미군 보병부대들이 질식성 및 최루성 가스탄을 41차에 걸쳐 아군 진지에 발사하는 등 화학공격은 1953년에도 계속됐다고 강조했다.

 

미국 세균전의 숨은 그림찾기

 

한국전쟁 당시 세균전의 숨은 그림을 찾기 위한 국내외 언론과 학자들의 분투는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다선구적 역할을 한 이는 공교롭게도 미국 언론인 존 윌리엄 파월(John W. Powell)이다그는 1947년부터 1953년까지 중국 상하이에서 영문 <월간 중국 리뷰(China Monthly Review)>를 발행했는데 자신이 직접 목격한 미국의 세균전 문제를 집중보도했다그러자 미국 정부는 잡지의 국내 반입을 금지하고, 1956년엔 그와 2명의 편집 실무자를 반역죄와 선동죄 등 13가지 범죄 혐의로 기소했다파월은 미국 정부에게 비밀문서 공개를 요구하는 등 완강히 대응해 기소는 철홰됐고미국 정부는 1961년 소송 자체를 취하했다이런 사실은 2000년 7월 2일 방영된 MBC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15회 일급비밀미국의 세균전편에서 소개됐는데 파월은 제작진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일급비밀미국의 세균전편은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파월은 세균전 문제 추적을 계속해 1980년엔 2차 대전 직후 미국 정부가 일본 세균전 전범과 거래한 증거가 담긴 맥아더 사령관 관련 비망록을 입수해 <참여 아시아 학자 회보(Bulletin of Concerned Asian Scholars)>에 폭로하기도 했다여기엔 세계에서 처음 실시된 주요 생물학전 프로그램에 대한 기록이 들어있었다맥아더와 비망록을 주고받은 이들은 정보 보좌관인 찰스 월러비 소장법률 고문 알바 가핀터 등이었다.

 

미국과 일본의 세균전 커넥션의 절정은미국이 1947년 마루타로 악명 높은 이시이 시로 등 731부대 출신자들에게 생체실험 자료를 얻기 위해 그들과 직접 거래한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이는 2005년 8월 14일 당시 일본 가나가와대학의 스나이시 게이이찌 교수가 미국 국립문서보관서에서 발견한 2건의 기밀해제 문서를 언론에 공개해 알려졌다당시 일본을 점령한 미군정은 731부대원들에게 생체실험 자료와 교환 조건으로 15~20만 엔을 주고 전범재판 기소를 면제한 것으로 드러났다이 금액은 현재 2000~4000만 엔(약 2~4억원)에 이른다. 731부대장이었던 이시이 시로는 미국에게 협조하는 대가로 전쟁범죄에 대한 사면을 서면으로 약속해 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미국의 세균전 문제를 심층 분석한 대표적 연구물은 캐나다 역사학자인 스티븐 엔디콧(Stephen Endicott) 교수와 에드워드 해거먼(Edward Hagerman) 교수가 1998년에 쓴 <The United State and Biological Warfare(미국과 생물학전)>이다국내에선 2003년 <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 (도서출판 중심)이란 제목으로 번역 출간됐는데 미국 생물학전의 기원에서부터 일본과의 커넥션세균전 프로그램 연구개발 및 작전계획 과정한국전쟁에서 세균전 문제 등을 비밀 해제된 미국 정부 문서자료 등을 근거로 치밀하게 추적 분석했다두 저자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제작진과도 인터뷰를 했다.

 

국내 연구물로는 강정구 전 동국대 교수가 1996년 단행본으로 출간한 <분단과 전쟁의 한국현대사> (역사비평사)에서 10번째 주제로 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을 다뤄 주목받은 바 있다.

 

출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 p.84~9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댓글저장
 

2001 9.11테러 당시 내 나이는 7살이었다당시 나는 유치원에 다녔던 나이었던지라, 9.11테러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아마 2003년이었던 것 같다당시 텔레비전에서 미군으로 추정되는 군인들과 대규모의 탱크부대가 사막에서 진격하는 장면을 나는 보았던 기억이 있다그 당시에는 너무나도 어린 나이었기에 나는 이라크라는 나라 이름만 알았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전쟁이 일어났는지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하나도 몰랐다.

