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관광지 혹은 휴양지로 손꼽히는 제주도는 너무나도 참혹하고 끔찍한 현대사를 경험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군들이 제주도를 군사기지화 혹은 요새화했고, 해방 후에는 미군이 들어와 미군정을 실시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참혹한 대학살이 일어났는데, 그것이 바로 제주 4.3항쟁 혹은 제주도 대학살이다. 많은 사람들이, 4.3사건을 4.3항쟁이라 부르기도 한다. 과거 반공주의가 강했던 시절에는 4.3 폭동이라 칭했지만, 민주화 이후에는 제주 4.3 사건 혹은 제주 4.3항쟁이라 부르게 됐다. 나 또한 4.3을 제주 4.3항쟁이라 자주 부른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제주도에서 자행된 학살에 초점을 두었기에, 일부러 제목을 제주도 대학살이라 표현했다.

(제주 4.3 70주년 카드뉴스)
1945년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한 이후, 한반도 이남에는 미군이 상륙했다. 해방 이후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제주도에도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건설된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가 자주적으로 설립됐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지배 아래서 72개의 화학 및 제조업 공장이 제주도에 세워졌는데, 일제가 패망한 이후 며칠 만에 72개 기업 모두가 접수되어 인민의 자주적인 관리를 통해 운영됐다. 그러나 이런 자주적인 활동은 미군이 상륙하면서 제지당했다. 미군이 제주도에 상륙하기 전인 9월 23일 대중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인민위원회가 구성됐고, 이 인민위원회는 남한의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사실상 평화롭게 행정과 치안을 이어나갔었다.
1945년 11월 9일 미군이 제주도에 들어오고 난 이후에도 제주도 지역은 잘 운영됐고, 심지어 1947년 10월 미군정 사령관인 존 리드 하지는 “제주도는 코민테른의 별다른 영향 없이 인민위원회가 평화적으로 통제하는 진정한 공동체적 지역”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평화적인 단체와 지역을 피로 물들이고 억압을 행사한 주체는 바로 미국이었다. 제주도에 상륙한 미군은 과거 일제에 협력했던 친일 인사들을 기반으로 행정과 경찰력을 증원했다. 이러한 조치는 당연히 제주도민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946년 8월 미군정은 제주도를 독자적인 도로 분리했고, 우익출신 경찰들을 제주도에 파견하여 증원했다.

(제주 4.3 당시 산간지대로 피한 민간인들)
1946년 대구 10.1 항쟁이 발발하여 수천 명의 민간인이 미군과 우익 경찰에 의해 죽고 체포 당하는 일이 생겼다. 제주도에서는 미군정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없었지만, 1947년에 들어서면서, 긴장이 고조됐다. 1947년 3월 1일 제주도에서도 3.1절 집회가 열렸다. 최소 5만 명 이상의 군중이 결집했고, 평화시위가 벌어졌다. 군중들이 결집하자, 미군정은 경찰들에게 발포를 명령했다. 평화적으로 시위를 하던 시위군중은 경찰이 탄 말에 인명피해가 생겼고, 이에 항의한 시민들이 경찰에게 저항했다. 그러자 경찰은 총을 사용했다. 경찰이 발포한 총에 최소 6명이 총에 맞아 사망했고, 더 많은 수가 부상 당했다. 이에 항의하기 위한 차원으로 시위 군중은 일주일 후에 경찰에게 항의 시위를 했고, 경찰의 또 다른 발포로 5명이 사망했다. 3.1절 시위로 최소 16명이 살해됐고, 22명이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고 미군 소식통은 보도하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 미국의 대통령이던 해리 트루먼은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nctrine)을 선포하여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반공주의적 지원을 강화했고, 이러한 미군정의 폭압적인 통치는 제주도민이 미군정에 맞서 저항하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1948년 2월 7일 남로당을 중심으로 발생한 전국적 파업에서 제주도는 가장 저항의 격력한 곳으로 변모했다. 1948년 3월 1일에는 이승만과 미국이 주도하는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청년 2,500명이 경찰에게 체포당했고, 체포당한 젊은이들이 고문당했다. 거기다 미군정의 무책임하고 살인적인 정책으로 쌀 세금이 폭등했다. 적어도 1947년보다 5배 이상 쌀 세금이 폭등했다. 이런 모순과 불합리성이 겹치면서, 1948년 4월 3일 남로당을 중심으로 좌익 성향의 인사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이렇게 해서 제주 4.3항쟁이 시작된 것이다.

(계엄령을 선포한 이승만)
제주 4.3항쟁이 시작되자, 이에 대한 미국의 대응은 신속했고, 매우 잔인했다. 미군 부대가 부산에서 증파됐고, 경찰 1,700명이 추가로 파견됐다. 남로당측 봉기군과 이를 진압하려는 우익들 간의 전투가 격화됐다. 초기 전투에서 진압군 측 김익렬과 게릴라 지도자 김달삼은 평화협정을 마련했지만, 우익 측에서 빨치산을 학살하여 협정은 무효화 돼버리고 유혈은 더 격해졌다. 1948년 5.10 선거에서 제주도의 투표 참여율은 당연히 저조했다. 양측의 교전은 멈추질 않았고, 학살도 발생했다. 학살의 절대다수는 우익들에 의한 것이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대통령 이승만은 제주도를 진압하기 위한 전투에 박차를 가했다. 이승만은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저주도 전역을 적성지역으로 설정한 뒤, 병력을 보내 진압했다. 계엄령은 1948년 11월 21일에 선포됐다. 진압 과정에서 여수와 순천에 있던 국군 병력이 역으로 봉기하기도 했으며, 이것이 바로 여순항쟁의 맥락이었다. 여순항쟁에서도 살인적인 유혈극이 우익들에 의해 자행됐다. 제주도에서 진압작전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이른바 극우 단체인 서북 청년단도 제주도에 파견됐다.

