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국내 언론은 러시아에 대한 비난의 화살을 올리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의 침공으로 민간인 352명이 사망했다는 자극적인 보도도 이어가고 있다.

나는 이게 너무 편향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침공 그 자체를 옹호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이런 보도들은 미국 중심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난 아프가니스탄 전쟁 때도 탈레반 진격으로 인한 난민들과 민간인 피해 상황은 대대적으로 보도했지만, 정작 탈레반 진격과정에서 미군의 화력 지원을 하여 생긴 사망자들에 대해선 침묵했다.

과거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고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을 때 미군 화력에 학살당한 민간인들에 대해선 외면하던 언론이 지금은 러시아를 까기 바쁘다. 여기서 나오는 이중성과 위선은 언제까지 반복되야 하는 걸까?

지난 아프가니스탄 전쟁때도 그랬지만, 이런 사실들을 생각하면 답답할 따름이다. 그리고 미국이 살인적인 경제제재 때리는 거에 대해선 외면하고 침묵하는 사실에 화가 치밀어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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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2-02-28 15: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쯤 되면 진짜 병이다 병…러시아가 주권국가 우크라이나 무력 침공해서 사망자 다수 발생했다. 여기서 팩트 아닌 게 있나? 여기에 어떤 자극적인 보도와 미국 중심 편향이 있는가? 님의 스탈린 사랑과 러시아 사랑은 알겠지만 적당히 좀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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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714일 무장한 시민 군중이 프랑스 파리에 있던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다.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고 며칠이지나 왕은 파리를 방문했고, 혁명 측의 요구를 수용했다. 왕 스스로가 왕권의 실추를 행동으로 보여줬다. 파리의 소식은 프랑스 전역으로 퍼졌고, 지방 도시에서는 주로 부르주아로 구성된 시정 상설 위원회와 국민 방위대가 조직되어 행정과 치안을 맡았으며, 그해 8월에는 이른바 인권선언문을 채택되어 봉건제도를 폐기했다. 이것이 바로 프랑스 혁명(French Revolution)이다.

 

1791년에 이르러 왕권의 권력은 완전히 붕괴했고, 이는 유럽 전역에 공포를 안겨줬다. 영국의 에드먼드 버크는 프랑스 혁명은 미친 짓이다.”라고 했을 정도로 경멸을 드러냈고, 이는 다른 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 1792년 혁명의 불길이 확산되는 것을 두려워한 프로이센은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게 됐고, 영국이나 러시아 제국 그리고 포르투갈 왕국과 네덜란드가 프로이센을 지원했다. 이것이 바로 프랑스 혁명전쟁이다. 유럽이 프랑스를 두려워 한 것은 왕권의 힘이 약해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며, 특히나 루이 16세의 단두대 처형은 그들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프랑스는 혁명을 수호하기 위한 전쟁을 치렀다. 전쟁 초기 프로이센군의 전진은 거셌지만, 프랑스군은 발미 전투에서 정신적 그리고 정치적 승리를 거두었다. 전투에서 프로이센군 200명이 전사하고 프랑스군이 300명 전사했는데, 프로이센군의 진격을 1차적으로 막아냈다. 이를 통해 프랑스군은 혁명 열기를 이끌어 낼 수 있었고, 프랑스 시민과 군대는 보다 더 단결했다. 더 나아가 국내에서는 로베스피에르를 포함한 강경파들이 정치적으로 권력을 잡게 됐는데, 이들은 혁명 프랑스를 수호하기 위해 1793823일 징집령을 선포했다. 이에 따라 혁명군의 규모는 1794년에 대략 100만 명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됐고, 프랑스는 대략 10년 동안 이 혁명전쟁을 치러야 했다. 플랑드르 전역과 스페인 전역 그리고 네덜란드 점령 및 제1차 이탈리아 원정으로 이어졌으며, 그 이후 이집트와 시리아 원정에 나섰다. 또한 제2차 이탈리아 전쟁을 치렀으며, 이 전쟁은 1801년까지 전개됐다. 17983월 프랑스는 영국을 굴복시키기 위해 350척의 함선과 54,000명의 병사를 싣고 이집트 원정에 나섰다. 여기서 큰 활약을 떨쳤던 인물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그 유명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이집트 원정에서 터키 제국과 러시아에게도 큰 자극을 주었고, 영국과 더불어 이들을 상대했다. 당시 프랑스 혁명 전쟁은 네덜란드 방면과 독일의 라인강 방면 그리고 이탈리아의 나폴리 방면이었는데, 동맹국의 총공격 앞에 크게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네덜란드에 상륙하려는 영국군 3만 명을 격퇴시켰으며, 179910월 러시아의 반불 동맹 탈퇴 후에 연합세력의 공격을 국경에서 막아냈다. 이집트 원정에서 본국 귀환을 선택한 나폴레옹은 이른바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것이 바로 브뤼메르 18일이다.