(2001년 9.11 테러 당시 사진)

 

내가 보다 미국 역사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하워드 진(Howard Zinn)이 쓴 책들을 읽게 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당시 하워드 진이 쓴 책들에는 미국이 어떻게 해서 제국주의 국가인지를 아주 일목요연하게 잘 설명하고 있었고나는 진 선생이 쓴 글에 감명 받았다. 3년 전 군복무를 마치고나서 나는 1달 동안 미국여행을 할 기회가 있었다뉴욕에서 대략 1주일동안 있었던 나는 9.11기념관 근처를 들렸었다당시 내가 이곳을 방문하며 느낀 감정은 미국은 과거사에 전혀 반성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베트남을 폭격하는 미국으 B-52 폭격기)

 

2001년 9월 11일 오사마 빈라덴과 그 알카에다 세력들이 9.11테러를 일으켰다이 테러로 최소 3,00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이는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사망했던 미국인 숫자보다 더 많은 수치였다냉전 이후 세계 최강의 국가라 자부하던 미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고, 2년 뒤인 2003년에는 이라크를 침공했다이렇게 해서 중동분쟁의 화약이 터져버린 것이다미국의 이라크 전쟁은 대략 2011년에서 2012년에 종결됐고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올해 8월 31일에 종결됐다이 전쟁에서 미국은 막대한 군사력과 자금을 쏟아 부었고그 나라를 초토화시켰다이라크 전쟁에서만 65만 명의 이라크 민간인이 미군의 공습으로 사망했으며아프가니스탄에서도 최소 15만 이상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전쟁 당시 마을에 투하된 네이팜 폭탄)

 

사실 미국은 9.11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었는데아프가니스탄 전쟁 초기인 2001년 12월 말까지 미군의 공습 및 군사작전으로 죽은 아프가니스탄 민간인이 최소 2만 명을 넘겼었다개전 초기 몇 주 동안 죽은 아프가니스탄 민간인의 숫자는 9.11 테러로 희생된 민간인 숫자를 훨씬 상회했다앞서 설명한 이라크 전쟁 또한 마찬가지였고이라크 전쟁에서는 테러리스트들을 잡는다는 명목으로 온갖 기행적인 고문들을 이라크군 포로에게 행했다이 전쟁을 계획했던 인물인 조지 부시와 딕 체니 그리고 도널드 럼스펠트와 콘돌리자 라이스 등은 이러한 전쟁을 일으키고 계획한 침략자들이었다심지어 딕 체니의 경우 자신이 CEO로 있던 핼리버튼 회사를 통해 이라크 전쟁에서 석유산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기까지 했다이런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2003년 이라크 전쟁은 미국의 자본이 더 많은 부를 축적하기 위해 일으킨 침략전쟁이었다.

 

미국이 하는 방식은 과거에도 전혀 다르지 않았다. 1947년 그리스 내전에 개입하여 소수의 고문단과 네이팜 폭탄을 투하할 때도결과적으로 이익을 보는 세력은 미국 자본가 세력이었다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도 마찬가지였다사실 냉전시기 미국이 개입한 전쟁들은 식민주의와 파시즘의 모순 속에서 자유라는 장식을 포장되었을 뿐이었다그리고 그런 전쟁개입과 내정간섭에서 미국이 이러한 행위를 하는 이유에는 근본적으로 자신들의 자본주의적 이해관계에 입각한 것이었다베트남 전쟁도 그러했다말이 좋아 민주주의를 지키러 간다는 명분을 세웠지만현실은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이 만들어 놓은 토대에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포장해서 일으킨 전쟁이었고그 나라 민중의 80%(대다수 베트남인들은 호치민과 공산당을 지지함.)의 염원을 짓밟아버린 행위였다해방 후 한반도에 이승만 정부를 수립한 것도 민중들의 염원(해방 후 한반도 민중 70%가 사회주의를 지지)과는 거리가 먼 일이었다이는 제주4.3항쟁을 통해서 입증된다.

