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원과 이승만, 본인 스스로 백두산 호랑이라 칭하던 김종원은 이승만과 각별한 사이였다. 이승만이 말하는 애국이란 이런 학살자들과 친일파들을 앞세운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과 우익들이 저지른 양민 학살은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다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10만 명이 미군정 하에서 학살당했고한국전쟁에서만 대략 70만 많게는 100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학살당했다국민 보도연맹 학살만 하더라도 최소 30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이승만과 그 지지 세력들에 의해 학살당한 것이다전라도와 경상도 사이에 있는 지리산에서는 1948년 여순항쟁 시점부터 소위 빨치산들이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에 맞서 게릴라전을 전개했다여순항쟁 이후 빨치산이 게릴라전을 벌인 이유는 분명했다이승만과 미국이 여수와 순천에서 무고한 양민들을 대량 학살했기 때문이었다.

 

일본군 하사관 출신으로 태평양 전쟁 당시 파푸아뉴기니 전투에 참전했던 김종원은 1948년 여순항쟁 당시진압군을 지휘한 김종원은 여수중앙초등학교 운동장에 민간인들을 뫃아놓고 온갖 잔혹한 학살을 저질렀다그는 직접 나서서일본도로 민간인의 목을 즐겨 벳고베다 지치면 권총이나 소총으로 민간인들을 쏘아 죽였다당시 증언자의 말에 따르면김종원은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짓들을 했었던 것이다.

(최덕신, 광복군 및 중국 국민당군 출신으로 1951년 거창양민 학살을 일으킨 인물이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박정희 시절 독재정권에 반대했으며, 더 나아가 1980년대에 월북했다. 캄보디아의 노로돔 시아누크 같은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대한민국 전역에서는 이른바 국민보도연맹 학살(Bodo League Massacre)로 수십만 명의 민간인이 우익들에 의해 무차별 학살당했다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이후 서울을 탈환하고 나서도 소위 부역자 색출이라는 명분하에 이승만 정부는 또 다시 천인공노할 학살을 자행했고, 38선을 돌파하여 점령한 북한 지역에서도 양민 학살을 저질렀다이러한 양민 학살은 한국전쟁 기간 내내 발생했으며특히 빨치산들이 활동하던 지리산 지역에서 미국과 이승만 세력에 의해 자행됐다. 1951년 중공군과 인민군이 서울을 다시 재점령하며한국군과 유엔군에게 반격을 하던 시기또 다른 양민학살이 한국군과 우익들에 자행됐다그것이 바로 거창양민 학살 사건이다.

(거창양민 학살 당시 희생된 무고한 민간인의 시신)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낙동강 전선에서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들은 지리산 일대로 숨었고노령산맥의 줄기를 따라 순창·정읍·남원·장성·구례등 호남일대와 거창·산청·함양·합천 등지에서 활동하기도 했었다한국군의 단독적인 38선 돌파 이후 이승만 정부는 10월 2일 공비토벌을 목적으로 육군 제11사단을 창설했고빨치산 출몰 지역에서 토벌에 나섰다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밀리자숨어있던 빨치산들은 신원지서를 습격했었으며 이에 따라 경찰과 군인 몇 명이 사살되기도 했다.

(학살을 나타낸 박물관에 있는 모형)

 

이에 따라 한국군은 거창과 함양·산청 등 지리산 남부지역에서 이른바 공비소탕작전을 펴기로 했고, 2월부터 본격적인 토벌에 들어갔다. 1950년 2월 9일부터 11일까지 한국군은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 빨치산을 소탕한다며 진입했고인근 지역 주민들을 신원초등학교에 집결시켰다여기서 빨갱이로 몰린 사람들은 모두 박산골로 끌고 가 무차별 사격을 가했으며죽은 시체 위에는 솔가지를 덮고 휘발류를 뿌린 다음 불을 질렀다동시에 마을 집들도 모두 불태웠다놀랍게도 이러한 전략은 만주에서 일본군이 했던 전략이고그리스에서 미군사고문단과 왕당파들이 했던 전략이며제주 4.3 항쟁 당시 한국군이 했던 전략이다또한 이후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이 했던 전략이기도 하다.