 

브뤼메르 18일을 통해 권력을 잡은 나폴레옹은 1800년에 제2차 이탈리아 전쟁을 지휘하기 위해 출정했고, 알프스를 넘어 밀라노에 입성했다. 마렝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무찌르고, 12월에는 독일 라인 방면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무찔렀다. 마렝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측은 9,000명의 사상자를 낸 반면, 나폴레옹은 7,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1801년 결국 오스트리아는 뤼네빌 조약에 응했고, 이에 따라서 프랑스와의 전쟁을 지속하는 국가는 영국만 남게 됐다. 영국은 오스만 제국과 협력하여 이집트에 있던 프랑스 원정군을 항복시켰지만, 결과적으로 프랑스에게 고립 당했다. 이후 나폴레옹은 1802년 종신 통령을 선포했고, 1804년에는 황제가 되었다. 이것은 결국 나폴레옹의 정복전쟁으로 이어졌다.


사실 프랑스의 정복 전쟁은 어떤 면에선 1796년 제1차 이탈리아 원정을 통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전쟁은 엄밀히 따져서 프랑스 혁명 전쟁의 일부였고, 나폴레옹 개인의 정복욕 때문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종신 통령을 선포하며 황제의 길을 걸었던 것은 1802년으로 그 전까지는 엄밀히 따지고 보면 혁명을 방어하기 위한 성향이 강했다. 나폴레옹이 정복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던 것은 자신이 황제로 등극한 이후였다. 특히 그가 황제를 자칭하면서, 영토 팽창을 가속화했는데 이런 점에서 프랑스의 전쟁은 혁명전쟁에서 나폴레옹 개인이 추구한 정복전쟁로 성질이 바뀌었다. 따라서 나는 프랑스의 혁명전쟁은 나폴레옹이 종신 통령 선포와 황제 등극 이전까지를 혁명전쟁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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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만주는 토벌과 반토벌의 격전지였다. 1931 9 18일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침략의 마수를 드러냈고중국인과 조선인은 공산당을 중심으로 저항했다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만주를 침략한 이례로중국 공산당 휘하의 중국인과 조선인들은 일본군에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이들의 저항이 거세지자 일제는 대대적인 대토벌 작전을 전개했었다. 1933 11월 일제의 동만 지역 2차 대토벌에만 보병기병포병을 포함한 6,000명의 병력과 전투기가 동원됐으며, 3차 대토벌은 1935년까지 전개됐다만주지역 일본의 관동군 숫자는 1941년 독소전쟁이 일어나는 시점에서 대략 70만 명으로 증가했고, 600대의 전투기도 주둔했다.

(마오쩌둥과 홍군, 대장정 이외에도 중국 공산당 병력들은 만주사변 이후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만주에 주둔한 일본군 병력 규모에서 알 수 있듯이일제는 만주 지역에 대규모 병력을 투입했다. 1941년 일제가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음에도만주 지역 관동군은 1945년까지 대부분 주둔하고 있었다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킨 이례로 중국 공산당은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무장투쟁을 전개했던 이들 중에는 조선인들이 많이 있었으며이후 북한의 초대 지도자가 되는 김일성도 그 중 한 사람이다김일성만 하더라도 1935년 중국 공산당 병력과 연합한 2,000명의 병력으로 일본군 부대를 습격해 6일 동안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심지어 1937년에는 소위 국내 보천보에 잠입하여 소규모의 교전을 치르고 난 뒤무사히 후퇴하기까지 했다동북항일연군 잔존 병력을 이끌던 허형식은 1942년 8월 일본군과 교전을 치르다 전사했다.