(아옌데 사후 수많은 칠레 시민들을 체포하는 피노체트의 군인들)

 

라틴 아메리카와 중동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반복되는 미국의 제국주의 침략 및 내정간섭은 소위 서방세계에서 쉽게 잊혀지곤 한다특히 미국이 만들어 놓은 9.11 이미지 메이킹은 참으로 소름이 돋을 정도다마치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를 빌미로 자신들의 제국주의적인 전쟁범죄를 전부 다 덮어버리려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모습이 생각날 정도다실제로 미국은 그러하다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자신들에 의해 무수히 많은 민간인 사상자가 생긴 사실은 외면한 채아프가니스탄에서의 여성인권 및 탈레반 세력의 잔혹성만을 부각시킨다이런 것이 바로 미국이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다.

(이라크 전쟁 당시 포로들에게 온갖 고문과 폭행을 일삼는 미군 병사들)

 

9.11 테러로 희생된 미국인들은 당연히 도덕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인권적인 측면에서 안타까운 일이다그러나 미국은 자신들이 저지른 수많은 과거에 대해선 전혀 반성하지 않는다한국전쟁에서의 폭격 및 세균전베트남 전쟁에서의 폭격 및 맹독성 고엽제 살포 그리고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폭격과 드론 공습 등에 대해선 반성하는 모습을 국제적으로 잘 보여주지 않는다그렇게 미국이 죽인 타국의 생명은 수천만이 넘어감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반성하지 않는다아직도 반공주의적 감수성에 빠져 미국의 폭력 행위에는 감각이 없는 이들은 마찬가지로 미국정부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작년 1월 이란과 미국의 대립 구도에서 반전운동이 일어났을 때한국에서도 반전운동이 소규모로 진행되었지만일각에서는 한국의 호르무즈 해협 파병을 지지하는 아주 아제국주의적인 성향을 보여줬다그리고 그랬던 이들은 현재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얘기할 때도 앵무새처럼 똑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하워드 진의 말대로 미국은 정말 과거로부터 아무런 반성을 하지 않고 있다. 9.11 20주년인 오늘 우리가 머릿속에 새겨야할 사실이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청아 2021-09-11 21: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각종 뉴스에서 나오는 관련 기사들 보며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하워드 진의 책은 미국을 제대로 알기 위해 꼭 읽어야하는 필독서라 생각합니다.
911로 희생된 죄없는 희생자들은 안타깝지만 어떤 죽음은 추모되지도 기억되지도 않는다는게 더 끔찍하네요.

NamGiKim 2021-09-11 21:14   좋아요 2 | URL
해방정국 10만
한국전쟁 150만
베트남 전쟁 300만
캄보디아 1차 킬링필드 50만
이라크 아사 정책 150만
이라크 전쟁 65만
아프가니스탄 전쟁 15만
그외의 수많은 미제 침략 및 개입으로 거의 수천만이 죽었다 봐도 과언이 아니죠.

그러나 우리는 기억과 역사평가에 있어서 얼마나 공정할까요? 저는 지극히 서구편향적이라 봅니다.

NamGiKim 2021-09-11 22: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9월 27일날 제 책도 알라딘서 살 수 있으니, 이 부분에 대해 관심있으면 읽어보세요.
댓글저장
 

1963 11 1일 남베트남에서 군부 주도의 쿠데타(coup d'état)가 발생했다당시 쿠데타를 일으킨 인물은 남베트남군 장성인 즈엉반민(Dương Văn Minh으로 Dương Văn “Big” Minh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으로 그는 1945 3월 일본의 쿠데타 당시 프랑스군에 복무하며 일본군과 전투를 치른 적이 있는 인물이었다그는 프랑스 식민지 군대에 복무했으며이후 바오다이 정부와 응오딘지엠 정부에서도 남베트남군에서 복무하며 장성까지 올라간 인물이었다.

(응우옌카인)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제네바 회담에서 베트남을 남북 분단시킨 미국은 남베트남에 반공 민족주의자인 응오딘지엠(Ngô Ðình Diệm)을 내세워 친미 꼭두각시 정부를 세웠었다그러나 응오딘지엠 정부는 초기에 미국이 걸었던 기대와는 달리 독재정치와 민심붕괴 그리고 토지개혁 실패 등으로 국가를 제대로 운영하지 못했고남베트남 민중들은 1960년에 창설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즉 베트콩(Viet Cong)을 지지하게 됐다디엠 정부의 인기는 특히나 불교를 탄압하면서 나락으로 떨어졌고, 1963년 6월 11일 고승 틱광둑(Thích Quảng Ðức)이 수도 사이공 거리에서 분신자살을 하면서 종말로 나아갔다.