 

거창에서만 719명이 학살당했다학살당한 이들은 전부다 죄없는 민간인들이었으며 아이노인여성들이 다수를 차지했다심지어 1~2살짜리 갓난아기들도 학살당했다학살당한 이들의 인적구성을 보면 여성이 51.3%였고어린이와 청소년 45.3%, 60세 이상 노인 5%였다이외에도 산청·함양에서도 705명이 학살당했으며총 1,424명이 학살당했다학살을 자행한 한국군은 이 학살 사건을 은폐하려고 피해 현지와 외부의 왕래를 차단하고 생존주민에게 실상을 발설하는 자는 공비로 간주총살하겠다고 위협했다이 학살을 주도한 인물은 바로 최덕신이었다그는 이후 박정희 정부에 반대하는 행동을 하다가천도교 교령으로 활동하다가, 1986년에 월북했다역사의 아이러니다.

(현재 경남 거창에 있는 희생자들 묘비)

 

그러나 한 달 후인 1951년 3월 학살 소식을 들은 신중목은 국회 본회의에서 빨갱이 잡으라고 보낸 토벌대가 죄 없는 양민 500명을 살육했다.”고 폭로했으며조사단이 4월 6일 현지에 파견됐다당시 국방장관이었던 신성모는 이 사건을 덮으려고 했지만결코 덮지 못했다여순항쟁 당시 양민 학살에 앞장섰던 김종원도 이 사건을 은폐하려고 했다그는 자신의 병력을 빨치산으로 위장하여조사단에게 따발총(PPSH-41 소련제 기관단총)으로 위협사격을 가해 철수하게 만들기도 했다.

 

진상조사 초기 이승만은 이 사건을 은폐하고 조작하려 했지만결국 진상조사를 실시했고오익경한동석 그리고 김종원에게 징역을 선고했다그러나 총 책임자인 최덕신은 처벌받지 않았으며김종원도 얼마 지나지 않아 석방됐으며징역을 선고받은 이들 모두 1년 내로 석방됐다이 사건이 다시 조명 받은 것은 1960년 4.19 혁명 이후 유족회가 결성되면서 부터였다그러나 이들의 활동도 5.16 쿠데타로 박정희가 정권을 잡으면서 다시 한 번 침묵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으며민주화 이후에 다시 조명됐다.

 

참고문헌

 

김삼웅한국현대사 다이제스트 100가람기획, 2010

 

임기상숨어 있는 한국 현대사 2인문서원, 2015

 

임종금대한민국 악인열전피플파워, 2016

 

손호철'작전명령 5'로 시작된 어린이·여성·노인 무차별 학살프레시안, 2021.03.24.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32318150663165#0DK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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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Nick Turse의 저서 <Kill Anything That Moves>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후에 전투 당시 투입된 미군 탱크)


As U.S, and South Vietnamese forces launched a counterattack to take back the city, another bloodbath commenced. Reporing on the marines as they fought street to street, the CBS television correspondent John Laurence asked Lieutenant Colonel Ernie Cheatham what would happan to innocents trapped between them and the guerrillas. “I'm pretty sure they are civilians that we would consider bad guys right now,” Cheatham replied.

 

Navy ships lobbed 7,679 shells into Hue, and Marine Corps aircraft flew dozens of sorties, dropping napalm and five hundred pound bombs on residential neighborhoods. In all, U.S. forces unleashed an astonishing six hundred tons of bomb, plus barrages from artillery and tank cannons, dismantling the city in a chorus of explosions while ground troops fought street street. “We used everything but nuclear weapons on this town,” said one marine. Another admitted, “A great many civilians must have died in the fighting. If you saw or heard-or thought you saw or heard- movement in the house next door, you didn't stop to knock; you just tossed in a grenade.”

 

At least 3,800 of Hue's citizens were killed or reported missing as a result of the bombardment and battle, and 116,000 people were made homeless. More than three quarters of the city's homes were destroyed or seriously damaged. “Nothing I saw during the Korean War in the Vietnam so far has been as terrible, in terms of destruction and despair, as what I saw in Hue,” wrote the correspndent Robert Shaplen. Cheatham, the commmander of the 2nd Battalion, 5th Marines, put it more simply; “We pretty much destoryed the place, I guess.”

