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콘퀘스트가 이용한 파시스트 자료

 

비탄의 수확에서 결정적인 부분인 12장의 제목은 기근이 창궐하다이다. 이 부분에는 인상적인 237개의 목록을 이루는 참고자료를 포함한다.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러한 참고자료의 반 이상이 극우 우끄라이나 망명자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우끄라이나 파시스트 도서인 끄레믈린의 음흉한 행위들은 쉰다섯 번이나 인용되었다! 콘퀘스트가 우끄라이나인 나찌 협력자들과 미국 비밀 정보국에서 제공한 역사서를 이용한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같은 장에서 콘퀘스트는, 스테판 반데라의 파시스트 조직의 청년운동에 의해 1953년 출판된, 올랙사 우로페이(Olexa Woropay)가 쓴 아홉 번째 원(The Ninth Circle)의 내용을 열여덟 번이나 인용한다. 저자는 1930년대 동안의 자신의 구체적인 일대기를 보여주나, 그가 나찌 점령 기간 동안 뭘 했는지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가 나찌에 참여한 과거가 가까스로 덮였다. 1948년에, 그는 많은 우끄라이나인 파시스트가 도피처로 삼은 뮌스터(Muenster)에서 다시 자신의 전기를 썼다. 그가 1932년에서 1933년의 기근대학살에 대해 우크라이나인들과 대담했던 곳이 바로 그곳이다. 어떠한 목격자(그 실체가 역자) 확인되지 않았기에, 과학적인 관점에서 그 책은 가치가 없다. 그가 전쟁 동안 무엇을 했는지 말하지 않은 것에 비추어 보아, ‘스딸린에 대한 진실을 폭로한이들은 아마도 도망간 우끄라이나인 나찌 협력자들이었을 것이다.37)

 

허스트의 1930년대 친나찌 출판물을 위해 글을 썼고, 후에 반아메리카 활동에 대한 냉전 맥카시주의 의회 위원회에 협력했던 빌(Beal)은 다섯 번 인용되었다.

 

반공주의 망명자인 크라브첸코(Kravchenko)는 출처 제공자로 열 번 나왔다. 또 다른 러시아 망명자인 레프 코펠레프(Lev Kopelev)는 다섯 번 나왔다.

 

포함된 과학적참고자료 중에는 바실리 그로스맨(Vasily Grossman)의 소설이 포함되어 있는데, 콘퀘스트는 그것을 열다섯 번이나 참고문헌으로 이용했다!

 

그 다음에, 콘퀘스트는 하버드의 망명자 대담 사업(Refugee Interview Project)에 있는 회견 내용을 인용했는데, 그 사업은 CIA가 재정 지원을 하였다. 그는 이왈드 아멘데가 쓴 1935년의 나찌 서적뿐만 아니라 맥카시 시대의 공산주의 침략에 대한 국회 위원회의 보고서를 인용했다. 콘퀘스트는 또한 유진 라이온과 윌리엄 챔벌린의 주장도 다섯 번 언급했데, 이 두 사람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CIA의 중앙 유럽 라디오 네트워크 조직인, 자유 라디오 이사회의 임원들이었다.

 

244쪽에서 콘퀘스트는 이렇게 썼다. ‘키예프에서 남쪽으로 20마일 떨어진 마을에서 한 미국인이 뭔가를 발견했다.... 그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너절한 무엇인가를 요리하고 있었다.’ 참고문헌은 1933228일자 New York Evening Journal이 라고 되어 있다. 사실 그것은, 1935년에 발행된 허스트 신문에 발표한, 토마스 워커의 기사였다! 콘퀘스트는 이 기사를 1933년의 기근과 맞물리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신문의 날짜를 앞당겼다. 콘퀘스트는 미국인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그는 어떤 누군가가, 토마스 워커가 한번도 우끄라이나에 들어간 적 없는 사기꾼이었다는 점을, 다시 생각해 낼까봐 염려했다. 콘퀘스트는 위조자였다.

 

거짓 풍문을 기록한 망명자들이 쓴 서적의 사용을 정당화하기 위해 콘퀘스트는 그래서 진실은 오직 소문에서 걸러질 수 있다.’ 그리고 비록 절대 옳은 것은 아니지만, 가장 좋은 출처는 기본적으로 풍문이다.’라고 주장하였다.38) 이 진술은 파시스트 비방, 잘못된 정보와 거짓에 학문적인 신뢰성을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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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 -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굴레를 벗고 자주의 새 역사를 여는 베네수엘라
베네수엘라 혁명 연구모임 지음 / 시대의창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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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전쟁이 격화되고 있는 요즘 재밌는 책 한권을 읽었다. 그 책은 바로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의 저자로 유명한 임승수씨가 공동집필한 저서 <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라는 책이다. 사회주의자가 되고 난 이후 베네수엘라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작 베네수엘라에 대해서 깊게 공부해본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저 베네수엘라가 미국의 경제제재를 받고 있고, 진보적인 정책들을 통해 사회주의를 달성하고자 했었던 것 정도만 단편적으로 알았다. , 베네수엘라의 역사와 이들의 정치 상황을 자세히는 몰랐다고 할 수 있다.