(동북항일연군 대원들)

 

중국인과 조선인의 항일무장투쟁이 격렬했기 때문에 일본군은 무자비한 토벌을 감행했다중일전쟁 발발 1년이 되던 1938년 일제는 그 악명 높은 간도 특설대를 창설하여중국 공산당 휘하의 부대 및 독립군들을 토벌하는 일에 착수했다일제는 만주에서 일어나는 항일투쟁의 뿌리를 뽑고자이른바 모든 것을 태우고죽이고약탈하는” 삼광작전을 감행하여 무자비한 양민 학살과 토벌을 자행했다삼광작전의 일환으로 일제는 이른바 집단부락이라는 것을 세웠다집단부락은 항일 유격대의 근거지를 철저하게 토벌하고 불태워 버린 뒤 그 주변에 흩어진 농가의 백성들을 강제로 집결시켜 하나의 부락에 수용하는 정책이다이후 비슷한 정책이 제주 4.3 사건 당시 한국 군경과 미군에 의해 사용됐고베트남 전쟁 당시에도 전략촌이라는 이름하에 자행됐다.

(동북항일연군의 깃발)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기 며칠 전 동북항일연군 휘하 병력 600명은 일본군에 맞서 승리를 쟁취했다그 전투가 바로 다샤허 전투다당시 전투에 참가한 동북항일연군 제3방면군은 웨이정민과 천한장이 지휘했으며전투에 참가한 대다수 인사들은 조선인이었다. 1939년 8월 23일 동북항일연군은 일제가 만들어 놓은 집단부락을 포위해 공격했고집단 부락 안으로 밀고 글어가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동북항일연군은 이 과정에서 만주국 경찰 및 자위단 병력 다수를 사살했고대략 100여 명의 일본군을 사살했다이 소식을 들은 일본군은 수백명의 병력을 그곳으로 보냈다.

(다샤허 전투에서 전사한 허성숙의 전투 장면을 묘사한 그림)

 

다음 날에도 전투가 벌어졌다집단 부락에 도착한 일본군 수비대는 항일연군의 기습공격을 받았다이 전투에서는 당시 창설된 지 얼마 안 된 간도 특설대도 참여했다고 한다동북항일연군은 일본군 수비대가 집단부락의 일본인 주검을 수습해 돌아가는 것을 노렸으며, 7대의 트럭에 분승한 토벌대 차량 대열의 선두차가 대낮에 류슈 촌 부근에 미리 파놓은 물웅덩이에 빠져 정착하자 기습 공격을 가했다고 한다기습 공격을 받은 일본군 부대는 간도 특설대 대원 4명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멸했다다샤허 전투에 관한 내용은 <연변인민 항일투쟁사>에 보면 다음과 같이 나왔다.

 

대사하 전투에서 제3방면군 부지휘관 후국충은 한 개 연대 40명을 인솔하여 양목조자에 매복하고 있다가 안도현성에서 증원병력으로 오는 100여 명의 일본군과 만주국 경찰에게 불의의 사격을 가하여 적을 무리로 쓸어 눕혔다살아남은 적들은 살구멍을 찾아 황급히 흩어졌다그런데 이 요격전에서 부지휘관 후국충이 적의 흉탄에 맞아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1호군 제3방면군은 가장 어려운 시기에 우수한 군사 지휘관을 잃었다.”

 

출처연변인민 항일투쟁사 p.350~351

 

2일간의 전투는 동북항일연군의 승리로 마무리 됐다다샤허 전투에서 대략 200명의 일본군을 사살하고 경기관총 7정을 포함하여 모두 200여 자루의 총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하지만 인용문에 나와 있듯이3방면군의 희생도 컸다부지휘관인 후국충이 전사했고그를 포함하여 14단 정치위원 양형후, 13단 1연의 여자 기관총 사수 허성숙 등이 전사했다이후에도 항일연군은 일제가 만들어 놓은 집단부락을 타격 대상으로 삼으며 급습했고성과를 거두기도 했다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1939년 9월부터 12월 사이에 다샤허 전투를 승리로 이끈 동북항일연군 제3방면군은 집단부락을 습격하여 일본군 무장자위단원 100명을 포로로 붙잡고식량과 군용물자를 노획했었다최현이 있던 부대는 화전현 한총구에서 집중훈련을 받고 있던 만주군을 습격하여 그 대부분을 포로로 붙잡고 경기관총 7소총 600자루권총 10자루와 기타 군수물자를 노획하기도 했었다.