 

Source: Kill Anything That Moves p.103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도시를 재탈환하기 위해 반격을 게시하자, 또 다른 유혈극이 일어났다. 미 해병대가 시가전을 벌이는 것을 보도함에 따라, CBS 텔레비전 특파원인 존 로렌스는 어니스트 치트햄 중령에게 미 해병대와 게릴라 사이에 갖힌 민간인들에게 무슨일이 일어날지 질문했는데, “나는 현재 나쁜 놈들로 여겨지는 그 무고한 이들이 민간인들이라 생각한다.”라고 치트햄은 대답했다.

 

미해군 군함은 7,679개의 포탄을 후에에 투하했고, 미 해병대의 전투기는 수십차례나 출격했으며 네이팜 폭탄과 500파운드나 되는 폭탄을 인구 거주 지역에 투하했다. 미군은 모두 합쳐600톤의 폭탄과 대포와 탱크 대포로 포격을 퍼부었으며, 지상병력이 시가전을 벌이는 동안 엄청난 폭발로 도시를 파괴했다. “우리는 핵폭탄을 빼고는 이 도시에 모든 것을 퍼부었다고 한 미군 해병은 말했다. 다른 해병은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이 이 전투로 죽었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다른 집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거나 들었다면(혹은 보거나 들은 것을 생각한다면), 당신은 그곳을 공격하는 것을 막지 못했을 것이다. 당신은 그저 수류탄을 던졌을 것이다.”라고 인정했다.

 

최소 3,800명 이상의 후에 시민이 미군의 폭격이나 전투로 죽거나 실종되었고, 116,000명 이상의 민간인이 노숙자가 되었다. 도시의 3/4 이상이 파괴되거나 극심하게 손실됐다.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 동안 내가 본 그 어떤 것도 절망과 파괴 면에서는 후에 도시에서 본 것 만큼 끔찍하지 않았다.”라고 로버트 셰플린 특파원은 기록한다. 미 해병대 제2대대 5연대 지휘관인 치트햄은 좀 더 간단하게 표현했다. “내 생각에는 우리가 그곳을 거의 다 파괴했는걸.”

 

출처: 움직이는 것은 뭐든 죽여라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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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노정협 사무실을 들렸다가 우연히 흥미로운 책 한권을 발견했다. 멕시코 만화작가 리우스가 쓴 <산디니스타 니카라과>. 1980년대 극단적 친미 반공주의자 로널드 레이건은 소위 이란-콘트라 스캔들(IranContra affair)’을 야기하여, 국제적으로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 레이건 정부는 이란과 무기를 거래하고 받은 돈으로 니카라과에 있는 콘트라 반군을 지원했다. 당시 콘트라 반군은 1979년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정부를 전복시키려던 세력이었다.

 

콘트라 반군에게는 정당성이 전혀 없었다. 이들은 카터 정부와 레이건 정부로부터 대대적인 지원을 받아가면서 사회주의 정권을 무너뜨리는 행동에 착수했다. 또한 니카라과 인민들을 대량 학살했다. 미국은 니카라과 정부에게 대대적인 경제제재를 가했고, 혁명 정부는 소련의 지원에 의존해야 했다. 당시 미국이 지원한 세력은 반민중적이고,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한 세력이었다. 이들은 니카라과인의 소수를 이루는 자본가 계급을 대변했으며, 당연히 민중들에게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이들이었다. 반면 1979년 혁명을 통해 탄생한 산디니스타 정부는 억압받고 착취 받던 계급의 이익과 입장을 대변했다.

 

1979년 산디니스타 혁명 이전에도 니카라과의 상황은 비슷했다. 19세기 중후반 미국의 기업들은 니카라과에 진출하여, 그 나라 자원과 국부를 수탈했다. 대표적으로 연합과일회사(United Fruit Company)를 포함하여, 미국의 기업들은 니카라과를 사실상 식민 지배했다.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는 직접적인 식민 지배를 했고, 1930년대 이후에는 간접적인 식민지배를 했다. 미국이 지원하는 세력은 반민중적이었다. 친미세력들은 미국의 지원을 받았고, 때로는 양민을 학살했다.