(이후 발견된 학살자의 유해)
광란의 학살극이 자행됐다. 특히 1948년에서 1949년 사이에 대규모의 학살이 발생했으며, 희생된 민간인 대다수는 여성과 아이 노인 심지어 갓난아기였다. 진압측에선 임산부의 배를 가르는 만행까지 저질렀으며, 적대지역으로 선포된 마을을 불태웠다. 그리고 이런 잔혹한 진압을 최종적으로 뒤에서 지휘했던 주체는 바로 이승만과 미군정이었다. 미군정의 브라운 대령과 대통령 이승만 그리고 경찰총장의 지휘에 있으며 강경진압을 자행했던 조병옥과 국방부 장관 신성모 등은 제주도민 전부를 빨갱이로 규정해놓고, 일부를 제외한 제주도 전역을 적대지역으로 선포해놓고 학살을 자행했다. 특히나 서북청년단이 자행한 학살은 정말 끔찍하고, 추악했다.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보면, 당시 서북청년단이 어떤 짓을 벌였는지 아주 잘 나와있다.

(제주 4.3 학살에서 희생된 희생자 분포 지도)
“이승만과 미군의 후원 아래 제주 사태의 최일선에 서게 된 서북청년회는 군‧경 모두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중산간마을인 애월면 광령리 주민이던 고치돈은 하귀리 개수동으로 소개했다가 그곳에서의 무차별 총살에 놀라 다시 제주읍 외도리로 소개했다. 고치돈은 외도리 민보단장이 처가 쪽 친척이라 그의 배경으로 양민증도 비교적 빨리 얻었고, 특공대에 편입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고 했다. 고치돈은 특공대 시절 목격했던 서북청년회 출신 경찰들의 잔혹했던 행동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내가 외도지서 특공대 생활을 할 때 서북청년단 출신 경찰 이윤도(李允道)의 학살극은 도저히 잊을 수 없습니다. 그 날 지서에서는 소위 ‘도피자가족’을 지서로 끌고 가 모진 고문을 했습니다. 그들이 총살터로 끌려갈 적엔 이미 기진맥진해서 제대로 걷지도 못할 지경이 됐지요. 이윤도는 특공대원에게 그들을 찌르라고 강요하다가 스스로 칼을 꺼내더니 한 명씩 등을 찔렀습니다. 그들은 눈이 튀어나오며 꼬꾸라져 죽었습니다. 그때 약 80명이 희생됐는데 여자가 더 많았지요. 여자들 중에는 젖먹이 아기를 안고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윤도는 젖먹이가 죽은 엄마 앞에서 바둥거리자 칼로 아기를 찔러 위로 치켜들며 위세를 보였습니다. 도평리 아기들이 그때 죽었지요. 그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 꼴을 보니 며칠간 밥도 못 먹었습니다.”
출처: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p.271
제주도 대학살에서 벌어진 학살은 무수히 많지만, 또 다른 대표적인 학살을 마지막으로 언급하고자 한다. 1949년 1월 17일 제주도 북촌리 근처에서 진압군 2명이 봉기군에게 습격을 받아 살해당하는 일이 있었다. 군인 2명이 사망하자, 진압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마을에 난입하여 집들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근처 밭에서 학살했다. 이 학살로 최소 400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이러한 크고 작은 학살들은 당시 제주도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났다. 심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킬링필드(Killing Field)로 변모했고, 제주도에 있는 가옥 중 70%가 파괴됐다. 총 39,285가구가 파손되고 400개 마을 중 170개만 남았다고 한다. 무수히 많은 여성들이 진압군에 의해 강간당했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부상 당했다. 또한 최소 4만 명 이상의 제주도민이 당시 학살을 피해 일본으로 피난가기도 했다.

(현재 제주 4.3 평화공원 및 박물관에 있는 희생자들의 묘비)

(제주 4.3 사건 관련한 만화책)
제주도에서 벌어진 학살의 85~90%는 우익들에 의한 것이었다. 좌익들에 의학 보복 살해는 대부분의 경우 우익 경찰과 진압군과 그 일가족에 한해서 벌어졌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참혹한 무차별 학살은 미군정과 이승만의 지휘를 받는 우익들에 의해 자행됐다. 보통의 경우 최소 3만 명 이상의 제주도 시민이 학살당한 것으로 본다. 당시 제주도에서 벌어진 학살로 희생된 이들은 많게는 6만 명까지도 본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연구한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는 2016년 당시 제6회 제주 4.3 평화포럼에서 “보다 최근의 연구자료에는 제주 4.3으로 8만 명 정도가 사망했다는 주장도 있다.”고 했다. 최소 3만 명에서 6만 명 많게는 8만 명 이상의 제주도민이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들에 의해 학살당한 것이다.

(제주 4.3 사건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미국인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대략 5년이라는 기간 동안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은 소위 작은전쟁을 통해 10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숫자의 인명이 국가 보안법으로 구속되어 감옥에 있었다. 이런 천인공노할 제주도 대학살을 벌인 이승만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른바 보도연맹 학살을 자행하여 적잖은 제주도민을 예비 검속한 뒤에 빨갱이로 몰아 학살했다. 이처럼 제주도에서 벌어진 학살로 무수히 많은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이런 학살극의 중심에는 미국과 이승만이 있었다. 이들이 벌인 천인공노할 학살은 역사의 심판대에 세워야 한다.