 

거기다 1963년 기준으로 베트콩은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의 추산으로 남베트남 지역 40%를 통치하고 있었고일부 통계에 따라선 최대 남베트남 국토 75%를 접수한 상황이었다남베트남에 미군사고문단을 파병했던 미국의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 정부는 결국 CIA를 동원하여 응오딘지엠을 암살하기로 결정했다이에 따라 남베트남군의 장성인 즈엉반민 장군이 쿠데타를 주도하게 됐고이들은 사이공에서의 군사작전 끝에 응오딘지엠과 그의 동생 응오딘누(Ngô Đình Nhu)를 살해하는데 성공했다이렇게 해서 남베트남에서 첫 번째 정권 교체 쿠데타가 성공한 것이다.

(로버트 맥나마라와 응우옌카인)

 

그러나 응오딘지엠의 죽음은 아이러니 하게도 남베트남에 더 큰 혼란을 가져왔다물론 남베트남 정부는 응오딘지엠 정부 시점부터 망해가고 있었지만그가 사망하자 남베트남에서는 군벌들의 권력 쟁취 싸움이 지속적으로 일어났다그 이유는 디엠이 죽은 이후 정권을 잡은 이들의 통치력이 매우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디엠 암살 3주뒤 미국에서는 케네디가 암살당했다케네디가 죽자 부통령이었던 린든 B. 존슨(Lyndon B. Johnson)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1963년 12월 맥나마라는 자칫하면 2~3개월 안에 남베트남이 공산당이 지배하게 될 수 있다.”고 보았다그만큼 남베트남의 상황은 당장 무너져도 놀랍지 않은 수준이었던 것이다.

 

다음해인 1964년 1월 30일 이번에는 남베트남군 대령 출신인 응우옌카인(Nguyên Khánh) 장군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1주일 뒤인 2월 7일에 즈엉반민 장군을 형식상의 수반으로 하는 신정부를 수립했다그리고 카인 자신은 남베트남의 수상으로 등극했다물론 리영희 교수가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언급했던 것처럼응우옌카인 또한 민 장군과 같은 또 다른 과거의 프랑스 식민지 장교에 지나지 않았다응우옌카인의 쿠데타 또한 미국의 힘을 얻어 진행된 것이었고이에 따라 3월에는 미국의 존슨 대통령이 맥나마라를 남베트남에 보내 카인 정부가 미국편이라는 것을 확실히 하고자 했다당시 맥나마라는 카인과 함께 남베트남 대중들 앞에서 베트남 만세!”를 외쳤는데베트남어 발음 차이 때문에 대중들에겐 베트남 만세!”가 아닌 작은 오리가 눕고 싶다.”라는 말로 들려서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쿠데타 당시 사이공의 대통령궁)

 

존슨이 맥나마라까지 베트남에 보내 자신의 편인 것을 확실시 했던 카인 정부는 마찬가지로 즈엉반민 정권처럼 대중성이 결여되어 있었다따라서 다른 남베트남 군인들이 계속 권력을 잡으려는 쿠데타를 일으켰다따라서 남베트남에서의 내부 쿠데타는 1965년까지 일어났고디엠 암살부터 1965년까지 대략 20개월 동안 총 10번의 쿠데타가 있었다2차 세계대전 말기 북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Hồ Chí Minh)과 깊은 관계를 형성하며 호치민을 존경했던 아키메데스 패티(Archimedes Patti)처럼, 1950년대 당시 응오딘지엠과 깊은 관계를 형성하며 응오딘지엠을 존경했던 에드워드 랜스데일(Edward Lansdale)은 다음과 같은 증언을 했었다.

 

“CIA는 쿠데타 진행 방법에 반대했다디엠의 몰락과 함께 장성들은 헌법도 바꿔 버렸다새 헌법에 따라 그들은 성장이나 지방 고위 관리들을 대부분 재임명하는 수법으로 개혁을 피해 갔다국가 원수를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 투쟁이 드디어 세련되고 막강한 힘을 가진 적북베트남의 면전에서 정치적인 분열로 이어졌다.”