 

1912년 미해병대의 니카라과 점령이 시작된 이래로, 니카라과인들은 미제국주의에 저항했다. 아우구스토 산디노라 불리는 혁명가는 게릴라전을 통해, 점령군 미해병대에 맞서 싸웠다. 미국은 산디노의 게릴라 세력들을 뿌리 뽑기 위해, 대규모 전투기 편대를 조직하여 마을에 무차별 폭격했으며, 기총소사를 퍼부어 죄없는 농민과 부녀자 그리고 어린이 300명을 학살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들은 미국의 캘빈 쿨리지 대통령에 의해 영웅적인 군사행동으로 찬양받았으며,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한 전투기 조종사들은 백악관에서 대통령이 주는 훈장을 받았다. 소름끼치게도 이러한 비극은 이후 그리스 내전과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 전쟁에서 반복됐다.

 

미국 언론들은 산디노의 게릴라 부대에 대한 온갖 흑색선전을 했다. 미국의 언론들은 산디노 부대를 약탈자, 살인자, 악마적 투기꾼들, 강간자들, 침략자들과 같은 수식어로 흑색선전을 했다. 한국전쟁 당시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가 빨치산들에 대해 온갖 악의적인 왜곡 보도와 흑색선전을 했던 것과 일치한다. 마찬가지로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국과 남베트남 언론이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투쟁하던 베트콩들에 대해 온갖 악의적인 왜곡 보도와 흑색선전을 하며 테러리스트라 매도했던 것과 똑같다. 그리고 현재 친미주의자들은 100년 전부터 미국이 했던 이러한 왜곡된 흑색선전을 아무런 검증 없이 믿는다.

 

1930년대 등장한 소모사 정권은 40년에 걸쳐 이른바 3대 세습 독재를 했다. 많은 이들이 북한이 3대 세습 독재를 비난하지만, 정작 미국이 3대 세습을 지원했다는 점에 대해선 무비판적이며 무지하다. 아니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전 근대주의적 국가에 대해선 아무런 말도 없다. 미국이 주장하는 소위 인권 타령의 진면목일 것이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 기준으로 소모사 일가의 전 재사는 미화로 9억 달러였고, 미국 기업의 외자 투자액도 상상을 초월했다. 그러나 당시 니카라과 민중은 세계 최대의 빈곤국중 하나였다. 니카라과의 실업률은 36%였고, 민중의 문맹률은 74%였으며, 유아사망률은 최소 20%를 넘겼다. 주택 불청결도 70%에 민중의 60%가 영양실조였다. 또한 니카라과의 어린이 80% 이상이 미취학 아동이었다. 쉽게 말해, 니카라과 부자들과 미국이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는 동안, 대다수의 민중은 가난에 허덕였다.

 

1948년 한반도 이남에서 미국과 이승만 정권의 폭압에 맞서 빨치산들이 창설되어 게릴라전을 벌였고, 1960년 남베트남에서 미국과 응오딘지엠 정권에 맞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이 창설되어 게릴라전을 벌였듯이, 1962년 니카라과에서도 를로스 폰세카 아마도르(Carlos Fonseca Amador) 등 소모사 왕조의 독재와 미국 독점자본의 지배에 반대하는 소규모 무장조직 지도자들이 모여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을 결성했다. 이들은 18년간의 게릴라 항쟁을 통해, 1979년에 니카라과 전역을 장악했다. 수많은 전투에서 미제국주의 앞잡이 소모사 일단의 반동적 군대를 격파했고, 궁극적으로 이들을 몰아냈다.

 

이들은 120만 에이커에 달하는 토지를 몰수하여 국유화하고자 했으며, 미취학 아동과 치료받지 못한 민중들에게 무상으로 치료해주고자 했다. 이들은 하늘처럼 치솟은 문맹률을 감소시키 위해 학교를 건설하고, 무상교육을 실행하고자 했다. 소모사 친미정권 시기 치솟은 유아사망률을 감소시키기 위해, 무상의료 체제를 건설하고자 했다. 정권 초기 무려 10만 명 이상의 젊은이들이 문맹 퇴치 캠페인에 참여했고, 10개월 만에 문맹률이 많이 감소했으며, 글을 배운 이들이 다시 도시와 농촌의 어린이들을 교육시켰다. 책에 나오는 내용 일부를 발췌하겠다.