 

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책에서 주인공이 되는 인물은 바로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인 우고 차베스(Hugo Chavez). 우고 차베스는 진보적인 정책들을 통해, 베네수엘라를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고자 했다. 실제로 차베스는 집권 초기 여러 성과들을 만들어 냈고, 성과들은 고무적이었다. 차베스는 베네수엘라를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는 과거 빈부격차가 극심하던 베네수엘라를 억압받고 착취 받던 이들에게 보다 더 많은 권력을 부여하고자 했고, 빈민들을 위해 학교를 설립하고 병원을 세웠으며, 문맹 퇴치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차베스는 과거 굶주리던 빈민들을 위해 무상으로 급식을 제공했고, 집이 없는 이들을 위해 주택을 건설했으며, 또 건설한 주택들을 가난한 인민들에게 분배했다. 차베스의 정책은 분명 진보적인 정책이었고, 자본주의적 양식이 많이 남아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회민주주의적 성격을 띈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차베스는 빈민 계급이 권력을 가지기를 원했다. 그리고 기업의 이익이 아닌 공적인 이익을 추구했으며, 생산자가 일하고 노력한 만큼 받을 수 있는 평등한 생산관계를 유지한 사회를 추구했다. 그는 소위 21세기 사회주의라는 구호 아래 민주주의를 추구했지만, 소위 미국에서 주장하는 위선이 가득 찬 민주주의는 절대로 아니었다. 오히려 제국주의로 포장한 미국식 민주주의에 맞서 저항했다.

 

1998년 선거를 통해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이 된 차베스는 집권 시점부터 미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주의 세력의 사악하고 위협적인 공격을 받았다. 미국에게 있어서 차베스라는 존재는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방해하는 존재였고, 따라서 축출되어야만 하는 존재였다. 따라서 미국은 베네수엘라 내에 있는 우익 부르주아지 세력들을 지원하여, 차베스 정부를 내부에서 흔들고자 했다. 이런 수법은 과거나 현재나 미국이 항상 이용하는 방법이다. 과테말라의 아르벤스, 브라질의 골라르트, 칠레의 아옌데 등이 그렇게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를 당했다. 2002년에만 해도 차베스를 축출하려는 두 번의 쿠데타가 있었고, 실제로 차베스 또한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러나 미제국주의자들의 염원과는 달리, 베네수엘라 민중은 차베스편이었다. 그래서 미국과 우익 세력들이 온갖 흑색선전과 여론조작을 해도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다.

 

민중들이 차베스를 지키고 수호한 이유는 자명했다. 그것은 차베스가 가난한 인민들을 위해 진심으로 헌신했기 때문이다. 차베스 집권 이전에는 베네수엘라 빈민들과 인종차별을 받던 원주민들을 위해, 헌신하고 그들을 위한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한 지도자는 없었다. 차베스가 집권한 이후 베네수엘라 사회에서 차별받던 원주민들도 권리라는 것이 생겼고, 공장과 사회에는 인민들의 의사가 직접적으로 반영되는 시스템이 도입됐다. 탐욕과 이윤밖에 모르는 자본주의 사회가 아닌, 집단과 공동 그리고 대다수 민중을 위한 진보적인 사회가 자리 잡았다. 과거 아주 극소수만 소유하던 집을 빈민들이 소유하게 됐고, 치료비가 없어서 못 가던 병원을 공짜로 치료받을 수 있게 됐다. 이런 혁명적인 변화들은 차베스가 대다수 인민들에게 지지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책을 읽으면서, 우고 차베스에 대한 존경심이 더 생겼다. 사회주의를 향한 그의 원대한 꿈과 정의는 너무나도 아름답고 순수하다. 1959년 혁명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한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와 더불어, 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의 사회주의 승리를 향한 발걸음은 그 자체로 숭고하다. 이들의 혁명과 진보가 아름다운 건, 인간적이고 당연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기업과 자본가 계급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가치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이런 가치를 부정하고, 범죄와 학살 그리고 폭력을 동반하는 주체가 바로 미국이다. 이런 미국에 대한 환상을 가진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을 보고만 있으면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일각에서는 베네수엘라 경제가 실패했다고 말한다. 물론 베네수엘라는 가난하다. 무엇보다 미국의 경제제재는 지금도 해제되지 않았다. 미국은 차베스가 집권한 시점부터 현재까지 무려 20년간 베네수엘라에게 살인적인 경제제재를 가하고 있다. 베네수엘라 석유 문제도 그 원인을 따지고 보면, 자본과 부, 권력, 달러를 독점한 기업들이 우익들을 동원해 베네수엘라의 자주적인 시스템에 사보타주를 가해서 생긴 일이지, 차베스와 베네수엘라 민중이 의도적으로 망치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미국의 경제제재와 사보타주 및 테러를 당하는 베네수엘라의 상황은 보지 않고, 그저 서방이 주장하는 말말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왜곡된 신념이 진실의 눈을 가린 것이다.

