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이 자유롭던 COVID-19 이전 인천공항을 제외한 국내의 기타 지역 공항에는 동남아시아행 비행편들이 제법 있었다. 그 중에는 쿠알라룸푸르도 있었는데, 제법 한국 사람들이 많이 놀러가는 곳이라 제주도 국제선이나 김포공항 국제선에서도 비행편을 예약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한국에서 6시간 정도 걸리는 쿠알라룸프르는 바로 말레이시아의 수도다. COVID-19 이전에는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 등과 더불어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놀러가는 동남아시아 국가였던 말레이시아는 20세기 저항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다만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오늘은 20세기 말레이시아의 현대사 그것도 좌파들의 투쟁사와 반동의 역사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말라야 공산당의 지도자 첸핑, 게릴라 전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2013년 8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동인도회사(East Indian Company)를 내세워 인도를 식민지화 했던 소위 대영제국은 18세기 말 비슷한 방식으로 말레이시아를 식민지화 했다. 천연고무를 비롯하여 야자유·주석·원목·원유 등이 풍부한 말레이시아는 근 현대 시기 지배자 영국에 의해 착취당했다. 20세 당시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던 말레이시아에서는 1917년 레닌의 러시아 혁명과 1921년 중국 공산당의 창당 등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운동이 일어났고, 1928년 말레이시아 안에서 남양공산당이 결성됐다. 인도차이나 공산당이 창당되던 1930년 영국 지배 하의 말레이시아에서도 남양공산당은 말라야공산당(MCP: Malayan Communist Party)으로 개칭했다.
1939년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1940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하며 파시즘 대열에 완벽히 합류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더 나아가 1941년에 미 해군 기지가 있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으며, 이에 따라 동남아시아 전체를 점령하려는 제국주의적 야심을 드러냈다. 1941년 12월 일본은 말레이 반도 북부지역에 병력을 상륙시켰다. 이 일본군대는 말레이시아 점령 절차를 이어나갔다. 1942년 2월 싱가포르를 함락시킨 일본 제25군 사령관인 야마시타 도모유키(Yamashita Tomoyuki로 아시아의 롬멜 혹은 말레이시아의 호랑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는 당시 영국군 사령관이었던 퍼시벌의 항복을 받고 말레이시아 점령을 궁극적으로 완료했다.

(말라야 반일 인민군의 깃발)
태평양 전쟁 시기 일본은 타국을 침략하면서 이른바 아시아를 해방시킨다는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웠지만, 이는 말 그대로 허상이었다. 일본 제국주의가 점령지역에서 불러온 것은 억압과 그 나라 국민을 대상으로 한 탄압이었으며, 학살과 전쟁범죄도 일어났다. 인도네시아나 버마, 베트남에서와 같이 말레이시아에서도 일부 민족주의 세력이 영국으로부터 지배를 벗아난다는 명분으로 일본을 해방자로 받아들이는 실수를 범했지만, 앞에서 언급한 사례처럼 일본은 이들을 궁극적으로 조직을 해체하거나 활동을 통제하려 했다. 결국 일본은 과거의 지배자 영국을 대체한 새로운 지배세력이었던 것이다.
일본이 말레이시아를 군사적으로 점령하자, 말라야공산당은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이 전개한 독립운동은 무장투쟁이었다. 비록 영국은 말레이시아를 지배한 지배자였으나, 반파시즘인민전선 논리에 따라 말레이시아 좌파들은 좋든 싫든 영국의 SOE와 협력관계를 구축하여, 반일투쟁에 나서기도 했다. 이들은 영국의 SOE 지도자들 휘하에서 정글에 산재하는 소수 게릴라 부대를 조직하는 것과 훈련하는 것을 돕도록 했으며, 특히 중국계 말레이시아인들이 이 독립투쟁에 많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1945년 일제 패망 이후 도시로 입성한 말라야 인민 해방군)
이에 따라 이들에 대한 일본의 탄압도 가속화 됐는데, 1942년 8월 일본 헌병대가 싱가폴에 있는 당 최고 지도자들을 체포하여 처형했으며, 바투 지역에 있는 은신처를 습격하여 중앙위왼회와 게릴라 지도자들 중 상당수가 제거되기도 했다. 이런 큰 손실을 입었음에도 좌파 세력들은 저항을 멈추지 않았고, 당서기장인 레이텍(Lai Teck)과 그의 보좌인 첸핑(Chen Ping)의 지도를 받으며, 좌익 세력이 반일 독립운동은 지속됐다.
이 좌파세력들은 중국계 인사들이 중심이 된 조직이었고, 이들은 말라야 반일 인민군(MPAJA: Malayan Peoples' Anti-Japanese Army) 조직을 바탕으로 일본군에 맞선 무장투쟁을 벌였으며, 해를 거듭하면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초기 일본군은 말레이시아에서 일어나는 좌익들의 투쟁력을 꺾기 위해 기존에 말레이시아에서 있던 민족 혹은 인종 갈등을 이용하여 최소 6,000명에서 많게는 4만 명에 달하는 중국인을 숙청하는 작업을 벌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라야 반일 인민군은 일본 통치 막바지 무렵 전국에 산재한 게릴라 부대를 동원해 며칠 안에 말레이시아를 통제할 수 있는 강력한 무장 세력으로 급성장했다. 일본이 패망하던 1945년 말레이시아에 있던 좌익 게릴라 조직은 7,000명 이상의 정규군대를 보유한 군대 조직으로 성장했고, 항일무장투쟁 기간 동안 최소 수백 명 이상의 일본군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소병국 교수의 저서 『동남아시아사』에 따르면, 일본이 항복한 시점부터 대략 3주 정도는 사실상 무정부 상태였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말라야 반일 인민군은 밀림 지대에서 벗어나 말레이시아 전역을 장악하기에 나섰고,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한 말레이인들을 대상으로 테러를 자행하기도 했었다. 항일 투쟁을 전개한 좌파 세력들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이것은 말레이시아가 가지고 있던 고유의 인종 갈등 그러니까 중국계와 말레이계의 민족적 혹은 인종적 갈등이 되었다고 소병국 교수는 책에서 주장했다.