 

대서양 연안지방의 사람들은 조금 다른 데가 있는 민족이었다. 그들은 고유의 방언과 그들만이 갖고 있는 풍습과 종교가 있었다. 나카라구아의 중심도시에서 수천명에 달하는 교사, 사회운동가, 의사, 그리고 문맹퇴치 운동원들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에야 비로서 이 지방이 니카라구아의 한 부분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출처: 산디니스타, 니카라구아 p.134

 

책을 읽으며 니카라과 인민들과 혁명가들의 감동적이고, 역동적인 역사를 감동적으로 알 수 있었다. 쿠바와 칠레, 엘살바도르, 베네수엘라 등 미국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이들은 항상 전체적으로 너무나도 옳은 가치를 추구한다는 생각이 든다. 반면에 자본으로 모든 것을 지배하려는 미국은 너무나도 추악하고 탐욕스럽다. 1950년대 프랑스에 맞서 독립전쟁을 전개하고 있던 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이 했던 연설처럼, 미국은 너무나도 탐욕스럽고 추악한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절대적으로 정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최소한 미국이 제국주의적 행보를 포기하지 않는 한 말이다.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의 시초인 아우구스토 산디노가 했던 연설이 기억에 남는다. 1912년부터 1933년까지 21년간 니카라과를 군대로 통치하고 점령한 미국은 잔악무도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필리핀에서 대량 학살을 했듯이, 그리고 니카라과 이후에는 그리스와 한반도 그리고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온갖 천인공노할 대학살을 벌였듯이 말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그 미국 지지자들이 자행한 온갖 범죄와 만행들이 미해병대의 니카라과 통치 기간에 일어났다.

 

미군 전투기가 니카라과 마을을 무차별 폭격했을 당시, 혁명군 지도자 아우구스토 산디노는 저항을 추구했다. 그리고 미제국주의에 맞선 투쟁에서 궁극적으로 승리했다. 그의 연설은 참으로 감동적이고 혁명적이다. 그의 연설을 인용하며 마치겠다.

 

우리는 고립됐다. 조국 니카라과의 대의는 잊혀져가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산디노의 상대는 디아즈 정권이 아닌 역사상 가장 강력한 미제국주의자들이다. 우리는 그들과 다시 싸울 것이다. 그리고 우리 중의 일부는 그들의 폭격으로 무참히 학살당하고, 제국주의 군대의 총검에 난자당하며 최신식 기관총 앞에 쓰러져 나갈 것이다. 그러나 니카라과는 승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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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기원에 집착하는 것만으로는 전쟁을 제대로 평가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김동춘이 그의 주목할만한 저작에서 지적하듯이,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실행하기 위해서 전통적 학파와 수정주의 학파 모두가 여전히 갇혀 있는 전쟁의 시작에 대한 집착을 깨뜨려야 할 때가 됐다.” 그의 견해로는 전쟁의 종식이후 반세기 이상 동북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지속적 영향을 끝낼 방법을 찾기 위해 전쟁의 성격을 평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미국은 그 이후로 오랫동안 베트남이나 북한의 동맹인 중국과 평화를 유지했지만, 평양과는 전쟁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 계속되는 전쟁의 뿌리를 밝히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전쟁의 성격과 관련된 것이다. 이 전쟁은 내전인가, 아니면 제국주의 개입에 맞선 민족해방 전쟁인가?

 

만약 내전이라면, 리와 그랜트, 스톤월 잭슨과 윌리엄 테쿰세 셔먼(각각 미국 남북전쟁 때 남군과 북군의 장군)에 해당되는 인물은 누구인가? 남한이나 미국의 역사, 영화, 공공 기념물에서 답을 찾더라도 우리는 불가피하게 한국이 아니라 미국 장군들, 맥아더, 리지웨이, 월튼 해리스 워커(그의 이름을 딴 쉐라톤 워커힐 호텔과 카지노가 서울에 남아 있다) 등과 마주치게 된다. 한국의 내전에서 미국 장군들이 두각을 드러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승만이 1950년 대전협정을 통해 한국군에 대한 완전한 작전통제권을 미국에 넘겨줬기 때문이다.(오늘날까지 참모본부가 유지되고 있다.) 그런데도 과연 독립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승만이 전쟁에 도움이 되도록 맥아더를 한국에 데려온 것이 아니다. 맥아더가 이승만을 개인용 미군기에 태워 한국으로 데려왔다. ‘북한의 기습 공격이후 3개월도 안 돼 맥아더는 디데이 노르망디 침략군보다 더 많은 함대를 모아서 915일 인천에 상륙했다. 그리고 그는 북한 군대가 여전히 남한에서 토지개혁을 시행하느라 바쁜 와중에 서울을 손쉽게 재탈환했다. 그런 다음 이승만을 두 번째 서울로 데려와 그에게 통치권을 줬고 이승만은 기뻐 눈물을 흘렸다.