 

차베스는 2013년에 사망했다. 그러나 그는 죽기 전까지 미제국주의에 맞선 투쟁과 사회주의 승리를 향한 투쟁을 포기하지 않았다. 비록 사회주의 국가는 아니지만, 베네수엘라는 사회주의로 가기 위한 그 과도기적 단계에 있다. 현재는 그의 후임자인 니콜라스 마두로가 지도자로 있다. 우고 차베스와 피델 카스트로 그리고 에보 모랄레스로 이어지는 사회주의 승리를 향한 라틴 아메리카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전 인류가 COVID-19를 겪으며, 자본주의 하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 그리고 로자 룩셈부르크의 말대로 사회주의를 선택하지 않은 자본주의 국가는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 물론 자본주의 러시아 보다 자본주의 미국의 책임이 훨씬 더 크긴 하지만, 자본주의라는 야만주의가 불러온 결과다.

 

20세기가 끝나는 시점에서 21세기에 사회주의를 시도한 베네수엘라의 붉은 별 우고 차베스, 그는 비록 세상을 떠났지만 사회주의를 향한 라틴 아메리카의 전진은 COVID-19라는 위기 속에서 지속되고 있다. 자본주의가 야만주의라는 사실은 미국을 통해서 숱하게 봐왔다. 20세기에는 베트남 21세기에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까지 미국이 일으킨 침략전쟁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표현대로 제국주의 세력이 보여준 야만주의 그 자체다. 그 침략전쟁으로 돈을 벌고 이윤을 축적하는 것도 미제 그 자체다. 현재 우크라이나 사태에서도 경제적 이득을 보는 건 결과적으로 미국일 것이다. 2013년 유로마이단 색깔 혁명 이후 우크라이나에서 탈산업화가 가속화되며, 미국과 서방의 기업들만 이득을 보았다.

 

이처럼 자본주의는 야만주의고, 제국주의의며 신식민주의를 추구한다. 따라서 인류가 선택해야할 길은 사회주의다. 4차 산업혁명 시대라고 하지만, 19세기 마르크스가 분석한 모순은 본질적으로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사회주의를 향한 투쟁은 계속돼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우고 차베스의 베네수엘라는 적잖은 영감을 주는 사례라고 나는 생각한다. 미제에 맞서 사회주의를 이룩하고자 했던 우고 차베스의 말을 인용하겠다.

나는 매일 더욱 확신하게 되며 내 마음 속에는 한 점의 의심도 없습니다. 이전부터 수많은 지식인들이 말해왔듯이, 우리는 자본주의를 넘어서야 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사회주의를 통해서만이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은 민주주의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하지만 미국이 강요하는 방식의 민주주의는 아닙니다. - P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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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비탄의 추수: 콘퀘스트 그리고 우끄라이나 나찌 협력자들의 복귀

 

19781월에 데이비드 리(David Leigh)는 런던 가디언(Guardian)지에 기사를 냈는데, 거기서 로버트 콘퀘스트가 공식적으로 정보연구부(IRD, information Research Department)라고 불린, 영국 비밀정보부(British secret service)의 부서에서, 그동안 의도적으로 허위 정보를 퍼뜨리는 일을 했다고 폭로했다. 영국 대사관에서 IRD의 대표는 변조된정보를 기자와 유명인사들에게 알리는 일을 맡았다. 가장 중요한 두 개의 목표물은 제3세계와 쏘련이었다. (David Leigh)는 이렇게 주장했다.

 

로버트 콘퀘스트 .. 쏘련에 대해 종종 비판적이던 그는 IRD의 일원이었다. 그는 1956년까지 외무부(FO, Foreign Office)에서 일했다.’23)

 

IRD의 제안으로, 콘퀘스트는 쏘련에 관한 책을 썼다. 출판물의 1/3을 프래저(Praeger)출판사가 매입했는데, 프레저는 CIA의 요구에 따라 주기적으로 책을 출판하고 배포했다.

 

1986, 콘퀘스트는, 적군(Red Army)이 미국을 점령할 가능성에 대해 일반 미국 시민을 대상으로, 레이건이 펼친 선전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 만칩 화이트(Manchip White)와 공동 집필한 콘퀘스트의 책은 러시아가 침공하면 취해야 할 행동: 생존 안내서(What To Do When the Russians Come: A Survivalist's Handbook)라는 제목이었다.