(동북항일연군 지도부의 얼굴)

 

1940년 1월부터 6월까지 간도성의 옌지허룽왕칭안투 네 현에서만 모두 46회의 집단부락 공격이 존재했다다샤허 전투 이후 만주국 정부는 숨진 특설부대원 16명의 장례식을 밍위에거우에서 성대하게 치르고이들이 숨진 장소에 16용사 전적비를 세워 순국열사로 기렸다이 전적비는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난 뒤 철거됐다이처럼 만주에서는 일본군에 맞서 티열한 항일무장투쟁이 전개됐다그리고 만주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웠던 이들 중에는 조선인들이 다수를 차지했다이들의 투쟁은 분명히 독립운동이었지만대한민국 교과서에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참고문헌

 

최성춘연변인민 항일투쟁사연변대학, 1999

 

김효순간도특설대서해문집,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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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테러 당시 미국 소방관의 모습을 암시하는 포스터)


이것저것 하다보니 제법 바쁜 몸이지만, 시간을 내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인 터닝 포인트 3화를 감상했다. 3화에서도 2화에서와 마찬가지로 9.11 테러로 희생된 이들의 안타까움과 유가족들의 슬픔을 보여준다.


그리고 나서 9.11 테러를 일으킨 알카에다 측이 어떻게 준비를 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놀랍게도 이들은 영어 실력이 안좋은 이들이 꽤나 많았다는 점이 제법 흥미롭게 다가왔다. 하지만 9.11 테러를 주도한 이들 19명 중 16명이 사우디 아라비아 출신인 점은 그다지 강조되지 않으며, 사우디 아라비아가 하나도 처벌받지 않은 점은 언급되지도 않는다. 


다큐멘터리에서 이점이 언급되지 않는 건 치명적인 문제라 할 수 있으며, 다소 의도적인 것 같다고 생각한다.


다큐멘터리는 아프가니스탄 전쟁 초기 포로로 잡혀 쿠바 인근에 있는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저질러진 학대와 폭행에 대해 다룬다. 이 점을 확실히 언급하고 자세히 소개한 것은 제법 괜찮다.  미국 정부가 소위 테러리스트로 지정한 이들을 어떻게 인권유린 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다큐멘터리가 이 점을 확실히 집고간 점은 분명 눈여겨 볼만 하다. 다큐멘터리는 9.11 테러 이후 3,000명의 민간인이 테러리스트에 의해 희생된 점을 강조하며,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빠지게 되는 점을 예시해준다.


3화는 1화나 2화에 비해서, 제법 미국의 실책을 알리는 쪽이었던 것 같다. 빠른 시일 내에 4화를 보고 리뷰를 남겨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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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2-02-23 2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넷플에 이런 게 뜨군요. 조만간 찾아서 봐야겠습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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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의 작품, 이 작품은 한국전쟁 당시의 민간인 학살을 표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한 이유 때문인지, 박정희 시절 피카소를 이름을 크레파스에 넣었다고 처벌받았던 이도 있을 정도다.)

 

한국전쟁 당시 양민학살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전쟁 초기 이승만 정부에 의해 발생한 국민 보도연맹 학살(Bodo League Massacre)만 하더라도 2~3달도 안 되는 사이에 남한 땅 전역에서 30만 명의 민간인이 우익들에 의해 무차별 학살당했다이러한 사실을 통해한국전쟁에서 우익들이 저지른 학살은 매우 광범위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이러한 학살은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고 나서도 지속됐으며, 9.28 서울 수복 후에도 부역자 색출이라는 미명아래 이승만 정부의 또 다른 양민 학살이 광범위하게 발생했다학살은 미군에 의해서 발생하기도 했으며특히나 폭격에 의한 학살이 가장 광범위했다한국전쟁 시기부터 현재까지 북한에서 강하게 주장하는 미군에 의한 학살이 있다그것이 바로 신천양민 학살(Sinchon Massacre)이다.