 

저명한 미국 학자들은 한국전쟁을 그리스의 펠로포네소스 전쟁에 비유하는데, 남북한을 이해하기 위해 자치 도시국가인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끌어들여 비유한 것이다. 만약 고대 그리스 역사에서 전례를 찾으려면, 크기만 고려해보더라도 미국을 페르시아에 비교하는 것이 더 현실적인 것 같다. 지금처럼 그 당시에도 제국적 외세의 이해는 일부 토착 투사들을 침략자 편으로 끌어당겼다. 크세르크세스가 침략한 동안 일부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 편에서 싸웠다(한 세대 후에 알렉산더가 아시아에 전쟁을 일으켰을 때 그랬던 것처럼). 만약 내전으로 성격을 규정하는 논리를 따른다고 할 때,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정복했다면 현존 역사는 테르모필레를 장악한 군사주의적 스파르타인들에게 맞서 궐기할 평화 애호적 그리스인들을 페르시아가 지원한 것으로 규정할 것이다. 아니면 만약 영국인들이 1789(미국 헌법이 승인된 해) 이후 미국의 절반을 통제했다고 가정해보자. 오늘날 역사가들은 최초의 미국 내전177674(미국의 첫 독립기념일)에 시작됐다고 언급하지 않겠는가?

 

조선을 휩쓴 재앙을 내전으로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민족 독립전쟁으로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 역시, 반세기 넘게 미국이 왜 북한에 대한 경제적 금수조치를 지속했는가를 조사하면 답할 수 있다. 만약 그 충돌이 정말로 내전이었다면 미국은 이미 오래전에 개입을 중단했어야 한다. 그렇다면 수십 년간 미국의 북한 포위와 고립, 반세기 이상 한국에 남아 있는 수만 명의 미군 부대, 한국군에 대한 미국의 지속적인 작전 통제를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1953년 정전 이후 몇 년 동안 EC-121 첩보기를 포함한 최소한 10대의 미군기가 북한 측에 의해 격추되었다. 1976년에서 1993년까지 지속된 미국의 팀스피리트 작전(대개 1년에 1회씩 실시한 한국과 미국의 합동 군사훈련)은 침략과 핵전쟁의 위협을 가했다. 북한에 따르면 수십 년간 날마다 핵무기를 투하할 수 있는 미군 폭격기가 38도선에 접근했다가 마지막 순간에 선회했고, 따라서 미국의 핵 공격 가능성을 매일의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1968년 미국 군함 푸에블로호의 억류 이후 미국 협상가들은 북한 영해 침법에 대해 사과했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서면으로 약속했지만, 북한은 그 이후에도 미 해군의 영해 침범 사례를 수백 건이나 보고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북한은 해마다 7,900건 이사의 도발 행위를 집계했고, 미국은 날마다 이루어진 북한에 대한 고도 감시 비행을 인정했다.

 

출처: 한국의 민중봉기 p.204~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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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세균전 의혹은 국내에서 제법 얘기가 된 주제다미국의 세균전은 판문점에서 휴전회담이 한참이던 1952년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당시 북한과 중국에서 조사를 벌이던 국제민주법률가협회 국제과학조사단 미국이 조선과 중국에서 세균전을 감행했다.”고 결론지었다국제민주법률가협회는 북한의 대표적인 15개 지역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으며그곳들에서 발견된 곤충이 1952 1 28일과 3 12일 사이에 확증되었다고 밝혔다북한이 미국의 세균전을 규탄한 시점은 1952년 초부터로 확인된다당시 북한의 부수상이었던 박헌영은 세균전에 대해 언급하며미국을 비판하는 공개 발언을 했다그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니덤 보고서, 국제과학자협회 조사단이 북한에서 조사한 미국의 세균전 관련 공식 문서다.)