 

거대한 테러(The Great Terror)(1968, 1973년 개정)이라는 그의 책에서 콘퀘스트는 1932년과 1933년 사이 집산화 기간에, 500만에서 600만 명이 죽었는데, 우끄라이나에서 그 절반 정도가 죽었다고 추정했다. 레이건의 집권기 동안에 반공주의 광란은, 나찌에 의해 몰살된 600만 명의 유대인의 수보다 많은 수치가 필요하였다. 1983년에 콘퀘스트는 기근의 상황을 1937년까지 연장하고, 사망자 예상수치1400만으로 수정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1986년 그가 출판한 비탄의 추수는 우크라이나의 극우 인사와 냉전주의자들이 제시한 것과 같은, 거짓 학술 역사서이다.

 

콘퀘스트는 우크라이나의 극우 인사들이 반독일 반쏘비에트투쟁을 이끌었다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범죄 집단(극우 인사 역자)이 패배한 이후 미국으로의 이주를 꾀했을 때 그들이 지어낸 거짓말을 되풀이했다.

 

우끄라이나 역사를 다루면서, 콘퀘스트는 나찌 점령기간을 두 번의 적색 테러의 물결 사이의 시대로서, 한 문장으로 언급한다!24) 그는 나찌 점령기간 동안 우끄라이나 파시스트들이 자행했던 야만적인 테러를 그의 역사서에서 완전히 지워버렸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기근대학살의 최고의 출처이기 때문이다.

 

로만 슈케비치(Roman Shukhevych)는 독일 군복을 입은 우끄라이나 민족주의자들로 구성된 나이팅게일 대대의 지휘관이었다. 이 대대는 1941630일 리보프(Lvov)를 점령했고, 이 지역에 거주하는 유대인에 대한 3일간의 대학살에 참여했다. 1943년 슈케비치는 우끄라이나 반란 부대(Ukrainian Insurgent Army, the Banderivtsy, or UPA)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부대는 우끄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Organization of Ukrainian Nationalists, OUN)의 파시트스 지도자 스테판 반데라(Stepan Bandera)의 심복인 무장조직이었다. 이후에 스테판 반데라는 자신이 독일과 쏘련에 맞서 싸웠다고 전후에 사람들을 속였다.25)

 

그들이 독일에 대항하여 싸웠다는 모든 이야기는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그들은 독일 나찌 돌격대(SA)의 대장인 빅토르 루체(Victor Lutze)를 사형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실, 그는 베를린 근처에서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26) 그들은 1943년 여름에 볼니아(Volnia)와 폴리사(polyssa)에서 1만 명의 독일 군인과 전투를 했다고 주장했다. 역사가인 루벤 아인츠텐(Reuben Ainsztein), 이 전투 과정에서 5000명의 우끄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 1만 명의 독일군 편에서, 유명한 볼셰비끼 알렉세이 표도로프(Bolshevik Alexei Fyodorov)가 이끄는 빨치산 부대를 포위해서 전멸시키려는 대규모 전투에 참여했음을 증명하였다!27)

 

아인츠텐은 이렇게 적었다:

 

반데리브치(Banderivtsy)로 알려지게 된 우끄라이나 반란 부대 무리는, 오늘날 따라스 추쁘린카(Taras Chuprynka)로 알려진 슈케비치의 지휘 아래 있었는데, 이들은 생존한 유대인들, 폴란드 농민들과 거주민들, 그리고 모든 반독일 빨치산들에게 가장 위험하고 잔인한 적들이었다.’28)

 

우끄라이나의 무장 나찌 친위대 갈라치아 14사단(14th Waffen SS Galizien Division)[또한 할리치나 사단(Halychyna Division)으로도 알려짐] 19435월에 창설되었다. 우끄라이나인들에게 이 사단으로 입대를 권유하면서, 나찌가 권한을 부여한 우끄라이나 중앙위원회의 수장인 쿠비조비치(Kubijovych)는 이렇게 선언했다.

 

고대하던 순간이 왔다. 우끄라이나 인민들은 총을 들고 뛰쳐나와 극악무도한 모스끄바인유대인 볼셰비즘(MuscoviteJewish Bolshevism)과 싸울 수 있는 기회를 다시 얻었다. 위대한 독일 제국의 총통이, 우끄라이나 지원자들로 구성된 독립된 부대를 만드는 것을 승인했다.’29)

 

이전에는 나찌가 우끄라이나에 직접적으로 그들의 권한을 강요했고, 그들의 우끄라이나인 협력자들에게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았었다. 나중에 우끄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 독일에 대한 대항이라는 신화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독일과 우끄라이나 파시스트들 간에 있었던 이러한 대립관계 때문이었다.

 

적군에 밀려서 나찌는 1943년에 전술을 바꾸어 우끄라이나 살인자들에게 더 중요한 역할을 부여했다. 무장 나찌 친위대(SS)우끄라이나인사단의 창설은 우끄라이나 민족주의의 승리로 여겨진다.

