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닌 생일에 맞춰 나온 베트남의 포스터)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이자 지도자인 호치민(Hồ Chí Minh, 胡志明)은 베트남 전쟁 당시 서구 좌파들의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다. 호치민 서거 3일 뒤인 1969년 9월 5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UC 버클리 대학에선 ‘히피족(Hippie)’으로 대표되는 대학생들이 호치민의 초상화를 들고나와 그를 추모했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구정 공세(Tet Offensive)가 한참이던 1968년 2월 17일 독일의 서베를린에선 ‘국제 베트남 회의’가 열려 “미제국주의에 맞선 베트남 인민의 승리”를 지원하며, ‘호! 호! 호치민!’을 외쳤다.
이처럼 호치민은 1960년대 서구 좌파들에게 있어서 상징적인 존재였다. 그리고 그의 영향력은 지금도 좌파들에게 남아있다. 2019년 칠레에서 반정부 시위가 한참일 때, 거리로 나온 칠레인들 중 일부는 ‘호치민의 노래(Bài Ca Hồ Chí Minh)’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 따라서 호치민은 단순히 베트남의 국부일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좌파들에게 영웅과도 같은 존재다. 지금까지도 호치민은 베트남에서 최고의 위인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그가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이유에는 현재 좌파의 영향력도 무시하긴 힘들 것이다. 동남아시아의 한 인물이 이 정도로 유명해진 사례는 아마 20세기에서는 호치민 말고는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1960년대 좌파들의 우상이기도 했던 호치민은 1890년 5월 19일 베트남 응에안 성(Nghệ An)에서 태어났다. 2016년부터 하노이 일월대학 총장을 지냈던 후루타 모토오 교수는 자신의 저서 『호찌민-민족해방과 도이모이』에서 그의 출생 년도가 미스터리하다고 밝혔으며, 1891년이나 1893년생일 수 있다고 했다. 후루타 교수에 따르면 그의 생일인 5월 19일도 사실은 1941년 5월 19일 즉 베트남독립동맹(베트민, Viet Minh) 창설일을 생일로 표기한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호치민 평전』의 저자 윌리엄 J. 듀이커(William J. Duiker)는 호치민의 출생일을 1890년으로 표기했으며, 베트남 측 자료가 제법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호치민의 아버지는 과거시험에 합격한 관리였고, 아버지를 따라 당시 수도였던 후에(Hue)로 가서 공부했다. 17살이 되던 1907년 호치민은 프랑스식 국립학교인 국학에 입학했으며, 거기서 반프랑스 시위를 했다가 퇴학당했다. 19세기 중반부터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았고, 당시 베트남에선 판보이쩌우(Phan Bội Châu)로 대표되는 반프랑스 독립운동이 일어났었다. 호치민 또한 판보이쩌우의 학교에서 잠시나마 교편을 잡기도 했으며, 그러던 1911년 사이공으로 가 프랑스 기선 아미랄 라투셰 트레빌 호에 주방보조로 취직했다.
1911년 6월 만 21세의 나이에 베트남을 떠났으며, 30년간의 길고 긴 해외 생활을 이렇게 시작했다. 서방에서 베트남 근현대사 1세대 연구자인 버나드 폴(Bernard Fall)은 “이러한 호치민의 행적이 아시아의 사회주의 지도자 마오쩌둥과의 큰 차이점”이라 주장했다. 주방보조로 일하게 된 호치민은 그 해 7월 프랑스 마르세유에 도착해 처음으로 외국 생활을 체험했고, 알제리, 튀니지 등의 프랑스 식민지와 라틴 아메리카, 유럽, 아시아 등을 돌아다녔다. 젊은 시절 그는 미국에도 있었는데, 뉴욕과 보스턴에도 있었으며 보스턴의 옴니 파커 하우스에서도 일했다고 한다. 1913년에는 미국을 떠나 영국 런던에도 정착했었고,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참이던 1917년 다시 프랑스 파리로 돌아와 활동하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 종결 이후 1919년 파리강화회의가 열리자, 호치민은 프랑스사회당에 입당해 안남애국자협회를 조직하고 사무총장이 되었다. 그는 베르사유 궁전에 찾아가 8개 항목으로 구성된 ‘안남인민의 요구’라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여기에는 모든 정치범의 석방, 언론자유 보장, 결사와 집회의 자유보장 등, 베트남인과 프랑스읜의 동등한 권리 요구가 전부였다. 그러나 이러한 호치민의 청원은 프랑스 당국 인사들과 서구 열강에 의해 철저히 외면받았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호치민은 프랑스 파리에서 3~4년간 머물렀는데, 2018년에 밝혀진 문서에 따르면 김규식 조소앙과 같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인사들과 교류했었다.