 

“1월 28일 적 군용기들은 조선에서 종전에 보지 못하던 세 종류의 벌레들을 이천·동남·농소동·용수동 등 지구에 대량적으로 산포했는바그 첫째 종류의 형태는 검은 파리와 같으며 둘째 종류의 형태는 벼룩과 같으며 셋째 종류의 형태는 빈대와 같다. 2월 11일 적군 비행기들은 철원 지구의 아군 진지에 대하여 벼룩·거미·모기·개미·파리 및 기타의 작은 벌레들이 가득 찬 종이통과 종이 봉지를 투하했다시번리 지구에서는 파리를 대량적으로 투하했으며 또한 평강 지구에서는 벼룩·파리·모기·귀뚜라미들을 대량적으로 뿌렸다.”(박헌영 평전 p.555~556)

 

현재 북한은 미국이 이미 1950년 겨울부터 세균전을 벌엿다고 주장하고 있다아래의 인용문은 북한의 조국전사에 나오는 내용이다. “놈들은 쫓겨 가면서 일시적으로 강점하였던 공화국 북반부지역(평양시평안남북도함경남도강원도황해도)에 천연두 병균을 살포하였다그리하여 당시까지 천연두가 전혀 발생한 일이 없었던 이 지역들에서 천연두 환자가 급격히 늘어났다. 1951년 4월에 이르러 천연두 환자는 3,500여 명에 이르렀으며 그중 10%가 사망하였다.” 이를 토대로 북한은 미군 비행사 포로들에 대한 심문 등을 근거로 세균전이 실험단계와 작전단계로 나뉘어 진행됐다는 분석을 내놨다. “첫 단계(실험단계)에서는 주로 효과적인 세균탄 투하의 목표를 선정하며 투하방법 및 세균전 전술을 련마하는데 목적을 두었다면 둘째 단계(작전단계)에서는 오염지대를 설정하고 집중적인 투하를 일층 강화할 것을 계획했다는 것이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I p.88)

 

미국의 역사학자인 조지 카치아피카스는 한국전쟁 당시 미국이 세균전이라는 극악무도한 전쟁범죄를 저질렀음을 주장했다그가 쓴 <한국의 민중봉기>라는 책에 따르면미국은 1947년부터 생물학전 무기를 개발했고그 당시 메릴랜드 주 데트릭 기지가 미군 세균전의 중심지였으며, 1951년부터 1953년 회계연도에 미국은 생물학전 연구에 3억 4,500만 달러를 사용했고이는 한국전쟁 동안 미국이 배치한 무기를 제조하기 위해 사용한 금액이었다.(한국의 민중봉기 p.209)

(아랍계 언론 알자지라의 미국 기밀문서 해제)

 

미국의 이러한 세균전 자료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확인된다실제로 미국은 마루타 부대로 유명한 731 부대의 책임자 이시이 시로를 살려줬다그를 살려준 주체는 바로 더글라스 맥아더였다올리버 스톤의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에는 이에 못지않게 우리를 당혹케 하는 것은 도쿄 전범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미군 당국이 악명 높은 731부대에서 활동했던 일본군 장교와 연구자들에게 비밀리에 완전 면책권을 부여했다는 사실이다그 대가로 미군은 만주에서 죄수 3,000명을 상대로 일본군이 실시한 인간 생체실험 관련 자료를 넘겨받았다.”고 나온다.(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p.365)

 

반면 현재까지의 미국 공식 입장은 세균전이 없었다는 것이다즉 북한과 중국이 지어낸 것이라는게 현재 미국의 입장이다정말 그러한 것일까미국의 공식적 입장과는 달리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세균전은 북한과 중국 자료 뿐만 아니라 미국의 공식 자료를 통해서도 입증된다미국의 세균전에 대한 선구적 역할을 한 인물은 공교롭게도 미국 언론인 존 윌리엄 파월(John W. Powell)이다.