 

1944516, 친위대의 수장인 히믈러(Himmler)는 갈리치아 사단의 독일 장교들에게 우끄라이나에서 모든 유대인을 없애는 데 성공한 것을 축하했다.

 

무장 친위대 갈라치아 14사단의 노병인 바실 베리하(Wasyl Veryha)1968년에 이렇게 썼다:

 

무장 친위대 갈라치아 14사단에서 훈련받은 병사들은 이제 우끄라이나 반란 부대 군대의 중추세력이 되었다.... 우끄라이나 반란 부대 지휘관은 또한 원대 병사들이 제대로 된 훈련을 받도록 무장 친위대에 보냈다.... 이것은 나찌가 물러간 후에 모국에 남은 우끄라이나 반란 부대를 강화시켰고, 특히 지휘관과 교관을 강화시켰다.’30)

 

비록 우끄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에서 멜닉(Melnyk)과 반데라31)의 경향이 서로 경쟁하고 심지어 서로 싸우기도 했지만, 우리는 여기서 어떻게 그들이 독일 나찌의 지도 하에 공산주의에 맞서 협력했는지 알 수 있다.

 

나찌 장교인 숄츠(Scholtze)는 뉘른베르크(Nuremberg) 법정에서, 독일 정보기관의 수장인 카나리스(Kanaris)[2차 세계 대전 중의 독일 국방군 최고 사령부(OKW)의 외국 첩보국 역자] 아프베르(Abwehr)에게, 우끄라이나에서 쏘비에뜨 권력에 대항하는 투쟁이 지속되도록 지하 조직을 구성하라고 직접 명령한 사실을 폭로했다. 특히 민족주의 운동을 지도하기 위해 유능한 요원들을 남겨두었다.’32) 만델의 뜨로츠키파 무리가 1944년에서 1952년 사이에 우끄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의 파시스트 암살단들이 자행했던 반스딸린주의무장 투쟁을 항상 지지했다는 점에 주목하라.

 

전후에, 존 로프투스(John Loftus)는 미국 법무부 대리인으로서 특별 조사단에서, 미국에 입국하려는 나찌를 추적하는 직무를 맡았다. 그의 책 벨라루스의 비밀(The Belarus Secret)에서 자신은 우끄라이나인 나찌의 입국을 막는 업무를 했음을 확언했다. 그러나 미국 정책조정 행정실(the U.S. administration's Office of Policy Coordination) 업무를 맡았던 프랭크 위즈너(Frank Wisner)는 당시에 아주 중요한 비밀 업무를 수행했는데, 전직 우끄라이나, 크로아티아, 헝가리 출신의 나찌의 입국이 허락되도록 조직적으로 일을 했다. 나중에 CIA의 수뇌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위즈너는 이렇게 주장했다: ‘OUN(우끄라이나 민족 조직)1942년 이 조직이 창설한 빨치산 부대(원문대로), UPA(우끄라이나 반란 부대)는 독일과 쏘련 양쪽 모두와 격렬하게 싸웠다.’33)

 

우리는 여기서, 전쟁 직후에 미국 정보기관이 쏘련에 맞선 은밀한 전투에서 반공주의자들을 이용하기 위해서, 어떻게 우끄라이나에서의 나찌 활동 역사를 이어받았는지 알 수 있다. 로프투스(Loftus)는 이렇게 논평했다:

 

이것은 완벽한 허구이다. CIC(미국의 방첩부대, U.S Counter-Intelligence Corps)에는 OUN반데라에 관한 11권의 내부 비밀 자료를 찍은 정보요원이 있었다. 이 자료들은 위의 조직원들 대부분이 독일 비밀경찰(Gestapo)이나 나찌 친위대를 위해 경찰, 암살자, 빨치산 사냥꾼 그리고 시의 공무원으로서 어떻게 활동했는지 명백히 보여준다.’34)

 

미국에서, 전직 우끄라이나 나찌 협력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에 관한 그들의 개정판을 퍼뜨리는 연구소를 창립했다. 로프투스는 이렇게 적었다:

 

전직 나찌 정보요원들을 위한 전방에 위치한 조직(front groups)과 마찬가지인, 이러한 연구소의 기금은 오늘날 자유 라디오로 알려진, 볼셰비즘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아메리칸 위원회에서 나왔다. 이 위원회는 사실상 OPC의 최전열(a front)이었다’35)

 