(현재 북한에서 제시하는 신천양민 학살 민간인 희생자의 수치, 이 숫자는 대략 그 지역 인구 1/4 수준이다.)

 

신천양민 학살은 1950년 10월부터 12월까지 한국군과 미군이 북진하며 전진하는 상황에서 발생한 학살로 대략 3만 5,000명의 무고한 민간인이 학살된 것으로 알려졌다놀랍게도 학살당한 민간인의 숫자는 그 지역 인구의 1/4이다신천양민 학살은 과거 한국에서 신천 10·13 반공 의거라고도 불렸고현재 북한에서는 신천 대학살로 불리고 있다현재 한국 학계에서는 북한에 있던 우익 세력인 반공 청년단들이 한 것으로 판단하거나좌익과 우익 갈등 속에서 희생된 것으로 얘기한다반면 북한에서는 이 학살을 미제국주의자들이 저지른 끔찍한 학살로 얘기한다신천양민 학살은 양측의 입장과 의견이 판이하게 갈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 신천 박물관에 있는 상상화)

 

우선 북한에서 주장하는 미군의 학살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현재 북한에서는 신천양민 학살의 주체로 미군을 지목하고 있고신천에 만들어진 박물관에도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북한에서는 신천 미점령군사령관인 해리슨과 그 휘하의 미군을 학살의 주체로 지목한다북한의 자료에 따르면미군과 한국군이 들어온 시점부터 후퇴하게 되는 시점까지 신천에서 미군들에 의한 학살이 발생했으며그러한 학살은 매우 야수적이었다고 한다. MBC에서 했던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신천학살 편을 보면 이들의 증언도 확인이 가능하다한 북측 시민의 증언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때 미군 한 놈이 나타나더니뭐라고 지껄이면서사람들을 직접 쏴 죽이면서말하는 것이었습니다옆에 통역 놈이 말하기를 빨갱이는 모조리 죽여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이 놈이 바로 미국 장교 해리슨이라는 놈이었습니다.”

 

신천양민 학살의 주체로 미군을 지목한 것은 비단 북한 뿐만은 아니었다대표적으로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서 활동했던 국제여맹 단원들이 그러하다한국전쟁 당시 북한에서는 국제민주여성연맹(Women's International Democratic Federation)이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과 한국군 그리고 우익들의 학살과 잔혹행위 등을 조사했었다이들은 미군의 무차별 폭격 현장을 직접 목격했고양민학살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하는 증언들을 기록했다이들의 기록에 따르면 유엔군 점령 기간 동안 대략 12만 3,000명의 황해도 시민의 학살당했다고 썼다이 수치는 당시 영국 노동당 신분으로 참가했던 모니카 펠턴(Monica Felton)이 제시한 것으로 국제여맹 인사들 중에 가장 우익 성향의 인물이 주장한 것이다펠턴의 주장에 따르면황해도 안악시에서만 1만 9,092명의 주민들이 미군과 영국군 그리고 한국군에 의해 학살되었다이는 아마도 당시 북한 측의 제시한 수치와 자신이 조사한 자료를 통해 나온 것으로 확인된다.

(신천양민 학살 희생자의 묘, 이 묘 또한 신천 박물관 근처에 있다.)


(신천양민 학살 당시 양민들이 학살당한 현장)

 

앞에서 제시한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이 있다즉 한국군과 미군에 의한 학살이 결코 없지 않았고그 규모가 작지 않았다는 사실이다그러나 신천양민 학살의 주체로 미군을 뽑는 북한의 주장에 대한 반론도 결코 만만치 않다. MBC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신천양민 학살을 다룬 편에서월남한 생존자들과 신천에 주둔했던 미군의 진술을 토대로 당시의 사건을 추적해 들어갔다그러나 당시 신천에 주둔했던 미군은 지명만 기억할 뿐 그리 오래 있지도 않았으며 북진하기 바빴고신천에 주둔한 기간이 매우 짧았다고 한다또한 또 다른 미군은 부대가 지나갔음에도 본인 스스로 그 지명조차 기억하지 못했다그리고 무엇보다 북한에서 학살의 배후로 뽑은 윌리엄 해리슨은 자신이 신천에서의 학살 주동자로 지목당한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주장했으며그가 신천에 있지도 않았음을 확인해주는 자료도 있다.