(세균전 당시 미군이 사용한 폭탄)

 

그는 1947년부터 1953년까지 중국 상하이에서 영문 <월간 중국 리뷰(China Monthly Review)>를 발행했는데 자신이 직접 목격한 미국의 세균전 문제를 집중보도했다매카시즘이 한참이던 1953년 미국 정부는 잡지의 국내 반입을 금지하고, 1956년엔 그와 2명의 편집 실무자를 반역죄와 선동죄 등 13가지 범죄 혐의로 기소했다파월은 미국 정부에게 비밀문서 공개를 요구하는 등 완강히 대응해 기소는 철홰됐고미국 정부는 1961년 소송 자체를 취하했다이런 사실은 2000년 7월 2일 방영된 MBC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15회 일급비밀미국의 세균전편에서 소개됐다.

(북한에 투하된 것으로 추정되는 벼룩)

 

그 외에도 미국의 세균전 문제를 심층 분석한 대표적 연구물은 캐나다 역사학자인 스티븐 엔디콧(Stephen Endicott) 교수와 에드워드 해거먼(Edward Hagerman) 교수가 1998년에 쓴 <The United State and Biological Warfare(미국과 생물학전)>은 국내에선 2003년 <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 (도서출판 중심)이란 제목으로 번역 출간됐다이 책은 미국 생물학전의 기원에서부터 일본과의 커넥션세균전 프로그램 연구개발 및 작전계획 과정한국전쟁에서 세균전 문제 등을 비밀 해제된 미국 정부 문서자료 등을 근거로 치밀하게 추적 분석했다.

 

2010년에는 아랍계 언론인 알자지라(Al Jazeera)’을 통해 미국이 세균전을 감행한 사실이 문서로 증명됐다알자지라는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입수한 문서를 공개했고, 1951년 9월 21일 작성된 이 문서에는 "미 합참이 작전상황 중 (세균전에 사용되는특정 병원체의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를 판별하기 위해 대규모 현장 실험을 개시할 것을 명령했다"고 기록돼 있음을 밝혔다. 1951년 9월 21일자 문서였으며당연히 미국 측 국립문서보관소에 있던 미국 문서였다.(“한국전쟁 중 세균전 현장실험 명령”, 한겨레, 2010.03.19)

(세균전 관련 중국의 프로파간다)

 

2015년에는 미국이 세균전 방법을 일본으로부터 배위 한국전쟁에 사용했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니덤 보고서가 원본 전문이 최초 공개됐다.”는 기사가 나왔다니덤 보고서는 영국의 생화학자인 조지프 니덤을 단장으로 하는 국제과학자협회 공식조사단이 1952년 작성한 것으로 보고서에는 미 공군이 일제 강점기 생체실험을 자행해 악명이 높았던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 등에게 기술을 건네 받아 한국전쟁 당시 북한과 중국을 상대로 세균전을 치른 것을 주장하는 내용이다이 전문은 조사 내용만 670페이지나 된다그리고 이 보고서에는 참고자료로 전쟁 당시 중국과 북한 일대에 뿌려진 벼룩 사진해당 지역의 주민 사진세균을 뿌리다 잡힌 미군 포로의 수기 진술서미군의 세균 배포 경로 비행지도 등 세균전을 뒷받침할 증거가 200장 가까이 수록됐다.(단독", 6·25서 세균전" '니덤보고서전문 나와연합뉴스, 2015.06.09)

 

이와 같은 사실을 생각해 보았을 때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세균전은 분명 있었다고 생각한다세균전이 없었다고 주장하기에는 미국의 기밀문서나 영국의 조지프 니덤 등이 조사한 자료가 보여주는 증거가 명명백백하기 때문이다따라서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세균전은 분명 존재했고규탄받아 마땅하다.

 

참고문헌

 

한국전쟁 중 세균전 현장실험 명령”, 한겨레, 2010.03.19.

 

단독", 6·25서 세균전" '니덤보고서전문 나와연합뉴스, 2015.06.09.

 

박태균한국전쟁책과함께, 2005

 

안재성박헌영 평전실천문학사, 2009

 

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공저), 이광일(),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들녘, 2015

 

조지 카치아피카스(), 원영수(), 한국의 민중봉기오월의봄, 2015

 

김동원 안광획 이정훈(공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I, 4.27시대.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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