히틀러와 스딸린에 대항해서’: 전직 히틀러주의자와 CIA가 그들의 힘을 합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구호 주위에서이다. 잘 모르는 이들에게는 파시즘에 대항하고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표현이 3의 길로 보일 수도 있으나, 이것은 분명히 사실이 아니다. 나찌가 패배한 이후 붕괴하는 대독일의 이전의 지지자들과, 세계 패권을 갈망하고 있던 그들의 후계자인 미국을 통합시킨 것은 바로 이 관용어구이다. 이제 히틀러는 단지 과거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에, 독일, 우끄라이나, 크로아티아 등의 극우는 미국의 극우와 결합했다. 그들은, 반파시즘 전쟁의 주력을 담당했던 사회주의와 쏘련에 맞서기 위해 힘을 합쳤다. 부르주아 세력을 다시 모으기 위해, 그들은 사회주의가 나찌주의보다 더 나쁘다는 거짓을 퍼뜨렸다. ‘히틀러에 맞서고 스딸린에 맞서서라는 표현은 스딸린의 범죄대학살을 조작하는데, 또한 더 유용하게는 히틀러의 소름끼치는 범죄와 대학살을 덮어버리고 심지어 부정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1986년에, 우끄라이나 반란 부대(UPA)의 베테랑이며, ‘히틀러와 스딸린에 맞서서싸우는 척했던 바로 그 군인이, 왜 이 대학살이 다른 학살과 비교해 큰 의미를 지니는가?라는 제목의 책을 한 권 출판했는데, 바로 UPA의 군인이었던 유리 추마트스키(Yurij Chumatshkyj)가 저자였다. ‘유대인을 말살하려는 계획은 없었고, 대규모의 독가스 살해도 없었으며, 2차 세계대전에서 모든 이유로 인해 죽은 유대인이 100만 명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수정주의 역사가들이 박해당하고 있다.’고 유감을 표하면서, 추마트스키는 계속 말했다:

 

시온주의자들의 진술에 의하면, 히틀러는 600만의 유대인을 죽였지만, 유대 국가기관의 지원을 받은 스딸린은 히틀러보다 10배는 많은 수의 기독교인을 죽일 수 있었다.’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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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미국과 나토가 당초 구소련과 했던, 단 일인치도 동독의 동쪽으로 나토의 영역을 확장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속적으로 어기며 급기야 이젠 우크라이나까지 나토로 묶으려 한다는 사실...그 우크라이나에 러시아를 표적으로 하는 치명적 군사자산을 전개해 왔다는 사실...미국과 서방이 그런대로 중립을 유지해 오던 우크라이나 사람들을 선동, 쿠데타를 일으켜 러시아에 적대하게 만들고 이 흐름에 반대하는 동쪽의 러시아 사람들을 8년 동안 군사적으로 공격, 8년 동안 무려 15,000명을 살해해 왔다는 사실...이 살해행위를 중지하기로 했던 약속을 우크라이나가 계속 위반해 왔다는 사실...이 흐름을 주도하는 게 나찌를 숭앙하는 극우 민족주의자들이라는 사실...이 문제에 대해 러시아가 지속적으로 문제제기해 왔다는 사실...등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전쟁은 이번에 뜬금없이 발생된 게 아니다. 가깝게는 8년 전에 개전된 것이고 멀게는 독일 통일되었던 시점으로부터 갈등의 에너지가 쌓여온 것이다. 러시아가 전쟁 책임을 독박 쓸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 뉴스 보니 러시아 목 조르려 나머지 온 유럽과 미국이 나서는 모양이다. 각종 첨단 군사장비와 돈으로 우크라이나를 원조하고 미국은 러시아 탱크 때려잡는 아파치 헬기까지 파견할 모양이다. 게다가 경제제재까지.

세상에 옳고 그름을 따지려면 양측의 사정을 공정하게 봐야 한다.

미국이 가는 곳마다 내전이 벌어져 멀쩡한 정권이 무너져 나라가 파괴되고 숱한 인민들이 피를 흘렸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선진 복지국가에서 졸지에 비극의 땅으로 되어버린 리비아 ,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시리아, 베네주엘라 멀게는 필리핀, 인도네시아, 월남...에서 미국이 어떤 일을 했는지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언론에서 이 처참한 비극들과 관련된 미국의 책임을 묻는 것을 난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우리는 물어야 한다.

‘‘지금까지 누가 진짜 타국을 공격하고 침략해 왔는가?
러시아가 그랬는가, 미국과 나토가 그랬는가?‘‘

세계 각 나라의 내란, 쿠데타, 전쟁, 살상..등에 거의 빠짐없이 관여해 온 미국과 그 추종국들이 마치 정의의 사도인 양 등장하는 꼬라지를 봐 주기 힘들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러시아에 대해 결연하게 저항하고 러시아를 저주하는 모습을 자주 본다.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세상 보는 견해는 다양한 법. 우크라이나 정부를 비판하고 서구의 간섭을 못 마땅해 하는 우크라 인민들도 당연히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장면은 단 한 컷도 나오지 않는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우리가 보고 듣는 모든 소식은 미국이 장악, 통제하는 통신사들이 걸르고 선택한 후에 내보내는 거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전쟁 좋아하는 사람 없다. 전쟁이 빨리 끝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외부 국가들이 끼어들지 않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에 첨단무기 지원하며 간섭하는 것은 역사를 공유해 온 애증적 형제 관계의 두 슬라브 국가 인민들이 서로를 극한으로 증오하도록 싸움 부추키며 공멸하게 하는 행위다.