 

출처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153

 

남베트남 내부에서 일어나는 쿠데타불교도 및 대학생 그리고 시민들의 반독재 투쟁응오딘지엠 암살 이후 남베트남 곳곳에서 남베트남군을 패퇴시키는 베트콩과의 전쟁은 카인 정부에서도 지속적으로 일어났고남베트남 정권 입장에서 오히려 더 사태가 악화되고 있었다. 1964년 8월 23일에는 반독재 투쟁 시위대가 사이공방송국을 점령했었고, 25일에는 수만명이 모인 대규모 시위가 수도 사이공에서 개최되기도 했다거기다 1964년 12월 28일부터 약 3일 동안 호치민의 표현대로 작은 디엔비엔푸(Little Dien Bien Phu)’가 빈지아 지역에서 발생했다이 전투에서 4,000명 이상의 남베트남군이 1,000명 안팎의 베트콩에게 대패했다베트콩은 32명이 전사한 반면남베트남군은 201명이 전사하고 또 다른 200명이 부상당했을 정도로 참패했다.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장군과 린든 B. 존슨 대통령 그리고 응우옌반티에우와 응우옌까오끼)

 

1964년 12월 20일 남베트남의 극우파 소장 장교를 중심으로 내부 쿠데타가 카인 정부의 민정이양 이후 탄생한 찬반후옹(Trần Văn Hương) 정부는 1965년 1월에 카인을 지지하는 세력의 군부 쿠데타로 다시 물러났고그해 2월에 또 다른 장교단의 쿠데타가 발생했다이 쿠데타에 이어 또 다른 역 쿠데타가 2월 20일에 일어났다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전면적으로 일으키는 과정과 베트콩들에게 전투에서 패전하는 속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이다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남베트남에서 베트콩과 제대로 싸울 능력도 없던 응우옌카인은 이승만처럼 북진통일(????????)’을 외치기까지 했었다.

 

남베트남의 쿠데타를 종결시킨 또 다른 쿠데타는 린든 존슨 대통령이 남베트남에 미군 지상병력을 파병하고 나서 3개월 뒤에 일어났다당시 베트남 전쟁은 다낭에 미해병대 3,000명이 상륙한 시점부터 대한민국과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필리핀태국이 베트남 전쟁에 지상병력 파병을 시작하려고 할 때였다. 1965년 6월 11일 응우옌까오끼(Nguyễn Cao Kỳ)와 응우옌반티에우(Nguyễn Văn Thiệu)가 마지막으로 남베트남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들의 정권을 잡았다대통령에는 티우가 수상에는 끼가 차지했다이렇게 되면서 남베트남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던 내부 총질의 물결은 존슨 행정부의 대규모 지상병력 파병이 실행되는 시점에서 종결됐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댓글저장
 

아니 근데 보수 기독교인들 졸라 멍청하고 병신같은 새끼들이네. 낙태를 반대한다면서, 콘돔을 극도로 싫어하는건 앞뒤가 안맞는 행동 아닌가?

 

애초에 낙태 현상을 줄이려면 콘돔사용을 권장해야 하는게 맞지. 소위 체외사정은 가임률 25%인데, 콘돔 착용하면 비행기 사고로 죽을 확률보다 임신할 가능성이 더 낮아짐. 그러니 낙태 반대론자들은 상식적으로 콘돔권장을 해야 정상임.

 

이걸 보면 소위 성적보수주의 내지는 성엄숙주의 그리고 정조따위를 강요하는 식의 관점들이 얼마나 멍청하기 짝이 없는지 알 수 있음. 내가 그래서 성보수주의를 극도로 싫어하는 것임.

 

다른 얘기지만 성적 보수주의자들이 "성매매도 하지 마라, 리얼돌도 하지마라, 야동도 보지마라"3중합창을 하는데, 이거 가만히 보니까 일부 페미니스트들도 이 함정에 빠지는 것 같다. 그냥 3개중 1,2개만 요구하는 선에서 끝내야지, 전부다 금지하라는건 일반인에게 종교인이 되어 무욕하라는 것과 뭐가 다르냐.ㅋㅋㅋㅋㅋㅋㅋㅋ


댓글(1)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NamGiKim 2021-09-08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다면, 거기에 대한 진지한 대안을 얘기를 하는가?를 생각해보면, 또 그렇지도 않다.
댓글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