(일제 패망 이후 수도 쿠알라룸푸르로 입성한 말라야 반일 인민군 부대)
그로부터 3주 뒤인 1945년 9월 다시 복귀한 영국은 말레이시아의 재식민지화 하기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했다. 1946년 영국 정부는 친영파 출신의 인사들과 일부 민족주의 진영 인사들을 규합하여 말라야 연합을 출범시켰다가, 1948년에 가서 말아야 연방 체제를 도입했다. 영국의 주도로 만들어진 이 나라는 당연하게도 전쟁 전 영국 식민지배하에서 말레이인 사회가 누렸던 전통적인 특권을 고스란히 유지하는 방향이었고, 새로운 친영정부는 미소냉전 초기의 흐름과 더불어 반공주의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일본군 점령 시기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던 첸핑은 영국과 일부 민족주의 진영의 주도로 친영 꼭두각시 정부가 세워지자, 이에 대항했다. 따라서 말레이시아 좌파들은 과거 일본군에 맞서 싸웠듯이, 이번에는 영국군과 친영정부에 맞서 무장투쟁을 벌이게 됐다. 첸핑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지휘했던 소규모 게릴라 부대들을 다시 활성화시켰고, 이러한 무장투쟁은 냉전 초기이던 1947년에서 1948년 사이에 가속화 됐다. 말레이 좌익 게릴라들의 무장 투쟁은 모스크바로부터 지령을 받기도 했으며, 필요에 따라선 테러와 암살, 은행강도 등의 전술도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말레이시아 비상사태(좌익 게릴라들의 무장 투쟁을 벌일)당시 민간인을 조사하고 있는 경찰과 영국군)

(말레이 정부군에게 포로로 붙잡힌 좌파 게릴라)
사실상 말레이시아를 지배했던 영국은 1948년부터 이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고, 친영정부 또한 이러한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따라서 영국과 친영 말레이 정부은 민중들과 좌파들을 대상으로 검열과 대대적인 토벌에 나섰다. 영국의 지원을 받은 친영 정부는 경찰병력과 군병력을 증강했으며, 영국 정부군 또한 이 사태에 관여했다. 『세계게릴라전사』를 집필한 로버트 에스프레이는 책에서 말레이 좌파 게릴라들이 지나치게 테러에만 의존해서 대중적인 지지를 크게 못 얻었다는 점과 대다수가 중국계로 구성되어 인종적으로 말레이인들과 갈등이 있었다는 점을 게릴라 투쟁이 결국 실패로 끝난 원인으로 분석했다. 이런 점에서 말레이 좌파 게릴라들은 대대적으로 베트남의 유일한 대중조직이었던 베트민이나 베트콩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그래도 말레이의 좌파 게릴라들은 수십만에서 많게는 100만 이상의 동조자를 획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53년 당시 게릴라를 소탕하기 위해 밀림을 수색하는 군인들)
말레이 게릴라의 무장투쟁은 1952년도가 되어서 힘을 잃기 시작했고, 영국 정부가 고안해낸 이른바 전략촌 계획에 실행됨에 따라 게릴라들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전략촌 계획은 농민과 게릴라를 분산시키는 전략이었고, 이 전략은 말레이시아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그만큼 영국과 말레이시아 친영정부가 크게 신경을 썼다는 얘기다. 좌파들의 게릴라 투쟁은 1952년에서 1954년에 이르는 2년 동안 게릴라들의 2/3가 소탕되었고 테러의 발생건수도 한 달에 500건에서 100건으로 희생자의 수도 300명에서 40명으로 감소했다. 물론 말레이 친영정부와 영국 정부도 게릴라들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많은 잔혹행위를 벌였으며, 이에 따른 희생자들도 분명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공격 단계는 1955년에 가서야 종결됐고, 1957년 말레이시아가 공식적인 독립국가가 된 시점에서도 계속되었지만, 산발적인 저항은 1960년까지 이어진 것으로 확인된다.

(농촌 지역을 수색하고 있는 영국군)

(말레이시아 비상 사태에 관한 관련 서적)
이 전쟁에서 총 수천 명의 민간인이 죽고, 친영 정부군 1,300명과 영국군 500명이 전사했다. 그리고 공산당 휘하의 좌파 게릴라들은 조직원 6,700명 이상을 잃었다. 이 전쟁은 적잖은 사상자를 냈다.
말레이시아에서 영국이 추진했던 이른바 전략촌 계획은 이후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에서 디엠의 동생 응오딘누와 그들을 지원하는 로버트 맥나마라에 의해 추진됐다. 그러나 말레이시아의 상황과는 달리, 베트남 전쟁에서는 전혀 성공적이지도 못했고, 오히려 전략촌에 있던 농민들이 정부에 협력하기 보단 베트콩의 무장투쟁에 동조하는 역효과가 만들어졌다. 참고로 말레이시아에서 사용된 이 전략촌 계획은 그 이전에 미국이 개입한 그리스 내전과 이승만 단독정부 수립에 대항해서 발생한 제주4.3항쟁에서도 사용된 방식이었다.
참고문헌
『동남아시아사』, 소병국, 책과함께, 2020
『세계게릴라전사 2』, R.B 에스프레이, 편집부, 일윌서각, 1989
『세계게릴라전서 3』, R.B 에스프레이, 편집부, 일윌서각,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