미국 뿐만이 아니라 네덜란드, 폴투갈, 영국, 프랑스, 독일, 폴란드...심지어 한국까지 우크라이나를 편들며 껴들고 있다. 확고한 논리적 근거와 정당한 명분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푸틴은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패배를 받아 들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수중에 핵무기를 쥐고 중국을 전략적 동반자로 배경으로 두고 있는 푸틴의 러시아를 과도하게 궁지로 몰고 있다. 이래도 되는 거냐?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4650097655096939&id=100002902501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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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man 2022-03-02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 고작 한다는 비판이 이거인가요? 그래서 민간인 지역에도 폭격을 가하는 건가요? 제가 봤을 때는 자신들의 정치적 목표(반미 반제)를 위해서 우크라이나를 구실로 삼은 것으로밖에는 안 보이네요 ㅋ

NamGiKim 2022-03-02 17:54   좋아요 0 | URL
민간인 지역에 대한 폭격은 당연히 잘못됐죠. 그리고 러시아가 정의도 아니고요. 푸틴의 지나친 야심과 패착도 당연히 문제 있고, 깔 필요도 있죠. 하지만 이중적이었던 언론의 태도는 충분히 비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NamGiKim 2022-03-02 17:57   좋아요 0 | URL
그리고 얘기가 나온 김에 이 얘기도 하고 싶습니다. 민우님은 아니지만, ˝미제가 <오폭>으로 아프가니스탄 민간인 죽이는 건 ˝그럴수도 있다.˝라고 하셨던 친미 전쟁광들이 러시아 욕하시는 것도 종종 보입니다.˝ 전 그런 분들이 러시아를 욕할 자격 없다 봅니다.

Redman 2022-03-02 20:56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남기님 생각 잘 알았습니다.

newdvs117 2023-06-29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내 언론에서는 우크라이나의 반소련 반공 극우주의자들이 저지른 갖가지 만행(ex: 오데사 학살, 노동법 개악 등)에 대해 전혀 보도하지 않죠. 그래서 제가 국내언론을 끊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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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이 되고 난 이후 미군정 통치를 거치면서, 과거 일제에 적극 협력했던 친일파들은 친미파가 되어 신분세탁을 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이들은 학계와 정치, 군사, 경찰, 행정, 기업 등 대부분의 분야에 자리 잡고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대한민국 내에서 친일파를 청산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바로 반민특위의 활동이 그러했다. 반민특위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줄임말로 친일파 청산을 목적으로 활동했던 단체다. 물론 이러한 움직임에 찬물을 끼얹고 궁극적으로 이 조직을 해체시킨 주체는 바로 대통령인 이승만이었다. 19491월 반민특위는 한 사람을 체포했다. 그가 바로 노덕술이다.

 

노덕술은 189961일 울산 장생포에서 태어났다. 1918년 경찰이 되기 위해 경남순사교습소에 지원했으며, 졸업 후 일제 말단 순사로 경찰 생활을 시작했다. 1921년에는 순사부장을 맡았고, 1924년에는 경부보 시험에 합격하여 경남지역에서 근무했다. 그는 경찰에 있으면서 상승 가도를 달렸는데, 당시 일본인도 달기 힘든 경부자리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그가 높은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바로 그가 일제가 원하는 데로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다 죽이고 잔인하게 고문했기 때문이다.

 

노덕술의 악질적인 고문은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이어졌다. 1927년 일제의 신간회 탄압이 있자, 노덕술은 신간회 간부인 박일향을 잡아들여 무자비하게 고문했다. 신간회 탄압 당시에만 노덕술에게 고문을 받아 죽은 독립운동가는 3명이나 된다. 노덕술의 고문 방식은 아주 다양했으며, 일설에 따르면 그의 고문은 일본인 형사들도 기겁할 정도였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일설에 따르면 일제 경찰이 전국의 고문기술을 총 정리했는데, 그 가운데 70% 가량이 노덕술의 기술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1928년 반일 학생모임인 혁조회를 적발하여 이들 회장 김규직 등 9명을 잡아들여 무자비하게 고문했다. 그리고 잡아들여 고문한 9명 중에 3명이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1929년 광주항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노덕술은 이에 동참한 고등학생들을 2차례에 걸쳐 구속하여 모질게 고문했다. 193251ML(Marx-Lenin)당원인 김재학이 메이데이(May Day) 시위행렬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노덕술에게 고문당했다. 노덕술은 그를 직접 검거해 두 손을 뒤로 두 발을 앞으로 결박해 천장에 매달아 구타와 함께 숱한 고문을 했으며, 그가 통영에서 1년 남짓 근무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잡혔고, 또 고문당했다. MBC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노덕술편을 보면 다음과 같은 인터뷰가 나온다.