1920년 7월 프랑스사회당 기관지인 뤼마니테(l'Humanité)에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킨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의 「민족문제와 식민지 문제에 고나한 테제 원안」이 게재됐다. 이 글을 읽은 호치민은 레닌에게 감명받아 같은 해 12월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했다. 호치민은 1960년 그가 쓴 「나를 레닌주의로 이끈 길(The Path Which Led Me To Leninism)」에서 자신이 어떻게 레닌을 신뢰하게 됐는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논문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정치적 개념들이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반복하여 읽고 또 읽었고, 마침내 핵심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이 논문을 통해 위대한 감성과 열정, 계몽, 그리고 자신감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저는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방에 혼자 앉아서 군중들에게 연설하듯이 외쳤습니다. “순교한 애국자들이여,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필요로 했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해방을 위해 나아가야 할 길입니다.” 그때부터 저는 레닌과 제3인터내셔널을 완벽하게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세포조직 토론에서 주로 이야기를 듣기만 했습니다. 저는 발표자들의 논리를 분명히 이해할 수 없었고, 누가 옮고 그른지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논문을 읽고 난 후부터, 저는 논쟁에 뛰어들었고 열정적으로 토론에 참여했습니다. 비록 제 프랑스어 실력이 부족하여 모든 생각을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저는 레닌과 제3인터내셔널을 공격하는 주장들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저의 유일한 논증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만일 당신이 식민주의를 규탄하지 않는다면, 만일 당신이 식민지 인민들의 편에 서지 않는다면, 도대체 당신이 하고자 하는 혁명이란 어떤 것입니까?’”
호치민은 이 글을 읽고 ‘울고싶을 정도의 기쁨’을 느꼈다. 후루타 교수는 “호치민이 레닌주의를 애국주의=민족주의의 입장에서 수용한 것은 명백하지만 레닌주의의 수용으로 호의 민족주의도 민족독립을 명확히 지향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는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라고 했다., 또한 호치민은 레닌의 논문에서 민족독립을 실현할 수 있는 확실한 전망을 발견함으로써 진정한 독립 전사가 됐다. 이런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1917년 레닌의 러시아 혁명이 억압받던 식민지 민족과 혁명가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줬는지다.
이후 호치민은 1922년 르 파리아(Le-paria)라는 언론지를 창간하여 편집인으로 활동했으며, 주로 프랑스의 식민지 정책과 베트남 지배를 비판하는 글과 사설 그리고 만화를 게재했다. 그러던 1923년 6월 프랑스에서 도망쳐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로 갔고, 코민테른 휘하의 기관인 극동국에서 근무하며 그해 12월에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했다. 1923년부터 1924년까지 소련 모스크바에 있으며, 호치민은 혁명가로 훈련받았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레닌의 아내 나데즈다 크룹스카야(Nadezhda Krupskaya), 이후 소련의 육군 원수가 되는 클리멘트 보로실로프(Kliment Voroshilov)등을 만났고, 여러 인사들을 만났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생전의 레닌은 만나지 못했고, 1924년 그의 장례식에 손수참가했다고 한다.
1920년 레닌의 논문을 읽은 호치민은 레닌주의자의 삶을 살게 됐다. 소련에서 중국 광저우로 돌아온 그는 베트남 공산당 창당을 향해 전진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베트남의 혁명가들을 길러냈다. 그리고 1930년 영국 식민지이던 홍콩에서 베트남 공산당을 창당했으며, 이 당명은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합친 인도차이나 공산당으로 이름이 개정된다.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이후 1930년 베트남 국민당이 단행한 대규모 봉기에 가담했고, 특히 응에안 하틴 소비에트 봉기(Nghe An-Ha Tinh Soviet)를 이끌었다.
이러한 활동은 결국 1941년 베트남 독립 동맹 즉 베트민의 창설로 이어지게 되며, 1935년 제7차 코민테른 대회에서 결정된 강령에 따라 애국적 민족주의자들과의 반파시즘 연합전선을 결성하게 됐다. 실제로 베트민 활동시기 호치민은 팍 보(Pác Bó)동굴에 있으면서, 산봉우리를 카를 마르크스로 시냇물을 레닌으로 이름을 지었다. 레닌주의자가 된 호치민은 이 레닌주의를 소위 베트남의 민족주의와 결합하여, 반제국주의 투쟁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이 점에서 블라디미르 레닌과 러시아 혁명의 영향력이 반제국주의 투쟁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1924년 호치민이 쓴 레닌 추모글인 「레닌과 식민지 민족」의 마지막 구절을 인용하겠다.
“레닌은 우리의 아버지이자 스승이고, 동지이자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사회주의 혁명의 길을 밝게 비춰준 별이십니다. 그는 우리의 과업 속에 영원히 살아계십니다.”
참고문헌
송필경, 『왜 호찌민인가?』, 에녹스, 2013
유일상, 『베트남 역사문화기행』, 하나로에드컴, 2021
윌리엄 J 듀이커, 정영목(역), 『호치민 평전』, 푸른숲, 2003
호치민, 월든 벨로(서문) 배기현(옮김). 『호치민: 식민주의를 타도하라』, 프레시안북, 2009
후루타 모토오, 이정희(역), 『베트남, 왜 지금도 호찌민인가』, 학고방,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