(신천양민 학살을 묘사한 벽화)


(2010년대에 새로 단장한 신천 박물관 일부 모습, 자세히 보면 미군 옆에 하얀색 완장을 낀 우익 치안대도 보인다.)

 

즉 이러한 부분에서 북한의 자료와 미국의 자료가 엇갈리는 점이 있기에 나는 신천양민 학살의 주체로 미군이라 결론짓지 않는다그러나 미군 자체가 아예 무고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우선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 나온 내용에는 좌우익 양측의 학살이라는 점에 주목했지만중공군과 인민군의 남진 이후 미군이 과연 후퇴시기에 신천을 거쳤는지는 얘기하지 않았다. 1950년 7월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300~400명의 양민이 학살당했던 것을 생각하면미군에 의한 학살 가능성이 후퇴도중 일어났을 가능성도 아주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신천양민 학살을 미국이 한 것이라 보는 입장은 이런 점에서 맥락적으로 틀리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신천양민 학살의 주체로 지목되는 반공 청년단은 사실상 미국이 지원한 세력이기 때문이며설사 미군 자체가 학살의 배후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들을 지원하는 주체는 미국이기 때문이다적어도 이들을 방조한 책임도 크다고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MBC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2년 당시 신천양민 학살에 대해 다룬 적이 있다.)

 

나는 이 학살의 주체가 북한에 숨어 있던 반공 청년단이라 본다사실 반공 청년단의 존재는 맥락적으로 그리 생소하지 않다우선 한국전쟁 시기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친공 포로와 반공포로가 서로 죽고 죽이는 사태가 벌어졌었고양측의 포로 문제는 휴전회담에 큰 장애물이기도 했다또한 북한에서 주장하는 신천양민 학살의 참혹성이나 잔혹성을 따지고 보면제주 4.3 항쟁이나 여순항쟁에서 한국군과 우익 청년단들이 보였던 행위들과 너무나도 일치하는 부분들이 많다거기다 당시 학살에 참여했던 이들 중 월남한 이들은 자신들의 학살 행위에 대해서 제법 많이 증언했다그리고 북한 자체도 이들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다만 주된 주체를 미군으로 설정해놓은 것 뿐이다.

(신천 박물관을 방문한 김정은 위원장, 신천 박물관은 1960년대 김일성의 지시로 만들어져 김정일 김정은까지 그 규모를 확장했고, 반미주의 학습을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어쨌든 신천에서는 천인공노할 학살이 이승만 정부 하에서 발생했다필자는 신천양민 학살을 이승만 정부의 북한 통치 기간에 저질러진 우익들의 양민 학살로 생각한다그런 점에서 소위 이승만의 북진통일은 북한 민중에게는 너무나도 잔혹하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고 본다마지막으로 미군의 잔혹행위에 대해 더 첨언하고 싶다물론 내가 북한이 주장하는 신천에서의 미군에 의한 학살을 다소 부정하는 투로 얘기했지만나는 미군이라면 그러한 짓거리를 저지르고도 남을 주체라 생각한다북한에서 묘사한 신천학살의 참혹성은 실제로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군이 남베트남에서 벌이던 전형적인 군사작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이들은 민간인의 시체를 베트콩 사살로 처리하고 전과를 과장했다그런 점에서 미제국주의 군대의 잔혹성은 굳이 신천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여러 근거를 통해 입증이 가능하다.

 

신천양민 학살을 저지른 반공 청년단들은 말 그대로 서북청년단과 같은 이들이다이들은 북한에서 그런 끔찍한 학살을 저질렀으며이승만 정부의 북한 점령 2달 동안 수십 만명의 민간인이 무차별 학살당하고 빨갱이로 몰려 죽었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신천양민 학살이라는 참혹한 역사를 통해 우리가 알아야할 역사적 사실은 바로 그 점에 있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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