 

하여간 통영에서 엄청나게 잡혀가지고 제일 많이 고문한 사람들이 허가비 노덕술이 한경부 이런 사람들이야. 솔직히 말하면 그는 들어가면 물고문하고 전기고문하고 반쯤 죽여 버리지요 뭐.”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노덕술은 1933년에는 경부가 됐고, 태평양 전쟁이 한참이던 1943년에는 경시자리까지 올랐다. 조선인 가운데 일제 경찰로 경시를 단 사람은 35년 식민 지배를 통틀어 21명뿐이었다는 사실에서, 그가 얼마나 악질적인 친일 경찰이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또 부패한 경찰이었다. 1931년 일제의 만주사변 이래로 노덕술은 화물자동차 징발과 군수품 수송에 적극 나섰으며, 일제 공훈 기록으로만 따져도 노덕술은 1937년에서 1938년 사이에는 841938년에서 1940년에는 104회에 달했다. 1949년 반민특위 조사 기록에 따르면 그의 재산은 60만 원이나 되는데, 현재 시세로 하자면 100억 원이 넘는다.

 

1945년 해방을 맞은 시점에서 노덕술은 평양경찰서장으로 있다가, 소련군이 진주하자 친일 인사로 지목되 구금당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금에서 벗어나 남한으로 내려왔으며, 미군정 하에서 수도경찰청장이던 장택상과 경무부장이던 조병옥이 친일 경찰을 재등용하는 정책을 실행하게 되면서, 노덕술은 해방 후에도 승승장구의 길을 걸었다. 장택상은 노덕술에게 날개를 피게 해줬다. 194646일 우익 거물인사인 송진우 암살범들을 검거한 공로로 노덕술은 경찰 수뇌부에 인정받았으며, 그해 5월에 있던 정판사 사건에서 조선 공산당 재정부장이던 이관술을 잔인하게 고문했다. 놀랍게도 이관술은 노덕술에게 일제시대때 총 3번이나 고문을 당했다. 그 외에도 노덕술은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와 좌우합작운동으로 유명한 독립운동가이자 통일운동가인 여운형 암살 배후에 있던 것으로도 추정하기도 한다.

 

심지어 그는 전설적인 독립운동가인 약산 김원봉을 고문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약산 김원봉은 19472월 자택에서 볼일을 보던 중 노덕술에게 체포돼 갖은 고문을 당하고 뺨을 맞는 수모를 겪었다. 노덕술이 김원봉을 빨갱이로 몰아 탄압한 명분은 바로 미군정 포고령 위반이었다. 해방 된 땅에서 악질 친일 경찰이 전설적인 독립운동가를 빨갱이로 몰아 고문하고 탄압한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노덕술은 위기를 맞았다. 그해 10월 반민특위가 출범하자, 노덕술은 우익 테러리스트인 백민태를 찾아, 반민특위와 연관된 이들을 사전에 죽이려 했다. 노덕술이 사전에 죽이려 했던 인물들 중에는 김병로나 신익희 그리고 김상덕과 같은 독립운동가들도 있었던 반면, 유진산이나 이철승 그리고 김두한과 같은 극우 반공주의자들도 있었다. 놀랍게도 백민태라는 인물이 반민특위에 자수하면서, 노덕술은 체포당했다. 노덕술은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지만, 그를 지원해준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대통령 이승만이다. 결국 이승만의 도움으로 그는 풀려났고, 반민특위도 이승만에 의해 해체됐다. 이승만은 노덕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 같은 애국자가 있어 내가 발 뻗고 잔다.”

 

한국전쟁이 있던 1950년 노덕술은 군으로 자리를 옮겨 중령이 됐고, 육군 제1사단 헌병대장을 지냈다. 그는 이승만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고, 심지어 주한 미대사 무초가 이승만에게 전달한 서한에는 그를 높게 평가하는 구절이 등장할 정도다. 그랬던 노덕술이지만 1955년 돌연 재판에 회부되기도 했다. 재판에 회부된 이유는 그가 밀수와 관련이 있다. 이후 노덕술은 고향인 울산으로 내려왔으며, 19604.19 혁명 이후 치러진 제5대 국회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기 까지 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그는 호의호식 하다가 19684169세의 나이로 편하게 생을 마감했다.

 

노덕술이 이렇게 잘먹고 잘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친일파를 앞세워 나라를 만든 미국과 이승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노덕술이라는 존재가 만들어낸 대한민국의 모순은 박정희 전두환 시대를 거쳐 박처원과 이근안으로 이어졌다. 독립운동을 탄압하던 친일파들은 해방 후 친미파가 되어 독립운동가를 빨갱이로 몰아 탄압했고, 이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서는 민주화 운동가들을 빨갱이로 몰아 탄압했다. 이런 악질 친일파를 애국자로 둔갑시킨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이라 부르는 이들이 한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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